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역적 추론은 반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만 성립한다
이제 나는 연역으로 선회한다. 연역적 추론은, 그 추론이 전제에서 결론으로 변함없이 진리를 전송한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성립한다고 언급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일한 논리적 형태의 모든 추론이 진리를 전송한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성립한다고 언급될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이것을 또한 설명할 수 있다: 반증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연역적 추론은 성립한다. 여기서 반증은, 다음에서와 같이, 참인 전제와 허위 결론을 지닌 동일한 형태의 추론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를 여기서 개의 이름으로 하라. 그러면 전제는 참이고 결론은 허위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반증이 있고 그 추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연역적 추론은, 진리처럼, 객관적이고 심지어 절대적이다. 객관성은 물론, 주어진 서술이 참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항상 발견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주어진 추론이 성립하는지를 항상 발견할 수는 없다. “참”이라는 용어를 단지 객관적 의미로만 사용할 것이라고 우리가 동의한다면, 우리가 참으로 증명할 수 있는 많은 서술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진리에 대한 일반적 기준이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 그런 기준이 있다면, 우리는 적어도 잠재적으로 전지(全知)할 터인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 괴델(Gödel)과 타스키(Tarski)의 연구에 따라서, 우리가 물론 참인 산술적 서술의 무한집합을 기술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에게 심지어 산술적 서술에 대한 진리의 일반적 기준이 있을 수 없다.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는 객관적 의미에서 “성립하는 추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 동의할 것인데 그 경우 우리는 많은 추론에 대하여, 그 추론들이 성립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그 추론들이 항상 진리를 전송한다는 것) 증명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성립에 대한 일반적 기준이 없다 ㅡ 심지어 우리 자신을 순전히 산술적인 서술에 국한시킬지라도 그렇다. 결과적으로, 어떤 주어진 산술적 서술이 산술의 공리(axioms)로부터 성립하여 귀결되는지 아닌지를 결정하기 위한 일반적 기준이 우리에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립을 증명할 수 있는 무한히 많은 추론의 규칙을 (많은 등급의 복잡성을 지닌) 우리가 기술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반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할 수 있는 무한히 많은 추론의 규칙을 우리가 기술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귀납적 추론이 우리의 직관에 의존한다고 말하면 허위이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어떤 추론의 성립을 확립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추측에 ㅡ 다시 말해서, 직관에 의하여 ㅡ 우리 자신이 끌려가는 것을 허용할 것이다; 직관은 우리가 없이 살아갈 수 없지만, 흔히 우리를 오도한다. (이것은 명백하다; 과학의 역사로부터 우리는, 훌륭한 이론보다 나쁜 이론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직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직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논증의 도움을 받는 것과 동일하게 훌륭한 것인 양, 직관의 도움을 받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다.
내가 강좌에서 흔히 말한 바와 같이, 직관과 같은 것이나 어떤 것이 자명하다는 느낌은 진리에 의하여 혹은 성립에 의하여 아마도 부분적으로 설명될지도 모르지만, 역순은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어떤 서술이나 추론이 참이거나 성립한다고 느낀다는 (아무리 강력할지라도) 이유로만 그 서술은 참이지도 않고 그 추론을 성립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지성이나 우리의 추론 혹은 판단 기능이 (또는 우리가 그것을 지칭한 여하한 것) 그렇게 조정되어서 상당히 정상적 상황에서 우리가 참인 것을 수용하거나 판단하거나 믿는 것은 물론 인정될 수 있다; 주로 의심의 여지없이 사물을 비판적으로 조사하기 위하여 우리 내부로 장착된 몇 가지 성향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조정되어서 상당히 정상적 상황에서 우리가 참인 것을 수용하거나 판단하거나 믿는 것은 물론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비교적 단순한 사례를 들면, 착시현상으로 인하여 우리의 직관이 다소 충동과 유사한 형태를 띨지라도 우리가 그 직관에 지나치게 의존할 수 없다고 밝혀진다.
그런 주관적 감정이나 직관을, 진리나 성립이 주어진 결과로서 그리고 우리의 정상적 조사 중 몇 가지 조사를 통과한 결과로서 우리가 설명할 것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 문제 상황을 긍정적 방향으로 돌려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 서술이나 이 추론을 믿기 때문에, 혹은 내가 그것을 믿어야 하기 때문에 또는 그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아니면 그 반대가 생각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서술이 참이거나 이 추론이 성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동안 논증을 대신해서 이런 종류의 이야기로 인하여 주관론적 철학자들이 도움을 받았다.
논리에서 순환성이 없다면 연역적 논리의 규칙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논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직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견해가 여전히 널리 믿어진다: 모든 논증은 논리를 전제해야 한다는 견해가 여전히 널리 믿어진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사물을 표현하는 이런 방식에 반대하여 많은 것이 언급될지라도 모든 논증은 논리를 이용하고, 여러분의 마음에 든다면, 논리를 “전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론의 몇 가지 규칙을 이용하지 않고 우리가 그 규칙의 타당성을 확립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요컨대 연역이나 연역적 성립은, 객관적 진리가 그러한 것처럼, 객관적이다. 직관이나 믿음의 느낌 혹은 충동의 느낌은 아마도 때때로, 특정 추론이 성립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성립은 객관적이어서, 심리학적 그리고 행동주의적 및 실용주의적 용어로도 설명될 수 없다.
나는 다음과 같은 말함으로써 이 태도를 종종 표현했다: “나는 믿음 철학자가 아니다.” 정말로 믿음은, 객관적 의미에서 진리의 이론이나 연역의 이론 또는 “지식”의 이론에 대하여 아주 무의미하다. 소위 “참된 믿음”은 참인 이론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그 이론이 참인이지 아닌지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이다. “합리적 믿음”은, 만약 그런 것이 있다고 언급될 수 있다면, 비판적 논증에 비추어 선호될 수 있는 것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이 본질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다시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논증의 문제 그리고 비판적 논쟁과 관련한 객관적 상태의 문제이다.
귀납에 (혹은 귀납적 논리나, 귀납적 행태 아니면 귀납에 의한이나 반복에 의한 또는 “지시[instruction]”에 의한 학습) 관하여, 나는 흄(Hume)과 함께, 그런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내가 옳다면 이것으로 인하여 귀납의 문제가 물론 해결된다. (미래가 과거와 같을 것인지와 같은 귀납의 문제로 지칭될 남은 다른 문제들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나의 견해로 전혀 흥미진진하지 않고 역시 해결될 수 있다: 미래는 부분적으로 과거와 같고 부분적으로 전혀 과거와 같지 않을 것이다.)
흄(Hume)에 대하여 현재 가장 유행하는 답변은 무엇인가? 그 답변은, “성립한다(valid)”라는 단어가 “연역적으로 성립한다”를 의미하기 때문에 귀납은 물론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귀납적 논증의 불성립으로 (연역적 의미에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연역적 추론과 귀납적 추론이 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추론에 공통점이 많을지라도 ㅡ 두 가지 추론 모두는 충분히 시험되고 습관적이며 상당히 직관적 규칙에 따라서 논증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ㅡ 많은 차이점도 있다.
연역과 귀납의 공통점으로 생각되는 것은 특히, 이처럼 표현될 수 있다. 연역의 성립은 타당하게 증명될 수 없는데 이유인즉 이것이 논리에 의하여 논리를 증명하고 있을 터이고 그리하여 순환적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순환적 논증은 사실상 우리의 견해를 설명하여 우리의 믿음을 강화할 것이라고 언급된다. 귀납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사실이다. 귀납은 아마도 귀납적 정당화를 뛰어넘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납에 관한 귀납적 추론은,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닐지라도, 유용하고 도움이 된다. 게다가 연역의 이론과 귀납의 이론 두 가지 모두에서 직관이나 습관 혹은 규약이나 실용적 성공과 같은 것이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때때로 그런 것은 틀림없이 도움을 준다.
이 유행하는 견해를 비판하기 위하여 나는, 앞서 이 절에서 내가 말한 것을 반복한다: 연역적 추론은 반증이 존재하지 않으면 성립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객관적인 비판적 시험이라는 방법이 있다: 연역에 제시된 규칙에 대하여 우리는 반증을 구축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우리가 성공한다면 추론이나 추론의 규칙은, 그것이 몇몇 사람에 의하여 혹은 심지어 모든 사람에 의하여 직관적으로 성립한다고 믿어지든 아니든, 성립하지 않는다. (브로우베르[Brouwer]는 자신이 바로 이렇게 했다고 ㅡ 간접적 증명에 자신이 반증을 제시했다고 ㅡ 생각하여 이것들이 성립한다고 잘못 생각되었다고 설명했는데 왜냐하면 무한한 반증만 존재하여 간접적 증명이 유한한 모든 경우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객관적 시험이 있고 많은 경우 심지어 이용할 수 있는 객관적 증명이 있기 때문에 심리학적 고찰, 주관적 신념, 습관 그리고 규약은 쟁점에 완전히 무관하게 된다.
ㅡ 칼 포퍼, ‘끝없는 탐구(Unended Quest)’, 1993년, 143-6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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