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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의 세계, 서문 (번역 수정본)

이윤진이카루스 2024. 8. 1.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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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세계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소크라테스 이전 계몽사조에 대한 논문

 

 

 

칼 포퍼

 

요르겐 메이어 (JØrgen Mejer)의 협조를 받아 아르네 F. 피터슨 (Arne F. Peterson)이 편집함.

 

 

 

 

 

루틀리쥐(Routledge) 출판사

역자 주해

 

본 저서의 한글 번역본은 20091030, 이한구, 송대현, 이창환에 의하여 번역되어 영림카디널 출판사에서 출판되었지만 ㅡ 이하 영림카디널본 ㅡ 지금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절판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독자들이 구독할 수 있는 길을 몇몇 도서관에서 찾는 것이다. 역자는 본 저서를 20096월부터 번역하기 시작하였지만 그 후 20091030일 출판된 영림카디널본을 참조할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번역본을 참고하겠다는 생각을 실천하지 못했다.

이제 칼 포퍼 경의 전집을 (공저 제외) 역자가 번역한 후 되돌아보니 역자의 번역에 적지 않은 오류가 발견되어 다른 역자의 번역서와 대조하면서 번역을 수정하고 있다.

본 저서의 2007년 재인쇄본을 역자가 번역하였고, 역자의 번역에서 본 저서의 쪽수는 원저자나 편집자가 인용한 다른 저자의 저서 쪽수를 제외하고 본 저서 내용에 관한 쪽수만은 역자의 번역과 다를 수 있고 역자는 굳이 역자의 번역에서 수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본 저서에 표기된 쪽수대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역자의 번역에 그어진 밑금은 역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자의적으로 그었기 때문에 독자는 그 밑금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20247월 번역을 수정하면서, 서울에서 역자

 

 

 

 

 

 

목차

 

편집자의 서문 viii

서문 xiv

약어표 xvi

 

서론: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 발명과 소크라테스 이전 우주론의 쇠퇴 1

논문 1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로 돌아가라 7

부록 1: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에 대한

역사관련 기록

부록 2: 박진성에 관한 몇 가지 추가 암시

 

논문 2 알려지지 않은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그의 위대성을

확립하기 위한 시도 33

1 그리스 계몽사조의 시조 2 크세노파네스의 초기 ㅡ 3

크세노파네스의 우주론에 대한 오해 ㅡ 4 철학적 신학자로서

크세노파네스 ㅡ 5 크세노파네스의 지식론 ㅡ 6 크세노파네스의

도덕론에 관하여 ㅡ 7 크세노파네스는 역사관련 기록을

창시했는가? 부록 1: 크세노파네스 DK 21B25으로부터의

인용구에 대한 기록 ㅡ 2: 크세노파네스의 진리론에 근거한 새로운

전문적 윤리론 ㅡ 편집자 주해

 

논문 3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두 가지 길에 달이 달빛을 비추는 방식 (I) 68

1 파르메니데스의 서사시()의 구조 ㅡ 2 여신(女神)의 계시

3 문제 ㅡ 4 나의 문제에 대하여 제시된 해답 ㅡ

5 흔적? 아니면 증거? 6 산재하는 몇 가지 언급

7 간략한 평가

 

논문 4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두 가지 길에 달이 달빛을

비추는 방식 (1989) 79

파르메니데스의 시 두 부분 사이에 영향을 미치는

교정이 가능한 기록이 포함된 부록

 

논문 5 달은 파르메니데스의 두 가지 길에 빛을 비출 수 있나?

(1988) 97

1 문제 ㅡ 2 사실 ㅡ 3 역설 ㅡ 4 문제의 해결책에

대한 설명 ㅡ 5 파르메니데스가 제시하는 증거 ㅡ

6 파르메니데스의 합리주의적 논박

 

논문 6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파르메니데스의 시와 초기

그리스 우주론에서 그 시의 근원에 대한 기록 105

1 우주론의 중요성 ㅡ 2 지구와 하늘의 발견 ㅡ 3

철학의 시작 ㅡ 4 우주론자로서의 파르메니데스 ㅡ 5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론자가 아니었다 ㅡ 6

파르메니데스의 새로운 지식론 ㅡ 7 파르메니데스와

과학의 방식 ㅡ 8 여신(女神)의 계시에 왜 견해라는

기만적 방식이 포함되었나? 9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심리학적 추측 ㅡ 10 파르메니데스의 시에

관한 기록 요약 ㅡ 11 끝맺는 말 ㅡ 부록:

파르메니데스의 우주론의 근원에 대한 역사관련 추측

 

논문 7 불변 탐색을 넘어서 146

1 파르메니데스와 현대 과학 ㅡ 2 과학적 탐구 ㅡ 끝없는

탐구3 파르메니데스가 가르치는 두 가지 길 ㅡ

4 비판적 합리주의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의 선각 ㅡ 5

근거 없는 지식 ㅡ 6 실재론 ㅡ 7 합리성과 불변 탐색 ㅡ

8 대립과 변화에 대한 초기 관념들 ㅡ 9 변화의 문제 ㅡ

10 변화의 문제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의 논리적 해결책

11 파르메니데스의 해결책에 대한 원자론적 비판 ㅡ

12 파르메니데스의 합리주의적 안건 ㅡ 13 파르메니데스의

진리 탐구의 유산 ㅡ 14 변화에 대한 원자론적 이론 ㅡ

15 불변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의 이론 ㅡ 16 현대 물리학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의 뿌리 ㅡ 17

시간의 실재성 ㅡ 18 파르메니데스의 3차원적 공간과 현대의

상대성 이론 ㅡ 19 합리성에 한계가 있는가? 20 상대성

이론과 비결정론(indeterminism) 21 물리학에서 비()

파르메니데스적 면모의 출현 ㅡ 22 맥스웰의 도깨비

(Maxwell's demon) 23 볼츠만(Boltzmann)의 원자론

옹호 ㅡ 24 열역학 제2법칙의 역설 해결 ㅡ 25 볼츠만 이론에

대한 슈뢰딩어(Schrödinger)식 해석 ㅡ 26 현대 물리학으로

볼츠만의 이론을 전환하기 ㅡ 27 현대 물리학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적 또 다른 옹호: 개연성에 관한 주관주의식 해석

28 정보 이론(information theory)의 주관론적 해석에

관한 몇 가지 비판적 언급 ㅡ 29 파르메니데스 이론의 파멸로서

양자 물리학에서의 비결정론 ㅡ 30 현대 물리학에서 다른

()-파르메니데스적 발전 ㅡ 31 팽창하는 우주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적 설명 ㅡ 32 파르메니데스의

안건으로부터의 일탈 요약 ㅡ 33 ()-파르메니데스적

경제학으로부터 얻은 교훈 ㅡ 34 불변 탐색을 넘어서:

논리적 이해론을 향하여 ㅡ 부록: 소크라테스 이전 인식론에서

대립자들과 존재에 관한 기록

 

논문 8 선사시대 자아(自我) 발견에 관한, 그리고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심신 문제에 관한 언급 223

1 우주에 대하여 우리가 그린 그림의 역사 ㅡ 2 다음에

오는 것에 의하여 해결될 문제 ㅡ 3 선사시대의 자아와

생각의 세계(세계 2) 발견 ㅡ 4 그리스 철학에서 심신

문제 ㅡ 5 추측성 설명 대() 긍극적 설명

 

논문 9 플라톤과 기하학 251

1 플라톤과 기하학 (1950) 2 플라톤과 기하학

(1957) 3 테아이테토스(Theaetetus)의 연대 결정

(1961) 4 지식의 근원과 무지의 근원에 관하여

5 비판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산파적 기법 대()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epagōgē) 6 유클리드

기하학의 우주론적 근원 ㅡ 7 플라톤, 티마이오스(Timaeus)

54e-55a

 

논문 10 지지와 반대에 관하여 맺는 말: 귀납이 반()귀납이

되고, 귀납이 논박으로 회귀하는 방식 271

 

부록: 그리스 철학에 대한 포퍼의 최근 단편 글 280

단편 글 05 파르메니데스에 관하여 (II) ㅡ 단편 글 6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와 유물론 ㅡ 단편 글 7-10

오해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학 ㅡ 단편 글 11 태양에

대한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와 크세노파네스의

이론을 혼란시킨 아리스토텔레스

 

색인 307

 

 

 

 

 

 

 

 

 

 

 

 

 

 

 

 

 

 

편집자의 서문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

 

1965년 여름, 역사 및 과학철학의 국제 협회(the International Union of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후원하에 윌리엄 닐(William Kneale)과 임레 라카토스(Imre Lakatos) 및 존 왓킨스(John Watkins)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조직위에 참여하면서 런던정경대학(the London School of Economics)과 영국 과학철학협회(the British Society for the Philosophy of Science)가 주관하는 과학철학에 관한 국제회의가 베드포드 대학(Bedford College)에서 열렸다. 논리학과 수학철학 및 과학철학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몇 분이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 회의는 이전에 우세한 철학의 한 학파인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가 마침내 논리학과 지식론에 대한 다른 접근방식에 길을 내주던 때에 열렸다. 회의에 대한 조직위의 주요 목적은 포퍼를 그의 반대자 중 몇 명, 특히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 및 토마스 쿤(Thomas Kuhn)과 대면시켜 비판적 합리주의의 힘과 활력을 결과적으로 증명하려는 바람이었던 듯하다.

몇 가지 의미에서 회의는 조직위의 의도와 소망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포퍼와 초대된 반대자들은 진전을 이룩하지 못했고, 포퍼의 발제사가 지닌 주제와 범위에도 불구하고 그 발제사에 의하여 몇 가지 간략한 언급만 나타났다. 포퍼의 발제사는 소크라테스 이전 우주론과 추론이 어떻게 서구 과학사상의 기둥들에 속하는지, 그리고 이 근거가 과거 2500년에 걸쳐 물리학과 천문학 및 생물학과 철학의 연구계획들에서 추적될 수 있음을 매우 상세하게 밝혔다. 과거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했던 방법론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포퍼는 논증했다; 필요한 유일한 것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비판적 합리주의 정신의 부활로 포퍼가 당시 이미 고전적 포퍼의 강연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로 돌아가라에서 권유한 것이었는데, 그 강연은 1958년에 수행되었고 이번 회의 2년 전에 추측과 논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이라는 저서에 발표되었다. (그 강연은 이 저서의 논문 1로 다시 실렸다.)

포퍼의 요지는 발제사에 관하여 언급한 사람들에 의하여 실제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 강연의 또 다른 요점에 관한 토론도 없었다: 변화에 대한 원자론의 붕괴에 따른 변화에 대한 새로운 이론의 시급한 필요라는 또 다른 요점에 관한 토론도 없었다. 회의가 끝난 후 지명된 편집자는 토론에 참가해서 발언한 사람들 몇 명에게 발행될 회보에 더 상세한 비판 글을 쓰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회보가 나왔을 때 포퍼의 강연이나 포퍼의 견해에 반대하는 준비된 글이 포함되지 않았고, 수십 년 동안 원고로 남아있던 포퍼의 발제사는 과학적 발견의 논리 후기(The Postscript to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198283에 발간되기 전까지 동료들과 학생들 사이에 그랬던 것처럼 몇 년 동안 거의 전설이 되었다. (논문 7은 그 발제사의 증보본으로 여기에 최초로 실렸다.)

내가 1968년에 옥스퍼드에서 공부하면서 나는 런던정경대학에서 열리던 포퍼의 강의와 세미나에 참가하기 위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런던으로 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다. 나에게 그것은 움직이는 급행열차에 올라타는 것과 같았다. 당시 이 세미나에는 몰입적인 참된 공부 분위기와 지식추구 및 과학과 철학의 역사에서 많은 위대한 순간을 반영하는 일종의 가르침이 많았다. 전 세계에서 온 탁월한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포퍼의 세미나에 참가하였는데, 그 세미나에서 모든 사람이 서로 관계가 나빠지지 않고도 서로의 견해를 비판할 수 있는 대가족의 구성원으로서 편안한 듯했다. 그리고 논리학과 과학적 방법에 관한 포퍼의 강의는, 많은 국적의 학생들이 참가했는데, 특별한 풍요로움과 엄격함을 지니고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정신에 의하여 고무된 지속적인 교육과정의 장면이었다. 강의를 통하여 포퍼는 발견의 상황을 풀이하거나 과학적 또는 철학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설명하면서 청중들에게서 전율과 계시를 자아낼 수 있었다. 그는 과학철학을 살아있는 학문으로 만들어 과거의 관념들이 현재의 관념들을 어떻게 설득할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강의가 끝난 다음에 포퍼는 토론을 계속하기 위하여 자신의 연구실로 몇몇 학생들을 자주 초대하곤 했다. 내가 운 좋게 그런 무리에 낀 첫 번째 모임에서 화제는 우주론과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로 바뀌었다. 어느 단계에서 나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Being)’와 그 존재가 옥스퍼드에서 (코퍼스 크리스티 대학 [Corpus Christi College]에서 내가 연구하고 있던 초기 그리스 철학에 관한 연구에서)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언급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To be, or not to be)’가 파르메니데스의 반향이라고 언급할 수 있었는데 이유인즉 내가 옥스퍼드를 언급하자마자 포퍼가 이런 노선들로 말을 잘랐기 때문이다: ‘자네 알지, 파르메니데스는 언어분석가도 아니요 존재론주의자도 아니었고 우주론자였을 따름이네. 그의 존재는 존재론과 관련이 없네. “그것은 이다(it is)”나 논리적 계사(繫辭: copula)는 내가 보기에 공허하네: 그것은 기껏해야 형식적 논리의 일부인데 그 부분으로부터 항진명제(亢進命題: tautologies)만 귀결되지. 그러므로 나는 존재론을 공허한 단어로서 간주하네. 그리스어인 esti, 영어인 is처럼, 계사나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모호하게 사용될 것이라고 인정되지. 그러나 파르메니데스가 존재를 표현하기 위하여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가 사용하는 esti그것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지.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것들이 존재하는가에 대하여 말하기를 원한다면 ㅡ 우리 세계의 가구에 대하여, 존재에 대하여, 예를 들어, 원자에 대해서나 유기체에 대해서 혹은 속성들에 대해서 ㅡ 파르메니데스를 따라서, 우주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낫다고 나는 제안하네.’ 나는 이 말에 경악했는데 그 말로 인하여 나는 덴마크 시인 폴 라 쿠르(Paul la Cour)가 주목한 아티카(Attica)와 우주론 유산, 아티카의 산과 신전 유적, 소나무와 백리향(百里香)의 향기가 짙은 해안의 푸른 수직 절벽과 바람을 받은 선박들, 햇빛을 흠뻑 받은 정적 속에 들리는 매미소리와 양의 방울소리를 기억했다.

이듬해 내가 포퍼의 연구조수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대한 우리들의 잦은 대화는 중요한 전기를 맞이했다. 19699월 포퍼 부부는 브랜다이스 대학(Brandeis University)4개월 동안 방문했고, 그의 부재중에 비서와 나에게 일감을 주기 위하여 포퍼는 자신의 과학적 발견의 논리 후기(Postscript to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를 새로 타자로 칠 것을 요청했는데 그 저서는 당시 수백 가지의 수기나 타자로 친 교정사항들과 추가사항들의 쪽지가 붙은 교정쇄의 상태였다. 그해 가을 동안 마조리 워커 부인과(Mrs Marjorie Walker) 나는 타자를 치고 검토를 하면서 이 일에 열중했는데, 나는 일에 매혹되어 편지에 답장하는 일이나 중간보고를 보내는 일을 잊어버렸다. 11월이 되자 나의 무례한 침묵으로 인하여 포퍼는 인내심을 잃었다. 그러나 학과장에게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 포퍼는 파르메니데스의 반()감각주의에 관한 자신의 심리학적 추측뿐 아니라 파르메니데스의 우주론적 관념들의 가능한 연대순에 대하여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두 통의 흥미롭고 친절한 편지로 나에게 전했다. 이 편지들은 즉각 타자로 쳐져 더 상세하게 설명되도록 포퍼에게 반환되었으며, 나는 빛과 암흑에 관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글들을 연구할 때인 몇 년 전에 내가 이룩한 몇 가지 열정적인 숙고사항을 덧보태었다. 나중에 포퍼는 나의 논평뿐 아니라 편지들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대한 그의 글들을 내가 편찬하자고 제안한 논문집에 넣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두 통의 편지는 이 저서에서 논문 6의 부록으로 인쇄되었다.)

포퍼 부부는 브랜다이스 대학으로부터 1218일에 돌아왔고, 그 후 곧 나는 포퍼 부부에게 한 때 포퍼의 침실에 있던 거의 1200쪽의 기념비적 작품인 새로운 후기의 해석본 두 권을 가져도 주었다; 그 작품은 포퍼의 침실에 10년 동안 손을 대지 않은 채 놓여있었고 반면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우리의 편지를 담은 노란 폴더가 집필 책상 위 창틀에 놓여있었는데 그곳에서 타자본 발제사가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색이 바랬다.

확실히 1970년대 초에 많은 시급한 일들이 있어서, 자연이나 우연이 다람쥐의 형태로 간섭하지 않았다면 파르메니데스 논문들에는 어떤 일도 아마도 발생하지 않았을 터이다. 내가 1971년 런던정경대학을 떠난 후 처음으로 펜(Penn)에 있던 포퍼 부부를 방문했던 1977년 가을 나는 그 사건에 대하여 들었다. 어느 봄날 다람쥐 한 마리가 포퍼 부부가 살던 집에 몰래 들어와 여러 가지 논문을 물어가기 시작했는데 분명히 이 진귀한 논문들을 집짓는 재료로 사용할 목적이었고 그중에 파르메니데스 폴더가 있었다고 포퍼 부인이 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다람쥐는 너무 무거웠던 노란 폴더를 나무 둥치에 떨어뜨렸는데 그곳에서 그 폴더가 나중에 발견되었다. 포퍼가 대화에 합류하자 나는 포퍼에게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대한 그의 논문을 수집하는 오래된 계획을 상기시켜주었고, 파르메니데스에 관한 논문들에 다람쥐도 경쟁적으로 흥미를 보인다고 언급하면서 어렵지 않게 그 계획이 시급해졌다고 그를 설득했다. 유쾌해진 포퍼는 내가 논문 편집을 맡을 것을 제안했고, 그 순간부터 나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관하여 그가 서술한 논문들에 관하여 그리고 그 논문들이 그 후 과학과 철학에 미친 충격에 관하여 발견될 수 있는 것마다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일 년에 한두 번씩 거의 20년 동안 우리의 만남이 또한 시작되었다. 이 시절에 포퍼는 크세노파네스의 우주론과 파르메니데스의 인식론에 대하여 나와 함께 작업을 하기 위하여 다른 일들을 하루 이틀 전형적으로 미루었거나, ‘발제사에 길고도 긴 주석을 달거나 브로드헤드 강좌(Broadhead Lecture)(논문 6) 관한 본문 물음에 답하고 몇 년 동안 자신이 작업을 하던 -논문(Moon-essays)’을 수정하곤 했다. 어느 날 저녁 파르메니데스가 설명하는 두 가지 길이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이 어떻게 최고로 설명될 수 있는지를 갑자기 알아채고 포퍼는 초기 원고를 다시 작성하는 데 몰두하여 밤새도록 작업을 하고 다음 날 아침 내가 공항으로 출발하는 때에서야 글쓰기를 멈추었다. 이 밤샘 마라톤 작업은 그가 거의 90살이 되었을 때 일어났고, 1992계간고전(The Classical Quarterly)에 발표된 논문 3의 초기본에 실렸다. 논문 3, 45를 역순이지만 연대순으로 (논문 제목 옆 괄호 안에 적시됨) 읽고 부록의 단편 글 0-5파르메니데스에 관하여 (II)’를 읽으면 파르메니데스가 가졌던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서 몇 가지 주요 단계가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관한 모든 작업이 이 회의들 동안에 완성된 것은 아니고 세월이 흐르면서 포퍼는 추후에 발표되는 많은 원고를 집필했다. 자신의 삶의 막바지에 포퍼는 해외 강연을 위하여 자신이 몰두하던 다른 분야에서보다 아마도 더 빈번히 이 분야에서 주제를 선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래서 나은 세상을 찾아서[In Search of a Better World]에 모두 포함된 바와 같이 저서와 사상[Books and Thoughts]’, ‘관용과 지적[知的] 책임[Toleration and Intellectual Responsibility]’, 그리고 지중해 역사의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 관하여[On a Little-Known Chapter of Mediterranean History]’와 같은 논문이 발간되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대한 포퍼의 헌신에서 고찰되는 바와 같이, 사건들의 이 과정은 포퍼의 소일거리나 취미에 관한 그의 전체 태도와 일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유인즉 자신의 논문을 출간하는 문제에 질문을 받고 포퍼는 자신이 죽은 후까지 출판이 확실하게 늦어질 수 있다고 전형적으로 대답하곤 했기 때문이다. 포퍼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몰입의 일환으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을 선택한 듯했다.

포퍼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번역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열정은 자신의 부친 시몬 S.C. 포퍼 (Simon S.C. Popper)를 닮았는데 부친은 여가시간에 시를 쓰고 그리스와 로마 시인들의 운문을 번역했다. 이 저서 도처에, 포퍼는 자신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을 해석하는 데 매우 핵심적인 단편 글들을 영어와 독일어로 번역한 것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면서 원문을 반복적으로 참고한다는 암시들이 있다. 이 저서에 나타나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글들을 포퍼가 여러 가지로 번역한 목록이 번역색인(the Index of Translations)에 포함되어 있는데 각 번역된 구절의 다양한 번역 가운데서 최근 번역이 이탤릭체로 된 쪽수에 의하여 그 색인에 표시되어 있다.

여러 해에 걸쳐서 나는 몇 명의 동료들 및 친구들과 흥미롭고 즐거운 협력관계를 유지했고, 그들의 제안 덕분에 많은 편집상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사우스 크로이든(South Croydon)멜리타 뮤(Melitta Mew) 부인과 레이몬드 뮤(Raymond Mew) 씨가 포퍼의 유고로부터 관련 문서를 찾는 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그들의 노력 덕분에 몇 가지 최신 단편 글을 이 저서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 런던의 에른스트 곰브리치 경(Sir Ernst Gombrich)은 전체 계획에 큰 흥미를 보였는데 특히 편집이 그의 귀중한 제안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논문 2에 흥미를 보였다; 그는 또한 친절하게도 포퍼의 독일어 번역을 근거로 크세노파네스의 단편 글 B8B22를 영어로 번역하였다. 요르겐 메이어 박사(Dr J𝞥rgen Mejer)는 코펜하겐과 아테네에서 원고에 나타나는 헬라어 단어 모두와 참고사항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고,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원전에서 유래하는 인용구 대부분을 추적하고 검토하여 해당하는 이름 및 인용구 색인을 작성했다. 코벤트리(Coventry)데이비드 밀러 씨(Mr David Miller)는 영어 관용구와 포퍼의 문체에 관하여 많은 자문을 제공하였고, 이 논문들의 명쾌한 특징은 부분적으로 여러 곳에서 조각 글로 우리에게 전해진 원문을 그가 비판적으로 읽고 윤문한 덕분일 수 있다. 파리-소르본느와 몽펠리에 (Paris-Sorbonne and Montpellier)장 베르나르디 교수(Professor Jean Bernardi)와 코펜하겐의 에릭 이베르센 박사(Dr Erik Iversen)에게도 격려해주시고 원문에 의문을 표한 데 감사한다. 로스킬드(Roskilde)트로엘스 에거스 한센 박사(Dr Troels Eggers Hansen)는 초기 열역학과 상대성 이론에 대한 몇 가지 동떨어진 참고사항을 추적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포퍼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번역 색인(the Index of Popper's translation of the Presocratics)을 영어와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내가 작업용 원고를 가지고 유럽을 여행하던 여러 해 동안 안전상의 이유로 전체 원고의 수정본을 보관한 데 감사한다. 그들 모두가 이 저서를 완결하여 품질을 높인 데 기여하였기에 나는 그들에게 감사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포퍼의 세상에 끌려 들어가서 여러 해 동안 그의 친구가 된 것과 많은 분야에서 중요한 문제들 및 흥미로운 화제들에 ㅡ 그 중 소크라테스 이전 우주론을 그가 매혹적으로 설명한 것 ㅡ 관하여 그와 함께 연구하면서 내가 누렸던 행운에 대하여 감사하는 감정을 느낀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대해 그가 평생 지녔던 사랑을 기억하면서, 그의 생전인 1997년 봄 동안에 완성된 헤일-(Hale-Bopp)’으로 지금 알려진 혜성의 고대부터 우리 시대까지의 이동을 목격하지 못하여 나는 심히 유감스럽다. 그 혜성이 마지막으로 우리 태양계를 지나갔을 때 크세노파네스나 파르메니데스는 아마도 목격하였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 혜성을 목격하고 포퍼는 크게 기뻐하였을 것이며, 아마도 이 위대한 천문학의 선구자들인 크세노파네스와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추측으로 그 혜성이 포퍼를 고취하였을 것이다.

자신이 본보기가 되고 연구를 통하여 포퍼는 지식에 대한 새로운 길들을 열었으며 낡은 길들을 청소하였고, 파르메니데스식의 탐구 방식을 따르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한 인간으로서, 인간이 저지른 짓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우리 문명의 초기에 그랬던 바와 같이 여전히 새롭고 신선할 것이라는 두드러진 인상으로 자주 보상을 받았다.

아르네 프리에무트 피터슨(Arne Friemuth Petersen)

 

 

 

 

 

 

 

 

 

 

 

 

 

 

 

서문

 

 

이 현재 저서에 초기 그리스 철학을 이해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포함되어 있는데 나는 그 철학을 여러 해 동안 연구하였다. 이 논문들이, 모든 역사는 문제 상황의 역사이거나 틀림없이 그 역사라는, 그리고 이 원리를 준수하면서 우리가 과거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과 다른 사상가들을 한층 더 이해할 것이라는 논지를 예시하기를 내가 희망한다. 이 논문들은 또한, 유럽에 그 철학과 과학 및 인문주의를 전해준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의 위대성을 밝히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 논문들은 집필 순서에 따라 배열되지는 않았다. 가장 오래된 논문 중 하나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주요 관심사와 업적을 이해하려는 몇 가지 초기 시도를 제시하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게로 돌아가라(Back to the Presocratics)’ 다음에, 크세노파네스와 파르메니데스가 연구했었을 핵심적 문제들에 관한 몇 가지 논문이 이어졌다. 나중에 나온 이 논문들은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번 다시 작성되었고 오직 한 가지 논문만 (논문 3) 이전에 출판되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게로 돌아가라라는 논문이 더 최근 논문들과는 부분적으로 다른 문제를 다룰지라도, 그 논문들은 몇 가지 면에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게로 돌아가라를 대체한다. 이것에 의하여 또한 왜 고대 그리스 문헌을 해석하려는 반복적인 주제들과 반복된 시도들이 있는지가 설명될 것이다: 다양한 번역들이 이 편집 저서에 유지되었는데 왜냐하면 주제가 논문에 따라 다양한 문맥과 관점에서 ㅡ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이 지닌 광채로부터 반영된 관점 ㅡ 나타나기 때문이다.

미발간 논문 중에서 가장 긴 논문은 (논문 7), 원래 합리성과 불변 탐색(Rationality and the search for invariants)’으로 제목이 붙은 것으로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논문은 헤라클레이토스와 (‘만물은 변한다’) 파르메니데스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화해하여 현대과학에서 결합되는데 현대과학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 안에서 파르메니데스의 불변을 탐색한다. (에밀 메이어슨[Emile Meyerson]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것은 물리학에서 미분방정식에 의하여 이룩된다.) 이 논문의 최종 제목으로 인하여 불변 탐색이 크세노파네스의 초기 관념들에 근거한 이해 이론에 의하여 대체되어 이로울 것임이 지적된다.

16세의 학생으로서 내가 처음 파르메니데스의 탁월한 시를 읽었을 때, 나는 달의 여신 셀레네(Selene: )와 헬리오스(Helios: 태양)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웠는데 그의 시에 의하여 나의 눈이 계몽되었다. 파르메니데스는 지구와 별이 빛나는 하늘의 시적(詩的) 아름다움에 나의 눈을 열어주었고, 새로운 탐구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도록 나를 가르쳤다: 셀레네 여신 자신이 그러는 바와 같이 셀레네의 열성적인 모습의 방향을 쫓아감에 의하여 지구 수평선 아래에 있는 헬리오스의 위치를 결정하려고 탐색하는 것을 나에게 가르쳤다. 파르메니데스의 발견을 내가 다시 발견한 것에 관하여 내가 말해준 나의 친구 누구도 이전에는 이것을 탐색하지 않아서 나는 그 친구들 몇 명이 나만큼 내가 다시 발견한 것을 좋아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가 발견한 것의 완전한 중요성을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약 70년 후의 일이였고, 그리하여 이로 인하여 나는 그 발견이 원래 발견자인 파르메니데스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 후 나는 파르메니데스의 세계에 대한, 그의 두 가지 길에 대한 이 발견의 중요성과, 과학사 특히 인식론과 이론물리학의 역사에서 이 발견의 중요성을 이해하여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언급된 바와 같이 이 논문들은 몇 가지 면에서 중첩되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관념들을 이해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반복적인 시도를 드러낸다. 반복적인 시도가 때때로 지나치다면 나는 독자들에게 사과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이 분야에서 전문가가 아니며 단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을 사랑하는 아마추어임을 그들이 알고도 논문들을 취합하여 편집하기로 결정한 데 대하여 나의 친구들 특히 아르네 F. 피터슨(Arne F. Petersen)에게 감사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논문들에 의하여 다른 모든 철학자들보다도 세 명의 우주론자들을 내가 사랑함이 밝혀진다: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그리고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R. 포퍼

켄리(Kenley), 1993227

 

 

 

 

 

 

 

약어

 

 

 

 

C. & R. 칼 포퍼, 추측과 논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 런던,

19635, 1989.

DK H. 딜스(H. Diels) W. 크란츠(W. Kranz),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글(Fragmente der Vorsokratiker),

10, 베를린, 1960.

L.d.F. 칼 포퍼,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 비엔나,

1934, 10, 1994.

L.Sc.D 칼 포퍼,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런던, 1959.

O.K. 칼 포퍼, 객관적 지식: 진화론적 접근(Objective

Knowledge: An Evolutionary Approach), 옥스퍼드,

1972, 2, 1979.

O.S.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6, 1권 및 2, 런던, 1969.

S.I.B. 칼 포퍼, 자아와 두뇌 ㅡ 상호작용론에 대한 논증(The Self

and Its Brain An Argument for Interactionism), 1

(2부는 존 에클스[John Eccles] 경이 저술), 베를린-

하이델베르크-뉴욕, 1977, 3, 1990.

 

 

 

서론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 발명과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우주론 쇠퇴

 

 

아마도 반박하는 듯한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를 유일한 예외로 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모든 진지한 사상가들은 신성하여 신()들만 접근할 수 있는 실재적 지식이자 확실한 진리(saphes, alētheia; 나중에는 epistēmē)지식(knowledge)과 인간이 소유할 수 있고 크세노파네스에 의하여 향상될 수 있는 추측으로 해석되는 견해(opinion: doxa)를 확실하게 구별했다.

이 견해에 대항했던 최초의 사람은 프로타고라스였던 듯하다. 그가 저술한 저서의 첫머리가 존재하는데 그곳에서 프로타고라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신()들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다 ㅡ 그들이 존재하는지도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지도 우리는 아는 바가 없다.’ 나는 그의 인간척도론(homo mensura) 제안이 ㅡ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ㅡ 이것으로부터 도출되고, 그의 논증이 다음과 같다고 제안한다: ‘()들에 대하여 우리는 아는 바가 없어서 그들이 아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은 우리의 기준으로, 우리의 척도로 수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론 제안은 그의 선배들이 단순히 인간의 견해인 것과 신()의 지식을 구분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지식을 우리의 표준이나 척도로 수용해야 한다.’

다른 사상가들도 유사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역사적으로 프로타고라스 후배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로타고라스처럼 고향이 압데라(Abdera)였던 데모크리토스(Democritus)가 있다; 데모크리토스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ertius)에 의하면, 프로타고라스의 스승이었지만, 더 믿을만한 역사적 근거들에 의하면 프로타고라스가 데모크리토스의 스승이었다. 프로타고라스가 파르메니데스의 합리주의에 저항한 경험주의자였을 개연성이 아주 크다. 이 요지는 현재 저서에서 여러 번 강조된다.

그러나 프로타고라스 이후 ㅡ 그러나 단지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ㅡ 주요 사상가 대부분은 오직 신()들만 지식을 지닌다는 파르메니데스와 그의 선배들의 관점을 계속 유지한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에게서 절대적으로 분명하다. 이것은 훨씬 더 독단적인 플라톤에게서 훨씬 더 분명한데 왜냐하면 플라톤의 독단주의가 주로 국가의 법률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 법률이 성문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그 법률이 엄격하고 철저히 변할 수 없어야 했다. 이제 우리가 자연과학으로 기술(記述)하는 분야에 관하여 플라톤은 자신이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기껏해야 진리와 유사할(truthlike)’뿐이고 진리가 아니라고 명시적으로 말한다 (예를 들어 티마이오스[Timaeus]와 다른 장소들에서): 그것은 기껏해야 진리와 유사하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개연적(probable)’로 해석되지만 우리는 수학적 의미에서 확률과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진리유사성(truthlikeness)을 구분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두 가지 개념을 혼용하는 전통과 결별한다; 그리고 우리가 수학자들이 확률에 의하여 의미하는 것을 바꾸기를 소망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특히 이론들에 대하여 진리유사성(truthlikeness)’ , 박진(迫眞: verisimilitude)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플라톤이 사용하는 단어는 실제로 유사한(similar)이고 때때로 그는 진리와 유사한(similar to truth)’이라고 말한다; 그 단어는 회화적(繪畵的) 유사성이나 닮음(pictorial similarity or likeness)과 또한 연결되어 이것이 정말로 그 의미의 뿌리가 되는 듯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이런 종류의 지식을 가질 수 있을 따름이다; 플라톤은 그런 지식을 견해(opinion)라고 부르지 않는데 견해라는 용어는 플라톤과 동시대인인 이소크라테스(Isocrates)가 자주 사용하여, 그는 우리가 견해를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결정적인 단절이 일어난다. 기묘하게도 아리토텔레스는 유신론자였지만 ㅡ 심지어 그는 일종의 신학을 지닌다 ㅡ 신적(神的) 지식과 인간적 추측을 구분하는 전통과 확실하게 결별한다. 그는 자신이 안다고 믿는다. 자기 자신이 증명될 수 있는 지식인 지식(epistēmē)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좋아하지 않는 주요 이유이다: 플라톤에게 과학적 가설인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증명될 수 있는 지식인 지식(epistēmē)이 된다. 그리고 서양의 인식론자 대부분에게 이것은 그 후 그렇게 남았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합당한 전통과 결별한다. 그는 자신이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증명될 수 있는 지식인 지식(epistēmē)에 관한 이론을 내놓으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영리한 사람이자 훌륭한 논리학자이기 때문에 증명될 수 있는 지식이 있다는 자신의 상정(想定)으로 인하여 자신이 무한회귀(an infinite regress)에 연루되는 것을 자신이 발견하는데 왜냐하면 증명된다면 이 지식은 다른 것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연역되어야 하는데 다른 것이 차례에 의하여 또한 증명된 지식이어야 해서 다른 것으로부터 차례에 의하여 연역되는 등 연역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 문제에 다다른다: 어떻게 이 무한회귀가 멈춰질 수 있을까? : 실재적인 원초적 전제들이 무엇이며 어떻게 우리는 그 전제들의 진리를 확신할 수 있는가? 그는 이 지식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실재적인 원초적 전제들이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의 진술들이라는 교설에 의하여 해결한다. 여기서 그는, 적어도 때때로, 일종의 기묘한 이중사고(double thinking)’이중 대화(double talk)’를 이용한다. 정의(定義)란 한편으로 규약에 의하여 단어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리하여 확실하다 (분석적[analytic],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 그러나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이 규약적이고 그리하여 확실하기만 하다면 모든 지식(epistēmē)은 규약에 따라 진리이고 그리하여 확실하다. 다시 말해서 모든 지식(epistēmē)은 우리의 정의들(定義: definitions)에서 연역되어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이다. 이 결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원하지 않아서 다른 한편으로 규약적이지 않아서 확실하지 않은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이 또한 존재한다고 그는 제안한다. 그러나 그는 그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본결과여서 종합적(synthetic)이라고 강조한다; 그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은 귀납의 결과이다.

이것이 귀납이 과학적 방법에 관한 이론인 인식론에 침투하는 방식이었던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귀납이 학생을 (또는 배우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학자를) 어느 장소로, 어떤 관점으로 이끄는 과정인데 그 장소나 관점으로부터 학생이나 학자 자신이 관심 대상의 본질을 볼 수 있다. 그다음 이 본질에 대한 기술(記述)을 그는 자신의 근본적 원리(archai)의 하나로서 정의(定義)에 의하여 규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 원리들이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이며, 동시에 이 원리들은 오직 규약적(規約的: conventional)이고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 정의들(定義: definitions)만 지닐 수 있는 확실한 진리가 된다 (내가 제안하는 바, 어떤 종류의 이중 대화에 의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 방법은 젊은이를 사회와 처음 대면시키는 일과 유사하다: 그 귀납 방법은, 젊은이가 어른의 삶이 지닌 본질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관점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귀납 실행은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을 풍요로운 지식의 근원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그러나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은 실제로 이런 것이 아니다: 지식성(informative) 정의들(定義: definitions)과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론은 ㅡ 우리가 사물의 본질적 속성인 본질, 본성을 보고 직관으로 이해하도록 유도되는 방식 ㅡ 또한 또 다른 의미에서 이중 대화이다: 그 귀납론은, 몇 가지 면에서 그 귀납론을 비판적으로 바라봄으로써 부분적으로 이룩되고 (소크라테스식 토론에서처럼), 그 귀납론의 많은 경우를, 많은 사례를 고찰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이룩된다. 후자 의미의 귀납으로 인하여 일종의 귀납적 3단논법이 발생한다. 전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플라톤은 죽는다; 심미아스(Simmias)는 죽는다; 기타 등등. 이 모든 이는 사람들이다. 결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는 바와 같이, 무효로 도달된): 모든 사람은 죽는다. 혹은 심지어 더 나아간 결론은 문제의 본질로 간다: 틀림없이 부패하여 죽는 것은 생성된 모든 것의 본성에 속한다.

방금 언급된 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귀납적 3단논법이 무효임을 완전히 확신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방식을 통하여, 언급된 사물의 본질을 직관하거나 그 직관의 도움을 받아서, 이 본질이나 몇 가지 본질적 속성을 기술(記述)하는 명제들에 도달하고, 이 명제들은 정의들(定義: definitions)로서 참되고 확실하여 지식(epistēmē), 증명된 과학적 지식의 궁극적 전제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그는 정말로 믿는다.

논리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이론을 도입했을 때 악한 지적(知的) 양심을 지니고 있었다고 나는 추측한다. 이 추측을 뒷받침하는 두 가지 논증이 있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그가 취했던 매우 객관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상한 방식으로 지식론에서 주관적이 된다: 사물을 아는 데서, 사물을 직관하는 데서 아는 사람과 그의 지식이 알려진 대상과 하나가 된다고 그가 가르친다; 그 가르침은 신비주의로서 공정하게 기술될 이론이다. 아는 것과 알려지는 것이 동일하다는 이론은 명백히, 하나의 주관론적 형태이어서 증명될 수 있거나 3단 논법적 지식이라는 객관론과 매우 다르다. 그러나 그 이론은 아무튼, 귀납이 매우 불안한 교량을 제공하는 단절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귀납을 창안했을 때 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는 다른 징표는 그가 자신의 창안품인 귀납을 모든 사람 중에서 소크라테스에게 투사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혹은 여하한 사람이) 그런 과정에 근거할 수 있는 지식(epistēmē)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할 사람이 전혀 아니었을 텐데 단지 왜냐하면 그는 항상 지식(epistēmē)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표현하는 바와 같이, 소크라테스는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ㅡ 더 직역하여 그가 말하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혹은 주장한다) 일지라도.

모든 사람 중에서 소크라테스에게 귀납법을 창안했다는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매우 이상하게 보인다. 동기는 아마도, 모든 사람 중에서 소크라테스가 귀납의 필요성을 보았다면 나쁜 논증의 결과로서일 수 없을 터라는 생각 , 무비판적 논증의 결과로서일 수 없을 터라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가지 난제를 극복해야 한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알지 못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했다는 것을 부인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그는 소크라테스의 무지 고백이 반어적 표현일 따름이라고 제안한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식 역설이다.) 다른 난제는 소크라테스식 방식을 ㅡ 반증을 통한 비판적 논박인 elenchus ㅡ 확실한 증명 방식으로 변환해야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논박으로써 시도하는 것은 자신들이 안다고 믿는 사람들의 무지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처음에 그들은 자신들이 한 주제에 (예를 들어, 미덕) 대하여 완전히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다음에 소크라테스는 경험적이어서 구체적인 사례의 ㅡ 반증의 ㅡ 도움을 받아서 그들이 완전히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들에게 증명한다. 이 방식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제 구체적 증거를 통한 본질 탐색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이 해석에 특정 합당성이 있을지라도 논박(elenchus)귀납적 증거(epagōgē)로 전환함으로써 소크라테스식 반어법을 이용할 필요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생긴다.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이 만들고, 말하자면 자신이 감히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발명품에 대하여 책임을 질 사람으로서 소크라테스를 선택하는지 이제 이해될 수 있다. 저것이 당시 상황이었던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에게 지식이 있음을 안다 (그래서 자신에게 지식이 있음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으로 인하여 역시 경험주의자였던 프로타고라스와 조금 유사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프로타고라스가 아마도 인정했던 것을 ㅡ 즉, 인간의 지식은 확실치 않다는 것 ㅡ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만물의 척도이고 우리가 실제로 실행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실행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지닌 지식을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 개선할 수 있으므로 우리가 인간의 지식을 모든 지식의 척도로서 수용해야 한다고 프로타고라스는 정말로 인정했을 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신뢰했던 방식으로 프로타고라스가 지식(epistēmē)을 신뢰했다는 말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단테(Dante)에 의하여 지식인의 거장(The master of all who know)’으로서 찬사를 받아 묘사된다. 나의 견해로 이것은 올바른 묘사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지식은 실제로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지식으로 인하여 찬사를 받아서는 안 된다. 크세노파네스와 소크라테스의 (그리고 자연과학의 문제를 그가 다루었다는 정도까지 플라톤 또한)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추측할 따름이다는 옳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심할 바 없이 위대한 과학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평가했지만 플라톤은 언급한 적이 없고 ㅡ 어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ㅡ 증오했다고 여겨지는 데모크리토스만큼 위대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러나 그는 두드러지게 학자이자 위대한 논리학자였는데 우리는 논리학의 발명에 대하여 그에게 감사할 수 있으며, 그는 또한 위대한 생물학자였다. 그의 이론이 모두 독단론으로 된 연구일지라도 그의 공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많다. 정말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초의 실재적인 독단주의자였다 ㅡ 심지어 플라톤도 정치적인 독단주의자였지만 인식론에서는 독단주의자가 아니었다.

과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이상(理想)은 본질들의 명칭들인 개념들로 가득 찬 다소 백과사전이라고 우리가 말할 것이다. 이 본질에 관하여 알려지는 것이 개념들을 정의(定義)하여, 개념들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과 개념들의 상호관계들로부터 우리가 개념들에 관한 모든 것을 연역할 수 있다. 이것이 귀납적 과정에 의하여 습득되는 자체의 모든 개념을 지닌 연역적 백과사전의 구조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논리적 연역인 3단 논법을 통하여 다른 모든 것을 도출할 수 있는 원리들(the archai).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논리적 추론 이론에 의하여 그리고 자신의 4원인 이론에 의하여, 즉 더 정확하게 그의 제3 원인에 (동적이거나 근접이거나 효율적 원인) 의하여 플라톤의 본질주의를 (예를 들어 미[]를 아름다운 대상의 원인으로 만든) 상당히 설명했다고 인정된다.

그렇지만, 과학인 지식(epistēmē)(증명될 수 있고 그러므로) 확실한 지식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으로 인하여 그리스의 비판적 합리주의라는 위대한 업적이 종말을 맞이했다고 언급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자신이 중요한 공헌을 했던 비판적 과학을 죽였다. 우주론에서 위대한 독창적 시도이자 자연에 관한 이론인 자연철학은, 증거(귀납적 증거를 포함하여) 요구하던 주로 그의 인식론의 영향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붕괴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것이, 인식론이 파르메니데스가 지칭했을 잘못된 방식인 귀납의 방식에 의하여 지배를 당하게 되는 방식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또한 역시, 귀납에 대한 반증을 포함하고 있는 이 논문들이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계몽에 관한 논문이라는 제목으로 수집되었는지의 주요 이유가 된다. 이 논문들은 주로 세 명의 위대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을 ㅡ 크세노파네스, 헤라클레이토스 그리고 파르메니데스 ㅡ 다루지만 또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토론하기도 하며 그리스 철학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창조적이던 기간으로부터 나중에 가르침을 받은 것과 아직도 가르침을 받을 것을 토론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독단적인 인식론에 의하여 종말을 맞았던 기간이며, 그 인식론으로부터 심지어 가장 현대적인 철학도 회복되지 못했다고 언급될 수 있는 기간.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