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주의와 전체론의 불순한 연합
이 연합과 관련된 두 명의 특징적 대표자는 플라톤과 마르크스이다. 비관론자인 플라톤은, 모든 변화는 ㅡ 혹은 거의 모든 변화 ㅡ 부패라고 믿었다; 이것이 그의 역사 발전 법칙이었다. 따라서 그의 유토피아적 청사진은 모든 변화를 중지시키는 것을 겨냥한다; 오늘날 그것은 ‘정역학(靜力學: static)’으로 지칭될 터이다. 다른 한편 마르크스는 낙관론자였고 아마도 (스펜서[Spencer]처럼) 역사주의적 도덕론을 옹호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유토피아적 청사진은 정지된 사회에 대한 청사진이라기보다 발전적이거나 ‘역동적’ 사회에 대한 청사진이었다. 그는, 정치적이거나 경제적 강압이 없는 이상적 유토피아에서 최고조에 달하는 발전을 예언하여 능동적으로 그 발전을 확대하려고 시도했다: 국가는 소멸하고, 개인은 자기 능력에 따라서 자유롭게 협동하여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충족된다.
역사주의와 유토피아주의의 연합에서 가장 강력한 요소는, 의심할 바 없이, 두 가지 모두에 공통적인 전체론적 접근방식이다. 역사주의는 사회생활의 면모의 발전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사회’의 발전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유토피아적 공학은 유사하게 전체론적이다. 두 가지 모두는, 다음 절에서 증명될 사실을 ㅡ 이런 의미에서 ‘전체’는 결코 과학적 탐구의 대상일 수 없다는 사실을 ㅡ 간과한다. 두 가지 당파는 ‘점진적 땜질하기’와 ‘계획 없이 어느 정도 성공하기’에 만족하지 못한다: 두 가지 당파는 더 급진적인 방법을 채택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역사주의자와 유토피아주의자 모두는, 변화하는 사회적 환경에 대한 경험에 (흔히 놀랍고 때때로 ‘사회적 붕괴’로 서술되는 경험) 의하여 인상을 받고 심지어 깊이 당혹하는 듯이 보인다. 따라서 그들 모두는, 한 사람은 사회발전의 과정을 예언함에 의하여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변화가 엄격하고 완벽하게 통제되거나 심지어 변화가 완전히 정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에 의하여, 이 변화를 합리화하려고 시도한다. 그 통제는 완벽해야 하는데 이유인즉 그렇게 통제되지 않는 사회생활의 어떤 분야에 보이지 않는 변화를 야기하는 위험한 힘(forces)이 잠복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역사주의자와 유토피아주의자 사이의 또 다른 연결 고리는,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목표나 목적이 선택이나 도덕적 결정의 문제라고 믿지 않고 그 목표나 목적이 자신들의 탐구 분야 안에서 자신들에 의하여 과학적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정확하게 물리 공학자와 다른 만큼, 점진적 공학가 및 기술자와 다르다.) 역사주의자와 유토피아주의자 모두는, 자신들이 ‘사회’의 참된 목표나 목적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사회의 역사적 경향을 결정함에 의하여, 혹은 ‘자기들의 시대에 필요한 것’을 진단함에 의하여. 그리하여 그들에게 특정 종류의 역사주의적 도덕이론을 채택하는 경향이 있다 (18절 참조). 유토피아적 ‘계획하기’를 옹호하는 저술가 대부분이 역사가 나아가는 방향 때문에 계획하기는 불가피하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우리는 계획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동일한 역사주의적 표현방식으로, 이 저술가들은 자신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퇴행적이라고 꾸짖으며 ‘낡은 사고 습관을 깨뜨리고 변하는 사회를 이해하는 새로운 비결을 발견하는 것’이 자신들의 주요 과제라고 믿는다. 우리가 점진적 접근방식이나 ‘“계획 없이 어느 정도 성공하기”라는 정신’을 포기할 때까지 사회 변화의 추세가 성공적으로 영향을 받거나 심지어 방향 전환이 될 수도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새로운 ‘계획하기 수준에서 사유’는, 전체론이 플라톤에서부터 계속하여 상당히 고대 사고의 특징이었던 듯이 보이기 때문에 그 사유가 예상되는 만큼 참신한지 의심스러울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유의 발전에서 높은 수준이거나 최근 단계와 그렇게 동떨어진 전체론적 사유 방식이 (‘사회’에 관해서건 ‘자연’에 관해서건) 과학 이전의 단계에 특징적이라는 견해에 대하여 상당히 훌륭한 사례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ㅡ 칼 포퍼,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 1976년, 73-6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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