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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오디세이, '트로이아 목마'의 유혹은 영원하다

이윤진이카루스 2012. 1. 21. 09:35

‘트로이아 목마’의 유혹은 영원하다

고전 오디세이
트로이아의 멸망과 아가멤논의 죽음

»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앞날을 예측하여 적절한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인·지식인은 우리 시대의 예언자다. 하지만 지난 세월 우린 달콤한 번영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얼마나 많은 ‘트로이아의 목마’를 끌어들여 허우적댔던가. 어쩌면 우린 또 새로운 유혹에 휘둘려 경계하라는 목소리를 죽이고 우리 시대의 ‘라오콘’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10년 동안 그리스 연합군의 공격을 잘 버텨냈던 트로이아가 한 방에 훅 간 것은 오디세우스의 지략 때문이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 해변에 있던 적진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빈터 한가운데 산더미만한 목마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도성에서 나온 트로이아인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의아해했다. 적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서 철수했나? 그런데 이 거대한 목마는 또 뭔가? 사람들은 술렁였다. 이때 트로이아의 지혜로운 예언자 라오콘이 나섰다. 그리스 군은 그렇게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수상하다. 뭔가 음모가 있다. 특히 저 목마를 조심하라. 당장 없애버려야 한다. 만약 그의 말을 따랐다면, 트로이아는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속에는 그리스의 최고 전사들이 무장을 갖춘 채 잠입을 노리며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마를 들이지 말라” 경고한 라오콘

이때 한 그리스인이 사람들 앞으로 끌려나왔다. “저는 시돈이라고 합니다. 전쟁에 지친 그리스 연합군은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저는 그들의 무사 귀향을 위한 희생 제물로 바쳐졌지요. 하지만 저는 달아났습니다. 이제 갈 데가 없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그럼 저 목마는? “그들이 무사히 귀향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미네르바 여신에게 바친 제물입니다. 목마를 도성 안으로 들여놓고 경의를 표한다면, 트로이아는 여신의 가호를 받아 강성해지고 번영을 누릴 것입니다.” 사람들은 라오콘의 날선 경고보다 그리스인의 말에 더 솔깃했다. 게다가 바다에서 괴물이 나타나 라오콘과 그의 자식들을 죽이자, 사람들은 그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고 쉽게 믿었다.

트로이아인들은 거대한 목마를 도성 안으로 끌어들였다. 마치 무슨 횡재라도 한 듯이. 장밋빛 미래가 활짝 피어날 것처럼. 무엇에 홀린 듯이 한껏 들떠 있었다. 하지만 시돈은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아인들을 속이기 위해 남겨두었던 미끼였다. 그들은 그 달콤한 미끼를 덥석 물었다. 목마를 도성 한복판에 세워두고 승리에 도취된 채 축제를 벌였고, 거나하게 취하여 곯아떨어졌다. 밤이 깊어지자, 시돈이 조용히 일어나 움직였다. 곧 목마의 배 부분이 활짝 열리더니 인간병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트로이아에 불을 질렀다. 놀라 깨어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베고 찔러 죽였다. 인근 섬에 숨어 있다가 다시 잠입한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아 도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무방비 상태에 있던 트로이아인들을 무참히 살육하였다. 트로이아는 그렇게 망했다.(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2권)

아, 라오콘의 말을 들었더라면. 적의 작전을 꿰뚫어본 예언자 라오콘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는 엄청났다. 목마를 트로이아 안으로 들이지 말라 했건만. 욕망의 덫에 걸린 트로이아인들에게는 올바른 판단력이 없었다. 그렇게 진실은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앞날을 내다볼 줄 아는 지혜로운 선지자의 말은 종종 무시당한다. 트로이아의 또 다른 예언자인 카산드라의 처지 역시 비극적이다. 그녀는 아폴론으로부터 예언의 능력을 선물로 받았지만, 그를 배신하는 바람에 예언을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벌을 받았다. 눈앞에는 미래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그녀가 말하면 모두가 못 들은 척 외면한다고 상상해보라. 미칠 것만 같은 그녀였다. 그런 일이 반복될 때 그녀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특히 트로이아 사람들이 라오콘의 경고를 무시하고 목마를 도성 안으로 끌고 왔을 때, 카산드라는 그것이 거대한 재앙의 불씨임을 직감하고 예언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았다. 만약 트로이아인들이 그녀의 말을 믿고 목마를 불태웠다면, 트로이아가 불타는 일은 없었을 터.

도성이 함락되고 난 뒤, 트로이아의 여인들은 그리스인들의 전리품이 되었다. 가장 아름다웠던 카산드라는 그리스의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의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아가멤논을 보았을 때, 그의 끔찍한 미래도 함께 보았다. 그가 귀국하면 그의 아내가 그를 도끼로 쳐 죽이고, 그의 곁에 카산드라 자신도 시체로 드러눕게 되는 끔찍한 암살의 현장이 보였고, 곧이어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어머니를 죽이는 친족살해의 장면도 보였다. “아, 나는 그를 죽이고 그의 가문을 파괴할 겁니다. 내 오라비들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거예요.” 하지만 아무도 그의 예언을 이해하지 못했다. 공포에 질린 미친 여자의 과대망상이라 혀를 찰 뿐. 그녀는 참혹한 미래를 향해 참담한 심정으로 그 길을 가야만 했다. 피할 길이 없었다.(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아의 여인들> 352~405행) 만약 아가멤논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그는 암살을 피할 수 있었을 터.

아가멤논이 귀국하여 카산드라와 함께 왕궁으로 들어갈 때도 미래의 불행이 카산드라에게 그림처럼 떠올랐다. 개선하는 아가멤논에게 핏빛처럼 붉은 카펫을 깔아주는 그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을 환영하지만, 이제 곧 남편을 도끼로 쳐 죽일 것이다. 아, 그리고 그 옆에 자신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질 것이다. 이 끔찍한 음모를 그녀가 소리 높여 예언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도 믿지도 않았다. 저주를 받았기에, 공허하게 허공에 울릴 뿐이었다. 만약 누구라도, 특히 아가멤논이 카산드라의 예언을 귀담아들었다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도끼날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가정일 뿐. 그녀는 그가 끔찍한 암살의 현장으로 순순히 인도되어 들어가는 것을 봐야만 했고, 이어 그녀 자신도 그곳으로 끌려들어가야만 했다. “가겠어요. 가서 집안에서 나의 운명과 아가멤논의 운명을 슬퍼하겠어요. 난 살 만큼 산 거니까.”(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 1313~4행)





인간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다. 미래를 안다면, 닥쳐올 불행을 피할 수 있으련만. 후회할 일을 하지 않으련만. 설령 누군가가 앞날을 예견하여 진실을 말한다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가짜 예언자도 있는 판에,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누가 진짜 예언자인지 사기꾼인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된 예언을 듣는다 해도 그것을 판별할 능력이 없고, 진짜 예언자가 있다 해도 그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라오콘이 트로이아의 멸망을 내다보며 목마를 절대 들이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트로이아인들은 그의 말을 묵살했고, 결국 멸망했던 것처럼. 카산드라가 아가멤논 앞에 놓인 암살의 덫을 조심하라고 외쳤지만, 피비린내 나는 도륙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암살의 덫’ 예언한 카산드라

그리스 로마인들은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의 힘을 이성과 태양의 신인 아폴론의 선물이라 믿었다. 예언이란 밝은 이성으로 비추는 햇빛과 같다는 뜻이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고, 현재 직면한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에 근거하여, 다가올 미래를 올바르게 그려내는 건전한 예측은 우리 시대의 예언이다. 그래서 국가와 세계의 앞날을 날카롭게 예측하여 적절한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인이나 지식인은 우리 시대의 지혜로운 예언자다. 하지만 트로이아 전쟁 신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지성인들의 참된 예측은 대중에게 외면당하고 권력에 억압당하기 일쑤다. 지난 세월, 우리는 달콤한 번영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얼마나 많은 ‘트로이아의 목마’를 우리 안에 끌어들여 혼란과 위기에 빠져 허우적댔던가. 그것을 들여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깨어 있는 목소리들을 얼마나 많이 무시했던가. 어쩌면 앞으로도 우리는 또 새로운 ‘트로이아의 목마’의 유혹에 휘둘려, 이를 경계하라는 각성의 목소리를 죽이고 우리 시대의 ‘라오콘’을 또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지난 2년 가까이 안재원 박사와 함께 꾸려온 ‘고전 오디세이’를 오늘로 마무리 짓는다.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인류가 공유하는 문화유산이라 보고, 그것이 일깨우는 지혜를 찾아 독자들과 함께 나누려고 애썼다. 우리는 묻는다. 고전은 우리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가? 사람들은 고전이 중요하다고 외치면서 동시에 못 본 척하니, 어쩌면 고전은 진리를 외쳤지만 외면당했던 예언자 라오콘이나 카산드라와 같은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반대일지도. 고전은 어쩌면 라오콘이나 카산드라의 외침과 같은 참된 예언을 억누르기 위해 음흉한 세력들이 역사 속에 심어놓은 트로이아의 목마나 시돈과 같은 위험한 덫일지도 모른다. <끝>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