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박정희
찢어지게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굶주리고 살며 학교 다녔던 박정희
일제 때 대구사범학교 졸업
소학교 교사로 아이들 가르치다가
출세하겠다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본육사
역시 우등으로 졸업하는데 그의 근저에
설움 있었을까, 욕망 도사리고 있었을까?
만주군 장교로 일제 항복하자
일본군 출신이 득실대던 신생 한국군 소령으로
이유가 불명한 남로당 군사부장 되는데
같은 만주군 출신 백선엽의 증언에 의하면
육군 정보부대에 걸려 사형선고 받고
10여 일 후면 수색에 있는 군부대에서
총살당할 운명 맞이하는데 수갑 차고
정보부대장 백선엽에게 면담 신청하여
눈가에 물기 담고 한 번 살려주십시오
의연(毅然)하고도 처연(悽然)하게 말하자
백선엽 자기도 모르게 그럽시다,
그렇게 해보도록 하지요 대답했단다.
사전을 찾아 의연과 처연의 뜻 물으니
의연은 의지가 굳은 강기(剛氣)이고
처연은 애달프고 슬프다는 의미여서
가난이라는 운명 이기고자 발버둥 치며
혼돈의 시대 살았던 인간
총살형으로 일생 마감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살고 싶은 욕망 내뱉는 모습
슬픔이었을까 애걸이었을까 강기였을까,
모두 합쳐진 복잡한 인간 모습이었을까?
군사쿠데타로 정권 잡자
미국 박정희의 과거 의심하고
일본 얼씨구 좋다 환영했는데
한국전쟁으로 엄청 부자가 된
일본에게 손 벌려 차관 얻어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만들어
민족중흥 기치 새마을 만들어
하면 된다 군인정신으로
국민 몰아 수출 드라이브 걸었다.
2차대전 후 미국의 최대 관심사
소련과 중공의 공산 세력 확산
막는 것이어서 유럽에서는 서독
동아시아에서 일본과 한국 중심인데
공산주의 가난한 국가에 만연하니
수출품 마구 받아들여 부자 국가로
만들었는데 라인강의 기적
한강의 기적이라면 배경 무엇이고
당시 미국의 영향 받았던 국가 모두
번창했는데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만 예외였고 스페인어 쓰는
중남미 모두 마약 폭력에 쩔었다.
한국 먹고 살게 되니 박정희
우상 되어 높이 올라갔는데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단다.
영국 역사가 액튼 경의 통찰
모든 권력 부패한다,
절대 권력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다시 증명되었고
서방세계
더 이상 가부장적이 아니고
아버지 없는 fatherless 사회.
그 시절 기억한다
고문과 폭력 난무하고
모든 국민 눈치보며
국기 하강식에 가던 길 멈추고
가슴에 손 얹고 국기 바라봤던
파시즘 국가의 모습에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애향단
군인처럼 줄지어 등하교
남북이 서로 닮은 모습,
남북 모두 집권자에게
반항조차 불가능한 독재!
인간 박정희의 서글픈 역사
한민족의 한 많은 역사!
후기:
폭군살해가 용인될 수 있음을 가르쳤던 몇몇 중세 및 르네상스 기독교 사상가들과 함께, 독재정치 하에서 정말로 다른 가능성이 없을 것이고, 폭력적 혁명이 정당화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그런 혁명이 민주주의 확립을 자체의 유일한 목표로서 삼아야한다고 또한 나는 믿는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의하여 나는 ‘국민의 통치’나 ‘다수의 지배’처럼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라, 피통치자가 통치자를 통제하고 해임할 수 있고, 피통치자들이 심지어 통치자의 의지에 반하여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개혁을 이룩할 수 있는 제도들의 집합을 (그 제도들 가운데는 특히 총선거, 다시 말해서 자신의 정부를 해임할 국민들의 권리가 있다)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폭력사용은 폭력 없이는 개혁이 불가능한 독재체제 하에서만 정당화되며, 폭력사용에는 오직 한 가지의 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다시 말해서, 폭력 없이 개혁이 가능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폭력적 수단에 의하여 저것 이상을 이룩하려고 시도해야 한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이유인즉 그런 시도에, 합당한 개혁에 대한 모든 전망을 파괴하는 위험이 포함될 터라고 내가 믿기 때문이다. 폭력사용이 길어짐으로 인하여 열정이 배제된 이성의 지배가 아니라 강자(强者)의 지배가 발생하기 쉽기 때문에, 폭력사용이 길어지면 결국 자유의 상실로 이어질 것이다. 독재체제 파괴 이상을 시도하려는 폭력적 혁명은, 적어도 자체의 실제적 목표를 성취하기 쉬울 것과 같이 또 다른 독재정치를 초래하기 쉽다.
정치적 불화 속에서 내가 정당화된다고 생각해야 하는 유일하게 추가적인 폭력사용이 있다.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자마자, 민주주의적 헌법과 민주주의적 방법 사용에 대항하는 여하한 공격에 (국가의 내부에서 오든 외부에서 오든) 대한 저항을 나는 의미한다. 여하한 그런 공격도, 특히 그 공격이 권력을 장악한 정권으로부터 온다면 혹은 그 공격이 그 정권에 의하여 비호된다면, 모든 충성스러운 시민들에 의하여 심지어 폭력을 사용해서도 저지되어야 한다. 실제로 민주주의의 작동은, 주로 스스로 권력을 오용하여 스스로 독재체제를 확립하려고 시도하는 (혹은 다른 사람에 의하여 독재체제가 세워지는 것을 허용하는) 정부가 스스로 무법화하고, 시민들은 그런 정부의 행동을 범죄행위로서 그리고 그 정부의 구성원을 위험한 범죄자 단체로서 간주할 권리뿐 아니라 의무 또한 소유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데 달려있다. 그러나 나는 민주주의를 전복하려는 시도에 대한 그런 폭력적 저항이 명백하게 방어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저항의 유일한 목표는 민주주의를 구하는 것이라는 데 추호의 의심 흔적도 남겨져서는 안 된다. 반(反)-독재체제 수립을 위하여 상황을 이용하겠다는 위협은 독재체제를 도입하겠다는 당초의 시도와 꼭 마찬가지로 범죄적이다; 그런 위협의 사용은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적(敵)을 저지함에 의하여 민주주의를 구하겠다는 솔직한 의도로 수행될지라도,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나쁜 방법일 터이다; 진정으로, 그런 위협으로 인하여 위험한 시기에 민주주의 수호자들의 계층이 혼란되고 그리하여 적이 도움을 받을 것 같다.
ㅡ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II권”, 1971년, 151-152쪽 ㅡ
I believe with some medieval and Renaissance Christian thinkers who taught the admissibility of tyrannicide that there may indeed, under a tyranny, be no other possibility, and that a violent revolution may be justified. But I also believe that any such revolution should have as its only aim the establishment of a democracy ; and by a democracy I do not mean something as vague as 'the rule of the people' or 'the rule of the majority', but a set of institutions (among them especially general elections, i.e. the right of the people to dismiss their government) which permit public control of the rulers and their dismissal by the ruled, and which make it possible for the ruled to obtain reforms without using violence, even against the will of the rulers. In other words, the use of violence is justified only under a tyranny which makes reforms without violence impossible, and it should have only one aim, that is, to bring about a state of affairs which makes reforms without violence possible.
I do not believe that we should ever attempt to achieve more than that by violent means. For I believe that such an attempt would involve the risk of destroying all prospects of reasonable reform. The prolonged use of violence may lead in the end to the loss of freedom, since it is liable to bring about not a dispassionate rule of reason, but the rule of the strong man. A violent revolution which tries to attempt more than the destruction of tyranny is at least as likely to bring about another tyranny as it is likely to achieve its real aims.
There is only one further use of violence in political quarrels which I should consider justified. I mean the resistance, once democracy has been attained, to any attack (whether from within or without the state) against the democratic constitution and the use of democratic methods. Any such attack, especially if it comes from the government in power, or if it is tolerated by it, should be resisted by all loyal citizens, even to the use of violence. In fact, the working of democracy rests largely upon the understanding that a government which attempts to misuse its powers and to establish itself as a tyranny (or which tolerates the establishment of a tyranny by anybody else) outlaws itself, and that the citizens have not only a right but also a duty to consider the action of such a government as a crime, and its members as a dangerous gang of criminals. But I hold that such violent resistance to attempts to overthrow democracy should be unambiguously defensive. No shadow of doubt must be left that the only aim of the resistance is to save democracy. A threat of making use of the situation for the establishment of a counter-tyranny is just as criminal as the original attempt to introduce a tyranny ; the use of such a threat, even if made with the candid intention of saving democracy by deterring its enemies, would therefore be a very bad method of defending democracy ; indeed, such a threat would confuse the ranks of its defenders in an hour of peril, and would therefore be likely to help the en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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