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주의라는 허구
XII
어떤 서술의 진리가 그 서술의 근원을 ㅡ 다시 말해서 그 서술의 기원 ㅡ 탐구함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라는 기이한 견해는 아마도 해소될 어떤 논리적 실수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설명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견해를 종교적 신앙을 통하여 또는 심리학적 관계로 ㅡ 아마도 부모의 권위를 언급하면서 ㅡ 설명하는 것보다 우리가 결코 더 잘 할 수 없을까? 우리의 단어들이나 용어들 혹은 개념들의 의미와 우리의 서술들이나 명제들의 진리 사이의 밀접한 유추와 연결된 논리적 실수를 여기서 인식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대편의 도표 참조).
우리가 쓰는 단어들의 의미가 그 단어들의 역사나 근원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은 알기 쉽다. 단어란 논리적으로 고찰되면, 규약적 부호이다; 심리학적으로 고찰되면, 단어란 그 의미가 용법이나 관습이나 연상에 의하여 확립되는 부호이다. 논리적으로 고찰되면, 단어의 의미는 최초의 결정에 의하여 ㅡ 최초의 정의(定義)나 규약 같은 것인 일종의 원래 사회계약 ㅡ 정말로 확립된다; 그리고 심리학적으로 고찰되면, 단어의 의미는 우리가 최초로 그 단어의 사용을 배웠을 때, 우리가 최초로 우리의 언어적 버릇과 연상을 형성했을 때, 확립되었다. 그리하여 학생이 영어는 고통을 ‘pain’이라고 부르며 빵을 ‘bread’라고 부르는 데 훨씬 더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쉽다고 느끼는 반면, ‘pain’이 빵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의 불필요한 인위성에 대해서 불평을 하는 데 일리가 있다. 학생은 용법의 규약성을 완벽하게 잘 이해할 것이지만, 원래 규약에 ㅡ 그에게 원래 ㅡ 구속력이 없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느낌을 표현한다. 그래서 그의 실수는 동등하게 구속력이 있는 몇 가지 원래 규약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한 것이 본질일 따름일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은연중에,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는가? 우리들 대부분은 프랑스에서는 심지어 어린 아이들도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 자신이 충격감에 빠진다.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지식함에 대하여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새뮤엘 존스’라고 불리는 사람의 진짜 이름이 ‘존 스미스’였음을 발견하는 경찰관에 관해서 우리는 미소를 짓지 않는다 ㅡ 그의 진짜 이름에 대한 지식을 습득함에 의하여 우리가 사람이나 신(神)이나 정신을 지배하는 힘을 얻는다는 마술적 믿음의 마지막 흔적이 여기에 의심할 바 없이 있을지라도: 그의 진짜 이름을 언명함에 의하여 우리가 그를 소환하거나 칭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용어의 ‘진정한’이나 ‘고유한’ 의미가 그 용어의 원래 의미인, 논리적으로 방어 가능할 뿐 아니라 친숙한 의미가 정말로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 용어를 이해한다면, 우리가 그 용어를 ㅡ 참된 권위자로부터, 그 언어를 알고 있던 사람으로부터 ㅡ 바르게 배웠기 때문에 이해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단어의 의미라는 문제가 정말로 우리의 용법과 관련된 권위적 근원이나 기원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음이 밝혀진다.
그것은 사실의 서술인 명제의 진리라는 문제와는 다르다. 이유인즉 누구나 사실과 관련된 실수를 ㅡ 심지어 자신의 나이나 자신이 바로 이 순간 분명하고도 뚜렷이 감지하는 사물의 색깔과 같은, 자신이 틀림없이 권위자인 문제에서도 ㅡ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원에 관해서, 서술이 처음에 이룩되어 처음으로 적절하게 이해되었을 때 서술은 쉽게 허위였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단어는 이해되자마자 합당한 의미를 틀림없이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단어들의 의미와 서술들의 진리가 각각의 기원과 연관된 방식들 사이의 차이점을 우리가 숙고한다면, 기원의 문제가 지식이나 진리의 문제와 많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려는 유혹을 우리는 받지 않는다.
관념들은 지칭어나 용어나 서술이나 명제나 개념인데 이론인데 단어들로 주장들로 언명될 것인데 유의미하다 참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의미는 진리는 정의(定義)들 추론들 통하여 정의되지 않은 개념들의 원초명제들의 의미로 환원될 것이다 |
이 수단들에 의하여 그것들의 의미를 진리를 확립하려는 (환원하기보다는) 시도로 인하여 무한소급이 발생한다 |
그러나 의미와 진리 사이에는 깊은 유사성이 있다; 그리고 의미와 진리를 매우 긴밀하게 연결하려고 노력하여 양쪽 모두를 동일한 방법으로 취급하려는 유혹이 거의 불가항력적이 되는 철학적 관점이 ㅡ 내가 그것을 ‘본질주의’라고 불렀다 ㅡ 있다.
이것을 간단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관념표의 양편 사이의 관계를 주시하면서 우리는 앞의 관념표를 한 번 더 살펴볼 것이다.
이 표의 양편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표의 왼편을 보면, 우리는 거기서 ‘정의(定義: Definitions)’라는 단어를 발견한다. 그러나 정의(定義)는 일종의 서술이나 이론 혹은 명제이며 그래서 표의 오른편에 있는 저것들 중의 하나이다. (부언하여 이 사실로 인하여 관념표의 균형이 망가지지 않는다; 이유인즉 추론 역시 ‘추론’이라는 단어가 출현하는 편에 있는 ㅡ 서술, 기타 등등 ㅡ 종류의 것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정의[定義]가 단어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특수한 종류의 단어들의 배열에 의하여 언명되듯이 추론도 서술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특수한 종류의 서술들의 배열에 의하여 언명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의 왼편에 출현하는 정의(定義)들이 서술들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정의(定義)들이 표의 왼편과 오른편 사이에서 고리를 형성할 것임이 암시될 것이다.
정의(定義)들이 이런 일을 수행한다는 것은 정말로, 내가 ‘본질주의’라는 이름을 부여한 저 철학적 교설의 한 부분이다. 본질주의에 따르면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 정의(定義)들은 사물의 내재적 본질이나 본성에 대한 서술이다. 동시에 정의(定義)들은 단어의 ㅡ 본질을 가리키는 명칭의 ㅡ 의미를 서술한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 그리고 칸트 역시 ‘몸체[body]’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 연장되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모든 본질주의자들은 정의(定義)들은 ‘원리’다라고 믿었다; 다시 말해서, 정의들은 다른 명제들로부터 도출될 수 없으며, 모든 증명의 토대를 형성하거나 토대의 일부인, 원초명제들을 (사례: ‘모든 몸체들은 연장된다’) 생성한다. 그리하여 정의들이 모든 과학의 토대를 형성한다.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특히 11장의 주석27ㅡ33 참조.) 이 특수한 원리는, 본질주의적 신조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본질’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그 원리가 홉스(Hobbes)나, 가령 슐릭(Schlick)같은 본질주의에 대한 유명론적(唯名論的: nominalistic) 반대자에 의하여 수용된 이유가 설명된다. (슐릭의 인식론[Erkenntnislehre] 2판, 1925년, 62쪽 참조.)
이제 기원 문제로 인하여, 사실적 진리의 문제가 결정될 것이라는 관점의 논리를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이 우리 수중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유인즉 기원에 의하여 용어나 단어의 진정한 의미가 결정될 수 있다면, 기원에 의하여 중요한 관념의 진정한 정의(定義)가 결정될 수 있고, 그리하여 사물의 본질이나 본성에 대한 기술이며 우리가 수행하는 증명과 결과적으로 우리들이 지닌 과학적 지식의 기초를 이루는 기본적 ‘원리들’ 중 적어도 몇 가지가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경우에 우리가 지닌 지식의 권위적 근원이 있는 듯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정의(定義)가 우리가 지닌 사실에 대한 지식을 증가시킬 수 있다고 본질주의가 제안함에서 잘못되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규약에 관한 결정으로서 정의[定義]들이 우리가 지닌 사실에 관한 지식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지라도, 그리고 정의[定義]들이 반대로 우리가 지닌 이론의 형성에 영향을 미쳐 그리하여 우리가 지닌 사실에 대한 지식의 진화에도 영향을 미칠 수단들을 생성할지라도). 정의(定義)가 ‘자연’에 관하여, 혹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어떤 사실적 지식도 결코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자마자, 몇몇 본질주의적 철학자들이 주조하려고 노력했던 기원의 문제와 사실적 진리 문제 사이의 논리적 연결이 단절됨을 우리는 또한 안다.
ㅡ 칼 포파, “추측과 논박”, 1989년, 18-21쪽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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