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화는 기간에 국한되는가
26 일반화는 기간에 국한되는가?
사회학적 법칙이나 이론 혹은 가설이나 ‘일반화’를 상세하게 토론하기 전에 내가 사회적 실험에 대한 문제를 토론했음은 사실이지만, 관찰이나 실험이 이런저런 정도로 논리적으로 이론에 앞선다고 내가 생각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대로 실험이 이론적 문제와 관련해서만 유의미하다는 의미에서, 이론은 실험에 뿐 아니라 관찰에도 앞선다고 나는 믿는다. 또한 관찰이나 실험이 답변을 제공하는 방식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우리가 희망할 수 있기 이전에 우리는 틀림없이 문제를 경험한다. 혹은 시행착오 방식의 관계로 그것을 표현하면, 시행이 틀림없이 착오보다 앞선다; 그리고 우리가 안 바와 같이 (24절에서), 관찰과 실험은 이론이 틀린 곳을 밝힘에 의하여 이론의 오류를 제거하는 데 우리를 돕는 반면, 이론이나 가설은 항상 잠정적이면서 시행의 일부이다. 그리하여 ‘일반화의 방법’을, 다시 말해서 과학이 어떤 일반화나 귀납의 과정에 의하여 자체의 이론을 도출하는 관찰로써 시작한다는 견해를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찰과 실험의 기능은 우리의 이론을 시험하는 데 그리고 시험을 견디지 못하는 이론을 제거하는 데 우리를 돕는 더 겸손한 기능이라고 내가 믿는다; 이 오류제거의 과정이 이론적 사념을 제한할 뿐 아니라 그 사념이 다시 시도하도록 ㅡ 그리고 흔히 다시 오류를 저질러 새로운 관찰과 실험에 의하여 다시 반증되도록 ㅡ 자극도 한다고 인정되어야 할지라도.
사회과학에서 모든 일반화의 혹은 적어도 가장 중요한 일반화의 타당성은, 유관한 관찰이 수행된 구체적 역사 기간에 국한된다는 역사주의적 주장을 (1절 참조) 나는 이 절에서 비판하겠다. 소위 ‘일반화의 방법’이 옹호될 수 없다는 나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이 옹호될 수 있는지 혹은 없는지의 문제를 먼저 토론하지 않고 나는 이 주장을 비판하겠다; 이유인즉 그 역사주의적 주장은 이 방법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밝히지 않고도 반증될 수 있다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방법에 관한 그리고 일반적 이론과 실험 사이의 관계에 관한 나의 견해에 대한 토론은 그리하여 연기될 것이다. 그 토론은 28절에서 다시 거론될 것이다.
특정 역사 기간에서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은, 자신들이 주변에서 관찰하는 규칙성이 사회생활에 관한 보편법칙으로 모든 사회에 유효하게 성립한다는 그릇된 믿음에 경도될 것이라고 인정함으로써 나는 그 역사주의적 주장에 대한 나의 비판을 시작한다. 정말로 외국에서 음식과 우리의 인사 예절(greeting-taboos), 기타 등등에 관한 우리의 습관이 우리가 순진하게 전제했던 것과 매우 같은 정도로 수용될 수 없는 것을 우리가 왕왕 발견할 때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간직하고 있음을 주시할 따름이다. 우리가 지닌 다른 일반화 중 많은 일반화가, 우리가 또 다른 역사 기간으로 여행할 수 없기 때문에 변함없이 남을지라도, 의식적으로 간직되었건 아니건 동일한 종류일 것임은 다소 명백한 추론이다. (이 추론은 예를 들어 헤시오도스[Hesiod]에 의하여 도출되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특정 기간에만 특징적인 많은 규칙성이 우리의 사회생활에 있을 것임과 이 한계를 간과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다고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특히 급격한 사회변혁의 시기에) 우리가 자체의 타당성을 잃은 법칙에 의존했다는 것을 우리가 배우고 유감스러워질 것이다.
역사주의자의 항변이 이것보다 더 멀리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가 다소 사소한 요점에 고생한다고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있을 따름일 터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역사주의자는 더 많은 것을 주장한다. 상황 때문에, 자연과학에서 발생하지 않는 난제가 발생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고 더욱 특히, 자연과학과 대조적으로 사회과학에서 정말로 보편법칙이 과거에 항상 유효했는지를 우리가 결코 알 수 없기 (이유인즉 우리가 지닌 기록이 불충분할 것이어서) 때문에 혹은 그 법칙이 미래에도 항상 유효할 것인지를 우리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 법칙을 발견했다고 전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에 반대하여, 서술된 상황이 조금이라도 사회과학에 고유하다거나 그 상황이 특정 난제를 야기한다고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의 물리학적 환경에서 발생하는 변화로 인하여, 우리의 사회적 혹은 역사적 환경에서 발생하는 변화로부터 발생하는 경험과 완전히 유사한 경험이 분명히 발생한다. 밤과 낮의 연결보다 더 명백하고 일반적 규칙성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극지 지역을 건널 때 그 규칙성은 붕괴한다. 물리학적 경험과 사회학적 경험을 비교한다는 것은 아마도 다소 어렵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런 붕괴는 사회적 영역에서 아마도 발생할 붕괴만큼 매우 충격적일 것이다. 또 다른 사례를 들면, 서기 1900년 크레타의 역사적 환경이나 사회적 환경 그리고 3,000년 전 크레타의 역사적 환경이나 사회적 환경은 크레타와 그린란드의 지리적이나 물리학적 환경보다 더 다르다고 언급될 수 없다. 한 가지 물리적 환경이, 준비되지 않을 상태로 다른 물리적 환경으로 급작스럽게 격리된다면 사회적 환경에서의 상응하는 변화보다 더 치명적인 결과가 발생할 것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양한 역사 기간 사이의 다소 현격한 차이점을 역사주의자가 과장한다는 것과, 과학적 재능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분명하다. 케플러에 의하여 발견된 법칙이 행성 체계에만 성립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법칙의 타당성은 케플러가 살았던 그리고 케플러가 관찰했던 태양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관성 법칙의 중요성을 알기 위하여 중력이나 다른 힘(forces)의 영향을 받지 않는 움직이는 물체들을 자신이 관찰할 수 있는 우주 일부로 후퇴할 필요가 뉴튼에게 없었다. 다른 한편 태양계에서 아무도 이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을지라도, 이 법칙은 태양계에서 자체의 중요성을 잃지 않는다. 유사하게, 모든 사회적 기간에 중요한 사회학적 이론을 우리가 틀림없이 만들 수 없는 이유가 없는 듯하다. 이 기간들 사이의 현격한 차이점은, 크레타와 그린란드 사이의 현격한 차이점이 두 지역 모두에게 성립하는 물리학적 법칙이 없다고 증명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런 법칙이 발견될 수 없다는 징표가 되지 않는다. 반대로 이 차이점은, 적어도 몇 가지 경우에서, 상대적으로 피상적 특성을 띠는 것으로 (습관에서, 인사 및 의식[儀式: ritual], 기타 등등에서의 차이점이 그런 것과 같이) 보이며, 특정 역사적 기간이나 특정 사회에 특징적이라고 언급되는 (그리고 지금은 몇몇 사회학자에 의하여 매개 원리[媒介 原理: principia media]로 지칭되는) 저 규칙성에도 다소 동일하게 성립하는 듯하다.
이것에 대하여, 사회적 환경에서 차이점은 물리학적 환경에서 차이점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역사주의자는 답변할 것이다; 이유인즉 사회가 변한다면 사람도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규칙성에서 변화를 암시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사회적 규칙성이 사회의 원자인 사람의 본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답변은, 물리학적 원자도 물리학의 법칙에 저항해서가 아니라 이 법칙에 따라서 자기들의 환경에 따라 (예를 들어, 전자기장의 영향에서, 기타 등등) 변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소위 인간 본성의 변화에 관한 중요성은 의심스럽고 평가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제 사회과학에서 진정으로 보편적인 법칙의 타당성 성립이, 그 법칙의 성립을 우리가 관찰한 기간을 넘어서 확대되는지 우리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보편법칙을 우리가 발견했다고 우리가 결코 전제해서는 안 된다는 역사주의적 주장으로 우리는 선회한다. 이것은 인정될 것이지만, 단지 이것이 자연과학에도 또한 적용되는 한에서이다. 자연과학에서 우리의 법칙이 실제로 보편적으로 타당한지 아니면 그 법칙이 특정 기간에만 (혹시 우주가 팽창하는 기간에만) 혹은 특정 지역에서만 (혹시 비교적 약한 중력장이 있는 지역에서) 성립하는지를 우리가 결코 완전히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법칙의 유효성을 확신할 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연법칙을 우리가 저렇게 정식화하면서, 그 법칙이 성립하는 것으로 관찰되었던 기간에만 혹은 아마도 ‘현재 우주론적 기간’ 안에서만 그 법칙이 주장된다고 말하는 조건을 우리는 추가하지 않는다. 그런 조건을 우리가 추가할지라도 칭찬받을만한 과학적 조심성의 징표는 아닐 터이지만 우리가 과학적 절차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징표일 터이다. 이유인즉 무제한적 타당성의 영역으로써 우리가 법칙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은 과학적 방법의 중요한 공준(公準: postulate)이기 때문이다. 자체가 변화에 좌우되는 법칙을 우리가 인정하면, 변화는 법칙에 의하여 결코 설명될 수 없을 터이다. 변화는 기적적일 따름이라고 인정될 터이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적 진보의 종말일 터이다; 이유인즉 예기치 않은 관찰이 발생할지라도 우리의 이론을 수정할 필요가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법칙이 변했다는 임시방편적 가설을 만들면 모든 것이 ‘설명될’ 터이다.
이 논증은 자연과학에 대해서보다 조금도 못지않게 사회과학에도 성립한다.
ㅡ 칼 포퍼,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 1976년, 97-103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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