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적 조건의 변화가능성
25 실험적 조건의 변화가능성
역사주의자는, 사회적 분야에서 우리가 정확하게 유사한 실험적 상황을 마음대로 재생할 수 없기 때문에 실험적 방법이 사회과학에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역사주의적 입장의 핵심에 조금 더 접근한다. 이 주장에 중요한 것이 있다고 나는 인정한다: 의심할 바 없이 여기 물리학적 방법과 사회학적 방법 사이에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주의적 방법은, 물리학의 실험적 방법에 대한 중대한 오해에 근거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먼저 이 방법을 고찰하자. 모든 실험 물리학자는, 정확하게 유사한 조건으로 보이는 것에서도 매우 유사하지 않은 일들이 발생할 것임을 안다. 두 개의 철사는 첫눈에 보기에 정확하게 같게 보일 것이지만, 한 가지 철사가 한 조각의 전기 도구에서 다른 철사와 교환되면 결과적으로 발생하는 차이점은 매우 클 것이다. 더 세밀하게 조사하자마자 (가령, 현미경을 통하여) 그 철사들은 처음에 보였던 것처럼 유사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아마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흔히 다양한 결과를 야기하는 두 가지 실험의 조건에서 차이점을 탐지하는 것은 정말로 매우 어렵다. 어떤 종류의 유사성이 유관하고 어느 정도의 유사성이 충분한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이론적일 뿐 아니라 실험적인 장기적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이 연구는, 우리가 우리의 실험을 위하여 유사한 조건을 확보할 수 있기 이전에 그리고 우리가 심지어 이 경우에 ‘유사한 조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 이전에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험의 방법은 항상 적용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유사한 조건’으로서 서술될 수 있는 것이라는 문제가 실험의 종류에 달렸고 실험을 이용함에 의해서만 답변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무리 뚜렷할지라도 관찰된 차이점이나 유사성에 관하여 그 차이점이나 유사성이 실험을 재현하는 목적에 유관할 것인지 아닌지를 선험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실험적 방법이 스스로 처리되도록 허용해야 한다. 정확하게 유사한 고찰이, 방해하는 영향으로부터 실험을 인위적으로 격리시킨다는 많이 논쟁된 문제에 성립한다. 분명히 우리는 모든 영향에 대하여 한 가지 실험기구를 격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물리학적 실험에 미치는 행성이나 달의 위치의 영향이 상당한지 미미한지를 우리는 선험적으로 알 수 없다. 필요하다면 어떤 종류의 인위적 격리가 필요한지는 실험의 결과로부터만 혹은 그다음 실험에 의하여 시험되는 이론으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다.
그런 고찰에 비추어, 사회적 실험은 사회적 조건의 변화가능성에 의하여 그리고 특히 역사적 전개 상황에 기인하는 변화에 의하여 치명적으로 방해받는다는 역사주의적 항변은 자체의 힘을 잃는다. 역사주의가 그렇게 심하게 정신이 팔려있는 두드러진 차이점, 다시 말해서 다양한 역사적 기간에서 우세한 조건 사이의 차이점으로 인하여 사회과학에 고유한 난제가 야기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갑자기 또 다른 역사적 기간으로 옮겨진다면 우리는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 수행된 점진적 실험을 토대로 형성된 우리의 사회적 기대 중 많은 기대가 좌절됨을 우리는 틀림없이 발견할 것이라고 인정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험은 예견치 않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적 조건에서 변화를 발견하도록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실험일 터이다; 실험으로 인하여 우리는 특정 사회적 조건이 역사적 기간에 따라 달라짐을 배울 터이다; 실험으로 인하여 끓는 물의 온도가 지리적 위치에 따라 달라질 것임을 물리학자가 배운 것과 꼭 마찬가지로. 다시 말해서, 역사적 기간 사이의 차이점이라는 교설은 사회적 실험을 불가능하게 만들기는커녕, 또 다른 기간으로 이전된다면 우리가 틀림없이 지속적으로 우리의 점진적 실험을 수행하지만 놀랍거나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는다는 전제를 표현한 것일 뿐이다. 사실상 다양한 역사 기간에서 다양한 태도에 대하여 우리가 뭔가를 안다면 그것은 우리의 상상 속에서 수행된 실험으로부터이다. 역사학자는 특정 기록을 해석하면서 난제를 발견하거나 혹은 자기 선배 중 몇몇이 어떤 역사적 증거를 잘못 해석했음을 밝히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역사 해석의 난제는, 역사주의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역사적 변화의 종류에 대하여 우리가 지닌 유일한 증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난제는, 우리의 사고 실험의 기대된 결과와 실제적 결과 사이의 격차에 지나지 않는다. 시행착오라는 방법에 의하여 생소한 사회적 조건을 해석하는 우리의 능력을 향상시킨 것은 이 놀라운 결과와 실망스러운 결과이다. 그리고 역사 해석의 경우에서 사고 실험에 의하여 우리가 달성하는 것은, 인류학자들에 의하여 실제적 현장 연구에서 달성되었다. 자기들의 기대를 아마도 석기시대의 조건보다 전혀 멀지 않은 조건에 조절하는 데 성공한 저 현대 연구가들은 자기들의 성공을 점진적 실험과 관련시킨다.
몇몇 역사주의자는 그런 성공적 조절의 가능성을 의심한다; 그리고 그들은 심지어, 외딴 역사 기간에 옮겨질지라도 우리의 사회적 실험 중 너무나 많은 실험이 실망을 초래할 터라는 논증에 의하여 사회적 실험이 쓸모없다는 자신들을 교설을 옹호한다. 우리의 사유 습관을 그리고 특히 사회적 사건을 분석하는 우리의 습관을 이 당혹스러운 조건에 우리가 틀림없이 조절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런 두려움은 내가 보기에 역사주의적 과잉 반응의 ㅡ 사회적 변화의 중요성에 대한 강박관념 ㅡ 일부이다; 그러나 선험적 근거를 토대로 저 두려움을 해소하는 것이 어려울 터라고 나는 틀림없이 인정한다. 결국, 자신을 새로운 환경에 조절하는 능력은 사람에 따라서 달라서 역사주의자가 (그런 패배주의적 견해를 지닌) 자신의 정신을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시킬 것이라고 우리가 역사주의자에게 기대해야 할 이유가 없는 듯하다. 또한 문제들은 새로운 환경의 특징에 의존할 것이다. 사회연구가가 시행착오에 의하여 식인종 습관에 자신을 조절하는 데 성공하기 전에 자신이 잡아먹히는 것을 알게 될 가능성은, 어떤 ‘계획된’ 사회에서 자기 연구가 강제수용소에서 끝날 가능성만큼 배제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언급이 물리학 영역에서 성립한다. 물리학자에게 생존 기회를 혹은 자신을 시행착오에 의하여 이 조건에 조절하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물리학적 조건이 팽배한 많은 장소가 세상에 있다.
요컨대 역사적 조건의 변화가능성 때문에 실험적 방법을 사회의 문제에 적용할 수 없게 된다는 그럴듯한 역사주의적 주장에 혹은 이 요점에서 사회연구는 자연 연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에 근거가 없는 듯하다. 실제로 사회학자가 자신의 실험적 조건을 마음대로 선택하여 변경하는 것이 흔히 매우 어렵다고 우리가 인정할 것인지는 아주 다른 문제이다.
물리학자는 자신 또한 때때로 유사한 난제에 직면할지라도 나은 입장에 놓인다. 그리하여 변하는 중력장에서 혹은 극단적 기온 조건에서 실험을 수행하는 가능성은 매우 제한된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물리학자에게 개방된 많은 가능성이 얼마 전까지 비실용적이었는데 물리학적 난제 때문이 아니라 사회학적 난제 때문이었음을 즉, 연구를 위하여 필요한 자금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회학자는 매우 다른 위치에 놓인 반면, 매우 많은 물리학적 연구가 바랄 것이 없는 실험적 조건에서 이제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매우 바람직할 터인 많은 실험은, 그 실험들이 유토피아적 특징이 아니라 점진적 특징을 지닌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미래의 꿈으로 남을 것이다. 실제로 사회학자는 정신적으로 수행되는 실험에, 그리고 과학적 관점에서 바랄 것이 많은 조건 및 방식으로 수행되는 정치적 조치의 분석에 틀림없이 의존한다.
ㅡ칼 포퍼, ‘(The Poverty of Historicism)’, 1976년, 93-7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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