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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는 세계냉전체제가 한국서 폭발한 사실상 3차대전 / 박명림

이윤진이카루스 2013. 6. 25. 08:40

정치

국방·북한

“6·25는 세계냉전체제가 한국서 폭발한 사실상 3차대전”

등록 : 2013.06.24 20:44수정 : 2013.06.24 20:44

 

 

[박명림의 한국전쟁 깊이 읽기]
①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올해는 한국전쟁(6·25전쟁)이 멈춘 지 60년이 되는 해다. 종전 60돌을 맞아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한국전쟁의 의미를 깊이 있게 짚어보는 기고를 전쟁 발발일인 6월25일부터 매주 한 차례씩 8차례에 걸쳐 싣는다. 박 교수는 동서 분단과 냉전이라는 세계사적 맥락에서 한국전쟁이 갖는 의미와 60년째 이어지고 있는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기 위한 실천적 과제에 대해 천착할 계획이다.

1950년 6월25일부터 1953년 7월27일까지 한반도에서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거대한 전쟁이 있었다. 한국전쟁이었다. ‘은둔의 나라’로 알려졌던 동양의 한 작은 변방 국가는 이 전쟁을 계기로 갑자기 세계와 전면적으로 만났고,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나뉜 인류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모든 대륙과 중심 국가들이 연루된 세계이념전쟁을 치렀다. 세계의 자원과 관심들은 한국으로 집중됐고, 한반도에서의 나날의 사태 전개는 워싱턴과 모스크바, 도쿄와 베이징의 핵심사안의 하나가 되었다. 세계 언론들은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두 진영 간의 인류 최초의 전면적인 이념전쟁을 앞다투어 보도하기에 바빴다.

삼국통일·임진왜란·동학전쟁 등
한반도 패권변동 늘 국제문제로

2013년 우리는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맞는다. 오늘의 한국과 세계에게 이 전쟁은 도대체 무엇이었나? 우리는 왜 세기를 넘긴 아직도 이 전쟁에 대해 말해야 하나?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한국산 스마트폰과 전자제품, 반도체, 자동차의 물결을 보고 60년 전 한국에서의 비극적 사태를 떠올린다는 것은 전연 불가능하다. 뉴욕을 연상시키는 서울 강남의 거리에 전쟁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 한국청년들의 일상에서 전쟁의 상흔을 찾는 것 역시 연목구어에 가깝다. 전쟁은 이미 과거의 일이고 역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은 여전히 살아있는 현실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많은 병력이 가장 오랫동안 대치하고 있는 군사대결선인 휴전선은 바로 한국전쟁 정전의 산물일만큼 이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마주보며 대치하고 있는 남북한 군인들의 경계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휴전선이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통일을 이룰 가능성 역시 아직은 높지 않다. 정전60주년을 맞는 올해도 세계의 언론들은 북핵문제로 인한 제2의 한국전쟁의 가능성을 보도하기에 바빴고, 상대방의 무기개발과 군사훈련에 대한 서울과 평양의 곤두선 신경은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60년 전에 끝났으되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전후 두 세대를 지났음에도 전쟁이 놓은 근본질서가 엄존할 뿐만 아니라 전쟁재발의 가능성마저 운위되고 있는, 세계사적으로도 지극히 예외적인 기막힌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한국전쟁의 근본 성격과 의미, 기원과 전개, 영향과 유산, 극복과제에 대해 거듭 묻게 한다.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대체 이 거대사태가 무슨 전쟁인지를 물었다. 한국전쟁은 무엇을 위한 누구의 어떤 전쟁이었는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물음은 계속되었고, 그것은 지금에도 그러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한국전쟁은 분단된 두 한국을 하나로 합치기 위한 무력시도였다. 그 점에서 한국전쟁은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다. 분단이 없었다면 전쟁은 없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은 남북분단 때문에 도래한 것이었다. 분단이 곧 전쟁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장구한 단일민족국가의 역사를 고려할 때 한국민들에게 분단은 참을 수 없는 이질요소로 다가왔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선제공격과 침략을 개시한 북한의 김일성의 통일목표는 달성될 수 없었다. 전쟁은 통일을 위한 방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북한의 선제공격은 남한의 이승만에게도 통일을 위한 기회였다. 그러나 반격과 북진을 감행한 남한 역시 전쟁을 통한 통일목표는 달성될 수 없었다. 분단‘현실’과 통일‘이상’ 사이의 간극을 메워줄 방법은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전쟁이 아니었던 것이다.

목표로서의 통일과 귀결로서의 분단고착, 이 혹독한 역설처럼 한국전쟁의 본질과 성격을 드러내주는 것도 없다. 통일을 위한 한국인들의 시도가 전쟁으로 나타났을 때 그것은 왜 세계(인들)의 사태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 이 역설은 전쟁은 어떤 경우에도 통일을 위한 수단으로 선택되어선 안 된다는 당위명제의 정당성을 확인시켜주는 차원을 훨씬 넘는다. 이 역설은 한국전쟁을 넘어 한국문제의 근본 지반과 성격이 이 전쟁을 계기로 전면적으로 발현되었음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한국문제는 한국에서의 사태가 커질수록 전면화·국제화·세계화되는 특성을 보여 왔다. 특히 한국에서의 패권변동과 전쟁문제는 더더욱 그러하였다.

부분적으로 내전적 성격 있지만
한국전쟁 본질은 세계이념 전쟁

7세기의 삼국통일전쟁과 고구려의 멸망을 포함해 13세기 몽골의 조선과 일본침략, 16세기 일본의 조선침략과 제1차 동아시아국제전쟁(1592-1598), 19세기 동학농민전쟁과 청일개입 및 청일전쟁, 20세기 한국전쟁과 미국·중국 참전 및 미·중 대결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특징은 한반도 내에서의 통일 여부나 패권의 변동문제는 언제나 당대의 핵심적인 역내 지역문제이자 국제문제로 변전(變展)된다는 점이다. 이 점은 언제든 동아시아인이자 세계인으로 존재하고 생존했어야만 하는 한국민들이 감당해야 할 역사적 무게가 아닐 수 없다. 한국민들이 냉전시대 세계최대의 비극과 세계 최대의 피해를 감내하게 된 연유는 여기에 있었다.

역사적으로 한국문제는 단 한 번도 지역 및 국제질서와 유리되어 존재한 적이 없었다. 대륙과 해양, 중국과 일본 사이에 피할 수 없는 가교와 요충으로 존재하는 지정학적 위치가 결정적 요인이었다.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각각 중화체제, 동서조우, 일본제국주의, 냉전체제로 변전될 때 한국의 위상이 각각 조공국가, 부유(浮遊)국가, 식민국가, 분단국가로 정확히 조응했다는 점은 한국문제의 위상과 본질은 국제질서의 변천과 불가분하게 맞물려있다는 점을 증거한다.

친일-항일 가른 것도 제국주의
분단-전쟁 부른 것도 미·소 ‘제국’

게다가 동서조우와 냉전체제 도래 이후 한국문제는 전통적인 역내 중일패권경쟁을 넘어 서양과 동양,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미국과 소련의 세계적 대결구도의 전방초소로 변전되었다. 그 점에서 한국분단은 역사적인 동시에 세계구조적이었다. 남한은 동아시아에서 자본주의 진영의 전방초소국가였고, 북한은 사회주의 진영의 전방초소국가였다. 때문에 두 초소국가 남한과 북한의 두 분단국민은, 세계의 다른 오지나 변방의 국민들과는 달리, 당대의 세계질서와 세계 갈등구조, 즉 냉전체제를 가장 앞서서 담지하고 있는 전형적인 세계시민이었다.

따라서 세계 자본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의 분할선인 38선을 합치려는 시도는 어떤 경우에도 두 진영의 세계적 동아시아적 차원의 세력관계의 변동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시점에 등장한 한반도 분할(선)은, 전범국가 일본의 분단 대신에 등장한 동아시아분단(선)이었다는 본질에서 볼 수 있듯, 이미 단순한 민족분단(선)을 넘어 지역분단(선)이자 세계분단(선)의 성격을 내장하고 있었다. 38선과 한국분단이 갖는 이른바 동아시아 3중분단(선)의 성격이었다. 전후 한국에서의 전쟁은 출발부터 국제전쟁, 세계시민전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1945년 이후 두 분단국가의 등장과정을 고려할 때, 분할점령제안과 합의-공동 군대 진주-신탁통치 논쟁-미소 공동위원회-유엔결의의 과정에서 결코 포기한 적이 없는 남한과 북한을 미국과 소련,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상대 분단국가의 군사공격 한 번에 순순히 양보한다는 것은 국제정치의 본질상 상상할 수 없었다.

더욱이 한국전쟁은 냉전체제 시대에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합의한 경계선을 폭력적으로 제거한 뒤 상대진영의 일부를 장악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김일성-마오쩌둥-스탈린이 합의한 자본주의 진영으로의 공산진출을 방치할 경우 한국통일을 넘어 냉전체제의 근간이 도전받을 수 있는 공격이었다. 반대로 맥아더-이승만의 북한점령을 방치할 경우 전후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와 진영에 대한 미국의 진출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세계냉전체제의 한국에서의 폭발인 동시에 제한이었으며, 그로 인해 제3차 세계대전을 방지한 사실상의 제3차 세계대전의 성격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은 분명 한국인들이 한국인들을 공격한 전쟁이었다. 표면적으로 보아 내전, 또는 시민전쟁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맞는 말이다. 한국전쟁은 두 분단국가를 하나로 합치려는 내전적 성격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전쟁이 내전적 측면을 갖는다는 것이 곧 이 전쟁의 성격이 내전이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한국전쟁의 원인과 전개에 비추어 볼 때 한국전쟁은 내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역전쟁이자 국제전쟁이었으며, 20세기 세계사를 압축하여 대변한 세계시민전쟁이었다. 물론 이때 말하는 세계시민전쟁은 ‘세계적 시민전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시민적 전쟁’을 뜻한다. 그것은 남한과 북한, 이승만과 김일성으로 대표되는 세계적 체제전쟁이자 이념전쟁이며 진영전쟁이었던 것이다.

고전고대 시기부터 오랜 연원을 갖는 시민전쟁-내전(bellum civile)이라는 말은 원래 한 공동체 안에서 어느 쪽이 전체 사회를 대표할 것인지를 둘러싼 전쟁을 뜻한다. 문자 그대로 한 사회 내의 시민들 사이의 전쟁을 말한다. 처음 이 용어가 체계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영국 시민혁명 때부터였다.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 아니라 내부의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누가 영국사회를 대표할 것이냐 다투는 상황 때문이었다. 이처럼 내전 개념은 한 공동체가 내부로부터 분열되어서 어느 쪽이 한 공동체를 대표할 것이냐를 둘러싼 투쟁에 쓰이는 것이다. 전형적인 내전이랄 수 있는 영국내전과 미국의 남북전쟁을 비롯해 프랑스, 러시아, 스페인 등이 이에 해당된다. 중국혁명도 사실상 내전이라고 할 수 있다.

남침한 김일성도 반격한 이승만도
통일 노렸지만 전쟁으론 성취못해

그러나 근대세계체제 등장 이후 제3세계를 포함한 주변부 국가들에서 진행된 거대 전쟁 중에서 엄밀한 의미에서 내전은 거의 없었다. 이들 전쟁을 내전으로 보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중심부의 오리엔탈리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체제 등장 이후 제3세계 국민들이 서로 싸우게 된 기원은 거의 전부 제국과 제국주의에 의한 국가와 영토, 종족과 민족의 분할 때문이었다. 훗날 전쟁을 치르도록 한 민족을 협력세력과 저항세력으로 갈라놓은 것도 제국주의였다. 중동, 동남아, 아프리카의 많은 이념지도와 영토경계들은 제국의 이익과 논리를 따라 획정된 것인데, 토착민들이 이를 다시 합치거나 변경하려고 싸웠을 때 이를 내전이라고 하면 전혀 맞지 않는다. 제국주의가 설정한 영토적 이념적 군사적 분할선으로 인해 발생한 전쟁이 어떻게 내전이 되는가?

한국의 경우 친일과 항일을 갈라놓은 것도 제국주의였고, 전쟁의 기원을 이루는 영토분단과 분할점령도 미국의 제안과 소련의 동의 때문이었다. 전쟁에 사용된 무기도 미국과 소련 것이었다. 물론 전쟁의 결정도 김일성-마오쩌둥-스탈린의 국제적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 순수 내전이었다면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이토록 깊숙이 개입할 수는 없었다. 남한과 북한 방어를 위한 최종 결정과 힘의 근원도 미국 워싱턴과 일본 도쿄 및 소련 모스크바와 중국 베이징이었다. 전쟁 종결에 대한 궁극적 합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쟁의 기원부터 종결까지의 중요한 국면의 궁극적 결정 권한은 주로 국제적 요인과 주체였다.

6·25의 본질 냉정히 파악해야
화해·평화·통일의 길 갈수있어

분단과 전쟁으로의 도정에 대해 한국민들이 스스로를 철저히 반성하고 비판해야 한다는 점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주체적 역할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강조와, 전쟁이 내전이었다는 주장은 같은 차원이라고 할 수 없다. 지역문제이자 세계문제로서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주요 갈등의 계기엔 항상 국제화·세계화하는 한국문제이기 때문에, 오히려 주체적 반성과 지혜의 영역은 더욱 크고 절실하다.

크게 양보하더라도 한국전쟁은 ‘국제화한 내전’이라기보다는 ‘내전화한 국제전’ 또는 ‘내전화한 세계시민전쟁’에 가깝다. 한국전쟁이 세계시민전쟁이자 내전화한 국제전이었기 때문에 한국민들의 피해와 비극은 끝없이 커졌고 한국의 평화와 통일의 길은 아직도 멀리 있다. 정전 60주년을 맞아 우리는 분단과 전쟁에 대해 정녕 철저하게 비판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문제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이해에 바탕할 때 비로소 화해와 통일, 생명과 평화를 향한 지혜와 실천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 겸 베를린 자유대 초빙교수는…

박명림 교수는 한국전쟁, 한-미 관계, 해방 전후 한국정치 등의 분야에서 꾸준한 연구 성과를 쌓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학자다. 그가 1996년에 발표한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를 뛰어 넘은 명저로 꼽힌다. 1994년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99~2001년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협동연구학자를 지냈고, 2009년부터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동아시아협력센터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