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를 선택할 것인가, 플라톤을 선택할 것인가
미래는 크게 열려서 우리에게, 우리 모두에게 달려있다. 미래는 당신과 나와 많은 다른 사람이 오늘, 내일 그리고 모레 하는 일에 달려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은 반대로 우리의 관념과 소망에, 우리의 희망과 두려움에 달려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에 그리고 미래의 열린 가능성을 어떻게 우리가 평가하는지에 달려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책임은 우리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때 한층 더 커진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혹은 더 정확하게, 우리에게 아는 것이 거의 없어서 저 적은 것을 ‘없다’라고 안전하게 정의(定義)할 수 있는데 이유인즉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할 것과 비교하여 그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 관념을 파악한 최초의 사람은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정치가가 현명해야 한다고 ㅡ 자기가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정도로 그렇게 현명한 ㅡ 말했다. 플라톤 역시 정치가, 특히 왕은 현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소크라테스와 전혀 다른 것을 의미했다. 플라톤은 왕이 철학자여야 하고 왕은 플라톤적 변증법을 (매우 박식하고 복잡한) 배우기 위하여 철학자의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ㅡ 혹은 훨씬 낫게 자기와 같은 가장 현명하고 가장 박식한 철학자가 왕이 되어서 세상을 통치해야 한다는 의미로 ㅡ 말했다. 이 제안은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으로 빌려 말하는데, 오해를 낳았다. 왜냐하면 철학자들이 자신들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듣고 흥분했으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정치가에게 요구한 것의 거대한 차이점이 철학적 변증법의 안개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하여 그 차이점을 다시 한번 설명하고 싶다. 플라톤에게 ‘정치가는 현명해야 한다’라는 표현은 박식한 철학자의 편에서 권력에 대한 권리주장이다; 그리하여 교양인, 지성인 즉 ‘엘리트’의 편에서 권력에 대한 권리주장이다. 정반대로, 동일한 표현이 소크라테스에게 정치가는 자신이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없는지 그리하여 자기 주장에서 극도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정치가는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서 막중한 책임을 깨달아서 자신이 초래할 수 있는 불행을 잘 인식할 것이다. 정치가는 자신이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를 알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가 소크라테스의 충고였다; 너 자신을 알아서 당신이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를 당신 자신에게 인정하라!
저것이 소크라테스의 태도요 소크라테스의 지혜였다.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라! 통상적으로 플라톤주의자는 왕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는 정당의 우두머리이다. 그리고 그의 정당을 자기 외에 누구도 차지하지 않을지라도, 정당들의 거의 모든 우두머리가 ㅡ 특히 공격적 정당과 성공적인 정당의 우두머리들 ㅡ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주의자들이다; 결국, 우리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플라톤이 말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 중에서 최고의 인간, 최고로 박식한, 최고로 현명한 사람이다.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 이것은 플라톤 정치철학의 근본적 문제이다. 그리고 그의 답변은 가장 현명하고 또한 가장 뛰어난 자! 이다. 첫눈에 보기에 이것은 논쟁될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최고로 현명해서 가장 뛰어난 자가 자신은 최고로 현명해서 가장 뛰어난 자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명령권을 거부하면 어쩔 텐가? 그래, 저것이 정확하게 소크라테스주의자가 가장 현명해서 가장 뛰어난 자에게 기대하는 것일 터이다. 소크라테스주의자는 또한 자신을 최고로 현명해서 최고로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과대망상에 빠져서 현명하지도 뛰어날 수도 없다고 생각할 터이다.
분명히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잘못 언명된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질문은 저 형태로 흔히 반복되고 근본적 해답은 항상 플라톤의 해답과 동일했다. 고대에 답변은 군대가 선출한 황제였는데 이유인즉 그 사람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합법적 왕자였다. 마르크스 또한 누가 권력, 독재 권력을 가져야 하는가? 라고 ㅡ 노동자인가 아니면 자본가인가 ㅡ 물었다. 그의 답변은 계급을 의식해서 선량한 노동자들이었다. 그리고 틀림없이 쓰레기 같은 인간들은 안 돼! 그들은 모욕당하는 것을 참아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그들은 더 이상 쓰레기 같은 인간이 아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가 대부분은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플라톤적 질문에 또한 답변했다. 그들의 이론에 중세기부터 계속해서 명백하다고 생각되는 답변인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합법적 왕자’를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민중’으로 바꾸는 것이 ㅡ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이라는 말은 통상적으로 생략되거나 아니면 그 공식은 ‘민중의 은총에 의한 민중’이 되는 것을 제외하고 ㅡ 포함되었다. 저것이 이미 고대 로마에서 그들이 언급했던 ‘vox populi, vox D ei(민중의 목소리는 하느님의 목소리이다)’였다.
항상 우리는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플라톤적 질문에 직면한다. 이것은 정치이론에서 여전히 커다란 중요성을 띤다: 합법성 이론에서, 특히 민주주의 이론에서 여전히 커다란 중요성을 띤다. 정부는 합법적일 때 ㅡ 즉, 헌법 지배하에서 정부가 민중 다수나 민중대표 다수에 의하여 선출되었을 때 ㅡ 통치할 권리를 지닌다고 언급된다. 그러나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권력을 차지했음을, 그리고 그를 독재자로 만들었던 수권법(授權法: Enabling Law)이 의회의 다수에 의하여 통과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합법성의 원칙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합법성의 원칙은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플라톤적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우리는 질문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민중 주권(popular sovereignty)의 원칙이 또한 플라톤적 질문에 대한 답변임을 우리가 알았다. 사실상 그 원칙은 위험한 원칙이다. 다수 독재는 소수에게 지독할 수 있다.
44년 전 나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이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나는 그 저서를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기고문으로서 집필했다. 그 저서에서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플라톤적 질문을 ‘우리는 어떻게 정부를 피를 흘리지 않고 갈아치우는 방식으로 헌법을 제정할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질문으로 바꿀 것을 내가 제안했다. 이 문제는 정부를 선출하는 방식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를 제거하는 가능성을 강조한다.
ㅡ 칼 포퍼, ‘금세기의 교훈(The Lesson of This Century)’ 1997년, 81-3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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