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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근원을 추적하지 말고 지식을 검증하라

이윤진이카루스 2023. 2. 12.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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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의 근원을 추적하지 말고 지식을 검증하라

 

 

XIII

이제 나는 주로 역사적인 이 고찰들 모두를 밀쳐놓고, 문제들 자체와 그 문제들의 해결로 선회하겠다.

나의 강좌의 이 부분은, 예를 들어 흄(Hume)의 다음과 같은 고전적 서술에서 언명된 바와 같이, 경험주의(empiricism)에 대한 공격으로 아마도 기술될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왜 특정한 사실의 문제를 믿느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나에게 어떤 이유를 말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이유는 이 이유와 결부된 어떤 다른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런 방식을 모방하여 무한정 진행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분은 종국적으로 어떤 사실에서 끝나야 하는데, 그 사실은 여러분의 기억이나 감각에 출현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믿음이 완전히 근거가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 오성 탐구[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 5; 셀비ㅡ비기[SelbyBigge], 46; 내가 1762쪽에서 인용한 좌우명 참조.)

경험주의의 타당성에 문제는 개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것이다: 관찰은 자연에 대한 우리 지식의 궁극적 근원인가? 그리고 아니라면, 무엇이 우리가 지닌 지식의 근원인가?

내가 베이컨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했든, 그리고 그의 철학의 저 부분들을 내가 비평했지만 베이컨주의자들과 다른 경험주의자들이 다소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지라도, 이 문제들은 남는다.

우리가 지닌 지식의 근원에 관한 문제는 최근 다음과 같이 다시 서술되었다. 우리가 주장을 한다면, 우리는 그 주장을 정당화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다음 질문에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당신은 아는가? 당신 주장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것은 나중에, 다음과 같은 질문에 해당한다고 경험주의자는 믿는다.

어떤 관찰이 (혹은 관찰의 기억) 당신 주장의 기초를 이루는가?’

나는 이 일련의 질문이 아주 불만족스러움을 발견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장 대부분은 관찰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다른 근원에 근거한다. 나는 그것을 더 타임즈(The Times)에서 읽었다나 아마도 나는 그것을 대영백과사전에서 읽었다나는 그것을 관찰했다나는 지난해 내가 실행한 관찰로부터 그것을 안다보다 어떻게 당신은 아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더 개연적이고 더 확정적인 답변이다.

그러나 더 타임즈대영백과사전이 그 정보를 어떻게 얻었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라고 경험주의자는 응수할 것이다. 틀림없이, 당신이 충분히 길게 조사를 지속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목격자의 관찰 보고(때때로 프로토콜명제[protocol sentences]”나 ㅡ 당신 자신에 의하여 ㅡ 기초명제[basic statements]”로 지칭되는) 끝날 것이다. 저서들은 주로 다른 저서들부터 만들어진다고 인정된다. 예를 들어 역사학자는 서류로부터 작업할 것이라고 인정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결국 이 다른 저서들이나 이 서류들은 틀림없이 관찰에 근거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들은 증언으로서가 아니라 시()나 허구 혹은 거짓말로서 기술되어야 할 터이다. 관찰이 틀림없이 우리가 지닌 지식의 궁극적 근원이라고 우리 경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라고 경험주의자는 계속 응수할 것이다.

나의 실증주의자 친구들 몇몇에 의하여 아직도 표현되는 바와 같이, 여기서 우리는 경험주의자의 입장을 경험한다.

이 입장이 베이컨의 경우처럼 거의 효력이 없다는 것을 나는 증명하려고 시도하겠다; 지식의 근원이라는 문제에 대한 답변은 경험주의자에게 반대가 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궁극적 근원에 ㅡ 사람들이 상급 법원이나 상급 권위자에게 아마도 도움을 구할 것처럼 사람들이 도움을 구할 근원 ㅡ 관한 전체 문제는 오류에 근거한 것으로서 배격되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하겠다.

첫째 그들이 지닌 지식의 근원에 관하여 당신들이 더 타임즈와 그 기자들을 실제로 계속해서 심문한다면, 경험주의자들이 그 존재를 신뢰하는 목격자들에 의한 관찰에 당신들이 실제로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임을 나는 증명하고 싶다. 여러분이 단 한 걸음씩 나갈 때마다 눈덩이 같은 모양으로 추가 발걸음들의 필요성이 증가함을 당신들은 오히려 발견할 것이다.

합리적인 사람들이 나는 더 타임즈에서 그것을 읽었다라는 답변을 충분하다고 아마도 수용할 뿐인 종류의 주장을 사례로 들라; ‘수상(首相)이 일정보다 며칠 앞서서 런던으로 귀환하기로 결정했다는 주장을 말하자. 이제 어떤 사람이 이 주장을 의심하거나 그 주장의 진실성을 조사할 필요를 느낀다고 잠시 동안 상정(想定)하라. 그는 어떻게 할까? 그의 친구가 수상(首相) 집무실에 있다면, 가장 간단하고도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이 친구가 그 요점을 입증한다면, 그것으로 문제는 해결된다.

다시 말해서, 조사자는 가능하면, 정보의 근원을 추적하기보다는 주장되는 사실 자체를 검토하거나 조사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경험주의적 이론에 따르면, ‘나는 그것을 더 타임즈에서 읽었다는 주장은 궁극적 근원을 추적함이 본질인 정당화 과정에서 첫 단계일 뿐이다.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적어도 두 가지 다음 단계가 있다. 하나는 나는 그것을 더 타임즈에서 읽었다가 또한 주장이라는 것과, 우리는 아마도 가령 더 타임즈와 매우 유사하게 보이는 신문에서가 아니고 더 타임즈에서 당신이 그것을 읽었다는 당신이 지닌 지식의 근원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것임을, 숙고하는 것일 터이다. 다른 하나는 더 타임즈 신문사에게 그 지식의 근원을 요구하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러나 우리는 더 타임즈만 구독하여 우리는 아침에 그 신문을 받는다일 것인데 그 답변으로 인하여 우리가 추구하지 않을 근원에 대한 많은 추가 질문이 발생한다. 두 번째 질문으로 인하여 더 타임즈의 편집자로부터 다음 답변이 나올 것이다: ‘우리는 수상 집무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제 경험주의적 과정에 따라서, 우리는 이 단계에서 다음 질문을 해야 한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다음에 그의 관찰보고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다음 질문을 틀림없이 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들은 목소리가 수상 집무실의 관리로부터 왔다는 당신의 지식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렇게 질문이 계속된다.

이 피곤한 질문의 지속이 결코 만족스러운 종착점에 도달하지 않는 간단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모든 목격자는 자신의 보고에서, 인물, 장소, 물체, 언어적 용법, 사회적 규약, 기타 등등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항상 충분히 이용해야 한다. 특히 그의 보고가 정당화할 가치가 있는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 소용이 되려면, 그는 자신의 눈이나 귀에 의존할 수만 없다. 그러나 이 사실로 인하여 물론 틀림없이, 즉각적으로 관찰성이 아닌 자신이 지닌 지식의 저 요소들의 근원에 관하여 새로운 질문들이 항상 제기된다.

이것이 관찰에서 모든 지식의 궁극적 근원까지 모든 지식을 추적하는 계획을 실행하기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이유이다: 그로 인하여 무한소급이 발생한다. (진리는 명백하다는 교설에 의하여 이 소급이 차단된다. 이 요점은 저 교설의 매력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에 흥미롭다.)

나는 이 주장이 또 다른 주장과 ㅡ 모든 관찰에 우리의 이론적 지식에 비춘 해석이 포함된다는, 혹은 이론에 의하여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관찰성 지식은, 조금이라도 가능하다면, 완전히 척박하고 무익할 터이라는 주장 ㅡ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부언하고 싶다.

근원을 묻는 관찰주의적 강령에 관해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ㅡ 그 지루함은 차치하고 ㅡ 그 강령이 상식을 철저히 위반한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우리가 주장에 대하여 의심을 하면, 정상적인 절차는 그 주장의 근원을 묻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주장을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독립적인 입증을 발견하면, 우리는 근원에 관하여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그 주장을 흔히 수용할 것이다.

물론 상황이 다른 경우들이 있다. 역사관련 주장을 검증하는 것은 항상 출처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통 목격자의 보고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어떤 역사가도 기록된 증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기록의 진품 문제가 있으며, 편견의 문제가 있으며, 또한 이전 출처들의 재구성과 같은 문제들이 있다. 이 사건들이 발생했을 때 기록자는 현장에 있었는가? 같은 문제들 또한 물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가가 겪는 특징적인 문제의 하나가 아니다. 역사가는 기록의 신빙성에 대하여 우려할 것이지만, 그는 이 사건이 관찰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상정(想定)조차 하면서도 기록 작성자가 문제 사건의 목격자였는지 아니었는지에 관하여 거의 우려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제 이 문제에 관하여 나의 생각을 바꾸었다라고 쓰인 편지는, 생각 바꾸기가 관찰될 수 없을지라도 (그리고 우리가 다른 증거를 고찰하여 글쓴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추측할지라도), 매우 귀중한 역사적 증거일 것이다.

목격자들에 관하여, 그들은 반대심문을 받을 수 있는 법정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중요하다. 대부분의 법률가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목격자들도 자주 실수를 저지른다. 이것은 실험적으로 조사되었는데, 가장 두드러진 결과로 이어졌다. 사건을 발생한 바와 같이 기술하고자 매우 조바심하는 목격자들은, 특히 어떤 자극적인 사건이 급하게 발생하면, 다수의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 그리고 사건으로 인하여 어떤 해석이 유혹되면, 이 해석에는 흔히 실제로 목격된 것에 대한 왜곡이 발생한다.

역사관련 지식에 관한 흄(Hume)의 관점은 달랐다: 인성론(Treatise)에서 (1, 3, 4절 셀비-비기판, 83) 그는 이렇게 서술한다: ‘... 우리는 시저가 원로원에서 315에 살해당했다고 믿는데... 그 이유는 이 사실이 역사가들의 일치된 증언을 근거로 확립되어 있고 그 역사가들은 이 정확한 시점과 장소를 그 사건에 적용하기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의 기억이나 감각에 출현하는 특정 부호들이나 문자들이 있다; 그 부호들이 특정 관념의 표시로서 사용됐음을 우리는 똑같이 기억한다; 그리고 그 관념들은 저 행위에 즉각적으로 출현한 그런 생각 속에 있어서 그 관념들을 그 행위의 존재로부터 직접적으로 받았거나; 아니면, 그 관념들은 다른 사람들의 증언에서 나왔고 저 증언은 다시 또 다른 증언으로부터 나와서 사건의 목격자였고 관람자였던 사람들에게까지 우리는 도달하게 된다.’ (또한 인간 오성의 탐구[Enquiry], 10; 셀비-비기판 111쪽 이하 참조.)

내가 보기에 이 관점으로 인하여 틀림없이 위에 기술된 무한소급이 발생한다. 이유인즉 문제가 물론 역사가들의 일치된 증언이 수용되어야 하는지, 또는 그 증언이 흔하지만 가짜 출처에 역사가들이 의존한 결과로서 거부되어야 하는지 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억과 우리의 감각에 출현한 문자들에 의한 도움이란 역사서술의 이 문제나 다른 유관 문제와 관련이 있을 리가 없다.

 

XIV

그렇다면 우리가 지닌 지식의 근원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답변은 이것이다: 우리가 지닌 지식에 관해서 모든 종류의 근원이 있다; 그러나 어떤 근원에도 권위는 없다.

더 타임즈대영백과사전이 지식의 근원일 수 있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물리학에서 어떤 문제에 관한 물리학 평론(the Physical Review)에 난 특정 논문이 더 타임즈대영백과사전에 난 동일한 문제에 관한 기사보다 더 권위를 가지고 있고 근원에 관한 특징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물리학 평론에 난 기사의 근원이 틀림없이 전적으로 혹은 심지어 부분적으로 관찰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틀렸을 터이다. 근원은 또 다른 논문에 실린 모순의 발견이거나, 가령, 또 다른 논문에 제시된 가설이 이런저런 실험에 의하여 시험될 수 있다는 사실의 발견일 것이다; 이 모든 관찰성이 아닌 발견은 그 발견 모두가 우리의 지식을 확대시킨다는 의미에서 근원이다.

물론 실험에 의하여 우리의 지식이 또한, 그것도 매우 중요한 방식으로, 확대될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궁극적 의미에서 실험은 근원이 아니다. 실험은 항상 검사를 받아야 한다: 더 타임즈에 난 뉴스의 사례에서처럼 우리는 보통 실험의 목격자를 문제 삼지 않지만, 우리가 결과를 의심하면, 우리는 실험을 반복하거나 다른 사람이 실험을 반복하도록 요청할 것이다.

지식의 궁극적 근원이라는 철학적 이론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근본적인 실수는 그 이론이 기원 문제와 유효성 문제를 충분히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틀림없이, 역사서술의 경우에, 이 두 가지 문제는 간혹 일치할 것이라고 인정된다. 역사관련 주장의 유효성 문제는 오직 혹은 주로, 특정 자료의 출처에 비추어 검증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 두 가지 문제는 다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 근원이나 출처를 추적함에 의하여 주장이나 정보의 유효성을 우리가 검증하지 않지만, 주장된 것을 ㅡ 주장된 사실 자체들 ㅡ 비판적으로 조사함에 의하여 훨씬 더 직접적으로 주장이나 정보를 검증한다.

그리하여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당신 주장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경험주의적 질문들은 잘못 표현된 것이다. 그 질문들은 부정확하거나 난잡한 방식으로 언명된 것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왜곡되었다. 그 질문들은 권위주의적 답변을 간청한다.

 

XV

인식론의 전통적 체계는 우리가 지닌 지식의 근원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예-답변(yes-answers)이나 아니오-답변(no-answers)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언급될 것이다. 그 체계는 이 질문들에 도전하지도 않고, 그 질문의 합당성을 문제 삼지도 않는다; 그 질문들은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되어, 아무도 그 질문들에 있는 독소를 보지 못하는 듯하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그 질문들이 정신적으로 분명히 권위주의적이기 때문이다. 그 질문들은 최고로 훌륭한 자가장 현명한 자인민이나 다수같은 권위적 답변을 간청하는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정치이론의 저 전통적 질문과 비교될 수 있다. (부언하여 저 전통적 질문으로 인하여 지식의 궁극적 근원은 무엇인가: 지성인가 아니면 감각인가?’와 유사하게, ‘누가 우리의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가: 자본가인가 아니면 노동자인가?’와 같은 어리석은 양자택일이 제시된다.) 이 정치적 질문은 잘못 표현되었으며 그 질문이 이끌어내는 답변은 역설적이다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7장에서 내가 밝히려고 노력했던 바와 같이). 그 질문은 ‘(우리가 뽑으려고 노력해서는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마도 그렇게 쉽게 뽑을) 나쁘거나 무능한 지도자들이 너무 많은 해악을 저지를 수 없도록 어떻게 우리가 정치 제도를 조직할 수 있는가?’와 같이 완전히 다른 질문에 의하여 대체되어야 한다. 우리의 질문을 이런 방식으로 바꿈에 의해서만 정치제도에 관한 합당한 이론으로 우리가 나아가기를 희망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지식의 근원에 관한 질문도 유사한 방식으로 대체될 수 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은 정신으로 항상 제기되었다: ‘지식의 최고 근원들은 ㅡ 가장 신뢰될 수 있는 근원들로, 우리를 오류에 빠뜨리지 않고, 의심이 들 경우 우리가 최종판결로서 도움을 바랄 수 있고 도움을 구해야 하는 근원들 ㅡ 무엇인가?’ 대신 이상적인 통치자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 이상적인 근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모든 근원들은 때때로 우리를 오류에 빠뜨리기 쉽다고 상정(想定)하기를 나는 제안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닌 지식의 근원들에 관한 문제를 나는 다음과 같이 완전히 다른 질문에 의하여 바꾸기를 제안한다: 우리는 어떻게 오류를 탐지하여 제거하기를 희망할 수 있을까?’

지식의 근원들에 관한 문제는, 그렇게 많은 권위주의적 질문처럼, 유전적 질문이다. 그 문제는, 지식은 자체의 유래에 의하여 자체를 합법화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지식의 기원을 요구한다. 가능한 한 신()으로부터인 최고의 권위로부터 유래하는 지식이자 오염되지 않은 지식으로 인종적으로 순수한 지식의 고귀함을 요구한다: 이것들은 그 문제의 뒤에 존재하는 (흔히 무의식적인) 형이상학적 관념들이다. 내가 수정한 문제인 우리는 어떻게 오류 탐지를 희망할 수 있을까?’는 그런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으며 확실한 근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리고 기원이나 순수성의 문제는 유효성이나 진리의 문제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관점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언급될 것이다. 이 관점은 크세노파네스(Xenophanes)만큼 오래되었다고 언급될 것이다. 크세노파네스는, 다음 자신의 시()에서 (DK, B, 1834) 밝혀지는 바와 같이, 우리의 지식이 짐작이자 견해임을 ㅡ 지식(epistēmē)이라기보다는 견해(doxα) 알고 있었다:

 

제신(諸神)은 처음부터 밝히지 않는다,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탐구를 통하여 우리는 배울 것이고 사물을 더욱 잘 알리라.

 

그러나 확실한 진리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 제신(諸神)에 대해서도,

내가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도.

그리고 누가 우연히 완벽한 진리를 발설할지라도,

자신은 그 진리를 알지 못할 터이다;

모든 것은 짐작으로 짜인 그물일 따름이기에.

 

그러나 지식의 권위주의적 근원에 대한 전통적 질문은 심지어 오늘날에도 반복된다 ㅡ 더구나 자신들이 권위에 저항한다고 믿는 실증주의자들 및 다른 철학자들에 의하여 매우 자주.

우리는 어떻게 오류를 탐지해서 제거하기를 희망할 수 있을까?’라는 나의 질문에 합당한 답변은, ‘다른 사람들의 이론이나 짐작을 비판함에 의하여 이며 ㅡ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렇게 훈련시킬 수 있다면 ㅡ 우리 자신의 이론이나 짐작을 비판함에 의하여라고 나는 생각한다. (후자[後者] 요점은 고도로 바람직하지만, 필수불가결하지는 않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의 이론들을 우리가 비판하지 못하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이론들을 비판할 다른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답변에 의하여 내가 비판적 합리주의(critical rationalism)’라고 지칭하기를 제안하는 입장이 요약된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인들에게서 배우는 관점이자 태도이고, 전통이다. 비판적 합리주의는 데카르트와 그의 학파가 주장하는 합리주의지성주의(intellectualism)’와 매우 다르며, 심지어 칸트의 인식론과도 매우 다르다. 그러나 윤리학이나 도덕적 지식의 분야에서, 칸트는 자신의 자율성의 원리(principle of autonomy)로써 비판적 합리주의에 근접한다. 이 원리는 권위자의 명령을, 아무리 고양되었을지라도, 윤리의 토대로서 우리가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칸트의 깨달음을 표현한다. 이유인즉 우리가 권위자에 의한 명령을 대면할 때마다, 그 명령이 복종하기에 도덕적인지 비도덕적인지는 우리가 비판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권위자는 자신의 명령을 강요할 힘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고, 우리에게는 저항할 힘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 물리적인 선택의 힘이 있다면, 궁극적 책임은 우리에게 남는다. 명령에 복종할지는 우리 자신의 비판적 결정이다; 권위자에게 복종할지는.

칸트는 이 관념을 종교 분야에까지 과감하게 가지고 간다: ‘... 어떤 방식으로 신()이 당신에게 밝혀지든, 그리고... ()이 자신을 당신에게 드러낼지라도: 당신이 신()을 믿고 숭배하는 일이 허용되는지를 판단해야 하는 사람은 당신이다라고 그는 서술한다.

이 과감한 서술을 고찰하면, 칸트가 자신의 과학철학에서 오류를 비판적으로 탐색하는 동일한 비판적 합리주의의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 칸트가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뉴튼의 우주론이 지닌 권위를 ㅡ 가장 엄격한 시험들을 거의 믿을 수 없이 성공적으로 통과한 결과 ㅡ 그가 수용했을 따름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칸트에 대한 이 해석이 옳다면, 내가 옹호하는 비판적 합리주의에 (그리고 비판적 경험론 또한) 의하여 칸트 자신의 비판적 철학이 마무리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가능해졌는데, 아인슈타인은 뉴튼의 이론이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되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래서 어떻게 당신은 아는가? 당신 주장의 근원이나 근거는 무엇인가? 어떤 관찰로 인하여 당신은 그것에 이르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나는 알지 못한다: 나의 주장은 짐작일 뿐이었다. 나의 주장이 유래할 출처나 출처들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말라 ㅡ 가능한 출처들이 많아서 나는 그 출처들의 절반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기원들이나 출처들은 진실과 거의 관계가 없다. 그러나 내가 나의 잠정적 주장에 의하여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문제에 당신이 관심이 있으며, 가능한 한 엄격하게 나의 잠정적 주장을 비판함에 의하여 당신은 나를 도울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생각하기에 나의 주장을 혹시 반증할 어떤 실험적 시험을 당신이 고안할 수 있다면, 나는 나의 주장을 당신이 반박하도록 기꺼이 그리고 나의 최선을 다하여 당신을 돕겠다.’

이 답변은 엄밀하게 말해서, 질문이 역사관련 주장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과학적 주장에 관해서만 제기된다면 적용된다. 나의 추측이 역사와 관련되면, 근원들은 (궁극적이 아닌 의미에서) 물론 그 유효성을 비판적으로 토론하는 데로 입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안 바와 같이, 근본적으로 나의 답변은 동일할 것이다.

 

 

XVI

이제 이 토론의 인식론적 결과들을 언명할 적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그 결과들을 10가지 논지의 형식으로 표현하겠다.

1. 지식의 궁극적 근원들은 없다. 모든 근원, 모든 제안이 환영을 받는다; 그리고 모든 근원, 모든 제안은 비판적 검토에 개방되어 있다. 역사에서 제외하고, 우리가 지닌 정보의 출처보다는 사실 자체를 우리는 보통 조사한다.

2. 합당한 인식론적 질문은 근원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제시된 주장이 사실인지를 묻는다 ㅡ 다시 말해서, 주장이 사실과 일치하는지. (이율배반에 빠지지 않고, 사실과 대응이라는 의미에서 객관적 진리라는 관념으로써 우리가 활동할 것임은 알프레드 타스키[Alfred Tarski]의 업적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주장 자체를 조사하거나 시험함에 의하여 가능한 한 잘 주장과 사실의 일치여부를 알아내려고 우리는 노력한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혹은 주장의 결과를 조사하거나 시험함에 의하여.

3. 이 조사와 연결하여 모든 종류의 논증이 관련될 것이다. 전형적인 과정은 이론이 관찰에 부합하는지를 조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를 들어 역사관련 출처들이 상호적으로 그리고 내부적으로 일관적인지를 또한 조사할 것이다.

4. 정량적으로(定量的으로: Quantitatively)나 정성적으로(定性的으로: qualitatively) 지식의 단연코 가장 중요한 근원은 ㅡ 선천적인 지식은 차치하고 ㅡ 전통이다. 예증에 의하여, 이야기를 청취함에 의하여, 독서에 의하여, 비판하는 방법과 비판을 받고 수용하는 방법 그리고 진리를 존중하는 방법을 습득함에 의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을 우리는 배웠다.

5. 우리가 지닌 지식의 근원 대부분이 전통적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반()-전통주의가 무효로 선고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전통주의적 태도를 지지하는 것으로 믿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지닌 전통적 지식의 모든 편린은 (그리고 심지어 우리의 선천적인 지식도) 비판적 검토에 노출되어 있어서 전복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통이 없으면 지식도 불가능할 터이다.

6. 지식은 무()에서 ㅡ 백지상태(tabula rasa)에서 ㅡ 시작할 수 없으며 그러나 관찰에서도 시작할 수 없다. 지식의 진보는 주로 이전 지식의 수정을 본질로 한다. 간혹 예를 들어 고고학에서 우리가 우연한 관찰을 통하여 진보할지라도, 발견의 중요성은 보통 우리의 이전 이론을 수정하는 발견의 능력에 의존할 것이다.

7. 비관적 그리고 낙관적 인식론은 거의 동일하게 틀렸다. 플라톤의 비관론적 동굴 이야기는 진실한 이야기이지만, 그의 낙관론적인 상기(想起: story of anamnēsis)은 진실한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다른 동물들처럼, 모든 사람과 심지어 모든 식물도 선천적인 지식을 소유함을 우리가 인정해야 할지라도). 그러나 현상들의 세계가 정말로 우리가 갇힌 동굴의 벽에 비친 그림자만의 세상일지라도,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그 세상을 넘어 접촉한다; 그리고 데모크리토스(Democritus)가 말한 바와 같이 진실은 깊은 곳에 숨겨져 있을지라도, 우리는 깊은 곳을 조사할 수 있다. 우리 수중에는 진리의 대한 기준이 없고, 이 사실로 인하여 비관론이 뒷받침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행운이 있다면, 우리가 오류와 거짓을 인식할 기준을 우리는 정말로 소유하고 있다. 명징성과 확실성은 진리의 기준이 아니지만, 모호함이나 혼동 같은 것은 오류를 가리킬 것이다. 유사하게, 일관성으로써 진리가 확립될 수 없지만, 비일관성과 부적합에 의해 정말로 허위가 확증된다. 그래서 비일관성과 부적합이 인식되면, 우리가 갇힌 동굴의 암흑 밖으로 길을 더듬어 나가는 데 우리 자신의 오류로 인하여 우리를 돕는 희미한 붉은 빛이 제공된다.

8. 관찰이나 이성은 권위자가 아니다. 지적(知的) 직관과 상상력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들은 신뢰될 수 없다: 그것들에 의하여 우리가 사물을 매우 분명하게 볼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에 의하여 우리가 오도될 것이다. 그것들은 이론의 주요 근원으로서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우리의 이론 대부분은 어떤 정도로든 허위이다. 관찰과 추론의 그리고 심지어 직관과 상상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우리가 미지의 것을 탐사하는 수단인 저 과감한 추측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서 우리를 돕는 것이다.

9. 명징성이 본질적으로 귀중할지라도, 정확함이나 정밀함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지닌 문제에 필요한 이상으로 정확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쓸모가 있을 수 없다. 언어적 정밀성은 허깨비이며, 단어들의 의미나 정의(定義)와 연관된 문제들은 중요하지 않다. 그리하여 (19쪽의) 관념표에는, 그 표의 대칭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편과 중요하지 않은 편이 있다: 왼편은 (단어들과 그 단어들의 의미) 중요하지 않은 반면, 오른편은 (이론들과 그 이론들의 진리와 연관된 문제들) 매우 중요하다. 단어들은 이론들의 언명을 위한 도구로서만 중요하고, 언어적 문제들은 지겹다: 그 문제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회피되어야 한다.

10. 어떤 문제의 모든 해결책으로 인하여 해결되지 않은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된다; 원래 문제가 심층적이고 그 해결책이 대담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많이 배워서 우리의 학식이 더 깊어질수록,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인 우리의 무지(無知)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것은 더욱 의식적이 되고 더욱 구체적이 되며 더욱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이것이 진정으로 우리가 지닌 무지(無知)의 주요 근원이기 ㅡ 우리의 무지(無知)는 틀림없이 반드시 무한한 반면, 우리의 지식은 오직 유한할 수 있다는 사실 ㅡ 때문이다.

하늘의 방대함을 관조할 때 우리가 지닌 무지(無知)의 방대함을 우리가 일별할 것이다: 우주의 단순한 규모는 우리가 지닌 무지(無知)의 가장 깊은 원인이 아닐지라도, 그 규모는 우리가 지닌 무지(無知)의 원인 중 하나이다. ‘내가 친구 몇몇과 다른 듯이 보이는 곳은 물리적 규모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은 데 있다. 나는 하늘의 방대함 앞에서 조금도 초라한 느낌을 가지지 않는다. 별들은 크겠지만 별들은 생각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것들이 규모보다 훨씬 더 많이 나에게 감명을 주는 특성들이다. 거의 17 스톤(stone) 몸무게가 나간다는 것으로 나는 신망을 받지 못한다라고 F. P. 램지(Ramsey)는 자신의 저서 수학의 기초(Foundations of Mathematics)(291) 매력적인 구절에 서술했다. 램지의 친구들이 단순한 물리적 규모의 무의미성에 관하여 램지의 의견에 동의했을 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친구들이 하늘의 방대함 앞에서 초라함을 느꼈다면 이것은 그들이 하늘의 방대함 속에서 자신들이 지닌 무지(無知)의 상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배우려고 노력하다가 우리가 아는 게 없다는 것을 우리가 배우기만할지라도 그렇게 배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가치가 있을 터라고 나는 믿는다. 무지(無知)를 아는 이 상태는 아마도 우리가 겪는 많은 난관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양한 작은 지식 편린에서 크게 다른 반면, 우리의 무한한 무지(無知)에서 우리 모두는 동등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것이 아마도 좋을 것이다.

 

XVII

내가 제기하고 싶은 마지막 질문이 있다.

우리가 찾기만 한다면, 허위로 배격되어야 하는 철학이론에서, 보존될 가치가 있는 진정한 관념을 우리는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지식의 궁극적 근원들에 관한 이론들 중 한 이론에서 이것과 같은 관념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모든 지식의 근원이 초-자연적이라는 교설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두 가지 주요 관념 중 하나라고 나는 제안한다. 이 관념들 중 두 번째 것은 참인 반면, 첫 번째 것은 허위라고 나는 믿는다.

허위 관념인 첫 번째 관념은 긍정적인 이유에 의하여 다시 말해서, 우리의 지식이나 이론을 확립할 수 있거나 적어도 매우 개연적으로 만들 수 있는 이유에 의하여, 우리의 지식이나 우리의 이론을 우리가 정당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지식이나 이론이 지금까지 비판을 견뎌냈다는 것보다 나은 이유에 의하여 우리가 우리의 지식이나 우리의 이론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관념은 진정한 지식에 관한 어떤 궁극적이거나 권위적인 근원의 도움을 우리가 받아야 함을 암시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그러나 이 관념에 의해서도 저 권위의 특징은 여전히 미결된 상태로 남는다 ㅡ 그 특징이 관찰이나 이성처럼 인간적인지 초-인간적인지 (그리하여 초-자연적인지).

두 번째 관념은 ㅡ 그 필수적 중요성이 러셀(Russell)에 의하여 강조되었다 ㅡ 어떤 인간의 권위도 명령에 의하여 진실을 확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인간의 권위를 초월한다는 것이다.

함께 고찰되면 이 두 가지 관념들로 인하여, 우리의 지식이 유래하는 근원은 틀림없이 초인간적이라는 결론이 거의 즉시 발생한다; 독선을 부추기고, 신적(神的) 진리 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폭력 사용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는 결론.

올바르게 이 결론을 배격하는 어떤 사람들은 불행히도 첫 번째 관념을 ㅡ 궁극적인 지식 근원의 존재에 대한 믿음 ㅡ 배격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두 번째 관념을 ㅡ 진리는 인간의 권위를 초월한다는 논지 ㅡ 배격한다. 그리하여 그들로 인하여 지식의 객관성 관념인 비판이나 합리성의 공통 기준이라는 관념이 위험에 빠진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식의 궁극적 근원이라는 관념을 포기하고, 모든 지식은 인간적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모든 지식은 우리의 실수와 우리의 편견과 우리의 꿈과 우리의 희망과 섞여 있다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진리가 우리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을지라도 진리를 더듬어 찾는 것이라는 것. 우리의 암중모색이 자주 영감을 받는 것을 우리가 인정할 것이지만, 아무리 깊이 느껴질지라도 우리가 받는 영감이 신적(神的)이나 다른 방식으로 어떤 권위라도 지닌다는 믿음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지식이 미지의 세계 속으로 아무리 멀리 관통했을지라도, 우리가 지닌 지식의 전체 영역 안에서 비판을 초월하여 발견될 권위는 없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진리가 인간의 권위를 초월한다는 관념을 위험 없이 우리가 지닐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관념을 지녀야 한다. 왜냐하면 그 관념이 없으면 탐구의 객관적 표준들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추측에 대한 비판이 없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암중모색이 없다; 지식 추구가 없다.

ㅡ 칼 포퍼, 추측과 논박, 1989, 21-30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