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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의 새로운 지식론

이윤진이카루스 2024. 11. 24.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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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르메니데스의 새로운 지식론

 

지식의 문제는 무엇이며 그 문제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그 문제는 항상 의심으로부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불확실성으로부터 발생한다: 이 주장들의 근거가 충분히 확립된 것이 아니라는, 그 주장들이 불충분한 이유들에 근거한다는 깨달음으로부터 발생한다. 그 문제는 비판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특히 지식에 대하여 상반되고 경쟁하는 주장이 많이 있을 때 발생한다. 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상반되는 이야기들은 충돌의 의식 없이 이집트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비판적인 정신을 지닌 그리스 우주론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우주 이론가들의 상반되고 통상적으로 독단적인 많은 주장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야기했다: 이 상반되는 이야기들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어느 이야기를 우리는 선호해야 하는가?

헤라클레이토스가 이 지식의 문제에 관여했다는 징표가 있다. 결정적인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권위를 지닌 개인적인 특성이라고 그가 주장했던 듯하다: 사람들 대부분은 마치 자신들이 잠을 자는 것처럼행동할 뿐 아니라 생각하고도 있는 반면, 오직 신()들만이, 그리고 신 다음에 최고의 인간만이 ㅡ 선택된 사람들(the elite) ㅡ 진짜 지식이나 지혜와 같은 것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듯하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 이전에 가장 중요한 지식론자는 크세노파네스(Xenophanes)였다. 크세노파네스는 대중적인 신학에 의문을 (헤라클레이토스가 의문을 표시한) 표시했다. 크세노파네스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들을 자신들의 모습으로 창조한다고 지적했다; 사람들이 신()들을 인간으로 변형시킨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일신론적 이론을 발전시켰다: 하나의 신을 인간 및 전통적인 신들과 전혀 다른 독특한 존재로서 ㅡ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사용하면 일종의 움직이지 않는 동력자로서 ㅡ 기술하려는 시도를 발전시켰다. 동시에 우리가 신들에 대한 확실성 및 세계에 대한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과 우리가 지닌 지식 모두가, 그 자신의 지식을 포함하여, 추측으로 남는다고 그는 또한 지적했다. 이 요점을 추적하기 위하여 아마도 크세노파네스의 시 몇 행을 내가 번역한 것을 나는 반복할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진리에 관해서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들에 관하여서도 그렇고

내가 말하는 모든 것에 관해서 그렇다.

그리고 우연히 사람이 최종적인 진리를 발설할지라도

그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유인즉 모든 것은 추측으로 짜인 그물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But as for certain truth, no man has known it,

Nor will he know it; neither of the gods,

Nor yet of all the things of which I speak.

And even if by chance he were to utter

The final truth, he would himself not know it:

For all is but a woven web of guesses.

 

내가 여기서 추측(guesses)’으로 번역한 단어는 dokos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파르메니데스가 쓰는 용어 doxa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doxa라는 용어는 통상적으로 견해로 번역되고, 심지어 파르메니데스의 시에서도 추측이나 추측 작품으로서 번역될 개연성이 높다.

크세노파네스로부터 인용된 운문은, 우리의 주제에 관해서뿐 아니라 철학사 전체에 관해서도 커다란 중요성을 띤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운문을 높이 평가하는데 이유인즉 내가 그 운문에서 나 자신의 지식론에 대한 일종의 선례를 보기 때문이고, 그 선례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과학적 이론은 신화, 크세노파네스의 말로써, ‘추측으로 짜인 그물이다. 과학적 이론은, 비록 비판의 영향을 받아서 시간이 지나면 점점 진리와 같아질지라도, 본질적으로 불확실하거나 가설적으로 남는다고 나는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미지의 것에 ㅡ 숨겨진 실재에 ㅡ 점점 더 낫게 근접할지라도. 그러나 심지어 이 견해도 크세노파네스가 선례를 남겼는데 크세노파네스는 다음 운문 때문에 기억된다:

 

()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우리에게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탐구를 통하여

우리는 배워서 사물을 더 잘 알 것이다.

 

The gods did not reveal, from the beginning,

All things to us; but in the course of time,

Through seeking we may learn, and know things better.

 

이제 진리의 길에서 파르메니데스의 가르침이 완벽하고 확실한 진리의 (크세노파네스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서 간주했던) 신적(神的) 계시 형태를 띰을 고려하면 파르메니데스가 여러 가지 면에서 고도로 비판적일지라도 때때로 독단론으로 틀림없이 기울었던 듯하다. 아마도 심지어 그가 당초에 크세노파네스보다 자기비판으로 덜 기울었다고 우리가 상상할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견해의 길에 상당히 참신한 우주론과 우주기원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견해와 이 상상을 우리가 결합한다면 파르메니데스가 처음에 견해의 길이라는 우주론과 우주기원론을 구축하여 수용하였다가 나중에서야 그것을 의심하게 되어서 마침내 그것을 망상적이고 기만적인 것으로서 배격했을 개연성이 있는 듯하다. 그의 의심으로 인하여 그는 우주론에서 지식론에 도달하였다고 우리가 상상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우주론이 단지 망상적 견해나 추측(doxa)이라고 확신하게 되어서 그는 진리의 길 즉, 진정한 지식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참되고 확실한 지식에 이르는 이 길은 궁극적으로 여신에 의하여 그에게 계시된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이렇다: 지식의 길 탐구에 의하여 어떻게 파르메니데스가 자신이 주장하는 움직임이 없는 덩어리 우주라는 기묘한 이론에 이르렀는가?

그가 걸어간 주요 단계를 우리가 재구축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파르메니데스의 첫 번째 단계는, 이 재구축에 따라서, 진정한 지식과 단지 추측이나 견해에 지나지 않는 것을 구분하여 진정한 지식은 단순한 견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에 도달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진정한 지식에 무엇이 필수적인가라는 의문이 발생한다. 답변은 진정한 지식이란 참된 것에 대한 지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지식은 참된 믿음이다. 그러나 진정한 지식은 그 이상의 것이다: 진정한 지식은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으며, 흔들릴 수 없고 정당화될 수 있는 신념인데,참된 신념이 {정당화될 수 있고 확실한} 전혀 없는 인간이 지닌 견해{불확실하고 흔들릴 수 있는} 반대가 된다. 우연히 진리와 조우할지라도 우리는 지식을 말하지 않는다. 이 경우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단지 추측하고 있다고 (정말로 크세노파네스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의 주장을 옹호하여 충분한 이유유효한 논증을 충분하게 내놓을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우리는 지식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주장이 논증에 의하여, 이성에 의하여 정당화되거증명될 수 있다조건으로만 우리가 지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지식은, 전적으로 신뢰될 수 있고 정말로 확실해야 하는데, 확실한 전제로부터 추론에 의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이것은 파르메니데스의 두 번째 단계로 그가 진리를 증명 가능한 진리와 동일시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것에서 그는 현대적 직관주의[直觀主義: intuitionism]의 선례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고 진리와 조우할 것이라고 가르쳤던 크세노파네스로부터 그는 이탈한다.)

그러므로 세 번째 단계는 증명 가능한 진리에 대한 합리적 지식과, 우리의 감각을 통하여 습득된 기만적인 사이비-지식과 같은 소위 모든 다른 지식을 예리하게 분리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파르메니데스의 지성주의(知性主義: intellectualism) , 합리주의(合理主義: rationalism)가 확립되고 그는 경험을 거부하게 된다. 경험은 단순히 견해나 습관만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거부된다: 참이 아닌 사이비-지식만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거부된다. 경험과 습관 및 견해는 확실하증명 가능한 진리를 결코 낳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참이 아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지식에 대한 요건은 합리적 방법, 논리적 방법, 증명의 방법에 대한 요건이 된다. 파르메니데스는 전환의, 계시의 특징을 지닌 단계에 의하여 합리적 방법을 이렇게 요구하는 데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여신이 파르메니데스에게 주었던 시 몇 행을 번역하겠다; 여신이 파르메니데스에게 경험과 감각을 믿지 말라고 말하는 시: 눈과 귀와 혀라는 감각을 믿지 말라고 말하는 시; 그리고 여신이 이성을 예찬하는 시.

 

... 경험인 많이 시험된 습관으로 하여금 너를 옥죄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너의 먼 눈이나 막힌 귀나 심지어 너의 혀가 이 길을 따라

방황하지 않도록 하라! 그러나 오직 이성에 의하여 내가 여기서

너에게 반증으로서 설명한 흔히 논쟁되는 논증을 결정하라.

 

... don't let experience,

Much-tried habit, constrain you; and do not let wander your

blinded

Eye, or your deafened ear, or even your tongue, along this way!

But by reason alone decide on the often-contested argument

Which I have here expounded to you as disproof.

 

다음 단계는, 사태가 실재적인 사실이라는 조건으로만 그 사태가 진실로 존재한다면 우리가 사태를 수 있다는 칸(Kahn)에 의하여 해설된 논지를 낳는다. 또는, 파르메니데스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이유인즉 알려질 수 있는 것은, 존재하는 중일 수 있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For, what can be known is the same as what can be existing.

 

그리하여 자체의 본질에서 진정한 지식이란 반드시 항상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이라고 파르메니데스는 주장한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다; 참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이라고 파르메니데스는 주장한다고.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에 도달한다: 알려질 수 있어서 틀림없이 반드시 존재하는 이 물체에 대하여 우리는 이성에 의하여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는가?

물론 파르메니데스가 실제로 말한 것을 발견하여 원문을 재구성하여 이해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그가 도달한 명백한 결론으로부터, 그가 자신의 주요 단계들에 관하여 내놓는 몇 가지 암시로부터 그의 주요 논증을 재구축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진리의 길에 있는 연역적 증거가, ‘그것(It)’이 알려질 수 있는 물체로 아마도 유형적(有形的) 물체인 그것은 이다(It is)’그것이 사례다(It is the case)’ 혹은 그것은 존재한다(It exists)’와 같은 관념으로 시작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그리고 이다(is)’존재하다(exists)’, 결론에 비추어, 유형성(有形性)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명된다. 파르메니데스의 연역적 증거는 항진명제(恒眞命題: tautology)나 분석적 명제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서 재구축될 것이다 (논리 속의 증거가 그러해야 하는 바와 같이). 재구축은 다음과 같다.

 

전제: 오직 참으로 사례인 것만이 (알려지는 것과 같이) 사례가 될 수 있으며,

참으로 존재할 수 있다.

첫 번째 결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두 번째 결론: ()나 공간은 존재할 수 없다.

세 번째 결론: 세계는 가득 차 있다: 세계는 분리가 없는 연속적인

덩어리이다.

네 번째 결론: 세계는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움직임이 불가능하다.

 

이런 방식으로 여신의 우주론인 덩어리 우주 이론이 그녀의 진정한 지식론으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된다.

여기서 내가 오류로 간주하는 파르메니데스의 지식론 중에서 두 가지 교설을 내가 아마도 언급할 것이다. 그 교설들은, 두 가지 교설 모두가 그의 논증에서 한 가지 역할을 정말로 수행하고 플라톤의 철학에서 훨씬 더 큰 역할을 수행할지라도, 그의 논증에 필수적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첫 번째 교설은 그가 진리를 확실하고도 증명 가능한 진리와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지식(epistēmē)과 그리고 브로우어[Brouwer]의 진리 개념과 동일한 듯하다.) 내 견해로 이것은 크세노파네스(Xenophanes)가 도달한 입장로부터의 퇴행인데 크세노파네스는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도 우연히 진리와 조우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내가 오류로서 간주하는 두 번째 교설은, 참이고 불변하는 실재에 진정한 지식이 대응한다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변화하는 현상들에 추측이나 견해가 대응한다는 교설이다. (이 교설은 파르메니데스에게서보다 플라톤에게서 더 명시적이다.) 반대로 우리는 현상 뒤에 있는 참인 실재를 추측(doxa)의 ㅡ 상상이나 가설의 (예를 들어 플라톤이 티마이오스[Timaeus]에서 실행하는 바와 같이) ㅡ 방법과 비판의 방법에 의하여 접근하려고 시도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추측과 논박의 방법에 의하여.

처음에 보기에 움직임이 없는 덩어리라는 이론은 정말로 거의 미친 이론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 이론이 물리학의 진보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는 것을 강조할 가치가 있다.

ㅡ 칼 포퍼 저, 아르네 피터슨 편집,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2007, 115-119쪽 ㅡ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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