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발발 직후 동래성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동래부 순절도(東萊府殉節圖). 숙종 연간에 그린 것을 1760년(영조 36) 변박이 다시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군이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자 송상현이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응수하는 장면, 부녀자들이 기왓장을 일본군에게 던지는 장면, 경상좌병사 이각이 도주하는 장면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육군박물관 소장 |
[토요판] 한명기의 -420 임진왜란
⑬ 일본의 침략
“적선이 바다를 덮고 몰려왔다. 부산첨사 정발은 마침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인들로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적은 이미 성으로 기어올랐다. 정발은 어지러이 싸우는 중에 전사했다. 이튿날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고 부사 송상현이 죽었으며, 그의 첩도 죽었다. 적은 드디어 길을 나눠 진격하여 김해, 밀양 등 부(府)를 함락했는데 경상병사 이각은 병력을 거느리고 먼저 달아났다. 태평한 세월이 200년 동안 이어져 백성들은 전쟁을 몰랐고 군현들은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사실을 최초로 기록하고 있는 1592년(선조 25) 4월의 <선조실록> 내용이다. 임진왜란 초전의 양상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당시 일본 쪽 기록을 보면 부산까지 침략군을 수송했던 병선은 700여척에 이르는 대선단이었다. 그럼에도 부산첨사 정발은 침략군을 조공 선단으로 오인했다.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임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방어 태세를 제대로 갖추기는 어려웠고, 부산진을 비롯하여 서울로 이르는 길목의 주요 고을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전쟁은 이렇게 일본군의 승승장구로 시작되었다.
2만명 대 1000명…부산진과 동래성의 함락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선발대는 거의 2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반면 부산진의 조선군 병력은, 기록에 따라 600명에서 10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어느 쪽이든 중과부적의 상황이었다. 정발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맹하게 분전했지만 성을 지켜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월14일 부산진을 돌파한 일본군은 이튿날 동래로 밀려들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부산진 함락 소식을 듣고 성 안팎의 방어 태세를 정비하고, 인근의 양산·울산 지역의 병력까지 불러들여 결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동래성으로 들어왔던 경상좌병사 이각은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성 바깥에서 협공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북쪽으로 달아나버렸다. 이윽고 일본군은 성을 포위한 뒤, 남문 밖에 목패를 세웠다. 목패에는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不戰則假我道)”는 글귀를 써 놓았다. 송상현은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死易假道難)”고 응수했다고 한다.
싸움이 시작된 지 반나절 만에 성은 함락되었다. 적군이 성안으로 밀려오는 와중에도 송상현이 조복(朝服·관원이 조정에 나아가 하례할 때에 입던 예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자, 일찍이 동래에 드나들며 송상현에게 후대를 받았던 일본군 부장 평성관(平成寬)은 그를 구출하려 했다. 하지만 송상현은 그의 피신 권유를 거부하고 순절했다. 죽기 직전 그가 부친에게 보내려고 남겼다는 시를 보면 마음이 아리다. “달무리처럼 포위당한 외로운 성/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 않는데/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의 은혜는 가벼워라”
고니시 휘하의 일본군 선발대는 동래성 함락 뒤에도 승승장구했다. 그들은 곧 기장, 양산, 밀양, 대구 방향으로 진격하여 4월25일에는 상주까지 도달했다. 4월18일 각각 부산과 김해 등지에 상륙했던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등이 이끌던 일본군 후속 부대도 거침없이 북상 대열에 합류했다.
문경새재의 오늘날 모습. 새재는 문경에서 충주로 이어지는 교통의 관문이다. 주변에 주흘산, 조령산 등 험한 봉우리들이 즐비하다. 명군 제독 이여송은 훗날 “신립이 새재라는 천혜의 요새를 포기했던 것이 어리석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신립이 천혜의 요새를 버리고 배수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문경시청 누리집 |
4월17일 경상좌수사 박홍의 장계를 통해 일본군의 침략과 북상 소식이 조정에 알려졌다.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 성응길을 경상 좌방어사, 조경을 우방어사로 삼고, 유극량과 변기를 조방장으로 임명하여 각각 죽령과 조령을 지키도록 했다. 하지만 임명된 장수들 모두 휘하에 거느릴 만한 병력이 없었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일이 데려갈 군사 300명을 차출하기 위해 병조에 보관된 병적을 점검했을 때 조정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명단에 올라 있는 사람의 태반이 서리와 유생 등 훈련을 전혀 받지 못한 백도(白徒)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일은 명령을 받은 지 사흘이 되도록 출발하지 못했고, 결국 군관 약간명만을 거느리고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른바 제승방략(制勝方略)에 입각한 병력동원체제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유사시에 각 고을의 수령이 군사를 이끌고 자신의 고을을 떠나 약속된 방어지역으로 집결하고, 중앙에서 임명된 순변사, 방어사, 도원수 등이 도착하면 그 휘하에 배속되어 지휘를 받는 체제였다. 실제 임진왜란 발생 직후 경상감사 김수는 문경 이남의 수령들에게 각 고을의 병력을 거느리고 대구로 집결하여 순변사의 도착을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순변사 이일의 도착이 늦어지고 일본군의 북상 소식이 알려지자 집결했던 수령과 병사들은 대부분 도망치고 말았다.
순변사 이일이 문경에 도착했을 때 고을은 비어 있었다. 상주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지휘를 받아야 할 상주목사 김해는 도주했다. 이일은 할 수 없이 마을과 골짜기를 뒤져 장정들을 끌어모을 수밖에 없었다. 수백명의 병력을 모으긴 했지만 그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창졸간에 오합지졸들을 타이르고 훈련시키기에도 버거운 상황에서 적을 막을 수 있는 체계적인 대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당장 척후가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군은 이미 선산을 지나 북상하고 있었지만 이일은 척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적군이 상주 가까이 접근했다는 사실을 보고했던 사람의 목을 베었다. 유언비어로 군중을 동요시킨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이일은 병력을 거느리고 상주 북천 근처에서 진 치는 훈련을 하다가 일본군의 기습을 받는다. 일본군의 조총 사격이 시작되자 조선군 진영은 졸지에 와해되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조선군이 겁에 질려 활시위조차 힘껏 당기지 못한 채 무너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일은 조령을 넘어 충주로 도주했고 900명 남짓한 조선군 대부분은 섬멸되고 말았다.
상주전투는 임진왜란 초 조선군이 안고 있던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노출시켰다. 제승방략 체제가 지닌 병력 동원과 전개 방식의 한계, 오합지졸들을 끌어모을 수밖에 없었던 병무체계의 문제점, 지방 수령들의 무책임한 직무유기, 기본적인 척후조차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 지휘관의 무능 등이 그것이다. 요컨대 오랜 평화의 시간을 거치면서 조선의 국방 태세가 붕괴되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려 있었음을 드러냈다. 일본군은 달랐다. 그들은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가졌을 뿐 아니라 100년 가까운 전국시대를 치르면서 전투에는 이력이 난 ‘베테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합지졸’과 ‘베테랑’의 대결.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1592년 4월 부산첨사 정발은
700여척의 적선을 보고도
조공 선단으로 오인했다
침략 보름 만에 서울길이 뚫렸다
도성은 파장 그 자체였다
민심을 잡고자 피난을 금했으나
대궐 호위군사들조차 달아나
궁궐문엔 자물쇠가 걸리지 않았다
용장 신립의 실책, 척후병의 목을 베다
상주전투의 양상은 충주에서도 비슷하게 재현되었다. 충주는 사실상 서울로 향하는 적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방어 거점이었다. 그 때문에 당시 충주에는 도순변사 신립 휘하에 약 8000명의 병력이 모여 있었다. 신립은 조선 조정이 가장 높이 신뢰하고 있던 용장이었고, 실제 그가 대군을 거느리고 왔다는 소식에 충주의 사민들은 피난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
“훈련이 안 된 오합지졸로는 적을 어떻게 해볼 수조차 없었다”는 이일의 보고를 받은 직후 신립 진영에서는 논란이 빚어졌다. 신립의 참모 김여물은 적군보다 병력이 현저히 적은 상황을 고려하여 문경새재에 진을 치자고 건의했다. 조령의 험준한 지형을 활용하여 지키다가 역습을 펼치자는 주장이었다. 신립은 김여물의 제안을 거부하고 들판에서 싸우자고 했다. 높고 험한 곳에서는 기마병을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실제로 충주 읍내에서 5리쯤 떨어진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신립은 일찍이 북방에서 기마병을 활용하여 여진족을 물리친 경험이 있는 장수였다. 또 휘하 병력의 상당수가 오합지졸인 상황에서 그들의 마음을 다잡으려면 배수진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신립 또한 척후를 소홀히 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조령에 복병이나 척후병을 제대로 배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군은 조령 입구에 이르러 험준한 산세와 복병에 대한 우려 때문에 정찰에 몹시 신경을 썼다. 4월27일 저녁 군관 한 사람이 와서 일본군이 고개를 이미 넘었다고 보고하자 신립은 그의 목을 벤다.
4월28일 일본군은 단월역으로부터 길을 나눠 공격을 개시했다.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본사>에서 “신립이 탄금대 앞에 초승달 형태의 진을 치고 일본군의 중앙부를 향해 돌격을 시도하는 등 용맹하게 싸웠다”고 기록했다. 이 싸움에서도 조총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신립의 기마대는 수차례 돌격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의 조총 사격 앞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게다가 주변에 논과 습지가 널려 있어 기마대가 돌격전을 계속 펼치기에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전세가 기울자 신립은 단기로 적진을 향해 돌격을 시도하다가 달천에 몸을 던져 순국한다. <징비록>은 “여러 군사들도 모두 강물에 뛰어들어 시체가 강을 뒤덮었다”고 당시의 참상을 기록하고 있다.
4월29일 신립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도성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일이 상주에서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부터 도성의 분위기는 이미 흉흉했다. 조정은 민심의 동요를 막으려고 도성 주민들의 피난을 금지했다. 밤이면 사대문을 닫아걸고, 나루의 배를 없앴으며, 골짜기 등을 뒤져 피난한 백성들을 색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립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위기감은 절정에 이르렀다. 대궐의 호위 군사들은 달아나고 궁궐 문엔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았으며 물시계는 시간을 알리지 않았다. 4월29일 서울의 분위기는 이미 파장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