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주의가 말하는 물리법칙과 사회법칙
물리법칙 즉, ‘자연의 법칙’은 도처에서 타당하고 항상 타당하다고 역사주의는 말한다; 이유인즉 물리 세계는 공간과 시간을 통틀어서 불변하는 물리적 균일성의 체계에 의하여 지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학적 법칙이나 사회적 생활의 법칙은 다양한 장소와 기간에서 상이하다. 그 규칙적 반복이 관찰될 수 있는 전형적인 사회적 환경이 많다고 역사주의가 인정할지라도, 사회생활에서 탐지될 수 있는 규칙성에 물리적 세계의 불변하는 규칙성이라는 특징이 있음을 역사주의는 부인한다. 이유인즉 그 규칙성이 역사에서, 그리고 문화에서 차이점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 규칙성은 특정 역사적 상황에 의존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예를 들어 추가 제한 없이 경제학 법칙을 말해서는 안 되고, 봉건시대의 혹은 초기 산업시대의 그리고 기타 등등의 경제 법칙만을 말해야 한다; 문제의 법칙이 우세했다고 전제되는 역사적 기간을 항상 언급하면서.
역사주의는, 사회법칙의 역사관련 상대성으로 인하여 물리학의 방법 대부분이 사회학에 적용될 수 없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가 근거하는 전형적인 역사주의적 논증들은 일반화, 실험, 사회적 현상들의 복잡성, 정확한 예측의 난관 그리고 방법론적 본질주의의 중요성과 관련된다. 나는 이 논증들을 차례로 다루겠다.
I 일반화
역사주의에 따르면, 물리과학들에서 일반화의 가능성과 일반화의 성공은 자연의 일반적 균일성(均一性: uniformity)에 의존한다. 유사한 상황에서 유사한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관찰에 ㅡ 아마도 전제로서 더 잘 기술되는 ㅡ 의존한다. 이 원리는 시간과 공간을 통틀어서 타당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물리학 방법의 기초를 이룬다고 언급된다.
역사주의는, 이 원리가 사회학에서 반드시 쓸모가 없다고 주장한다. 유사한 상황들은 단 하나의 역사적 기간 안에서 출현할 따름이다. 그 상황들은 한 기간으로부터 또 다른 기간으로 지속되는 적이 없다. 그리하여 사회 안에 장기적 일반화가 근거할 수 있을 터인 장기적 균일성(均一性: uniformity)이 없다 ㅡ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항상 무리를 지어 산다거나 특정 물건의 공급은 제한적이고 공기와 같은 다른 것들의 공급은 무제한이라거나 그래서 전자(前者)만이 시장 가치나 교환 가치를 지닌다는 진부한 표현에 의하여 기술되는 것과 같은 하찮은 규칙성을 우리가 무시하면 사회 안에 장기적 일반화가 근거할 수 있을 터인 장기적 균일성(均一性: uniformity)이 없다. 역사주의에 따르면, 이 한계를 무시하고 사회적 균일성(均一性: uniformities)에 대하여 일반화를 시도하는 방법은 문제의 규칙성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함축적으로 전제한다; 그리하여 방법론적으로 우활한(迂闊한: naive) 견해는 ㅡ 일반화 방법이 사회과학에 의하여 물리학으로부터 인수될 수 있다는 견해 ㅡ 허위이고 위험스럽게 오해를 낳는 사회학적 이론을 야기할 것이다. 그 견해는, 사회가 발전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이론일 것이다; 혹은 사회적 발전이 있다면 그 발전이 사회생활의 기본적 규칙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부인하는 이론.
그런 잘못된 이론의 배경에 통상적으로 변명적 목적이 있다고 역사주의자들은 흔히 강조한다; 그리고 정말로, 불변하는 사회학적 법칙이라는 전제는 그런 목적을 위하여 쉽게 오용될 수 있다. 그 전제는 먼저, 불쾌하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것들이 변하지 않는 자연법칙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에 수용되어야 한다는 논증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예를 들어 경제학의 ‘철칙(鐵則: inexorable laws)’은, 임금 협상에 대한 법률적 간섭이 무효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원용(援用)되었다. 두 번째, 지속적으로 그 전제를 변명하며 오용하면 불가능성이라는 느낌을 일반적으로 부추겨서 불가능한 것을 묵묵히 그리고 저항하지 않고 인내하는 각오를 조성하는 것이다. 지금 영원할 것 그리고 사건들의 진행에 영향을 미치려는 혹은 심지어 그 진행을 평가하려는 시도는 터무니없다: 사람들은 자연법칙들에 대항하여 논증하지 않고 그래서 자연법칙들을 전복하려는 시도는 재앙을 맞을 따름이다.
이것들은, 자연주의적 방법이 사회학에서 채택되어야 한다는 요구의 필연적 명제인 보수적이고 변명적이며 심지어 숙명론적 논증들이라고 역사주의자는 말한다.
사회적 균일성(均一性: uniformities)은 자연과학의 균일성과 크게 다르다고 주장함에 의하여 역사주의자는 그 논증들에 반대한다. 사회적 균일성은 한 기간에 또 다른 한 기간으로 변하고 인간의 활동은 그 균일성들 변화시키는 힘이다. 이유인즉 사회적 균일성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인공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균일성이 인간의 본성에 의존한다고 언급될지라도, 인간의 본성에 그 균일성을 변화시키고 혹시 통제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그 균일성은 인간의 본성에 의존한다. 그리하여 사태는 나아질 수도 있고 악화될 수도 있다: 능동적 개혁은 무효일 필요가 없다.
역사주의의 이 경향은, 능동적이 되라는 요구를 느끼는 사람들을 현혹한다; 현재 사태를 불가피한 것으로서 수용할 것을 거부하고 특히 인간사에 개입하려는 요구를 느끼는 사람들을 현혹한다. 능동성을 지향하는 그리고 여하한 종류의 만족에도 반대하는 경향은 ‘행동주의(activism)’로 지칭될 것이다. 17절과 18절에서 나는, 행동주의에 대한 역사주의의 관계들에 관하여 더 많이 말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유명한 역사주의자인 마르크스가 내놓은 잘 알려진 선동질을 인용하겠는데 그 선동질은 ‘행동주의적’ 자세를 두드러지게 표현한다: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요점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ㅡ 칼 포퍼,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 1976년, 5-8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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