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베를린에 있는 홈볼트대학.(왼쪽) 신인문주의 이념의 기치를 내걸고 1810년 빌헬름 폰 훔볼트에 의해 창립된 이 대학은 무엇보다 철학을 강조했고 이런 교육이념은 다른 독일 대학들에 전범이 됐다. 베를린 중심부 도로텐슈타트 공동묘지에 안치된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부부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부부의 묘지.(오른쪽) 피히테의 뒤를 이어 훔볼트대학 교수직을 이어받았던 헤겔은 사후 피히테의 옆자리에 묻혔다. |
[김덕영의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⑦ 헤겔철학과 삶의 종착지, 베를린
칸트가 ‘주체의 철학’이라면
헤겔은 한마디로 ‘정신의 철학’
마르크스 유물변증법에 영향훔볼트 대학서 교수·총장 지낸
독일 철학계의 절대적인 존재생전에 피히테 후임이었던 헤겔
그의 묘지 옆엔 피히테의 묘지가…어떤 독일 학자가 강연을 위해 일본에 들렀는데 학생들로부터 “이마누엘 칸트(1724~1804)와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 가운데 누가 더 위대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 질문의 진의를 알 수 없었던 그는 몹시 당황해서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는 일본 사람들에게 모든 것에 서열을 부여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세상만사를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치면 한국인들을 당할 사람들이 있을까?
얼마 전 오랜 친구와 전화통화를 했다. 토요일에 베를린에 간다고 하니까 미친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주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칼리닌그라드(쾨니히스베르크)에 다녀왔고, 금요일에는 세 시간짜리 세미나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대답했다. “나도 안다, 내가 이팔청춘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칸트와 헤겔 중 누가 더 위대한가 하는 철학사의 가장 큰 난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친구, 또 실없는 헛소리한다고 낄낄거린다.
카셀에서 베를린은 도시 간 고속철도(ICE : InterCity Express)로 2시간45분 정도면 닿을 수 있어 여행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다. 베를린 중앙역에서 슈넬반(Schnellbahn : 도시 안을 운행하는 빠른 열차로 우리 지하철에 해당)으로 갈아타고 ‘알렉산더 광장’까지 세 정거장을 간 다음 걸어서 훔볼트대학에 가기로 했다.
훔볼트대학은 신인문주의 이념의 기치 아래 1810년에 창립되었다. 신인문주의란 인간의 이성과 자유, 그리고 전인적 인격의 형성을 강조하는 사상적 조류였다. 그리하여 훔볼트대학은 다양한 학제간 교육을 통해 인문주의적 교양을 갖춘 인간의 교육을 지향했다. 훔볼트대학은 무엇보다도 철학을 강조했다. 이 대학의 창립에 관여하며 초대 총장을 지낸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1762~1814)는 모든 고등교육은 철학에서 출발해야 하며 모든 학생은 철학 강의를 우선적으로 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교육이념은 그 이후에 설립되는 독일 대학들에 전범이 되었다. 헤겔은 1818년 피히테 후임으로 이 대학의 철학교수가 되었으며, 1829년에는 총장이 되었다. 그는 “교수 중의 교수”로 불리면서 독일 철학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처음에 예상했던 것과 달리 훔볼트대학은 곧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날씨도 춥고 해서 그런지 좀 짜증이 나려던 차에 눈이 번쩍 뜨였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기념상이 눈에 확 들어온 것이다. 마르크스는 오른쪽에 앉아 있고 엥겔스는 왼쪽에 서 있는 근엄한 청동 기념상이다. 옛 서독 지역에서는 이 두 위대한 사상가의 기념상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기에, 이는 뜻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
헤겔이 살던 거리 옆의 ‘헤겔 광장’에 있는 헤겔의 두상(위쪽)과 베를린 시내에 세워진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기념상(아래쪽). 헤겔의 후계자이면서 비판자였던 마르크스는 헤겔의 유심론(관념론)적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받아들여, 세계를 변혁하기 위한 철학을 구축했다. |
글의 첫머리에서 칸트를 언급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헤겔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칸트와의 관련 속에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칸트의 철학이 한마디로 주체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면, 헤겔의 철학은 한마디로 정신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칸트에 대해서도 정신을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인식이란 인간 정신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이자 작용이다. 그러나 그 정신은 주체, 곧 인식하고 실천하고 판단하는 주체에 한정된다. 칸트의 정신은 어디까지나 인간학적 차원에 머문다. 이에 반해 헤겔의 정신은 인간을 넘어서 자연과 신까지도 포함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학적 차원을 넘어서 자연철학적 차원과 신학적 차원까지 포괄한다. 헤겔에 따르면, 정신은 절대적인 실체로서 자기 자신을 내포하는 존재이다.
헤겔이 보기에 칸트의 비판철학은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칸트의 인식론은 ‘주체에 의한 객체의 질서화와 구조화가 인식’이라는 기본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헤겔이 보기에 정신적 존재는 주체도 아니고 객체도 아니다. 그것은 양자의 통일이며 전체이다. 존재는 통일성과 전체성에 다름 아니며, 바로 이 통일성과 전체성이 진리이다. 주체와 객체는 이 통일성과 전체성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서로를 매개하며 외화하고 타자화한다.
훔볼트대학을 둘러보고 본관 건물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차 오늘은 토요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 대학은 토요일에 수업이 없어 대개 문을 잠근다. 그런데 다행히도 본관 건물의 문은 열려 있어서 나 말고도 방문객 몇 명이 그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저 유명한 명제, 이른바 ‘포이어바흐에 관한 열한 번째 테제’가 새겨진 곳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 명제는 본관 일층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중간의 벽에 노란색 글자로 선명하게 붙어 있었다. 이러한 명제에 입각해 인류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적 틀 가운데 하나를 주조한 마르크스의 철학은 변증법과 유물론에 그 핵심이 있다.
마르크스의 철학에서 변증법은 역사운동의 법칙에 대한 이론이고 유물론은 역사운동의 토대에 대한 이론이다. 이 가운데 변증법은 헤겔한테서 온 것이다. 변증법은 한마디로 정신의 운동법칙이다. 헤겔에 따르면 정신은 운동을 통하여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지양하고 더 높은 통일성과 전체성의 단계로 고양되는데, 이 운동에는 대립·모순·부정 등이 중요한 기제로 작동한다. 헤겔에게 정신은 고착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운동을 통하여 자기를 실현하고 구현한다. 정신이 운동한다는 점에서 헤겔의 변증법은 유심론(관념론)적이다. 마르크스는 이 정신을 물질로 대체했다. 곧 유심론(관념론)을 유물론으로 대체했다. 마르크스의 철학은 유물변증법 위에 구축된 역사철학이자 사회철학이다. 이렇게 보면 마르크스는 헤겔의 후계자이자 비판자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은 1828년부터 세상을 떠나는 1831년까지 훔볼트대학 본관 건물의 뒤편에 있는 암 쿠퍼그라벤 4a번지에 살았는데, 그 건물은 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 옆 건물의 벽에 그가 이 집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념편액이 부착돼 있다. 그리고 그가 살던 거리의 옆에 ‘헤겔 광장’이 있고 헤겔의 두상이 마치 자신이 구축한 거대한 철학적 사유의 세계를 지키기라도 하듯이 우두커니 자신의 이름이 붙은 광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철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철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칸트와 헤겔은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한다. 칸트는 철저히 인간학적 차원에 머문다. 곧 철학이 물을 수 있고 물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이와 달리, 헤겔은 기존의 모든 지식을 통합하여 거대한 백과전서적 체계를 구축하려고 했다. 그 가운데 철학은 모든 학문의 정점에서 정신의 최고단계인 절대정신에 대한 자유로운 사유를 한다. 이 점에서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상당히 유사하다. 그리고 칸트는 (물론 여러 가지 유보사항이 있지만) 이데아 세계와 현실세계를 엄격하게 구분한 플라톤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은 각각 플라톤과 칸트로부터 배웠지만 모두 스승한테 만족할 수 없었다.
헤겔은 사후 베를린 중심부에 있는 도로텐슈타트 공동묘지(도로텐슈타트는 베를린의 한 구역을 가리키는 지명)에 묻혔는데, 이 공동묘지는 생전에 그가 살고 가르치던 곳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우반(U-Bahn : 도시 안을 천천히 운행하는 열차로 우리의 옛 전차에 해당)으로 두 정거장을 간 다음 조금 걸어서 당도한 시내 공동묘지는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작고 아담했다. 이 공동묘지는 유명인사가 많이 묻힌 것으로 유명하다. 그중 몇몇의 이름을 거론하면, 작가 아르놀트 츠바이크(1887~1968), 철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1898~1979), 작가 하인리히 만(1871~1950, 거장 토마스 만의 형), 전 독일 대통령 요하네스 라우(1931~2006) 등이 그곳에 잠들어 있다. 마치 작은 정신의 공화국, 정신의 소우주를 보는 듯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헤겔의 묘지가 피히테의 묘지 바로 옆에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헤겔은 살아서는 피히테의 교수직을 물려받았고 죽어서는 피히테의 옆자리를 물려받았던 것이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번 기행에서 피히테를 집중해서 다루진 못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가 중요하지 않거나 위대하지 않아서는 아니다. 피히테의 영전에 죄송스럽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바로 그 앞쪽에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와 그의 부인 헬레네 바이겔-브레히트(1900~1971)의 무덤이 있다. 크지 않은 천연석에 생몰연도조차 없이 그냥 하얀 글씨로 이름만 새긴 이 부부의 묘비가 그렇게 인상적일 수가 없었다. 아주 소박하고 단순하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
헤겔의 철학은 여러 가지로 칸트의 철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평가도 극과 극으로 갈린다. 너무 사변적이고 거대한 지적 체계를 추구한 나머지 칸트 이전의 철학으로 후퇴했다든가, 칸트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주체철학을 더욱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식의 평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독일 관념론은 칸트에게서 그 출발이 이루어졌다면, 헤겔에게서 그 완성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거장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철학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왔고 앞으로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독일 관념론, 특히 헤겔의 사변적 관념론은 난해하기로도 악명 높다. 오죽하면 브레히트는 헤겔의 <대논리학>을 “세계문학의 가장 위대한 희극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표현했을까? 이런 골치 아픈 철학을 논한다고 해서 누구 말대로 밥이 나오는 것도,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삶은 그런 물질적인 것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삶에는 인식하고, 사유하고, 성찰하고, 반성하는 삶, 곧 사변적인 철학적·형이상학적 삶도 있는 것이다. 독일 관념론, 특히 그 완성자인 헤겔의 사변적 관념론은 이런 삶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롭게 하는 정신적 유산이자 자양분이다.
도로텐슈타트 공동묘지에서 베를린 중앙역까지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이다. 헤겔의 묘지와 다른 여러 저명인사들의 묘지를 둘러볼 때 조금씩 흩뿌리던 눈발이 중앙역에 가까이 이르자 점차로 굵어지면서 세상이 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김덕영 사회학자·독일 카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