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시험은 어디서 멈추는가
이론에 대한 모든 시험은, 그 이론의 입증을 낳건 오류판정을 낳건, 우리가 수용하기로 결정하는 이런저런 기초명제에서 멈추어야 한다. 우리가 결정에 이르지 못하여 이런저런 기초명제를 수용하지 못하면 시험은 성과를 낳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 관점에서 고찰되면, 상황은 그 상황으로 인하여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저 특정 기초명제라기보다는 이 특정 기초명제에 멈추게 되거나 아니면 시험을 모두 포기하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유인즉 여하한 기초명제도 반대로, 시험 중인 이론이나 또 다른 어떤 이론의 도움을 받아서 그 기초명제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기초명제 중 여하한 기초명제를 시금석으로서 사용하여, 다시 시험들에 부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절차는 자연스럽게 끝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시험을 통하여 우리가 성과를 얻으려면, 이런저런 지점에서 멈추어 우리는 당분간 만족한다고 말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그 절차에 따라서 특별히 시험하기 쉬운 일종의 서술에서만 멈추는 절차에 다다른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것은 상당히 쉽다. 이유인즉 그것이, 그 명제들의 수용이나 배제에 관하여 다양한 연구자들이 합의에 이를 것 같은 명제들에 우리가 멈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연구자들이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하면, 그 연구자들은 시험들을 지속할 따름이거나 아니면 그 시험들은 완전히 다시 시작할 것이다. 이것 또한 결과를 낳지 않는다면, 문제의 명제들이 상호-주관적으로 시험될 수 없었다거나 우리는 결국 관찰될 수 있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지 않았다고 우리가 아마도 말할 것이다. 어느 날 과학적 관찰자들이 기초명제들에 관하여 합의에 이른다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면 이것은 보편적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언어의
실패에 해당할 터이다. 그것은 새로운 ‘언어들의 바벨탑’에 해당할 터이다: 과학적 발견은 어불성설로 판명될 터이다. 이 새로운 바벨탑인 솟구치는 과학의 건축물은 곧 폐허에 놓일 터이다.
어려운 작업이 끝나고 모든 것이 쉽게 검사될 수 있을 때 논리적 증거가 만족스러운 형태에 도달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과학이 자체의 연역이나 설명 작업을 마친 다음에 우리는 쉽게 시험될 수 있는 기초명제들에서 멈춘다. 개인적인 경험들에 관한 명제들은 ㅡ 다시 말해서 프로토콜 문장들 ㅡ 분명히 이런 종류가 아니다; 그리하여 그 명제들은, 우리가 멈추는 명제들로서 작동하기에 그다지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물론, 과학연구과 산업연구 기관에 서 발행되는 시험증명서들과 같은 기록들이나 초안들(protocols)을 정말로 이용한다. 이것들은, 필요하다면, 재검토될 수 있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시험들을 실행하는 전문가들의 반응-시간들을 시험하는 것이 (다시 말해서 그 전문가들의 개인적인 균차들[均次들: equations]을 결정하는 것) 필수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리고 특히 ‘... 결정적인 경우들에서’ 우리는 정말로 쉽게 시험될 수 있는 명제들에서 멈추고, 카르납(Carnap)이 추천하는 바와 같이 지각이나 프로토콜 문장들에서 멈추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 지각들에 관한 명제들을 상호-주관적으로 시험하기가... 상대적으로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이것들에만... 멈추지’ 않는다.
독단론,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 그리고 심리학주의 사이의 선택인 프리스(Fries)의 3중딜레마와 관련하여 이제 우리의 입장은 무엇인가? (25절 참조.) 우리가 멈추는 기초명제들은, 만족스러운 것으로서 그리고 충분히 시험된 것으로서 우리가 수용하겠다고 결정하는데, 인정되는 바와 같이 독단들의 특징을 띠지만 단지 우리가 그 기초명제들을 추가 논증들에 의하여 (혹은 추가 시험들에 의하여) 정당화하는 것을 그만둘 것인 한에서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독단론은 무해한데 왜냐하면 필요성이 나타나면 이 명제들은 쉽게 추가적으로 시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또한 연역의 연쇄가 원칙적으로 무한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도 무해한데 왜냐하면 우리의 이론에서 어떤 명제들도 그런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로써 증명하려고 시도하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리학주의에 관하여: 기초명제를 수용하여 그 기초명제에 만족하는 결정은 우리의 경험들과 ㅡ 특히 우리의 지각적 경험들과 ㅡ 인과적으로 연관된다는 것을 나는 다시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경험들에 의하여 기초명제들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경험들은 결정에 동기를 부여하고 그리하여 명제의 수용이나 배척에 동기를 부여할 수 있지만, 기초명제들은 경험들에 의하여 정당화될 수 없다 ㅡ 책상을 친다고 결코 정당화되지 않듯이.
ㅡ 칼 포퍼, “과학적 발견의 논리”, 1968년, 104-105쪽 ㅡ
Every test of a theory, whether resulting in its corroboration or falsification, must stop at some basic statement or other which we decide to accept. If we do not come to any decision, and do not accept some basic statement or other, then the test will have led nowhere. But considered from a logical point of view, the situation is never such that it compels us to stop at this particular basic statement rather than at that, or else give up the test altogether. For any basic statement can again in its turn be subjected to tests, using as a touchstone any of the basic statements which can be deduced from it with the help of some theory, either the
one under test, or another. This procedure has no natural end. 1 Thus if the test is to lead us anywhere, nothing remains but to stop at some point or other and say that we are satisfied, for the time being.
It is fairly easy to see that we arrive in this way at a procedure according to which we stop only at a kind of statement that is especially easy to test. For it means that we are stopping at statements about whose acceptance or rejection the various investigators are likely to reach agreement. And if they do not agree, they will simply continue with the tests, or else start them all over again. If this too leads to no result, then we might say that the statements in question were not
inter-subjectively testable, or that we were not, after all, dealing with observable events. If some day it should no longer be possible for scientific observers to reach agreement about basic statements this would amount to a failure of language as a means of universal communication. It would amount to a new 'Babel of Tongues': scientific discovery would be reduced to absurdity. In this new Babel, the soaring edifice of science would soon lie in ruins.
1 Cf. Carnap, Erkermtnis 3, 1932, p. 224. I can accept this report by Carnap of my theory, save for a few not too important details. These are, first, the suggestion that basic statements (called by Carnap 'protocol statements') are the starting points from which science is built up; secondly, the remark (p. 225) that a protocol statement can be confirmed 'with such and such degree of certainty'; thirdly that 'statements about perceptions' constitute 'equally valid links in the chain' and that it is these statements about perception to which we 'appeal in critical cases'. Cf. the quotation in the text to the next note. I wish to take this opportunity of thanking Professor Carnap for his friendly words about my unpublished work, at the place mentioned.
THE PROBLEM OF THE EMPIRICAL BASIS
Just as a logical proof has reached a satisfactory shape when the difficult work is over, and everything can be easily checked, so, after science has done its work of deduction or explanation, we stop at basic statements which are easily testable. Statements about personal experiences — i.e. protocol sentences — are clearly not of this kind; thus they will not be very suitable to serve as statements at which we stop. We do of course make use of records or protocols, such as certificates of tests issued by a department of scientific and industrial research. These, if the need arises, can be re-examined. Thus it may become necessary, for example, to test the reaction-times of the experts who carry out the tests (i.e. to determine their personal equations). But in general, and especially '. . .in critical cases' we do stop at easily testable statements, and not, as Carnap recommends, at perception or protocol sentences; i.e. we do not '. . . stop just at these . . . because the inter-subjective testing of statements about perceptions ... is relatively
complicated and difficult'.2
What is our position now in regard to Fries's trilemma, the choice between dogmatism, infinite regress, and psychologism? (Cf. section 25.) The basic statements at which we stop, which we decide to accept as satisfactory, and as sufficiently tested, have admittedly the character of dogmas, but only in so far as we may desist from justifying them by further arguments (or by further tests). But this kind of dogmatism is innocuous since, should the need arise, these state-
ments can easily be tested further. I admit that this too makes the chain of deduction in principle infinite. But this kind of 'infinite regress' is also innocuous since in our theory there is no question of trying to prove any statements by means of it. And finally, as to psychologism: I admit, again, that the decision to accept a basic statement, and to be satisfied with it, is causally connected with our experiences — especially with our perceptual experiences. But we do not attempt to justify basic statements by these experiences. Experiences can motivate a decision, and hence an acceptance or a rejection of a statement, but a basic
2 Cf. the previous note. *This paper of Carnap's contained the first published report of my theory of testing hypotheses; and the view here quoted from it was there erroneously attributed to me.
SOME STRUCTURAL COMPONENTS OF A THEORY OF EXPERIENCE
statement cannot be justified by them — no more than by thumping the tabl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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