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문제
변화의 문제와 변화를 이해하는 문제는 기묘하고도 당혹스러운 문제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만들기가 어려운 문제이다. 그들이 물리학자이든 철학자이든, 그 문제가 그들에게 너무나 오래전에 해결되어서 그들은 그 문제에 많은 것이 있을 리가 없음을 당연하게 여겼다. (또한 그들은 제시된 다양한 해결책들이 양립될 수 없음을 깨닫지 못한다.)
그 문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것이다. 모든 변화는 사물의 변화이다. 틀림없이 변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변하는 동안 자체와 동일한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체와 동일한 상태로 남아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우리가 질문해야 한다.
그 질문으로 인하여 특정 물체가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불성설로 환원되는 듯하다.
초록색 나뭇잎은 갈색이 될 때 변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초록색 나뭇잎을 갈색 나뭇잎으로 대체할지라도 그 나뭇잎은 갈색이 되지 않는다: 변화하는 나뭇잎이 변화 동안에도 동일한 것으로 남는 것이 변화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변화하는 나뭇잎이 다른 것이 되는 것 또한 필수적이다: ‘나뭇잎은 초록색이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갈색이 된다; 그것은 축축했다, 그리고 그것은 건조해진다; 그것은 뜨거웠다, 그리고 그것은 차가워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훨씬 후에 동일하게 남는 것이 질료(hylē)나 실체(ousiα)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상황과 같은 비물질적이고 추상적인 ‘것들’에게도 ㅡ 가령 전쟁에서 ㅡ 발생한다. 전쟁에서 ‘상황이 변했다’는 (예를 들어) 적의 진격이 후퇴로 바뀌었다를 의미할지도 모른다. 변화의 주체로서 작용할 ‘질료’나 ‘실체’가 여기 없다.
헤라클레이토스를 변화의 문제 대한 자신의 해결책으로 이끌어갔던 것은 다음과 같은 사유였다고 나는 믿는다.
헤라클레이토스의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만물은 무상하여 정지해 있는 것이 없다.’ 그것은 변하는 ‘물체들’에 대한 부인이다 (혹은 그것은 ‘물체’를 인용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말할 것이다.) 물체는 없다 ㅡ 오직 변화만, 과정만 있다. 나뭇잎-같은-것은 없다, 처음에 축축하다가 나중에 건조해지는 불변하는 기층(基層: substratum)은 없다; 더 정확하게, 과정인 건조해지는 나뭇잎이 있다. ‘물체들’이란 망상으로, 실재로부터의 잘못된 추상이다. 만물은 화염과, 불과 같다. 화염은 물체처럼 보일 것이지만 화염이 ‘물체’가 아니라 과정임을 우리가 안다.
그리하여 우리의 감각에 물체로서 나타나는 것은 비교적 느리거나 (헤라클레이토스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규칙적인 리듬을 지닌(measured) 과정’이다; 그것은, 대립하는 세력들의 균형 (‘긴장’) 때문에 전쟁에서 변하지 않는 상황과 같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자신에게 적용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피상적으로 본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체로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깊이 본다면, 우리가 과정임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중단된다면 그것이 우리의 종말임을 발견한다. 이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발견을 낳았던 원초적 통찰이었던 듯하다: ‘나는 나 자신을 탐색했다’고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것은 물체가 아니라 과정이었다: 타오르는 불, 화염이었다.우리가 더 많이 깨어있을수록 우리는 더 살아있고 완전히 더 우리 자신이 된다. 우리가 잠든다면, 우리 삶의 과정이 감소되면 우리의 영혼은 더 이상 살아있는 불이 아니다 ㅡ 우리는 거의 죽었다.
그리하여 물체들은 없고 오직 과정들만 있다; 혹은 더 정확하게, 모든 개별적인 과정들이 합쳐지는 한 가지 세계 과정만 있다: ‘만물은 하나다’ 그리고 ‘신(神)은 낮과 밤이며 겨울과 여름이고 평화와 전쟁, 포만과 굶주림이다’ ㅡ 모든 대립하는 것들, 이것이 그 의미이다 ㅡ ‘그리고 신(神)은 변한다...’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한다.
그리하여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정지(停止)는 변화의 상태이다: ‘변하면서 그것은 정지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비록 극단적일지라도 이것은 낮과 밤, 겨울과 여름이 ㅡ 요컨대, 대립하는 모든 것들 ㅡ 동일하다는 교설의 한 가지 사례일 따름이다.
이유인즉 그것들이, 자기-동일적인 것들을 대체하여 대립하는 것의 어떤 쌍 중 하나를 다른 하나와 결합시키는 것을 본질로 하는 자기-동일적 과정이거나 변화의 구성적 면모들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것들 어느 것도, 자신들을 결합하는 다른 편이 없거나 과정인 변화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ㅡ 칼 포퍼 저, 아르네 피터슨 편집,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2007년, 155-156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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