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마 정벌이 명나라 때문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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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 교수의 G2 시대에 읽는 조선 외교사
⑨조선 초기의 한일관계 (Ⅳ) 세종때 다시 충청도등 왜구 침략 태종 중심으로 쓰시마 정벌 강행 일본 본토와는 우호 관계 지속해 명나라 일 정벌땐 조
쓰시마 정벌의 직접 배경 개국 이래 일본인들을 받아들이고 생활 대책을 마련해 주는 등 유화책을 통해 왜구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조선이 쓰시마 정벌이라는 초강수를 선택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주목되는 것은 세종 즉위 직후 조선이 쓰시마에 대해 느꼈던 배신감이다. 조선이 배신감을 갖게 된 직접적 계기는 1419년 5월 충청도 비인현(庇仁縣)과 황해도 연평곶(延平串) 등지에 왜구가 침입했던 사건이었다. 왜구는 5월5일 비인의 도두음곶(都豆音串)에 침입하여 조선 병선 7척을 소각한 뒤 상륙하여 현성(縣城)을 포위하고 노략질을 벌였다. 이어 북상하여 5월11일에는 연평곶에 나타나 조선 병선을 포위하고 미곡을 약탈했다. 당시 쓰시마에서는 도주 소 사다시게가 죽은 뒤 내정이 불안한 상황에서 마침 기근까지 극심하여 민심이 동요하고 있었다. 태조와 태종대에 이어졌던 조선의 왜인 포용과 생필품 공급 등 회유책을 계기로 잦아들었던 ‘왜구 근성’이 다시 꿈틀거릴 조짐을 보였다. 실제 쓰시마 왜구들은 명에 대한 침략에 나서면서 ‘군량 확보’라는 명목을 내세워 비인현과 연평곶에 침입하여 사달을 일으켰던 것이다. 소식을 접한 조선 조정은 격앙했다. 연평곶이 침략받았다는 보고가 올라온 직후 세종과 상왕(上王) 태종은 중신들을 불러 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군신을 막론하고 “왜인들을 그토록 후대했는데 다시 침략해 왔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성토와 응징론이 제기되었다. 특히 태종은 왜구 침입을 계기로 쓰시마를 정벌하고 명에서 귀환하는 왜구 선단을 요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세종은 정벌과 응징에 아주 소극적이었다. 그는 조선의 병선 숫자가 적다는 것, 육지 방어 태세가 미흡하다는 것 등을 이유로 정벌을 벌이는 대신 육지 방어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세종은 부왕 태종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비록 ‘상왕’으로 물러나 있기는 했지만 태종은 여전히 병권(兵權)을 틀어쥐고 있었다. 태종은 “마땅히 소제해야 할 때 하지 못하고 매번 침략을 받기만 한다면 옛날 한(漢)이 흉노에게 당하던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세종과 신료들을 다그쳤다.
태종은 정벌을 기정사실로 하고 준비에 착수했다. 원정을 지휘할 총사령관 격인 삼군도통사에 유정현(柳廷顯)을 임명하여 병력과 전함을 정비하게 하는 한편, 원정 관련 정보가 쓰시마나 일본으로 누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심하게 조처했다. 먼저 당시 쓰시마가 보낸 사절 8명을 오지인 함경도로 보내 억류했다. 또 원정군이 출발하기 전에 경상도 일원의 포소(浦所)에 있던 왜인들을 모두 체포하여 각지에 유배했다. 삼남에 유배했던 인원이 591명이었고, 체포 과정에서 저항하거나 도주하다가 죽은 왜인만 136명에 이르렀다. 세종은 재류 왜인들에 대한 이 같은 강경책에 소극적이었지만 태종은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과거 정몽주를 제거하고 두 차례나 ‘왕자의 난’을 감행하면서 집권했던 태종의 ‘무골 기질’과 과단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주목되는 것은 응징의 목표를 쓰시마에 집중하면서도 규슈를 비롯한 일본 본토의 여러 세력들과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점이다. 태종은 쓰시마와 관련된 왜인들은 억류하거나 제거했음에도 규슈 단다이를 비롯한 본토 세력들이 보낸 사절들은 여전히 우대했다. 그들에게 “왜구 짓을 자행한 것에 대한 응징 차원에서 쓰시마를 정벌하는 것일 뿐 본토와는 원한이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1419년 6월19일 삼군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가 이끄는 조선군은 거제도를 떠나 원정에 나선다. 모두 1만7285명의 병력이 65일분의 군량을 준비하여 227척의 병선에 분승하고 있었다. 이윽고 6월20일 정오 무렵, 선발대를 실은 조선 전함 10여척이 쓰시마에 상륙한다. 상륙을 목도한 쓰시마의 왜인들은 애초 왜구 선단이 커다란 성과를 안고 귀환한 것으로 착각한다. 그들은 술과 고기를 준비하여 환영하러 나왔다가 조선군임을 알고는 혼비백산해서 달아난다. 조선군은 귀화한 왜인 지문(池文)이란 자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유시문을 들려 도주에게 보냈으나 회답이 없었다. 조선군은 작전을 개시했다. 섬 안팎을 수색하여 크고 작은 선박 109척과 가옥 1939호를 소각했다. 또 왜인 114명을 처치하고, 잡혀 있던 중국인 포로 131명을 구출했다. 나아가 경작하던 작물들을 모두 베어 버렸다. 하지만 쓰시마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6월26일 좌군절제사 박실(朴實)이 이끌던 조선군은 복병을 만나 100여명이 전사하는 패전을 맛보았다. 이윽고 도주 도도웅와(都都熊瓦)가 조선군의 철수를 간청한데다 곧 다가올 태풍 철에 대한 우려가 맞물리면서 조선군은 선단을 이끌고 철수 길에 오르게 된다. 끼여 있는 나라의 고뇌 조선이 쓰시마를 정벌했던 배경에는 명에 대한 고려도 작용하고 있었다. 15세기 초, 역시 왜구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명에서는 일본에 대한 정벌설이 여러 차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벌 관련 풍문은 조선을 긴장시켰다. 특히 조선은 팽창론자인 영락제가 일본 정벌을 감행하면서 조선에 길잡이를 요구하거나 명군이 조선에 주둔하게 되는 상황을 우려했다. 또한 조선이 막부뿐 아니라 왜구 집단과도 통교하고 무역하는 사실을 명에게 숨기려고 시도했다. 1419년의 쓰시마 정벌은 왜구와 관련된 명의 조선에 대한 의심과 우려를 씻기 위한 작전이기도 했다. 정벌 전후 왜구 관련 정보를 명에 알려주고, 왜구에게 납치된 중국인 포로들을 송환했던 것도 명의 의심을 풀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정책이었다. 당시 명은 조선이 일본과 밀착하는 상황, 혹은 여진을 끌어들여 만주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품는 상황 등을 경계했다. 이 같은 배경에서 조선은 쓰시마를 쳐서 왜구 응징에 대한 결의를 과시하는 한편, 명의 조선에 대한 의혹의 시선도 돌리려고 시도했다. 15세기 초, 쓰시마 정벌은 ‘끼여 있는 나라’ 조선의 고뇌가 반영된 군사적 행동이었던 셈이다.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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