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포퍼 원전+번역문

열린사회와 그 적들 제 10장 열린사회와 그 적들

이윤진이카루스 2010. 7. 31. 18:42

플라톤이 공격하는 배경

 

 

10 장: 열린사회와 그 적들

 

 

그는 우리의 본성을 회복시키고,

우리를 치유하고, 우리를 행복하고 복되게 하리라.

플라톤.

 

 

 

 

 

우리가 분석한 것에는 아직도 빠진 것이 있다. 플라톤의 정치강령이 순전히 전체주의적이라는 주장과, 6 장에서 제기된 이 주장에 대한 반론 때문에 우리는 이 강령 내부에서 정의(正義), 지혜, 진리, 그리고 아름다움 같은 도덕적 이념이 한 역할을 검토해야 했다. 이 검토의 결과는 항상 동일했다. 우리는 이 이념들의 역할이 중요했지만, 이 이념들로 플라톤이 전체주의와 인종주의를 초월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이념 중 하나를 우리는 아직도 검토해야 한다: 행복이라는 이념이다. 플라톤의 정치강령이 근본적으로 ‘모든 시민이 실제로 행복한 완벽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이었다는 믿음과 관련하여 우리가 크로스만(Crossman)을 말을 인용했다는 것과, 내가 이 믿음을 플라톤을 이상화하려는 경향의 잔재로 설명했다는 것이 기억날 것이다. 내 의견을 정당화하라는 요구를 받는다면, 나는 어렵지 않게 플라톤이 행복을 다루는 방식은 정의를 다스리는 방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지적하겠다; 그리고 특히 플라톤이 행복을 다루는 방식은 사회란 ‘본질적으로’ 계급과 신분제도로 나뉘어져 있다는 동일한 믿음에 기초한다는 것을 지적하겠다. 진정한 행복이란 정의에 의해서만, 즉 자신의 위치를 지킴으로써만 이룩된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통치자는 통치에서 행복을 발견해야 하고, 무사는 전쟁에서 행복을 발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노예는 노예역할에서 행복을 발견해야 한다고 추론할 것이다. 그것과는 별도로, 플라톤은 자기가 겨냥하는 것이 개인의 행복도 아니요 국가 속의 어떤 특정한 계급의 행복도 아니고, 단지 전체의 행복일 뿐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리고 전체의 행복이란 내가 특성상 전체주의적이라고 밝힌 정의(正義)의 지배의 결과일 뿐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 정의만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플라톤이 저술한 국가의 주요 주장의 하나이다.

이 모든 것을 고찰하면, 자신의 즉각적이고 실용적인 업무에서는 실패했지만, 자신이 증오했던 문명을 중지시키고 전복하기 위한 정치선전에서는 결국 매우 성공적이었던 플라톤을 전체주의적 정당 정치인으로 제시하는 것은 자료의 일관적이고도 논박의 여지가 없는 해석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해석과 관련하여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 있다는 느낌을 가지기 위해서는 문제를 이렇게 솔직한 방식으로 표현하기만 하면 된다. 아무튼, 내가 그 문제를 공식화했을 때 나는 그렇게 느꼈다. 나는 아마도 그 해석이 거짓이라기보다는 결점이 있으리라고 느꼈다. 그러므로 나는 이 해석을 반박할 증거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가지 점을 제외하고 모든 점에서, 내 해석을 반증하려는 이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새로운 자료는 플라톤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의 동질성을 한층 더 분명하게 밝혀주었을 따름이다.

내가 찾은 성공적인 반박의 한 가지 점은 플라톤이 독재체제(참주체제)를 증오한 것과 관련된다. 물론 이 점을 해명하고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있었다. 그가 참주체제를 비난한 것은 정치선전일 뿐이었다고 쉽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체주의는 자주 ‘진정한’ 자유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그래서 플라톤이 참주체제를 반대하여 자유를 기리는 것은 이 고백된 사랑과 똑같이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참주체제에 대한 그의 관찰 몇 가지가, 이 장 후반에 언급될 것인데, 성실한 것이라고 느꼈다. 물론, 플라톤의 시대에는 ‘참주체제’란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통치형태를 의미한다는 사실 때문에 플라톤의 참주체제에 대한 증오는 나의 당초 해석과 일치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나의 해석을 수정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느꼈다. 나는 또한 플라톤의 근본적인 성실성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이 수정작업을 이룩하기에는 완전히 불충분하다고 느꼈다. 아무리 강조한들 그림의 일반적인 인상이 상쇄되지는 않았다. 그리스 사회에 닥치고 있는 것을 전무후무하게 누구보다도 더 분명하게 관찰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병든 사회의 몸을 치료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임무를 성심껏 믿었던 플라톤을 포함할 새로운 그림이 필요했다. 플라톤주의와 전체주의의 동질성을 거부할 시도가 그림을 개선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결국 전체주의 자체에 대한 나의 해석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현대 전체주의에 관한 유추로서 플라톤을 이해하고자 했던 나의 노력은 놀랍게도 전체주의에 대한 나의 견해를 수정하도록 만들었다. 나의 노력은 내가 지닌 적대감을 수정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 노력으로 인하여 나는, 아무리 그 시도가 잘못 해석되었다고 할지라도, 고대의 전체주의 운동과 현대의 전체주의 운동의 힘이 그 운동들이 매우 현실적인 필요에 답하고자 애를 쓰는 사실에 의지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의 새로운 해석을 고찰하면, 플라톤이 국가와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자신의 희망을 선언한 것은 단순히 정치선전이 아닌 듯싶다. 나는 플라톤이 지니고 있던 근본적인 자비심을 기꺼이 인정하겠다. 나는 또한 자신의 행복 약속의 기틀을 세웠던 사회학적 분석에서 그가 제한적이나마 옳았다고 인정한다. 이 점을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나는 플라톤이, 깊은 사회학적 통찰력으로, 자신의 동시대인들이 심각한 충격을 겪고 있으며, 그리고 이 충격은 민주주의와 개인주의의 발흥으로 시작된 사회적 혁명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믿는다. 그는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뿌리 깊은 불행의 주원인인 사회적 변화와 사회적 불화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것들에 대항하여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가 지녔던 가장 강력한 동기 하나가 시민들에게 행복을 되찾아주려는 것이었음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이 장 후반에 논의된 이유들 때문에, 나는 그가 추천한 의술-정치적 처리방식인 변화의 정지와 종족주의로의 회귀는 절망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추천은, 치료법으로 실용적이지 않다할지라도, 플라톤의 진단 능력을 입증한다. 그 추천은, 그가 사람들을 종족주의로 이끌어감으로써 충격을 완화할 수 있고 사람들의 행복을 회복할 수 있다는 자신의 근본적인 주장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할지라도, 그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그 밑에서 고생을 하던 긴장과 불행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장에서는 나로 하여금 그런 의견을 갖도록 만들었던 역사자료를 간단하게 탐색하는 것이 나의 의도이다. 채택된 방식, 즉 역사적 해석의 방식에 대한 몇 가지 비평이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밝혀질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내가, 역사적 해석에 대한 검증은 평범한 가설에 대한 검증보다 엄격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방식에 대한 과학적 상태를 주장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충분할 것이다. 해석은 주로 관점이며, 그 가치는 그 풍요성에, 역사 자료를 밝히는, 우리에게 새로운 자료를 발견하도록 만드는, 그리고 그 새로운 자료를 합리화하고 통합하는 데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능력에 달려있다. 이곳에서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러므로, 아무리 내가 아마도 간혹 나의 의견을 과감하게 피력한다 할지라도, 독단적 주장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I

우리 서구문명은 그리스인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종족주의에서 인도주의로 발걸음을 옮긴 최초의 사람들로 보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자.

초기 그리스의 종족사회는 많은 점에서, 예를 들어 폴리네시아인이나 마오리인들의 사회를 닮았다. 작은 무사 집단이 보통 요새화된 정착지에 살면서 추장이나 왕 혹은 귀족가문의 지배를 받았는데 육지에서뿐만 아니라 해상에서도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그리스와 폴리네시아의 삶의 방식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는데, 그 이유는 당연히 종족주의는 다 같지 않기 때문이다. 표준화된 ‘종족적 삶의 방식’이란 없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라도 대부분의 이 종족사회에서 발견될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 듯싶다. 내가 의미하는 바는 사회생활의 관습에 대한 종족사회의 마술적, 즉 비이성적 자세와 이 관습이 지닌 상응하는 경직성이다.

사회관습에 대한 마술적 자세는 전에 논의되었다. 그 주요 요소는 사회생활의 관습적 규칙성과 ‘자연’에서 발견되는 규칙성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두 가지 규칙성이 초자연적 의지에 의하여 강화된다는 믿음과 흔히 병행한다. 사회관습의 경직성은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에 동일한 자세의 다른 면일 뿐이다. (이 면이 훨씬 더 원시적이며, 초자연적인 믿음은 일종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두려움을 합리화한 것이라고 - 우리가 매우 어린 아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두려움 - 믿을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내가 종족주의의 경직성에 대하여 말할 때 나는 종족적 생활방식에서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오히려 비교적 흔치않은 변화는 종교적 개종이나 급격한 감정변화의, 혹은 새로운 마술적 금기 도입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사회적 상황을 개선하려는 이성적 시도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다. 드문 그런 변화와는 별도로, 금기는 삶의 모든 면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지배한다. 그런 금기는 빠져나갈 구멍을 별로 남겨놓지 않는다. 이런 형태의 삶에는 문제가 거의 없고, 도덕적 문제와 실제로 대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종족의 한 구성원이 금기에 맞추어 행동하기 위해서 많은 영웅주의와 인내심이 필요하지 않다고 내가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의미하는 바는 그 구성원은 어떻게 자신이 행동해야 하는지 의심해보는 위치에 놓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올바른 행동은, 그 행동을 따르는 데 난제가 극복되어야 할지라도, 항상 결정되어 있다. 올바른 행동은 금기에 의하여, 비판적 고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마술적 종족적 제도에 의하여 결정되어 있다. 심지어 헤라클리투스도 종족적 생활의 제도적 법과 자연법칙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두 가지 법은 동일한 마술적 특색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집단적인 종족적 전통에 기초하여, 제도는 개인적 책임에 대한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다. 어떤 형태의 집단 책임을 설정하는 금기는 소위 개인적 책임의 선조일는지는 모르지만, 개인적 책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금기는 합리적인 책임성이라는 원칙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운명의 힘을 완화하는 생각과 같은 마술적 생각에 기초한다.

이것이 얼마나 많이 생존해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우리의 생활 방식도 아직 금기로 둘러싸여 있다; 음식 금기, 예절에 관한 금기, 그리고 다른 많은 금기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우리들의 삶의 방식 속에서, 한편으로는 국가의 법률과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준수하는 금기 사이에서, 자체의 문제 및 책임과 함께 개인적 결정을 항상 확대하는 분야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분야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개인의 결정은 금기를 변경시킬는지도 모르며, 심지어 더 이상 금기가 아닌 정치적 법규를 변경시킬는지도 모른다. 커다란 차이점은 이 문제를 이성적으로 성찰할 가능성이다. 이성적 성찰은 어떤 의미에서 헤라클리투스와 함께 시작된다. 알크메온(Alcmaeon), 팔레아스(Phaleas) 그리고 히포다무스(Hippodamus)와 함께, 헤로도투스(Herodotus)와 소피스트들과 함께, ‘최고의 정치체제’를 추구하는 것은, 점차, 이성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문제의 특성을 띄게 된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입법과 다른 제도적 변화가 가치가 있는지 혹은 가치가 없는지에 관해서 이성적 결정을 내린다; 다시 말해서, 가능한 결과를 평가한 데 기초하고 그 결과 몇 가지를 의식적으로 선호하는 데 기초한 결정. 우리는 이성적인 개인의 책임이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다.

다음에서, 마술적 즉, 종족적이거나 집단주의적 사회는 또한 닫힌사회라고 불릴 것이고 개인이 자신의 결정을 내리는 사회를 열린사회라고 불릴 것이다.

전성기의 닫힌사회는 응당 하나의 유기체에 비교될 수 있다. 소위 국가에 대한 유기체적 즉, 생물학적 이론은 상당한 정도로 유기체에 적용될 수 있다. 닫힌사회는 그 구성원이 반(半)생물학적 유대에 의하여 결속된 반(半)유기체적 단위 상태로 있는 무리나 종족을 닮았다 - 함께 살면서 공동으로 노력하고, 공동으로 위험을 분담하며, 공동으로 기쁨을 나누고 함께 고민하는 혈족관계. 닫힌사회는 아직도 구체적인 개인으로 구성된 구체적인 집단인데, 노동 분업이나 상품교환 같은 추상적 사교 관계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촉각, 후각 그리고 시각 같은 구체적 육체적 관계에 의하여 서로 연계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노예제도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할지라도, 노예의 존재가 가축화된 동물의 문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기체 이론을 열린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측면이 없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측면은, 열린사회에서는, 많은 사회인들이 사회적으로 위치가 높아져 다른 사회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를 쓰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예를 들어 계급투쟁과 같은 그런 중요한 사회적 현상을 야기할 수 있다. 우리는 유기체 안에서 계급투쟁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유기체의 세포나 조직은, 때때로 국가의 구성원과 일치한다고 일컬어지는데, 영양분을 얻기 위하여 경쟁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리 부분이 뇌가 되려고 한다거나 몸의 다른 부분이 복부가 되려고 하는 내재적 경향은 없다. 유기체 속에는 열린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와 일치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사회구성원 사이의 신분경쟁인 소위 국가에 대한 유기체 이론은 잘못된 유추에 기초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닫힌사회에는 그런 경향이 많지 않다. 그 사회의 신분제도를 포함하여, 그 제도는 신성불가침이다 - 금기이다. 유기체 이론은 여기서 그렇게 나쁘게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 유기체 이론을 적용하려는 대부분의 시도는 종족주의로 회귀하려는 정치선전의 숨겨진 형태라는 것을 발견한다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기체적 특성을 잃어버린 결과로, 열린사회는 점차 내가 ‘추상적 사회’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 될 것이다. 추상적 사회는, 상당한 정도까지, 인간으로 구성된 구체적이거나 실제적인 집단의 특징을, 혹은 그런 실제적 집단의 체계가 지닌 특징을 잃어버릴 것이다. 사람들이 별로 이해하지 못했던 이 요점은 과장을 사용하여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만나지 않는 - 모든 사업이 타이프된 편지나 전보로 통신하고 밀폐된 자동차를 타고 여러 곳을 다니는 - 격리된 개인들에 의하여 영위되는 사회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수정으로 인하여 개인적 요소 없이도 심지어 번식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한 가공의 사회는 ‘완전히 추상적이거나 비인간화된 사회’라고 불릴지도 모른다. 이제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가 많은 면에서 그렇게 완전히 추상적인 사회를 닮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밀폐된 자동차를 타고 항상 홀로 운전하는 것은 아니라할지라도 (그러나 거리에서 우리 앞을 걸어서 지나가는 수천 명의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친다) 결과는 마치 우리가 항상 혼자 운전하는 것처럼 동일하다 - 우리는 보통 우리와 함께 걸어가는 사람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 유사하게,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것은 겨우 조합원 신분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미지의 노동조합 위원장에게 조합비를 내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익명과 격리 속에서, 그리하여 결국 불행 속에서 사는, 친근한 개인적 접촉을 가지지 않거나 거의 가지지 않고 현대 사회에서 사는 많은 사람이 있다. 그 까닭은 사회가 추상적이 되었다할지라도, 인간의 생물학적 구성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추상적 사회에서 충족시킬 수 없는 사교적 욕구를 지니고 있다.

물론, 우리가 제시한 보기는 심지어 이런 형태로도 매우 과장되었다. 완전히 추상적이거나 심지어 우세하게 추상적인 사회는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고 존재할 수도 없다 - 완전하게 이성적이거나 심지어 우세하게 이성적인 사회도 그런 것처럼. 사람은 여전히 현실적 집단을 구성하고 모든 종류의 현실적인 사회적 접촉을 시작하며, 최선을 다하여 자신들의 정서적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현대 열린사회의 사회적 집단 대부분은 (몇 개의 운 좋은 가족 집단을 예외로 하고) 보잘것없는 대체물인데, 그 이유는 그 집단들이 공동의 삶을 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집단들이 전체적인 사회생활에서 어떤 기능도 발휘하지 못한다.

그 보기가 과장된 또 다른 방식은 이룩된 장점을 조금도 지금까지 담고 있지 않고 단점만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점이 있다. 새로운 종류의 인간관계는, 출생이라는 우연에 의하여 결정되는 대신에, 자유롭게 시작될 수 있는 곳에서 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과 동시에, 새로운 개인주의가 태어난다. 유사하게, 정신적 결속은 생물학적, 즉 육체적 결속이 약해진 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기타 등등. 이것이 어떠하든, 나는 우리가 제시한 보기가 보다 구체적인 사회집단과 대비하여 보다 추상적인 사회가 의미하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 보기는 우리의 현대적인 열린사회가 주로 교환이나 협력 같은 추상적 관계를 통하여 기능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줄 것이다. (경제 이론과 같은 현대 사회이론이 주로 관련되는 것은 이 추상적 관계의 분석이다. 이 점은 뒤르껭[Durkheim]과 같은 많은 사회학자에 의하여 이해되지 못했는데, 뒤르껭은 사회란 구체적 사회집단으로 분석되어야 한다는 독단적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언급된 것을 고찰하면, 닫힌사회에서 열린사회로의 이행은 분명히 인류가 통과한 가장 깊은 혁명의 하나로 기술될 수 있다. 우리가 닫힌 사회의 생물학적 특성으로 설명한 것 때문에, 이 이행은 정말로 깊이 느껴질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우리의 서구문명이 그리스인들로부터 출발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인들이 우리를 위하여 아직도 초기단계에 있는 듯한 위대한 혁명을 - 닫힌사회에서 열린사회로의 전환 -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ll

물론, 이 혁명은 의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스 닫힌사회의 종족주의 붕괴는 인구증가가 지주계급 사이에 느껴지기 시작하는 때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이것은 ‘유기체적’ 종족주의의 종말을 의미했다. 그 까닭은 종족주의의 종말이 지배계급의 닫힌사회 내부에 사회적 긴장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 문제의 ‘유기체적’ 해결책인 자매도시의 설립 같은 것이 나타났다. (이 해결책의 ‘유기체적’ 특성은 식민지 개척자를 내보내는 데 뒤따른 마술적 과정에 의하여 강화되었다.) 그러나 식민지 개척이라는 의식(儀式)은 종족주의 붕괴를 연장했을 따름이었다. 식민지 개척은 문화적 접촉을 야기하는 곳마다 새로운 위험지역을 만들어내기조차 했다; 그리고 이 위험지역들은 나중에 아마도 닫힌사회에 대한 최대의 위협인 것을 불러왔다 - 상업과, 무역 및 해운에 종사하는 신흥계급. 기원전 6세기 경, 이러한 상황은 옛 생활방식의 부분적 해체와 심지어 일련의 정치적 혁명 및 반동을 초래했다. 그리고 그 상황은 스파르타에서처럼 강제로 종족주의를 유지하고 고수하려는 시도뿐만 아니라, 저 위대한 정신적 혁명인 비판적 토론의 창안,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마술적 강박관념에서 놓여난 사고의 창안까지 낳았다. 동시에 우리는 새로운 불안의 최초 증상을 발견한다. 문명의 긴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긴장, 불안은 닫힌사회가 붕괴한 결과이다. 그것은 심지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느껴진다, 특히 사회변혁의 시대에. 그것은 개방적이고 부분적으로 추상적인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노력에 의하여 - 이성적이 되려는, 적어도 우리의 정서적 사회적 욕구 몇 가지를 포기하려는, 우리 자신을 돌보려는, 그리고 책임을 수용하려는 노력에 의하여 - 야기되는 긴장이다. 내가 믿는 바, 우리는 이 긴장을 지식의, 합리성의, 협력과 상호협조의,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생존 가능성의, 그리고 인구규모의 증가에 지불되어야 할 대가로서 감내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인도적이 되기 위하여 지불해야 할 대가이다.

그 긴장은 닫힌사회의 붕괴에 의하여 최초로 제기된 계급 사이의 갈등이라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닫힌사회 자체에는 이런 문제가 없다. 적어도 닫힌사회의 지배계급에게는, 노예제도나 신분제도 그리고 계급 통치는 문제시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연스럽다’. 그러나 닫힌사회의 붕괴와 함께 이 확고함은 모든 안전감과 함께 사라진다. 종족적 공동체는 (그리고 나중에 ‘도시’는) 종족의 구성원에게는 안전한 장소이다. 적에 의하여 그리고 위협적이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마술적 힘에 둘러싸여서, 아이가 자신의 정해진 역할을 하는 가족과 가정을 경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종족적 공동체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가 잘 알고 잘하는 역할. 닫힌사회의 붕괴는, 계급문제와 사회적 신분에 관한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할지라도, 심각한 가정불화와 가정해체가 자녀들에게 미치기 쉬운 동일한 결과를 시민들에게 미쳤음이 틀림없다. 물론, 이런 종류의 긴장을 전에 억압을 당하던 사람들이 느끼던 것보다 위협을 당하던 특권층이 더 강하게 느꼈다; 그러나 심지어 전에 억압을 당하던 사람들도 불안했다. 그들 또한 자신들의 ‘자연스러운’ 세상이 붕괴됨으로써 경악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투쟁을 계속했지만, 그들은 전통, 기존질서(status quo), 높은 수준의 교육, 그리고 천부적 권위감정에 의하여 지지를 받던 자신들의 계급적 적(敵)에게서 쟁취한 승리를 이용하기를 자주 주저했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스파르타와 주도적 민주국가인 아테네의 역사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스파르타는 이 발전을 막는데 성공했다.

아마도 닫힌사회가 붕괴한 가장 강력한 원인은 해상교통과 상업의 발달이었을 것이다. 다른 종족과 긴밀하게 접촉하면 자신의 종족적 제도를 대하는 필연적 감정이 해를 입기 쉽다; 그리고 무역과 상업적 창업은 개인적 사업과 독립이, 심지어 종족주의가 아직도 만연한 사회에서도, 자체의 능력을 드러내는 드문 형태 하나로 보인다. 해운과 상업, 이 두 가지 업종은 아테네의 제국주의가 5세기에 발달할 때 주요 특징이 되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 직업은 아테네의 과두정치 독재자들, 특권층 혹은 이전 특권층에 의하여 가장 위험한 상황으로 인식되었다. 그들에게는 아테네의 무역, 아테네의 화폐를 통한 중상주의(重商主義: commercialism), 아테네의 해군정책, 그리고 아테네의 민주주의적 추이가 단 한 가지 운동의 부분임이 분명했고 악의 근원을 파헤쳐 해군정책과 제국을 파괴하지 않고는 민주주의를 패퇴시키는 것이 분명히 불가능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해군정책은 아테네의 항구를 중심으로 시행되었는데, 특히 상업의 중심지이자 민주주의 정당의 요새인 피라에우스(Piraeus)가 중심지였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아테네를 요새화한 성벽이, 나중에는 아테네를 피라에우스와 팔레룸(Phalerum) 항구와 연결한 장성(長城: Long Walls)이 중심이었다. 따라서 1세기 이상 동안 제국, 함대, 항구, 그리고 성벽이 아테네의 과두정치 정당에 의하여 민주주의의 상징으로서 그리고 그들이 언젠가는 파괴하기를 희망하는 민주주의의 힘의 근원으로서 증오의 대상이 됨을 우리는 발견한다.

이러한 상황전개에 대한 많은 증거가 투키디데스(Thucydides)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더 정확하게 말해서 기원전 431-421과 419-403년 걸쳐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스파르타의가 통제하는 과두 정치적 종족주의 사이에 벌어진 두 차례의 대전(大戰)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투키디데스를 읽을 때 우리는 그가 자신의 모국인 아테네의 편을 들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분명히 전쟁 동안 적과 내통한 아테네의 과두정치가 무리의 급진파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과두정당의 당원임이었으며 자신을 추방했던 아테네 시민들의 친구도 아니요 아테네의 제국주의 정책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나에게는 아마도 가장 위대한 역사가인 투키디데스를 폄하할 의도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자신이 기록한 사실을 확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할지라도, 그리고 공정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아무리 신실하다할지라도, 그의 비평과 도덕적 판단은 해석, 즉 관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의 견해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나는 우선 펠로폰네소스 전쟁 반세기 전인 기원전 482년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의 정책을 기술하는 글로부터 인용한다: ‘테미스토클레스 또한 아테네인들에게 피라에우스 항구를 완성하라고 설득했다... 아테네인들이 바다로 진출했기 때문에, 그는 아테네인들이 제국을 건설할 커다란 기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테네인들이 바다를 활동영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감히 말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20년후, ‘아테네인들은 바다를 향하여 장성(長城)을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하나는 발레룸 항구로, 다른 하나는 피라에우스로’.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26년 전인 이때, 과두정치 정당은 이 상황전개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는 투키디데스로부터 과두 정치가들이 심지어 가장 파렴치한 배신행위도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는 말을 듣는다. 과두정치 독재자들에게 간혹 발생하는 것처럼, 계급이익이 그들의 애국심을 앗아갔다. 아테네 북쪽에서 적대적인 스파르타의 원정군이 작전을 펼칠 때 기회는 왔고 과두정치 독재자들은 자신의 조국을 배반하여 스파르타와 공모하기로 결심했다. 투키디데스는 이렇게 썼다: ‘몇 명의 아테네인들이 은밀하게 그들에게 (다시 말해서 스파르타인들에게) 회담을 제의하고 있었다’ ‘민주주의와 장성의 건설을 종식시키려는 희망으로. 그러나 다른 아테네인들은...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그들의 기도를 의심했다.’ 그러므로 충성스러운 아테네시민들을 스파르타인들을 대적하러 나갔으나 패배 당했다. 그러나 아테네시민들은 적을 충분히 약화시켜 적이 아테네 내부의 동조세력과 힘을 합치는 것을 막았다. 몇 개월 뒤, 장성(長城)은 완공되었고 그것은 아테네의 민주주의란 그 해군력의 우세를 유지한다면 안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사건은 심지어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26년 전에도 아테네에서 계급 상황이 경직되어있음을 보여주는데, 전쟁 동안 상황이 훨씬 악화되었다. 그 사건은 또한 체제 전복적이고 친(親)스파르타적인 과두정치 정당이 이용한 방법을 밝혀준다. 사람들이 주목해야 하는 바, 투키디데스는 그들의 배신행위를 단지 진술 중에 언급할 따름이며, 다른 장소에선 가장 강력하게 계급 갈등과 파당 정신을 비판할지라도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인용된 다음 글은, 기원전 427년의 코르키라(Corcyra) 혁명에 대한 일반적인 회상으로 쓰였는데, 우선 계급상황에 대한 탁월한 보기로서, 두 번째로는 투키디데스가 코르키라의 민주주의자 편에서 발생했던 동일한 경향을 설명하고자 할 때 찾을 수 있었던 강력한 언어의 예시로서, 흥미롭다. (그에게는 공평성이 없다는 것을 판단하기 위하여 우리는 전쟁 초기에 코르키라는 아테네의 민주주의 동맹의 일원이었으며 폭동은 과두 독재자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게다가, 그 글은 전체적인 사회적 붕괴에 대한 느낌을 탁월하게 표현한 것이다: ‘거의 전체 그리스 세계가 동요하고 있었다. 모든 도시에서 민주주의 정당과 과두정치 정당의 지도자들은, 전자는 아테네인들을 후자는 스파르타인들을 불러들이려고 열심히 애를 쓰고 있었다.. 정당의 결속은 피의 결속보다 강했다.. 양편의 지도자들은 허울 좋은 말만 사용했는데, 민주주의 정당 지도자들은 다수의 헌법적 평등을 지지한다고 선언하고 과두정치 정당 지도자들은 귀족들의 지혜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그들은, 물론 거기에 헌신한다고 공언하면서, 공공의 이익을 자신들의 가치로 만들었다. 그들은 서로를 이기려고 상상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였으며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다... 이 혁명은 그리스에서 모든 형태의 사악함을 야기했다... 모든 곳에서 배신적 적대감을 지닌 자세가 만연했다. 적들과 의견일치를 이룰 충분히 구속력이 있는 약속도 지독한 맹세도 없었다. 각자는 아무것도 안전하지 않다는 강한 신념만 지니고 있었다.’ 아테네의 과두 독재자들이 스파르타의 도움을 수용하여 장성(長城) 건설을 중단시키려던 시도의 완전한 의미는, 한 세기 이상이 지난 후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Politics)을 썼을 때 우리는 이 배신적 자세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정확하게 측정될 수 있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과두 독재자들의 맹세에 대하여 듣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기를 그 맹세는 ‘이제 유행이다’. 그 맹세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민중의 적이 될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민중에게 나쁜 충고를 주려고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한다!’ 우리는 이 자세를 이해하지 않고는 이 시기를 분명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위에서 투키디데스 자신이 반(反)민주주의자라고 언급했다. 이것은 우리가 아테네제국을 그가 기술한 것과, 그 제국이 다양한 그리스 국가에 의하여 증오의 대상이 된 방식을 고찰할 때 분명해진다. 그는 아테네의 제국 통치는 독재보다 결코 낫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어서 모든 그리스 종족이 아테네를 두려워했다고 말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여론을 기술하면서, 그는 스파르타를 미온적으로 비판하고 아테네의 제국주의는 혹평한다. ‘민족들의 일반적인 감정은 강력하게 스파르타의 편이었다; 그 이유는 스파르타인들이 그리스의 해방자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도시와 개개인은 스파르타인들을 열심히 도왔다.., 그리고 아테네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분노는 강렬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테네로부터 해방되기를 갈망했고 다른 사람들은 아테네의 지배하에 놓이는 것을 두려워했다.’ 아테네 제국에 대한 이런 판결은 다소 ‘역사’의 공식적 판결, 다시 말해서 역사가 대부분의 공식적 판결이 되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철학자들이 플라톤의 관점에서 자신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어려운 것과 꼭 마찬가지로, 역사가들은 투키디데스의 관점에 묶여있다. 보기로서 나는 이 기간의 독일 최고 권위자인 마이어(Meyer)의 말을 인용하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투키디데스의 말을 반복할 따름이다: ‘교육을 받은 그리스인들의 심정은 .. 아테네에서 돌아섰다.’

그러나 그런 진술은 반(反)민주주의적 관점의 표현일 뿐이다. 투키디데스에 의하여 기록된 많은 사실들은 - 예를 들어, 민주주의 정당과 과두정치 정당의 지도자의 자세를 기술하는 인용된 글은 - 스파르타가 그리스 민족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과두 독재자들 사이에서만 ‘인기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이어가 멋지게 표현한 바와 같이 ‘교육받은 자들’ 사이에서. 심지어 마이어도 ‘민주주의적 정신을 가진 대중들은 많은 장소에서 그 승리를 기원했다’, 다시 말해서 아테네의 승리를 기원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투키디데스의 설명에는 민주주의자들과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테네의 인기를 증명하는 많은 사례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누가 교육을 받지 못한 대중의 의견에 신경을 쓰는가? 투키디데스와 ‘교육을 받은 자들’이 아테네가 폭군이었다고 주장하면, 아테네는 폭군이었다.

세계적 제국의 기초인 로마의 업적에 대하여 로마를 환영하는 동일한 역사가가, 더 나은 것을 이룩하려는 아테네의 노력에 대하여 아테네를 비난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아테네가 실패한 곳에서 로마가 성공했다는 사실은 이런 자세를 충분하게 설명하는 것이 못된다. 그들은 아테네의 노력이 성공했을 가능성도 있었다는 바로 그 생각을 증오하기 때문에, 아테네의 실패로 인해서 아테네를 실제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믿기에, 아테네는 무자비한 민주주의로, 교육받은 사람을 증오하고 억압하여 그들에 의하여 반대로 증오의 대상이 되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의하여 통치되는 장소였다. 그러나 이 관점은 - 민주주의적인 아테네의 문화적 무자비라는 신화는 - 알려진 사실을 망치고, 무엇보다도 이 특정시기의 경이적인 아테네의 정신적 생산성을 헛되게 만든다. 심지어 마이어도 이 생산성을 인정한다. ‘이 10년 동안에 아테네가 생산한 것은 독일문학의 황금기 수십 년 중의 10년과 동일하다’라고 그는 특별히 겸손하게 말한다. 페리클레스(Pericles)는 당시 아테네의 민주주의 지도자였는데 아테네를 ‘그리스 세계의 학교’라고 불러 더욱 정당하게 표현했다.

나는 아테네가 제국을 건설하면서 했던 모든 일을 옹호하는 것은 결코 아니어서, 나는 (그런 일이 있었다면) 부당한 공격이나 잔혹행위를 물론 옹호하고 싶지 않다; 또한 나는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여전히 노예제도를 근간으로 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종족적 배타성이나 자급자족은 어떤 형태의 제국주의에 의해서만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아테네에 의하여 도입된 몇 가지 제국주의적 행위는 다소 자유로웠다고 언급되어야 한다.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사례는 아테네가 기원전 405년에 자신의 동맹국인 이오니아 군도의 사모스(Samos)에게 ‘사모스인들은 지금부터 아테네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두 도시는 한 국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모스인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국내문제를 처리해야 하며 자신의 법률을 유지해야 한다’고 제의했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사례는 아테네가 자신의 제국에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이다. 이 세금이나 조공(租貢)에 대하여 많을 말이 있었지만, 보다 작은 도시들을 수탈하는 파렴치하고 폭압적인 방식이라고 매우 부당하게 설명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이 세금의 의미를 평가하려는 시도로, 우리는 물론 그 세금을 아테네의 함대에 의하여 보답으로 보호된 무역량을 비교해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정보는 투키디데스가 전하는데, 우리는 그로부터 아테네인들은 기원전 413년에 ‘바다를 통하여 수입되고 수출되는 모든 상품에 조공을 대신해서 5%의 세금’을 부과하였으며, ‘그리고 그들은 이것이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조치는 전쟁이라는 심각한 긴장 하에서 채택되었는데, 내가 믿기에 로마의 중앙집권화와 비교해도 유리하다. 아테네인들은 이 세제로 무역 동맹체 개발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의 제국에 속한 다양한 국가들의 창의력과 독립에 관심을 보였다. 당초에는, 아테네 제국이 평등 동맹으로 발전하였다. 아테네 시민 몇몇에 의하여 공개적으로 비판된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리시스트라타[Lysistrata]를 참조하라) 아테네의 일시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무역발전에 대한 아테네의 관심은 조만간 연방 체제를 야기했을 개연성이 있다. 적어도, 우리가 알기에 아테네의 경우에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지배도시로 문화재를 ‘옮기는’, 다시 말해서 로마식 약탈 방식은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금권정치에 반대하여 무슨 말을 할지라도, 금권정치는 약탈자들의 통치보다는 낫다.

아테네식 제국주의에 대한 이 호평은 외교문제를 다루는 스파르타식 수법과 아테네 제국주의를 비교함으로써 옹호될 수 있다. 스파르타의 외교수법은 스파르타의 정책을 지배한 궁극적 목표에 의하여, 모든 변화를 중지하고 종족주의로 회귀하려는 정책적 기도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이것은 내가 나중에 주장하는 바와 같이 불가능하다. 순수성이란 한번 잃어버리면 회복될 수가 없고, 인위적으로 중단된 폐쇄사회 혹은 가꾸어진 종족주의는 진품 종족주의와 동일할 수가 없다.) 스파르타의 정책 원칙은 이렇다. (1) 자국의 통제된 종족주의 보호: 종족적 금기의 경직성을 위협할 모든 외국의 영향을 차단하라. - (2) 반(反)인도주의: 더욱 특별히, 모든 평등주의적, 민주주의적, 그리고 개인주의적 이념을 차단하라. - (3) 자급자족: 무역을 하지 말라. - (4) 반(反)보편주의 혹은 배타주의: 당신의 종족과 모든 다른 종족 사이의 차별성을 유지하라; 열등한 종족과 섞이지 말라. - (5) 지배: 당신의 이웃을 지배하여 노예로 만들라. - (6) 그러나 너무 비대한 국가가 되지 말라: ‘도시는 오직 자신의 통합을 해치지 않고 성장하여야 한다’, 그리고 특히 보편주의적 경향을 도입하는 위험 없이. - 우리가 이 여섯 가지 주요 경향을 현대 전체주의의 주요 경향과 비교하면, 우리는 그 경향들이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것을 아는데, 마지막 경향만 유일하게 예외이다. 그 차이점은 현대 전체주의는 제국주의적 경향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고 말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제국주의에는 관용적인 보편주의의 요소가 없고, 현대 전체주의의 세계적 야망은, 말하자면, 현대 전체주의자의 의지에 반하여 자신에게 부과된 것이다. 이 현상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첫 번째 요인은 국가를 (혹은 국민을) 적으로부터 구함으로써 자신의 존립을 정당화하려는 모든 독재체제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 옛 적들이 성공적으로 제압될 때마다, 새로운 적들을 틀림없이 만들어 내는 경향. 두 번째 요인은 밀접하게 연계된 전체주의적 강령 (2)와 (5)를 실행하려는 시도이다. 인도주의는, 강령 (2)에 따라 배척되어야 하는데, 보편적이 되어버려서 국내에서 인도주의와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해서 전 세계에 걸쳐서 파괴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매우 작아져서 모든 사람이 이제는 이웃이므로 강령 (5)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을 지배하고 노예화해야 한다. 그러나 고대에는, 스파르타의 배타주의와 같은 배타주의를 채택한 사람들에게 아테네의 제국주의와 그 제국주의가 지닌 그리스 도시들이 연방으로 발전하려는, 심지어 혹시 인류의 보편적 제국으로 발전하려는 내재적 경향보다 더 위협적으로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의 분석을 요약하면, 우리는 그리스의 종족주의 붕괴와 동시에 시작된 정치적 및 정신적 혁명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발과 함께 기원전 5세기에 정점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혁명은 격렬한 계급전쟁과, 동시에, 그리스의 두 주도적 도시 사이의 전쟁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III

그러나 투키디데스 같은 뛰어난 아테네인들이 이 새로운 상황전개에 대항하는 반동의 편에 섰던 것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믿기에 계급이익으로는 설명이 불충분하다; 그 까닭은 우리가 설명해야 하는 것은, 야망에 찬 많은 젊은 귀족들이 항상 신뢰할만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민주주의 정당의 당원이 되었지만, 가장 사려 깊고 재능을 지닌 사람들 몇몇은 이 유혹을 물리쳤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요점은, 열린사회가 이미 존재했지만, 실제로 열린사회가 새로운 가치인 새로운 평등주의적인 삶의 기준을 개발하기 시작했지만, 특히 ‘교육받은 자들’에게는 여전히 빠진 것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열린사회의 새로운 신념이자 열린사회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신념인 인도주의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아직 공식화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당분간, 사람들은 계급전쟁, 과두정치의 반동에 대한 민주주의자들의 두려움, 그리고 향후 혁명전개의 위협보다 훨씬 더 많이 볼 수는 없었다. 이러한 상황 전개에 대항하는 반동은 그러므로 많은 것을 자신의 편에 두고 있었다 - 전통, 옛 미덕을 옹호하라는 요구, 그리고 옛 종교. 이러한 경향들은 대부분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해서 그 인기는, 스파르타인들과 그들의 과두정치 독재자 친구들에 의하여 지휘되고 그 사람들의 목적을 위하여 이용되었다할지라도, 책임감이 있는 사람들이 심지어 아테네에서도 대거 참가해야 했던 사회운동을 야기했다. 그 사회운동의 구호, ‘우리 선조의 나라로 돌아가라’, 혹은 ‘옛날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가라’로부터 ‘애국자’라는 말이 유래한다. 이 ‘애국적’ 운동을 지지했던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던 신념이, 민주주의자에 대항하여 지원을 얻으려는 희망으로 자신의 도시를 적에게 넘기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았던 저 과두정치 독재자들에 의하여 악랄하게 악용되었다는 것은 주장할 필요도 없다. 투키디데스는 ‘아버지 국가’를 위한 이 운동의 대표적 지도자 한 명이었고, 그가 아마도 극단적인 반(反)민주주의자의 배신적 행위를 지지하지는 않았다할지라도 그들의 근본적인 목표에 대한 그의 공감을 숨길 수는 없었다 - 사회적 변화를 중단시키고, 아테네 민주주의의 제국주의와 아테네 힘의 도구이자 상징인 해군, 성벽, 그리고 상업과 싸우려는 목표. (상업에 관한 플라톤의 원칙을 고찰하면, 중상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주시하는 것이 재미있을 것이다.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 왕 리산더[Lysander]는 아테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엄청난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했을 때, 스파르타의 ‘애국자들’ 다시 말해서 ‘조국’을 위한 운동회원들은 금[金]수입을 막고자 했다; 그리고 결국 수용되었지만, 금 소유는 국가에 국한되었고, 보석을 지니고 있는 것이 발각된 시민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플라톤이 쓴 법률에는, 매우 유사한 조치가 옹호된다).

‘애국적’ 운동이 부분적으로 보다 안정된 삶의 형태로, 종교, 품위, 법과 질서로 회귀하고자 하는 갈망의 표현이었다 할지라도, 그 자체는 도덕적으로 부패했다. 그 운동의 옛 신념은 실종되었고, 종교적 감정은 주로 위선적이고 심지어 냉소적으로 이용되었다. 허무주의는, 플라톤이 칼리클레스(Callicles)와 트라시마쿠스(Thrasymachus)의 초상을 그릴 때처럼, 기회가 주어진다면 민주주의 정당의 지도자가 되었을 젊은 ‘애국자인’ 귀족들 사이에서 발견될 수 있었다. 이 허무주의를 가장 분명하게 주창한 사람은 아마도 아테네에 치명타를 가하는 데 일조했으며 30인의 참주 지도자였던 플라톤의 삼촌 크리티아스(Critias)였다.

그러나 이때에, 투키디데스가 속했던 동일한 세대 안에서 이성과 자유 그리고 모든 인간의 형제애에 대한 새로운 신념이 나타났다 - 새로운 신념이자, 내가 믿는 바 열린사회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신념.

IV

인류의 역사에서 전환점을 그은 이 세대를 나는 위대한 세대(Great Generation)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것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바로 전, 그리고 그 전쟁 동안에 아테네에 살던 세대이다. 그들 사이에는 소포클레스(Sophocles)나 투키디데스 같은 위대한 보수주의자가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전환기를 대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에우리피데스(Euripides)처럼 동요하던 자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처럼 회의적인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위대한 지도자인 페리클레스(Pericles) 또한 있었는데, 그는 법 앞에서의 평등과 정치적 개인주의 원칙을 공식화했고, 헤로도투스(Herodotus)는 페리클레스가 이끌던 아테네에서 이 원칙들을 기린 작품의 저자로서 환영을 받았고 성원을 받았다. 압데라(Abdera) 태생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는 아테네에서 영향력을 갖게 되었고 그의 동포인 데모크리투스(Democritus) 또한 위대한 세대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들은 언어, 관습, 그리고 법에 관한 인간의 제도는 금기의 마술적 특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이고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적인 것이라는 원리를, 그것들에게 우리가 책임을 진다고 동시에 주장하면서, 공식화했다. 그 다음에는 고르기아스 학파가 있었다 - 알키다마스(Alcidamas), 리코프론(Lycophron) 그리고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로 그들은 반(反)노예제도, 이성적 보호주의, 그리고 반(反)민족주의에 관한 근본적인 원칙, 다시 말해서 인간의 보편적 제국에 대한 신조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위대한 사람인 소크라테스가 있었는데, 그는 인간의 이성을 신뢰해야 하지만 동시에 독단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을 가르쳤다; 이론과 이성 불신을, 그리고 지혜를 우상으로 만드는 사람들의 마술적 자세를 피해야 한다는 교훈; 다시 말해서 과학의 정신은 비판이라고 가르쳤던 사람.

지금까지 나는 페리클레스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지 않았고, 데모크리투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새로운 신념을 예시하기 위하여 그들 자신의 말을 조금 사용하겠다. 우선 데모크리투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올바른 것에 대한 느낌 때문에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미덕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을 존경하는 데 놓여있다...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의 작은 우주이다... 우리는 불의를 당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훌륭하다는 것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잘못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훌륭한 행동이지 말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빈곤은, 자유가 노예상태보다 나은 것과 마찬가지로, 귀족정치나 전제정치에서 생겨난다고 주장되는 번영보다 낫다... 현명한 사람은 모든 나라에 속하는데, 그 까닭은 위대한 영혼의 집은 전 세계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과학자의 이 말은 또한 그로부터 유래한다: ‘나는 페르시아의 왕이 되느니 단 하나의 인과법칙을 발견하겠다!’

인도주의와 보편주의를 강조하면서 데모크리투스의 이 말들은, 플라톤보다 앞선 시대에 나왔다할지라도, 마치 플라톤을 겨냥한 것처럼 들린다. 동일한 인상이, 훨씬 더 강력하게, 적어도 플라톤의 국가가 쓰이기 반세기 전에 행해진 페리클레스의 유명한 추모연설에서 전해진다. 나는 평등주의를 논의하면서 6 장에서 이 연설문에서 두 문장을 인용했지만, 그 정신을 보다 명백하게 각인하기 위하여 몇 구절을 더 완전하게 여기에서 인용하겠다. ‘우리의 정치제도는 다른 곳에서 실행되는 제도와 경쟁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이웃을 모방하지 않고 본보기가 되려고 힘쓴다. 우리의 행정은 소수 대신에 다수를 선호한다: 이것이 우리 행정이 민주주의로 불리는 이유이다. 법률은 개인적 분쟁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정의를 제공하지만 우리는 우수한 주장을 무시하지 않는다. 시민이 뛰어나면 다른 사람에 앞서 국가를 위하여 일하도록 요청 받지만 특권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장점에 대한 보상으로서 그러하다; 그리고 빈곤은 장애물이 아니다... 우리가 향유하는 자유는 또한 일상생활에까지 확대된다; 우리는 서로를 의심하지 않고, 이웃 사람이 자신의 길을 가기로 결정한다고 그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자유는 우리를 무법자로 만들지 않는다. 우리는 판사와 법을 존중할 것을 배우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그 강제력이 올바른 것에 대한 보편적 감정에만 존재하는 불문법을 준수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우리의 도시는 세계를 향하여 열려있다; 우리는 외국인을 추방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산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어떤 위험에도 대처할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는 환상에 빠지지 않고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비록 우리는 지능을 향상시키고자 노력할지라도, 이것이 우리의 의지를 약화시키지는 못한다... 자신의 가난을 인정하면 우리들에게 불명예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을 모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을 수치스럽다고 여긴다. 아테네 시민은 자신의 개인적인 사업을 돌볼 때도 공공의 일을 무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국가에 흥미를 갖지 않는 사람을 해롭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쓸모가 없다고 여긴다; 그리고 소수만이 정책을 발의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 정책을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토론을 정치적 행동의 방식에서 장애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현명하게 행동하는 데 필수적인 예비과정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행복이란 자유의 열매이고 자유는 용기의 열매라고 믿으며, 우리는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위축되지 않는다... 요약컨대, 나는 아테네가 그리스의 학교라고 주장하며, 아테네의 개개인은 성장하여 행복한 다재다능,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 그리고 자립성을 개발할 것을 주장한다.’

이 말들은 단순히 아테네에 대한 찬사가 아니다; 그 말들은 위대한 세대의 진정한 정신을 대변한다. 그 말들은 위대한 평등주의적 개인주의자의, 민주주의란 ‘국민이 통치해야 한다’는 무의미한 원칙으로 끝날 수 없고 이성에 대한 믿음과 인도주의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을 잘 이해하는 민주주의자의, 정치강령을 공식화한다. 동시에, 그 말들은 진정한 애국심의, 본보기를 세우는 것을 임무로 했던 도시 속의 자존심의, 표현이다; 그리스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과거와 미래 수 천 년 동안 인류의 학교가 되었던.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강령뿐만이 아니고 방어이자 아마도 심지어 공격이다. 그 연설은 내가 이미 암시한 바와 같이, 플라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읽힌다. 나는 그 연설이 스파르타의 통제된 종족주의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는 전체주의적 파당이나 ‘연줄’을 겨냥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조국을 위한 운동, 아테네의 ‘라코니아(Laconia) 동지협회’ (Th. Gomperz가 1902년에 그렇게 불렀다)를 겨냥했다는 것을. 그 연설은 이런 종류의 운동에 반대하여 행하여진 최초의 연설인 동시에 아마도 가장 강력한 언급이다. 그 연설의 중요성을 플라톤은 느꼈고, 플라톤은 반세기 후 메네크세누스 혹은 추도 연설(Menexenus or the Funeral Oration)이라고 불리는 대화편인 위장된 풍자시에서뿐만 아니라 그가 민주주의를 공격한 국가의 글에서 페리클레스의 연설을 희화적으로 그렸다. 그러나 페리클레스가 공격했던 라코니아의 동지들은 플라톤을 훨씬 앞서서 보복을 했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있은 지 겨우 5, 6년이 지나서 지금은 보통 ‘구(舊) 과두 독재자’라고 불리는 익명의 저자 (아마도 크리티아스)에 의하여 아테네의 정치체제에 관한 소책자가 발간되었다. 정치이론에 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논문인 이 교묘한 소책자는, 동시에 아마도 인류의 지적(知的) 지도자에 의하여 인류가 유기 되는 데 대한 가장 오래된 기념비이다. 그 소책자는 의심할 바 없이 아테네 최고의 두뇌 한 명에 의하여 기록된 아테네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이다. 그 핵심 사상은, 투키디데스와 플라톤의 신조가 된 사상으로, 해군제국과 민주주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 핵심 사상은 두 개의 세계, 즉 민주주의 세계와 과두정치제도 사이의 갈등에는 화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외부(스파르타인)로부터 오는 동맹국들의 간섭을 포함하여, 무자비한 폭력과 싹쓸이 조치만을 사용하여 부정(不淨)한 자유의 지배를 종식할 수 있다는 것을. 이 괄목할만한 소책자는, 우리 시대까지 동일한 주제를 다소 공개적으로 혹은 은밀히 반복할 정치 철학에 관한 실제로 무한한 연속 작품의 최초가 되었다. 인류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미지의 미래 속으로 향하는 험난한 길을 따라 인류를 도우려는 마음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이, 몇몇 ‘교육받은 자들’은 인류를 돌려세워 과거로 향하게 만들려고 애를 썼다. 새로운 길로 이끌 능력이 없어, 그들은 스스로를 자유에 대항하는 지속적인 반란의 지도자로 만들 수 있었을 따름이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면) 인간 혐오자이자 이론 혐오자이었기 때문에 평등에 저항하여 싸움으로써 자신들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이 그만큼 더 필요해졌다 - 인간에게 신뢰를, 그리고 인간의 이성과 자유에 신뢰를 불어넣는 간단하고도 평범한 아량을 가질 수 없어서. 이 판단이 가혹하게 들릴는지 모르지만, 위대한 세대 후, 특히 소크라테스 이후에 왔던 자유에 대항하는 저 반란을 일으키는 지적(知的)지도자들에게 적용된다면 유감스럽지만 올바른 것이라고 나는 말하겠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역사적 해석을 배경으로 그들을 알려고 노력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철학의 발흥 자체는 닫힌사회와 그 마술적 신념의 붕괴에 대한 반응으로서 해석될 수 있다. 철학의 발흥은 잃어버린 마술적 믿음을 이성적 믿음으로 대신하려는 시도이다; 철학의 발흥은 이론이나 신화를 전하는 전통을 새로운 전통을 세움으로써 수정한다. - 이론과 신화에 도전하는 전통과, 이론과 신화를 비판적으로 토론하는 전통. (중요한 점은 이 시도가 소위 그 구성원이 잃어버린 단결심을 새로운 밀교[密敎]로 대체하고자 애썼던 오르페우스 종파[Orphic sects]의 전파와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오르페우스 종파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내를 찾아 지하세계에 다녀온 오르페우스가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의 세상의 안다고 전해지면서 생겨난 종파이다 - 역자 주].) 최초의 철학자인 세 명의 위대한 이오니아인과 피타고라스는 아마도 자신들이 반응하고 있었던 자극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지는 못했다. 그들은 사회혁명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표하기도 했다. 그들이 학파나 종파 혹은 교단, 다시 말해서 새로운 사회제도나 더 정확히 말해서 공동으로 생활하고 공동으로 활동하는 구체적인 집단을 설립해서 주로 이상화된 종족의 구체적인 집단을 모방하였다는 바로 그 사실은 사회적 분야에서 그들이 개혁가였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특정한 사회적 요구에 반응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들이 운명과 부패라는 역사주의적 신화를 창조하는 헤시오드(Hesiod)를 흉내 내지 않고, 비판과 토론이라는 전통과, 그 전통과 함께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기술을 발명함으로써 이 요구와 자신들이 가지는 추이에 대한 느낌에 반응했다는 것은 우리 문명의 시작에 존재하는 설명될 수 없는 사실 하나이다. 그러나 심지어 이 이성주의자들도 종족주의적 단결을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대체로 감정적인 방식으로 반응했다. 그들의 이성적 사고는 그들의 추세에 대한 느낌을, 우리의 개인주의적 문명을 창조하려던 발전적 긴장을 표현한다. 이 긴장에 대한 가장 오래된 표현 하나는 이오니아의 제 2인자 철학자인 아낙시맨더(Anaximander)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인주의적 존재는 그에게 오만(hubris)으로서, 불의의 불순한 행위로서, 찬탈이라는 잘못된 행위로서 개인이 고통을 당하고 속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혁명과 계급투쟁을 인식하게 된 최초의 사람은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였다. 최초의 반(反)민주주의적 이념과 변화와 운명에 관한 최초의 역사주의적 철학을 개발함으로써 어떻게 자신이 지니고 있던 추세에 대한 감정을 합리화했는지는 이 책의 두 번째 장에 설명되었다. 헤라클리투스는 열린사회를 최초로 인식한 적(敵)이었다.

이 초기 사상가 거의 모두가 비극적이고 격렬한 긴장상태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 유일한 예외는 아마도 유일신주의자인 제노파네스(Xenophanes)인데, 그는 자신의 짐을 용감하게 짊어졌다. 우리는, 우리가 그들의 후계자를 어느 정도 비난하는 방식으로, 그들이 새로운 상황전개에 적대감을 보였기 때문에 비난할 수는 없다. 열린사회에 관한, 인간에 관한, 평등주의적 정의에 관한, 그리고 인간의 이성에 관한 새로운 신념이 아마도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아직 공식화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V

이 신념에 대한 가장 커다란 공헌은 소크라테스에 의하여 제공될 수 있었는데, 그는 그것 때문에 죽음을 당했다. 소크라테스는, 페리클레스가 그러한 것처럼, 아테네 민주주의의 지도자는 아니었으며, 프로타고라스가 그러한 것처럼, 열린사회에 대한 이론가도 아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는 아테네와 아테네의 민주주의적 제도를 비판한 사람이었고, 이러한 점에서 그는 열린사회에 대한 적대적인 반동을 주도했던 사람 몇 명과 겉보기에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적 제도를 비판하는 사람이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적 제도의 적(敵)일 필요는 없다, 비록 그가 비판하는 민주주의자들과 민주주의 진영에서 일어나는 불화로부터 이익을 얻기를 바라는 전체주의자들 모두가 그를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적 제도의 적이라고 낙인찍고자 할지라도. 민주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적 비판과 전체주의적 비판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비판은 민주주의적인 비판이었고 진정으로 민주주의의 생명 자체인 그런 종류의 비판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우호적 비판과 적대적 비판 사이의 차이점을 보지 못하는 민주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이 전체주의적 정신으로 가득 차있다. 전체주의는 물론 어떤 비판도 우호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그런 권위에 대한 모든 비판은 권위의 원칙 자체에 도전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소크라테스의 가르침 몇 가지를 언급했다: 그의 지식주의, 다시 말해서 언어소통에 관한 보편적 매체로서 인간의 이성에 관한 평등주의적 이론; 지적(知的) 솔직성과 자기비판에 관하여 그가 한 강조; 정의(正義)에 대한 그의 평등주의적 이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가하는 것보다 불의에 희생당하는 것이 낫다고 그가 주장한 원칙.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그의 가르침의 핵심인 그가 주장하는 개인주의에 대한 신조, 개별인간을 본질적으로 목적으로 하는 믿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이 마지막 원칙이다.

닫힌사회와 함께, 종족은 모든 것이요 개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사회의 신조는 무너졌다. 개인의 창의력과 자기주장이 현실이 되었다. 오직 종족적 영웅과 구세주로서가 아니라, 개인으로서 인간 개인에 대한 관심이 고취되었다. 그러나 인간을 철학적 관심의 중심으로 만드는 철학은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와 함께 시작되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다른 개별인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믿음, 사람들에게 서로를 존중하고 사람 자신을 존중하라는 호소는 소크라테스에게서 유래되는 듯싶다.

버넷(Burnet)은 영혼(soul)이라는 개념, 우리 문명에 그렇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개념을 창조한 사람은 소크라테스라고 강조했다. 비록 나는 그 관점의 공식화가, 특히 ‘영혼’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이 관점에는 많은 것이 있다고 믿는다; 그 까닭은 소크라테스는 가능한 한 형이상학적 이론으로부터 피해왔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호소는 도덕적 호소요, 개성에 관한 (만약 이 말이 더 좋다면, ‘영혼’에 관한) 그의 이론은, 내가 생각하기에, 도덕적이자 형이상학적은 아닌 원칙이다. 그는, 이 원칙의 도움을 받아서, 항상 자기만족과 자만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었다. 그는 개인주의란 단순히 종족주의의 해체가 아니라, 개인은 자신이 해방된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가 사람이란 단순히 살덩어리인 육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사람에게는 더 많은 것, 신성한 불꽃인 이성이 있다; 그리고 진리와 친절, 인간적임에 대한 사랑, 아름다움과 선에 대한 사랑이 있다. 인간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그러나 내가 단순히 ‘육체’가 아니라면, 나는 무엇인가? 당신은, 무엇보다도, 지성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대답한다. 당신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당신이 지닌 이성이다; 당신을 단순한 욕망덩어리 이상이 되도록 만드는 것; 당신을 자족적인 개인으로 만들고 당신이 본질적으로 목적이라고 주장할 권한을 부여하는 것. ‘당신 자신을 알라’는 말이 소크라테스에 의하여 우리들에게 우리가 지닌 지적(知的) 한계를 상기시키는 데 사용된 것과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의 말 ‘당신의 영혼을 보살피라’는 주로 지적(知的) 정직을 위한 호소이다.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바, 이것들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적 정치가에게서 비판한 것은 그들이 이것들을 불충분하게 깨닫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그들의 지적 정직 결여와 권력정치에 대한 집착에 대하여 그들을 옳게 비판했다. 정치문제의 인간적 면을 그가 강조하는 바람에, 그는 제도적 개혁에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그가 관심을 쏟았던 것은 열린사회의 가장 가까운, 인간적인 면이었다. 그는 자신을 정치가로 생각하여 오류를 범했다; 그는 교사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근본적으로 열린사회를 위한 투사였고 민주주의의 벗이었다면, 왜 그는 반(反)민주주의자들과 어울렸을까 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 까닭은 그의 동료 중에는 잠시 동안 스파르타 편으로 갔던 알키비아데스(Alcibiades)뿐만 아니라 플라톤의 두 삼촌으로 나중에 30인의 참주의 무자비한 지도자가 된 크리티아스(Critias)와 그의 부관이 된 카르미데스(Charmides) 또한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는 한 가지 이상의 대답이 존재한다. 첫째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당시의 민주주의적 정치가를 공격한 것은 부분적으로 국민에게 위선적으로 아첨하는, 특히 민주주의자로 나서면서 국민을 자신들의 권력욕을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던 젊은 귀족들의, 이기심과 권력욕을 폭로할 목적이었다는 것을 플라톤에게서 듣는다. 이 활동은 적어도 민주주의의 적 몇 명에게 한편으로 그를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 활동은 그를 바로 그런 형태의 야심만만한 귀족들과 접촉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면 여기에 두 번째로 고려할 점이 떠오른다. 도덕주의자이자 개인주의자인 소크라테스는 이 사람들은 공격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기꺼이 이들에게서 현실적 관심을 가졌고, 그들을 고치려는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고 포기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플라톤이 쓴 대화편에는 그런 노력에 관한 많은 언급이 있다. 이것이 세 번째로 고려할 점인데 우리에게는 교사이자 정치가였던 소크라테스가 특히 젊은이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 젊은이들을 모아들여 그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했고, 언젠가 그 젊은이들이 그들의 도시에서 아마도 책임 있는 직책을 맡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다. 뚜렷한 본보기는 물론 알키비아데스(Alcibiades)인데, 아테네 제국의 위대한 미래지도자로서 매우 어린 시절부터 선택되었다. 그리고 크리티아스(Critias)는 총명함, 야망, 그리고 용기 때문에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소수의 경쟁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한동안 알키비아데스와 협력하였으나 나중에 그에게서 돌아섰다. 그 일시적 협력이 소크라테스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것이 전혀 개연성이 없지는 않다.) 플라톤 자신의 초기 및 후기의 정치적 열망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고찰하면,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의 관계는 비슷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소크라테스는 열린사회의 정신적 지주의 하나였을지라도, 정당인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국가에 이익을 줄 어떤 단체에서도 일을 했을 것이다. 그가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에게 관심을 가졌다면 그는 과두정치 가족 관계에 의하여 저지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될 수 있었다. 대전쟁에서 아테네가 패하자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를 배반하고 적과 공모하여 아테네의 함락을 불러왔던 사람들을 교육시켰다는 이유로 기소 당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아테네의 함락 역사는, 투키디데스의 권위의 영향을 받아, 아테네의 패배는 민주주의적 제도의 도덕적 취약점에 관한 궁극적 증거로 나타난다는 식으로 여전히 자주 거론된다. 그러나 이 관점은 편향적인 왜곡이며, 잘 알려진 사실은 다른 이야기를 전해준다. 패배한 전쟁에 대한 주요 책임은 지속적으로 스파르타와 공모한 배신적인 과두 독재자들에게 있다. 이 사람들 중에서 두드러진 사람은 전(前)소크라테스 제자 세 명으로 알키비아데스, 크리티아스, 그리고 카르미데스였다. 기원전 404년에 아테네가 함락된 다음에,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는 30명의 참주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그 참주들은 스파르타의 보호를 받는 꼭두각시 정권에 지나지 않았다. 아테네 함락과 성벽 파괴는 기원전 431년에 시작된 대전쟁의 최종 결과로 흔히 제시된다. 그러나 이런 제시 속에는 심각한 왜곡이 도사리고 있다; 그 까닭은 민주주의자들이 싸움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겨우 일흔 명으로, 그들은 트라시불루스(Thrasybulus)와 아니투스(Anytus) 지휘 하에 아테네의 해방을 준비했는데, 그동안 아테네에서는 크리티아스가 시민 다수를 살해하고 있었다; 그의 공포정치 8개월 동안 사망자 명단에는 ‘지난 10년의 전쟁기간 동안에 스파르타인들이 살해한 것보다 다소 더 많은 수의 아테네인’이 포함되어있다. 그러나 8개월 후 (기원전 403년) 크리티아스와 스파르타 주둔군은 민주주의자들의 공격을 받고 패배하며, 민주주의자들은 피라에우스(Piraeus)에 자리를 잡고, 플라톤의 삼촌 두 명은 그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과두 독재 추종자들은 아테네에서 잠시 동안 공포정치를 계속했지만, 그들은 세력은 혼란과 해체 상태에 놓여있었다. 자신들이 통치에 무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후, 그들은 결국 스파르타인 섭정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스파르타인들은 아테네의 민주주의자들과 조약을 체결했다. 평화는 아테네에 민주주의를 다시 세웠다. 그리하여 민주주의 형태의 정부는 가장 혹심한 시련 속에서도 그 우월한 힘을 증명했으며, 심지어 적들도 민주주의는 정복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9년후 크니두스[Cnidus] 전투 다음에,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의 성벽을 다시 세웠다. 민주주의의 패배는 승리로 변했다.)

회복된 민주주의가 정상적인 법질서를 재정립하자마자, 소크라테스에게 재판사건이 벌어졌다. 그 사건의 의미는 분명했다; 그는 국가의 가장 해로운 적인 알키비아데스, 크리티아스, 그리고 카르미데스를 교육하는 데 솜씨를 보였다고 기소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재수립되기 전에 자행된 모든 정치적 범죄에 대한 사면조치 때문에 기소에 관한 어떤 난관이 생겨났다. 그러므로 죄목은 이 악명 높은 사건들과 공개적으로 연결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고발자들은 아마도 그들이 잘 알고 있었던 바와 같이 소크라테스의 의도에 반하여 발생했던 과거의 불행했던 정치적 사건들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처벌하려고 하지 않았다; 고발자들의 목표는, 오히려, 그 효과를 고찰할 때, 그들이 국가에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없었던 그의 가르침이 계속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이 모든 이유를 고려하여, 죄목에는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있었다는, 그가 불경스럽다는, 그리고 그가 국가에 희한한 종교적 관행을 도입하려고 했다는 모호하고 다소 무의미한 형식이 주어졌다. (나중의 두 죄목은 의심할 바 없이, 아무리 서툴다할지라도, 윤리-종교 분야에서 그가 혁명가였다는 올바른 느낌을 나타낸다.) 사면 때문에, ‘타락한 젊은이들’이 더 정확하게 지칭될 수는 없었지만, 모든 사람들은 물론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을 변호하여, 소크라테스 자신은 30인의 과두정치 독재자들에게 동조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그들의 저지른 범죄행위에 연루시키려는 그들의 기도에 대항하여 실제로 목숨을 걸기도 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배심원들에게 그의 가장 친한 동료와 가장 열성적인 제자 중에는 30인의 과두 독재자들에 대항하여 싸운 적어도 한 명의 열성적인 민주주의자인 카에레폰(Chaerephon)이 있었다고 환기시켰다 (그리고 그는 전투에서 피살당한 것으로 보인다).

기소를 도왔던 민주주의 지도자인 아니투스(Anytus)는 소크라테스를 순교자를 만들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지금은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목적은 그를 추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원칙과 타협하기를 거절함으로써 무산된다. 그가 죽기를 원했다거나 그가 순교자의 역할을 즐겼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그는 단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필생의 일을 위하여 싸웠을 뿐이다. 그에게는 민주주의를 침해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실제로, 그는 민주주의에게 필요한 신념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그의 필생의 일이었다. 그가 느끼기에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협에 처했다. 그의 전 동료들의 배신으로 인하여 그가 하는 일과 그 자신은 그를 분명히 깊은 당혹감에 빠뜨린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조국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이 무한하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로서 재판을 환영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도피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 견해를 가장 신중하게 설명했다. 그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추방자가 되었더라면, 모든 사람들은 그를 민주주의의 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남았고, 자신의 이유를 진술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인 이 설명은 플라톤이 쓴 크리토(Crito)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설명은 간단하다. 내가 도피한다면, 나는 국가의 법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그러한 행동은 나를 법에 반대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며 내가 불충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런 행동은 국가에 해를 끼칠 것이다. 내가 남아있을 수 있어야만 나는 국가의 민주주의적 법률로써 국가에 대한 나의 충심이 의심스럽지 않게 만들며, 내가 국가의 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국가를 위하여 죽으려는 나의 각오보다 나의 충심을 더 증명하는 것은 없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그의 충심을 최종적으로 증명한다. 그는 용기, 소박함, 겸손, 균형감각, 기지를 잊은 적이 없다. ‘나는 신(神)이 이 도시에 붙여놓은 쇠파리이다, 그래서 하루 종일 그리고 모든 장소에서 나는 항상 당신들에게 달라붙어 자극하고 설득하고 꾸짖기도 한다. 당신들은 나와 같은 사람을 쉽게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들에게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아니투스(Anytus)가 시키는 대로, 당신들이 나를 공격하여 조급하게 사형시킨다면, 신이 보살피어 다른 쇠파리를 보내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여생동안 잠을 자게 될 것이다’라고 변명(Apology)에서 말했다. 그는 사람이, 운명과 명성과 이런 종류의 다른 장중한 것들 위해서 뿐만 아니라 비판적 사고를 할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자만이나 감상(感傷)과는 관계가 없는 품위를 위하여,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VI

소크라테스에게는 오직 한 사람의 훌륭한 후계자가 있었는데, 그는 오랜 친구이자 위대한 세대의 최후 사람인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였다. 재능이 가장 많던 그의 제자인 플라톤은 곧 가장 불충스런 사람으로 드러났다. 그는 자신의 삼촌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를 배반했다. 이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배반한 것 외에도, 자신들의 테러행위에 연루시키려고 애를 또한 썼지만 그가 저항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플라톤은 통제된 사회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려는 자신의 장엄한 시도에 소크라테스를 연루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그는 어려움 없이 성공하는데, 그 까닭은 소크라테스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판단이 심지어 플라톤에게 비판적인 사람들에게도 지나치게 혹독하게 보일 것이라는 것을 나는 물론 알고 있다. 그러나 변명(Apology)과 크리토(Crito)를 소크라테스의 유언서로서 간주하고, 그의 만년에 나온 이 유언서와 플라톤의 유언서인 법률(Laws)을 비교하면 달리 판단하기가 어렵다. 소크라테스는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를 재판에 회부한 사람들은 그를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플라톤이 쓴 법률(Laws)은 사형시키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그 책에서 플라톤은 종교재판의 이론을 냉철하고도 조심스럽게 상술한다. 자유로운 사고, 정치제도에 대한 비판,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사고를 가르치기, 새로운 종교적 관행과 심지어 의견을 도입하려는 시도, 이 모든 것들은 극형감이라고 선언된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에게는 아마도 자신을 공개적으로 변호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분명히 자신의 병든 영혼을 ‘치료’하고 최종적으로 그 병든 영혼을 처벌할 목적으로 비밀 야간 위원회(Nocturnal Council)에 송치되었을 것이다 (야간 위원회[Nocturnal Council]은 플라톤이 자신의 저서 법률에서 설명하는 기구로 이상국가에서 불경의 죄를 범한 죄인을 감옥에 가두고 교정하는 일을 담당한다 - 역자 주.).

나는 플라톤의 배반 사실을 의심치 않으며, 소크라테스를 자신의 저서 국가(Republic)의 주요 연사로 이용한 것이 소크라테스를 연루시키려는 가장 성공적인 시도이었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이 시도가 의식적이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플라톤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동시대 상황 전체를 그려보아야 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문명의 긴장은 여느 때처럼 강하게 느껴졌다. 구 과두 독재자들의 희망은 아직도 살아있었고, 아테네의 전쟁패배는 그들의 용기를 부추기는 경향을 보였다. 계급투쟁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구 과도 독재자들의 강령을 수행함으로써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던 크리티아스(Critias)의 노력은 실패했다. 그 시도는 결심이 없어서 실패한 것은 아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로부터 오는 강력한 지원이라는 유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가장 잔인하게 사용한 것은 성공하지 못했다. 플라톤은 그 강령의 완전한 재건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30인의 과두 독재자들은 대체로 자신들이 시민들의 정의감을 거슬렸기 때문에 권력정치 영역에서 패했다. 그 패배는 주로 도덕적 패배였다. 위대한 세대의 신념은 그 힘을 증명했다. 30인의 과두 독재자들에게는 내놓을만한 이런 종류의 신념이 없었다; 그들은 도덕적 허무주의자였다. 플라톤의 느낌으로는 구 과두 독재자들의 강령은 다른 신념에, 구 가치를 열린사회의 신념에 대치시키는 종족주의적 구 가치를 재확신 시키는 설득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부활할 수 없었다. 사람은 정의가 불평등이라고, 그리고 종족인 집단은 개인보다 더 높다고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신념은 공개적으로 도전하기에는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플라톤은 할 수 없이 그 신념을 닫힌사회 속의 신념으로 재해석하게 되었다. 이것은 난제였다; 그러나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 까닭은 소크라테스를 민주주의가 죽이지 않았던가? 민주주의는 그를 가질 권리를 잃어버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대중들의 지도자뿐만 아니라 무명의 대중들을 지혜가 없다고 항상 비판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소크라테스가 ‘교육을 받은 사람들’, 박식한 철학자들이 통치할 것을 추천했다고 재해석하는 일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이 해석에서, 플라톤은 그것이 고대 피타고라스학파의 신조의 한 부분임을 발견하고 크게 고무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플라톤이 타렌툼의 아키타스(Archytas of Tarentum)에게서 위대하고 성공적인 정치가뿐만 아니라 피타고라스학파의 현자를 발견했을 때. 그가 느끼기에 여기에 수수께끼의 해답이 있었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제자들에게 정치에 참가하라고 격려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그가 계몽된 자들, 현명한 자들이 통치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아테네를 다스리는 대중의 조잡함과 아키타스의 위엄 사이의 차이점이라니! 분명히 정치체제에 대한 자신의 해결책을 진술한 적이 없는 소크라테스는 피타고라스의 학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런 방식으로 플라톤은 위대한 세대의 가장 영향력이 있던 사람의 가르침에 점차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자신이 감히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못했던 압도적인 힘을 지닌 적이 자신의 동맹자라고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내가 믿기에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벗어나서 이 일탈에 대하고 자신을 더 이상 속이지 못하게 된 후에조차도 소크라테스를 자신의 주 대화자로 삼았던 사실을 가장 간단하게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 전부는 아니다. 내가 믿기에 그는 영혼의 깊은 곳에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이러한 발표와 정말로 매우 다르다는 것과, 자신이 소크라테스를 배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자신을 재해석하도록 만드는 플라톤의 부단한 노력은 동시에 자신의 나쁜 마음을 잠재우려는 플라톤의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가르침이 진정한 소크라테스의 원칙의 논리적 발전일 뿐임을 증명하려고 반복해서 애를 씀으로써, 그는 자신이 배반자가 아니라고 자신을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내가 느끼기에 우리는 플라톤을 읽으면서 내부 갈등, 플라톤의 생각 속에 있었던 정말로 거대한 갈등의 목격자가 된다. 심지어 그의 유명한 ‘까다로운 자제, 자신의 개성억압’, 혹은 더 정확하게, 의도된 억압도 - 그 까닭은 행간을 읽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 이 갈등의 표현이다. 그리고 나는 플라톤의 영향력은 한 영혼 속에 존재하는 두 세계 사이의 이 갈등의, 플라톤에게 미친 그 강력한 반향이 까다로운 자세의 표면 아래서 느껴질 수 있는 갈등의 매력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갈등이 우리들의 감정을 건드리는데, 그 까닭은 그 갈등이 우리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여전히 우리 것이기도 한 시대의 자식이었다. (우리는 결국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겨우 1세기가 지났으며, 중앙 유럽에서 농노제도가 폐지된 지 그 보다 훨씬 적은 시간이 지났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내부갈등이 플라톤의 영혼에 관한 이론에서보다 더 명백하게 표출되는 곳은 없다. 플라톤이, 자신의 단결과 화합에 대한 열망과 함께, 인간 영혼의 구조를 계급으로 분할된 사회의 구조와 유사한 것으로 시각화한 것은 그가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플라톤이 겪었던 가장 큰 갈등은 소크라테스를 본보기로 그에게 미친 깊은 인상에서 나타나지만, 그 자신이 지녔던 과두 독재적 취향은 그 인상에 대항하여 너무나 성공적으로 노력했다. 이성적 논쟁의 분야에서, 그 갈등은 소크라테스의 인도주의에 관한 주장을 그 자체에 반대로 사용함으로써 나타난다. 이런 종류에 관한 최초의 본보기로 보이는 것이 에우티프론(Euthyphro)에서 발견될 수 있다. 나는 에우티프론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플라톤은 자신에게 다짐한다; 나는 내 자신의 아버지, 내 자신의 존경받는 조상들이 법과 조악한 신성함의 수준에 있는 인도주의적 도덕성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비난하는 일을 맡지는 않겠다. 그들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면, 결국 그것은 그들 소유의 농노의 목숨일 뿐이며 그 농노들은 범죄자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을 판단하는 일은 나의 일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옳은 것과 그른 것, 신성한 것과 불경한 것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자신이 이른바 이 인도주의자들에 의하여 불경죄로 기소 당하지 않았던가? 플라톤이 지녔던 갈등의 다른 흔적들은 그가 인도주의적 이념에 대항하는 거의 모든 곳, 특히 국가(Republic)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정의에 관한 평등주의 이론과 싸우면서 그가 보인 회피적 태도나 냉소, 거짓말을 자신이 옹호한 데 대하여, 자신의 인종주의 도입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이 뜻을 정하는 정의(正義)에 대하여 자신이 머뭇거리며 쓴 서문(序文) 모두가 앞장에서 언급되었다. 그러나 아마도 그 갈등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한 것은 페리클레스가 행한 현충일 연설에 대한 저 냉소적 대답인 메네크세누스(Menexenus)에서 발견될 수 있다. 내가 느끼기에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풍자와 경멸 뒤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는 자신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페리클레스의 정서에 의하여 얼마나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를 보여줄 수밖에 없다. 이것이 플라톤이 자신이 만든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페리클레스의 연설에 의하여 자신에게 미친 인상을 악의적으로 설명하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환희의 감정이 사흘 이상 나에게 남아있었다; 나흘 혹은 닷새가 되서야 노력 없이도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나의 위치를 깨달았다.’ 플라톤이 여기서 얼마나 심각하게 열린사회의 신조에 의하여 감동을 받았으며, 제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위치를 - 즉, 열린사회의 신조에 대한 적들의 진영에서 - 깨닫기 위하여 얼마나 열심히 몸부림쳤는지를 폭로한다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VII

이 갈등에서 플라톤이 내놓는 가장 강력한 주장은 내가 믿는 바 진심이다: 그가 주장하는 바 인도주의적 신조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도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몹시 필요하다, 그들은 불행하다, 그들은 심각한 긴장인 표류감정으로 고생을 한다. 만물이 유전(流轉)할 때 삶에는 확실성도 없고 안전도 없다. 나는 그들을 도울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나는 악의 뿌리를 캐지 않고는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악의 뿌리를 발견했다. 그것은 ‘인간의 추락’, 닫힌사회의 붕괴였다. 이 발견으로 인하여 그는 구 과두 독재자와 그 추종자들이 아테네에 비하여 스파르타를 선호하는 데, 그리고 변화를 중지시키는 스파르타의 강령을 모방하는 데에서 근본적으로 옳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들은 충분히 멀리 가지 못했다; 그들의 분석은 충분히 깊지 못했다. 그들은 심지어 스파르타도 모든 변화를 중지시키려는 그 영웅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쇠퇴의 조짐을 보였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고 걱정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스파르타도 추락의 원인인 지배인종의 특징뿐만 아니라 숫자에서의 ‘변종’과 ‘이종(異種)’을 제거하기 위하여 양육을 통제하려는 시도에 냉담했다는 것. (플라톤은 인구증가가 추락 원인의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구 과두 독재자와 그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경박함으로 30인의 과두 독재자들의 독재정치와 같은 독재정치의 도움을 받아서 옛 황금시절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 위대한 사회학자는 이 독재체제들이 당시 혁명적 정신에 의하여 지탱되었으며, 반대로 그 정신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독재체제들은 어쩔 수 없이 국민의 평등주의적 열망에 양보했다는 것; 그리고 그 열망이 종족주의의 붕괴에서 정말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 플라톤은 참주정치를 증오했다. 그가 자신의 유명한 참주 묘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직 증오만이 날카롭게 볼 수 있다 (이 문장은 원문 only hatred can see as sharply as he did in his famous description of the tyrant를 직역한 것이지만 문맥상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이한구 교수는 "그의 참주정치에 관한 유명한 기술에서는 증오만이 날카롭게 관찰되었다"로 해석했지만 이한구 교수의 해석 역시 문맥상 의미가 통한다고 할 수 없다. 원문에서 동사 see의 목적어가 없으며 see를 수동의 의미로 해석한다는 것은 as he did 때문에 불가능하다. 원문의 오류로 생각된다 - 역자 주). 참주정치의 진정한 적만이 참주들은 분명히 ‘국민들이 장군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만들기 위하여 계속해서 전쟁을 일으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인 위험으로부터 구세주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만들기 위하여. 참주정치는 해결책이 아니며 당시 과두정치체제 어느 것도 해결책이 아니라고 플라톤은 주장했다. 국민들을 제 위치에 두는 것이 긴급했지만 국민들을 억압하는 일이 본질적으로 목표가 아니었다. 목표는 자연으로 완전히 회귀하는 것, 화포의 완벽한 청소이어야 한다.

한편으로 플라톤의 이론과 구 과두독재자의 이론 사이의, 다른 한편으로 30인의 과두 독재자들의 이론 사이의 차이점은 위대한 세대의 영향 때문이다. 개인주의, 평등주의, 이성에 대한 믿음, 그리고 자유에 대한 사랑은 새롭고, 강력하고, 열린사회의 적들의 관점에서 보면 투쟁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위험한 생각이었다. 플라톤 자신이 그들의 영향력을 느꼈고, 그의 내부에서 그는 그들과 싸웠다. 위대한 세대에 대한 그의 대답은 진실로 커다란 노력이었다. 그의 대답은 열렸던 문을 닫으려는, 그리고 깊이와 풍요로움에 유례가 없는 현혹적인 철학의 주술을 사회 위에 던짐으로써 사회를 통제하려는 노력이었다. 정치 분야에서 그는 페리클레스가 한 때 반대주장을 폈던 구 과두독재 체제의 강령을 거의 확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우리 시대에 파레토(Pareto)에 의하여 공식화된 자유에 대한 반란의 위대한 비밀을 발견했다: ‘그들을 파괴하려는 헛된 노력에 자신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감정을 이용하는 것.’ 이성에 대한 자신의 적대감을 내보이는 대신에, 그는 박식한 자가 통치를 해야 한다는 요구로 지식인들에게 아부를 하고 또 그들에게 전율을 느끼도록 하면서 자신의 탁월함으로 모든 지식인들을 매혹했다. 정의(正義)에 반대하는 주장을 펴면서도 그는 모든 정직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정의를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설득했다. 심지어 자신에게도 그는 소크라테스가 목숨을 바쳤던 사상의 자유와 싸우고 있었다는 것을 완전히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를 자기가 옹호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서 그는 자신이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싸우고 있다고 다른 사람 모두를 설득했다. 그리하여 플라톤은 흔히 훌륭한 신념으로 반인도주의적이고 비도덕적인 목적을 위하여 도덕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기술을 개발했던 많은 선동가들의 선구자가, 무의식적으로,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위대한 인도주의자들에게 그들이 지닌 신조의 비도덕성과 이기심을 확신시키는 다소 놀라운 결과를 성취해냈다. 나는 그가 자신에게 확신시키는 일에도 성공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개인적 창의성에 대한 증오와 모든 변화를 중지시키려는 자신의 소망을 정의와 절제에 대한 사랑으로, 그 속에서 모든 사람이 만족하고 행복하며 그 속에서 돈을 거머쥐는 조잡스런 행동이 아량과 우정의 법칙으로 바뀌는 천상의 국가에 대한 사랑으로 변모시켰다. 단결과 아름다움과 완벽에 대한 이 꿈, 이 탐미주의와 전체주의와 집단주의는 종족주의가 잃어버린 집단정신의 증상이자 산물이다. 그것은 문명의 긴장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감정 표현이자 그 감정에 대한 열렬한 호소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심각한 오류를, 제도적 오류뿐만 아니라 개인적 오류를, 피할 수 있는 고통을, 낭비와 불필요한 추악함을,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지만 그러한 개선은 중요한 만큼 이룩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고통스럽게 깨닫는 고통의 일부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개인의 책임, 인간적이 되는 십자가를 지는 긴장을 고조시킨다.)

VIII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지녔던 인격적 솔직성과 타협하기를 거절했다. 플라톤은 자신이 지녔던 모든 비타협적 화포청소(canvas-cleaning) 때문에 자신이 취했던 행동마다 스스로 자신의 솔직성과 타협했던 길을 따라갔다. 그는 자유로운 사고, 그리고 진리추구와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거짓말과 정치적 기적, 금기주의적 미신, 진리억압과 궁극적으로 잔인한 폭력을 옹호하게 되었다. 인간혐오와 논리혐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을 불신하고 논쟁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 자신이 독재체제를 증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재자에게 도움을 바라고 가장 독재적인 조치를 옹호하게 되었다. 그가 지녔던 반인도주의적 목표의 내부적 논리, 힘에 대한 내부적 논리에 의하여, 그는 부지불식간에 한때 30인의 참주가 도달했던, 그리고 나중에 그의 친구 디오(Dio)와 자신의 수많은 독재자 제자들 중 다른 제자들이 도달했던 동일한 지점에 도달했다. 그는 사회변화를 중지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오직 훨씬 뒤에, 암흑시대에, 사회변화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적 본질주의의 마술적 주술에 의하여 중지되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주술에 의하여 자신이 한때 증오했던 권력에 자신을 묶는 데 성공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플라톤으로부터 배워야하는 교훈은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애썼던 것의 정반대이다. 그것은 잊혀서는 안 되는 교훈이다. 플라톤의 사회학적 진단이 탁월했다할지라도, 그 자신의 발전은 그가 추천하는 치료방식이 그가 싸우려고 했던 악보다 더 나쁘다는 것을 증명한다. 정치적 변화를 중지시키는 일이 치료법은 아니다; 그것은 행복을 가져올 수 없다. 우리는 닫힌사회에서 주장되는 순수함과 아름다움으로 돌아갈 수 없다. 천국을 이루려는 우리의 꿈은 지상에서 이룩될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이성에 의지하기 시작하고 우리의 비판력을 사용하기 시작하자마자, 우리가 개인적 책임요구와 함께 지식을 증진시키는 데 조력해야하는 책임을 느끼자마자, 우리는 종족적 마술에 암묵적으로 복종하는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지식의 나무를 먹은 사람에게 천국은 사라졌다. 우리가 종족주의라는 영웅적 시대로 회귀하려고 애를 쓸수록, 우리는 종교재판과 비밀경찰과 낭만화된 깡패행위에 그만큼 더 분명하게 도달한다. 이성과 진리를 억압하여 시작하여, 우리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가장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파괴하여 끝장을 보게 된다. 자연의 조화로운 상태로 돌아가는 길은 없다. 만약 우리가 돌아선다면, 우리는 길 전체를 가야한다 - 우리는 동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그렇게 하기가 힘든 일일지라도, 우리가 정면으로 부딪쳐야 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우리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를 꿈꾼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여 행복해지려는 유혹을 받는다면,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려는, 인간성과 이성과 책임의 십자가를 지려는 임무로부터 위축된다면, 우리가 용기를 잃고 긴장으로부터 물러선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간단한 결정을 분명히 이해하여 우리 자신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는 동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적으로 남고자 한다면, 단 한 가지 길, 열린사회로 들어가는 길만 있다. 우리는, 안전과 자유를 위하여 가능한 한 잘 우리가 계획을 세우기 위하여 우리가 지닌 모든 이성을 사용하면서, 미지의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 “열린사회와 그 적들, 1권 플라톤”, 칼 포퍼 -

THE BACKGROUND OF PLATO'S ATTACK

CHAPTER 10: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He will restore us to our original nature,

and heal us, and make us happy and blessed.

PLATO.

There is still something missing from our analysis. The contention that Plato's political programme is purely totalitarian, and the objections to this contention which were raised in chapter 6, have led us to examine the part played, within this programme, by such moral ideas as Justice, Wisdom, Truth, and Beauty. The result of this examination was always the same. We found that the role of these ideas is important, but that they do not lead Plato beyond totalitarianism and racialism. But one of these ideas we have still to examine: that of Happiness. It may be remembered that we quoted Crossman in connection with the belief that Plato's political programme is fundamentally a 'plan for the building of a perfect state in which every citizen is really happy', and that I described this belief as a relic of the tendency to idealize Plato. If called upon to justify my opinion, I should not have much difficulty in pointing out that Plato's treatment of happiness is exactly analogous to his treatment of justice; and especially, that it is based upon the same belief that society is 'by nature' divided into classes or castes. True happiness , Plato insists, is achieved only by justice, i.e. by keeping one's place. The ruler must find happiness in ruling, the warrior in warring; and, we may infer, the slave in slaving. Apart from that, Plato says frequently that what he is aiming at is neither the happiness of individuals nor that of any particular class in the state, but only the happiness of the whole, and this, he argues, is nothing but the outcome of that rule of justice which I have shown to be totalitarian in character. That only this justice can lead to any true happiness is one of the main theses of the Republic.

In view of all this, it seems to be a consistent and hardly refutable interpretation of the material to present Plato as a totalitarian party-politician, unsuccessful in his immediate and practical undertakings, but in the long run only too successful in his propaganda for the arrest and overthrow of a civilization which he hated. But one only has to put the matter in this blunt fashion in order to feel that there is something seriously amiss with this interpretation. At any rate, so I felt, when I had formulated it. I felt perhaps not so much that it was untrue, but that it was defective. I therefore began to search for evidence which would refute this interpretation . However, in every point but one, this attempt to refute my interpretation was quite unsuccessful. The new material made the identity between Platonism and totalitarianism only the more manifest.

The one point in which I felt that my search for a refutation had succeeded concerned Plato's hatred of tyranny. Of course, there was always the possibility of explaining this away. It would have been easy to say that his indictment of tyranny was mere propaganda. Totalitarianism often professes a love for 'true' freedom, and Plato's praise of freedom as opposed to tyranny sounds exactly like this professed love. In spite of this, I felt that certain of his observations on tyranny , which will be mentioned later in this chapter, were sincere. The fact, of course, that 'tyranny' usually meant in Plato's day a form of rule based on the support of the masses made it possible to claim that Plato's hatred of tyranny was consistent with my original interpretation. But I felt that this did not remove the need for modifying my interpretation. I also felt that the mere emphasis on Plato's fundamental sincerity was quite insufficient to accomplish this modification. No amount of emphasis could offset the general impression of the picture. A new picture was needed which would have to include Plato's sincere belief in his mission as healer of the sick social body, as well as the fact that he had seen more clearly than anybody else before or after him what was happening to Greek society. Since the attempt to reject the identity of Platonism and totalitarianism had not improved the picture, I was ultimately forced to modify my interpretation of totalitarianism itself. In other words, my attempt to understand Plato by analogy with modern totalitarianism led me, to my own surprise, to modify my view of totalitarianism. It did not modify my hostility, but it ultimately led me to see that the strength of both the old and the new totalitarian movements rested on the fact that they attempted to answer a very real need, however badly conceived this attempt may have been.

In the light of my new interpretation, it appears to me that Plato's declaration of his wish to make the state and its citizens happy is not merely propaganda. I am ready to grant his fundamental benevolence . I also grant that he was right, to a limited extent, in the sociological analysis on which he based his promise of happiness. To put this point more precisely: I believe that Plato, with deep sociological insight, found that his contemporaries were suffering under a severe strain, and that this strain was due to the social revolution which had begun with the rise of democracy and individualism. He succeeded in discovering the main causes of their deeply rooted unhappiness - social change, and social dissension - and he did his utmost to fight them. There is no reason to doubt that one of his most powerful motives was to win back happiness for the citizens. For reasons discussed later in this chapter, I believe that the medico-political treatment which he recommended, the arrest of change and the return to tribalism, was hopelessly wrong. But the recommendation, though not practicable as a therapy, testifies to Plato's power of diagnosis. It shows that he knew what was amiss, that he understood the strain, the unhappiness, under which the people were labouring, even though he erred in his fundamental claim that by leading them back to tribalism he could lessen the strain, and restore their happiness.

It is my intention to give in this chapter a very brief survey of the historical material which induced me to hold such opinions. A few critical remarks on the method adopted, that of historical interpretation, will be found in the last chapter of the book. It will therefore suffice here if I say that I do not claim scientific status for this method, since the tests of an historical interpretation can never be as rigorous as those of an ordinary hypothesis. The interpretation is mainly a point of view, whose value lies in its fertility, in its power to throw light upon the historical material, to lead us to find new material, and to help us to rationalize and to unify it. What I am going to say here is therefore not meant as a dogmatic assertion, however boldly I may perhaps sometimes express my opinions.

I

Our Western civilization originated with the Greeks. They were, it seems, the first to make the step from tribalism to humanitarianism. Let us consider what that means.

The early Greek tribal society resembles in many respects that of peoples like the Polynesians, the Maoris for instance. Small bands of warriors, usually living in fortified settlements, ruled by tribal chiefs or kings, or by aristocratic families, were waging war against one another on sea as well as on land. There were, of course, many differences between the Greek and the Polynesian way of life, for there is, admittedly, no uniformity in tribalism. There is no standardized 'tribal way of life'. It seems to me, however, that there are some characteristics that can be found in most, if not all, of these tribal societies. I mean their magical or irrational attitude towards the customs of social life, and the corresponding rigidity of these customs.

The magical attitude towards social custom has been discussed before. Its main element is the lack of distinction between the customary or conventional regularities of social life and the regularities found in 'nature'; and this often goes together with the belief that both are enforced by a supernatural will. The rigidity of the social customs is probably in most cases only another aspect of the same attitude. (There are some reasons to believe that this aspect is even more primitive, and that the supernatural belief is a kind of rationalization of the fear of changing a routine - a fear which we can find in very young children.) When I speak of the rigidity of tribalism I do not mean that no changes can occur in the tribal ways of life. I mean rather that the comparatively infrequent changes have the character of religious conversions or revulsions, or of the introduction of new magical taboos. They are not based upon a rational attempt to improve social conditions. Apart from such changes - which are rare - taboos rigidly regulate and dominate all aspects of life. They do not leave many loop-holes. There are few problems in this form of life, and nothing really equivalent to moral problems. I do not mean to say that a member of a tribe does not sometimes need much heroism and endurance in order to act in accordance with the taboos. What I mean is that he will rarely find himself in the position of doubting how he ought to act. The right way is always determined, though difficulties must be overcome in following it. It is determined by taboos, by magical tribal institutions which can never become objects of critical consideration. Not even a Heraclitus distinguishes clearly between the institutional laws of tribal life and the laws of nature; both are taken to be of the same magical character. Based upon the collective tribal tradition, the institutions leave no room for personal responsibility. The taboos that establish some form of group responsibility may be the forerunner of what we call personal responsibility, but they are fundamentally different from it. They are not based upon a principle of reasonable accountability, but rather upon magical ideas, such as the idea of appeasing the powers of fate.

It is well known how much of this still survives. Our own ways of life are still beset with taboos; food taboos, taboos of politeness, and many others. And yet, there are some important differences. In our own way of life there is, between the laws of the state on the one hand and the taboos we habitually observe on the other, an ever-widening field of personal decisions, with its problems and responsibilities; and we know that the importance of this field. Personal decisions may lead to the alteration of taboos, and even of political laws which are no longer taboos. The great difference is the possibility of rational reflection upon these matters. Rational reflection begins, in a way, with Heraclitus . With Alcmaeon, Phaleas and Hippodamus, with Herodotus and the Sophists, the quest for the 'best constitution' assumes, by degrees, the character of a problem which can be rationally discussed. And in our own time, many of us make rational decisions concerning the desirability or otherwise of new legislation, and of other institutional changes; that is to say, decisions based upon an estimate of possible consequences, and upon a conscious preference for some of them. We recognize rational personal responsibility.

In what follows, the magical or tribal or collectivist society will also be called the closed society, and the society in which individuals are confronted with personal decisions, the open society.

A closed society at its best can be justly compared to an organism. The so-called organic or biological theory of the state can be applied to it to a considerable extent. A closed society resembles a herd or a tribe in being a semi-organic unit whose members are held together by semi-biological ties - kinship, living together, sharing common efforts, common dangers, common joys and common distress. It is still a concrete group of concrete individuals, related to one another not merely by such abstract social relationships as division of labour and exchange of commodities, but by concrete physical relationships such as touch, smell, and sight. And although such a society may be based on slavery, the presence of slaves need not create a fundamentally different problem from that of domesticated animals. Thus those aspects are lacking which make it impossible to apply the organic theory successfully to an open society.

The aspects I have in mind are connected with the fact that, in an open society, many members strive to rise socially, and to take the places of other members. This may lead, for example, to such an important social phenomenon as class struggle. We cannot find anything like class struggle in an organism. The cells or tissues of an organism, which are sometimes said to correspond to the members of a state, may perhaps compete for food; but there is no inherent tendency on the part of the legs to become the brain, or of other members of the body to become the belly. Since there is nothing in the organism to correspond to one of the most important characteristics of the open society, competition for status among its members, the so-called organic theory of the state is based on a false analogy. The closed society, on the other hand, does not know much of such tendencies. Its institutions, including its castes, are sacrosanct - taboo. The organic theory does not fit so badly here. It is therefore not surprising to find that most attempts to apply the organic theory to our society are veiled forms of propaganda for a return to tribalism .

As a consequence of its loss of organic character, an open society may become, by degrees, what I should like to term an 'abstract society'. It may, to a considerable extent, lose the character of a concrete or real group of men, or of a system of such real group. This point which has been rarely understood may be explained by way of an exaggeration. We could conceive of a society in which men practically never meet face to face - in which all business is conducted by individuals in isolation who communicate by typed letters or by telegrams, and who go about in closed motor-cars. (Artificial insemination would allow even propagation without a personal element.) Such a fictitious society might be called a 'completely abstract or depersonalized society'. Now the interesting point is that our modern society resembles in many of its aspects such a completely abstract society. Although we do not always drive alone in closed motor cars (but meet face to face thousands of men walking past us in the street) the result is very nearly the same as if we did - we do not establish as a rule any personal relation with our fellow-pedestrians. Similarly, membership of a trade union may mean no more than the possession of a membership card and the payment of a contribution to an unknown secretary. There are many people living in a modern society who have no, or extremely few, intimate personal contacts, who live in anonymity and isolation, and consequently in unhappiness. For although society has become abstract, the biological make-up of man has not changed much; men have social needs which they cannot satisfy in an abstract society.

Of course, our picture is even in this form highly exaggerated. There never will be or can be a completely abstract or even a predominantly abstract society - no more than a completely rational or even a predominantly rational society. Men still form real groups and enter into real social contacts of all kinds, and try to satisfy their emotional social needs as well as they can. But most of the social groups of a modern open society (with the exception of some lucky family groups) are poor substitutes, since they do not provide for a common life. And many of them do not have any function in the life of the society at large.

Another way in which the picture is exaggerated is that it does not, so far, contain any of the gains made - only the losses. But there are gains. Personal relationships of a new kind can arise where they can be freely entered into, instead of being determined by the accidents of birth; and with this, a new individualism arises. Similarly, spiritual bonds can play a major role where the biological or physical bonds are weakened; etc. However this may be, our example, I hope, will have made plain what is meant by a more abstract society in contradistinction to a more concrete or real social group; and it will have made it clear that our modern open societies function largely by way of abstract relations, such as exchange or co-operation. (It is the analysis of these abstract relations with which modern social theory, such as economic theory, is mainly concerned. This point has not been understood by many sociologists, such as Durkheim, who never gave up the dogmatic belief that society must be analysed in terms of real social groups.)

In the light of what has been said, it will be clear that the transition from the closed to the open society can be described as one of the deepest revolutions through which mankind has passed. Owing to what we have described as the biological character of the closed society, this transition must be felt deeply indeed. Thus when we say that our Western civilization derives from the Greeks, we ought to realize what it means. It means that the Greeks started for us that great revolution which, it seems, is still in its beginning - the transition from the closed to the open society.

II

Of course, this revolution was not made consciously. The breakdown of tribalism, of the closed societies of Greece, may be traced back to the time when population growth began to make itself felt among the ruling class of landed proprietors. This meant the end of 'organic' tribalism. For it created social tension within the closed society of the ruling class. At first, there appeared to be something like an 'organic' solution of this problem, the creation of daughter cities. (The 'organic' character of this solution was underlined by the magical procedures followed in the sending out of colonists.) But this ritual of colonization only postponed the breakdown. It even created new danger spots wherever it led to cultural contacts; and these, in turn, created what was perhaps the worst danger to the closed society - commerce, and a new class engaged in trade and seafaring. By the sixth century B.C., this development had led to the partial dissolution of the old ways of life, and even to a series of political revolutions and reactions. And it had led not only to attempts to retain and to arrest tribalism by force, as in Sparta, but also to that great spiritual revolution, the invention of critical discussion, and, in consequence, of thought that was free from magical obsessions. At the same time we find the first symptoms of a new uneasiness. The strain of civilization was beginning to be felt.

This strain, this uneasiness, is a consequence of the breakdown of the closed society. It is still felt even in our day, especially in times of social change. It is the strain created by the effort which life in an open and partially abstract society continually demands from us - by the endeavour to be rational, to forgo at least some of our emotional social needs, to look after ourselves, and to accept responsibilities. We must, I believe, bear this strain as the price to be paid for every increase in knowledge, in reasonableness, in co-operation and in mutual help, and consequently in our chances of survival, and in the size of the population. It is the price we have to pay for being human.

The strain is mostly closely related to the problem of the tension between the classes which is raised for the first time by the breakdown of the closed society. The closed society itself does not know this problem. At least to its ruling members, slavery, caste, and class rule are 'natural' in the sense of being unquestionable. But with the breakdown of the closed society this certainty disappears, and with it all feeling of security. The tribal community (and later the 'city') is the place of security for the member of the tribe. Surrounded by enemies and by dangerous or even hostile magical forces, he experiences the tribal community as a child experiences his family and his home, in which he plays his definite part; a part he knows well, and plays well. The breakdown of the closed society, raising as it does the problems of class and other problems of social status, must have had the same effect upon the citizens as a serious family quarrel and the breaking up of the family home is liable to have on children . Of course, this kind of strain was felt by the privileged classes, now that they were threatened, more strongly than by those who had formerly been suppressed; but even the latter felt uneasy. They also were frightened by the breakdown of their 'natural' world. And though they continued to fight their struggle, they were often reluctant to exploit their victories over their class enemies who were supported by tradition, the status quo, a high level of education, and a feeling of natural authority.

In this light we must try to understand the history of Sparta, which successfully tried to arrest these developments, and of Athens, the leading democracy.

Perhaps the most powerful cause of the breakdown of the closed society was the development of sea-communications and commerce. Close contact with other tribes is liable to undermine the feeling of necessity with which tribal institutions are viewed; and trade, commercial initiative, appears to be one of the few forms in which individual initiative and independence can assert itself, even in a society in which tribalism still prevails. These two, seafaring and commerce, became the main characteristics of Athenian imperialism, as it developed in the fifth century B.C. And indeed they were recognized as the most dangerous developments by the oligarchs, the members of the privileged, or of the formerly privileged, classes of Athens. It became clear to them that the trade of Athens, its monetary commercialism, its naval policy, and its democratic tendencies were parts of one single movement, and that it was impossible to defeat democracy without going to the roots of the evil and destroying both the naval policy and the empire. But the naval policy of Athens was based upon its harbours, especially the Piraeus, the centre of commerce and the stronghold of the democratic party; and strategically, upon the walls which fortified Athens, and later, upon the Long Walls which linked it to the harbours of the Piraeus and Phalerum. Accordingly, we find that for more than a century the empire, the fleet, the harbour, and the walls were hated by the oligarchic parties of Athens as the symbols of the democracy and as the sources of its strength which they hoped one day to destroy.

Much evidence of this development can be found in Thucydides'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or rather, of the two great wars of 431-421 and 419-403 B.C., between Athenian democracy and the arrested oligarchic tribalism of Sparta. When reading Thucydides we must never forget that his heart was not with Athens, his native city. Although he apparently did not belong to the extreme wing of the Athenian oligarchic clubs who conspired throughout the war with the enemy, he was certainly a member of the oligarchic party, and a friend neither of the Athenian people, the demos, who had exiled him, nor of its imperialist policy. (I do not intend to belittle Thucydides, the greatest historian, perhaps, who ever lived. But however successful he was in making sure of the facts he records, and however sincere his efforts to be impartial, his comments and moral judgements represent an interpretation, a point of view; and in this we need not agree with him.) I quote first from a passage describing Themistocles' policy in 482 B.C., half a century before the Peloponnesian war: 'Themistocles also persuaded the Athenians to finish the Piraeus... Since the Athenians had now taken to the sea, he thought that they had a great opportunity for building an empire. He was the first who dared to say that they should make the sea their domain...' Twenty five years later, 'the Athenians began to build their Long Walls to the sea, one to the harbour of Bhalerum, the other to the Piraeus' . But this time, twenty-six years before the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the oligarchic party was fully aware of the meaning of these developments. We hear from Thucydides that they did not shrink even from the most blatant treachery. As sometimes happens with oligarchs, class interest superseded their patriotism. An opportunity offered itself in the form of a hostile Spartan expeditionary force operating in the north of Athens, and they determined to conspire with Sparta against their own country. Thucydides writes: 'Certain Athenians were privately making overtures to them' (i.e. to the Spartans) 'in the hope that they would put an end to the democracy, and to the building of the Long Walls. But the other Athenians.. suspected their design against democracy.' The loyal Athenian citizens therefore went out to meet the Spartans, but were defeated. It appears, however, that they had weakened the enemy sufficiently to prevent him from joining forces with the fifth columnists within their own city. Some months later, the Long Walls were completed, which meant that the democracy could enjoy security as long as it upheld its naval supremacy.

This incident throws light on the tenseness of the class situation in Athens, even twenty-six years before the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during which the situation became much worse. It also throws light on the methods employed by the subversive and pro-Spartan oligarchic party. Thucydides, one must note, mentions their treachery only in passing, and he does not censure them, although in other places he speaks most strongly against class struggle and party spirit. The next passages quoted, written as a general reflection on the Corcyraean Revolution of 427 B.C., are interesting, first as an excellent picture of the class situation; secondly, as an illustration of the strong words Thucydides could find when he wanted to describe analogous tendencies on the side of the democrats of Corcyral (Corcyral은 Corcyra의 오기로 보임 - 역자 주) (In order to judge his lack of impartiality we must remember that in the beginning of the war Corcyra had been one of Athens' democratic allies, and that the revolt had been started by the oligarchs.) Moreover, the passage is an excellent expression of the feeling of a general social breakdown: 'Nearly the whole Hellenic world', writes Thucydides, 'was in commotion. In every city, the leaders of the democratic and of the oligarchic parties were trying hard, the one to bring in the Athenians, the other Lacedaemonians.. The tie of party was stronger than the tie of blood... The leaders on either side used specious names, the one party professing to uphold the constitutional equality of the many, the other the wisdom of the nobility; in reality they made the public interest their price, professing, of course, their devotion to it. They used any conceivable means for getting the better of one another, and committed the most monstrous crimes... This revolution gave birth to every form of wickedness in Hellas... Everywhere prevailed an attitude of perfidious antagonism. There was no word binding enough, no oath terrible enough, to reconcile enemies. Each man was strong only in the conviction that nothing was secure.'

The full significance of the attempt of the Athenian oligarchs to accept the help of Sparta and stop the building of the Long Walls can be gauged when we realize that this treacherous attitude had not changed when Aristotle wrote his Politics, more than a century later. We hear there about an oligarchic oath, which, Aristotle said, 'is now in vogue'. This is how it runs: 'I promise to be an enemy of the people, and to do my best to give them bad advice!' It is clear that we cannot understand the period without remembering this attitude.

I mentioned above that Thucydides himself was an antidemocrat. This becomes clear when we consider his description of the Athenian empire, and the way it was hated by the various Greek states. Athens' rule over its empire, he tells us, was felt to be no better than a tyranny, and all the Greek tribes were afraid of her. In describing public opinion at the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he is mildly critical of Sparta and very critical of Athenian imperialism. 'The general feeling of the peoples was strongly on the side of the Lacedaemonians; for they maintained that they were the liberators of Hellas. Cities and individuals were eager to assist them.., and the general indignation against the Athenians was intense. Some were longing to be liberated from Athens, others fearful of falling under its sway.' It is most interesting that this judgement of the Athenian empire has become, more or less, the official judgement of 'History', i.e. of most of the historians. Just as the philosophers find it hard to free themselves from Plato's point of view, so are the historians bound to that of Thucydides. As an example I may quote Meyer (the best German authority on this period), who simply repeats Thucydides when he says: 'The sympathies of the educated world of Greece were.. turned away from Athens.'

But such statements are only expressions of the anti-democratic point of view. Many facts recorded by Thucydides - for instance, the passage quoted which describes the attitude of the democratic and oligarchic party leaders - show that Sparta was 'popular' not among the peoples of Greece but only among the oligarchs; among the 'educated', as Meyer puts it so nicely. Even Meyer admits that 'the democratically minded masses hoped in many places for her victory' , i.e. for the victory of Athens; and Thucydides' narrative contains many instances which prove Athens' popularity among the democrats and the suppressed. But who cares for the opinion of the uneducated masses? If Thucidides and the 'educated' assert that Athens was a tyrant, then she was a tyrant.

It is most interesting that the same historians who hail Rome for her achievement, the foundation of a universal empire, condemn Athens for her attempt to achieve something better. The fact that Rome succeeded where Athens failed is not a sufficient explanation of this attitude. They do not really censure Athens for her failure, since they loathe the very idea that her attempt might have been successful. Athens, they believe, was a ruthless democracy, a place ruled by the uneducated, who hated and suppressed the educated, and were hated by them in turn. But this view - the myth of the cultural intolerance of democratic Athens - make nonsense of the known facts, and above all of the astonishing spiritual productivity of Athens in this particular period. Even Meyer must admit this productivity. 'What Athens produced in this decade', he says with characteristic modesty, 'ranks equal with one of the mightiest decades of German literature.' Pericles, who was the democratic leader of Athens at this time, was more than justified when he called her 'The School of Hellas'.

I am far from defending everything that Athens did in building up her empire, and I certainly do not wish to defend wanton attacks (if such have occurred), or acts of brutality; nor do I forget that Athenian democracy was still based on slavery . But it is necessary, I believe, to see that tribalist exclusiveness and self-sufficiency could be superceded only by some form of imperialism. And it must be said that certain of the imperialist measures introduced by Athens were rather liberal. one very interesting instance is the fact that Athens offered, in 405 B.C., to her ally, the Ionian island Samos, 'that the Samians should be Athenians from now on; and that both cities should be one state; and that the Samians should order their internal affairs as they chose, and retain their laws.' Another instance is Athens' method of taxing her empire. Much has been said about these taxes, or tributes, which have been described - very unjustly, I believe - as a shameless and tyrannical way of exploiting the smaller cities. In an attempt to evaluate the significance of these taxes, we must, of course, compare them with the volume of the trade which, in turn, was protected by the Athenain fleet. The necessary information is given by Thucydides, from whom we learn that the Athenians imposed upon their allies, in 413 B.C., 'in place of the tribute, a duty of 5 per cent. on all things imported and exported by sea; and they thought that this would yield more' . This measure, adopted under severe strain of war, compares favourably, I believe, with the Roman methods of centralization. The Athenians, by this method of taxation, became interested in the development of allied trade, and so in the initiative and independence of the various members of their empire. Originally, the Athenian empire had developed out of a league of equals. In spite of the temporary predominance of Athens, publicly criticized by some of her citizens (cp. Aristophanes' Lysistrata), it seems probable that her interest in the development of trade would have led, in time, to some kind of federal constitution. At least, we know in her case of nothing like the Roman method of 'transferring' the cultural possessions from the empire to the dominant city, i.e. of looting. And whatever one might say against plutocracy, it is preferable to a rule of looters .

This favourable view of Athenian imperialism can be supported by comparing it with the Spartan methods of handling foreign affairs. They were determined by the ultimate aim that dominated Sparta's policy, by its attempt to arrest all change and to return to tribalism. (This is impossible, as I shall contend later on. Innocence once lost cannot be regained, and an artificially arrested closed society, or a cultivated tribalism, cannot equal the genuine article.) The principles of Spartan policy were these. (1) Protection of its arrested tribalism: shut out all foreign influences which might endanger the rigidity of tribal taboos. - (2) Anti-humanitarianism: shut out, more especially, all equalitarian, democratic, and individualistic ideologies. - (3) Autarky: be independent of trade. - (4) Anti-universalism or particularism: uphold the differentiation between your tribe and all others; do not mix with inferiors. - (5) Mastery: dominate and enslave your neighbours. - (6) But do not become too large: 'The city should grow only as long as it can do so without impairing its unity' , and especially, without risking the introduction of universalistic tendencies. - If we compare these six principal tendencies with those of modern totalitarianism, then we see that they agree fundamentally, with the sole exception of the last. The difference can be described by saying that modern totalitarianism appears to have imperialist tendencies. But this imperialism has no element of a tolerant universalism, and the world-wide ambitions of the modern totalitarianism are imposed upon them, as it were, against their will. Two factors are responsible for this. The first is the general tendency of all tyrannies to justify their existence by saving the state (or the people) from its enemies - a tendency which must lead, whenever the old enemies have been successfully subdued, to the creation or invention of new ones. The second factor is the attempt to carry into effect the closely related points (2) and (5) of the totalitarian programme. Humanitarianism, which, according to point (2), must be kept out, has become so universal that in order to combat it effectively at home, it must be destroyed all over the world. But our world has become so small that everybody is now a neighbour, so that, to carry out point (5), everybody must be dominated and enslaved. But in ancient times, nothing could have appeared more dangerous to those who adopted a particularism like Sparta's, than Athenian imperialism, with its inherent tendency to develop into a common wealth of Greek cities, and perhaps even into a universal empire of man.

Summing up our analysis so far, we can say that the political and spiritual revolution which had begun with the breakdown of Greek tribalism reached its climax in the fifth century, with the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It had developed into a violent class war, and, at the same time, into a war between the two leading cities of Greece.

III

But how can we explain the fact that outstanding Athenians like Thucydides stood on the side of reaction against these new developments? Class interest is, I believe, an insufficient explanation; for what we have to explain is the fact that, while many of the ambitious young nobles became active, although not always reliable, members of the democratic party, some of the most thoughtful and gifted resisted its attraction. The main point seems to be that although the open society was already in existence, although it had, in practice, begun to develop new values, new equalitarian standards of life, there was still something missing, especially for the 'educated'. The new faith of the open society, its only possible faith, humanitarianism, was beginning to assert itself, but was not yet formulated. For the time being, one could not see much more than class war, the democrats' fear of the oligarchic reaction, and the threat of further revolutionary development. The reaction against these developments had therefore much on its side - tradition, the call for defending old virtues, and the old religion. These tendencies appealed to the feelings of most men, and their popularity gave rise to a movement to which, although it was led and used for their own ends by the Spartans and their oligarchic friends, many upright men must have belonged, even at Athens. From the slogan of the movement, 'Back to the state of our forefathers', or 'Back to the old paternal state', derives the term 'patriot'. It is hardly necessary to insist that the beliefs popular among those who supported this 'patriotic' movement were grossly perverted by those oligarchs who did not shrink from handing over their own city to the enemy, in the hope of gaining support against the democrats. Thucydides was one of the representative leaders of this movement for the 'paternal state' , and though he probably did not support the treacherous acts of the extreme anti-democrats, he could not disguise his sympathies with their fundamental aim - to arrest social change, and to fight the universalistic imperialism of the Athenian democracy and the instruments and symbols of its power, the navy, the walls, and commerce. (In view of Plato's doctrines concerning commerce, it may be interesting to note how great the fear of commercialism was. When after his victory over Athens in 404 B.C. the Spartan king Lysander, returned with great booty, the Spartan 'patriots', i.e. the members of the movement for the 'paternal state', tried to prevent the import of gold; and though it was ultimately admitted, its possession was limited to the state, and capital punishment was imposed on any citizen found in possession of precious metals. In Plato's Laws, very similar procedures are advocated ).

Although the 'patriotic' movement was partly the expression of the longing to return to more stable forms of life, to religion, decency, law and order, it was itself morally rotten. Its ancient faith was lost, and was largely replaced by a hypocritical and even cynical exploitation of religious sentiments. Nihilism, as painted by Plato in the portraits of Callicles and Thrasymachus, could be found if anywhere among the young 'patriotic' aristocrats who, if given the opportunity, became leaders of the democratic party. The clearest exponent of this nihilism was perhaps the oligarchic leader who helped to deal the death-blow at Athens, Plato's uncle Critias, the leader of the Thirty Tyrants.

But at this time, in the same generation which Thucydides belonged, there rose a new faith in reason, freedom and the brotherhood of all men - the new faith, and, as I believe, the only possible faith, of the open society.

IV

This generation which marks a turning point in the history of mankind, I should like to call the Great Generation; it is the generation which lived in Athens just before, and during, the Peloponnesian war. There were great conservatives among them, like Sophocles, or Thucydides. There were men among them who represent the period of transition; who were wavering, like Euripides, or skeptical, like Aristophanes. But there was also the great leader of democracy, Pericles, who formulated the principle of equality before the law and of political individualism, and Herodotus, who was welcomed and hailed in Pericles' city as the author of a work that glorified these principles. Protagoras, a native of Abdera who became influential in Athens, and his countryman Democritus must also be counted among the Great Generation. They formulated the doctrine that human institutions of language, custom, and law are not of the magical character of taboos but man-made, not natural but conventional, insisting, at the same time, that we are responsible for them. Then there was the school of Gorgias - Alcidamas, Lycophron and Antisthenes, who developed the fundamental tenets of anti-slavery, of a rational protectionism, and of anti-nationalism, i.e. the creed of the universal empire of men. And there was, perhaps the greatest of all, Socrates, who taught the lesson that we must have faith in human reason, but at the same time beware of dogmatism; that we must keep away both from misology , the distrust of theory and reason, and from the magical attitude of those who make an idol of wisdom; who taught, in other words, that the spirit of science is criticism.

Since I have not so far said much about Pericles, and nothing at all about Democritus, I may use some of their own words in order to illustrate the new faith. First Democritus: 'Not out of fear but out of a feeling of what is right should we abstain from doing wrong... Virtue is based, most of all, upon respecting other man... Every man is a little world of his own... We ought to do our utmost to help those who have suffered injustice... To be good means to do no wrong; and also, not to want to do wrong... It is good deeds, not words, that count... The poverty of a democracy is better than the prosperity which allegedly goes with aristocracy or monarchy, just as liberty is better than slavery... The wise man belongs to all countries, for the home of a great soul is the whole world.' To him is due also that remark of a true scientist: 'I would rather find a single causal law than be the king of Persia!'

In their humanitarian and universalistic emphasis some of these fragments of Democritus sound, although they are of earlier date, as if they were directed against Plato. The same impression is conveyed, only much more strongly, by Pericles' famous funeral oration, delivered at least half a century before the Republic was written. I have quoted two sentences from this oration in chapter 6, when discussing equalitarianism , but a few passages may be quoted here more fully in order to give a clearer impression of its spirit. 'Our political system does not compete with institutions which are elsewhere in force. We do not copy our neighbours, but try to be an example. Our administration favours the many instead of the few: this is why it is called a democracy. The laws afford equal justice to all alike in their private disputes, but we do not ignore the claims of excellence. When a citizen distinguishes himself, then he will be called to serve the state, in preference to others, not as a matter of privilege, but as a reward of merit; and poverty is no bar... The freedom we enjoy extends also to ordinary life; we are not suspicious of one another, and do not nag our neighbour if he chooses to go his own way... But this freedom does not make us lawless. We are taught to respect the magistrates and the laws, and never to forget that we must protect the injured. And we are also taught to observe those unwritten laws whose sanction lies only in the universal feeling of what is right...

'Our city is thrown open to the world; we never expel a foreigner... We are free to live exactly as we please, and yet we are always ready to face any danger... We love beauty without indulging in fancies, and although we try to improve our intellect, this does not weaken our will... To admit one's poverty is no disgrace with us; but we consider it disgraceful not to make an effort to avoid it. An Athenian citizen does not neglect public affairs when attending to his private business... We consider a man who takes no interest in the state not as harmless, but as useless; and although only a few may originate a policy, we are all able to judge it. We do not look upon discussion as a stumbling-block in the way of political action, but as an indispensable preliminary to acting wisely... We believe that happiness is the fruit of freedom and freedom that of valour, and we do not shrink from the dangers of war... To sum up, I claim that Athens is the School of Hellas, and that the individual Athenian grows up to develop a happy versatility, a readiness for emergencies, and self-reliance.'

These words are not merely an eulogy on Athens; they express the true spirit of the Great Generation. They formulate the political programme of a great equalitarian individualist, of a democrat who well understands that democracy cannot be exhausted by the meaningless principle that 'the people should rule', but that it must be based on faith in reason, and on humanitarianism. At the same time, they are an expression of true patriotism, of just pride in a city which had made it its task to set an example; which became the school, not only of Hellas, but, as we know, of mankind, for millennia past and yet to come.

Pericles' speech is not only a programme. It is also a defence, and perhaps even an attack. It reads, as I have already hinted, like a direct attack on Plato. I do not doubt that it was directed, not only against the arrested tribalism of Sparta, but also against the totalitarian ring or 'link' at home; against the movement for the paternal state, the Athenian 'Society of the Friends of Laconia' (as Th. Gomperz called them in 1902 ). The speech is the earliest and at the same time perhaps the strongest statement ever made in opposition to this kind of movement. Its importance was felt by Plato, who caricatured Pericles' oration half a century later in the passages of the Republic in which he attacks democracy, as well as in that disguised parody, the dialogue called Menexenus or the Funeral Oration . But the friends of Laconia whom Pericles attacked retaliated long before Plato. only five or six years after Pericles' oration, a pamphlet on the Constitution of Athens was published by an unknown author (possibly Critias), now usually called the 'Old Oligarch'. This ingenious pamphlet, the oldest extant treatise on political theory, is, at the same time, perhaps the oldest monument of the desertion of mankind by its intellectual leaders. It is a ruthless attack upon Athens, written no doubt by one of her best brains. Its central idea, an idea which became an article of faith with Thucydides and Plato, is the close connection between naval imperialism and democracy. And it tries to show that there can be no compromise in a conflict between two worlds , the worlds of democracy and of oligarchy; that only the use of ruthless violence, of total measures, including the intervention of allies from outside (the Spartans), can put an end to the unholy rule of freedom. This remarkable pamphlet was to become the first of a practically infinite sequence of works on political philosophy which were to repeat more or less, openly or covertly, the same theme down to our own day. Unwilling and unable to help mankind along their difficult path into an unknown future which they have to create for themselves, some of the 'educated' tried to make them turn back into the past. Incapable of leading a new way, they could only make themselves leaders of the perennial revolt against freedom. It became the more necessary for them to assert their superiority by fighting against equality as they were (using Socratic language) misanthropists and mislogists - incapable of that simple and ordinary generosity which inspires faith in men, and faith in human reason and freedom. Harsh as this judgement may sound, it is just, I fear, if it is applied to those intellectual leaders of the revolt against freedom who came after the Great Generation, and especially after Socrates. We can now try to see them against the background of our historical interpretation.

The rise of philosophy itself can be interpreted, I think, as a response to the breakdown of the closed society and its magical beliefs. It is an attempt to replace the lost magical faith by a rational faith; it modifies the tradition of passing on a theory or myth by founding a new tradition - the tradition of challenging theories and myths and of critically discussing them . (A significant point is that this attempt coincides with the spread of the so-called Orphic sects whose members tried to replace the lost feeling of unity by a new mystical religion.) The earliest philosophers, the three great Ionians and Pythagoras, were probably quite unaware of the stimulus to which they were reacting. They were the representatives as well as the unconscious antagonists of a social revolution. The very fact that they founded schools or sects or orders, i.e. new social institutions or rather concrete groups with a common life and common functions, and modelled largely after those of an idealized tribe, proves that they were reformers in the social field, and therefore, that they were reacting to certain social needs. That they reacted to these needs and to their own sense of drift, not by imitating Hesiod in inventing a historicist myth of destiny and decay , but by inventing the tradition of criticism and discussion, and with it the art of thinking rationally, is one of the inexplicable facts which stand at the beginning of our civilization. But even these rationalists reacted to the loss of the unity of tribalism in a largely emotional way. Their reasoning gives expression to their feeling of drift, to the strain of a development which was about to create our individualistic civilization. one of the oldest expressions of this strain goes back to Anaximander , the second of the Ionian philosophers. Individual existence appeared to him as hubris, as an impious act of injustice, as a wrongful act of usurpation, for which individuals must suffer, and do penance. The first to become conscious of the social revolution and the struggle of classes was Heraclitus. How he rationalized his feeling of drift by developing the first anti-democratic ideology and the first historicist philosophy of change and destiny, has been described in the second chapter of this book. Heraclitus was the first conscious enemy of the open society.

Nearly all these early thinkers were labouring under a tragic and desperate strain . The only exception is perhaps the montheist Xenophanes , who carried his burden courageously. We cannot blame them for their hostility towards the new developments in the way in which we may, to some extent, blame their successors. The new faith of the open society, the faith in man, in equalitarian justice, and in human reason, was perhaps beginning to take shape, but it was not yet formulated.

V

The greatest contribution to this faith was to be made by Socrates, who died for it. Socrates was not a leader of Athenian democracy, like Pericles, or a theorist of the open society, like Protagoras. He was, rather, a critic of Athens and of her democratic institutions, and in this he may have borne a superficial resemblance to some of the leaders of the reaction against the open society. But there is no need for a man who criticizes democracy and democratic institutions to be their enemy, although both the democrats he criticizes, and the totalitarians who hope to profit from any disunion in the democratic camp, are likely to brand him as such. There is a fundamental difference between a democratic and a totalitarian criticism of democracy. Socrates' criticism was a democratic one, and indeed of the kind that is the very life of democracy. (Democrats who do not see the difference between a friendly and a hostile criticism of democracy are themselves imbued with the totalitarian spirit. Totalitarianism, of course, cannot consider any criticism as friendly, since every criticism of such an authority must challenge the principle of authority itself.)

I have already mentioned some aspects of Socrates' teaching: his intellectualism, i.e. his equalitarian theory of human reason as a universal medium of communication; his stress on intellectual honesty and self-criticism; his equalitarian theory of justice, and his doctrine that it is better to be a victim of injustice than to inflict it upon others. I think it is this last doctrine which can help us best to understand the core of his teaching, his creed of individualism, his belief in the human individual as an end in himself.

The closed society, and with it its creed that the tribe is everything and the individual nothing, had broken down. Individual initiative and self-assertion had become a fact. Interest in the human individual as individual, and not only as tribal hero and saviour, had been aroused . But a philosophy which makes man the centre of its interest began only with Protagoras. And the belief that there is nothing more important in our life than other individual men, the appeal to men to respect one another and themselves, appears to be due to Socrates.

Burnet has stressed that it was Socrates who created the conception of the soul, a conception which had such an immense influence upon our civilization. I believe that there is much in this view, although I feel that its formulation may be misleading, especially the use of the term 'soul'; for Socrates seems to have kept away from metaphysical theories as much as he could. His appeal was a moral appeal, and his theory of individuality (or of the 'soul', if this word is preferred) is, I think, a moral and not a metaphysical doctrine. He was fighting, with the help of this doctrine, as always, against self-satisfaction and complacency. He demanded that individualism should not be merely the dissolution of tribalism, but that the individual should prove worthy of his liberation. This is why he insisted that man is not merely a piece of flesh - a body. There is more in man, a divine spark, reason; and a love of truth, of kindness, humaneness, a love of beauty and of goodness. It is these that make a man's life worth while. But if I am not a merely a 'body', what am I then? You are, first of all, intelligence, was Socrates' reply. It is your reason that makes you human; that enables you to be more than a mere bundle of desires and wishes; that makes you a self-sufficient individual and entitles you to claim that you are an end in yourself. Socrates' saying 'care for your souls' is largely an appeal for intellectual honesty, just as the saying 'know thyself' is used by him to remind us of our intellectual limitations.

These, Socrates insisted, are the things that matter. And what he criticized in democracy and democratic statesmen was their inadequate realization of these things. He criticized them rightly for their lack of intellectual honesty, and for their obsession with power-politics . With his emphasis upon the human side of the political problem, he could not take much interest in institutional reform. It was the immediate, the personal aspect of the open society in which he was interested. He was mistaken when he considered himself a politician; he was a teacher.

But if Socrates was, fundamentally, the champion of the open society, and a friend of democracy, why, it may be asked, did he mix with anti-democrats? For we know that among his companions were not only Alcibiades, who for a time went over to the side of Sparta, but also two of Plato's uncles, Critias who later became the ruthless leader of the Thirty Tyrants, and Charmides who became his lieutenant.

There is more than one reply to this question. First we are told by Plato that Socrates' attack upon the democratic politicians of his time was carried out partly with the purpose of exposing the selfishness and lust for power of the hypocritical flatterers of the people, more particularly, of the young aristocrats who posed as democrats, but who looked upon the people as mere instruments of their lust for power . This activity made him, on the one hand, attractive to some at least of the enemies of democracy; on the other hand it brought him into contact with ambitious aristocrats of that very type. And here enters a second consideration. Socrates, the moralist and individualist, would never merely attack these men. He would, rather, take a real interest in them, and he would hardly give them up without making a serious attempt to convert them. There are many allusions to such attempts in Plato's dialogues. We have reason, and this is a third consideration, to believe that Socrates, the teacher-politician, even went out of his way to attract young men and to gain influence over them, especially when he considered them open to conversion, and thought that some day they might possibly hold offices of responsibility in their city. The outstanding example is, of course, Alcibiades, singled out from his very childhood as the great future leader of the Athenian empire. And Critias' brilliancy, ambition and courage made him one of the few likely competitors of Alcibiades. (He co-operated with Alcibiades for a time, but later turned against him. It is not at all improbable that the temporary co-operation was due to Socrates' influence.) From all we know about Plato's own early and later political aspirations, it is more than likely that his relations with Socrates were of a similar kind . Socrates, though one of the leading spirits of the open society, was not a party man. He would have worked in any circle where his work might have benefited his city. If he took interest in a promising youth he was not to be deterred by oligarchic family connections.

But these connections were to cause his death. When the great war was lost, Socrates was accused of having educated the men who had betrayed democracy and conspired with the enemy to bring about the downfall of Athens.

The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and the fall of Athens is still often told, under the influence of Thucydides' authority, in such a way that the defeat of Athens appears as the ultimate proof of the moral weaknesses of the democratic system. But this view is merely a tendentious distortion, and the well-known facts tell a very different story. The main responsibility for the lost war rests with the treacherous oligarchs who continuously conspired with Sparta. Prominent among these were three former disciples of Socrates, Alcibiades, Critias, and Charmides. After the fall of Athens in 404 B.C. the two latter became the leaders of the Thirty Tyrants, who were no more than a puppet government under Spartan protection. The fall of Athens, and the destruction of the walls, are often presented as the final results of the great war which had started in 431 B.C. But in this presentation lies a major distortion; for the democrats fought on. At first only seventy strong, they prepared under the leadership of Thrasybulus and Anytus the liberation of Athens, where Critias was meanwhile killing scores of citizens; during the eight months of his reign of terror the death-roll contained 'rather a greater number of Athenians than the Peloponnesians had killed during the last ten years of war' . But after eight months (in 403 B.C.) Critias and the Spartan garrison were attacked and defeated by the democrats, who established themselves in Piraeus, and both of Plato's uncles lost their lives in the battle. Their oligarchic followers continued for a time the reign of terror in the city of Athens itself, but their forces were in a state of confusion and dissolution. Having proved themselves incapable of ruling, they were ultimately abandoned by their Spartan protectors, who concluded a treaty with the democrats. The peace re-established democracy in Athens. Thus the democratic form of government had proved its superior strength under the most severe trials, and even its enemies began to think it invincible. (Nine years later, after the battle of Cnidus, the Athenians could re-erect their walls. The defeat of democracy had turned into victory.)

As soon as the restored democracy had re-established normal legal conditions , a case was brought against Socrates. Its meaning was clear enough; he was accused of having had his hand in the education of the most pernicious enemies of the state, Alcibiades, Critias, and Charmides. Certain difficulties for the prosecution were created by an amnesty for all political crimes committed before the re-establishment of the democracy. The charge could not therefore openly refer to these notorious cases. And the prosecutors probably sought not so much to punish Socrates for the unfortunate political events of the past which, as they knew well, had happened against his intentions; their aim was, rather, to prevent him from continuing his teaching, which, in view of its effects, they could hardly regard otherwise than as dangerous to the state. For all these reasons, the charge was given the vague and rather meaningless form that Socrates was corrupting the youth, that he was impious, and that he had attempted to introduce novel religious practices into the state. (The latter two charges undoubtedly expressed, however clumsily, the correct feeling that in the ethico-religious field he was a revolutionary.) Because of the amnesty, the 'corrupted youth' could not be more precisely named, but everybody knew, of course, who was meant . In his defence, Socrates insisted that he had no sympathy with the policy of the Thirty, and that he had actually risked his life by defying their attempt to implicate him in one of their crimes. And he reminded the jury that among his closest associates and most enthusiastic disciples there was at least one ardent democrat, Chaerephon, who fought against the Thirty (and who was, it appears, killed in battle) .

It is now usually recognized that Anytus, the democratic leader who backed the prosecution, did not intend to make a martyr of Socrates. The aim was to exile him. But this plan was defeated by Socrates' refusal to compromise his principles. That he wanted to die, or that he enjoyed the role of martyr, I do not believe . He simply fought for what he believed to be right, and for his life's work. He had never intended to undermine democracy. In fact, he had tried to give it the faith it needed. This had been the work of his life. It was, he felt, seriously threatened. The betrayal of his former companions let his work and himself appear in a light which must have disturbed him deeply. He may even have welcomed the trial as an opportunity to prove that his loyalty to his city was unbounded.

Socrates explained this attitude most carefully when he was given an opportunity to escape. Had he seized it, and become an exile, everybody would have thought him an opponent of democracy. So he stayed, and stated his reasons. This explanation, his last will, can be found in Plato's Crito . It is simple. If I go, said Socrates, I violate the laws of the state. Such an act would put me in opposition to the laws, and prove my disloyalty. It would do harm to the state. only if I stay can I put beyond doubt my loyalty to the state, with its democratic laws, and prove that I have never been its enemy. There can be no better proof of my loyalty than my willingness to die for it.

Socrates' death is the ultimate proof of his sincerity. His fearlessness, his simplicity, his modesty, his sense of proportion, his humour never deserted him. 'I am the gadfly that God has attached to this city', he said in his Apology, 'and all day long and in all places I am always fastening upon you, arousing and persuading and reproaching you. You would not readily find another like me, and therefore I should advise you to spare me.. If you strike at me, as Anytus advises you, and rashly put me to death, then you will remain asleep for the rest of your lives, unless God in his care sends you another gadfly' He showed that a man could die, not only for fate and fame and other grand things of this kind, but also for the freedom of critical thought, and for a self-respect which has nothing to do with self-importance or sentimentality.

VI

Socrates had only one worthy successor, his old friend Antisthenes, the last of the Great Generation. Plato, his most gifted disciple, was soon to prove the least faithful. He betrayed Socrates, just as his uncles had done. These, besides betraying Socrates, had also tried to implicate him in their terrorist acts, but they did not succeed, since he resisted. Plato tried to implicate Socrates in his grandiose attempt to construct the theory of the arrested society; and he had no difficulty in succeeding, for Socrates was dead.

I know of course that this judgement will seem outrageously harsh, even to those who are critical of Plato . But if we look upon the Apolgy and the Crito as Socrates' last will, and if we compare these testaments of his old age with Plato's testament, the Laws, then it is difficult to judge otherwise. Socrates had been condemned, but his death was not intended by the initiators of the trial. Plato's Laws remedy this lack of intention. Here he elaborates coolly and carefully the theory of inquisition. Free thought, criticism of political institutions, teaching new ideas to the young, attempts to introduce new religious practices or even opinions, are all pronounced capital crimes. In Plato's state, Socrates might have never been given the opportunity of defending himself publicly; and he certainly would have been handed over to the secret Nocturnal Council for the purpose of 'attending' to his diseased soul, and finally for punishing it.

I cannot doubt the fact of Plato's betrayal, nor that his use of Socrates as the main speaker of the Republic was the most successful attempt to implicate him. But it is another question whether this attempt was conscious.

In order to understand Plato we must visualize the whole contemporary situation. After the Peloponnesian war, the strain of civilization was felt as strongly as ever. The old oligarchic hopes were still alive, and the defeat of Athens had even tended to encourage them. The class struggle continued. Yet Critias' attempt to destroy democracy by carrying out the programme of the Old Oligarch had failed. It had not failed through lack of determination; the most ruthless use of violence had been unsuccessful, in spite of favourable circumstances in the shape of powerful support from victorious Sparta. Plato felt that a complete reconstruction of the programme was needed. The Thirty had been beaten in the realm of power politics largely because they had offended the citizens' sense of justice. The defeat had been largely a moral defeat. The faith of the Great Generation had proved its strength. The Thirty had nothing of this kind to offer; they were moral nihilists. The programme of the Old Oligarch, Plato felt, could not be revived without basing it upon another faith, upon a persuasion which re-affirmed the old values of tribalism, opposing them to the faith of the open society. Men must be taught that justice is inequality, and that the tribe, the collective, stands higher than the individual . But since Socrates' faith was too strong to be challenged openly, Plato was driven to re-interpret it as a faith in the closed society. This was difficult; but it was not impossible. For had not Socrates been killed by the democracy? Had not democracy lost any right to claim him? And had not Socrates always criticized the anonymous multitude as well as its leaders for their lack of wisdom? It was not so very difficult, moreover, to re-interpret Socrates as having recommended the rule of the 'educated', the learned philosophers. In this interpretation, Plato was much encouraged when he discovered that it was also part of the ancient Pythagorean creed; and most of all, when he found, in Archytas of Tarentum, a Pythagorean sage as well as a great and successful statesman. Here, he felt, was the solution of the riddle. Had not Socrates himself encouraged his disciples to participate in politics? Did this not mean that he wanted the enlightened, the wise, to rule? What a difference between the crudity of the ruling mob of Athens and the dignity of an Arcytas ! Surely Socrates, who had never stated his solution of the constitutional problem, must have had Pythagoreanism in mind.

In this way Plato may have found that it was possible to give by degrees a new meaning to the teaching of the most influential member of the Great Generation, and to persuade himself that an opponent whose overwhelming strength he would never have dared to attack directly, was an ally. This, I believe, is the simplest interpretation of the fact that Plato retained Socrates as his main speaker even after he had departed so widely from his teaching that he could no longer deceive himself about this deviation . But it is not the whole story. He felt, I believe, in the depth of his soul, that Socrates' teaching was very different indeed from this presentation, and that he was betraying Socrates. And I think that Plato's continuous efforts to make Socrates re-interpret himself are at the same time Plato's efforts to quiet his own bad conscience. By trying again and again to prove that his teaching was only the logical development of the true Socratic doctrine, he tried to persuade himself that he was not a traitor.

In reading Plato we are, I feel, witnesses of an inner conflict, of a truly titanic struggle in Plato's mind. Even his famous 'fastidious reserve, the suppression of his own personality' , or rather, the attempted suppression - for it is not at all difficult to read between the lines - is an expression of this struggle. And I believe that Plato's influence can partly be explained by the fascination of this conflict between two worlds in one soul, a struggle whose powerful repercussions upon Plato can be felt under that surface of fastidious reserve. This struggle touches our feelings, for it is still going on within ourselves. Plato was the child of a time which is still our own. (We must not forget that it is, after all, only a century since the abolition of slavery in the United States, and even less since the abolition of serfdom in Central Europe.) Nowhere does this inner struggle reveal itself more clearly than in Plato's theory of the soul. That Plato, with his longing for unity and harmony, visualized the structure of the human soul as analogous to that of a class-divided society shows how deeply he must have suffered.

Plato's greatest conflict arises from the deep impression made upon him by the example of Socrates, but his own oligarchic inclinations strive only too successfully against it. In the field of rational argument, the struggle is conducted by using the argument of Socrates' humanitarianism against itself. What appears to be the earliest example of this kind can be found in the Euthyphro . I am not going to be like Euthyphro, Plato assures himself; I shall never take it upon myself to accuse my own father, my own venerated ancestors, of having sinned against a law and a humanitarian morality which is on the level of vulgar piety. Even if they took human life, it was, after all, only the lives of their own serfs, who are no better than criminals; and it is not my task to judge them. Did not Socrates show how hard it is to know what is right and wrong, pious and impious? And was he not himself prosecuted for impiety by these so-called humanitarians? Other traces of Plato's struggle can, I believe, be found in nearly every place where he turns against humanitarian ideas, especially in the Republic. His evasiveness and his resort to scorn in combating the equalitarian theory of justice, his hesitant preface to his defence of lying, to his introduction of racialism, and to his definition of justice, have all been mentioned in previous chapters. But perhaps the clearest expression of the conflict can be found in the Menexenus, that sneering reply to Pericles's funeral oration. Here, I feel, Plato gives himself away. In spite of his attempt to hide his feelings behind irony and scorn, he cannot but show how deeply he was impressed by Pericles' sentiments. This is how Plato makes his 'Socrates' maliciously describe the impression made upon him by Pericles' oration: 'A feeling of exultation stays with me for more than three days; not until the fourth or fifth day, and not without an effort, do I come to my senses and realize where I am.' Who can doubt that Plato reveals here how seriously he was impressed by the creed of the open society, and how hard he had to struggle to come to his senses and to realize where he was - namely, in the camp of its enemies. (앞 문장은 수사의문문으로 마침표 대신 의문부호로 끝내야 한다 - 역자 주.)

VII

Plato's strongest argument in this struggle was, I believe, sincere: According to the humanitarian creed, he argued, we should be ready to help our neighbours. The people need help badly, they are unhappy, they labour under a severe strain, a sense of drift. There is no certainty, no security in life, when everything is in flux. I am ready to help them. But I cannot make them happy without going to the root of the evil.

And he found the root of the evil. It is the 'Fall of Man', the breakdown of the closed society. This discovery convinced him that the Old Oligarch and his followers had been fundamentally right in favouring Sparta against Athens, and in aping the Spartan programme of arresting change. But they had not gone far enough; their analysis had not been carried sufficiently deep. They had not been aware of the fact, or had not cared for it, that even Sparta showed signs of decay, in spite of its heroic effort to arrest all change ; that even Sparta had been half-hearted in her attempts at controlling breeding in order to eliminate the causes of the Fall, the 'variations' and 'irregularities' in the number as well as the quality of the ruling race . (Plato realized that population increase was one of the causes of the Fall.) Also, the Old Oligarch and his followers had thought, in their superficiality, that with the help of a tyranny, such as that of the Thirty, they would be able to restore the good old days. Plato knew better. The great sociologist saw clearly that these tyrannies were supported by, and that they were kindling in their turn, the modern revolutionary spirit ; that they were forced to make concessions to the equalitarian cravings of the people ; and that they had indeed played an important part in the breakdown of tribalism. Plato hated tyranny. only hatred can see as sharply as he did in his famous description of the tyrant. only a genuine enemy of tyranny could say that tyrants must 'stir up one war after another in order to make the people feel the need of a general', of a saviour from extreme danger. Tyranny, Plato insisted, was not the solution, nor any of the current oligarchies. Although it is imperative to keep the people in their place, their suppression is not an end in itself. The end must be the complete return to nature, a complete cleaning of the canvas.

The difference between Plato's theory on the one hand, and that of the Old Oligarch and the Thirty on the other, is due to the influence of the Great Generation. Individualism, equalitarianism, faith in reason and love of freedom were new, powerful, and,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enemies of the open society, dangerous sentiments that had to be fought. Plato had himself felt their influence, and, within himself, he had fought them. His answer to the Great Generation was a truly great effort. It was an effort to close the door which had been opened, and to arrest society by casting upon it the spell of an alluring philosophy, unequalled in depth and richness (이 문장에서 unequalled 앞의 쉼표는 없애서 unequalled로 시작되는 분사구문이 앞의 명사 the spell of an alluring philosophy 혹은 an alluring philosophy를 수식하도록 해야 한다 - 역자 주). In the political field he added but little to the old oligarchic programme against which Pericles had once argued . But he discovered, perhaps unconsciously, the great secret of the revolt against freedom, formulated in our own day by Pareto: 'To take advantage of sentiments, not wasting one's energies in futile efforts to destroy them.' Instead of showing his hostility to reason, he charmed all intellectuals with his brilliance, flattering and thrilling them by his demand that the learned should rule. Although arguing against justice he convinced all righteous men that he was its advocate. Not even to himself did he fully admit that he was combating the freedom of thought for which Socrates had died ; and by making Socrates his champion he persuaded all others that he was fighting for it. Plato thus became, unconsciously, the pioneer of the many propagandists who, often in good faith, developed the technique of appealing to moral, humanitarian sentiments, for anti-humanitarian, immoral purpose. And he achieved the somewhat surprising effect of convincing even great humanitarians of the immorality and selfishness of their creed . I do not doubt that he succeeded in persuading himself. He transfigured his hatred of individual initiative, and his wish to arrest all change, into a love of justice and temperance, of a heavenly state in which everybody is satisfied and happy and in which the crudity of money-grabbing is replaced by laws of generosity and friendship. This dream of unity and beauty and perfection, this aestheticism and holism and collectivism, is the product as well as the symptom of the lost group spirit of tribalism . It is the expression of, and an ardent appeal to, the sentiments of those who suffer from the strain of civilization. (It is part of the strain that we are becoming more and more painfully aware of the gross imperfections in our life, of personal as well as of institutional imperfection ; of avoidable suffering, of waste and of unnecessary ugliness ; and at the same time of the fact that it it not impossible for us to do something about all this, but that such improvements would be just as hard to achieve as they are important (이 문장에서 it it은 it is의 오기이다 - 역자 주). This awareness increases the strain of personal responsibility, of carrying the cross of being human.)

VIII

Socrates had refused to compromise his personal integrity. Plato, with all his uncompromising canvas-cleaning, was led along a path on which he compromised his integrity with every step he took. He was forced to combat free thought, and the pursuit of truth. He was led to defend lying, political miracles, tabooistic superstition, the suppression of truth, and ultimately, brutal violence. In spite of Socrates' warning against misanthropy and misology, he was led to distrust man and to fear argument. In spite of his own hatred of tyranny, he was led to look to a tyrant for help, and to defend the most tyrannical measures. By the internal logic of his anti-humanitarian aim, the internal logic of power, he was led unawares to the same point to which once the Thirty had been led, and at which, later, his friend Dio arrived, and others among his numerous tyrant-disciples . He did not succeed in arresting social change. (Only much later, in the dark ages, was it arrested by the magic spell of the Platonic-Aristotelian essentialism.) Instead, he succeeded in binding himself, by his own spell, to powers which once he had hated.

The lesson which we thus should learn from Plato is the exact opposite of what he tries to teach us. It is a lesson which must not be forgotten. Excellent as Plato's sociological diagnosis was, his own development proves that the therapy he recommended is worse than the evil he tried to combat. Arresting political change is not the remedy ; it cannot bring happiness. We can never return to the alleged innocence and beauty of the closed society . Our dream of heaven cannot be realized on earth. once we begin to rely upon our reason, and to use our powers of criticism, once we feel the call of personal responsibilities, and with it, the responsibility of helping to advance knowledge, we cannot return to a state of implicit submission to tribal magic. For those who have eaten of the tree of knowledge, paradise is lost. The more we try to return to the heroic age of tribalism, the more surely do we arrive at the Inquisition, at the Secret Police, and at a romanticized gangsterism. Beginning with the suppression of reason and truth, we must end with the most brutal and violent destruction of all that is human . There is no return to a harmonious state of nature. If we turn back, then we must go the whole way - we must return to the beasts.

It is an issue which we must face squarely, hard though it may be for us to do so. If we dream of a return to our childhood, if we are tempted to rely on others and so be happy, if we shrink from the task of carrying our cross, the cross of humaneness, of reason, of responsibility, if we lose courage and flinch from the strain, then we must try to fortify ourselves with a clear understanding of the simple decision before us. We can return to the beasts. But if we wish to remain human, then there is only one way, the way into the open society. We must go on into the unknown, the uncertain and insecure, using what reason we may have to plan as well as we can for both security and freedom.

-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Vol I Plato", Karl R. Popper -

10장_열린사회와_그_적들.hwp
0.24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