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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의 방법과 사회과학의 방법은 근본적으로 동일하지만 차이점은?

이윤진이카루스 2025. 11. 6.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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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의 방법과 사회과학의 방법은 근본적으로 동일하지만 차이점은?

 

자연에 대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이론과학의 방법 사이에 어떤 차이점도 없다고 주장하려는 의도가 나에게 없다; 그런 차이점은 다양한 사회과학 사이에서뿐 아니라 심지어 다양한 자연과학 사이에서도 분명히 존재한다. (예를 들어 경쟁적 시장에 대한 그리고 라틴어 계통의 언어에 대한 분석을 비교하라.) 그러나 두 가지 분야에서 방법이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방법은 콩트[Comte]와 밀[Mill]이 염두에 두고 있던 방법과 다를지라도)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데 나는 두 사람의 의견에 ㅡ 그리고 C. 멩거(Menger)와 같은 다수의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ㅡ 동의한다. 방법은 항상 본질적으로 연역적인 인과성 설명을 제시하는 데 그리고 그 설명을 시험하는 데 (예측을 통하여) 놓인다. 이것은 때때로 가설-연역적 방법으로 지칭되었고 혹은 가설의 방법으로 더 빈번하게 지칭되었는데 이유인즉 그 방법이 시험하는 과학적 서술 중 어떤 서술에 관해서도 그 방법이 절대적 확실성을 이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이 서술은, 그 서술이 수많은 엄격한 시험을 통과한 후에 그 서술의 잠정성이라는 특징이 더 이상 명백하게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잠정적 가설이라는 특징을 항상 지닌다.

가설의 잠정적이거나 임시적 특징 때문에, 가설은 방법을 연구하는 학자 대부분에 의하여 그 가설이 증명된 이론에 의하여 (또는 적어도 어떤 확률계산의 의미에서 고도로 개연적으로 판명될 수 있는 이론에 의하여) 궁극적으로 틀림없이 대체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임시적으로서 간주되었다. 이 견해가 오류라고 그리고 그 견해로 인하여 전혀 불필요한 많은 난제가 발생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비교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과학에서 우리가 항상 설명과 예측 및 시험에 관심을 둔다는 것과 가설을 시험하는 방법은 항상 동일하다는 (앞 절 참조) 깨달음이다. 시험될 가설로부터 (예를 들어 보편법칙) 이 목적을 위하여 문제가 있는 것으로서 간주되지 않는 몇 가지 다른 서술과 함께 ㅡ 예를 들어, 몇 가지 초기조건 ㅡ 우리는 어떤 예측을 연역한다. 그다음 우리는, 가능할 때마다, 이 예측을 실험적 결과나 다른 관찰의 결과와 대조시킨다, 그 결과와 일치하면, 최종적 증명으로서는 아닐지라도 그 예측은 가설에 대한 입증으로서 간주된다; 분명하게 일치하지 않으면, 그 불일치는 그 예측에 대한 반증이나 오류판정으로 간주된다.

이 분석에 따르면, 설명과 예측 및 시험하기 사이에 큰 차이점이 없다. 차이점은 논리적 구조에 관한 차이점이 아니라 오히려 강조에 관한 차이점이다; 차이점은 우리의 문제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에 달렸다. 주어진 예측을 연역할 초기조건이나 보편법칙 중 몇 가지 법칙을 (혹은 두 가지 모두) 찾는 것을 우리가 우리의 문제로 생각하는 반면 예측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설명을 찾고 있다 (그리고 주어진 예측은 우리의 피설명항[explicandum]’이 된다). 우리가 법칙과 초기조건을 주어진 것으로서 (발견될 것으로서 라기보다) 간주하고 그리하여 어떤 새로운 정보를 얻으려고 그것들을, 예측을 연역하기 위해서만 사용하면 우리는 예언을 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과학적 결과를 적용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전제 중 한 가지 전제를, 다시 말해서 보편법칙이나 초기조건을 문제가 있는 것으로서 그리고 예측을 경험의 결과와 비교될 것으로서 간주한다면, 우리는 문제가 있는 전제에 대한 시험을 언급한다.

시험의 결과로 시험을 견디어낸 가설이 선택되거나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그리하여 배척되는 저 가설은 제거된다. 이 견해의 결론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 결론은 이렇다: 모든 시험은, 허위 이론을 제거하려는 ㅡ 이론이 시험에 의하여 오류로 판정된다면 그 이론을 배척하기 위하여 이론의 약점을 발견하려는 ㅡ 시도로서 해석될 수 있다. 이 견해는 때때로 역설적으로 간주된다; 우리의 목표는 허위 이론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을 정립하는 것이라고 언급된다. 그러나 가능한 한 잘 이론을 정립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목표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이론을 가능한 한 엄격하게 시험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론의 결점을 발견하려고 시도해야 하고 우리는 이론을 오류로 판정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우리의 최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론을 오류로 판정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만 그 이론이 엄격한 시험을 견디어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반증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지 않아서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론을 확인하는 사례를 발견해도 의미가 없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비판적이라면 우리는 항상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확인을 찾아서 발견할 것이고, 아마도 우리의 애호 이론에 위험할 것에서 우리는 눈을 돌리고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비판적으로 접근되었다면 반증되었을 이론을 지지하는 압도적 증거로 보이는 것을 얻는 일은 너무 쉬울 따름이다. 제거에 의하여 선택하는 방법을 작동하기 위하여, 그리고 가장 적합한 이론만 생존한다고 담보하기 위하여, 그 이론의 생존투쟁은 그 이론을 위하여 엄격하게 되어야 한다.

이것이 개괄적으로, 경험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모든 과학의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이론이나 가설을 얻는 방법은 어떠한가? 귀납적 일반화와 우리가 관찰로부터 이론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어떠한가? 이 질문에 대하여 (그리고 1절에서 토론된 교설이 26절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한, 그 교설에 대하여), 나는 두 가지 답변을 제시하겠다. (α) 우리가 관찰로부터 시작하여 그 관찰로부터 우리의 이론을 도출하려고 시도한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어느 때고 귀납적 일반화를 이룩한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나아간다는 편견은 일종의 시각적 망상이라고 그리고 과학 발전의 어떤 단계에서도 어떤 정도로 우리의 관찰에 영향을 미쳐 우리가 무수히 많은 관찰 대상들로부터 흥미로울 관찰 대상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주는 가설이나 편견 혹은 문제와 같은 이론의 본성으로 중요한 것 ㅡ 흔히 전문적인 것 ㅡ 없이 우리가 시작하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그렇다면, 제거의 방법이 ㅡ 24절에서 토론된 시행착오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 ㅡ 항상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 토론이 이 요점을 고집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우리가 (b) 정당화되지 않은 결론으로 도약함에 의하여 혹은 단지 그 결론을 예기치 않게 발견함에 의해서나 (다시 말해서, ‘직관에 의하여) 어떤 귀납적 절차에 의하여 우리가 우리의 이론을 얻었는지는 과학의 관점에서 무관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당신은 처음에 당신의 이론을 발견했는가?’라는 질문은 말하자면, 유일하게 과학적으로 유관한 어떻게 당신은 당신의 이론을 시험했는가?’라는 질문과 반대로 아주 개인적 문제와 관련된다. 그리고 여기서 서술된 시험하기의 방법은 생산성이 좋다; 그 방법은 새로운 방법을, 그리고 이론과 관찰 사이에서 상호 간의 주고받기를 낳는다.

이제 이 모든 것은 자연과학에 뿐 아니라 사회과학에도 참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사회과학에서 우리의 대상에 관하여 우리가 생각하기 이전에 그 대상을 우리가 보고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은 자연과학에서보다 훨씬 더 명백하다. 이유인즉 사회과학에 관한 대상 대부분은, 그 대상 모두는 아닐지라도, 추상적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 대상은 이론적 구축물이다. (심지어 전쟁이나 군대도 이것이 몇몇 사람에게 이상하게 들릴지라도 추상적 관념이다. 구체적인 것은 죽임을 당한 많은 사람이다; 혹은 군복을 입은 남녀, 기타 등등.) 우리의 경험을 해석하는 데 사용되는 이 대상인 이 이론적 구축물은, 특정 경험을 설명하기 위하여 특정 모형을 구축한 (특별히 제도에 관하여) 결과이다 ㅡ 자연과학에서 (우리가 원자와 분자 및 고체와 액체, 기타 등등에 대한 우리의 모형을 구축하는) 친숙한 이론적 방법이다. 그것은 환원이나 가설로부터 연역을 통해 설명하는 방법의 일부이다. 매우 흔히 우리가 가설이나 이론을 이용하여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의 이론적 모형을 구체적인 것으로 오해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은 너무나 흔한 종류의 오류이다. 모형이 흔히 이런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사실로 인하여 방법론적 본질주의에 관한 교설이 설명된다 (그리고 그렇게 함에 의하여 파괴된다) (10절과 비교하라). 그 사실로 인하여 그 교설이 설명되는데 이유인즉 모형은 특징에서 추상적이고 이론적이기 때문이고 그리하여 변화하는 관찰 가능한 사건 내부에서나 뒤에서 그 모형을 일종의 영원한 유령이나 본질로서 우리가 본다고 느끼기 쉽다. 그리고 그 사실로 인하여 그 교설이 파괴되는데 왜냐하면 사회적 이론의 과제가 우리의 사회학적 모형을 서술적이거나 유명론적(唯名論的: nominalist) 용어로, 다시 말해서 개인을 통하여 그 개인의 태도와 기대 및 관계와 기타 등등을 통하여 신중하게 구축하여 분석하는 것이기 ㅡ 방법론적 개인주의(methodological individualism)’로 지칭될 공준(公準: a postulate) ㅡ 때문이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 관한 방법의 통일은 하이에크(Hayek) 교수의 과학주의와 사회연구(Scientism and the Study of Society)에서 유래하는 두 가지 구절을 분석함에 의하여 예시되어 옹호될 것이다.

이 구절의 첫 번째 구절에서 하이에크(Hayek) 교수는 이렇게 서술한다: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유래하는 유추의 도움을 받아서 사회과학의 문제를 이해하고 싶어 하는 물리학자는, 직접적 관찰에 의하여 원자의 내부를 알고 있어서 물질 덩어리를 이용하여 실험할 가능성도 없고 제한된 기간에 상대적으로 극소수인 원자의 상호작용 이상을 관찰할 기회도 없는 세상을 상상해야 할 터이다. 다양한 종류의 원자에 대한 자신의 지식으로부터 그는 특정 모형을 구축할 수 있을 터인데, 다양한 방법으로 구축된 모든 모형이 더 큰 단위로 결합되어 그가 더 복잡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던 극소수 사례이고 그 사례의 모든 특징을 이 모형이 점점 더 밀접하게 재생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소우주(小宇宙: microcosm)에 대한 자신의 지식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었던 대우주(大宇宙: macrocosm)의 법칙은 항상 연역적으로 남을 터이다; 복잡한 상황의 자료에 대한 그의 제한적 지식 때문에, 그 법칙으로 그는 특정 상황의 정확한 결과를 예측할 수 없을 터이다; 그리고 그는 통제된 실험에 의하여 그 법칙을 결코 검증할 수 없을 터이다 ㅡ 그 법칙이, 그의 이론에 따라서 불가능한 사건의 관찰에 의하여 혹시 반증될지라도.’

이 구절의 첫 번째 문장이 사회과학과 물리과학 사이의 특정 차이점들을 가리킨다고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 구절의 나머지는 완벽한 방법의 통일을 대변한다고 내가 믿는다. 이유인즉 내가 의심하지 않는 바와 같이, 이것이 사회과학의 방법에 대한 올바른 서술이라면 우리가 이미 배척한 자연과학의 방법에 대한 해석과 같은 해석과만 이것이 다르다고 밝혀지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에서 어떤 일반화의 방법에 의하여 우리가 관찰로부터 이론으로 체계적으로 나아간다고 그래서 어떤 귀납의 방법에 의하여 우리가 우리의 이론을 검증할수 있거나 심지어 혹시 증명할수 있다고 믿는 귀납론적해석을 나는 더욱 특히 염두에 두고 있다. 나는 여기서 매우 다른 견해를 ㅡ 과학적 방법을, 연역적이고 가설적이며 오류판정 등을 통한 선택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 ㅡ 옹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연과학의 방법에 대한 이 서술은, 사회과학의 방법에 대한 하이에크(Hayek) 교수의 서술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과학의 방법에 대한 나의 해석이 사회과학의 방법에 대한 여하한 지식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믿을 충분한 근거가 나에게 있다; 이유인즉 내가 나의 해석을 최초로 개진했을 때, 나는 자연과학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나는 사회과학에 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지어 인용문의 첫 번째 문장에 언급된 차이점도 첫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크지는 않다. 우리가 물리학적 원자에 대하여 지닌 직접적 지식보다 인간의 원자 내부에 대하여 우리가 더 직접적인 지식을 지닌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지식은 직관적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다른 사람에 관하여 혹은 모든 사람에 관하여 가설을 정식화하기 위하여 우리는 틀림없이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이용한다. 그러나 이 가설은 시험되어야 하고 그 가설은 제거에 의한 선택이라는 방법에 부쳐져야 한다. (직관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은 누군가가 아마도 초콜릿을 싫어할 수 있을 터라고 심지어 상상하지도 못한다.) 물리학자가 원자에 관하여 자기 가설을 정식화할 때 그런 직접적인 관찰에 의하여 도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자는, 자신이 심지어 원자의 내부를 ㅡ 심지어 원자의 변덕과 편견 ㅡ 아주 잘 안다고 느끼도록 쉽게 만들 어떤 종류의 동조적 상상력이나 직관을 매우 자주 이용한다. 그러나 이 직관은 사사로운 일이다. 과학은, 물리학자의 직관이 고취했을 가설에만, 그다음 그 가설에 결론이 풍부하다는 조건으로만 그리고 그 가설이 합당하게 시험된다는 조건으로만 그 가설에 관심을 둔다. (하이에크[Hayek] 교수의 첫 번째 문장에 언급된 다른 차이점, 다시 말해서, 실험을 실행하는 난제에 관하여, 24절 참조.)

이 몇 가지 언급은 또한, 8절에서 설명된 역사주의적 교설이 ㅡ 다시 말해서, 사회과학은 직관적 이해라는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교설 ㅡ 비판되어야 하는 방식을 가리킬 것이다.

두 번째 구절에서, 하이에크(Hayek) 교수는 사회적 현상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 현상이 생성되는 원리를 우리가 안다고 해도 우리는 구체적 상황의 정확한 결과를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특정 상황이 근거하여 생성되는 원리를 우리가 설명할 수 있고 이 지식으로부터 우리가 특정 결과의 가능성을, 예를 들어 함께 발생하는 특정 사건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는 반면 우리의 지식은 어떤 의미에서 부정적일 따름일 것인데 예를 들어 그 지식에 의하여 우리는 특정 결과를 예방할 수 있을 따름이지만 가능성의 범위를 충분히 좁혀서 오직 한 가지 가능성만 남도록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구절은, 사회과학에 고유한 상황을 기술하는 것과 거리가 멀지만, 특정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 이상을 정말로 결코 할 수 없는 자연과학의 특징을 완벽하게 서술한다. (‘체로 물을 나를 수 없다’; 20절 참조.) 더욱 특히 우리가 통상적으로 구체적 상황의 정확한 결과를 예측할수 없을 것이라는 서술로 인하여 예측의 부정확성이라는 문제가 가능해진다 (5절 참조). 구체적인 물리학적 세계에 관해서도 아주 동일하게 언급될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물리적 사건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인위적으로 격리시켜서 실험을 이용함에만 의해서이다. (태양계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ㅡ 인위적 격리의 경우가 아니라 자연적 경우이다; 충분한 규모를 지닌 외부 물체가 침입함에 의하여 그 격리가 파괴되자마자, 우리의 예측 모두가 붕괴하기 쉽다.) 심지어 물리학에서도 우리는 폭풍이나 화재와 같은 구체적 상황의 정확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여기서 복잡성이라는 문제에 매우 간략한 언급이 추가될 것이다 (4절 참조). 구체적인 사회적 상황에 대한 분석은 그 상황의 복잡성에 의하여 극도로 어렵게 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구체적인 물리학적 상황에 관해서도 동일한 것이 성립한다. 사회적 상황은 물리학적 상황보다 더 복잡하다는 널리 믿어지는 편견은 두 가지 근원으로부터 나타나는 듯하다. 그 근원 중 한 가지 근원은, 우리가 비교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비교하기 쉽다는 것이다; 나는 한편 구체적인 사회적 상황과 다른 한편 인위적으로 격리된 실험적인 물리학적 상황을 의미한다. (후자[後者]는 더 정확하게 아마도 인위적으로 격리된 사회적 상황과 ㅡ 교도소나 실험적 공동체와 같은 ㅡ 비교될 것이다.) 나머지 근원은, 사회적 상황에 관한 서술이 정신적 상태이고 혹시 심지어 유관한 모든 사람의 육체적 상태도 포함해야 한다는 (또는 혹시 그 서술이 심지어 그 상태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는) 오래된 믿음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 믿음은 심지어, 구체적 화학반응에 관한 서술이 유관한 모든 기초입자의 원자적 및 아()-원자적 상태에 관한 서술을 포함해야 한다는 불가능한 요건보다 훨씬 덜 정당화된다 (화학이 정말로 물리학으로 환원될지도 모르겠지만). 그 믿음은 또한, 제도나 결사와 같은 사회적 실체가 개인 사이에서 선택된 특정 추상적 관계를 해석하려고 구축되는 추상적 모형이라기보다 사람들의 무리와 같은 구체적인 자연적 실체라는 대중적 견해의 흔적을 드러낸다.

그러나 사실상, 사회과학이 물리학보다 덜 복잡하다는 믿음에 대해서 뿐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적 상황은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물리학적 상황보다 덜 복잡하다는 믿음에 대해서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 이유인즉 모든 사회적 상황은 아닐지라도 사회적 상황 대부분에 합리성이라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인간이라는 존재는 완벽하게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적이 없지만 (다시 말해서 인간이 지닐 여하한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이용 가능한 모든 정보를 최선으로 이용할 수 있을 터라면 그들이 그렇게 할 것과 같이)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하여, 인간의 행위와 상호-작용에 대하여 비교적 단순한 모형을 구축하여 이 모형을 근사치로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 요점은 내가 보기에 정말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사이의 상당한 차이점을 ㅡ 다른 중요한 차이점, 즉 실험을 실행하는 데서 (24절의 말미 참조) 그리고 정량적(定量的: quantitative) 방법을 적용함에서 (아래 참조) 구체적 난제가 종류라기보다 정도의 차이점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 과학의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점 ㅡ 가리키는 듯하다. 나는, 사회과학에서 논리적이거나 합리적 구축의 방법이나 혹시 (: zero) 방법으로 지칭될 것을 채택하는 가능성을 언급한다. 이것에 의하여 나는, 유관한 모든 개인의 부분에서 완벽한 합리성이라는 전제를 토대로 (그리고 아마도 또한 완벽한 정보의 소유라는 전제를 토대로) 모형을 구축하여 모형 행태를 일종의 영(: zero) 좌표로 사용하면서 모형 행태로부터 사람들의 실제적 행태의 일탈을 평가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이 방법의 사례는, 실제적 행태와 (가령 전통적 편견 등의 영향을 받는) 경제학의 방정식에 의하여 서술되는 것과 같이 순수 선택의 논리를 토대로 기대될 모형 행태의 비교이다. 예를 들어 마샤크(Marschak)의 흥미로운 통화 환상(Money Illusion)’은 이런 방식으로 해석될 것이다. (: zero) 방법을 다른 분야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P. 사건트 플로렌스(Sargant Florence), 산업에서 대규모 운영 논리실제적 운영의 비논리의 비교에서 발견될 것이다.

지나가는 길에 방법론적 개인주의라는 원칙도 합리적 모형을 구축하는 영(: zero) 방법의 원리도 심리학적 방법의 채택을 함축하지 않는다고 나는 언급하고 싶다. 반대로 사회과학은 비교적 심리학적 전제와 독립적이라는 그리고 심리학은 모든 사회과학의 근거로서가 아니라 다른 사회과학 가운데서 한 가지 사회과학으로서 취급될 수 있다는 견해와 이 원리가 결합될 수 있다고 내가 믿는다.

이 절을 끝맺음하면서 나는, 자연과 사회에 대한 이론과학 중 몇 가지 과학의 방법 사이의 다른 주요 차이점으로 내가 간주하는 것을 언급해야 하겠다. 나는, 정량적(定量的: quantitative) 방법과 특히 측정의 방법 적용과 관련된 구체적 난제를 의미한다. 이 난제 중 몇 가지는 예를 들어 수요 분석에서 통계적 방법의 적용에 의하여 극복될 수 있고 극복되었다. 그리고 그 난제는, 예를 들어 수리경제학의 방정식 중 몇 가지 방정식이 심지어 단지 정성적(定性的: qualitative) 적용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을지라도, 극복되어야 한다; 이유인즉 그런 측정이 없다면 흔히 몇 가지 상쇄하는 영향이 정성적(定性的: qualitative) 용어들로만 계산되는 효과를 능가하는지 아닌지를 우리가 알지 못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성적(定性的: qualitative) 고찰만은 때때로 기만적일 가능성이 높다; 프리슈(Frisch)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 어떤 사람이 배가 앞으로 가도록 노를 젓고자 할 때, 자기 발에 의하여 발휘되는 압력 때문에 배가 뒤로 몰릴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꼭 기만적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여기에 몇 가지 근본적 난제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리가 없다. 예를 들어 물리학에서 우리 방정식의 매개변수가 원칙적으로 작은 숫자의 자연 상수들로 환원될 수 있다 ㅡ 많은 중요한 경우에 성공적으로 수행된 환원이다. 이것은 경제학의 경우에 그렇지 않다; 여기서 매개변수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경우에서 빠르게 변하는 변수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분명히 우리가 실행하는 측정의 중요성, 해석 가능성 그리고 시험가능성이 감소된다.

ㅡ 칼 포퍼,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 1976, 130-143쪽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