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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영의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 카를 마르크스

이윤진이카루스 2013. 2. 23. 05:33

문화

문화일반

마르크스 하우스엔 유품 한점 없어…마치 교육장 온듯

등록 : 2013.02.20 20:03 수정 : 2013.02.20 20:03

독일 트리어의 ‘브뤼켄슈트라세’에 있는 ‘마르크스 하우스’의 안(왼쪽)과 바깥 모습(오른쪽). 마르크스가 태어난 이곳은 현재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으나, 변변한 유품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고향을 떠나 국적 없이, 오로지 자본주의의 비밀을 훔치는 ‘프로메테우스’로서 한평생을 살았던 마르크스의 신산한 삶이 드러난다.

[김덕영의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⑧ 마르크스가 살았던 본과 트리어

한 도시에서는 우아하고 여성적인 건물이 정감있게 다가왔고, 다른 한 도시에서는 검정색의 거대한 성문이 사람을 압도했다.

 

앞의 경우는 본에서의 경험이고, 뒤의 경우는 트리어에서의 경험이다. 사상가 카를 마르크스(1818~1883)의 숨결을 그가 공부
한 도시 본에서 찾는 것이 원래 목표였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계획에 없던 마르크스의 출생지 트리어를 기행지에 추가하기로 했다.

 

본에 간다고 하니까 주위에서 이구동성으로 음악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82) 때문이냐고 묻는다. 과연 본은 베토벤의 도시였다.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광장인 ‘뮌스터 광장’의 한복판에 근엄한 베토벤 기념상이 서 있다. 뮌스터 광장은 우리말로는 대성당 광장으로 옮길 수 있다. 그 광장의 한켠에 11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대성당이 있는데, 그 첨탑이 어찌나 높던지 카메라로 다 담아낼 수도 없었다.

 

이 광장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베토벤 하우스’가 있다. 베토벤의 생가와 박물관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베토벤 하우스를 보니 얼마 전에 방문했던 할레가 생각났다. 할레의 시장 광장에는 18세기 음악가 헨델의 기념상이 서 있었고 그 가까운 곳에 헨델 하우스가 있었다. 베토벤 하우스가 서민적이고 소박하다면, 헨델 하우스는 귀족적이고 웅장하다. 마치 바이마르에서 실러 하우스와 괴테 하우스를 보는 것 같다.

 

카셀에서 동료 학자 한 사람이 본에 가도 마르크스의 흔적은 전혀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마침 본에서 ‘카를 마르크스 박사. 공부에서 박사학위까지-본, 베를린, 예나’라는 주제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전시회가 나의 기행을 위해 열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뭔가 대어를 낚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실망스러웠다. 직접 마르크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가 즐겨 읽었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하나뿐(사실 이것도 실제로 마르크스가 소장했던 것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나머지는 증명서, 서류, 책 표지, 사진 등이었다.

 

 

지난달 본에서 열린 마르크스 관련 전시회에 들렀다가 발견한 마르크스의 초상(위쪽). 마르크스는 1835년 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본보다는 그의 고향인 트리어에 가서야 그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더듬을 수 있었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트리어의 대표적인 건축물으로 꼽히는 ‘포르타 니그라’(아래쪽). ‘검은 문’이라는 뜻으로 2000여년 전 로마인들이 세운 것이다.
박물관으로 꾸민 마르크스 생가
인쇄·영상자료만 전시돼 있을 뿐
체취 밴 어떤 흔적도 볼 수 없어

 

유물론 입각해 자본주의 모순 해부
‘자본론’이란 지적 유산 남겼지만
사회주의 붕괴되며 부침도 겪어

 

막스 베버가 한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 세계는
마르크스와 니체에 의해 각인됐다”

 

 

마르크스는 1818년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1835년에 본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그 이듬해인 1836년 베를린대학으로 옮겨 1841년까지 법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이때 그는 이 대학 교수 브루노 바우어(1809~1882)가 이끌던 청년헤겔파(헤겔좌파)의 영향을 받아 급진적이고 무신론적인 자유주의자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1841년 예나대학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바우어의 지도로 하빌리타치온(독일 대학교수 자격)을 따기 위해 본으로 돌아왔으나 허용되지 않았다. 그 뒤 바우어가 해직되는 것을 보고 대학교수의 꿈을 접은 그는 1842~1843년 쾰른에서 <라인신문>의 편집을 담당했다. 1843년 10월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뒤로는 평생 국적 없이 누구보다도 신산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 누구도 넘보기 힘든 위대한 지적 유산을 남겼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뭐니 뭐니 해도 인류 역사, 특히 근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 달리 표현하자면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원리를 밝혀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운동법칙과 작동원리를 역사적이고 이론적으로 추적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경제체제라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하여 자본주의에 대한 광범위하고 정치한 이론을 구축했다. 바로 이 역사적 차원이 마르크스를 기존의 사회주의 이론과 결정적으로 구분짓는 특징이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근대자본주의의 사회질서 및 경제질서와 그 운동법칙을 노동·가치·화폐·자본·교환 등의 개념과 범주에 입각해 구명해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비밀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였다.

 

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르크스의 고향 트리어에 가면 무언가 그의 체취를 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트리어행을 결심하기까지 몇 번이나 망설였다. 꽉 짜인 일정에 하루를 뺀다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는 데만 5시간 반이 걸린다. 더구나 기차를 두 번 갈아타야 하는데, 이런 경우 중간에 제대로 연결이 안 되면 낭패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누구인가? 막스 베버와 더불어 오늘날 사회과학의 양대 산맥을 구축한 거인, 우리에게 끊임없이 지적 자양분을 공급해준 거장 중의 거장이 아니던가? 마르크스의 흔적을 추적하지 않고는 이번 기행을 마음 편히 끝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코블렌츠로 가는 완행열차를 타고 비스바덴을 지나니 라인강이 나타났다. 강은 비교적 험한 산과 산 사이를 흘렀다. 곳곳에 폐허가 된 옛 성터가 보였다. 금방이라도 눈을 쏟아부을 듯 잔뜩 찌푸린 날씨였지만, 앙상한 본체를 드러낸 생명과 자연을 주변에 보듬은 채 유유히 흐르는 겨울 강을 감상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라인강이 그 지류 모젤강을 받아들이는 곳에 있는 코블렌츠는 마치 남양주의 양수리와도 같았다. 모젤강은 코블렌츠에서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트리어로 향하는 길을 따라오면서 나의 눈길을 빼앗는다. 트리어를 찾아가는 길 자체가 즐거운 체험이다.

 

트리어 시내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거대한 검은 성문이 위용을 자랑하며 버티고 있었다. ‘포르타 니그라’였다. ‘검은 문’이라는 뜻의 이 성문은 기원전 180년께 로마인들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트리어에는 로마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얼마 전 나에게 포르타 니그라와 대비되는 인상을 주었던 본의 옛 시청은 1737~38년에 지어졌다. 사실 중부독일 이북에서 로코코 양식 건축물을 처음 보았다. 본과 트리어는 직선거리로 100㎞ 남짓한데도 이렇듯 사뭇 다른 인상을 받았다.

 

시내 중앙광장 바로 옆 ‘브뤼켄슈트라세’ 10번지에 ‘카를 마르크스 하우스’가 있다. 마르크스의 생가인 이 건물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평일인데도 방문객이 많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본의 전시회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마르크스의 삶과 작품, 그리고 그가 남긴 영향을 사진자료·인쇄자료·영상자료 등으로 여러 공간에 정리해놓은 것이 전부다. 그의 손때 묻은 유품은 단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마르크스가 1843년에 파리로 이주한 다음,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3월 혁명기인 1848~49년에 잠시 쾰른으로 돌아와 <신라인신문>을 발행한 시기를 빼고는), 여러 나라를 떠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트리어의 시민들은 마르크스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역에서부터 만나는 사람들에게 카를 마르크스 하우스의 위치를 물어보았는데, 누구나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트리어 사람들은 마르크스라는 위대한 사상가를 배출한 도시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다. 카를 마르크스 하우스 바로 근처에 마르크스의 이름을 딴 ‘마르크스슈트라세’라는 길이 있고, 카를 마르크스 하우스를 트리어의 명소 가운데 하나로 홍보하고 있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비록 고향에 단 한 점의 유품도 남기지 못했지만, 그의 생가를 중심으로 하여 고향에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일찍이 고향에서 추방된 근대판 프로메테우스인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비밀을 훔치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의 몰락과 그 이후의 역사 발전 단계인 사회주의 사회, 공산주의 사회의 도래를 예언했다. 마르크스는 인류 역사가 자연법칙처럼 필연적으로 작용하면서 관철되어 나가는 경향에 의해 지배를 받아왔으므로 그러한 예언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인류 역사의 발전과정은 일종의 자연사적 과정이었다.

 

사실 이러한 표상은 지극히 비과학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인류 역사를 자연법칙으로 파악한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실천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지배와 억압과 착취의 자본주의는 새로운 사회에 의해서 대체될 것인가, 그렇다면 그 사회는 어떠한 모습일까, 그리고 그러한 사회는 어떠한 방식으로 도래할 것인가를 설파하려면 보편타당한 법칙에 기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만약 엄밀한 경험과학적 분석과 설명에 머문다면, 실천적 측면에서 자본주의적 모순의 개선이나 수정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몰락과 그다음 단계의 역사 발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이처럼 과학과 비과학이 혼재된 그의 거대한 사고체계에 힘입어 그 어떤 사상가보다도 인간의 역사와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1980~90년대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마르크스는 다시 한번 추방되었다. 수많은 그의 추종자들이 개종하거나 변심하거나 침묵을 지켰다. 그들은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의 비밀을 잘못 훔쳤다고 생각했다.

 

과연 마르크스는 죽었을까? 다시 묻자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인 역사유물론은 용도폐기되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역사철학적 형이상학과 예언의 요소만 걷어낸다면, 그리고 모든 것은 경제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환원론적 사고만 벗어버린다면, 역사유물론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고도 의미있는 과학적 인식과 사유의 틀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점점 더 경제적으로 조건지어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막스 베버(1864~1920)의 말처럼 “우리 근대인의 삶의 운명을 가장 강력하게 결정하는 힘”이다.

 

베버는 마르크스와 가장 대척적인 입장에 있었고 심지어 평생을 마르크스의 유령과 싸웠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베버는 (물론 여러 측면에서 비판적이었지만) 마르크스를 사회과학적 인식과 사유의 발전을 위한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디딤돌이자, 그 어깨 위에서 세상을 좀더 멀리 볼 수 있게 해주는 거인이라고 생각했다. 이 거인은 향후의 지적 세계를 결정적으로 각인했다. 그는 마르크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지식인, 그리고 특히 오늘날의 철학자가 얼마나 진실한가는 그가 니체와 마르크스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를 보면 측정할 수 있다. 이 두 거장의 업적이 없었다면 자신의 작업의 아주 커다란 부분을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정신적으로 존재하는 이 세계는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와 니체에 의해 각인된 세계다.”

 

김덕영 사회학자·독일 카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