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납은 허구이다
이제 귀납에 관한 상황은 어떠한가? 언제 귀납적 추론이 귀납적으로 “불건전(unsound)”한가 (“성립하지 않는[invalid]”과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제시된 유일한 답변은 이렇다: 귀납적 추론이 귀납적 행태에서 실용적 실수를 빈번히 초래할 때 귀납적 추론이 귀납적으로 “불건전(unsound)”하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하여 제시된 귀납적 추론의 모든 규칙은, 누군가가 그 규칙을 사용한다면, 그런 실용적 실수를 빈번히 초래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거기서 요점은, 심지어 한순간에도 진지하게 생각될 수 있는, 제시된 적이 있는 귀납적 추론의 ㅡ 이론이나 보편법칙을 낳은 추론 ㅡ 규칙이 없다는 것이다. 카르납은 동의하는 듯하다; 이유인즉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나의 강좌에서 귀납적 추론의 사례를 제시하지 않고 연역적 추론의 사례를 제시한 것을 포퍼는 “흥미롭다”라고 한다. 나의 개념으로 확률론적 (“귀납적”) 추론은 본질적으로 추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확률을 할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대신 확률을 할당하기 위한 원칙의 사례를 요구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요구는,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합당한 것인데, 예상되었고 충족되었다.
그러나 카르납은, 모든 전칭명제에 확률 0을 할당하는 체계만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 후 힌티카(Hintikka)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 0이 아닌 귀납적 확률을 전칭명제에 정말로 귀속시킨 이론체계들을 전개했을지라도, 이 체계들이 본질적으로 매우 빈약한 언어에 국한된 듯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그 언어로 심지어 원시적 자연과학도 정식화될 수 없을 터이다. 게다가 그 체계들은, 어느 때고 유한하게 많은 이론이 이용될 수 있는 경우에 국한된다. (이것으로 인하여 체계들이 놀라울 정도로 복잡해지는 것이 방지되지 않는다.) 아무튼 내가 생각하기에 그런 법칙은 ㅡ 실제로 항상 수없이 많은 ㅡ 그런 법칙의 입증 등급이 0보다 더 클지라도, 틀림없이 확률 0이 (확률계산의 의미에서) 주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새로운 체계를 ㅡ 몇몇 법칙에, 가령 0.7의 확률을 할당하는 체계 ㅡ 정말로 채택할지라도 우리가 무엇을 얻는가? 법칙에 귀납적 뒷받침이 있는지 없는지를 그 체계로 우리가 알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체계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어떤 (주로 자의적인) 새로운 체계에 ㅡ 누구의 체계이든 관계없이 ㅡ 따라서, 이 체계에 맞는 믿음의 느낌을 우리가 원한다면 0.7의 믿음 등급을 지닌 법칙을 우리가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규칙이 왜 중요할 터인가 그리고, 그런 규칙이 중요하다면 그런 규칙이 어떻게 비판될 수 있는가를 ㅡ 그런 규칙은 무엇을 배제하는가, 그리고 그런 규칙이 왜 보편법칙에 0 확률을 할당하는 것에 대한 카르납과 나 자신의 논증보다 선호되어야 하는가 ㅡ 말하기 어렵다.
합당한 귀납적 추론의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귀납론자인 넬슨 굿먼[Nelson Goodman]에 의해서도 인정되는 듯하다.) 내가 귀납적 문헌을 읽고 모든 것으로부터 내가 추출할 수 있는 최고의 규칙은 다음과 같은 것일 터이다:
“미래는 과거와 그렇게 매우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것은 물론, 모든 사람이 실제로 수용하는 규칙이다; 그리고 우리가 실재론자라면 (어떤 사람이 뭐라고 하든, 우리 모두가 실재론자라고 내가 믿는 바와 같이) 이와 같은 것을 우리는 이론에서도 또한 수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 규칙은 워낙 모호해서 흥미롭지 않다. 그리고 그 규칙의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그 규칙은 너무 많이 전제하여 틀림없이 우리가 (그리하여 귀납적 규칙이) 모든 이론 형성에 앞서서 전제해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전제한다; 이유인즉 그 규칙은 시간의 이론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상될 수 있었다. 이론 없는 관찰과 이론 없는 언어가 있을 리 없기 때문에, 물론 이론 없는 규칙이나 귀납 원리가 있을 리 없다; 모든 이론이 근거해야 하는 규칙이나 원리는 없다.
그리하여 귀납은 허구이다. “귀납적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확률계산에 대한 “논리적” 해석이 존재할지라도, 이 “일반화된 논리”가 (그렇게 지칭될 것과 같이) “귀납적 논리”의 체계라고 전제할 충분한 이유가 없다.
또한 귀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유감스러울 수 없다: 우리는 귀납 없이도 아주 잘해나갈 듯이 보인다 ㅡ 대담한 추측인 그리고 가능한 한 엄격하게 우리가 비판하고 시험하는 이론을 사용하여, 그리고 우리가 지닌 만큼 많은 재능을 사용하여.
물론 이것이 훌륭한 관행이라면 ㅡ 성공적 관행 ㅡ 그것은 귀납의 “귀납적으로 성립하는” 규칙이라고 굿먼(Goodman)과 다른 사람들이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전체적 요점은, 그것이 성공적이거나 믿음직하거나 기타 등등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오류를 유발하게 되어 있다고 우리에게 알려주어서 우리가 그 오류를 조심하고 그 오류를 제거하려고 노력할 필요성을 의식시킨다는 것이다.
ㅡ 칼 포퍼, ‘끝없는 탐구(Unended Quest)’, 1993년, 146-8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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