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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진적 공학 대(對) 유토피아적 공학

이윤진이카루스 2025. 10. 24.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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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진적 공학 대() 유토피아적 공학

 

21 점진적 공학 () 유토피아적 공학

공학이라는 용어에 부착되는 혐오스러운 연상에도 불구하고, 점진적 기술(技術: technology)의 결과를 실용적으로 적용함을 서술하기 위하여 나는 점진적 사회공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 어떤 목표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사용 가능한 모든 기술적(技術的: technological) 지식을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공적(公的)일 뿐 아니라 사사로운 사회적 활동을 포함하는 용어에 대한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 용어는 유용하다. 점진적 사회공학은, 기술(技術: technology)의 영역을 넘는 것으로서 목적에 관하여 물리 공학을 닮는다. (목적에 관하여 기술[技術: technology]이 언급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목적들이 서로 양립 가능한지 혹은 실현 가능한지 아닌지이다.) 이 점에서 점진적 사회공학은 역사주의와 다른데 역사주의는 인간 활동의 목적을 역사적 힘(forces)에 의존하여 역사주의 영역 안에 있는 것으로서 간주한다.

물리공학자의 주요 과제가 기계들을 고안하여 그 기계들을 개조하고 유지와 보수하는 것임과 꼭 마찬가지로, 점진적 사회공학자의 과제는 사회제도를 고안하여 이미 존재하는 저 사회제도를 재구축하여 운영하는 것이다. 사회제도라는 용어는 여기서, 공적 및 사사로운 특징을 띤 집단을 포괄하기 위하여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리하여 나는 그 용어를 사용하여, 작은 가게건 보험회사건 사업을 그리고 똑같이 학교나 교육제도나 경찰력 혹은 교회나 법정을 서술한다. 점진적 기술자나 공학자는, 사회제도 대부분이 인간 행위가 낳은 의도되지 않은 결과로서 다만 성장한반면 소수의 사회제도만 의식적으로 고안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중요한 사실에 의하여 아무리 강력하게 그가 인상을 받을지라도, 공학자나 기술자로서 그는 기능적이거나 도구적관점에서 사회제도를 바라볼 것이다. 그는 사회제도를 특정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 혹은 특정 목적을 수행하는 데로 전환될 수 있는 것으로서 볼 것이다; 유기체로서라기보다 기계로서. 이것은 물론, 그가 제도와 물리적 도구 사이의 근본적 차이점을 간과할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기술자는 틀림없이 유사점뿐 아니라 차이점도 연구하여 자신이 얻은 결과를 가설의 형태로 표현한다. 그리고 정말로 다음 사례에 의하여 밝혀지는 바와 같이, 제도에 관한 가설을 기술적(技術的: technological) 형태로 정식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무오류의 제도를, 다시 말해서 그 작동이 매우 크게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제도를 구축할 수 없다: 제도는, 기껏해야, 제도가 고안되는 목적을 위하여 일하는 그리고 그들의 개인적 행동력과 지식에 성공이 주로 의존하는 사람들을 도움에 의하여 개인적 요소라는 불확실성을 감소시킬 수 있다. (제도는 요새와 같다. 제도는 잘 고안되어야 하고 동시에 합당한 인사 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점진적 공학자의 특징적 접근방식은 이렇다. 혹시 그가 전체로서사회에 관련하는 몇 가지 이념을 ㅡ 아마도 사회의 일반적 복지 ㅡ 귀중하게 여길지라도, 그는 전체로서 사회를 다시 고안하는 방법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의 목적이 무엇이든, 지속적으로 개선될 수 있는 작은 조정과 재조정에 의하여 그 목적을 이룩하려고 그는 노력한다. 그의 목적은 다양한 종류일 것인데 예를 들어, 특정 개인들이나 특정 집단들에 의한 부()나 권력의 축적이다; 혹은 부()나 권력의 분배; 혹은 개인이나 집단이 가진 특정 권리보호, 기타 등등. 그리하여 진보적일 뿐 아니라 전체주의적인 가장 다양한 경향이 공적이거나 정치적 사회공학에 있을 것이다. 점진적 개혁을 위한 포괄적인 진보적 강령의 사례가 W. 리프먼(Lippmann)에 의하여 진보주의의 의제(The Agenda of Liberalism)’라는 제목으로 제시되었다. 점진적 공학자는, 소크라테스처럼, 우리가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를 안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실수로부터만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그는, 조심스럽게 기대된 결과를 이룩된 결과와 비교하면서 그리고 개혁이 낳는 불가피하게 원치 않는 결과를 항상 조심하면서 점진적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원인과 결과를 분리하여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복잡성과 범위에 대하여 개혁 실천을 피할 것이다.

그런 점진적 땜질하기, 많은 활동주의자의 정치적 기질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 활동주의자들의 강령은 사회공학의 강령으로서 또한 서술되기도 했는데 전체론적이거나 유토피아적 공학으로 지칭될 것이다.

전체론적 혹은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은, 점진적 사회공학과 반대로, ‘개인적특징을 띠는 적이 없고 항상 공적(public)’ 특징을 띤다. 그 공학은 확정된 계획이나 청사진에 따라서 사회 전체의 개조를 겨냥한다; 그 공학은 주요 요직을 장악하는 것 국가가 거의 사회와 동일하게 될 때까지... 국가권력 확대를 겨냥하며 나아가 그 공학은 이 주요 요직으로부터 발전하는 사회의 미래를 주조하는 역사적 힘(forces)의 통제를 겨냥한다: 이 발전을 중단시킴에 의해서나 아니면 그 발전의 과정을 예견하여 사회를 그 과정에 조정함에 의하여.

아마도 여기서 서술된 점진적 접근방식과 전체론적 접근방식이, 우리가 점진적 접근방식의 범위에 한계를 두었음을 고려하여, 근본적으로 다른지가 의문시될 것이다. 이 접근방식이 여기서 이해되는 바와 같이, 예를 들어 헌법 개정은 그 범위에 충분히 속한다; 또한 일련의 점진적 개혁이 아마도 예를 들어 소득의 더 큰 평준화를 향한 경향인 한 가지 일반적 경향에 의하여 고취될 것이라는 가능성을 나는 배제하지 않겠다. 이런 방식으로, 점진적 방식은 통상적으로 사회의 계급구조로 지칭되는 것에서 변화를 야기할 것이다. 더 야심찬 이런 종류의 점진적 공학과 전체론적이거나 유토피아적 접근방식 사이에 차이점이 있는가? 라는 질문이 생길 것이다. 우리가 어떤 제시된 개혁에서 생길 결과를 평가하려고 시도할 때 점진적 공학자가 사회 전체에 미치는 어떤 조치의 결과를 측정하려고 틀림없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우리가 고려한다면 이 질문은 훨씬 더 유관하게 될 것이다.

이 질문에 답변하면서, 나는 두 가지 방식 사이에 정확한 구분선을 그으려고 시도하지 않겠지만 전체론적 공학자와 점진적 공학자가 사회 개혁이라는 과제를 바라보는 매우 다른 관점을 제시하려고 나는 시도하겠다. 전체론자는, 점진적 접근방식을 너무 겸허한 것으로서 배척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 접근방식을 거부하는 것은, 그들의 관행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실제로 그들은, 야심적이고 무자비할지라도, 본질적으로 점진적인 방식인 것을 그 방식이 지닌 신중하고도 자기-비판적 특징 없이 다소 무계획적이고 서투르게 적용하기에 항상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사실상 전체론적 방식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된다는 것이다; 전체론적 변화가 더 크게 시도될수록, 그 변화가 낳는 의도되지 않고 주로 기대되지 않은 결과로 인하여 전체론적 공학자는 점진적 즉흥 조치라는 미봉책을 쓸 수밖에 없다. 사실상 이 미봉책은, 더 겸허하고 신중한 점진적 개입보다 중앙집권적이거나 집단주의적 계획에 더 특징적이다; 그리고 이 미봉책으로 인하여 유토피아적 공학자는 지속적으로 자신이 수행하려고 의도하지 않았던 것을 실행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 미봉책은 계획되지 않은 계획이라는 악명 높은 현상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유토피아적 공학과 점진적 공학 사이의 차이점은 사실상 규모와 범위에서의 차이점이라기보다 불가피한 예기치 않은 사건에 대한 신중함과 대비 태세에서의 차이점으로 판명된다. 실제로 두 가지 방식은 규모와 범위에서와 다른 면에서 다르다고 ㅡ 우리가 합리적 사회 개혁에 대한 합당한 방법에 관하여 두 가지 교설을 비교한다면 우리가 기대하도록 영향을 받는 것과 반대로 ㅡ 우리는 또한 말할 수 있을 터이다. 이 두 가지 교설 중에서, 다른 하나가 허위여서 회피될 수 있고 심각하기도 한 오류를 야기하기 마련인 반면, 하나는 참이라고 내가 믿는다. 두 가지 방식 중에서, 다른 하나가 존재하지 않을 뿐인 반면 하나는 가능하다고 내가 믿는다: 다른 하나는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유토피아적이거나 전체론적 접근방식과 점진적 접근방식 사이의 차이점 중 한 가지 차이점은 이런 방식으로 서술될 것이다: 점진적 공학자가 개혁의 범위에 관하여 열린 정신으로 자신의 문제를 공격할 수 있는 반면,

전체론자는 이렇게 할 수 없다; 이유인즉 전체론자는 완벽한 재건축이 가능하며 필요하다고 사전에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광범위한 결과를 낳는다. 이 사실로 인하여, 제도적 통제에 대하여 한계를 서술하는 특정 사회학적 가설에 반하여 유토피아주의자는 편견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 이 절의 위에서 언급된 한 가지 제도적 통제인데 개인적 요소인 인간적 요인에서 기인하는 불확실성을 표현한다. 그런 가설을 선험적으로 배척함에 의하여, 유토피아적 접근방식은 과학적 방법의 원칙을 위반한다. 다른 한편, 인간적 요인의 불확실성과 연관된 문제로 인하여 유토피아주의자는 좋든 싫든 제도적 수단에 의하여 인간적 요인을 어쩔 수 없이 통제하려 시도하고 계획에 따라서 사회변혁뿐 아니라 인간변혁도 포함하기 위하여 자신의 강령을 확대한다.그리하여 정치적 문제는, 인간이 지닌 충동이 자체의 에너지를 올바른 전략적 요점에 겨누어 바라는 방향으로 발전의 전체 과정을 이끌 방식으로 인간이 지닌 충동을 조직하는 것이다.’ 좋은 의도를 지닌 유토피아주의자가 심지어 이 강령을 개시하기도 전에 이 강령이 실패 인정을 함축한다는 것은 그 유토피아주의자에게 닿지 않는 듯이 보인다. 이유인즉 그 강령이, 이 남녀들이 살기에 적당한 새로운 사회를 우리가 건설해야 한다는 그 유토피아주의자의 요구를, 그 유토피아주의자가 만드는 새로운 사회에 알맞도록 우리가 이 남녀들을 주조해야한다는 요구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분명히, 새로운 사회의 성패를 시험하는 기회가 제거된다. 이유인즉 그 사회에서 살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하여 자신들이 그 사회에서 살기에 아직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닌 인간적 충동이 더 조직될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험의 가능성이 없다면 과학적방법이 사용되고 있다는 여하한 주장도 사라진다. 전체론적 접근방식은 진정으로 과학적 태도와 양립될 수 없다.

유토피아적 공학은 이 연구의 주제 중 하나의 주제가 아니지만, 그 공학이 다음 3가지 절에서 역사주의와 함께 고찰될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집단주의적 (혹은 중앙집권적) 계획이라는 명칭 하에서 그 공학은 점진적 기술(技術: technology)’점진적 공학으로부터 예리하게 구분되어야 하는 매우 유행성 교설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유토피아주의는 점진적 접근방식에 대한 자체의 적대감에서 역사주의를 닮을 뿐 아니라 자주 역사주의적 이념과 힘(forces)을 합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ㅡ 칼 포퍼,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 1976, 64-70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