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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닌그라드(옛 쾨니히스베르크) 시내 대성당 한편에 있는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묘지. 한때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2차 세계대전 뒤로 소련(러시아)의 땅이 됐다. 칸트는 독일의 끝자락에 위치한 이 도시에서 한평생 살면서 근대
계몽주의를 완성했다. |
[김덕영의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⑥ 칸트가 나고 잠든 땅, 칼리닌그라드
처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독일 통일의 주역인 융커(옛 독일 동부
지역의 지주 귀족)의 경제적·사회적 기반이었던 옛 프로이센 지역을 여행하는 것이 이번 기행 중에서 백미가 될 것이라는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그곳은 베를린에서 동쪽으로 500㎞가 좀 넘는 거리이지만 열차로 가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남의 땅’이었다. 시간도 독일보다 두
시간이나 빠르다.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의 고향이자 동프로이센의 중심도시였던 옛 쾨니히스베르크를 찾아가는 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곳은 독일 땅 쾨니히스베르크가 아니라 러시아 땅 칼리닌그라드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소련(러시아)이 이 도시를 포함한 동프로이센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애초 계획했던 1박2일 기차 여행을 2박3일의 비행기 여행으로 바꿨다. 칼리닌그라드 기행은 이번
‘추로지향(鄒魯之鄕) 순례’에서 가장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어간 여행이 됐다. 날씨도 가장 추웠고, 눈도 가장 많이 쌓였다. ‘역시 칸트가
위대하기는 위대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은 베를린에서 1시간15분 정도 걸렸다. 추운 날씨에다 소련 시절을 연상시키는 현지 공항
직원들의 복장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까다로운 입국심사를 당하고 보니 몸도 마음도 더 얼어붙었다. 정말 동토의 나라에 온 기분이었다.
키 157㎝가 채 안 되는 저 작은 거인 칸트는 평생 이곳 독일의 끝자락을 떠나지 않은
채 겨자 바른 음식을 즐겨 먹고(칸트는 모든 음식에 겨자를 발라 먹었다고 한다), 시계처럼 정확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하고자 한
것인가?
칸트는 그 이전의 철학적 조류를 종합해 근대정신을 체계화하는 것을 필생의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이 과제를
계몽주의의 이념을 가지고 해결하고자 했다. 칸트는 인식과 윤리는 물론이요 일견 이성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이는 예술과 종교도 철저히 이성의
원리에 따라서 파악했다. 그의 철학적 사유와 성찰은 이성이라는 법정에서 이성이라는 재판관이 이성이라는 피고를 재판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바로
이런 연유로 칸트를 계몽주의의 완성자로 보는 것이다.
칼리닌그라드에 도착한 다음날 칸트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다. 인구가 43만명이 넘을 정도로 큰 도시인데다
독일어는커녕 영어를 하는 사람도 만나기가 힘들어 일단 택시를 타기로 했다. 요금 미터기도 볼 수 없고 손가락 두 개 내밀면 200루블, 세 개
내밀면 300루블 주는 식이었다. 그렇지만 칸트의 묘지에는 잘 데려다 주었다. 묘지는 고풍스럽고 위엄 있어 보이는, 14세기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벽돌로 된 성당의 오른쪽 후미에 있었다. 독일어로 선명하게 새겨진 ‘이마누엘 칸트 1724~1804’라는 글씨가 강렬하게 와 닿았다.
매일 사진으로만 보던 위대한 철학자의 묘지를 어렵게 와서 직접 보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200년 전 계몽주의의 원리와 이념에
입각해 근대정신을 주조한 철학자 칸트가 바로 이곳에 영면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의 철학은 분화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있다. 인간의 정신능력은 인식이성·실천이성·판단이성·신앙이성으로
분화된다. 분화는 근대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특징이다.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면서 개인의 인격과 정신, 행위, 그리고 사회적 관계와 사회집단은
다양한 영역으로 분화된다. 칸트는 바로 이 근대의 역사적·문화적 과정을 담아낼 수 있는 형이상학을 제시하고자 했다. 기존의 형이상학이 좌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근대적 분화성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칸트의 철학은 근대의 법정에서 근대라는 재판관이 근대라는 피고를 재판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쉽게 칸트의 묘지를 찾고 보니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칸트의 기념상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알았다고 하면서 기분 좋게 한참을 달리더니 한 기념상 앞에 내려주었다. 그런데 웬걸? 그 상은 칸트가
아니었다. 일단 그의 자취가 남아 있을지도 모를 현지 대학으로 가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택시를 타고 호텔 카운터 여직원이 러시아어로
적어준 “대학”이라는 단어와 “칸트”라는 단어를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쏜살같이 내달렸다. 그런데 맙소사, 아까 그 성당에다
데려다 주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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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누엘 칸트 국립대학 건물 옆에 서 있는 칸트의 기념상(위쪽). 이 대학은 1544년 개교한 옛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의 명맥을 잇는다고 내세우고 있다. 원래 ‘국립 칼리닌대학’이었다가 칸트를 기념하기 위해 2005년 이름을 바꿨다. 아래쪽
사진은 <실천이성비판>의 마지막 구절이 돋을새김된 칸트 기념편액. 1904년 칸트 서거 100년을 맞아 제작했으나, 2차 대전 때
파괴돼 1994년에 모조품으로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
아하, 칼리닌그라드에서는
칸트를 으레 그의 묘지와 연결시키고 그 이상은 모르는 것이구나! 아까 아침의 택시기사도 내가 칸트 사진을 보여주니 무작정 이리로 온 것이구나!
말은 안 통하고 날은 춥고 눈은 발목까지 빠졌다. 겨울 해는 짧고, 상황은 막막했다. 다시 택시기사에게 대학으로 가자고 했다. 그랬더니 (이
도시에는) 대학이 세 개라고 손가락으로 대답한다. 그러면 칸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대학으로 가면 된다고 손짓 발짓으로 말했다. 그러자 기사는
한참 동안 이리저리 전화를 하면서 차를 몰더니 칸트의 기념상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칸트의 기념상 바로 옆에 대학 건물이 있는데, 그 현관 오른쪽에는 칸트의 얼굴과 러시아어로 된 칸트의
이름을 담은 편액이 걸려 있었다. ‘이마누엘 칸트 국립대학’이다. 이 대학은 옛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이 대학은 1544년에 개교했다)의 후계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이 대학에서 공부하고 가르친 칸트를 기리기 위해 2005년부터 그 이름을 ‘국립 칼리닌대학’에서 ‘이마누엘 칸트
국립대학’으로 바꾸었다. 현재는 12개 학부에서 1만3000명 정도의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의 관리인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칸트의
기념편액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자투리 영어로 박물관에 그게 있다고 말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다가 독일어를 좀 하는 학생을 만났다. 그가
일러준 대로 걸어가니까 칸트의 묘지가 있는 그 성당이 또다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 입구 쪽에 마치 비밀통로처럼 생긴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박물관이 나왔다. 그 가운데
두 층이 칸트에게 할애된 공간이었다. 거기에 칸트의 기념편액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금속으로 된 모조품이었다.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아는 젊은
여직원이 진품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조금 전에 오던 길을 되돌아가다 보니 큰 사거리가 나왔다. 바로 그 한쪽 귀퉁이의 벽면에 기념편액이
있었다.
이 기념편액은 1904년 칸트 서거 100년을 맞이하여 청동으로 제작하여 옛 쾨니히스베르크 성(이 성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심하게 파괴되었으며 그 폐허마저도 1968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명령으로 폭파되었다고 한다)의
서쪽 성벽에 부착했던 것인데, 1945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뒤 1994년 그 성벽의 잔해로 보이는 현재의 위치에 독일어와
러시아로 된 모조품을 만들어서 부착했다고 한다. 그곳은 칸트의 묘지가 있는 성당과 대학 사이에서 대학 쪽에 좀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칸트의 기념편액에는 <실천이성비판>의 마지막 구절이 양각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것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계속 숙고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큰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
칸트 철학에서 도덕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컨대 그는 인식을 책임지는 ‘순수이성’에 대해 윤리를
책임지는 ‘실천이성’이 우위를 지닌다고 말한다. 또한 칸트에게 종교는 궁극적으로 윤리다. 그러므로 신앙 공동체인 교회는 곧 윤리적 공동체가
된다.
그런데 이 도덕법칙은 별이 빛나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존재인 내가 나에게 스스로 부과한
법칙이다. 그래서 별이 빛나는 하늘처럼 아름다운 것이다. 바로 이 자율성과 주체성이 칸트 윤리학의 요체이다. 인식론도 마찬가지이다. 칸트에게
사물을 인식한다 함은 그 이전의 인식론이 가정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사물과 그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사물을 정리하고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내는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정신적 행위를 뜻한다.
소련 체제 붕괴 이후 칼리닌그라드에서는 학문적 차원에서 칸트를 복원시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러나
현지 일반인들에게 칸트는 여전히 소외된 철학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나 사회주의 사상의 지배를 받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는 그의 위대한 철학적 사유와 성찰을 통해서 이미 생전에 세계가 고향인 세계시민이 되었다. 옛말에 “꽃의 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이름 없는 사회학자도 이렇게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것이다.
걸어 다니면서도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칸트의 흔적들을 찾아 이리저리 헤맨 탓에 시간은 훌쩍 오후 두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배낭에서 과자와 물을 꺼내 잠시 시장기를 속여 둔 채로 발 닿는 대로 걷기로 했다. 목표는 옛 쾨니히스베르크의 두 얼굴,
아니 쾨니히스베르크의 얼굴과 칼리닌그라드의 얼굴이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가를 더욱 많이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옛 프로이센 지역을 제대로
여행하지 못한 데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어차피 독일은 많이 보았으니까 독일의 역사와 러시아의 역사(엄밀히 말하자면
사회주의 소련의 역사)가 중첩되는 도시를 보는 것이 어쩌면 더 배울 것이 많을 듯싶었다.
칼리닌그라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성냥갑처럼 규격화된 건물이었다. 아주 높지는 않지만, 카메라로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긴 아파트도 보였다. 이러한 건물들과 전통양식들이 유기적으로 융합되지 못하고 마치 서로 다른 지층처럼 어색하게
‘동거’를 하고 있었다.
해가 지고 난 다음에도 꽤 오랫동안 쏘다녔다. 더 걸을 수 없을 때 호텔에 돌아와서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저녁을 먹었다. 식사 뒤엔 좋아하는 술은 아니지만 보드카를 한잔 하면서 어렵사리 칸트의 발자취를 더듬은 것과 처음 러시아 땅을 밟은 것을
자축했다.
나는 힘들게 옛날의 쾨니히스베르크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어떤 독일의 도시에서보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웃으면서 나왔다.
김덕영 사회학자·독일 카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