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역사주의의 친(親)-자연주의적 교설
역사주의가 근본적으로 반(反)-자연주의적일지라도, 역사주의는 물리과학과 사회과학의 방법에 공통적 요소들이 있다는 관념에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이것은, 역사주의자들이 통상적으로 물리학처럼 사회학이 동시에 이론적이면서 경험적이 되기를 겨냥하는 지식 분야라는 견해를 (내가 완전히 공유하는) 채택한다는 사실에 기인할 것이다.
사회학이 이론적 연구 분야라고 말함에 의하여, 우리는 사회학이 이론이나 보편 법칙의 (사회학이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도움을 받아서 사건들을 설명하고 예측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학을 경험적으로서 기술함에 의하여, 사회학이 경험에 의하여 뒷받침된다는 것과 사회학이 설명하고 예측하는 사건은 관찰될 수 있는 사실이라는 것 그리고 관찰은 제시되는 이론에 대한 수용이나 거부를 위한 토대라는 것이라고 말하려는 의도가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물리학에서 성공을 말할 때, 우리는 물리학이 내놓는 예측의 성공을 염두에 둔다: 그리고 물리학이 내놓은 예측의 성공은 물리학이 내놓는 법칙에 대한 경험적 입증과 동일하다고 언급될 수 있다. 우리가 사회학의 상대적 성공을 물리학의 성공과 대비할 때, 사회학에서 성공이란 동일하게 기본적으로 예측에 대한 입증이 주요 부분이라고 우리가 전제한다. 특정 방법들이 ㅡ 법칙의 도움을 받는 예측과, 관찰에 의한 법칙 시험하기 ㅡ 물리학과 사회학에 공통적이어야 한다고 귀결된다.
나는, 내가 그 견해를 역사주의의 기초적 전제 중 한 가지 전제로서 간주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다음에 서술할 몇 가지 관념을 야기하는 이 견해의 더 상세한 전개에 동의하지 않는다. 첫눈에 보기에 이 관념들은 아마도 방금 개괄된 일반적 견해의 상당히 명백한 결론들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 견해들은 다른 전제들, 즉 역사주의의 반(反)-자연주의적 교설을 포함한다; 그리고 더욱 특히, 역사관련 법칙이나 추세라는 교설을 포함한다.
II 천문학과의 비교. 장기 예측과 대규모 예측
현대 역사주의자들은 뉴튼 이론의 성공에 의하여, 그리고 특히 그 이론이 지닌 행성의 위치를 오랜 시간에 앞서 예측하는 능력에 의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런 장기적 예측의 가능성은 그리하여 확립되어 먼 미래를 예언하려는 오래된 꿈이 인간 정신에 의하여 도달될 것의 한계를 넘지 않음을 밝힌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사회과학은 정확하게 그만큼 높이 겨냥해야 한다. 천문학이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사회학이 혁명을 예측하는 것이 왜 가능하지 않아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 높이 겨냥해야 할지라도, 사회과학은 천문학적 예측의 정확성에 도달하려고 희망할 수 없고 도달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역사주의자는 고집을 부릴 것이다. 가령 항해력(航海曆: the Nautical Almanack)에 비견될 수 있는 사회적 사건에 대한 정확한 달력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밝혀졌다 (5절 및 6절에서). 혁명이 사회과학에 의하여 예측될 것일지라도 그런 예측은 정확할 리가 없다; 그런 예언의 세부내용에 관하여 그리고 그런 예언의 시간 포착에 관하여 틀림없이 불확실성이라는 여백이 있다.
사회학적 예측의 결함을 인정하고 심지어 강조하는 반면, 역사주의자들은 그런 예측의 범위와 의미가 아마도 이 결함을 보상할 것이라고 믿는다. 결함은 주로 사회적 사건의 복잡성으로부터, 그 사건의 내부 관련성으로부터 그리고 사회학적 용어의 정성적(定性的: qualitative) 특징으로부터 출현한다. 그러나 사회과학이 결과적으로 모호함으로 고통을 겪을지라도, 사회과학의 정성적(定性的: qualitative) 용어들은 동시에 사회과학에 특정 풍요로움과 의미의 포괄성을 제공한다. 그런 용어들의 사례는 ‘문화 충돌’, ‘번영’, ‘단결’, ‘도시화’, ‘공공재(公共財: utility)’이다. 서술된 종류의 예측, 다시 말해서 그 모호함이 자체의 범위와 의미에 의하여 균형을 이루는 장기 예측을 나는 ‘대규모 예언’이나 ‘대규모 예측’으로 지칭할 것을 제안한다. 역사주의에 따르면 이것은, 사회학이 시도해야 할 종류의 예측이다.
그런 대규모 예측이 ㅡ 넓은 범위의 장기적 예측이고 아마도 다소 모호한 ㅡ 몇몇 과학에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사실이다. 중요하고 상당히 성공적인 대규모 예측에 대한 사례들이 천문학 분야에서 발견될 수 있다. 사례들은, 주기적 법칙에 근거한 태양-흑점 활동에 대한 예측이거나 (기후변화에 중요한) 상층 대기(the upper atmosphere)의 이온화에서 일상적이거나 계절적 변화에 대한 예측이다 (무선통신에 중요한). 이것들은 상대적으로 먼 미래의 사건들을 다루는 한, 일식과 월식 예측을 닮지만, 세부내용과 시간 포착 그리고 다른 특징들에 관하여 흔히 단지 통계적이고 아무튼 덜 정확하다는 점에서 일식과 월식 예측과 다르다. 대규모 예측이 아마도 본질적으로 실현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 그리고 장기 예측이 사회과학에 의하여 조금이라도 도달될 수 있다면, 그 예측이 우리가 대규모 예측으로 기술한 것이 될 수 있을 뿐임은 상당히 분명하다. 다른 한편 역사주의의 반(反)-자연주의적 교설들에 대한 우리의 설명으로부터 사회과학에서 단기 예측은 틀림없이 커다란 불이익을 겪는다고 귀결된다. 정확성의 부족으로 인하여 그 예측이 틀림없이 상당히 영향을 받는데 이유인즉 그 예측에 있는 바로 그 본성에 의하여 그 예측이 짧은 기간들에 국한되기에 그 예측은 사회생활의 더 작은 특징인 세부사항들만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체의 세부사항들에서 부정확한 세부사항들에 대한 예측은 상당히 쓸모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조금이라도 사회적 예측에 관심을 둔다면, 역사주의에 따라서 대규모 예측은 (장기 예측이기도 한) 가장 매혹적일 뿐 아니라 실제로 시도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예측으로 남는다.
12 관찰적 토대
과학에 대한 실험적이 아닌 관찰적 토대는, 그 용어의 특정 의미에서, 특징적으로 항상 ‘역사 관련성’이다. 저것은, 심지어 천문학의 관찰적 토대와 관련해서도 그렇다. 천문학이 근거하는 사실들은 천문대의 기록에 포함된다; 예를 들어 이런저런 날짜에 (시간, 초) 수성이 특정 위치에서 아무개 씨에 의하여 관찰되었다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록. 요컨대, 그 기록은 ‘시간 순서로 된 사건들의 공식 기록’이나 관찰사항들의 연대기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유사하게, 사회학의 관찰적 토대는 사건들에 대한, 즉 정치적이거나 사회적 사건들에 대한 연대기의 형태로만 주어질 수 있다. 사회생활에서 정치적 및 다른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이 연대기는 우리가 관습적으로 ‘역사’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이 협의의 역사는 사회학의 토대이다.
사회과학을 위하여 경험적 토대로서 이 협의의 역사가 지닌 중요성을 부인하면 터무니없을 터이다. 그러나 실험적 방법의 적용가능성에 대한 역사주의의 부인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역사주의의 특징적 주장 중 한 가지 주장은, 정치적이고 사회적 역사는 사회학의 유일한 경험적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주의자는 사회학을, 그 경험적 토대가 역사적 사실들의 연대기만에 의하여 구성되는 그리고 그 목표가 가급적 대규모 예측인, 예측을 수행하는 것인 이론적이고 경험적 연구 분야로서 상상한다. 분명히, 이 예측은 틀림없이 또한 역사관련 특징을 띠는데 왜냐하면 경험에 의하여 그 예측을 시험하는 것인 그 예측에 대한 검증이나 반증은 미래의 역사에 남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규모 예측을 수행하여 시험하는 것은, 역사주의가 보는 바와 같이, 사회학의 과제이다. 요컨대, 사회학은 이론적 역사라고 역사주의자는 주장한다.
13 사회적 동력학(SOCIAL DYNAMICS)
사회학과 천문학 사이의 유추는 더 멀리 전개될 수 있다. 역사주의자들이 통상적으로 고찰하는 천문학의 일부인 천체역학(celestial dynamics)은 운동을 힘(forces)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으로서 보는 이론인 동역학에 근거한다. 역사주의적 저술가들은, 사회학이 유사한 방식으로 사회적 동역학인 사회적 (혹은 역사적) 힘(forces)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으로서 사회적 운동 이론에 근거해야 한다고 흔히 주장했다.
정력학(靜力學: statics)은 동역학에서 나온 유일한 추상이라고 물리학자는 알고 있다; 정역학은, 말하자면,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그리고 왜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는지 다시 말해서, 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지에 관한 이론이다; 그리고 정역학은, 대항력들(對抗力들: counteracting forces)의 평형에 의하여 이것을 설명한다. 다른 한편 동역학은 일반적 경우를, 다시 말해서 동등하거나 동등하지 않아서 아마도 어떤 일이 어떻게 그리고 왜 정말로 발생하는지에 관한 이론으로 기술될 힘(forces)을 다룬다. 그리하여 동역학만 역학의 실재적이고 보편적으로 타당한 법칙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유인즉 자연은 과정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움직이고 변하고 발전한다 ㅡ 때때로 오직 서서히 움직여서 몇 가지 발전을 관찰하기가 어려울지라도.
사회학의 역사주의적 견해에 대한 동역학의 이 견해의 유추는 명백하여 추가적 언급이 필요 없다. 그러나 역사주의자는 아마도 그 유추가 더 깊다고 주장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아마도, 역사주의에 의하여 상상되는 사회학은 본질적으로 인과성 이론이기 때문에 동역학과 비슷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유인즉 일반적 인과적 설명은 특정 사건이 어떻게 그리고 왜 발생했는지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그런 설명에 틀림없이 항상 역사적 요소가 있다. 여러분이 다리가 부러진 사람에게 어떻게 그리고 왜 그렇게 되었냐고 물으면, 그가 여러분에게 사고의 경위를 알려줄 것이라고 여러분은 기대한다. 그러나 심지어 이론적 사유의 수준에서, 그리고 특히 예측을 허용하는 이론의 수준에서 사건의 원인에 대한 역사관련 분석이 필요하다. 역사관련 인과적 분석이 필요한 전형적 사례는 전쟁의 근원이나 본질적 원인이라는 문제라고 역사주의자는 주장할 것이다.
물리학에서, 그런 분석은 상호작용하는 힘(forces)을 결정함에 의하여, 다시 말해서 동역학에 의하여 이룩된다; 그리고 역사주의자는, 동일한 것이 사회학에 의하여 시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학은, 사회적 변화를 낳아서 인간의 역사를 창조하는 힘(forces)을 분석해야 한다. 동역학으로부터 우리는 상호작용하는 힘(forces)이 어떻게 새로운 힘(forces)이 되는지를 배운다; 그리고 반대로, 힘들(forces)을 그것들의 구성요소들로 분석함에 의하여 고찰되고 있는 사건에 대한 더 근본적 원인으로 우리가 관통할 수 있다. 유사하게, 역사주의는 정신적이건 물질적이건 역사관련 힘(forces)이 지닌 근본적 중요성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예를 들어, 종교적 혹은 윤리적 관념이나 경제적 이해관계라는 힘(forces). 상충하는 경향들과 힘들(forces)의 이 혼란 상태를 분석하고 풀어서 그 뿌리인 보편적 추동력과 사회 변화의 법칙까지 관통하는 것 ㅡ 이것이 역사주의가 보는 바와 같이, 사회과학의 과제이다. 이런 방식들로만, 그 예측에 대한 확인이 사회적 이론의 성공을 의미할 터인 저 대규모 예측이 근거한 이론과학을 우리가 발전시킬 수 있다.
14 역사법칙
역사주의자에게 사회학은 이론적 역사임을 우리가 알았다. 사회학이 내놓은 과학적 예측은 법칙에 근거해야 하고 그 예측이 사회의 변화에 대한 예측인 역사관련 예측이기 때문에 그 예측은 역사법칙에 근거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일반화의 방법이 사회과학에 적용될 수 없다고 그래서 우리가 사회생활의 균일성이 공간과 시간을 통하여 변함없이 타당하다고 전제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 균일성이 통상적으로 특정 문화적이거나 역사적 기간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라고 역사주의자는 믿는다. 그리하여 사회적 법칙은 ㅡ 실제적인 사회적 법칙들이 있다면 ㅡ 틀림없이 균일성에 근거한 평범한 일반화와 다소 다른 구조를 지닌다. 실제적인 사회적 법칙은 틀림없이 ‘일반적으로’ 타당할 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법칙이 인간 역사 전체의 모든 기간 중 몇 가지 기간만이라기보다 모두를 포함하여 그 역사의 전체에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단일 기간을 넘어서 유효한 사회적 균일성은 있을 리가 없다. 그리하여 사회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성립하는 유일한 법칙은 틀림없이, 연속적 기간들을 연결하는 법칙이다. 그 법칙은, 한 기간에서 또 다른 기간의 천이(遷移: transition)를 결정하는 역사발전에 관한 법칙이어야 한다. 이것이, 사회학에 관하여 유일한 실제적 법칙은 역사법칙이라고 말함에 의하여 역사주의자들이 의미하는 것이다.
15 역사예언 대(對: versus) 사회공학
지적된 바와 같이, 이 역사법칙으로 (그 법칙이 발견될 수 있다면) 인하여 세부사항에서 세밀하게 정확하지는 않을지라도 심지어 매우 먼 사건에 대한 예측도 허용될 터이다. 그리하여 실제적인 사회학적 법칙은 역사법칙이라는 교설은 (주로 사회적 균일성의 제한된 타당성으로부터 도출되는 교설), 천문학을 모방하려는 시도와 독립적으로, ‘대규모 예측’이라는 관념을 다시 낳는다. 그리고 그 교설로 인하여 이 관념이 더 구체적이 되는데 이유인즉 그 관념으로 인하여 이 예측에 역사관련 예언의 특징이 있음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회학은, 역사주의자에게, 미래를 예언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된다; 개인들의 미래라기보다 집단들의 그리고 인류의 미래를 예언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된다. 사회학은 임박한 전개상황에 대한 과학인 다가오는 것에 대한 과학이다. 과학적 타당성을 지닌 정치적 통찰력을 우리에게 제공하려는 시도가 성공한다면, 사회학은 정치가들에게 특히 그 상상력이 현재의 절박성을 넘어 확장되는 정치가들인 역사적 운명이라는 느낌을 지닌 정치가들에게 가장 큰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판명될 터이다. 몇몇 역사주의자는 인간 순례의 다음 단계들을 그것도 심지어 매우 신중한 용어들로 이 단계들을 예측하는 데 만족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관념이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이다 ㅡ 사회학적 연구는 정치적 미래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리하여 그 연구는 통찰력을 지닌 실용적 정치의 최고 도구가 될 수 있을 터라는 것.
과학의 실용주의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과학적 예측의 중요성은 충분히 분명하다. 그러나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예측이, 그리고 그리하여 실용적임에 대한 두 가지 다른 방식이 과학에서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은 항상 이해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α) 그 예측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제시간에 피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실용적으로 가장 큰 가치를 띨 예측인 태풍의 진로를 예측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b) 특정 대피소가 태풍을 견딜 수 있다면 그 대피소는 예를 들어 그 대피소의 북면에 강화 콘크리트 지지대를 세우는 특정 방식으로 건설되어야 한다고 예측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예측은, 두 가지 모두가 중요하고 오래된 꿈을 성취할지라도, 분명히 매우 다르다. 한 가지 경우에서 우리가 예방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건에 관하여 우리는 정보를 듣는다. 나는 그런 예측을 ‘예언’으로 지칭하겠다. 그 예언의 실용적 가치는, 우리가 예측된 사건에 관하여 경고받아서 우리가 그 사건을 회피하거나 대비하고 그 사건을 마주할 수 있는 (아마도 다른 종류의 예측의 도움을 받아서) 것에 놓인다.
이것들과 반대인 것들은, 이런 종류의 예측이 공학(工學: engineering)의 기초를 형성하기 때문에 우리가 기술적(技術的: technological) 예측으로 서술할 두 번째 종류의 예측이다. 그 예측은, 우리가 특정 결과를 이룩하고자 원한다면 우리에게 개방된 단계를 모방하여, 말하자면 건설적이다. 물리학의 더 큰 부분은 (천문학과 기상학을 별도로 하고 물리학의 거의 전체), 실용적 관점에서 고찰되어 그 예측이 기술적(技術的: technological) 예측으로서 서술될 수 있는 형태의 예측을 내놓는다. 이 두 가지 예측의 구분은 개략적으로, 관련된 과학에서 끈기 있는 단순한 관찰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고안된 실험에 의하여 수행되는 역할의 크거나 작은 중요성과 일치한다. 주로 비-실험적 관찰을 이용하는 과학이 예언을 생산하는 반면, 전형적인 실험적 과학은 기술적(技術的: technological) 예측을 할 수 있다.
모든 과학이나 심지어 모든 과학적 예측은 근본적으로 실용적이라고 내가 암시하는 것으로서 생각되기를 나는 원치 않는다 ㅡ 그 과학이 반드시 예언적이거나 기술적(技術的: technological)이어서 다른 것일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암시하는 것으로서 생각되기를 나는 원치 않는다. 나는 두 가지 종류의 예측과 그 종류에 부합하는 과학의 구분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을 따름이다. ‘예언적(prophetic)’ 및 ‘기술적(技術的: technological)’이라는 용어들을 선택함에서 나는 물론,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그 용어들이 드러내는 한 가지 특징을 암시하고 싶다; 그러나 이 용어사용법을 내가 사용하는 데는, 실용주의적 관점이 다른 관점보다 우수하다고 의미하거나 과학적 관심은 실용주의적으로 중요한 예언이나 기술적(技術的: technological) 특징을 띤 예측에 국한된다고 의미할 의도가 없다. 우리가 예를 들어 천문학을 고려하면, 천문학이 발견한 것은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가치가 없지 않을지라도 주로 이론적 관심을 띤다고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예언들’로서 그 발견한 것 모두는, 실용적 활동을 위하여 그 가치가 아주 명백한 기상학의 예언과 유사하다.
과학의 예언적 특징 및 공학적 특징에 대한 이 구분은, 장기적 예측과 단기적 예측 사이의 차이점과 대응하지 않는 것을 주목할 가치가 있다. 공학적 예측 대부분이 단기적일지라도, 예를 들어 엔진 수명에 관한 장기적인 기술적(技術的: technological) 예측도 있다. 다시, 천문학적 예언은 단기적 아니면 장기적일 것이고 대부분의 기상학적 예언은 비교적 단기적이다.
이 두 가지 실용적 목적 사이의 차이점과 ㅡ 예언하기와 공학 ㅡ 과학이론의 유관한 구조에서 상응하는 차이점은, 우리의 방법론적 분석에서 주요 요점 중 한 가지 요점임이 나중에 알려질 것이다. 이 순간, 역사주의자들이 사회학적 실험은 쓸모가 없고 불가능하다는 자신들의 믿음으로써 아주 일관되게 역사관련 예언을 ㅡ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제도적 발전에 대한 예언 ㅡ 찬성하여 그리고 사회과학의 실용적 목적으로서 사회공학에 반대하여 주장한다고 나는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제도를 계획하여 구축하는 것인 사회공학이라는 관념은, 아마도 임박한 사회적 전개상황을 막거나 통제하거나 재촉하는 목적으로 지니고, 몇몇 역사주의자에게 가능한 듯이 보인다. 다른 역사주의자들에게,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과제이거나, 모든 사회적 활동처럼 정치적 계획 세우기가 틀림없이 역사적 힘(forces)의 우월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과제로 보일 터이다.
16 역사적 발전 이론
이 고찰들로 인하여 우리는, 내가 ‘역사주의’로 명명할 것을 제안하는 많은 논증의 핵심에 도달했고 이 명칭의 선택은 정당화된다. 사회과학은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주장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단순한 연대기라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역사가 아니다. 역사주의자들이 사회학을 일치시키고 싶은 종류의 역사는 과거를 회고할 뿐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기도 한다. 그런 종류의 역사는 작동적 힘(forces)에 대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적 발전의 법칙에 대한 연구이다. 따라서 그런 종류의 역사는, 단지 보편적으로 타당한 사회적 법칙이 역사법칙으로서 인정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이론으로서 혹은 이론적 역사로서 서술될 수 있을 터이다.
그 법칙들은 틀림없이 과정에 대한, 변화에 대한, 발전에 대한 법칙이다 ㅡ 표면적 불변성이나 균일성(均一性들: uniformities)에 대한 사이비-법칙이 아니다. 역사주의자들에 따르면, 사회학자들은 그 추세에 따라서 사회적 구조가 변하는 폭넓은 추세에 대한 일반적 관념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그들은 이 과정의 원인인 변화를 일으키는 힘(forces)의 작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사람들이 이 법칙들로부터 예언을 연역함에 의하여 임박한 변화에 자신들을 조정하기 위하여, 사회학자들은 사회발전의 기초를 이루는 일반적 추세에 관한 가설들을 정식화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사회학에 대한 역사주의자의 관념은, 내가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진단 사이에 표시한 구분을 ㅡ 그리고 과학의 두 가지 체계에 대하여 관련된 구분 ㅡ 천착함에 의하여 추가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역사주의적 방법론과 반대로, 우리는 기술적(技術的: technological) 사회과학을 겨냥하는 방법론을 생각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런 방법론은, 사회제도의 개혁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의 작업을 위한 토대로서 필수불가결할 터인 저 모든 사실을 발견하는 목표를 지닌 사회생활에 대한 일반적 법칙의 연구로 이어질 터이다. 그런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어 그 체제들이 그런 사실을 충분히 고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만 비실용적인 많은 유토피아적 체제를 우리가 알고 있다.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기술적(技術的: technological) 방법론은, 그런 비현실적 구축물을 피하는 방법의 제공을 겨냥할 터이다. 그 방법론은 반(反)-역사주의적일 터이지만, 반(反)-역사적은 전혀 아닐 터이다. 역사적 경험은 매우 중요한 정보의 근원으로서 그 방법론에 기여할 터이다. 그러나 사회발전에 관한 법칙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역사적 경험은 사회제도의 구축에 제한을 가하는 다양한 법칙이나 다른 균일성(均一性들: uniformities)을 (이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사주의자가 말할지라도) 찾을 터이다.
이미 토론된 종류의 반대논증을 사용하는 것뿐 아니라, 역사주의자는 또 다른 방법으로 그런 사회관련 기술(技術: technology)의 가능성과 유용성을 의문시할 수 있을 터이다. 사회공학자가, 여러분이 예상한 종류의 사회학에 의하여 뒷받침받아서 새로운 사회구조를 위한 구상을 이룩했다고 전제하자고 역사주의자는 말할 수 있을 터이다. 이 구상은, 사회생활에 대하여 알려진 사실 및 법칙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라고 우리가 생각한다; 게다가 우리는 심지어, 그 구상이 현재 상태의 사회를 새로운 구조로 변혁시키기 위하여 동등하게 실용적인 추가적 계획에 의하여 뒷받침된다고 전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주의적 논증은, 그런 구상에 진지하게 고찰될 자격이 없을 터임을 밝힐 수 있다. 그런 구상은, 역사발전의 법칙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만 여전히 비현실적이어서 유토피아적 꿈으로 남을 터이다.
지금까지 논증은, 어떤 이론적 사회과학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사회공학의 실용적 가능성을 반대하였지 그런 과학 자체의 관념에 반대하지는 않았다고 역사주의자는 계속할 터이다. 그러나 기술적(技術的: technological) 종류의 이론사회과학이 불가능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논증은 쉽게 확대될 수 있다. 실용적인 공학적 모험이, 매우 중요한 사회학적 사실과 법칙 때문에, 틀림없이 실패할 운명에 처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모험이 유일하게 실제적인 중요한 사회법칙을 ㅡ 발전의 법칙 ㅡ 간과하기 때문에 그런 모험에 실용적 가치가 없다는 것뿐 아니라 이론적으로 건전하지 못하다고도 암시한다. 그런 모험이 근거했다고 주장되는 ‘과학’은 틀림없이 이 법칙도 놓쳤는데 이유인즉 놓치지 않았다면 그 과학은 그런 비실제적 구축물에 대하여 근거를 제공하지 못했을 터이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사회적 구축물이 불가능하다고 가르치지 않는 사회과학은, 사회생활의 가장 중요한 사실을 전혀 보지 못하여 틀림없이 실제적으로 타당하고 실제적으로 중요한 유일한 사회적 법칙을 간과한다. 사회공학을 위한 배경을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사회과학은, 그리하여, 사회적 사실에 대한 참된 서술(敍述: descriptions)일 리가 없다. 그 사회과학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역사주의자는, 이 결정적 비판 외에도 기술적(技術的: technological) 사회학을 거부하는 다른 이유들이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한 가지 이유는, 그 사회학은 참신함의 출현과 같은 사회적 발전의 면모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과학적 토대 위에서 새로운 사회적 구조를 합리적으로 구축할 수 있다는 관념은, 우리가 새로운 사회적 기간을 우리가 구상한 방식으로 다소 정확하게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구상이, 사회적 사실을 포함하는 과학에 근거한다면, 그 구상은 배열의 새로움에 관해서만 내재적으로 새로운 특징을 설명할 수 없다 (3절 참조).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기간에 자체의 내재적 참신성이 있을 것임을 ㅡ 어떤 상세한 구상도 틀림없이 소용없게 만들고, 그 구상이 근거하는 어떤 과학도 허위로 만드는 논증 ㅡ 안다.
이 역사주의적 고찰은, 경제학을 포함하여 모든 사회과학에 적용될 수 있다. 그리하여 경제학은 사회개혁과 관련하여 귀중한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할 수 없다. 사이비-경제학만 합리적 경제 계획을 위한 배경을 제공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정말로 과학적 경제학은, 다양한 역사적 기간을 통하여 경제 발전의 추동력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따름이다. 그 경제학은, 우리가 미래 기간들의 개요를 예견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지만 새로운 기간을 위한 상세한 구상을 전개하여 작동시키는 데는 우리를 도울 수 없다. 다른 사회과학에 성립하는 것은 틀림없이 경제학에도 성립한다. 경제학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사회의 움직임에 대하여 경제적 법칙을 밝히는 것이 될 수 있을 따름이다’ (마르크스).
17 사회 변화를 해석하기 대(對) 구상하기
사회발전에 대한 역사주의적 견해는, 운명론을 암시하지도 않으며 ㅡ 정반대로
ㅡ 활동 중단을 야기할 필요도 없다. 역사주의자 대부분은 ‘행동주의(activism)’를 향한 매우 두드러진 경향을 지닌다 (1절 참조). 우리의 소망과 사념, 우리의 꿈과 우리의 추론, 우리의 두려움과 우리의 지식, 우리의 이해관계와 우리의 에너지가 모두 사회발전에서 추동력(forces)이라는 것을 역사주의는 완전히 인정한다. 역사주의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역사주의는, 여러분의 꿈이나 여러분의 이성이 구축하는 것이 계획에 따라서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할 뿐이다. 역사의 주류(主流: main current)에 부합하는 계획만 효과를 낼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역사주의자들에 의하여 합당하게 인정되는 종류의 활동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런 활동들만, 임박한 변화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그 변화의 발생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합당하다. 사회적 산파역할(産婆役割: midwifery)은, 사회적 통찰력에 근거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이자 우리에게 개방된 완벽하게 합당한 유일한 활동이다.
과학적 이론과 같은 것은 활동을 직접적으로 고취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런 이론은 특정 활동을 비현실적인 것으로서 좌절시킬 수 있을 터일 따름이다),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함축적으로 격려할 수 있다. 역사주의는 분명히 이런 종류의 격려를 제공한다. 역사주의는 심지어 인간 이성에 특정 역할을 부여한다; 이유인즉 유일하게 우리에게 합당한 활동이 취해야 하는 방향이 임박한 변화의 방향과 일치하려면 그 방향을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역사주의적 사회과학인 과학적 추론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역사관련 예언과 역사에 대한 해석은 틀림없이 심사숙고하고 현실적인 사회적 행동의 토대가 된다. 결과적으로, 역사에 대한 해석은 틀림없이 역사주의적 사유의 핵심적 직무이다; 그리고 사실상 그 해석은 그렇게 되었다. 역사주의자들의 모든 생각과 모든 활동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하여 과거 해석하기를 겨냥한다.
역사주의는 나은 세상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이나 격려를 제공할 수 있는가? 본질적으로 더 합리적 사태를 향한다는 즉, 나은 사태를 향한다는 의미에서 사회발전이 본질적으로 ‘훌륭하거’나 ‘합리적’이라고 믿기에 사회발전에 대하여 낙관적 견해를 갖는 역사주의자만 그런 희망을 제공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사회적 및 정치적 기적에 대한 신뢰에 해당할 터인데 왜냐하면 그 견해가 더 합리적 세계를 만들어내는 인간 이성의 능력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영향력을 지닌 몇몇 역사주의적 저술가들은 자유의 왕국이 도래함을 예언했는데 그 왕국 안에서 인간의 사건은 합리적으로 계획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인류가 현재 고통을 당하고 있는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와 이성의 왕국으로의 천이(遷移: transition)는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ㅡ 기적적으로 ㅡ 역사적 발전에 대한 맹목적이고 불변적 법칙에 의해서인 냉혹한 필연성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고 그 법칙에 우리가 복종하라고 그들은 충고한다.
사회생활에서 이성의 영향력 증대를 간구하는 사람들은, 역사발전의 법칙을 발견하기 위하여 역사를 연구하여 해석하라고 역사주의에 의하여 충고받을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 해석이, 자신들의 간구에 답하는 변화가 임박했다는 것을 밝힌다면 그 간구는 합당한 간구인데 이유인즉 그 간구가 과학적 예측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임박한 발전이 또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면, 세상을 더 합당하게 만들려는 소망은 전혀 부당한 것으로 판명된다; 역사주의자들에게 그것은 그렇다면 유토피아적 꿈일 뿐이다. 행동주의(activism)는, 임박한 변화를 묵인하여 그 변화의 실현을 돕는다는 조건으로만 정당화될 수 있다.
나는 이미, 역사주의가 보는 바로서 자연주의적 방법이 확정된 사회학적 이론을 ㅡ 사회는 의미심장하게 발전하거나 변하지 않는다는 이론 ㅡ 함축한다고 밝혔다. 우리는 이제, 역사주의적 방법이 기묘하게 유사한 사회학적 이론을 ㅡ 불변하는 필연성에 의하여 미리 결정된 단계들을 통하여 사회는 반드시 변할 것이지만, 변할 수 없는 미리 결정된 통로를 따라서 변할 것이라는 이론 ㅡ 함축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회가, 자체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자연법칙을 발견했을 때, 심지어 그때도 사회는 자체의 진화에 관한 자연적 단계들을 건너뛸 수도 없고 펜을 휘둘러 세계로부터 그 단계들을 회피할 수도 없다. 그러나 사회는 이만큼만 할 수 있다: 사회는 산고(産苦: birthpangs)를 줄여서 경감할 수 있다.’ 마르크스에게서 기인하는 이 정식화는 역사주의적 입장을 탁월하게 대변한다. 그 정식화가 활동하지 말라고도 가르치지 않고 실제적 운명론을 가르치지도 않을지라도, 역사주의는 임박한 변화를 변경시키려는 여하한 시도도 무익함을 가르친다; 말하자면 역사의 추세에 관한 운명론으로 운명론의 기이한 변종이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요점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활동주의적’ 촉구로 인하여 변화에 대한 자체의 강조 때문에 역사주의자들에 많은 공감이 발생할 것이다 (여기서 ‘세계’는 인간사회의 발전을 의미한다고 알기 때문에). 그러나 그 촉구는 역사주의의 가장 중요한 교설과 충돌한다. 이유인즉 우리가 지금 아는 바와 같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주의자는 사회발전을 해석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그 발전을 도울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의 요점은, 아무도 그 발전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18 분석의 결론
나의 마지막 언명들이, 역사주의적 입장을 나아가 비판하기 전에 그 입장을 가능한 한 예리하고 확신적으로 개괄하겠다고 내가 주장한 의도로부터 이탈한다고 아마도 느껴질 것이다. 이유인즉 이 언명들이, 몇몇 역사주의자가 낙관론이나 활동주의로 경도되는 것은 역사주의적 분석 자체의 결과에 의하여 패배함을 밝히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주의에 일관성이 없다는 혐의를 함축하는 듯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비판과 반어법이 설명에 포함되도록 허용하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에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비판이 합리적일 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먼저 낙관론자이고 활동주의자이며 나중에 역사주의자인 사람들만 나의 비평을 해로운 의미에서 비판적으로서 생각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원래 자신들이 낙관론이나 활동주의에 경도되었기 때문에 역사주의에 매료된 사람들.) 그러나 원래 역사주의자인 사람들에게 나의 비평들은 틀림없이, 자신들의 역사주의적 교설에 대한 비판으로서가 아니라 그 비판을 낙관론이나 활동주의와 연계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으로서만 보인다.
그리하여 모든 형태의 활동주의가 확실히 역사주의와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서 비판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활동주의의 무절제한 형태 중 몇 가지 형태만 비판된다. 자연주의적 방법과 비교되어, 역사주의가 변화와 과정 및 움직임을 강조하기 때문에 순수한 역사주의자는 역사주의가 정말로 활동을 고취한다고 주장할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주의는 틀림없이 모든 종류의 활동을 과학적 관점에서 타당한 것으로서 맹목적으로 수용할 리가 없다; 많은 가능한 활동이 비현실적이고, 그 활동의 실패는 과학에 의하여 예견될 수 있다. 이것이, 순수한 역사주의자와 다른 역사주의자들이 유용한 활동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의 범위에 한계를 부여하는 이유이고 한계에 대한 강조가 역사주의에 대한 분명한 분석을 위하여 필요한 이유라고 순수한 역사주의자는 말할 터이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두 가지 마르크스의 인용구가 (앞 절에 있는) 서로 모순되지 않고 보완적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두 번째 인용구가 (그리고 더 오래된 인용구) 자체만으로 생각되어 아마도 다소 너무 ‘활동주의적’으로서 보일 수 있을 터일지라도, 자체의 고유한 한계는 첫 번째 인용구에 의하여 정해진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인용구가 지나치게 급진적 활동주의자들을 매혹하여 그들이 역사주의를 포용하도록 영향을 미쳤다면, 첫 번째 인용구는 그리하여 그들의 동정심을 소외시켰을지라도 틀림없이 그들에게 활동의 고유한 한계를 가르쳤다고 주장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나의 설명이 불공정하지 않다는 것, 그러나 나의 설명이 활동주의와 관련하여 단지 근거를 제거한다는 것은 이 이유 때문이다. 유사하게, 역사주의적 낙관론은 틀림없이 믿음에만 의존한다는 (더 합당한 세계를 실천하는 역할이 이성에게 거부되었기 때문에) 취지의 앞 절에서의 나의 다른 비평은 역사주의에 대하여 해로운 비판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비평은, 원래 낙관론자이거나 합리주의자인 사람들에게 해롭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일관적 역사주의자는 이 분석에서, 낙관론과 비관론의 통상적 형태로 낙관론과 비관론 모두가 지닌 그리고 또한 합리주의가 지닌 낭만적이고 유토피아적 특징에 대한 유용한 경고만을 볼 것이다. 진정으로 과학적 역사주의는 그런 요소들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그가 주장할 것이다; 우리가 중력의 법칙에 복종해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발전에 관한 현존하는 법칙에 복종해야 할 따름이라고 그가 주장할 것이다.
역사주의자는 심지어 더 멀리 나아갈 것이다. 그는, 채택할 가장 합당한 태도가 우리가 지닌 가치의 체계를 임박한 변화에 부응하게 만들 정도로 그 체계를 조정하는 것이라고 부연할 것이다. 이것이 이룩되면, 우리는 정당화될 수 있는 형태의 낙관론에 도달하는데, 왜냐하면 변화가 저 가치의 체계에 의하여 판단되면 변화는 그 경우 반드시 나은 것을 위한 변화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관념은 몇몇 역사주의자에 의하여 실제로 믿어졌고, 심지어 상당히 정합적인 (그리고 아주 인기 있는) 역사주의적 도덕 이론으로 발전되었다: 도덕적으로 선한 것은 도덕적으로 진보적이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으로 선한 것은 미래의 기간에 채택될 그런 행동 표준에 부합하는 데서 자체의 시간을 앞서는 것이다.
이 역사주의적 도덕 이론은, ‘도덕적 모더니즘(modernism)’이나 ‘도덕적 미래주의(futurism)’로서 (미학적 모더니즘이나 미래주의에 상대역이 있다) 서술될 수 있을 터인데, 역사주의의 반(反)-보수적 태도와 잘 들어맞는다; 그 이론은 또한, 가치에 관한 특정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 (‘객관성과 평가’에 관한 6절 참조). 무엇보다도 그 이론은, 역사주의가 ㅡ 역사주의가 방법에 관한 교설인 한에서만 이 연구에서 진지하게 검토되는 ㅡ 아마도 완벽한 철학 체계로 증폭되어 발전할 것이라는 징표로서 간주될 수 있다. 혹은,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역사주의적 방법이 아마도 세계에 대한 일반적인 철학적 해석의 일부로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가능성이 없지 않아 보인다. 이유인즉 논리학의 관점은 아닐지라도 역사의 관점에서, 방법론은 통상적으로 철학적 견해의 부산물이라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 역사주의적 철학을 다른 곳에서 검토하려는 의도가 나에게 있다. 여기서 나는, 역사주의의 방법론적 교설이 위에 제시된 바와 같이, 그 교설을 비판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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