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1536~1584)의 영정. 선조대의 개혁 정치가 이이는 임진왜란 발생 직전의 시기를 중쇠기(中衰期)라고 규정했다. 건국한 지 200년이 지난데다 척신정치가 남긴 후유증까지 겹쳐 갖가지 모순이 중첩되어 터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장(更張)이 없으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고 했거니와 임진왜란으로 그의 우려와 경고는 현실로 나타났다. 강릉 오죽헌 소장 |
한명기의 -420 임진왜란
⑪전쟁의 불씨(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1년 전인 1581년(선조 14) 10월, 이이(李珥)는 선조를 면대한 자리에서 조선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예로부터 나라를 세운 지 오래되면 점점 법제의 폐단이 생기고 인심이 해이해지는 것인데, 반드시 어진 임금이 나타나 퇴폐하고 타락한 것을 말끔히 없애고 정치를 고쳐야만 국세가 떨치고 운명이 새로워지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물쭈물하다가 퇴락하여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니 그 형상을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건국된 지 200년이 지나 중쇠(中衰)의 시기에 해당하는데, 권간(權姦)이 어지럽혀 화를 많이 겪었고 오늘에 이르러는 노인이 원기가 소진되어 다시 떨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다행히 성상께서 나셨으니, 이것은 장차 다스려질 수도 있는 때입니다. 만일 분발하고 진작하시면 억만년 동안 동방의 복이 될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장차 무너지고 잦아들어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이는 자신이 살던 16세기 후반을 ‘중쇠기’로, 당시 조선의 상태를 ‘원기가 소진된 노인’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건국 이후 200년 동안 쌓인 폐단을 제거하기 위한 개혁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조선은 원기를 소진한 노인과 같다”
16세기 조선은 안으로 심각한 진통을 겪고 있었다. 15세기 이래 정치판을 주도했던 훈구파(勳舊派)와 그들에게 도전했던 사림파(士林派) 사이의 갈등 속에서 심각한 내홍이 빚어졌다. 훈구파는 신생국 조선의 정치와 사회경제적 기초를 닦아 수성(守成)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세조대를 지나면서 그들은 권력과 부를 움켜쥐고 각종 비리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조선 건국에 부정적이었던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의 후계자였던 사림파는, 기득권층으로 변신한 훈구파의 비리를 비판하면서 성종대 이후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떠올랐다. 그들은 성리학이 강조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내 몸을 닦은 뒤 남을 다스린다)의 이념을 무기로 국왕과 훈구파들에게 왕도정치를 펼치라고 촉구했다. 연산군, 중종, 인종대에 걸쳐 모두 4차례나 일어난 사화(士禍)는 삼자 사이에서 빚어진 정치적 갈등과 대립의 결과였다. 그 과정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수많은 사림들은 목숨을 잃거나 정치적으로 몰락했다.
15세기 조선, 사화는 속출했고
실권을 쥔 외척은 타락했다
백성들의 원망은 커져만 갔다
1419년 쓰시마를 정벌하던
성종대의 군사력은 과거일뿐
선조는 일본을 알 수도 없었다
1545년 이른바 을사사화(乙巳士禍)와 함께 출범한 명종대(1545~1567) 조정에서 실권을 장악한 것은 외척(外戚), 그리고 그들과 연결된 신료들이었다.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급서하자 이복동생 명종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명종을 대신하여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 윤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통해 정사를 처리하고, 왕후의 아우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윤원형은 바로 이이가 지목한 권간(권력을 독점한 간신)의 상징적 존재였다. 외척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이른바 척신정치(戚臣政治)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강릉(康陵). 조선 제13대 명종(재위 1545~1567)과 그의 부인인 심씨(1532~1575)의 능이다. 명종대는 그의 모후 문정왕후와 외숙 윤원형을 중심으로 이른바 척신정치가 기승을 부려 조선의 원기를 크게 갉아먹은 시기였다. 서울 노원구 화랑로 소재. 문화재청 누리집 |
척신정치 아래서 갖가지 모순들이 터져 나왔다. 척신들은 우선 인사권을 장악하여 조정 안팎의 관직에 자신의 마음에 드는 자들을 심었다. 지방 수령이나 변방 방어를 책임지는 병사(兵使), 수사(水使)들은 척신들에게 뇌물을 바쳐 청탁했던 인물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갯벌까지 파먹은 척신들의 부정 축재
“근래 백관(百官)이 직무에 태만하여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기는커녕 백성들로 하여금 원한을 품게 하는 자가 아주 많으니 가슴 아픈 일입니다. 감군어사(監軍御史)가 내려간 뒤로는 병사와 수사가 함부로 수탈을 자행하지 못하여 영중(營中)에 응대할 물건이 없으므로 자기를 천거해 준 사람이 요구하는 상수(喪需), 혼수(婚需) 등의 물건을 각 고을에 배정하여 공공연히 보내고 있습니다. 병사와 수사를 공천(公薦)으로 뽑지 않고 사청(私請)에 의해 썼기 때문에 그들이 부임한 뒤에 자기를 발탁해 준 사람의 은혜를 후하게 갚는다고 하니 듣는 사람마다 통분하고 있습니다.”(<명종실록> 1553년(명종 8) 3월)
척신들에게 청탁하여 관직을 얻은 자들이 척신들에게 바칠 뇌물을 백성들에게서 거둬들이고 있다는 비판이다.
인사상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윤원형 등은 권력을 배경으로 부정 축재를 자행하고 각종 비리를 저질러 엄청난 재물을 쌓았다. 먼저 토지를 확보하려고 갖은 수단을 모두 동원했다. 매입이나 개간 등 합법적인 수단 말고도 힘없는 백성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지방 백성들을 마구 동원하여 갯벌에 둑을 쌓고 거기서 생겨나는 광대한 토지를 차지했다. 갯벌에 둑을 쌓아 바닷물의 유입을 차단하고 몇 년이 지나면 소금기가 빠져 경작할 수 있는 땅이 생겨난다. 이렇게 만들어진 토지를 보통 해택지(海澤地), 언전(堰田)이라 부른다. 그들은 또한 백성들의 공물(貢物)을 징수하는 과정에도 개입하여 이익을 챙겼다. 이른바 방납(防納-백성들이 바칠 공물을 대신 납부하고 나중에 백성들에게 비싼 값을 받아들이는 행위)을 직접 벌이거나 그것을 담당하는 브로커나 상인들과 결탁하여 뒤를 봐주었다.
이렇게 얻어진 부는 또다른 부를 낳았다. 해택지 등에서 수확한 막대한 양의 곡물은 부상(富商) 등을 통해 면포나 은, 구리 등과 교환되었다. 또한 은광 개발을 위한 밑천으로 투자되기도 했다. 면포는 당시 일본에 다량으로 수출되고 있었고, 은은 명나라와의 무역에 투입되어 비단이나 생사 등을 수입하는 데 사용되었다. 비단 등은 다시 일본 상인들에게 전매하거나 국내의 부유층에게 판매했다. 이렇게 경작과 방납, 교역, 광산 개발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윤원형 등 척신 출신 권세가들은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 과정에서 별다른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양민들이 동원되어 척신 권세가들에게 사역되었다. 청탁 등을 통해 지방관에 임명된 인물들은 척신들의 앞잡이가 되어 이러한 불법 행위를 방조했다. 조정에서는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지방관들의 비리를 제어하고 백성들을 다독이려 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자연히 백성들의 원망이 커지고 동요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백정 출신 임꺽정(林巨正)의 반란이 1559년부터 1562년 사이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위력을 떨쳤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5세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이때엔 중국 옆에 놓인 조선을 실제보다 크게 그릴 정도로 대국 의식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6세기 들어 조선의 국력은 위축되는 추세였다. |
1419년 쓰시마 정벌 이후 조선은 일본인들을 포용하여 왜구 행위를 억제하는 회유책을 대일 정책의 기본으로 삼았다. 경상도의 삼포(三浦) 지역에 일본인들의 거주를 허용하고 그들이 경작과 어로, 무역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런데 15세기 중반부터 문제가 속출했다. 조선이 애초 거주를 허용했던 일본인의 수는 60호 정도였는데 그 수가 계속 늘어났다. 16세기 초가 되면 제포(薺浦)에 거주하는 인원만 400호를 넘어서고 삼포 전체로 치면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일본인들 가운데는 거주 지역을 벗어나 내륙을 횡행하거나 밀무역, 인신매매 등 일탈 행위를 일삼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조선은 자연히 일본인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시도했고, 쓰시마 출신이 중심이 된 일본인들은 그에 반발하여 사달이 일어났다. 1510년(중종 5) 발생한 삼포왜란이 그것이다.
조선은 폭동을 진압한 뒤 쓰시마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이윽고 쓰시마의 간청을 받아들여 1512년 제포를, 1522년(중종 17)에는 부산포를 다시 열어주었다. 하지만 일본의 도발은 그치지 않았다. 1544년(중종 39)에는 왜선 20척이 경상도 사량진(蛇梁鎭)에 돌입하여 약탈을 감행했다. 1555년(명종 10)에는 왕직(王直)이 이끄는 왜구 선단이 전라도에 침입하여 영암(靈巖)의 달량진(達梁鎭)을 함락시키는 을묘왜변까지 일어났다. 조선에서는 왜구가 충청도와 경기도 해안으로 북상하여 도성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대두되었다.
15세기 조선이 삼포를 열고 일본인들의 거주와 교역을 허용한 것은 그들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제로 1419년 쓰시마를 정벌했던 것에서 드러나듯이 상당한 수준의 군사력을 보유했던 성종대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16세기에 들어와 군사력을 비롯한 조선의 전반적인 국력은 하강 추세였다. 당연히 일본인들을 접대하고 통제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16세기 거듭되는 왜변을 겪으면서 조선의 대일 인식은 경직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을 부르는 명칭이 왜적(倭賊), 적왜(賊倭) 등 부정적인 것으로 고정되었다. 더욱이 일본에서 전국시대의 혼란이 이어졌던 것을 계기로 공식적인 사신 왕래마저 중단되면서 일본 내정에 대한 탐지 능력도 떨어지고 있었다.
1567년 조선에서는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했다. 바야흐로 척신들의 집권이 끝나고 사림들의 시대가 열렸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는 전국시대의 분열이 끝나가고 통일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었다. 급변하는 일본의 동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절실한 시기였다. 하지만 과거 척신정치가 남긴 폐단과 후유증을 치유하기에도 겨를이 없었던 조선은 일본을 제대로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조선은 일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침략을 맞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