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의 세상과 현상의 세상
여신(女神)이 밝히는 실재의 세상인 진리의 길과 인간이 보는 현상의 세상인 견해의 길 사이의 불일치는 파르메니데스의 선배들의 전통이었다고 인정된다. 확실한 진리이자 신(神)들만이 (그리고 신들이 계시하는 사람들) 습득할 수 있는 진리와 죽을 운명인 인간이 습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 견해와 추측에 지나지 않은 것에 대한 그 선배들의 구분이 그 불일치에 의하여 그 선배들의 전통에서 계속되는 한 그 선배들의 전통이었다고 인정된다. 게다가 파르메니데스의 선배들은, 특이한 것을 (천둥 및 번개; 혹은 바다에서 특이하게 높은 파도; 혹은 특이한 인간의 행태; 혹은 사랑의 힘; 혹은 행성들의 특이한 움직임 같은 것들)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나타나는 평범한 세상 뒤에 있는 세상을 (신들과 악마들의 세상) 창안했다고 우리가 아마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파르메니데스가 자신이 주장하는 두 가지 세상인 실재의 세상과 현상의 세상을 대립시킴에 의하여 완전히 가려졌다. 이유인즉 (i) 실재의 세상은 (물론) 참된 세상인 반면, 현상의 세상은 철저히 거짓이기 때문이다: 현상의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비-물질이고, 기껏해야 그림자놀이이다. (ii) 실재의 세상에 속하는 어떤 것도 (다시 말해서, 1부 (b)) 현상의 세상에서 설명이 아마도 필요할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또한 현상의 세상은 철저히 거짓이고 철저히 망상적이기 때문에, 그런 설명에 의하여 현상의 세상이 지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터이다. (흥미로운 유일한 설명은 어떻게 그런 망상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로 1부 (a)에서 설명된다: 그런 망상은 전적으로 이성에 의존하는 대신 우리가 감각 경험을 신뢰함으로부터 발생한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감각 경험은 자기-부정을 낳는다.)
이 두 가지 요점 (i)과 (ii) 각각으로 인하여 두 가지 ‘세상’ 사이에 메울 수 없는 심연이 열린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칸트의 철학을 제외하고 유사한 것을 포함하는 다른 철학을 알지 못한다: 칸트 또한 완벽하게 알 수 없는 본질적인 물체의 세상인 실재의 세상 및 우리에게, 우리의 감각과 동시에 우리의 이성에게 나타나는 바와 같은 물체의 세상인 현상의 세상을 안다. 칸트가 아는 본질적 물체의 세상은, 칸트가 주장하는 실재의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든 현상의 세상에서 설명되지 않는 사건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작동하는 않는 한, 파르메니데스가 주장하는 실재의 세상과 닮았다. 그러나 칸트와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체계의 차이점은 매우 크다. 칸트에게 현상의 세상은 또한 실재성을 지닌다: 칸트에게 현상의 세상은 자연과학이 참인 기술에 의하여 기술하려고 시도하는 것이고 참인 이론들을 통하여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반면 실재의 ㅡ 본질적인 물체의 ㅡ 세상은 우리로부터 숨겨져서 그리하여 ㅡ 우리에게 ㅡ 단지 그림자 세상과 같은 것으로서 영원히 알려질 수 없다.
이원론적인 세상 체계로 된, 나에게 알려진 모든 다른 (서양) 철학 특히 파르메니데스 이후의 철학은 파르메니데스의 영향을 받아서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체계에서 메울 수 없었던 격차를 메우려고 시도했다: 그 철학 모두는, 실재의 세상이 우리 인간이 지닌 현상의 세상을 설명하는 기능을 지닌 이론체계에 의지했다. (나는 이 방법론을 ‘전통적 방식’이라고 부르겠다.) 이것은 원자론자들에게 매우 분명하게 성립하며 심지어 플라톤이 주장하는 이데아의 세상에도 성립한다; 1부에 기술된 파르메니데스의 실재적 세상처럼 실재적이며 참된 동시에 변하지 않는 이데아. 이 ‘전통적 철학’에서 이데아들은 우리가 살다가 죽는 덜 실재적이고 덜 참된 현상의 세상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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