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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주의의 반(反)-자연주의적 교설 (번역 수정본)

이윤진이카루스 2025. 10. 12. 15:39

역사주의의 빈곤 I장 역사주의의 반-자연주의적 교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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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역사주의의 반()-자연주의적 교설

 

사회학 분야에서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강력하게 반대하여, 물리학의 특징적 방법 중 몇 가지 방법이 사회학과 물리학 사이의 깊은 차이점들 때문에 사회과학들에 적용될 수 없다고 역사주의는 주장한다. 물리법칙 즉, ‘자연의 법칙은 도처에서 타당하고 항상 타당하다고 역사주의는 말한다; 이유인즉 물리 세계는 공간과 시간을 통틀어서 불변하는 물리적 균일성의 체계에 의하여 지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학적 법칙이나 사회적 생활의 법칙은 다양한 장소와 기간에서 상이하다. 그 규칙적 반복이 관찰될 수 있는 전형적인 사회적 환경이 많다고 역사주의가 인정할지라도, 사회생활에서 탐지될 수 있는 규칙성에 물리적 세계의 불변하는 규칙성이라는 특징이 있음을 역사주의는 부인한다. 이유인즉 그 규칙성이 역사에서, 그리고 문화에서 차이점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 규칙성은 특정 역사적 상황에 의존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예를 들어 추가 제한 없이 경제학 법칙을 말해서는 안 되고, 봉건시대의 혹은 초기 산업시대의 그리고 기타 등등의 경제 법칙만을 말해야 한다; 문제의 법칙이 우세했다고 전제되는 역사적 기간을 항상 언급하면서.

역사주의는, 사회법칙의 역사관련 상대성으로 인하여 물리학의 방법 대부분이 사회학에 적용될 수 없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가 근거하는 전형적인 역사주의적 논증들은 일반화, 실험, 사회적 현상들의 복잡성, 정확한 예측의 난관 그리고 방법론적 본질주의의 중요성과 관련된다. 나는 이 논증들을 차례로 다루겠다.

 

I 일반화

역사주의에 따르면, 물리과학들에서 일반화의 가능성과 일반화의 성공은 자연의 일반적 균일성(均一性: uniformity)에 의존한다. 유사한 상황에서 유사한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관찰에 ㅡ 아마도 전제로서 더 잘 기술되는 ㅡ 의존한다. 이 원리는 시간과 공간을 통틀어서 타당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물리학 방법의 기초를 이룬다고 언급된다.

역사주의는, 이 원리가 사회학에서 반드시 쓸모가 없다고 주장한다. 유사한 상황들은 단 하나의 역사적 기간 안에서 출현할 따름이다. 그 상황들은 한 기간으로부터 또 다른 기간으로 지속되는 적이 없다. 그리하여 사회 안에 장기적 일반화가 근거할 수 있을 터인 장기적 균일성(均一性: uniformity)이 없다 ㅡ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항상 무리를 지어 산다거나 특정 물건의 공급은 제한적이고 공기와 같은 다른 것들의 공급은 무제한이라거나 그래서 전자(前者)만이 시장 가치나 교환 가치를 지닌다는 진부한 표현에 의하여 기술되는 것과 같은 하찮은 규칙성을 우리가 무시하면 사회 안에 장기적 일반화가 근거할 수 있을 터인 장기적 균일성(均一性: uniformity)이 없다. 역사주의에 따르면, 이 한계를 무시하고 사회적 균일성(均一性: uniformities)에 대하여 일반화를 시도하는 방법은 문제의 규칙성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함축적으로 전제한다; 그리하여 방법론적으로 우활한(迂闊: naive) 견해는 ㅡ 일반화 방법이 사회과학에 의하여 물리학으로부터 인수될 수 있다는 견해 ㅡ 허위이고 위험스럽게 오해를 낳는 사회학적 이론을 야기할 것이다. 그 견해는, 사회가 발전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이론일 것이다; 혹은 사회적 발전이 있다면 그 발전이 사회생활의 기본적 규칙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부인하는 이론.

그런 잘못된 이론의 배경에 통상적으로 변명적 목적이 있다고 역사주의자들은 흔히 강조한다; 그리고 정말로, 불변하는 사회학적 법칙이라는 전제는 그런 목적을 위하여 쉽게 오용될 수 있다. 그 전제는 먼저, 불쾌하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것들이 변하지 않는 자연법칙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에 수용되어야 한다는 논증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예를 들어 경제학의 철칙(鐵則: inexorable laws)’, 임금 협상에 대한 법률적 간섭이 무효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원용(援用)되었다. 두 번째, 지속적으로 그 전제를 변명하며 오용하면 불가능성이라는 느낌을 일반적으로 부추겨서 불가능한 것을 묵묵히 그리고 저항하지 않고 인내하는 각오를 조성하는 것이다. 지금 영원할 것 그리고 사건들의 진행에 영향을 미치려는 혹은 심지어 그 진행을 평가하려는 시도는 터무니없다: 사람들은 자연법칙들에 대항하여 논증하지 않고 그래서 자연법칙들을 전복하려는 시도는 재앙을 맞을 따름이다.

이것들은, 자연주의적 방법이 사회학에서 채택되어야 한다는 요구의 필연적 명제인 보수적이고 변명적이며 심지어 숙명론적 논증들이라고 역사주의자는 말한다.

사회적 균일성(均一性: uniformities)은 자연과학의 균일성과 크게 다르다고 주장함에 의하여 역사주의자는 그 논증들에 반대한다. 사회적 균일성은 한 기간에 또 다른 한 기간으로 변하고 인간의 활동은 그 균일성들 변화시키는 힘이다. 이유인즉 사회적 균일성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인공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균일성이 인간의 본성에 의존한다고 언급될지라도, 인간의 본성에 그 균일성을 변화시키고 혹시 통제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그 균일성은 인간의 본성에 의존한다. 그리하여 사태는 나아질 수도 있고 악화될 수도 있다: 능동적 개혁은 무효일 필요가 없다.

역사주의의 이 경향은, 능동적이 되라는 요구를 느끼는 사람들을 현혹한다; 현재 사태를 불가피한 것으로서 수용할 것을 거부하고 특히 인간사에 개입하려는 요구를 느끼는 사람들을 현혹한다. 능동성을 지향하는 그리고 여하한 종류의 만족에도 반대하는 경향은 행동주의(activism)로 지칭될 것이다. 17절과 18절에서 나는, 행동주의에 대한 역사주의의 관계들에 관하여 더 많이 말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유명한 역사주의자인 마르크스가 내놓은 잘 알려진 선동질을 인용하겠는데 그 선동질은 행동주의적자세를 두드러지게 표현한다: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요점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2 실험

물리학은 실험이라는 방법을 이용한다; 다시 말해서, 물리학은, 인위적 소외인 인위적 통제를 도입하고 그리하여 유사한 상황의 재현과 특정 결과의 후속적 산출을 보장한다. 이 방법은 분명히, 상황이 비슷한 곳에서 비슷한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는 관념에 근거한다. 이 방법은 사회학에서 적용될 수 없다고 역사주의자는 주장한다. 또한 그 방법이 적용될 수 있을지라도, 유용하지 않을 터라고 역사주의자는 논증한다. 이유인즉 유사한 상황은 단 하나의 기간이라는 한계 내부에서만 발생하기에 실험의 결과는 매우 제한된 의미를 지닐 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위적으로 소외시키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사회학에서 저 요인들이 정확하게 제거될 터이다. 로빈슨 크루소와 그가 경험한 소외된 개인적 경제는, 그 문제들이 정확하게 개인과 무리의 경제적 상호작용으로부터 출현하는 경제라는 귀중한 모형이 절대로 될 수 없다.

실제로 귀중한 실험은 가능하지 않다고 추가적으로 논증된다. 사회학에서 대규모 실험은 물리학적 의미에서 결코 실험이 아니다. 그 실험은 지식 같은 것을 진전시키려고가 아니라 정치적 성공을 이룩하려고 실시된다. 그 실험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실험실에서 실행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바로 그 실험의 실행으로 인하여 사회환경이 변한다. 그 실험은 정확하게 유사한 환경에서 결코 반복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환경은 그 실험이 처음 실행됨에 의하여 변했기 때문이다.

 

3 참신성

방금 언급된 논증에 상세한 설명을 부여할 가치가 있다. 정확하게 유사한 환경에서 대규모 사회적 실험을 반복하는 가능성을 역사주의는 부인하는데 왜냐하면 두 번째 실험의 환경이, 그 실험이 이전에 실시되었다는 사실에 의하여 틀림없이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했다. 이 논증은, 사회가 생명체처럼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회의 역사라고 지칭하는 것에 대하여 일종의 기억을 지닌다는 관념에 의거한다.

생물학에서, 우리는 어떤 생명체의 생명-역사를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생명체는 과거의 사건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조건이 지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사건이 반복된다면, 경험하는 생명체에 관하여 그 사건에 참신함이라는 자체의 특징이 없어지고 습관이 퍼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정확하게, 반복되는 사건에 대한 경험이 원래 사건에 대한 경험과 동일하지 않은 이유이다 ㅡ 반복에 대한 경험이 새로운 이유이다. 그리하여 관찰된 사건의 반복은, 관찰자에게서 새로운 경험의 출현에 부합할 수 있다. 그 반복으로 인하여 새로운 습관이 형성되기 때문에, 반복으로 인하여 새롭고 습관적 상황이 생겨난다. 동일한 생명체에 관하여 우리가 특정 실험을 반복하는 상황의 ㅡ 내부적 및 외부적 ㅡ 총계는 그리하여, 우리가 진정한 반복을 언급하기에 충분히 유사할 리가 없다. 이유인즉 심지어 환경적 상황의 정확한 반복도 생명체 안에서 내부적 상황과 결합될 터이기 때문이다: 생명체는 경험에 의하여 배운다.

역사주의에 의하면, 사회에 대해서도 동일한 것이 참으로 성립하는데 왜냐하면 사회도 또한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회에도 역시 자체의 역사가 있다. 사회는 자체 역사의 (부분적) 반복들로부터 서서히 배울 따름일 것이지만, 사회가 자체의 과거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조건이 주어지는 한, 사회가 정말로 배운다는 것은 의심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전통과 전통적 충성심 및 원한, 신뢰와 불신은 사회생활에서 자체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터이다. 그리하여 실제적 반복은 사회의 역사에서 틀림없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특징을 지닌 사건이 출현할 것이라고 우리가 기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는 반복할지도 모른다 ㅡ 그러나 특히 관련된 사건이 역사적 중요성을 띤다면, 그리고 그 사건이 사회에 지속적 영향을 미친다면 동일한 수준에서 결코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물리학에 의하여 서술되는 세계에서 진정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은 발생할 수 없다. 새로운 엔진이 발명될 것이지만 우리는 항상 그 엔진을 새롭지 않은 것인 원소들의 재배치로서 분석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의 새로움은 배치(arrangements)나 결합(combinations)의 새로움일 따름이다. 이것과 정반대로, 사회적 새로움은 생물학적 새로움처럼 근본적 종류의 새로움이라고 역사주의자는 주장한다. 그 새로움은 배치(arrangements)의 참신함으로 환원될 수 없는 실제적 새로움이다. 이유인즉 사회생활에서 새로운 배치 내의 동일한 옛 요인들이 결코 실제적으로 동일한 옛 요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정확하게 반복되지 않는 곳에서 실제적 참신함이 틀림없이 항상 출현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의 새로운 단계나 기간의 전개를 고려하면 중요한 것으로 믿어지는데 그 단계나 기간 각각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다.

실제로 새로운 기간의 출현보다 더 큰 중요성을 띤 것은 없다고 역사주의는 주장한다. 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회생활의 면모는, 물리학이라는 영역에서 참신한 것을 익숙한 요소들의 재배치(re-arrangements)로서 간주함에 의하여 우리가 그 참신한 것을 설명할 때, 우리가 따르는 데 익숙해진 노선을 따라서 조사될 수 없다. 물리학의 통상적 방법이 사회에 적용될 수 있을지라도, 그 방법은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에 결코 적용될 수 없을 터이다: 사회를 기간들로 구분하는 것, 그리고 참신함의 출현이라는 특징에 결코 적용될 수 없을 터이다. 우리가 사회적 새로움의 중요성을 파악하자마자, 통상적인 물리학적 방법을 사회학의 문제에 적용하면 사회적 전개라는 문제를 우리가 이해하는 데 도움받을 수 있다는 관념을 우리가 포기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 새로움에 추가적 면모가 있다. 사회생활에서 모든 개별적 사건인 특정 모든 사회적 사건은 어떤 의미에서 새롭다고 언급될 수 있음을 우리가 알았다. 그 사건은 다른 사건들과 함께 분류될 것이다; 그 사건은 특정 면모에서 저 사건들을 닮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은 매우 확정적 정도로 항상 독특할 것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사회학적 설명에 관한 한 물리학에서의 상황과 두드러지게 다른 상황이 생긴다. 사회생활을 분석함에 의하여 특정 사건이 어떻게 그리고 왜 발생했는지를 우리가 직관적으로 발견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될 수 있다; 그 특정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ㅡ 그 사건과 다른 사건들에 미친 그 사건의 영향을 야기한 힘(forces) ㅡ 우리가 분명하게 이해할 것이라고 상상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반적 용어들로 그런 인과적 연결고리들에 대한 서술로서 기능할 터인 일반적 법칙을 우리가 정식화할 수 없음을 우리는 발견할 것이다. 이유인즉 우리가 발견한 특정 힘(forces)에 의하여 올바르게 설명될 수 있을 터인 것은 단지 한 가지 특정 사회학적 상황이고 다른 사회학적 상황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힘(forces)은 독특할 가능성이 높다: 그 힘(forces)은 이 특정 사회적 상황에서 단지 한번 출현할 것이고 다시 출현하지는 않을 것이다.

 

4 복잡성

방금 개괄된 방법론적 상황에 몇 가지 추가적 면모가 있다. 매우 빈번하게 토론된 (그리고 여기서 토론되지 않을) 한 가지 면모는 어떤 독특한 개성들의 사회학적 역할이다. 이 면모 중 또 다른 면모는 사회적 현상의 복잡성이다. 물리학에서 우리는, 훨씬 덜 복잡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험적으로 소외시키는 방법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우리는 문제를 더욱 단순화한다. 이 방법이 사회학에서 적용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중의 복잡성과 ㅡ 인위적 소외가 불가능함으로부터 발생하는 복잡성과, 사회생활은 개인의 정신적 삶을 다시 말해서 심리학을 전제하는 자연적 현상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복잡성 ㅡ 대면하는데 심리학은 반대로 생물학을 전제하고 생물학은 다시 화학과 물리학을 전제한다. 사회학이 이 과학들의 위계에서 마지막에 온다는 사실은, 사회생활에 포함된 요인들의 엄청난 복잡성을 우리에 보여준다. 물리학 분야에서 균일성(均一性: uniformities)과 같은 변치 않은 사회학적 균일성이 있을지라도, 이 이중적 복잡성 때문에 우리는 그 균일성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균일성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 균일성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한다고 주장해도 소용이 없다.

 

 

5 예측의 부정확성

역사주의에 예측의 중요성을 과학의 과제 중 한 가지 과제로서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역사주의의 친()-자연주의적 교설에 대한 토론에서 밝혀질 것이다. (이런 면에서, 역사관련 예언이 사회과학의 과제 중 한 가지 과제라고 내가 믿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 과제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예측은, 사회적 구조의 복잡성 때문만이 아니라 예측과 예측되는 사건 사이의 상호연계로부터 출현하는 고유한 복잡성 때문에도 틀림없이 매우 어렵다고 역사주의는 논증한다.

예측이 예측되는 사건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념은 매우 오래된 관념이다. 오이디푸스(Oedipus)는 전설 속에서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친아버지를 죽였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하여, 그의 친아버지는 그 예언의 직접적 결과로써 그를 버렸다. 이것이, 예측되는 사건을 야기하는 경향이 그 영향에 있든 그 사건을 예방하는 경향이 그 영향에 있든, 예측되는 사건에 대한 예측의 영향에 관하여 (혹은 더 일반적으로, 정보가 언급하는 상황에 대한 정보 항목의 영향에 관하여) 내가 오이디푸스 효과(Oedipus effect)라는 명칭을 제안하는 이유이다.

역사주의자들은 최근에, 이런 종류의 영향이 사회과학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 영향이 정확한 예측을 실행하는 어려움을 증대시켜서 그 예측의 객관성을 위협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회과학이 모든 종류의 사회적 사실과 사건에 대하여 정확한 과학적 예보를 허용할 정도로 언젠가 크게 발전될 수 있을 터라는 전제로부터 터무니없는 결과가 귀결될 것이라고 그리하여 이 전제는 순전히 논리적 근거들을 토대로 반박될 수 있다고 역사주의자들은 말한다. 이유인즉, 그런 참신한 종류의 과학적인 사회적 달력이 구축될 수 있어서 알려질 수 있다면 (그 달력은 원칙적으로 누군가에 의하여 발견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비밀로 유지될 수 없을 터이다) 그 달력으로 인하여 그 달력이 예측하는 것을 뒤엎을 터인 행동이 틀림없이 나타날 터이다. 예를 들어 주가가 사흘 동안 올랐다가 그다음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되었다고 가정하라. 분명히, 시장과 관련된 모든 사람은 세 번째 날에 매각하여 그날 가격하락을 부채질하여 예측을 오류로 판정할 터이다. 요컨대 사회적 사건에 대하여 정확하고 상세한 달력이라는 관념은 자기-모순적이다; 그리고 정확하게 상세한 과학적인 사회적 예측은 그리하여 불가능하다.

 

6 객관성과 평가

사회과학에서 예측의 난관을 강조하여 역사주의는, 예측되는 사건에 대한 예측의 영향 분석에 근거한 논증을 개진하는 것을 우리가 알았다.

그러나 역사주의에 따르면, 특정 상황에서 이 영향으로 인하여 예측하는 관찰자가 심각한 반향을 경험할 수 있다. 심지어 물리학에서도 유사한 고찰이 역할을 수행하는데 물리학에서 모든 관찰이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 사이에서 에너지 교환에 근거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통상적으로 무시될 수 있는 물리학적 불확실성이 생기는데 그 불확실성은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하여 서술된다. 이 불확실성이 관찰되는 대상과 관찰하는 주체 사이의 상호작용에 기인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가능한데 왜냐하면 두 가지 모두가 행위와 상호작용의 동일한 물리적 세상에 속하기 때문이다. 보어(Bohr)가 지적한 바와 같이, 물리학에 이 상황에 대한 다른 과학들 특히 생물학과 심리학에서 유사점이 있다. 그러나 과학자와 그의 대상이 사회과학에서보다 더 큰 중요성을 띠는 동일한 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은 어디에도 없는데 사회과학에서 그 사실로 인하여 예측의 불확실성이 생겨나고 (밝혀진 바와 같이) 그 불확실성은 때때로 커다란 실천적 중요성을 띤다.

사회과학에서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 사이인 주체와 대상 사이의 완벽하고도 복잡한 상호작용과 우리가 직면한다. 아마도 미래 사건을 만들어낼 경향의 존재에 대한 인식과, 나아가, 예측 자체가 아마도 예측되는 사건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인식은 예측의 내용에 반향을 일으키기 쉽다; 그리고 그 반향은 아마도 사회과학에서 예측의 그리고 다른 연구 결과의 객관성을 위중하게 훼손하는 그런 종류일 것이다.

예측이란, 다른 사회적 사건과 그리고 그 사건 가운데서 예측이 예언하는 사회적 사건과 상호작용을 수행할 사회적 사건이다. 우리가 안 바와 같이 예측은 이 사건을 재촉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예측이 다른 방식들로 이 사건에 영향을 미칠 것임을 알기 쉽다. 예측은, 극단적 경우에, 심지어 자체가 예언하는 사건을 일으킬 것이다: 그 사건은 예언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전혀 발생하지 않았을 터이다. 다른 극단에서 임박한 사건에 대한 예측은 그 사건의 예방을 야기할 것이다 (그리하여 의도적으로나 태만하게 그 사건에 대한 예측을 하지 않음에 의하여 사회과학자는 그 사건을 야기할 수 있을 터이거나 그 사건이 발생하도록 만들 터이다). 이 양 극단 사이에 분명히 많은 중간적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을 예측하는 행위와 예측을 하지 않는 행위는 아마도 모든 종류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제 사회과학자들이 틀림없이 궁극적으로 이 가능성을 인식하게 될 것임은 명백하다. 예를 들어 사회과학자는 자기의 예측이 어떤 것을 발생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그것을 예언할 것이다. 혹은 특정 사건이 예상될 수 있음을 사회과학자는 부인하고 그리하여 그 사건을 예방할 것이다. 그리고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그는, 과학적 객관성을 보장하는 듯이 보이는 원칙을 준수하고 있을 것이다: 진리를 그리고 진리만을 말하는 원칙을 준수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과학자가 진리를 말했지라도, 그가 과학적 객관성을 준수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없다; 이유인즉 예측을 (목전의 사건이 완수하는) 실행함에서 그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선호한 방향으로 저 사건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주의자는, 이 묘사가 다소 도식적임을 인정할 것이지만, 그 묘사가 사회과학의 거의 모든 장()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한 가지 요점을 선명하게 드러낸다고 그는 주장할 것이다. 과학자의 선언과 사회생활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런 선언의 진실성뿐 아니라 미래 발전사항에 미치는 그 선언의 실제적 영향 또한 고찰해야 하는 상황이 거의 변함없이 출현한다. 사회과학자는 진실을 발견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틀림없이 사회에 확정적 영향을 항상 미치고 있다. 그의 선언이 정말로 영향을 발휘한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하여 그 선언의 객관성이 파괴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회과학자가 진실을 그리고 진실만을 발견하려고 실제로 노력한다고 전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주의자는, 우리가 서술한 상황이 우리의 전제에 있는 난제를 불러온다고 지적할 것이다. 이유인즉 편향과 관심이 과학적 이론의 내용과 예측에 그렇게 영향을 미치는 곳에서 편견이 결정되어 회피될 수 있는지가 틀림없이 매우 의심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물리학에서 만나는 객관적이고 이상적 진리 추구를 닮은 것이 사회과학에 없음을 발견하고 놀랄 필요가 우리에게 없다. 우리는, 사회생활에서 발견될 수 있는 만큼 많은 경향을 사회과학들에서 발견하리라 기대해야 한다; 관심이 있는 만큼 많은 관점을 발견하리라 기대해야 한다. 이 역사주의적 논증이, 객관성과 진리라는 이상이 함께 성공만이 ㅡ 정치적 성공 ㅡ 결정적일 수 있는 사회과학에서 적용될 수 없다고 믿는 저 극단적 형태의 상대주의를 야기하지 않는지가 질문될 것이다.

이 논증을 예시하기 위하여 역사주의자는, 사회적 발전의 한 기간에 본질적 특정 경향이 있을 때마다 이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학적 이론 발견을 우리가 기대할 것임을 지적할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과학은, 새로운 사회적 기간을 불러오는 데 도움을 주는 산파로서 기능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과학은, 보수적 이익의 통제를 받아, 임박한 사회적 변화를 늦추는 데 동등하게 잘 작동할 수 있다.

그런 견해는, 특정 역사적 기간에 우세한 편애와 이해관계에 대한 다양한 사회학적 교설과 학파 사이에서 차이점들의 관련성을 (‘역사론[historism]으로 때때로 지칭되는 접근방식으로 내가 역사주의[historicism]’로 지칭하는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 되는 접근방식) 혹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 혹은 계급적 이해관계들에 대한 그 차이점들의 관련성을 (때때로 지식의 사회학[sociology of knowledge]으로 지칭되는 접근방식) 언급함에 의하여, 그 차이점들을 분석하여 설명하는 가능성을 제안할 것이다.

 

7 전체론(HOLISM)

역사주의자 대부분은, 물리과학의 방법이 사회과학에 적용될 수 없는 훨씬 더 깊은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모든 생물학적과학, 다시 말해서 살아있는 대상을 다루는 모든 과학처럼 사회학은 원자론적으로가 아니라 지금 전체론적방식으로 지칭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유인즉 사회학의 대상인 사회적 집단은 사람들의 총화만으로서 간주되어서는 결코 안 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집단은 단순한 그 집단의 구성원들의 총화 이상이며 그 집단은 또한 그 구성원 중 어떤 구성원들 사이에서 어느 순간에도 존재하는 개인적 관계만의 단순한 총화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지어 세 명의 구성원으로 구성되는 단순한 집단에서 쉽게 알려진다. AB에 의하여 구성된 집단은, 동일한 구성원들로 구성되지만 BC에 의하여 구성되는 집단과 특징에서 다를 것이다. 이것은, 집단에 자체의 역사가 있다고 그리고 집단의 구조는 큰 정도까지 자체의 역사에 의존한다고 언급함에 의하여 그 의미가 예시할 것이다 (‘참신함에 관한 위 3절 또한 참조). 집단은 자체의 덜 중요한 구성원 중 몇몇을 잃을지라도 쉽게 자체의 특징을 온전하게 간직할 수 있다. 그리고 집단의 원래 구성원 모두가 다른 구성원들에 의하여 대체될지라도 집단은 자체의 원래 특징을 많이 지킬 것이라고 심지어 상상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집단을 구성하는 동일 구성원들이, 한 명씩 집단에 들어가지 않고 대신 새로운 집단을 구성했다면, 아마도 매우 다른 집단을 구성했을 것이다. 그 집단 구성원의 개성은 집단의 역사와 구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지만, 이 사실로 인하여 그 집단이 자체의 역사와 구조를 갖지 못하지 않는다; 또한 이 사실로 인하여 그 집단이 구성원들의 개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 않는다.

모든 사회적 집단에 자기들의 전통, 자기들의 제도, 자기들의 의식(儀式: rites)이 있다. 역사주의는, 우리가 집단의 현재 상태로서 집단을 이해하여 설명하고 싶어 한다면 그리고 집단의 미래 발전을 이해하여 혹시 예견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집단의 역사와 집단의 전통 및 제도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집단의 전체론적 특징이자 그런 집단은 결코 그 구성원들의 총화만으로서 완벽하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하여, 물리학에서 참신성과 사회생활에서 참신성에 대한 역사주의적 구분이 조명되는데 물리학에서 참신성은 그 요소들 및 요인들이 새롭지 않은 요소들 및 요인들의 새로운 결합과 배열을 포함하고 사회생활에서 참신성은 실제적이어서 단순한 배열의 참신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이유인즉 일반적 사회구조가 그 구조의 부분들이나 구성원들의 결합들로서 설명될 수 없다면 분명히 이 방법에 의하여 새로운 사회구조를 설명하기가 틀림없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물리적 구조는 그 구조의 기하학적 배치와 함께, 단순히 배열로서나 단순히 그 구조의 부분들의 합계로서 설명될 수 있다고 역사주의는 주장한다. 예를 들어 태양계를 고려하라; 태양계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흥미로울지라도 그리고 이 연구가 태양계의 현재 상태를 조명할지라도, 어떤 의미에서 이 상태가 태양계의 역사와 독립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안다. 태양계의 구조, 태양계의 미래 움직임 그리고 전개사항은 태양계 행성들의 현재 배열에 의하여 완벽하게 결정된다. 어느 순간의 태양계 구성원들의 상대적 위치, 질량 그리고 운동량을 고려하면 태양계의 미래 움직임은 모두 완벽하게 결정된다. 행성 중 어느 행성이 더 오래되었는지, 혹은 어느 행성이 외부로부터 태양계 내부로 반입되었는지에 관하여 우리는 추가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구조의 역사는 흥미로울지라도, 구조의 행태와 구조의 기제(機制: mechanism) 그리고 구조의 미래 전개를 우리가 이해하는 데 기여하는 바가 없다. 물리적 구조가 이런 점에서 사회적 구조와 크게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후자(後者), 그것의 순간적 배열에 대하여 우리에게 완벽한 지식이 있을지라도, 그 역사에 대한 신중한 연구가 없다면 이해될 수 없고 또한 그 미래도 예언될 수 없다.

그런 고찰로 인하여, 역사주의와 소위 사회구조에 대한 생물학적 혹은 유기체적 이론 ㅡ 살아있는 생명체에 유추함에 의하여 사회집단을 해석하는 이론 ㅡ 사이에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강력한 제안이 나온다. 정말로 전체론은 일반적인 생물학적 현상의 특징이라고 언급되고 전체론적 접근방식은, 다양한 생명체의 역사가 생명체들의 행태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고찰함에 필수불가결한 것으로서 간주된다. 그리하여 역사주의의 전체론적 논증은, 반드시 사회구조에 대한 생물학적 이론의 수용을 불러올 필요가 없을지라도, 사회집단과 생명체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띤다. 유사하게 집단-전통을 지닌 것으로서의 집단-정신의 존재라는 유명한 이론은, 반드시 자체가 역사주의적 논증의 일부가 아닐지라도, 전체론적 견해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8 직관적 이해

참신성, 복잡성, 유기성(有機性: organicity), 전체론 그리고 사회생활의 역사가 기간에 속하는 방식과 같은 사회생활의 어떤 특징적 면모를 우리가 지금까지 주로 다루었다; 역사주의에 따르면 물리학의 특정 전형적 방법을 사회과학에 적용 불가능하게 만드는 면모를 우리가 지금까지 주로 다루었다. 그리하여 더 역사관련 접근방법이 사회적 연구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다양한 사회집단의 역사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역사주의의 반()-자연주의적 견해의 일부이고, 이 견해는 역사주의와 변함없이 결합되지 않을지라도 역사주의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는 방법론적 교설로 때때로 전개된다.

나는 직관적 이해라는 교설의 세 가지 다른 변형을 구분하자고 제안한다. 첫 번째 변형은, 사회적 사건은 그 사건을 야기한 힘(forces)을 통하여 분석될 때 다시 말해서 관련된 개인과 집단 및 자기들의 목적나 이해관계 그리고 자기들이 다룰 수 있는 권력이 알려질 때 이해된다고 주장한다. 개인이나 집단의 행위는 여기서 자기들이 지닌 목적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ㅡ 자기들의 실제적 이익이나 적어도 자기들이 상상한 이익을 촉진하는 것으로서 ㅡ 이해된다. 사회학의 방법은 여기서, 특정 목적을 향하여 겨냥된 합리적이거나 비합리적 활동의 상상적 재구축으로서 간주된다.

두 번째 변형은 더 멀리 나아간다. 그 변형은, 그런 분석이 특히 개인적 행위나 집단 활동에 대한 이해와 관련하여 필요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변형은, 사회생활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사회적 사건 예를 들어 특정 정치적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그 행위가 어떻게 그리고 왜 발생했는지 목적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저것에 덧붙여, 그 사건이 발생한 중요성인 그 사건의 의미를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의미중요성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두 번째 변형으로서 기술하고 있는 관점에서, 답변은 다음이 될 터이다: 사회적 사건은 특정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즉 그 사건은 궁극적으로 다른 사건들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사건이 존재함에 의하여 넓은 범위의 다른 사건들의 상황적 가치가 변한다. 그 사건은, 저 특정 분야에서 모든 대상에 대한 그리고 모든 행위에 대한 재()-방향설정과 재()-해석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상황을 야기한다. 가령, 특정 국가에서 새로운 군대의 창설과 같은 사건을 이해하기 위하여 의도와 이해관계 및 기타 등등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행위의 상황적 가치를 또한 분석하지 않고 우리는 이 행위의 의미나 중요성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저 때까지 자기 방어를 위하여 완벽하게 충분했던 또 다른 국가의 군사력이 지금은 완전히 부적당하게 되었을 것. 요컨대 물리학적이든 심지어 심리학적이든, 추가적인 사실적 변화가 심지어 발생하기 이전에 전체 사회적 상황이 변했을 것이다; 이유인즉 누군가에 의하여 변화가 주목되기 오래전에 상황이 변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회생활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사실적 원인과 결과에 대한, 다시 말해서 행위에 의하여 야기되는 동기와 이해관계 및 반응에 대한 단순한 분석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건을, 전체 안에서 어떤 특징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사건은 전체에 대한 자체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체의 중요성을 띠며, 그리하여 자체의 중요성은 전체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결정된다.

직관적 이해라는 교설의 세 번째 변형은, 첫 번째 및 두 번째 변형에 의하여 주장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수용하는 반면, 훨씬 더 멀리 나아간다. 그 변형은, 사회적 사건의 의미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사건의 발생과 결과 및 상황적 가치에 대한 분석보다 더 많은 것이 요구된다고 믿는다. 그런 분석에 덧붙여, 문제의 기간에 우세한 객관적이고 기초를 이루는 역사적 추세와 경향을 (특정 전통이나 권력의 성쇠와 같은) 분석하고 그런 추세가 명백해지는 역사적 절차에 대하여 문제의 사건이 공헌한 바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드레퓌스(Dreyfus) 사건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그 사건의 발생과 결과 및 상황적 가치를 분석함에 더하여, 그 사건은 민주적이고 독재적이며 진보적이고 반동적 프랑스 공화국의 발전에서 두 가지 역사적 경향 사이의 갈등 표출이었다는 사실을 통찰할 필요가 있다.

직관적 이해라는 방법에서 이 세 번째 변형은, 역사적 추세나 경향에 대한 자체의 강조와 동시에, 어느 정도까지 한 가지 역사적 기간에서 또 다른 역사적 기간으로 유추의 추론을 적용하자고 제안하는 입장이다. 이유인즉 역사관련 기간들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과 어떤 사건도 사회적 발전의 또 다른 기간에 자체를 실제로 반복할 수 없다는 것을 그 변형이 전적으로 인정할지라도, 유사한 경향이 혹시 서로 매우 멀리 격리된 다양한 기간에서 우세해질 것임을 그 변형이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유사성이나 유추는 예를 들어, 알렉산더 이전의 그리스와 비스마르크 이전의 남부 독일 사이에 성립한다고 언급되었다. 그런 경우에서 직관적 이해라는 방법은, 새로운 전개상황을 우리가 예언하는 데 도움을 주도록 특정 사건을 앞선 기간에서 발생한 유사한 사건들과 비교함에 의하여 우리가 그 사건들을 평가해야 한다고 ㅡ 그러나 두 기간 사이의 불가피한 차이점들은 합당하게 참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언제나 잊지 않고 ㅡ 제안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적 사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틀림없이 인과적 설명을 멀리 넘어선다는 것을 안다. 그 방법은 틀림없이 특징에서 전체론적이다; 그 방법은 복잡한 구조 안에서 ㅡ 동시대적 부분들뿐 아니라 시간적 전개상황의 연속적 단계를 포함하는 전체 안에서 ㅡ 사건에 의하여 수행되는 역할 결정을 틀림없이 겨냥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생명체와 집단 사이의 유추에 의존하는 경향이 직관적 이해라는 방법의 세 번째 변형에 있는 이유가 설명될 것이다. 그리고 한 시대의 정신이나 영혼이라는 사회적 사건의 의미를 결정하는 데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모든 저 역사적 경향이나 추세의 근원과 감독자라는 관념과 같은 관념들로써 작용하는 경향이 그 변형에 있는 이유가 설명될 것이다.

그러나 직관적 이해라는 방법은 전체론에 관한 관념에 들어맞지만 않는다. 그 방법은 참신성에 대한 역사주의자의 강조와 매우 잘 일치하기도 한다; 이유인즉 참신성은 인과적으로나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지 않고 직관적으로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역사주의의 친()-자연주의적 교설들에 대한 토론에서 다음과 같은 점이 알려질 것이다. 그 교설들과, 역사적 경향이나 추세의 직관적 이해라는 방법의 세 번째 변형이 강조하며, 그 변형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16절 참조.)

 

 

9 정량적(定量的: quantitative) 방법

직관적 이해라는 교설과 연계하여 통상적으로 강조되는 반대와 대비 가운데서 다음이 역사주의자들에 의하여 빈번히 강조되었다. 물리학에서 사건은, 정량적 용어들로 그리고 수학적 공식들의 도움을 받아서 엄격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설명된다고 언급된다. 다른 한편 사회학은 정성적(定性的: qualitative) 용어들로 역사적 전개상황을 더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예를 들어, 상충하는 경향들과 목표들이라는 용어들로 역사적 전개상황을 더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정량적이고 수학적 방법의 적용가능성에 반대하는 논증은 역사주의자들에게 고유한 것은 전혀 아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런 방법은 때때로 심지어 강력한 반()-역사주의적 견해를 지닌 저술가들에 의하여 거부된다. 그러나 정량적이고 수학적 방법에 반대하는 가장 설득적 논증 중 몇 가지 논증은, 내가 역사주의로 지칭하는 관점을 매우 잘 제시해서 여기서 이 논증들이 토론될 것이다.

사회학에서 정량적이고 수학적 방법의 사용에 대한 반대를 우리가 고려할 때, 강력한 반론이 틀림없이 우리에게 즉각 떠오른다: 이 태도는, 정량적이고 수학적 방법이 사회과학 중 몇몇 사회과학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실제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과 충돌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것에 직면하여, 그 방법들의 적용 가능성이 어떻게 부인될 수 있는가?

이 반론에 반대하여, 정량적이고 수학적 관점에 대한 반대는 역사주의적 사고방식에 특징적인 몇 가지 논증에 의하여 뒷받침될 것이다.

역사주의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당신의 비평에 완전히 동의한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통계적 방법과 물리학의 정량적-수학적 방법 사이에서 엄청난 차이점이 여전히 남는다. 사회과학은, 물리학의 수학적으로 정식화되는 인과적 법칙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주어진 파장을 지닌 광선에 대하여) 광선이 통과하는 구멍이 작을수록, 회절각(the angles of diffraction)이 점점 커진다는 물리법칙을 고려하라. 이런 유형의 물리법칙에 다음 형태가 있다: ‘특정 조건에서, 규모 A가 특정 방식으로 변한다면, 규모 B 또한 어떤 예측될 수 있는 방식으로 변한다’. 다시 말해서 그런 법칙은, 한 가지 측정될 수 있는 정량(定量: quantity)의 또 다른 한 가지 측정될 수 있는 정량(定量: quantity)에 대한 의존을 표현하여, 전자(前者) 정량이 후자(後者) 정량에 의존하는 방식은 정확한 정량적 관계로 주장된다. 물리학은 이런 형태로 자체의 모든 법칙을 성공적으로 표현했다. 이것을 이룩하기 위하여, 물리학의 첫 번째 과제는 모든 물리적 특징을 정량적 용어들로 바꾸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그 과제로 인하여 특정 종류의 광선이 ㅡ 예를 들어 밝은 황록색 광선 ㅡ 정량적 묘사에 의하여 대체되어야 했다: 특정 파장과 특정 강도를 지닌 광선. 물리적 특징을 정량적으로 기술하는 그런 절차는 분명히, 인과적인 물리학적 법칙을 정량적으로 정식화하는 데 필수적 전제조건이다. 그 법칙으로 인하여 우리는 어떤 일이 발생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구멍의 너비와 굴절각 사이의 관계에 관한 법칙의 전제하에, 구멍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굴절각의 확대에 대한 인과적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역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 인과적 설명은 틀림없이 사회과학에 의해서도 시도된다. 예를 들어 사회과학은 산업 확장을 통하여 제국주의를 설명하는 일을 떠맡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례를 참작하면, 사회학적 법칙을 정량적 용어들로 표현하는 것이 절망적 시도임을 우리는 즉각 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토 확장을 향한 경향은 산업화의 강도(强度)와 비례하여 증가한다와 같은 어떤 그런 정식화를 (혹시 사실들에 대한 참인 묘사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이해될 수 있는 정식화) 고려하면, 그 확장이나 산업화의 강도를 향한 경향을 우리가 측정할 수 있을 방법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우리가 곧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정량적-수학적 방법에 반대하는 역사주의적 논증을 요약하면, 예를 들어 국가나 경제체제 혹은 정부 형태와 같은 사회적 실체에 의하여 역사 과정에서 경험되는 변화에 대하여 인과적 설명을 제시한다는 것은 사회학자들의 과제이다. 정량적 관계로 이 실체들의 특징을 표현하는 알려진 방법이 없기 때문에, 정량적 법칙이 정식화될 수 없다. 그리하여 사회과학의 인과적 법칙은, 여하한 것이라도 존재한다면 정량적이고 수학적이라기보다 정성적이기 때문에, 물리학의 법칙과 특징에서 틀림없이 크게 다르다. 사회학적 법칙이 어떤 것의 등급을 결정한다면, 그 법칙은 매우 모호한 용어들로 그렇게 할 것이어서 기껏해야 매우 개략적인 측정을 허용할 것이다.

특징은 ㅡ 물리학적이든 아니면 비-물리학적이든 ㅡ 직관에 의하여 평가될 수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 여기서 토론한 논증들은 그리하여, 직관적 이해라는 방법을 선호하여 제시된 논증들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10 본질론(ESSENTIALISM)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

사회적 사건의 정성적 특징에 대한 강조로 인하여, 정성적 요소를 적시하는 용어들의 위상이라는 문제가 추가적으로 발생한다. 철학과 관련하여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근본적 문제인 소위 보편자들이라는 문제(problem of universals).

이 문제는, 그 문제에 관하여 중세기 동안 주요 전투가 격렬했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뿌리를 둔다. 그 문제는 통상적으로 순전히 형이상학적 문제로서 해석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형이상학적 문제들처럼 그 문제는 과학적 방법이라는 문제가 되기 위하여 재()-정식화될 수 있다. 우리는 소개를 통하여 그 형이상학적 사안을 개괄하면서 여기서 방법론적 문제만 다루겠다.

모든 과학은 에너지’, ‘속도’, ‘탄소’, ‘(whiteness)’, ‘진화’, ‘정의(正義: justice)’, ‘국가’, ‘인류와 같은 보편적 용어들로 지칭되는 용어들을 이용한다. 이것들은, ‘알렉산더 대왕이나 핼리 혜성혹은 세계 제1차 대전처럼 우리가 단칭 용어나 개별적 개념으로 지칭하는 종류의 용어들과 구분된다. 이것들과 같은 용어는 규약에 의하여 그 용어들에 의하여 적시되는 개별적 물체들에 표식이 부착된 고유명사이다.

보편적 용어의 본성에 관하여 두 학파 사이에 길고도 때때로 악의에 찬 논쟁이 격렬했다. 한 학파는, 단 한 가지의 개체에 라기보다 개체들로 구성된 집합이나 계층의 원소들에 부착될 따름이어서 보편자들은 고유명사들과 다르다고 믿었다. 이 학파에는 예를 들어 (whiteness)’이라는 보편적 용어는 많은 다양한 것의 집합에 ㅡ 예를 들어, 눈송이들, 식탁보들 그리고 백조들 ㅡ 부착되는 표시로만 보인다. 이것은 유명론적(唯名論的: nominalist) 학파의 교설이다. 그 교설은 전통적으로 실재론(實在論: realism)으로 ㅡ 이 실재론적이론이 관념론적으로도 지칭된 사실에 의하여 알려진 바와 같이 다소 오해를 낳는 명칭 ㅡ 지칭되는 교설과 상반된다. 그리하여 나는 이 반()-유명론적(唯名論的) 이론을 본질론(本質論: essentialism)으로 다시 지칭할 것을 제안한다. 본질론자들은, 우리가 먼저 개체들의 집단을 수집하고 그다음 그것들에게 희다(white)’라는 표시를 붙인다는 것을 부인한다; 오히려 흰 개체 각각이 다른 흰 물체와 공유하는 특정 본질적 속성 즉, ‘(whiteness)’ 때문에 우리는 그 개체 각각을 희다라고 부른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 속성은 보편적 용어에 의하여 적시되는데, 개체들 자체들과 꼭 마찬가지로 탐구될만한 대상으로서 간주된다. (실재론[實在論: realism]이라는 명칭은, 예를 들어 [whiteness]’과 같은 보편적 대상들이 개체들과 개체들의 집합들이나 집단들 위에 실제로존재한다는 주장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리하여 보편적 용어들은, 단칭 용어들이 개별적 물체들을 적시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보편적 대상들을 적시한다고 믿어진다. 보편적 용어들에 의하여 지적되는 보편적 대상들은 (플라톤에 의하여 형상들[Forms]’이나 이데아들[Ideas]’로 지칭된) ‘본질(essences)’로도 명명되었다.

그러나 본질론은 보편자들의 (, 보편적 대상들의) 존재를 신뢰할 뿐 아니라 과학을 위하여 그 보편자들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개체적 대상들은, 과학에 이익이 되지 않는 특징인 많은 우연적 특징을 드러낸다고 본질론은 지적한다. 사회과학들로부터 예를 들면: 경제학은 돈과 신용에 관심을 두지만, 동전이나 지폐 혹은 수표가 발행되는 특정 형태에 대해서 관심두지 않는다. 과학은 우연적인 것을 제거하고 사물의 본질로 침투해야 한다. 그러나 사물의 본질은 항상 보편적인 것이다.

이 마지막 비평은, 이 형이상학적 문제가 지닌 방법론적 함의 중 몇 가지 함의를 지적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토론할 예정인 방법론적 쟁점은 사실상 형이상학적 쟁점과 독립적으로 고려될 것이다. 우리는 또 다른 통로를 ㅡ 전칭 대상과 단칭 대상의 존재라는 그리고 그 대상들의 차이점이라는 문제를 피하는 통로 ㅡ 따라서 그 쟁점에 접근할 것이다. 우리는 과학의 목표와 수단만을 토론할 것이다.

내가 방법론적 본질주의자들로 명명할 것을 제안하는 사상가들의 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창립되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을 설명하기 위하여 과학적 탐구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방법론적 본질주의자들은 과학적 질문을 물질은 무엇인가?’(force)은 무엇인가?’ 혹은 정의(正義)는 무엇인가?’와 같은 용어들을 정식화하는 데로 기울어서, 이 용어들의 실재적 혹은 본질적 의미와 그리하여 그 용어들에 의하여 적시되는 본질들의 실재적 혹은 참된 본성을 밝히면서 그런 질문을 꿰뚫는 답변은 과학적 탐구의 주요 과제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 탐구의 필수적 전제조건이라고 믿는다. 이와 반대로 방법론적 유명론자들(唯名論者: nominalists)은 자신들의 문제를 이 물질의 조각은 어떻게 작용하는가?’그 조각은 다른 물체들이 있는 곳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가?’와 같은 용어들로서 표현할 터이다. 이유인즉 방법론적 유명론자들은, 과학의 과제란 어떻게 물체들이 작용하는지를 기술하는 것일 뿐이라고 믿어서 필요한 모든 곳에서 자유롭게 새로운 용어들을 도입함에 의하여 혹은 옛 용어들의 원래 의미를 유쾌히 무시하는 반면 편리한 곳마다 옛 용어들을 재()-정의함에 의하여 이것이 실행될 수 있다고 제안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어들기술에 관한 유용한 도구들로서만 간주하기 때문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방법론적 유명론이 자연과학에서 승리했다고 인정할 것이다. 물리학은, 예를 들어, 원자들의 혹은 빛의 본질을 조사하지 않고 특정 물리학적 관찰사항을 설명하고 서술하기 위하여 그리고 또한 특정 중요하고 복잡한 물리적 구조의 명칭으로서 아주 자유롭게 이 용어들을 이용한다. 생물학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철학자들은 생명은 무엇인가?’진화는 무엇인가?’와 같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생물학자들로부터 요구할 것이고 때때로 몇몇 생물학자는 그런 요구를 충족시키고 싶은 생각을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생물학은 대체로 다양한 문제를 다루고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방법과 매우 비슷한 설명적이고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방법들을 채택한다.

그리하여 사회과학에서, 방법론적 자연주의자들은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을 선호할 것을 그리고 반()-자연주의자들이 본질론을 선호할

것이라고 우리가 틀림없이 기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여기서 본질론이 우세한 듯하다; 그리고 본질론은 심지어 매우 활기찬 반론에도 직면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연과학의 방법은 근본적으로 유명론적인 반면, 사회과학은 방법론적 본질론을 채택해야 한다고 제안되었다. 사회과학의 과제는 국가, 경제적 행위, 사회적 집단, 기타 등등과 같은 사회학적 실체를 이해하여 설명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것은 그 실체의 본질을 관통함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고 논증된다. 모든 중요한 사회학적 실체는, 자체에 대한 서술을 위하여 보편적 용어들을 전제하여, 자연과학에서 그렇게 성공적으로 수행된 바와 같이 새로운 용어들을 자유롭게 도입하는 것은 무의미할 터이다. 사회과학의 과제는 그런 실체들을 분명하고도 합당하게 기술하는 것인데 다시 말해서, 우연적인 것에서 본질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하여 그 실체들의 본질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국가는 무엇인가?’시민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그의 저서 정치학[Politics]의 기본적 문제로서 고찰된) 혹은 신용은 무엇인가?’정통과 이단의 (혹은 교회와 분파) 근본적 차이점은 무엇인가?’와 같은 문제는 전적으로 합당할 뿐 아니라, 정확하게 사회학적 이론이 답변하려고 고안되는 종류의 문제이다.

역사주의자들이 형이상학적 쟁점에 대한 자기들의 태도에서 그리고 자연과학의 방법론과 관련한 자기들의 태도에서 다를지라도, 사회과학의 방법론에 관한 한 그들이 본질론을 지지하고 유명론에 반대하는 경향을 지닐 것은 분명하다. 사실상 내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역사주의자가 이런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역사주의가 지닌 일반적 반()-자연주의일 따름인지 혹은 방법론적 본질론을 선호하여 촉구될 특별한 역사주의적 논증들이 있는지는 고찰할 가치가 있다.

먼저 사회과학에서 정량적 방법의 사용에 반대하는 논증은 이 쟁점과 관련성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회적 사건이 지닌 정성적 특징에 대한 강조는, 직관적 이해에 (단순한 서술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대한 강조와 함께, 본질론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태도를 표시한다.

그러나 역사주의에 더 전형적인 다른 논증들이 있는데 그 논증들은 지금쯤 독자에게 익숙할 사유의 추세를 따른다. (부연하여, 그 논증들은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플라톤이 본질에 대한 첫 번째 이론을 전개하도록 영향을 미쳤던 논증들과 동일한 논증들이다.)

역사주의는 변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제 이 모든 변화에, 틀림없이 변하는 것이 있다고 역사주의자는 아마도 주장할 것이다. 변하지 않은 채로 남는 것이 없을지라도, 조금이라도 변화를 말하기 위하여 우리는 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물리학에서 상대적으로 쉽다. 예를 들어 역학(mechanics)에서 모든 변화는 물리적 물체의 움직임인데 즉, 공간-시간적 변화들이다. 그러나 사회학은 주로 사회제도에 관심을 두는데 더 큰 난제들에 직면하며 그 이유는 그런 제도가 변화를 겪은 후에 확인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간단한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의미에서, 변화 이전의 사회제도를 변화 이후의 저 제도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기가 불가능하다; 그 사회제도는 아마도,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관점에서, 전혀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정부의 현재 제도에 대한 자연주의적 기술(記述: description)은 아마도 4세기 전의 그 제도를 전혀 다른 것으로서 틀림없이 제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부가 있는 한, 그 정부가 상당히 변했을지라도 정부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현대 사회 안에서 정부의 기능은 그 정부가 당시 수행했던 기능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기술될 수 있는 특징이 동일하게 남아있지 않았을지라도 제도의 본질적 동일성은 보전되어 우리가 한 가지 제도를 다른 한 가지 제도의 변화된 형태로서 간주하는 것이 허용된다: 사회과학에서 우리는, 변하지 않는 본질을 전제하지 않고 그리하여 방법론적 본질론에 맞추어 나아가지 않고 변화나 발전을 말할 수 없다.

물론 경기침체, 인플레이션, 디플레이션 등과 같은 몇 가지 사회학적 용어가 원래 순전히 유명론적 방식으로 도입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그 용어들은 자체의 유명론적 특징을 유지하지 않았다. 상황이 변함에 따라, 특정 현상이 실제로 인플레이션인지 아닌지에 관하여 사회학자들이 의견이 다른 것을 우리가 곧 발견한다; 그리하여 정확성을 위하여, 인플레이션의 본질적 본성을 (혹은 본질적 의미) 조사할 필요가 생기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적 실체는 자체의 본질에 관한 한, 아마도 여하한 다른 장소에 그리고 여하한 다른 형태로 존재할 것이고 사실상 불변으로 남아있는 동안 같은 방식으로 변하거나 그 실체가 실제로 변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변할 것이다라고 사회적 실체에 대하여 언급될 수 있다 (후설[Husserl]). 가능한 변화의 범위는 선험적으로 제한될 수 없다. 사회적 실체가 어떤 종류의 변화를 견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것으로 남을 수 있는지는 말하기가 불가능하다. 몇 가지 관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를 현상들은 다른 관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할 것이다.

위에 전개된 역사주의적 논증들로부터, 사회적 발전들에 대한 적나라한 기술이 불가능하다고 귀결된다; 혹은 더 정확하게, 사회학적 기술(記述: description)은 유명론적 의미에서 결코 기술만일 수 없다고 귀결된다. 그리고 사회학적 기술이 본질들을 배척할 수 없다면, 사회적 발전에 대한 이론은 훨씬 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유인즉 특정 사회적 기간의 특징적 면모에 대한 결정이나 설명과 같은 문제들이, 자체가 지닌 긴장과 본질적 경향 및 추세와 함께, 유명론적 방법에 의하여 처리하려는 모든 시도에 틀림없이 저항할 것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법론적 본질론은 역사주의적 논증에 근거할 수 있고, 실제로 플라톤을 자신의 형이상학적 본질론인 변하는 사물은 합리적 묘사에 저항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적(Heraclitean) 논증으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과학이나 지식은, 변하지 않고 자체와 ㅡ 본질 ㅡ 동일한 것으로 남는다고 전제한다. 역사, 다시 말해서 변화에 대한 묘사 그리고 본질, 즉 변화하는 동안에 변하지 않고 남는 것은 여기서 상호관련적 관념들로 보인다. 그러나 이 상호관련성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양상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본질은 또한 변화를 전제하고 그리하여 역사를 전제한다. 이유인즉 사물이 변할 때 동일하거나 변하지 않은 채로 남는 것이라는 저 원리가 그 사물의 본질이라면 (혹은 이데아나 형상 혹은 본성이나 실체), 사물이 겪는 변화로 인하여 사물이 지닌 그리하여 사물의 본질이 지닌 다양한 국면이나 양상 혹은 가능성이 알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은, 사물 안에 내재한 가능태들의 총화나 근원으로 해석될 수 있고 변화는 (혹은 움직임) 사물에 있는 본질의 은닉된 가능태들이 실현되거나 실제화된 것으로서 해석될 수 있다. (이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기인한다.) 사물, 즉 사물이 지닌 변하지 않는 본질은 자체의 변화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고 귀결된다. 예를 들어 특정 물체가 금으로 만들어지는지를 우리가 발견하고자 원한다면 우리는 그 물체를 두드리거나 화학적으로 그 물체를 시험하고 그리하여 그 물체를 변화시켜서 그 물체의 숨겨진 가능태 중 몇 가지 가능태를 밝혀야 한다. 동일한 방식으로, 인간의 본질은 ㅡ 인간의 개성 ㅡ 그의 전기(傳記: biography)에서 그 본질이 드러남에 따라서 알려질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원리를 사회학에 적용하면, 사회적 집단의 본질이나 실재적 특징은 자체의 역사를 통해서만 드러나서 알려질 수 있다는 결론으로 우리는 인도된다. 그러나 사회적 집단이 그 집단의 역사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면, 그 집단을 서술하는 데 사용된 관념은 틀림없이 역사관련 관념이다; 그리고 정말로, 일본 국가나 이탈리아 민족이나 아리안 인종과 같은 사회학적 관념은 역사연구에 기초하는 관념 외에 어떤 것으로도 해석될 수 없다. 사회적 계급에 대해서도 동일한 것이 성립한다: 예를 들어 자본가 계급은 자체의 역사에 의하여 정의될 수 있을 따름이다: 산업혁명을 통하여 권력을 잡아서 지주들을 제치고 싸우고 있으면서 무산 계급에 의하여 싸움에 휘말리는 등등의 계급으로서.

본질론은 그로 인하여 변하는 물체에서 일치성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는 근거를 토대로 도입되었을 것이지만 그렇게 도입되자 본질론은, 사회과학은 역사관련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는 교설을 지지하여 가장 강력한 논증 중 몇 가지 논증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서, 역사주의라는 교설을 지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