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론의 출현
원자론은, 거의 모든 경험적 이론이 그러한 바와 같이, 자체 이론보다 앞선 이론을 경험적으로 논박함으로부터 출현했다.
파르메니데스는 경험적으로 시험 가능한 결론을 도출했다: 움직임이 불가능하다는 결론.
그러나 이 결론은 분명히 경험에 의하여 논박된다; 그래서 그 결론에 대한 논박은 점차, 원래 입장의 일부를 논박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통상적으로 그런 경험적 논박에서 논박된 이론체계는 이것이 가능한 한 유지된다.
그 논박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것이다:
움직임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움직임은 가능하다. 그러므로 세계가 하나의 가득 찬 덩어리일 리 없다; 더 정확하게 세계는 틀림없이 많은 덩어리들 ㅡ 세계는 틀림없이 분할 가능하다 ㅡ 그리고 무(無)를 포함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빈 공간을 포함하고 있다. 무(無)나 빈 공간은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득 찬 덩어리들이 빈 공간 속에 있다.
그 덩어리들은 파르메니데스적으로 ㅡ 다시 말해서, 가득 차고 변화 불가능하게 ㅡ 남는다; 그것들은 처음에 ‘존재하는 것’이나 ‘가득 찬 것’으로 지칭되었다가 나중에 곧 ‘분할 불가능한 것’ 즉, ‘원자들’로 지칭되었다. 빈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지칭되었다가 나중에 ‘공동(空洞: the void)’으로 지칭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원자들과 공동(空洞: the void)으로 구성된 세계에 도달한다.
이것이 원자론이 출현한 방식이었다. 우리는 원자론이 얼마나 성공적이 되었는지 안다. 그러나 원자론의 단연코 가장 큰 성공은, 원자론이 파르메니데스가 지녔던 당초의 문제에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원자론은 변화의 문제에 직접적인 해결책을 ㅡ 변화에 대한 합리적 이론 ㅡ 제공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다음과 같았다.
모든 변화는, 정성적(定性的: qualitative) 변화를 포함하여, 공간적 움직임에서 기인한다; 더욱 특별하게, 변화 불가능한 공동(空洞: the void) 속의 변화 불가능한 가득 찬 원자들의 움직임에서 기인한다.
그리하여 모든 변화는 순전히 재배치이다. 파르메니데스의 가르침은 적어도 두 가지 매우 중요한 요점에서 수용되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 원자들은 변화한 적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내재적 변화, 내재적 참신성이 있을 수 없었다. 내재적으로 항상 동일하던 것의 새로운 배치만 있을 수 있었다. 칸(Kahn)은 이것을 매우 명백하게 알았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의 생성이 불가능성으로 간주되었다’고 칸은 서술한다.
모든 변화가 움직임이라는 이 변화이론은 ㅡ 레우키포스(Leucippus)와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에게서 기인하는 이론 ㅡ 2,000여 년 동안 이론물리학의 기초로 남았다. 파르메니데스의 합리주의가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서구 과학을 지속적으로 지배한 것은 주로 ㅡ 전혀 배타적으로가 아니지만 ㅡ 이런 형태로서이다. 그 이론은 여전히 서구과학을 지배한다.
ㅡ 칼 포퍼 저, 아르네 피터슨 편집, ‘파르메니데스의 세계’, 2007년, 158-159쪽 ㅡ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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