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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이론 이해하기

이윤진이카루스 2025. 12. 1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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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이론 이해하기

 

18. 실재론과 양자이론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 몇몇 사람에게 비엔나 학파에 대한 비판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그 저서의 주요 목표는 긍정적인 것들이었다. 나는 인간 지식론을 제시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지식을 고전적 철학자들의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았다. (Hume)과 밀(Mill)과 마흐(Mach)에게 내려오기까지, 철학자 대부분은 인간의 지식을 결정된 것으로서 생각했다. 심지어 흄(Hume)도 자신을 회의론자로서 생각하고 사회과학을 혁명하려고 소망하여 인성론(Treatise)을 저술했는데, 인간의 지식을 인간의 습관과 거의 동일시했다. 인간의 지식은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는 것; 율리우스 시저가 암살당했다는 것; 잔디는 녹색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은 내가 보기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롭지 못했다. 흥미롭던 것은 지식의 성장 ㅡ 발견 ㅡ 문제가 있는 지식이었다.

우리가 지식이론을 발견이론으로서 간주할 수 있다면, 과학적 발견을 바라보면 매우 좋을 것이다. 지식성장에 관한 이론에, 특히 물리학의 성장에 관해서 그리고 물리학에서 견해들의 충돌에 관해서 말할 것이 있어야 한다.

헤르베르트 파이글의 격려를 받고 내가 나의 저서를 집필하기 시작한 때 (1930) 현대물리학은 혼란에 빠졌다. 양자역학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에 의하여 1925년에 창시되었다; 그러나 주요 돌파구가 마련된 것을 외부인들이 깨닫기까지 ㅡ 전문적 물리학자를 포함하여 ㅡ 몇 년이 걸렸다. 그리고 바로 시작부터 불화와 혼란이 일었다. 두 명의 탁월한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과 보어(Bohr)는 아마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이었는데 서로 의견이 달랐다. 그리고 그들의 의견 불일치는, 1927년 솔베이(Solvay) 회의에서 철저했던 바와 같이 1955년 아인슈타인이 사망할 때까지 철저했다. 아인슈타인과의 논쟁에서 보어가 이겼다는 거짓 이야기가 널리 수용된다; 그리고 창조적 물리학자 다수는 보어를 지지하여 이 허구적 이야기에 동의했다. 그러나 탁월한 물리학자인 드브로이(de Broglie)와 슈뢰딩거(Schrödinger)는 보어의 견해에 (나중에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으로 지칭된) 결코 만족하지 못하여 독립적 노선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후 코펜하겐 학파로부터 몇몇 이탈자가 나타났는데 특히 봄(Bohm), 붕게(Bunge), 란데(Landé), 마지노(Margenau)와 비지에(Vigier)였다.

코펜하겐 해석에 반대하는 사람은 여전히 소수이고 그들은 소수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자신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의견 불일치가 정통 코펜하겐 학파 안에서도 또한 감지될 수 있다. 이 정통파 회원들은, 자신들의 견해에 내재한 난제들을 주지하지 못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의견 불일치를 주지하지 못하여 아무튼 그 의견 불일치를 우려하지도 않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는 외부인들 눈에는 매우 두드러진다.

너무나 피상적이지만 이 모든 언급으로 인하여, 당시 새로운 양자이론으로 자주 지칭되던 양자역학을 내가 처음 이해하려고 시도했을 때 느낀 당혹감이 아마도 설명될 것이다. 나는 저서와 기고문을 통하여 독립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다; 나의 어려움에 관하여 종종 내가 함께 이야기한 유일한 물리학자는 나의 친구인 프란츠 우어바흐(Franz Urbach)였다. 나는 그 이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그는 그 이론이 이해될 수 있는지 ㅡ 적어도 평범한 인간에 의하여 ㅡ 의심했다.

그 이론에 대한 보른(Born)의 통계적 해석의 중요성을 내가 깨달았을 때 나에게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는 보른의 해석을 좋아하지 않았다: 슈뢰딩거의 독창적 해석이 심미학적으로 그리고 물질에 대한 설명으로서 나를 매료시켰다; 그러나 그 이론이 옹호될 수 없다는 것과 보른의 해석이 고도로 성공적이라는 것을 내가 수용하자마자 나는 후자(後者)를 고수했고 그리하여 보른의 해석이 수용된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공식에 대한 해석을 지지할 수 있을 터인지 당혹스러웠다. 양자역학이 통계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 하이젠베르크의 공식도 틀림없이 그러하다고 분명하게 보였다: 그 공식은 산포 관계(scatter relations)로서, 다시 말해서, 양자역학적 실험의 수열에 대한 통계적 산포의 하위 한계나 그 수열에 대한 동질성의 상위 한계를 서술하는 것으로서 해석되어야 했다. 이 견해는 당시 널리 수용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실험 집합의 결과 산포와 입자 집합의 산포를 원래 내가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해야 한다; “형식적으로 단칭인서술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을 내가 발견했을지라도, 그 문제는 경향이라는 관념의 도움을 받아서 완벽하게 정리되었을 따름이다.)

양자역학의 두 번째 문제는 파속의 붕괴(reduction of the wave packet)”라는 유명한 문제였다. 이 문제가 1934년에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

(Logik der Forschung)에서 해결되었다는 것을 동의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유능한 몇몇 물리학자는 이 해결책이 옳다고 인정했다. 제시된 해결책에 의하면, 양자역학에서 발생하는 확률은 상대확률(relative probabilities)이었다고 (혹은 조건확률[conditional probabilities]) 본질적으로 지적된다.

두 번째 문제는, 아마도 나의 고찰의 핵심적 요점인 것과 ㅡ 양자역학에 대한 해석 문제는 확률계산에 대한 해석이라는 문제로 추적될 수 있다는 추측인데 확신이 되었다 ㅡ 연결된다.

해결된 세 번째 문제는, 상태의 준비와 측정을 구분하는 것이었다. 이것에 대한 나의 토론이 전적으로 옳았고 내가 생각하기에 매우 중요했을지라도, 특정 사고실험에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77절에서) 관하여 심각한 오류를 내가 저질렀다. 나는 이 오류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했다; 심지어 아인슈타인도 몇 가지 유사한 오류를 저질렀음을 나는 당시 알지 못했고, 나의 오류로 인하여 나의 무능이 증명되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아인슈타인이 저지른 오류에 대하여 들은 것은 코펜하겐 과학철학 총회가 끝난 1936년 코펜하겐에서였다. 이론물리학자인 빅토르 바이스코프(Victor Weisskopf)의 조치로 시작하여, 나는 닐스 보어에 의하여 그의 연구소에서 토론을 위해 며칠 머물러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그전에 폰 바이체커(von Weizsäcker)와 하이젠베르크에 대항하여 나의 사고실험을 옹호했는데 그들의 논증에 의하여 나는 완벽하게 확신하지 못했고 아인슈타인에 대항해서도 나는 나의 사고실험을 옹호했고 그의 논증에 의하여 나는 정말로 확신했다. 나는 그 문제를 티링(Thirring)과 토론했고 슈뢰딩거와 토론했는데 (옥스퍼드에서) 슈뢰딩거는 자신이 양자역학에 관하여 대단히 불편하고 아무도 실제로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리하여 보어가 아인슈타인과 나눈 토론에 ㅡ 그가 나중에 쉴프(Schilpp)의 저서, 아인슈타인 편에서 기술한 동일한 토론 ㅡ 대하여 나에게 말했을 때 나는 패배주의적 심정에 빠졌다. 보어의 말에 따라서 아인슈타인도 나처럼 오류를 저질렀다는 사실로부터 위안받는다는 생각은 나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패배감을 느껴서 보어의 인격에서 나오는 엄청난 충격을 제어할 수 없었다. (당시 보어는 어떤 정도로도 저항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파속의 붕괴에 대한 나의 설명을 여전히 옹호했지만 나는 무너졌다. 바이스코프는 나의 설명을 기꺼이 수용하는 듯이 보였지만, 보어는 자신의 상보성 이론을 너무 열심히 설명하는 데 빠져서 나의 설명을 설득하려는 나의 허약한 노력을 주시하지 않아서 나는 가르치기보다 배우는 데 만족하여 요점을 밀고 나가지 않았다. 보어의 친절, 탁월함 그리고 열정에 압도적 인상을 받고 나는 떠나왔다; 나는 또한, 그가 옳고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어의 상보성을 내가 이해했다고 나는 확신할 수 없어서, 비록 분명히 몇몇 사람이 상보성을 이해했다고 확신했을지라도, 다른 누군가가 상보성을 이해하는지 나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이 나중에 나에게 말한 바와 같이, 이 의심은 아인슈타인도 그리고 슈뢰딩거도 지니고 있었다.

이것으로 인하여 나는 이해하기에 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보어는 어떤 면에서, 양자역학은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고전물리학만 이해될 수 있다고 그리하여 우리는 체념하고, 양자역학은 부분적으로만 그리하여 고전물리학을 매개로 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 이해하기의 일부는 고전적 파동 모습(wave picture)”을 통해서 이룩되었고 또 일부는 고전적 입자 모습(particle picture)”을 통하여 이룩되었다; 이 두 가지 그림은 양립될 수 없어서, 보어가 상보적(complementary)으로 지칭한 것이었다. 그 이론을 더 충분하거나 더 직접적으로 이해하려는 희망이 없었다; 그래서 요구되었던 것은, 더 충분한 이해에 도달하려는 시도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보어의 이론이, 이해하기가 이룩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매우 편협한 견해에 근거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보어는 이해하기를 그림과 모형을 통하여 ㅡ 일종의 시각화를 통하여 ㅡ 생각했던 듯이 보였다. 이것은 너무 편협하다고 나는 느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나는 전혀 다른 견해를 전개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림 이해하기가 아니라 이론의 논리적 힘 이해하기이다; 이론의 설명력과, 관련 문제에 대한 그리고 다른 이론에 대한 이론이 지닌 관계라는 이론의 논리적 힘을 이해하기이다. 나는 강연을 통하여 여러 해에 걸쳐서 이 견해를 전개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처음은 알프바흐(Alpbach)에서였고 (1948) 프린스턴에서 (1950), 케임브리지에서 양자역학에 관한 한 강좌에서 (1953년이나 1954), 미니애폴리스에서 (1962) 그리고 나중에 다시 프린스턴에서 (1963), 그리고 다른 장소들에서 (물론 런던 또한). 그 견해는, 개괄적일 따름일지라도, 몇 가지 나의 나중 논문들에서 발견될 것이다.

양자물리학에 관하여 나는 여러 해 동안 크게 낙심한 상태에 빠졌다. 나는 나의 그릇된 사고실험을 극복할 수 없었고 내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저지른 오류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이 전적으로 옳을지라도 내가 거기에 너무 많은 무게를 두었다고 나는 지금 생각한다. 1948년이나 1949년 양자역학에 관한 그의 저서를 내가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 인용한 양자물리학자인 아르투르 마르흐(Arthur March)와 몇 번 토론을 거친 후에만 나는 새로운 용기와 같은 것을 지니고 그 문제로 복귀했다.

나는 옛 논증을 다시 조사하기 시작하여 다음 결론에 도달했다:

(A)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문제.

(1) 결정론에 반대하는 특별히 양자역학적 논증과 같은 것은 없다. 물론 양자역학은 통계적 이론이고 일견 결정론적 이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역학이 일견 결정론적 이론과 양립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더욱 특히, 소위 이 불가능성에 대한 ㅡ 소위 숨은 변수들이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ㅡ 폰 노이만[von Neumann]의 유명한 증명은, 데이비드 봄[David Bohm]에 의하여 그리고 더 최근에 존 S. [John S. Bell]에 의한 더 직접적인 방법에 의하여 밝혀진 바와 같이, 성립하지 않는다.) 내가 1934년에 도달한 입장은, 양자물리학에서 결정론이 양자역학과 양립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정론이 반증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때 이후 나는 이 문제에 관하여 한 번 이상 내 생각을 바꾸었다.

일견 결정론적 이론의 존재가 정말로 양자역학의 결과와 형식적으로 양립될 수 있음을 밝히는 모형이 1951년에 데이비드 봄(David Bohm)에 의하여 제시되었다. (이 증명의 토대를 이루는 기본적 관념은 드브로이[de Broglie]에 의하여 먼저 제시되었다.)

(2) 다른 한편 결정론이 물리학에서 토대를 지닌다는 주장에 대하여 성립하는 근거가 전혀 없다; C. S. 퍼스(Peirce), 프란츠 엑스너(Franz Exner), 슈뢰딩거, 그리고 폰 노이만(von Neumann) 의하여 지적된 바와 같이, 사실상 그 주장에 반대하는 강력한 이유가 있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뉴튼 역학의 결정론적 특징이 비결정론과 양립 가능하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게다가 일견 결정론적 이론을, 비결정론적이고 확률론적인 미시이론들(microtheories)을 근거로, 거시이론(macrotheories)으로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 반면 그 반대 경우는 가능하지 않다: 자명하지 않은 확률론적 결론은 확률론적 전제의 도움을 받아서 도출될 수 (그리하여 설명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와 관련하여 란데[Landé]의 몇 가지 매우 흥미로운 논증이 틀림없이 참고된다.)

(B) 확률.

양자역학에서 우리에게

(1) 물리학적이고 객관적인 (혹은 실재론적인”);

(2) 통계학적으로 시험될 수 있는 확률 가설을 만들어내는

확률계산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게다가.

(3) 이 가설은 단일한 경우에 적용될 수 있다; 그리고

(4) 이 가설은 실험방식에 상대적이다.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나는, 이 모든 요건을 충족시킨 확률계산에 대한 형식주의적해석을 전개했다. 그 후 나는 이것을, “경향 해석에 의하여 대체하면서, 개선했다.

(C) 양자이론

(1) 실재론. “입자-파동(wavicles)”이나 (입자--파동[wave-cum-

particles]) 유사한 비-고전적 실체에 대하여 나는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을지라도, 전자 등등이 입자일 뿐이라는 고전적이고 우활[迂闊: naive]하고 실재론적인 견해로부터 이탈할 어떤 이유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이 국지화될 수 있고 운동량을 지닌다는 견해. (물론 그 이론을 전향적으로 전개하면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옳다고 밝혀질지도 모른다.)

(2) 하이젠베르크의 소위 불확정성 원리는 특정 공식을 잘못 해석한 것이고 그 공식은 통계적 산포(statistical scatter)를 주장한다.

(3) 하이젠베르크의 공식은 측정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현재의 측정에 대한 양자이론전체가 오해로 포장됨을 암시한다. 하이젠베르크 공식에 대한 통상적 해석에 따라 금지된측정은, 내가 얻은 결과에 따라서 허용될 뿐 아니라 바로 이 공식을 실험하기 위해 실제로 필요하다. 그러나 산포 관계는 양자역학적 체계의 준비 상태와 관련이 있다. 어떤 상태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항상 산포를 (짝을 이루는) 도입한다.a

(4) 양자이론에 고유하게 필요한 것은 (단계-의존적인) 확률의 간섭이다. 우리가 이것을 궁극적인 것으로서 수용해야 할 것이라고 상상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로 보이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이론을 콤프튼(Compton)이 결정적으로 시험한 것에 여전히 반대하는 반면, 듀안(Duane)은 파동역학 오래전인 1923년에 새로운 양자 규칙을 만들어냈고 그 규칙은, 에너지와 관련되는 플랑크(Planck) 규칙의 운동량을 참고한 유사한 것으로서 간주될 것이다. 운동량의 정량화(定量化: quantification)를 위한 듀안의 규칙은 광양자들에 뿐 아니라 입자에도 (란데에 의하여 강조된 바와 같이) 적용될 수 있고 그리하여 그 규칙은 입자 간섭을 합리적으로 (오직 정성적[定性的: qualitative]으로일지라도) 설명한다. 란데는, 파동역학의 정량적 간섭 규칙이 단순한 추가적 전제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고 나아가 논증했다.

(5) 그리하여 많은 철학적 유령이 이제 추방될 수 있고, 주체나 정신이 원자의 세상 속으로 침입한다는 저 많은 엄청난 철학적 주장은 이제 배척될 수 있다. 이 침입은 확률계산에 대한 전통적인 주관론적 오해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대체로 설명될 수 있다.

ㅡ 칼 포퍼, ‘끝없는 탐구(Unended Quest)’, 1993, 90-6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