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포퍼 원전+번역문

전체론에 대한 비판

이윤진이카루스 2025. 10. 24. 14:47

전체론에 대한 비판.hwpx
0.10MB

 

전체론에 대한 비판

 

23 전체론에 대한 비판

나 자신의 편향을 밝혀서, 한편 점진적 접근방식과 다른 한편 역사주의 및 유토피아주의 사이의 대립뿐 아니라 나의 비판의 기초를 이루는 관점을 개괄한 후 나는 이제 역사주의적 교설에 대한 검토라는 나의 주요 과제로 나아가겠다. 나는 전체론에 대한 간략한 비판으로써 시작하겠는데 왜냐하면 전체론이 공격받는 이론의 가장 결정적 입장 중 한 가지 입장으로 이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최근의 전체론적 문헌에서 전체라는 단어를 사용함은 근본적으로 애매모호하다. 그 단어는 (α) 사물의, 특히 사물의 구성적 부분 사이에서 성립하는 모든 관계의 모든 속성이나 양상 전체를, 그리고 (b) 문제의 물체의 어떤 특별한 속성이나 양상을, 즉 사물이 단순한 무더기라기보다 조직된 구조로 보이게 만드는 특별한 속성이나 양상을 의미하는 데 사용된다. (b) 의미에서 전체는 특히 심리학의 소위 형태(Gestalt)학파에 의하여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유기체나 전기장(電氣場: electrical fields)이나 기계와 같은 특정 사물에서 발견될 수 있는 구조의 규칙성으로서 (예를 들어, 대칭) 우리가 그런 양상을 연구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정말로 없다. 형태(Gestalt) 이론이 표현하는 바와 같이, 그런 구조를 지닌 사물에 대하여 그 사물은 집합체 이상이라고 ㅡ 그 사물의 부분들의 단순한 총화 이상ㅡ 언급될 것이다.

형태(Gestalt) 이론의 사례 중 어떤 사례도, (b)의 의미에서의 전체는 (a)의 의미에서의 전체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밝히는 데 사용될 것이다. 멜로디는 단일한 음악 음들의 단순한 집합이나 배열 이상이라는 것을 형태(Gestalt) 이론가와 함께 우리가 참작한다면, 우리가 참작하려고 선별하는 것은 음들(sounds)의 이 배열이 띠는 양상 중 하나의 양상이다. 그것은, 이 음 중 첫 번째 음의 절대 높이나 그 음들의 평균적 절대 강세와 같은 다른 양상과 분명하게 구분될 양상이다. 그리고 예를 들어 멜로디의 리듬인 멜로디의 양상보다 훨씬 더 추상적인 형태(Gestalt) 양상이 있다; 이유인즉 리듬을 참작함에 의하여 우리는 심지어 상대적 음높이를 무시하는데 상대적 음높이는 멜로디와 관련하여 중요하다. 그렇게 선택적이 됨에 의하여 형태(Gestalt)에 대한 연구 및, 그 연구와 함께 (b)의 의미에서의 전체에 대한 연구는 전체성에 대한 즉, (α)의 의미에서의 전체에 대한 연구와 뚜렷이 구별된다.

(b)의 의미에서 전체가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리하여 틀림없이, (α)의 의미에서 전체들이 그렇게 연구될 수 있다는 전혀 다른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도움이 되지 않는다. 후자(後者) 주장은 배척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연구하고 싶어 하면 우리는 그 사물의 특정 양상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세계의 전체 조각이나 자연의 전체 조각을 관찰하거나 서술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사실상 심지어 가장 작은 전체 조각도 그렇게 서술되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모든 서술은 반드시 선택적이기 때문이다. (α)의 의미에서 전체는 과학적이든 다른 것들이든 어떤 활동의 대상이 결코 될 수 없다고 심지어 언급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유기체를 잡고 또 다른 장소로 그 유기체를 옮긴다면, 우리는 그 유기체가 지닌 양상 중 많은 양상을 무시하면서 그 유기체를 물리적 물체로서 다룬다. 우리가 그 유기체를 살해한다면 우리는 그 유기체가 지닌 속성 중 특정 속성을 파괴했지만, 결코 그 속성 모두를 파괴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우리가 그 유기체를 박살하거나 태울지라도 우리는 도저히 그 유기체가 지닌 속성의 전체와 그 유기체가 지닌 부분의 모든 상호-관계 전체를 파괴할 수 없다.

그러나 총합이라는 의미에서 전체는 과학적 연구의 대상 혹은 통제나 재건축과 같은 다른 활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심지어 일반적으로 과학이 선택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전체론자들에게도 이해되지 않았던 듯이 보인다. 그들은 형태(Gestalt) 심리학이라는 전례에 의존하기 때문에 사회적 전체들에 (총합들이라는 의미에서) 대하여 과학적 파악이 가능함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형태(Gestalt) 접근방식과, ‘한 시대의 모든 사회적 및 역사적 사건의 구조를 포함하는 (α)의 의미에서의 사회적 전체들에 대한 처리 사이의 차이점은, 사회적 전체들이 일별해서 이해되기에는 너무 미묘하여그 전체들은 오랫동안 생각한 다음에 겨우 점진적으로 파악되고 그 오랜 생각에서 모든 요소가 주목되고 비교되어 결합되는반면 형태(Gestalt)는 직접적인 직관적 감지에 의하여 파악될 것이라는 사실에 놓여있다고 그들이 믿기 때문이다. 요컨대 전체론자들은, 형태(Gestalt) 감지가 (α)의 의미에서의 전체들과 관련이 없을 따름이라는 것과 직관적이건 논증적이건 모든 지식은 틀림없이 추상적 양상을 띤다는 것과 우리는 결코 사회적 실재 자체의 구체적 구조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 요점을 간과한 다음, ‘사소한 세부 사항에 대한 전문가의 연구는 전체 과정을 재구축하는 것을 겨냥하는 통합적이거나 종합적방법에 의하여 보완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리고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전체로서 보기를 거부한다면 사회학은 계속해서 본질적 질문을 무시할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전체론적 방법은 반드시 단순한 강령으로 남는다. 전체에 대한 과학적 서술의 한 가지 사례로서 구체적인 사회적 상황이 인용된 적이 없다. 그리고 그 상황은 인용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모든 그런 경우 무시된 양상을 지적하는 것이 항상 쉬울 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문맥에서 매우 중요할 양상을 지적하는 것이 항상 쉬울 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론자들은, 불가능한 방법에 의하여 전체 사회를 연구할 계획을 세울 뿐 아니라 그들은 또한 전체로서 우리의 사회를 통제하여 재구축할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국가의 힘은 국가가 거의 사회와 동일하게 될 때까지 증가하기 마련이라고예언한다. 이 구절에 의하여 표현되는 직관은 매우 명백하다. 그것은 전체주의적 직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직관을 전달하는 것과 별개로, 예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회라는 용어는 물론 모든 개인적 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사회적 관계를 포괄한다; 모친과 자녀 둘 중 하나에 대한 아동복지사의 관계만큼 자녀에 대한 모친의 관계를 포괄한다. 이 관계 모두를 혹은 거의모두를 통제한다는 것은 많은 이유 때문에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단지 사회적 관계에 대한 모든 새로운 통제로써 우리가 통제될 많은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야기하기 때문이라면 이 관계 모두를 혹은 거의모두를 통제한다는 것은 많은 이유 때문에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요컨대, 그 불가능성은 논리적 불가능성이다. (시도하면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가 발생한다; 그 입장은, 사회의 전체를 연구하려는 시도의 경우에서 유사하다 ㅡ 그것은 틀림없이 현재의 연구도 포함할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주의자들이 정확하게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려고 계획한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있을 리 없다; 이유인즉 그들이 우리에게, 다른 것들 가운데서 개인적 교제를 더 실재론적 방식으로 주조하는 것이 심지어 가능할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b) 의미에서의 전체들이 (α) 의미에서의 전체들과 반대로, 주조되거나 통제되거나 심지어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물론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를 들어 멜로디를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적 통제를 실행하려는 유토피아적 꿈들과 관계가 없다.)

유토피아주의에 대해서 이만큼만 하자. 역사주의에 관한 한, 그 입장은 유사하게 절망적이다. 역사주의적 전체론자들은 흔히, 역사적 방법은 총합들이라는 의미에서 전체를 다루기에 적합하다고 함축적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오해에 근거한다. 이 주장은, 이론과학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역사가 추상적인 일반적 법칙에 관심을 두기보다 구체적인 개별적 사건 및 개별적 인격에 관심을 둔다는 올바른 믿음과 역사가 관심을 두는 구체적개인들이 (α)의 의미에서의 구체적전체들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을 결합함으로부터 생긴다. 그러나 구체적 개인들은 (α)의 의미에서의 구체적 전체들과 동일시될 수 없다; 이유인즉 역사는, 다른 종류의 탐구와 같이, 역사가 관심을 두는 대상들에서 선택된 측면을 다룰 수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유기체의 전체한 시대의 모든 사회적 및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는 사회의 상태에 대한 역사인 전체론적 의미에서의 역사가 있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류다. 이 관념은, 인류의 역사를 거대하고 포괄적 발전의 흐름으로서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나 그런 역사는 서술될 수 없다. 서술되는 모든 역사는, 전체발전의 특정 협소한 측면에 대한 역사이어서 어떤 정도로든 심지어 선택된 특수하고 불완전한 측면에 대해서도 매우 불완전한 역사이다.

유토피아주의에 대한 그리고 역사주의에 대한 전체론적 경향은 다음의 특징적 서술에서 통합된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에 대하여 실행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완벽하게 우리가 자연의 전체 체계를 세워서 지시해야 했던 적은 없고 그리하여 우리는 자연의 개별적 세계들의 역사와 구조에 침투해야 했던 적이 없다. 인류는... 두 번째 자연의 창조를 떠맡으려고 시도한 적이 없을지라도 자체의 사회생활 전체를 규제하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 서술은, 전체론자들로서 우리가 자연의 전체 체계를 완벽하게다루기를 소망한다면 역사적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을 예시한다. 그러나 이 방식을 채택한 지구과학과 같은 자연과학은 자기 주제의 전체 체계를 파악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이 서술에 의하여 또한 예시되는 것은, (α)의 의미에서의 전체들을 세우거지시하거규제하거창조하는것이 가능하다는 옳지 않은 견해이다. ‘우리가 자연의 전체 체계를 세워서 지시해야 했던 적은 없다라는, 우리가 심지어 단 한 개의 물리적 기구 조각을 그 조각의 전체로 세워서 지시할 수 없다는 이유로만, 틀림없이 참이다. 그런 것들은 수행될 수 없다. 그런 것들은 유토피아적 꿈이거나 아마도 오해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실행하도록, 즉 사회의 전체 체계를 세워서 지시하고 사회생활의 전체를 규제하도록 강요당한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유토피아적 계획하기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역사적 힘(forces)’임박한 전개 상황으로써 우리를 위협하려는 전형적 시도일 뿐이다.

ㅡ 칼 포퍼,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 1976, 76-82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