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승(禪僧)처럼 그려져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를 만났던 조선 통신사 일행은 그의 모습이 볼품없었다고 폄하하면서도 그의 눈빛만큼은 아주 매서웠다고 평가한 바 있다. ‘태양의 아들’을 자처하면서 대륙 정복의 망상을 펼치려 했던 그가 일으킨 침략전쟁은 동아시아 삼국에 비극을 몰고 왔다.(위) 일본에 상륙했던 포르투갈인들과 일본인들의 교류 장면을 그린 병풍.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통일 직후 명과 조선 침략을 공언하면서 선교사들을 통해 포르투갈로부터 전함과 승조원들의 원조를 받아내려고 시도했다. 오사카 천수각 특별사업위원회 편 <히데요시와 오사카성>(1988)에서 전재 |
[토요판] 한명기의 -420 임진왜란
⑫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
예로부터 일본 사신을 맞이할 때는 연로의 군읍(郡邑)에서 백성들을 동원하여 창을 잡고 늘어서서 군대의 위엄을 보였다.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귤강광)가 인동(仁同)을 지나다가 창을 잡고 있는 사람을 흘겨보고는 비웃기를 “너희가 가진 창의 자루가 너무 짧구나”라고 했다. … 서울에 도착하니 예조판서가 잔치를 열어 접대했다. 술이 얼큰해지자 귤강광이 잔치판에 후추를 흩어놓았는데, 기생과 악공들이 다투어 그것을 줍느라 어지러워졌다. 그가 숙소로 돌아와 탄식하며 역관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망할 것이다. 기강이 이미 무너졌으니 어찌 망하지 않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1587년(선조 20) 9월 쓰시마가 보낸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가 조선에 왔을 때 그를 접대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담은 <징비록>의 기록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막 통일한 직후, 군사력에서 자신감이 넘치던 일본인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이 흥미롭다.
포르투갈 힘을 빌리는 것까지 염두에 둬
전국시대 통일의 초석을 놓았던 오다 노부나가는 1582년 6월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에 휘말려 최후를 맞았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뒤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그는 오다의 유업을 이어 정복사업을 계속 벌였고 그 과정에서 권력을 더욱 키워 1585년 7월 간파쿠(關白)에 취임했다. 간파쿠란 천황을 보좌하여 국정을 총괄하는 직책을 가리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어 1587년 규슈의 유력자 시마즈씨(島津氏)를 복속시킴으로써 사실상 일본의 통일을 달성한다.
간파쿠가 된 직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넘어 바깥세계까지 넘보기 시작했다. 그는 1585년 9월 히토쓰야나기 스에야스(一柳末安)에게 보낸 글에서 명을 정복하겠다는 구상을 전했다. 이듬해 3월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류를 만났을 때도 명과 조선을 침공하겠다는 계획을 털어놓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자리에서 병력 수송을 위해 2000척의 선박이 필요하다며 성능이 뛰어난 포르투갈 선박 2척과 우수한 승조원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대륙 침략을 위해 포르투갈의 힘을 빌리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규슈를 평정하자 침략 구상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1587년 6월 하카타에서 쓰시마의 지배자 소씨(宗氏) 부자를 만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의 교섭을 명령했다. 일본이 통일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 국왕을 불러와 자신을 알현토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기한을 1588년까지로 못박았다. 불응할 경우 조선을 정벌하겠다고 협박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 쓰시마가 조선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조선과 쓰시마 관계의 본질에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혼슈를 장악하고 규슈와 시코쿠를 정벌하여 쓰시마까지 복속시킨 상황에서 조선 또한 그저 바다만 건너면 정복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쓰시마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곡을 비롯한 생필품을 조선과의 무역에 의지하여 생활하고 있던 처지에서 조선을 화나게 할 경우 생계 자체가 막막해지기 때문이었다. 또 문화적으로 자존심이 강한데다 일본을 ‘야만국’으로 여기고 있던 조선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전했다가는 관계가 파탄나기 십상이었다. 그렇다고 명령을 거부하고 몰락의 길로 갈 수도 없는 것이 쓰시마의 고민이었다.
조선 통신사 일행이 숙소로 사용했던 쓰시마의 세이잔사(西山寺). 조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이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쓰시마는 전쟁을 막아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
일본 침략을 알아채지 못했고
나고야엔 15만 대군이 집결했다
신료나 다이묘들 가운데
누구도 침략에 반대를 안했다
태평양전쟁 전야와 비슷했다
성과 없이 돌아온 사신과 그 가족을 살해
쓰시마는 조선으로부터 거부당할 것이 뻔한 선조의 입조(入朝) 대신 인질과 공물을 요구하자고 제안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선조의 입조를 고집했다. 이런 배경에서 1587년 쓰시마가 보낸 사신이 다치바나 야스히로였다. 소씨는 그를 일본의 국왕사(國王使)로 칭하여 조선에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청토록 했다. 다치바나는 1573년(선조 6)에도 서울에 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14년 전과는 달리 조선에서 무례한 행동을 일삼았다. 더욱이 그가 소지한 서한에는 “천하가 짐의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운운하는 문구까지 있어 조선은 격분하게 된다. 조선 신료들은 ‘교화가 미치지 않는 야만국의 사신을 제대로 접대할 수는 없으며 바닷길이 험해 통신사도 보낼 수 없다’고 퇴짜를 놓았다.
다치바나가 아무런 성과 없이 귀국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와 그의 일족을 모두 살해했다. 그러고는 1589년 여름까지 조선 국왕을 입조시키라고 쓰시마를 다시 채근했다. 바짝 긴장한 소씨는 1589년 6월 하카타 쇼후쿠사(聖福寺)의 승려 겐소(玄蘇)와 함께 직접 조선으로 건너왔다. 조선 조정에 통신사를 파견해주도록 다시 간청한 뒤, 바닷길을 자신이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조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조선 조정은 조건을 제시했다. 본래 전라도 진도 출신으로 왜구에 투항하여 노략질에 앞장섰던 사을화동(沙乙火同)이란 인물을 잡아 보내면 통신사 파견을 고려하겠다는 것이었다. 쓰시마는 사을화동은 물론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인들까지 송환했다. 조선은 결국 1589년 9월 일본의 통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늦게나마 일본의 변화된 정세를 탐지하기 위한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통신사는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 등으로 구성되었다. 황윤길은 서인, 김성일은 남인, 허성은 북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황윤길 일행은 1590년 3월 서울을 출발하여 7월에 교토에 도착했다. 하지만 일행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가 원정에 나아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1월7일 통신사 일행을 접견했던 자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인 태도는 방약무인 그 자체였다. 그는 황윤길 일행을 자신의 전국 통일을 축하하려고 온 대등국의 사절이 아니라 속국의 사신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 통신사 일행이 가져온 선조의 국서에 대한 답서를 제때 주지 않는 무례를 저질렀다.
귀국길에 받은 답서의 내용을 본 통신사 일행은 경악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칭했는가 하면 ‘명나라로 건너가 400여 주를 정복하겠다’고 운운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선조를 ‘전하’(殿下)가 아닌 ‘각하’(閣下), 조선이 보낸 예물을 조공물을 뜻하는 ‘방물’(方物), 통신사의 일본 방문(來日)을 ‘입조’ 등으로 서술했다. 조선을 제후국으로 여기는 듯한 무례한 문구들이었다. 통신사 일행은 격분하여 수정을 요구했지만 일본 쪽은 제대로 고치지 않았다.
주지하듯이 일본에서 돌아온 통신사 일행의 일본 정세와 동향에 대한 보고 내용은 서로 달랐다. 특히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평가에서 의견이 갈렸다. 이렇게 된 것은 ‘당시 극심했던 조선의 당쟁 때문’이라는 것이 종래의 일반적인 평가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16세기 이후 평화가 지속되는 와중에 척신정치 등이 남긴 부정적인 영향이 더해지면서 바깥세계에 대한 관심과 감각이 상대적으로 무뎌졌던 것이다. 성종대 이후 일본에 대한 사신 파견이 중단된 것이 대표적인 예였다.
서두에서 다치바나가 언급했던 기강 해이 문제도 오랜 평화와 내정의 파행 속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일찍이 정약용은 왜란 직전의 분위기를 가리켜 ‘변방의 사건을 말하면 허풍을 떤다고 하고 군사 일을 말하면 민심을 동요시킨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변방 문제를 걱정하면서도 겉으로는 태평시대라 걱정이 없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결국 이런 풍조 속에서 1590년에야 쓰시마의 간청에 떠밀려 마지못해 통신사를 보냈지만, 일본의 동향을 탐지하여 대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통신사가 귀국한 직후인 1591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조선 침략의 기일을 정해 통보했다. 스스로 ‘태양의 아들’을 운운하는 공명심과 허장성세와, 취약한 자신의 권력 기반을 대외 침략을 통해 확고히 하려는 의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정이었다. 이미 그는 유소년 시절부터 자신을 따라다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원정이 성공하면 명나라 땅 가운데 20주를 주겠노라고 약속한 바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모한 결정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았다. 조선과 명 침략에 몰두하는 동안 내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우려, 조선과 명의 교통로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다 수군력과 해운 능력이 취약하다는 우려, 무기나 식량 등을 조달하기가 어렵다는 우려, 결국 다이묘들을 고생시키고 백성들을 빈궁하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 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동생 히데나가를 제외하면 신료나 다이묘 가운데 누구도 드러내놓고 침략에 반대하는 자가 없었다. 전쟁 개시 이전의 이런 풍조를 가리켜 어느 일본 학자는 ‘태평양전쟁 개전 전야와 비슷한 분위기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1년 규슈의 북단 나고야(名護屋)에 조선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를 건설하는 공사에 돌입한다. 거리나 지형으로 볼 때 조선으로 가는 침략군을 실어 나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는 규슈의 다이묘들에게 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하고 가토 기요마사를 축성 책임자로 삼아 속도전을 벌였다. 1591년 10월에 시작한 공사는 두 달 남짓 만에 끝났다. 그동안 병력과 물자 수송에 필요한 큰 배를 건조하고 승조원들을 차출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작업이 병행되었다.
이윽고 1592년 1월부터 조선으로 건너갈 침략군의 병력들이 나고야성으로 속속 집결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거느리는 제1군 1만8000명,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제2군 2만명 등 모두 15만8000명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독단과 아집에 따라 동아시아를 뒤흔드는 참혹한 전쟁이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