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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사이비-과학의 구획설정

이윤진이카루스 2025. 12. 15.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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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사이비-과학의 구획설정

 

베이컨(Bacon) 이래 지배했던 그릇된 과학이론이 ㅡ 자연과학이 귀납적 과학이라는 것과 귀납은 반복된 관찰이나 실험에 의하여 이론을 확립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이었다는 것 ㅡ 그렇게 깊이 자리를 잡은 이유를 나는 이해했다. 이유는 과학자들이, 신학과 형이상학으로부터 뿐 아니라 사이비 과학으로부터 자신들의 활동들 확정해야 했다는 것과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구획설정 기준으로서 베이컨으로부터 귀납적 방법을 계승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과학자들은, 신뢰성에서 종교의 뿌리와 비견될 수 있는 지식의 뿌리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들의 이론을 정당화하려고 조바심했다.) 그러나 나는 여러 해 동안 나은 구획설정 기준을 지니고 있었다: 시험가능성이나 오류판정 가능성.

그리하여 구획설정에 관하여 문제에 빠지지 않고도 나는 귀납을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시행착오라는 방법에 관하여 내가 얻은 결과를, 연역적 방법론에 의하여 전체 귀납적 방법론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나는 적용할 수 있었다. 이론이 지닌 연역적 결론에 대한 오류판정이나 반증을 통하여 이론을 오류 판정하거나 반증하는 것은 분명히 연역적 추론이었다 (후건부정[後件否定: modus tollens]). 이 견해는, 과학이론은 오류로 판정되지 않을지라도 영원히 가설이나 추측으로 남는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리하여 과학적 방법에 관한 전체 문제가 해결되었고 그와 함께 과학적 진보라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진보는, 우리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이론을 ㅡ 항상 더 큰 내용을 지닌 이론 ㅡ 향하여 움직이는 것을 본질로 한다. 그러나 이론은 많이 말할수록 더 많이 배제하거나 금지하고 그 이론을 오류로 판정한 기회가 더 커진다. 그리하여 더 큰 내용을 지닌 이론은, 더 엄격하게 시험될 수 있는 이론이다. 이 고찰로 인하여, 과학적 진보는 관찰의 축적을 본질로 한다고 판명되는 것이 아니라 덜 훌륭한 이론을 뒤엎고 나은 이론에 의하여 특히 내용이 더 큰 이론에 의하여 그 이론을 대체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고 판명되는 이론이 탄생했다. 그리하여 이론 사이에 경쟁이 ㅡ 일종의 다윈적 생존경쟁 ㅡ 있었다.

물론 추측이나 가설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에 정당화가 필요 없다

(존재하지 않는 귀납의 방법에 의한 정당화는 특히 필요 없는데 그 방법에 대해서 아무도 합당한 묘사를 제시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론을 비판적 토론에 비추어, 경합하는 이론 중 한 가지 이론을 다른 이론들보다 선호하는 것에 대하여 이유를 때때로 제시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이해하기 쉬웠고, 고도로 일관적이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마흐적(Machian) 실증주의자들과 비엔나 학파의 비트겐슈타인주의자들이 말하고 있던 것과 매우 달랐다. 나는, 1926년 아니면 1927년에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의 신문 기고문에서 그다음 그가 사회민주주의당 청년 모임에서 한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비엔나 학파에 대하여 들었다. (이것은 내가 참석한 유일한 정당 모임이었다; 내가 1919년이나 1920년 이래 노이라트를 조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정당 모임에 참석했다.) 나는 비엔나 학파의 강령 그리고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 동호회의 강령 인쇄물을 읽었다; 특히 나의 스승이었던 수학자 한스 한(Hans Hahn)이 마련한 소책자. 게다가 나의 철학박사 논문을 집필하기 몇 년 전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Tractatus)를 나는 읽었고 카르납(Carnap)의 저서는 발간되는 대로 읽었다.

이 모든 사람이 과학과 사이비-과학 사이라기보다 과학과 형이상학 사이의 구획설정 기준을 찾고 있었던 것이 내가 보기에 분명했다. 그리고 나의 구획설정 기준은 그들의 구획설정 기준보다 낫다는 것이 내가 보기에 또한 분명했다. 이유인즉 무엇보다도 그들은, 형이상학을 무의미한 헛소리인 순전히 횡설수설로 만든 기준을 찾으려고 애를 썼고 형이상적 관념은 흔히 과학적 관념의 선두주자이었기 때문에 그런 기준은 문제를 초래하기 마련이었다. 두 번째, 유의미 대() 무의미에 의하여 구획설정을 하면 문제가 변경될 따름이었다. 비엔나 학파가 인정한 바와 같이, 그 학파는 또 다른 기준에 대한 필요성을 만들어냈는데 의미와 의미 결여를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이것에 관하여 그들은 검증가능성을 채택했는데 검증가능성은, 관찰서술에 의한 증명가능성과 동일한 것으로서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귀납론자들이 오랫동안 주장하여 존중되던 기준을 서술하는 또 다른 방식에 지나지 않았다; 귀납이라는 관념과 검증이라는 관념 사이에 실제로 차이점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이론에 따르면, 과학은 귀납적이 아니었다; 귀납은 흄(Hume)에 의하여 산산조각이 난 허구였다. (추가적이고 덜 흥미로운 요점은, 나중에 에이어[Ayer]에 의하여 인정되었는데, 검증가능성을 구획설정 기준으로 삼으면 철저히 터무니없다는 것이었다: 이론이 검증될 수 없을 터이기 때문에 횡설수설이라고 우리가 어떻게 말할 수 있을 터인가? 이론이 검증될 수 있을 터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하여 그 이론을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해될 수 있는 이론이 철저한 횡설수설일 수 있을 터인가?)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나는, 그들이 지녔던 주요 문제 모두에 대하여 그들이 지녔던 것보다 내가 나은 답변을 ㅡ 더 일관적인 답변 ㅡ 지녔다고 나는 느끼게 되었다.

아마도 요점은, 그들이 실증주의자들이어서 버클리-마흐(Berkeley-Mach) 전통 속에서 인식론적 관념론자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관념론자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중립적 일원론자(neutral monists)”로 묘사했다. 그러나 내 견해로 이것은 관념론에 대한 또 다른 명칭일 ㅡ 그리고 카르납의 저서에서 관념론은 (혹은 그가 지칭한 바와 같이, 방법론적 유아론[方法論的 唯我論: methodological solipsism]) 일종의 작동하는 가설로서 상당히 공개적으로 수용되었다 ㅡ 뿐이었다.

카르납과 비트겐슈타인의 저를 상당히 상세하게 연구하면서 나는 이 쟁점에 관하여 많은 글을 썼다 (발표하지 않고). 내가 도달한 관점에서 이것은 상당히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나는, 내가 이 관념들을 설명할 수 있었던 단 한 명을 알고 있었고 그는 하인리히 곰페르츠(Heinrich Gomperz)였다. 나의 요점 중 한 가지와 ㅡ 과학이론은 항상 가설이나 추측으로 남는다는 것 ㅡ 관련하여 그는 알렉시스 마이농(Alexis Meinong)전제에 관하여(On Assumptions)(Über Annahmen) 나에게 언급했고 그 저서는 심리학주의적일 뿐 아니라 과학이론이 참이라고 함축적으로 전제하기도 함을 ㅡ 후설(Husserl)이 자기 저서 논리적 탐구(Logical Investigations)에서 (Logische Untersuchungen, 1900, 1901) 그랬던 바와 같이 ㅡ 나는 발견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이론은 논리적으로 고찰되면 가설과 동일하다는 것을 수용하기에 사람들이 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배적 견해는, 지금까지 가설은 증명되지 않은 이론이라는 것과 이론은 증명되거나 확립된 가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모든 이론의 가설적 특징을 수용하는 사람들도 그 이론들에 어떤 정당화가 필요하다고 여전히 믿었다; 이론이 참으로 밝혀질 수 없을지라도 그 이론의 진리는 틀림없이 고도로 개연적이라고 여전히 믿었다.

이 모든 것에서 결정적 요점인 모든 과학이론의 가설적 특징은, 내 생각에 아인슈타인의 혁명이 낳은 상당히 흔한 결과였는데 그 혁명으로 인하여 뉴튼 이론과 같은 심지어 시험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론도 진리의 근사치인 가설 이상으로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고 밝혀졌다.

연역론에 ㅡ 이론은 가설적-연역적 이론체계라는 것과 과학의 방법은 귀납적이 아니라는 견해 ㅡ 대한 나의 지지와 관련하여 곰페르츠(Gomperz), 비엔나 학파의 일원이자 과학적 방법의 기본적 형태(The Basic Forms of Scientific Method)라는 책의 저자였던 빅토르 크라프트(Victor Kraft) 교수를 나에게 알려주었다. 이 저서는, 실제로 과학에서 사용되는 몇 가지 방법에 대한 매우 귀중한 기술이었고 적어도 이 방법 중 몇 가지는 귀납적이 아니라 연역적이라고 ㅡ 가설적-연역적 ㅡ 밝혔다. 곰페르츠는 빅토르 크라프트를 (율리우스 크라프트[Julius Kraft]와 친척관계가 아니다) 나에게 소개해서 나는 그를 비엔나 대학 근처에 있는 시민공원(Volksgarten)에서 몇 차례 만났다. 빅토르 크라프트는 내가 만난 최초의 비엔나 학파 일원이었다 (칠젤[Zilsel]을 빼면 그러한데, 파이글[Feigl] 따르면 그는 회원이 아니었다). 그는 그 학파에 대한 나의 비판을 기꺼이 경청했다 ㅡ 내가 나중에 만난 회원 대부분보다 더 경청했다. 그러나 그 학파의 철학은 새로운 형태의 스콜라철학과 표현형식주의로 발전할 것이라고 내가 예언했을 때 그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나는 기억한다. 이 예언은 사실로 나타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철학의 과제가 관념들에 대한 해설이라는 계획성 견해를 언급하고 있다.

1929년이나 1930년에 (1930년에 나는 마침내 중등학교 교사로 임용되었다) 나는 헤르베르트 파이글(Herbert Feigl)이라는 또 다른 비엔나 학파 회원을 만났다. 그 만남은 나의 외삼촌이자 비엔나 대학의 통계 및 경제학 교수인 발터 쉬프(Walter Schiff)에 의하여 마련되었는데 그는 나의 철학적 관심사를 알고 있었고 내 생애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나는 이전에 율리우스 크라프트, 곰페르츠 그리고 빅토르 크라프트에 의하여 밝혀진 관심사에서 어떤 고무적인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내가 논문을 (출간되지 않은) 많이 집필했다고 그들이 알고 있었을지라도, 그들 중 누구도 나의 관념을 출간하라고 격려하지 않았다. 곰페르츠는 정말로, 여하한 철학적 관념을 출간하는 것은 절망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나에게 각인시켰다. (시대가 변했다.) 이것은, 과학의 방법에 관한 빅토르 크라프트의 탁월한 저서가 특별 기금을 지원받고서만 발간되었다는 사실에 의하여 뒷받침되었다.

그러나 헤르베르트 파이글은 우리의 철야 모임에서, 나의 관념들이 거의 혁명적인 것으로 중요하다고 알았을 뿐 아니라 내가 서책의 형태로 그 관념들을 출간도 해야 한다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책을 저술한다는 생각은 나에게 떠오른 적이 없다. 문제에 대한 흥미 때문에만 나는 나의 관념들을 발전시켰고, 그다음 명료성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자기-비판을 위하여 필요하기 때문에 그 관념 중 몇 가지를 스스로 적어놓았다. 당시 나는 나 자신을 정통파가 아닌 칸트주의자로서 그리고 실재론자로서 간주했다. 우리의 이론은 실재에 의하여 우리에게 각인된다기보다 우리의 정신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생산된다고 그리고 우리의 이론은 우리의 경험을 초월한다고 나는 관념론에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류판정이 실재와의 정면충돌이 될 것이라고 나는 강조했다. 본질적 물체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칸트의 교설을 우리가 생산하는 이론의 영구적 가설적 특징과 상응하는 것으로서 나는 또한 해석했다. 나는 또한 나 자신을 윤리학에서 칸트주의자로서 간주했다. 그리고 당시 비엔나 학파에 대한 나의 비판이 칸트를 읽은 그리고 칸트의 요점 몇 가지를 이해한 결과일 따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ㅡ 칼 포퍼, ‘끝없는 탐구(Unended Quest)’, 1993, 79-83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