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포퍼 원전+번역문

상대론은 죄악이다

이윤진이카루스 2025. 9. 5.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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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론은 죄악이다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오래되고 유명한 질문 뒤에 숨는 철학적 상대론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증오를 조장하는 거짓말 정치 선동과 같은 사악한 그것들로 길이 열릴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다수의 상대론적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인식했어야 하고 인식할 수 있었다. 버트런드 러셀은 그것을 알았고, 지식인의 배반(La Trahison des Clercs)(‘The Treason of the Intellectual’) 저자인 쥘리앙 방다(Julien Benda)도 알았다.

상대론은 지성인들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많은 범죄 중 한 가지 범죄이다. 상대론은 이성과 인간성에 대한 배반이다. 몇몇 철학자들에 의하여 옹호되는 소위 진리의 상대성은, 진리의 개념과 확실성의 개념을 혼동함으로부터 생긴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유인즉 확실성의 경우에 우리는 정말로 확실성의 등급들을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더 많은 신뢰 가능성이나 더 적은 신뢰 가능성. 확실성은, 항상 쟁점이 되는 것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도 상대적이다. 그래서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 진리와 확실성의 혼동이라고 그리고 몇몇 경우에서 그 혼동이 아주 분명하게 밝혀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은 법학과 법 집행에 아주 중요하다. ‘의심스러운 경우에 피고에게 유리하게 판단하라라는 표현과 배심원에 의한 재판이라는 개념으로 인하여 이것이 밝혀진다. 배심원들의 과제는, 자기들이 다루는 사건이 여전히 의심스러운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배심원이었던 사람은 누구나, 확실성은 주관적 판단의 문제인 반면 진실은 객관적임을 이해할 것이다. 이것은 배심원에게 닥치는 어려운 상황이다.

배심원들이 합의에 ㅡ 규약(convention)’ ㅡ 도달할 때 이것은 평결(verdict)’로 지칭된다. 평결은 자의적임과 거리가 멀다. 자기 지식을 최대한도로 발휘하여 그리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객관적 진실을 발견하려고 노력함이 모든 배심원의 의무이다. 그러나 동시에, 배심원은 자신의 불확실성에,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진실에 관하여 합당한 의심이 들면 배심원은 피고에게 유리하도록 판단해야 한다.

그 과제는 힘들고 책임이 따른다; 그리고 진실 탐구에서 언어적으로 언명된 평결로의 이동은 결정, 판단의 문제임이 그 과제로 인하여 분명하게 밝혀진다. 이것은 과학의 경우에도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 인하여, 의심의 여지 없이 내가 실증주의혹은 과학주의와 다시 한번 결합되어 있다는 결론이 생길 것이다. 이 표현들이 남용의 용어들로서 사용되고 있을지라도 이것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 용어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사실들을 왜곡한다는 것은 나에게 정말로 문제가 된다.

과학적 지식에 대한 나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학주의를 신봉하는 사

람이 아니다. 이유인즉 과학주의는 과학적 지식의 권위를 독단적으로 주장하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어떤 권위도 신뢰하지 않고 독단론에 항상 저항했다; 그리고 나는 특히 과학에서 독단론에 계속해서 저항한다. 과학자는 자기 이론을 신뢰해야 한다는 논지에 나는 반대한다. 나에 관한 한, E. M. 포스터(Forster)가 말하는 바와 같이, ‘나는 믿음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특히 과학에 대한 믿음을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기껏해야, 믿음은 윤리학에서 자리를 차지하는데 심지어 여기서도 몇 가지 사례들에서만이라고 나는 믿는다. 예를 들어 객관적 진리는 가치라고 ㅡ 다시 말해서, 아마도 존재하는 가장 큰 가치인 윤리적 가치 ㅡ 그리고 잔인성은 가장 큰 죄악이라고 나는 믿는다.

실재를 신뢰하지 않는 것과 인간과 동물이 겪는 고통의 무한한 중요성을 신뢰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인간의 소망과 인간의 선함의 실재와 중요성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이라고 내가 생각한다는 이유로만 나는 또한 실증주의자가 아니다.

나를 빈번히 겨냥하는 또 다른 비난은 다른 방식으로 답변되어야 한다. 이것은, 내가 회의론자라는 그리하여 내가 나 자신을 부정하고 있거나 헛소리하고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Tractatus] 6. 51에 따라서) 비난이다.

내가 진리에 (항진명제적이[恒眞命題的: tautological] 아닌) 대한 일반적 기준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한, 나를 회의론자로서 묘사하는 것은 (고전적 의미에서) 정말로 옳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합리적 사상가에게, 가령, 칸트나 비트겐슈타인이나 타스키(Tarski)에게 성립한다. 그리고 그들처럼 나도 고전적 논리를 (내가 비판의 추론 수단으로서 해석하는; 다시 말해서, 증명의 추론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반증의, elenchos의 추론 수단으로서) 수용한다. 그러나 나의 입장은, 오늘날 보통 회의론적으로 지칭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한 명의 철학자로서 나는 의심과 불확실성에 관심이 없는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주관적 상태들이기 때문이고 오래전에 주관적 확실성에 대한 탐구를 불필요한 것으로서 내가 포기했기 때문이다. 나의 관심을 끄는 문제는, 진리 탐구에서 또 다른 이론에 대하여 한 가지 이론을 선호하기 위한 객관적으로 비판적인 합리적 근거들이라는 문제이다. 현대 회의론자 누구도 나보다 앞서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나는 상당히 확신한다.

ㅡ 칼 포퍼, ‘나은 세상을 찾아서(In Search of a Better World)’, 1996, 5-7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