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포퍼 원전+번역문

우리는 단순한 진리 이상을 추구한다

이윤진이카루스 2023. 7. 22.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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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단순한 진리 이상을 추구한다

 

그리하여 과학의 과제가 진리탐구라는 다시 말해서, 참인 이론들의 탐구라는 (크세노파네스[Xenophanes]가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가 참인 이론들을 결코 획득하지 못할지라도 혹은 우리가 참인 이론들을 획득해도 참으로서 알지 못할지라도) 관념을 우리가 수용한다. 그러나 진리는 과학의 유일한 목표가 아니라고 우리는 또한 강조한다. 우리는 단순한 진리 이상을 원한다. 우리가 찾는 것은 흥미로운 진리이다 ㅡ 획득하기 어려운 진리. 그래서 자연과학들에서 (수학과 구분되어) 우리가 찾는 것은, 논리적으로 개연성이 없는 진리를 암시하는 의미에서, 고도의 설명력을 지닌 진리이다.

이유인즉 우리가 진리를 원하기만 하지 않는다는 것이 ㅡ 우리가 더 많은 진리를 그리고 새로운 진리를 원한다는 것 ㅡ 무엇보다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2 x 2 = 4’이 사실일지라도 우리는 만족하지 않는다. 위상기하학이나 물리학에서 우리가 난제에 봉착한다면 우리는 구구단표를 암송하여 이용하지 않는다. 단순한 진리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찾는 것은 우리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들이다. 요점은 막스와 모리처(Max-and-Moritz)로 유명한 독일 해학가이자 시인인 부슈(Busch)에 의하여 짧은 동요로 잘 표현되었다 ㅡ 나는 인식론적 보육을 위한 동요를 의미한다:

 

2 곱하기 24: 그것은 사실이지,

그러나 너무 공허하고, 너무 진부해.

내가 찾는 것은 실마리이지

그렇게 가볍지 않는 어떤 문제들에 대한.

 

문제에 ㅡ 어렵고 풍요로운 문제, 어느 정도 심오한 문제 ㅡ 대한 해답이라는 조건에서만 진리나 진리에 대한 추측이 과학과 유관하게 된다. 이것은 순수수학에서도 그렇고, 이것은 자연과학들에서도 그러하다. 그리고 후자(後者)의 경우에, 이전에 이 분야에서 제시된 최고의 이론이나 추측과 비교된 것으로서 제시된 새로운 해답의 논리적 비개연성이나 설명력의 증가하면 문제의 깊이나 중대성의 논리적 척도와 같은 것을 우리가 경험한다. 이 논리적 척도는 내가 위에서 잠재적 만족스러움과 진보에 대한 논리적 기준으로서 기술(記述)한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이 상황에 대한 나의 기술(記述)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진리가 결국 우리 부정주의자들에게 심지어 규제적 원리로서 매우 큰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유혹을 아마도 받을 것이다. 부정주의자들은 (나와 같은) 비록 그 추측이 곧 거짓으로 판명될지라도 흥미로운 문제들을 대담한 추측에 의하여 해결하려는 시도를, 참이지만 흥미롭지 못한 일련의 주장들을 암송하는 것보다 많이 선호하는 데 의심의 여지가 있을 리 없다고 그들이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 부정주의자들은 진리관념에 많은 쓸모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과학적 진보에 대한 그리고 문제-해결의 시도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은 진리관념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 무리의 태도에 대하여 아주 잘못된 인상이 생길 터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를 부정주의자들이든, 무엇이든 여러분이 원하는 것으로 부르라: 그러나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만큼 ㅡ 예를 들어, 법정의 구성원만큼 ㅡ 우리가 진리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판사가 증인에게 진실을, 모든 진실을, 진실만을말해야 한다고 말할 때, 판사가 찾는 것은 증인이 제시할 수 있는 만큼 많은 유관한 진실이다. 무관한 것들로 길을 벗어나기를 좋아하는 증인은, 이 무관한 것들이 자명한 이치여서 전체 진실의 한 부분일지라도, 증인으로서 만족스럽지 못하다. 판사가 ㅡ 혹은 다른 사람이 ㅡ 모든 진실을 요구할 때 원하는 것은 얻어질 수 있는 만큼 많은 흥미롭고 유관한 참된 정보임이 아주 명백하다; 그리고 완벽하게 솔직한 많은 증인들이, 사건에 대한 어떤 중요한 정보의 유관성을 단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 중요한 정보를 밝히지 못했다.

그리하여 부슈(Busch)와 함께 우리가 단순한 진리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흥미롭고 유관한 진리에 관심을 갖는다고 강조할 때, 우리는 모든 사람이 수용하는 요점을 강조할 따름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그래서 대담한 추측들이 곧 거짓으로 틀림없이 판명될지라도 우리가 그 추측들에 관심을 갖는다면, 이 관심은 그런 대담한 추측들의 도움으로써만 우리가 흥미롭고 유관한 진리를 발견하기를 희망할 수 있다는 우리의 방법론적 신념 때문이다.

논리학자가 분석할 특정 과제라고 내가 제안하는 요점이 여기 있다. 여기에 의도된 의미에서, ‘관심이나 유관성객관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 ‘관심이나 유관성은 우리의 문제들과 관련된다; 그래서 관심이나 유관성은 정보의 설명력에 그리하여 정보의 내용이나 비개연성에 의존한다. 앞에서 언급된 (그리고 이 저서의 부록에서 전개된) 척도들은 정확하게 정보의 어떤 유관한 내용을 ㅡ 가설이나 문제와 관련된 정보의 내용 ㅡ 고려하는 것과 같은 척도들이다.

그러므로 나와 같은 반증주의자들은 대담한 추측에 의하여, 그 추측이 곧 거짓으로 판명될지라도 (그리고 특히 거짓으로 판명된다면), 흥미로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일련의 무관한 진부한 표현들을 나열하는 것보다 많이 선호함을 나는 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오류들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선호한다; 그리고 우리의 추측이 거짓임을 발견하면서, 우리가 진리에 대하여 많이 배워서 진리에 더 근접할 것임을 우리가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선호한다.

그러므로 두 가지 관념들 모두가 ㅡ 사실들과 대응이라는 의미에서 진리관념과, 내용관념 (시험가능성과 동일한 척도에 의하여 측정될) ㅡ 우리의 고찰에서 거의 동등하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함과, 두 가지 관념들 모두로 인하여 과학에서의 진보라는 관념이 많이 조명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ㅡ 칼 포퍼, “추측과 논박, 과학적 지식의 성장”, 1989, 229-231쪽 ㅡ

 

Thus we accept the idea that the task of science is the search for truth, that is, for true theories (even though as Xenophanes pointed out we may never get them, or know them as true if we get them). Yet we also stress that truth is not the only aim of science. We want more than mere truth: what we look for is interesting truth - truth which is hard to come by. And in the natural sciences (as distinct from mathematics) what we look for is truth which has a high degree explanatory power, in a sense which implies that it is logically improbable truth.

For it is clear, first of all, that we do not merely want truth - we want more truth, and new truth. We are not content with 'twice two equals four', even though it is true: we do not resort to reciting the multiplication table if we are faced with a difficult problem in topology or in physics. Mere truth is not enough; what we look for are answers to our problems. The point has been well put by the German humorist and poet Busch, of Max-and-Moritz fame, in a little nursery rhyme - I mean a rhyme for the epistemological nursery:󰊓󰊘

 

Twice two equals four: 'tis true,

But too empty, and too trite.

What I look for is a clue

To some matters not so light.

 

Only if it is an answer to a problem - a difficult, a fertile problem, a problem of some depth - does a truth, or a conjecture about the truth, become relevant to science. This is so in pure mathematics, and it is so in the natural sciences. And in the latter, we have something like a logical measure of the depth or significance of the problem in the increase of logical improbability or explanatory power of the proposed new answer, as compared with the best theory or conjecture previously proposed in the field. This logical measure is essentially the same thing which I have described above as the logical criterion of potential satisfactoriness and of progress.

My description of this situation might tempt some people to say that truth does not, after all, play a very big role with us negativists even as a regulative principle. There can be no doubt, they will say, that negativists (like myself) much prefer an attempt to solve an interesting problem by a bold conjecture, even if it soon turns out to be false, to any recital of a sequence of true but uninteresting assertions. Thus it does not seem, after all, as if we negativists had much use for the idea of truth. Our ideas of scientific progress and of attempted problem-solving do not seem very closely related to it.

This, I believe, would give quite a mistaken impression of the attitude of our group. Call us negativists, or what you like: but you should realize that we are as much interested in truth as anybody - for example, as the members of a court of justice. When the judge tells a witness that he should speak 'The truth, the whole truth, and nothing but the truth', then what he looks for is as much of the relevant truth as the witness may be able to offer. A witness who likes to wander off into irrelevancies is unsatisfactory as a witness, even though these irrelevancies may be truisms, and thus part of 'the whole truth'. It is quite obvious that what the judge - or anybody else - wants when he asks for 'the whole truth' is as much interesting and relevant true information as can be got; and many perfectly candid witnesses have failed to disclose some important information simply because they were unaware of its relevance to the case.

Thus when we stress, with Busch, that we are not interested in mere truth but in interesting and relevant truth, then, I contend, we only emphasize a point which everybody accepts. And if we are

 

󰊓󰊘 From W. Busch, Schein und Sein (first published posthumously in 1909; p. 28 of the Insel edition, 1952). My attention has been drawn to this rhyme by an essay on Busch as a philosopher which my late friend Julius Kraft contributed to the volume Erziehung und Politik (Essays for Minna Specht, 1960); see p. 262. My translation makes it perhaps more like a nursery rhyme than Busch intended.

 

interested in bold conjectures, even if these should soon turn out to be false, then this interest is due to our methodological conviction that only with the help of such bold conjectures can we hope to discover interesting and relevant truth.

There is a point here which, I suggest, it is the particular task of the logician to analyse. 'Interest', or 'relevance', in the sense here intended, can be objectively analyzed; it is relative to our problem; and it depends on the explanatory power, and thus on the content of or improbability, of the information. The measures alluded to earlier (and developed in the Addenda to this volume) are precisely such measures as take account of some relative content of the information - its content relative to a hypothesis or to a problem.

I can therefore gladly admit that falsificationists like myself much prefer an attempt to solve an interesting problem by a bold conjecture, even (and especially) if it soon turns out be false, to any recital of a sequence of irrelevant truisms. We prefer this because we believe that this is the way in which we can learn from our mistakes; and that in finding that our conjecture was false, we shall have learnt much about the truth, and shall have got nearer to the truth.

I therefore hold that both ideas - the idea of truth, in the sense of correspondence with the facts, and the idea of content (which may be measured by the same measure as testability) - play about equally important roles in our considerations, and that both can shed much light on the idea of progress in sci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