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메니데스의 시 두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가능한 수정에 관한 주석이 있는
부록*
거스리(Guthrie)는 자신의 탁월한 저서 그리스 철학사(History of Greek Philosophy), 1965년 2권, 4쪽에서 ‘파르메니데스를 해석하는’ 핵심적 문제를 완전히 다르게 본다: 여신(女神)은 1부가 명백하게 참임을 주장하는 반면 2부에 대해서는 ‘참된 믿음이 아님’ 혹은 ‘참된 확실성이 아님’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2부를 망상의, 즉 인간의 추측이나 견해의 세상이라기보다는 현상의 세상을 기술하는 것으로서 간주하는 일이 여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원문은 2부의 불확실하고 가설적인 특징보다 더 많은 것을 주장한다: 그 원문은 (거스리 자신이 말하는 바와 같이) ‘명백하게’ 2부의 의견들(doxαι)이 거짓이고 심지어 기만적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요점이 있다’ (거스리): 왜 여신은 조금이라도 고생하여 탁월하지만 분명히 거짓이고 심지어 ‘기만적인’ 이론들을 보고해야 할까? 이것이 거스리에 따르면 ‘핵심적인 문제’이다; 세 가지 문제에 대하여 내가 작성한 목록에서 그것이 나의 세 번째 문제에 대응한다.
그러나 이 유명한 요점이 단 한 가지 단어에만 달려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아마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B8: 52에 있는 αραtēlon(‘기만적인’ 혹은 ‘속이는’)이라는 단어. 우리가 지닌 원문에, 2부의 세계인 인간 견해의 길이 불확실하고 증명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고 아마도 참인 추측들의 세계인 파르메니데스 자신의 발견과 추측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견해와 일치하여 해석될 수 없는 다른 단어는 없다.
그러므로 이 한 단어 αραtēlon이 다르게 해석될 수 있거나 또 다른 단어에 의하여 대체될 수 있다면, 두 가지 세계의 관계는 위에서 해석되는 방식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을 터이다: 그 단어로 인하여 내가 ‘전통적 방식’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원문이 실재와 현상에 대한 해석에 좌지우지되고, 정말로 칸트와 매우 유사하게 될 터이다.
*나의 조수 멜리타(melitta)와 그녀의 남편 레이먼드 뮤(Raymond Mew)에게 헌정됨. 나는 나의 친구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와 이레느 파파다키(Irene Papadaki)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데 그들은 이 부록의 주석에서 제기된 제안들을 나와 토론했다.
이제 나는 그 단어가 매우 유사한 단어인 αραtēton에 의하여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αραtēton은 αραtēlon과 한 글자만 차이가 난다 (그리고 아무튼 파르메니데스의 시대에 사용되지 않던 강세들로 차이가 난다). αραtēton이라는 단어는 ‘밟히지 않은’이나 ‘매우 새로운’, ‘특이한’이나 ‘지금까지 사용되지 않은’을 의미하여, 간접적으로 자신의 추측성 이론이 새로운 것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이 될 수 있을 터이다. 이것은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Morαliα)에서 나온 구절과 (위에 인용됨) 일치하여 나의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버넷(Burnet)의 (지나치게 만족스럽지 않은) 입장을 완벽하게 파괴할 터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스리의 문제를 해결할 터이다. 그것은 나의 첫 번째 핵심적 문제 및 그 문제의 해결책과 일관적이 되도록 만들어질 수 있을 터지만 나의 두 번째 문제를 죽일 터이고 그와 동시에 첫 번째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의 관심을 조금 죽일 터이다.
다른 한편 나의 두 가지 핵심적 문제와 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인하여 제시된 수정이 불필요하게 된다. 어느 경우에도 우리는 심플리키오스(Simplicius)와 의견을 같이할 수 있는데 그는 1부를 ‘이해가능한 세계에 대한 설명으로서’ 그리고 2부를 ‘감각될 수 있는 것에 대한 기술로서’ 간주한다; 버넷이 수용될 수 없는 ‘시대착오’로서 비난하는 견해이다.
주해
다음은 ἀπατηλὸν(‘속이는’)을 ἀπάτητον(‘밟히지 않은’이나 ‘매우 새로운’ 또는 ‘지금까지 사용되지 않는’이나 ‘특이한’: ‘미증유의’)으로 수정되도록 제의한 것을 선호하는 여섯 가지 논증이다.
(1) 제의된 단어는 데모크리토스 B131에 등장한다. (그 단어의 의미는, 여기서
요구되는 바와 같이, 정말로 그에 의하여 혹은 헤시키오스(Hesychius)에
의하여 설명된다: 아래 (6) 참조.)
(2) 유사한 용법이 파르메니데스 B1: 27 (ἀνθρὠπων ἐκτὀς πἀτοu)에서
발견된다.
(3) 밟힌이나 밟히지 않는 통로나 길이라는 은유는 항상 파르메니데스의 생각
속에 있어서 여기 (2)에서 인용된 바와 같이 πἀτος는 그에 의하여 ὁδὀς와
ㅡ 파르메니데스의 알려진 단편 글들에서 매우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들 중
한 단어 ㅡ 동의어로 사용된다.
(4) 그러므로 그 개념은 (ἁ-πἀτητος) 그의 생각에 존재했고, 그 단어에 대한 데모크리토스의 용법을 (그리고 설명을) 고려하여 파르메니데스가 또한
그 단어를 알고 있었다고 우리가 상정(想定)할 수 있다. (정말로 그는
그 단어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5) 제시된 수정은 원문과 매우 잘 맞아떨어진다; 그 수정은 때때로 여신의 다소 뽐내는 문체에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파르메니데스가 독자들에게
자신의 경험적 가설을 설명하고 싶어 했다고 우리가 상정(想定)할 것이다: 달의 구형(球形) 형체와 태양으로부터 받는 조명을; 아마도 지구의 구형
(球形) 형체를; 그리고 ㅡ DK 28B10에 인용된 플루타르코스의 칭찬을
고려하여 ㅡ 훨씬 더 많은 것을; 아마도 또한 항성(恒星)들의 배후에서
행성들이 그리는 궤적들이 (혹은 ‘고리’나 ‘테’) 서로 ‘가로지르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어 했다고 우리가 상정(想定)할 것이다. 그렇다면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자신의 발견에 대하여
진기함을 주장하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렇게 주장하기에
분명하고도 적합한 장소이다. (그 주장은 B1: 31이하에 미리 언급된다.)
(6) 필사하는 사람의 오류는 ㅡ 만약 조금이라도 있다면 ㅡ 다음과 같이
발생했을 것이다. 강세가 (우리가 상정하는) 없어서, 필사하는 사람은
απατητον을 마지막 음절에 강세를 두어 읽었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그 단어를 ἀπατητικὀν이나 ἀπατηλὁν과 (‘기만적인’, ‘속이는’) 동일한
의미로 해석하고 그리하여 그는 그 단어가 ἀπατηλὀν으로 수정되는
것이 틀림없이 낫다고 상정(想定)하였을 것이다. 이유인즉
ἀπἀτητον이라는 단어가 (그리고 심지어 πατητὀν도) 드물게 사용되는
듯한데 그것이 사전편찬가인 헤시키오스(Hesychius)가 (그리고 아마도
데모크리토스 자신도) 그 의미를 설명하는 이유였을 것이다: 필사하는
사람은 그 단어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들이 제시된 수정을 뒷받침하는 나는 논증들이다.
나는 아마도 다소 낭만적인 사념을 덧보탤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글 2부에 비교적 흥미가 부족한 것은 ἀπατηλὁν이라는 단어에 기인할 것이다; 이유인즉 여신의 말이 기만적이고 속이는 것으로 인정된다면 왜 그녀가 이 부분에서 말하는 것으로 걱정해야 하는가? 필사하면서 생긴 오류는 (만약 조금이라도 있다면) 틀림없이 매우 일찍 저질러졌다. 그것을 (레우키포스[Leucippus]를 통하여 아테네나 사모스[Samos]에서 구할 수 있던 원문들보다 나은 원문을 아마도 받았을) 데모크리토스가 비평했고, 헤시키오스의 인용은 이 비평의 결과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다.
여기에 제시된 수정은 한 가지 어설픈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안된 반면, 1부와 2부의 내용을 심지어 건드리지도 않는다. 나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을 우주론자들로 간주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파르메니데스의 시 두 개 부분 모두를 우주론적 문제, 무엇보다도 변화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로서 해석한다. 1부는 변화의 궁극적 실재를 부인한다. 2부는 플라톤의 동굴과 유사한, 텔레비전 이전의 시대에 아이들이 장난하던 그림자놀이로서 우주론적 변화를 기술한다: 변하지 않는 실재의 3차원 덩어리 위에서 ‘빛’과 ‘밤(night)’의 놀이. 그것은 사람들이 현상의 세계를, 비실재적인 차고 기우는 세계를, 탄생과 죽음의 세계를 어떻게 그리고 왜 수용했는지에 대한 설명의 형태로, 최고라고 주장되는 (B1: 31이하) 추측성 우주론을 담고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시에 영감을 불어넣은 최초의 발견이, 변하지 않는 3차원 구형(球形) 위에서 단지 현상들로서, 비실재적으로서 그림자놀이에 ㅡ ‘빛과 밤’ ㅡ 기인하는 것으로서 달이 차고 기우는 것에 대한 (그리고 아마도 또한 달의 월식에 대한) 그의 설명적 이론이었음을 이 해석이 암시한다; 2부가 모든 변화까지 일반화하는 발견. 그리하여 2부 없이 1부에 대한 합당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이유인즉 2부가 출현하여서 궁극적 실재의 존재가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빛과 밤’의 연출을 위한 변하지 않는 영사막으로서 그리고 현상들에 (변하거나 변화될 수 있는) 대한 설명적 퇴행의 궁극적 한계로서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이 실재가 오직 ‘이성에 의하여’ 혹은 ‘논증에 의하여’, 감지나 현상들의 도움을 배제하고 확보되어야 했음은 분명하다; 심지어 이제 변하지 않는, 차거나 기우는 것도 아닌 ㅡ 그러나 움직이고 그러므로 진실로 실재적이지 않은 ㅡ 매우 둥근 구형(球形)으로서 이제 확립된 달의 현상들의 도움도 없이.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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