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과학은 분리될 수 없다
내가 철학을 보는 바와 같이, 철학은 과학들로부터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되고 정말로 결코 분리될 수도 없다. 역사적으로 서구의 과학 모두는, 세계 질서인 우주에 관한 그리스의 철학적 사념에서 나온 자손이다. 모든 과학자와 모든 철학자의 공통적 조상은 호메로스, 헤시오도스(Hesiod) 그리고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다. 그들에게 핵심적인 것은 우주의 구조 및, 우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라는 문제를 (내가 바라보는 바, 모든 철학에 결정적인 문제) 포함하여, 이 우주에서 우리의 위치이다. 그리고 심지어 과학이 철학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후에도, 철학적 탐구의 특징으로서 남은 것은 과학에 대한 비판적 탐구이고 과학이 발견한 것과 과학의 방법들에 대한 비판적 탐구이다. 뉴튼의 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는, 인류의 전체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인 가장 위대한 지성적 혁명을 표시한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그 저서는, 2천 년에 걸친 꿈의 성취를 표시한다; 그 저서는 과학의 성숙을, 그리고 철학으로부터 과학이 떨어져 나감을 표시한다. 뉴튼 자신은, 모든 위대한 과학자처럼, 철학자로 남았다; 그리고 그는 비판적 사상가이자 연구자로 남았고 자기 이론들에 대하여 의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벤틀리(Bentley)에게 보낸 편지에서 (1693년 2월 25일자) 자기 이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했는데 원격작용(action at a distance)을 포함한다 (이탤릭체는 내가 표시함):
중력이 틀림없이 물질에 선천적이고 내재적이며 본질적이라는 것은, 그리하여 한 물체가 또 다른 물체에게 원격으로 영향을 미치는데... 나에게 크게 터무니없는 일이어서 철학적 문제에서 유능한 사유 능력을 지닌 사람은 그 터무니없는 일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가 회의론과 신비주의에 도달한 것은 자신의 원격작용 이론 때문이었다. 무한하게 먼 우주의 영역 모두가 즉각적으로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동일한 것이 모든 영역에 동시에 도처에 존재하기 ㅡ 하느님이 도처에 존재하기 ㅡ 때문이라고 그가 추론했다. 그리하여 뉴튼이 자신의 신비적인 이론에 따라서 우주는 하느님의 감각중추(sensorium)라는 이론에 도달한 것은 이 원격작용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그가 그 이론으로 과학을 초월했고, 비판적이고 사변적 철학 및 사변적 종교를 결합한 이론. 우리는, 아인슈타인도 유사하게 동기를 부여받았음을 안다.
I
강단 철학에서 자체의 자연적이고 정말로 자체의 유일한 위치를 지니는 철학에, 몇 가지 매우 미묘하지만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예를 들어, 수리논리학(mathematical logic)과, 더 일반적으로 수리철학(philosophy of mathematics). 우리 세기에 이 분야들에서 이룩된 놀라운 진보에 의하여 나는 큰 감명을 받는다.
그러나 일반적 강단 철학에 관한 한, 버클리(Berkeley)가 ‘세세한 철학자들(minutes philosophers)’로 지칭한 것의 영향력에 나는 우려한다. 비판은 틀림없이 철학의 생명선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부사항에 몰두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우주론에 관한, 인간 지식에 관한, 윤리학에 관한 그리고 정치철학에 관한 커다란 문제들을 이해하지 않고 그리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진지하고 헌신적인 시도를 실행하지 않고 세세한 요점들에 대하여 세세하게 비판하면 내가 보기에 치명적이다. 어떤 노력을 들이면 혹시 오해되거나 잘못 해석될 인쇄된 구절이, 또 다른 비판적 철학 논문의 서술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히 훌륭한 것처럼 거의 보인다. 학풍고집(Scholasticism)이 그 용어의 최악의 의미에서, 넘쳐난다; 위대한 관념 모두는 단어들의 홍수에 익사한다. 동시에 특정 오만이나 무례가 ㅡ 예전에는 철학적 문헌에 드물었는데 ㅡ 학술지들의 많은 편집인에 의하여 사상과 독창성의 대담성에 대한 증거로서 수용되는 듯이 보인다.
모든 지성인이 자신이 처한 특권적 입장을 경계하는 것이 지성인의 의무라고 나는 믿는다. 지식인에게, 가능한 한 간단하고 명료하게 그리고 가능한 한 교양 있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의무가 있다; 그리고 인류를 에워싼 커다란 문제들을 결코 잊지 않고 새롭고 대담하지만 인내하는 사상을 요구하거나, 자신이 얼마나 지식이 없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는 소크라테스적 겸손을 요구하는 의무. 세세한 문제들을 지닌 그런 철학자들에 반대하여, 철학의 주요 과제는 우주에 관하여 그리고, 우리의 아는 능력 및 선과 악에 대한 우리의 능력을 포함하여 우주에서 우리의 위치에 관하여 비판적으로 사색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XII
나는 아마도 다소 결정적으로 비-강단적 철학으로써 마쳐야 할 것이다.
달에 처음 착륙한 일에 참여한 우주비행사 중 한 명은, 자신이 귀환할 때
간단하고 현명한 언급을 실행했다고 믿어진다 (나는 나의 기억으로부터 인용하고 있다): ‘나는 나의 시대에 많은 행성을 보았지만, 매번 지구를 나에게 달라.’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지혜일 뿐 아니라 철학적 지혜다. 우리가 이 훌륭하면서도 작은 행성에서 살아있다는 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를 ㅡ 혹은 왜 생명체와 같은 것들이 있어서 우리 행성을 그렇게 아름답게 만드는지 ㅡ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있고 우리에게 그것에 놀라고 그것에 감사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과학이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주에는 물질이 거의 비어있다; 그리고 물질이 있는 곳에는 그 물질이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상태로 도처에 있어서 사람이 살 수 없다. 생명체를 지닌 다른 행성이 많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우주에서 무작위로 한 곳을 선택한다면 저곳에서 생명을 지닌 물체를 발견할 가능성은 (우리가 지닌 현재 의심스러운 우주론을 근거로 계산되면) 0이거나 거의 0일 것이다. 그래서 생명체에게 아무튼 희귀한 것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귀중하다. 우리에게 이것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아마도 생각하지 않아서 생명을 싸구려로 다룬다; 혹은 아마도 우리의 이 아름다운 지구가, 의심의 여지 없이, 다소 지나치게 인구과잉이기 때문에 생명을 싸구려로 다룬다.
이런저런 정도로 모든 사람이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철학자이다. 생명이 끝나기 때문에 생명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반대 논증이 아마도 또한 제기될 것임을 알지 못한다: 생명에 끝이 없다면, 생명에 가치가 없을 터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생명의 가치를 우리가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부분적으로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한 상존하는 위험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ㅡ 칼 포퍼, ‘나은 세상을 찾아서(In Search of a Better World)’, 1996년, 184-6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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