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었나, 타살이었나.” 2003년 12월10일 오전 서울소방학교 구조구급훈련센터 훈련탑에서 박창수씨 추락사의 원인을 검증하기 위해 스턴트맨이 5층 건물에서 실제 뛰어내리는 실험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④ 한진중공업 박창수의 죽음(하)
“김 변호사가 안기부 프락치래”
“신문이나 티브이에 나왔으니 애들이 손가락질당할까봐 걱정이에요. 당분간은 유치원에 가지 말라고 하세요. 그리고 왜 집사람은 면회를 안 와요? 여기 온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박 위원장은 면회 온 어머니에게 집안 걱정을 했다. 그는 강성 민주노조 위원장으로 분류되고 있었지만, 사적으론 성품이 온순하고 섬세하며 진중한 성격이었다.
며칠 뒤 면회를 온 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왜 그렇게 편지를 슬프게 썼노. 당분간 면회를 자주 왔으면 좋겠어. 내가 제일 걱정하는 것은 네 건강이야. 요 근래에 솔직히 말해서 마음이 안정이 안 돼. 당분간 부산을 떠나 어머니 계시는 성남에 있으면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와주라.”
박창수씨가 추락사한 며칠 뒤, 교도관들에 의해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당한 박창수씨의 부인 박아무개씨와 어린 아들이 안양병원 5층에서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다. |
당시 안기부는 한진중공업노조를 지금 민주노총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전노협과 대기업 연대회의에서 탈퇴시키려고 전 방위 공세를 펴고 있었고, 진상조사단은 그 연결고리로 한 노조 간부를 지목했다. 그가 박창수 위원장 체제가 출범한 1990년 7월 이전인 4월에 부산 영도에 72평짜리 초대형 아파트를 구입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월급이 50만원이 채 안 되는데 무슨 수로 계약금, 중도금 합쳐 7000만원이나 되는 큰돈을 낼 수 있었다는 것인지. 그는 10월 한진중공업을 담당하고 있던 안기부 부산지부 직원 홍아무개를 박 위원장에게 소개했다. 셋이서 함께 술을 마시고 박 위원장 집에까지 갔다. 그는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6만원짜리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살고 있었다. 안기부 직원은 “노조 위원장이 이런 집에 살 수가 있냐”고 했다. 1991년 4월 안기부 직원은 그 노조 간부를 통해 노조 조직부장을 만나 전노협 탈퇴와 해고자 복직을 맞바꾸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박 위원장이 죽기 며칠 전인 5월2일 역시 노조 간부를 통해 위원장 직무대리를 만나 “박 위원장 문제는 해고되지 않을 정도의 선고유예도 가능하다. 임금인상과 단체협약 문제도 최대한 신경을 써보겠다. 주위에서 볼 때 노조가 변한 것처럼은 보여야 되지 않겠느냐, 전노협을 탈퇴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회유했다. 그 노조 간부는 박 위원장을 면회 가서는 “안기부가 위원장의 조기 석방을 위해 애쓰고 있다. 다른 노조 임원들이 전노협 탈퇴에 긍정적이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잡고, 조합 임원들에게는 “위원장이 흔들리고 있다. 의처증 증세가 있다”고 전해서 위원장에 대한 조합원들의 신뢰를 흔들어 놓았다.
5월4일 오전 10시쯤, 박 위원장은 구치소 운동시간이 끝날 무렵 갑자기 줄에서 빠져나와 7, 8미터를 달려 나갔다. 그리고 사동 건물 벽 모서리를 세차게 머리로 들이받았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그는 인근 안양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깊게 찢어진 이마를 수십 바늘 꿰매고 붕대를 칭칭 감는 치료를 마친 뒤 일반병실에 자리가 없어서 2층 중환자실에 수용되었다. 다음날인 일요일 오후, 교도관으로부터 그다지 큰 상처가 아니면 구치소 내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게 될 거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러고는 나에게 당장 좀 와서 병원에서 계속 치료받을 수 있게 해 달라는 전화를 했던 거였다. 나한테 시원한 답을 듣지 못한 그는 예의 노조 간부에게 안기부 홍아무개와 이야기해보라고 부탁했다. 인간적으로 가장 약한 고리인 처에 대한 위해를 수단 삼아 안기부가 깔아놓은 덫에 걸려든 셈이었다.
박창수씨의 장례식을 앞두고 노동자, 시민, 학생 등 1000여명이 안양시 안양병원 앞길에서 전야제를 열고 있다. |
안기부서 다녀간 정황이 드러났다
노 정권이 무너질 상황이었다
대놓고 겁주기, 돈으로 회유하기
그리고 내가 첩자라는 역공…
결국 진상조사를 접고 말았다
간호사와 동생 진술은 왜 달랐을까
저녁 6시쯤 그 노조 간부는 안기부 홍아무개와 전화 통화를 했다. 홍아무개는 오늘은 일요일이니, 구치소에 돌아가지 않고 병원에 남아서 계속 치료받을 수 있는지 여부를 내일 답해주겠다고 했다. 박 위원장은 자신이 직접 홍과 통화하고 싶다고 해서 노조 간부가 다시 전화를 했는데 교도관이 이를 막았다. 그러자 홍이 다시 전화를 걸어와 교도관들에게 신분을 밝히고 박 위원장을 바꾸어 달라며 옥신각신했다. 결국 박 위원장 아버지가 나서서 홍아무개에게 “할 말이 있으면 병원에 와서 직접 하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홍은 그 뒤로도 한 차례 더 전화를 걸어 결국은 박 위원장과 통화를 했다. 저녁 8시쯤 박 위원장은 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안기부로부터 전노협과 연대회의에서 탈퇴하면 석방에 힘쓰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탈퇴해야 할지 고민이다. 형식적으로는 탈퇴를 하고 실제적으로는 활동을 하는 방법이 있다. 일이 자꾸 꼬여 간다. 누가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면 나가지 마라.”
6일 새벽, 중환자실에는 당직 간호사 2명에, 박 위원장 처가 침대 옆 보조의자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고, 박 위원장과는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 병실 옆 가족대기실에, 교도관 2명이 병실 바로 앞에 있었다. 간호사들이 밝힌 그때 상황은 이랬다. “새벽 2시에 박 위원장에게 엉덩이주사를 놓았다. 그가 병실에 있던 동생에게 손을 잡아 달라고 해서 20분 정도 그러고 있다가 나갔다. 동생은 이후에도 자주 들렀는데 4시에 들어와서 혈압을 물어보기에 140-150이라고 대답하고 혈관주사를 놓았다. 그는 당시 10분가량 형하고 긴한 이야기를 했으며 내가 가면 말을 끊었다. 동생이 나간 지 20분 정도 후인 4시30분에서 40분 사이에 박 위원장이 나갔다. 그가 10분이 지나도 안 들어와 이상하다 싶어 처를 깨우려는데 호리호리한 교도관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에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함께 밖으로 나가 동생을 깨웠다. 다시 중환자실로 갔다가 3층 여자화장실에 가서 창문 밖을 내려다보니 1층 바닥에 박 위원장이 누워 있었다.”
동생 진술은 이와 차이가 있었다. 형 손을 잡아주었고, 혈압을 물어본 건 맞는데 시각은 4시가 아닌 3시경이고 그 뒤 옥상에 올라가 바람을 쐬고 내려와 병실을 잠깐 들여다보았다. 그때 시계를 보니 3시 반이었다. 그 이후 잠을 자다가 4시40분경 간호사가 깨워 교도관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가 밖으로 나간 사람 없는지 물었고, 없다고 해서 바로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가 저 아래에 형이 누워 있는 걸 보았다는 거였다.
검찰은 “박씨가 구치소 생활에 염증을 느낀데다가 노조활동에 회의를 느껴 순간적인 충동으로 투신자살한 걸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당시 분신정국에서 만약 안기부 홍아무개 직원이 6일 새벽 안양병원에 왔다면, 그래서 박 위원장의 죽음에 어떤 식으로든지 개입이 되었다는 게 사실로 드러난다면 노태우 정권은 바로 무너질 상황이었다. 당연히 진상조사 작업은 여러 방식으로 엄청난 방해를 받았다. 첫째가 겁주기였다. 자고로 미행이나 도청이란 게 몰래 하는 건데, 도청하고 미행한다는 걸 알 수 있도록 드러내놓고 했다. 겁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사실 겁이 많이 났다. 그래서 같은 사무실의 이석태·조용환 두 변호사와는 모든 걸 공유했고, 나만 해코지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저들에게 알리려고 전화 대화 내용에 이 사실을 암시했다. 사무실 방과 자동차에 도청장치가 붙어 있지 않은지 자주 살폈다.
정말 노동운동은 목숨 걸고 하는 거였다
그 무렵 연세대에서는 분신정국에 대처하려고 운동단체들이 모여 상황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와 이, 조 변호사는 그곳에서 그 노조 간부를 조사했다. 오랜 실랑이 끝에 그로부터 6일 새벽 안기부 직원이 병원에 와 있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그는 그 뒤 잠적했다가 안기부 홍아무개의 권유로 검찰에 나가 이 진술을 번복했다.
겁주기에 이은 방해공작은 돈을 통한 회유였다. 전국적인 파업과 시위가 한창이던 어느 날 검찰 고위간부가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강남 팔래스호텔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는 이랬다. ‘김 변호사, 선배로서 진심으로 조언하는 건데, 잘 들으라구. 돈도 안 되는 일로 애쓰고 다니는데 아무리 그래 봤자 뭐가 나오겠어? 공연히 고생만 하지 말고. 유족들도 그렇지, 운동권에 끌려 다니며 이용만 당하다가 나중에 아무런 보상도 못 받게 될 게 뻔한데 그러지 말고, 김 변호사 애쓴 거, 유족들 딱한 형편, 충분히 보상받게 해줄 테니 그만 접으라고.” “그 말씀 안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겁, 회유에 이은 마지막 수순은 ‘우리 편’을 통한 공격이었다. 내가 안기부의 첩자라는 공격이었다. 표면으로 드는 근거는 어떻게 열사의 가족들을 욕보일 수가 있느냐는 거였다. 6일 새벽 침대 바로 옆 보조의자에 있던 위원장의 처는 자신이 자고 있어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어떻게 그렇게 까맣게 모를 수가 있는지 자꾸 물어보았다. 동생도 간호사들 말에 따르면 4시경 10여분 동안 형과 긴한 얘기를 하다 간호사가 가면 끊었다는 건데 자신은 3시 반부터 잤다고 했다. 그리고 형을 찾으러 바로 옥상으로 간 이유도 궁금했다. 동생이 형을 해치는 데 가담했을 리는 전혀 없다. 다만 당시 형과 안기부 직원이 서로 할 이야기가 있었으므로 홍이 병원에 왔다면 만남을 연결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동생이 연결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 아래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박 위원장이 죽자 안기부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동생 입을 막았을 수도 있을 터. 물론 이 가정이 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내가 안기부 첩자란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안기부의 역공작이었다고 여긴다. 현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인 심상정이 내 편을 들어주었지만 더는 조사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겁과 회유는 어찌어찌 넘어설 수 있었지만 첩자란 공격 앞에선 눈물을 머금고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노조원들 중에는 내 눈엔 안기부 끄나풀로 보이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정말 노동운동은 목숨 걸고 하는 거였다.
이렇게 어느 봄날 나는 내 피고인을 속절없이 보냈다. 그리고 왜 그리 되었는지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무능한 변호사로 남은 채 사건을 접었다.
그리고 남은 말.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당일 새벽 3, 4시께 박씨가 2, 30대 남자의 부축을 받아 병원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고 10분 후 쿵 하는 소리가 났다는 목격자가 나왔다고 발표했다. 조사기한이 끝나 구체적인 조사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