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민중 통치가 아니라 민중 재판소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ㅡ 어원적으로 ‘민중 통치’를 의미한다 ㅡ 불행하게도 위험하다. 민중 각자는 자신이 통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자신은 민주주의가 사기극이라고 느낀다. 이것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아테네 시대부터 ‘민주주의’가 독재체제인 전제정치(tyranny)를 예방하는 헌법에 대한 전통적 명칭이었음을 학교로부터 사람들이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독재체제 즉 전제정치는 우리가 중국에서 다시 한번 목격한 바와 같이 최악의 것이다. 우리는 피를 흘리지 않고 독재체제를 제거할 수 없고, 통상적으로 심지어 피를 흘리고도 제거할 수 없다. 오늘날의 독재자들은 여전히 너무나 강력하다 ㅡ 1944년 7월 20일 반(反)-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에서 우리가 관찰할 수 있을 터와 같이.
그러나 모든 독재체제는 비도덕적이다. 모든 독재체제는 도덕적으로 나쁘다. 이것이, 정부가 피를 흘리지 않고 제거될 수 있는 국가 형태로서 이해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도덕적 원칙이다. 독재체제는 국가의 시민을 비난하여 ㅡ 그 시민의 나은 판단에 반대하고 그 시민의 도덕적 신념에 반대하여 ㅡ 시민의 침묵을 통해서만 일지라도 악과 협력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나쁘다. 독재체제는 사람으로부터 도덕적 책임을 앗아가는데 그 도덕적 책임이 없으면 사람은 반쪽 사람이고 백 분의 1의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독재체제는 사람이 자기의 인간적 책임을 지려는 시도를 자살미수로 바꾸어놓는다.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적어도 페리클레스와 투키디데스와 함께 이미 민중 주권이라기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제정치를 막으려는 시도였음을 우리가 역사적으로 밝힐 수 있다. 대가가 높고, 아마도 너무 높아서 민주주의는 백 년도 안 되어 폐지된다. 대가는, 어떤 시민도 너무 인기를 얻으면 정확하게 그의 인기 때문에 제거될 수 있고 제거되어야 하는 자주 오해되는 도편추방 제도였다. 이런 방식으로 아리스티데스(Aristides)와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와 같은 가장 전문적 정치가들이 추방되었다. 아리스티데스(Aristides)가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를 방해했거나 그의 별칭 ‘정의로운 사람(the just)’로 인하여 아테네 시민이 질투심을 일으켰기 때문에 추방되었다고 의견을 내면 터무니없을 것이다. 저것은 당시 상황이 아니다. 그의 별칭이 아리스티데스(Aristides)가 인기를 얻고 있었다는 것을, 인기가 너무 높았다는 것을 나타냈고, 도편추방의 기능은 정확하게 민중영합주의적(populist) 독재자의 발흥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저것이 그가 추방된 유일한 이유였고 또한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가 추방된 이유였다.
페리클레스(Pericles) 자신은, 아테네 민주주의가 민중 통치가 아니라는 것과 이런 통치는 존재할 수 없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우리가 투키디데스의 저서에서 읽을 수 있는 그의 유명한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소수의 사람이 정책을 고안할 수 있을지라도, 모든 사람이 그 정책을 틀림없이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모두 통치하고 담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모두 정부를 판단하는 데 참여할 수 있고 우리는 모두 배심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나의 견해로는 저것이 정확하게 선거일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새로운 정부를 합법화하는 날이 아니라 우리가 지난 정부에 대하여 재판하는 자리에 앉은 날이다 ㅡ 지난 정부가 자신이 한 일에 책임져야 하는 날.
민중 통치로서의 민주주의와 민중 재판으로서의 민주주의 사이의 차이점이 전혀 순전히 언어적인 것만이 아니라 실제적 효과도 있음을 나는 이제 간단하게 밝히고 싶다. 이것은, 민중 통치라는 관념이 비례대표에 대한 뒷받침을 초래한다는 사실에서 알려질 수 있다. 여기서 논증은, 모든 여론의 물결인 모든 군소정당이 대표를 내야 해서 민중의 대표가 민중의 거울이고 민중 통치는 가능한 한 폭넓은 실재가 된다는 것이다. 모든 시민이 전자 단추를 누르도록만 해서 텔레비전 화면에서 시민의 대표들이 논쟁하는 모든 중요 사안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투표하도록 하는 가공할 제안을 나는 심지어 읽었다. 그 제안은, 민중 통치로서 민주주의라는 관점으로부터 시민의 주도권이 매우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보여야 한다고 또한 언급된다.
그러나 우리가 민주주의를 민중 재판으로서 생각한다면 상황은 다소 다르게 보인다. 나의 견해로 정당들의 확산은 매우 나쁜 것이고 선거에서 비례 대표제도 또한 그렇다. 정당들이 쪼개지면 민중의 재판정 앞에서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은 연립정부가 생기는데 왜냐하면 절충 이상의 것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가 재거될 수 있는지도 불확실해지는데 왜냐하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부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이 또 다른 작은 연립 정당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수의 정당이 적다면 정부는 통상적으로 다수의 정부이어서 그 정부의 책임을 모든 사람이 분명하게 판단한다. 인구의 견해들이 대의정치에 비례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는 견해에 어떤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고 정부에서는 훨씬 더 가치가 없다. 저것은, 반영되어도 원래 반영대로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에, 정부 책임이 실종될 터이다.
그러나 아마도 민중 주권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론은 민중 주권론이 불합리한 이념인 미신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민중이 (혹은 민중의 다수) 잘못할 리도 없고 부당하게 행동할 리도 없다는 것은 권위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 미신이기 때문이다. 이 이념은 비도덕적이어서 거부되어야 한다. 우리는 투키디데스로부터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내가 여러 면에서 찬양하는) 또한 몇 가지 범죄적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섬이자 도시국가인 멜로스(Melos)를 공격하여 (사전 경고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모든 성인 남성을 죽이고 모든 여성과 어린이들을 거대한 노예시장에 판매하려고 내놓았다. 저것이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Weimar Republic)의 자유롭게 선출된 독일 의회는 수권법(授權法: Enabling Act)이라는 합헌적 수단을 통하여 히틀러를 독재자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독일에서 자유롭게 선출되지 않았을지라도 강제 합병 후 오스트리아에서 거대한 선거 승리를 따냈다.
우리는 모두 실수에 노출되어 있고 민중이나 인간의 어떤 다른 무리도 또한 그러하다. 민중이 정부를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관념을 내가 지지한다면, 그것은 내가 독재체제를 피할 나은 길을 알지 못한다는 유일한 이유 때문이다. 심지어 민중 재판소로서의 민주주의 변형도 ㅡ 내가 옹호하는 민주주의 ㅡ 결점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의 역설적 익살은 여기서 매우 합당하다: ‘민주주의는, 물론 정부의 모든 다른 형태를 제외하고, 최악의 정부 형태이다.’
그리하여 요컨대 민중 주권으로서의 민주주의라는 관념과 민중 재판소로서의, 즉 제거될 수 없는 정부를 (다시 말해서, 독재체제) 방지하는 도구로서의 민주주의라는 관념 사이의 언어적 차이점이 없어질 따름이다. 그 차이점에 또한 실제적인 함축적 주요 의미가 있다: 그 차이점은 심지어 스위스에도 중요하다. 내가 이해하는바, 교육제도에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는, 독재정치를 방지할 필요에 대한 더 겸손하고 현실적 이론 대신 민중 주권이라는 해롭고 이념적 이론을 ㅡ 그리고 저것은 참을 수 없고 도덕적으로 방어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ㅡ 옹호한다.
ㅡ 칼 포퍼, ‘금세기의 교훈(The Lesson of This Century)’, 1977년, 83-6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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