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메니데스의 반(反)-감각주의
달이 차고 기운다는 망상에 대한 설명은 무엇인가? 분명히 변하는 빛이다 (태양으로부터 오는):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은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문자 그대로 그림자 장난이다 ㅡ 구형(球形) 몸체 위에서 빛과 밤이 노니는 것! (이것은 위 2절의 초입에 언급된 모형에 의하여 작은 규모로 또한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빛은 비-물체이다: 빛은 물체가 아니다; 그리고 오직 물체만 존재할 수 있다: 비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물체만이 합당하게 이름을 지닐 수 있다: 비물체는 이름이 주어지지 말아야 했고 동시에 실재로서 인정되지 말아야 했다. 달 같은 것만이, 어두운 물질인 달만이 자체가 받는 조명과 별도로 물체이다 (정말로 밀집되고 무거운 몸체): 조명을 받은 물체라기보다는 물체 그 자체; 그러나 우리가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인간은 이 비실재적인 비물체인 빛에 이름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실재보다 선호하는데 아마도 그 이유가 빛이 인간의 감각 하나를 매혹하여 시각에 아첨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각은 빛이 없으면 보지 못한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가 경고하는바, 당신의 감각을 경계하고 오직 당신의 이성만을 신뢰하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검은 달과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에 관하여 당신에게 알려주는 것은 이성이다!
그래서 움직임이라는 망상은 시각의 망상인데 까닭은 이름을 받지 말았어야 하는 빛이라고 지칭되는 비물체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인간이 위대한 망상의 희생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 망상적 세계인 존재하지 않는 변화와 움직임의 세계가, 자신들의 감각기관을 신뢰하는 인간에 의하여 신뢰받았던 이유이다.
이것은 1부에서 2부로 이전하는 표면적으로 유일한 언어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고, 이 난해한 구절에 (DK 28B8: 53-9) 대한 해석이다. 내가 보기에 적어도 여기에 원문과 관련된 문제는 남아있지 않다.
VI
이제 나는 첫 번째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요약하겠다. 실재적인 것은 아주 둥글고 무거우며 밀집하고 변하지 않는 덩어리 우주인데 그 우주는 아주 둥글고 무거우며 변하지 않는 달을 일반화한 것이다. 변화하는 우주라는 망상은, 달이 차고 기운다는 망상처럼, 비실재적인 그림자 장난질을 낳는 빛의 (비물체) 결과이다. 이 모든 것은 확립될 수 있지만 오직 이성과 (반)증거의 방법에 의해서 확립된다. 이것이 먼저 확립되어야 한다. 이것이 확립되자마자 우리는 심지어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인간이 자신들의 감각들을 ㅡ 특히 시각을 ㅡ 신뢰할 정도로 그리고 심지어 망상을 유발하는 감각을 사고(思考)로서 오해할 (DK 28B16) 정도로 충분히 어리석기 때문에 인간이 신뢰하는 존재하지 않는 망상적 세상을 기술(記述)할 수 있고 반면 오직 추론만이 실재적 사고 다시 말해서 실재에 대한 사고이다.
위의 마지막 언급으로 인하여 우리는 표면적으로 원문과 관련된 또 다른 문제만을 해결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단편 글 B16의 문제인데 (나의 의견으로) 항상 오역되었다; 사실상 심지어 최근 번역 중 한 가지도 내가 보기에 완전히 터무니없다. 예를 들어 커크(Kirk), 레이븐(Raven) 및 스코필드(Schofield)는 (1983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어느 순간에도 방황하는 사지(四肢)의 혼합물이 그러하듯,
그렇게 정신도 인간에게 존재한다; 이유인즉 생각하는 것은 동일하기
때문인데, 즉 모든 사람 각자에게 그들이 지닌 사지(四肢)의 본질이다;
이유인즉 우세한 것은 사고(思考)이기 때문이다.
As is at any moment the mixture of the wandering limbs,
so mind is present to men; for that which thinks is the
same thing, namely the substance of their limbs, in each
and all men; for what preponderates is thought.
이 번역은 고전학자가 아닌 누구에게나 이해불가능해서 나는 우려한다. 나의 운문 번역은 (유사 6음각으로 된) 이제, 1963년 이래 다소 손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다:
한때 실수를 많이 저지르는 감각기관의 혼합물 안에 있는 것이,
인간에게 참된 지식으로 보인다. 이유인즉 사람들이 인간의
지성적 정신과 인간이 지닌 감각기관의 변화하는 본성을 동일한
것으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각자와 모든 사람에게서, 사람들은
이 혼동 속에서 득세하는 것을 ‘사고(思考)’라고 부른다.
What is, at any one time, in the much-erring sense organs'
mixture,
That seems genuine knowledge to men. For they take as the
same thing
Man's intellectual mind, and his sense organs' varying nature.
'Thought' they call what in this muddle prevails, in each man
and all.
이것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감각이 낳는 망상과 인간이 합리적 사고를 평가절하하는 데 대한 전형적인 파르메니데스의 공격이다. 이해하기가 아주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이것은 그리스어 원전과 같다고 (그리스어 원전보다 더 난해하지는 않을지라도) 인정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두 번 읽으면 의미가 통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여신의 요지와 완벽하게 맞아 들어간다: 그것은 ‘이전에 우리의 감각에 들지 않았던 어떤 것도 우리의 지성에 들지 않는다’는 경험론적 원칙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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