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장: 탐미주의, 완벽주의,
유토피아주의
‘우선 모든 것을 파괴해버려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 정당함을 실현하기 전에
우리의 저주받은 문명은 전부 사라져야 한다.’
'Mourlan', 뒤 가르의 Les Thibauts에서
플라톤의 강령에 내재된 것에는 내가 믿기에 매우 위험한 정치를 향한 접근방식이 있다. 그 방식을 합리적 사회공학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은 실제로 매우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플라톤식 접근방식은 유토피아적 공학(Utopian engineering)의 접근법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유일하게 합리적이며 점진적 공학(piecemeal engineering)이라는 이름으로 설명될 다른 종류의 사회공학과 반대가 된다. 유토피아식 접근은 철저한 역사주의에 대한 - 우리는 역사의 과정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암시하는 극단적인 역사주의적 접근에 대한 - 명백한 대안으로 보일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만큼 더 위험하다; 동시에, 유토피아적 접근은 인간의 개입을 허용하는 덜 극단적인 플라톤의 역사주의에 대하여 필요한 보완책으로 보인다.
유토피아적 접근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겠다. 모든 합리적 행동은 분명히 어떤 목표를 지닌다. 합리적 행동은, 그 목표를 의식적이고 일관되게 추구하는, 그리고 그 수단을 이 목표에 따라서 결정하는 만큼 합리적이다. 그러므로 목표 선정은, 우리가 합리적으로 행동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해야할 최초의 일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실제적 또는 궁극적 목표를 결정하는데 신중해야 하는데, 그 궁극적 목표와 궁극적 목표로 가는 도중에서 만나는 실제로 수단일 뿐인 중간 혹은 부분적 목표를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이 구분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이 부분적 목표가 궁극적 목표를 낳을 것인지를 질문하지 않는 꼴이 되어버리고, 따라서 우리는 틀림없이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데 실패한다. 이 원칙들은, 정치활동의 영역에 적용되면, 실제 행동을 하기 전에 우리가 궁극적인 정치적 목표를, 혹은 이상적 국가를 결정할 것을 요구한다. 적어도 개략적 개념으로라도 이 궁극적 목표가 결정될 때만, 우리가 목표로 하는 사회에 대한 청사진 같은 것을 우리가 소유했을 때만, 우리는 그 실현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나 수단을 고려하며 실제로 행동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이러한 것들은 합리적이라고 불릴 모든 실제 정치적 움직임의, 그리고 특히 사회공학의 필수적인 예비조치이다.
이것이, 간단히 말해서, 내가 유토피아적 공학이라고 부르는 방법론적 접근이다. 그 접근은 설득력이 있고 매력적이다. 사실상, 그 접근은 역사주의적 편견에 감염되지 않았거나 그 편견에 대항하여 행동하는 모든 사람을 현혹하는 방법론적 접근방식일 따름이다. 이로 인하여 그 접근은 그만큼 더 위험해지며, 그 접근을 비판하는 일이 그만큼 더 시급해진다.
유토피아적 공학을 자세히 비판하는 데로 나아가기 전에, 나는 사회공학에 대한 다른 접근, 이름하여 점진적 공학(piecemeal engineering)이라는 접근을 개괄하고 싶다. 점진적 공학이란 내가 방법론적으로 건전하다고 생각하는 접근이다. 이 방식을 채택하는 정치인은 자신의 생각에 앞서서 사회에 관한 청사진을 가질 수도 있고 가지지 않을 수도 있으며, 인류가 어느 날 이상적인 국가를 구현하여 지구상에서 행복과 완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희망할 수도 있고 희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완성이란, 이룩될 수 있다면, 요원하여 인간의 모든 세대와 현재 살아가는 세대가 꿈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할 것이다; 아마도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제도적 수단이 없기 때문에 행복하게 만들어달라는 요구보다는, 가능한 곳에서는 불행하지 않게 해달라는 요구.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면, 가능한 모든 도움을 달라고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점진적 공학가는 따라서, 사회의 가장 큰 궁극적 선(善)을 추구하여 그 선을 위하여 투쟁하는 것보다는 사회의 가장 크고 가장 시급한 악(惡)을 추적하고 대항하여 싸우는 방법을 채택할 것이다. 이 차이점은 단순히 언어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사실상, 그 차이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인간의 삶을 향상시키는 합당한 방법과, 실제로 실험된다면 쉽게 인간 고통의 무참한 증가를 야기할 방법 사이의 차이이다. 그것은 어느 때도 적용할 수 있는 방법과, 그 방법을 옹호하면 상황이 더 호전될 훗날까지 끊임없이 연기하는 행동이라는 수단이 쉽게 되어버릴 방법 사이의 차이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실제로 성공적이었던 문제를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곧 밝혀지는 바 러시아도 포함하여) 개선하는 유일한 방법과, 적용하는 곳마다 이성을 대신해서 폭력사용이 일어날 뿐이며 그 자체를 포기하지 않으면 원본 청사진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방법 사이의 차이이다.
자신의 방법을 옹호하여, 점진적 공학가는 고통과 불의와 전쟁에 대항하는 체계적인 싸움은, 어떤 이상을 세우기 위한 싸움보다, 다수 사람들의 인정과 동의를 받기가 더 쉽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 아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사회적 악(惡)의, 다시 말해서, 사회적 상황의 존재는 비교적 잘 설정될 수 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리 바꾸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상적인 사회에 대하여 논하기는 무한히 더욱 어렵다. 사회생활은 몹시 복잡해서 대규모로 사회공학을 할 목적으로 만든 청사진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거나 혹은 아무도 없다; 그 청사진이 실용적인지, 실제 향상을 이룩할지; 그 청사진이 어떤 종류의 고통을 포함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청사진의 실현을 위한 수단은 무엇인지. 이것과 반대로, 점진적 공학을 위한 청사진은 상대적으로 간단하다. 그것들은 제도 각각을 위한, 예를 들어 건강보험과 실업보험, 혹은 중재 재판정이나 불황대비 예산책정이나 교육개혁을 위한 청사진이다. 그 청사진이 잘못되면,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고 재조정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 청사진은 덜 위험하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논란의 소지가 적다. 그러나 현존하는 악과 그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수단에 관하여 합당한 의견일치를 이루는 것이, 이상적인 선(善)과 그 선을 실현하는 수단에 관하여 합당한 의견일치를 이루는 것보다 더 쉽다면, 계획을 실행함에서 모든 합리적인 정치적 개혁 중에서 가장 큰 실제적 난제를 - 열정과 폭력을 대신해서 이성을 사용하는 문제 - 점진적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극복한다는 데 또한 더 많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합당한 타협에 다다를, 그리하여 민주주의적 방법으로 진보를 이룩할 가능성이 생겨날 것이다. ('타협[compromise]'은 추악한 말이지만 그 말의 올바른 사용법을 우리가 배운다는 것은 중요하다.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런 종류의 영향에 저항해야 할지라도, 제도는 불가피하게 환경, 이해관계, 기타 등등과의 타협의 결과이다.)
그것과 반대로, 사회 전체에 관한 청사진을 사용하여 이상적인 국가를 구현하려는 유토피아적 노력은, 소수가 갖는 강력한 중앙집권화된 통치를 요구하고 그리하여 독재체제를 불러오기 쉬운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유토피아적 접근방식에 대한 비판으로 생각한다; 그 까닭은 내가, 통치력의 원리에 관한 장에서, 권위적인 통치란 매우 가증스러운 정부 형태라는 것을 밝히려고 애를 썼기 때문이다. 그 장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몇 가지 요점은 우리에게 유토피아적 접근방식에 대항하는 훨씬 더 직접적인 주장을 제공한다. 인자한 독재자가 직면하는 한 가지 난제는 자신이 취한 조치의 효과가 자신의 선의(善意)와 일치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드 토크빌이 100여년 전에 분명하게 본 바와 같이)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1805 ~1859-은 프랑스 역사학자이자 정치가로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명저를 남김 - 역자 주). 그 난제는 권위주의란 비판을 분명히 억누른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인자한 독재자는 자신이 취한 조치에 관하여 불평을 쉽사리 들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견제가 없다면, 그는 자신이 취한 조치가 원했던 선량한 목표를 성취했는지 알아내기 어렵다. 그런 상황은 유토피아적 공학가에게 훨씬 더 악화될 것이 틀림없다. 사회 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랜 기간에 걸쳐 상당한 불편을 초래할 커다란 사업이다. 따라서, 유토피아적 공학가는 많은 불평에 귀를 막아야 할 것이다; 사실상, 부당한 반대의견을 억누르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는, 레닌처럼, '달걀을 깨지 않고는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말로써, 유토피아적 공학가는 합당한 비판 또한 분명히 일관되게 억누른다. 유토피아적 공학가가 당면하는 또 다른 난제는 독재자의 후계자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7 장에서 나는 이 문제의 몇 부분을 언급했다. 유토피아적 공학은, 똑같이 인자한 후계자를 찾으려고 애를 쓰는 인자한 독재자가 직면하는 난제와 흡사하지만 훨씬 더 심각한 난제를 불러온다(7 장 註 25 참조 [이 주는 인자한 독재자가 후계자로 자신과 같은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설명이다 - 역자 주]). 그러한 유토피아적 사업의 포괄성 때문에 한 사회 공학가나 한 무리의 공학가의 일생 동안에 그 목표를 실현할 개연성이 없어진다. 그리고 후계자가 동일한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 이상을 위하여 사람들이 겪은 모든 고초는 헛수고가 된 것이다.
이 논증이 일반화가 되면 유토피아적 접근에 더 심한 비판이 나오게 된다. 이 접근은, 우리가 원본 청사진이 아마도 어느 정도 조정은 되겠지만 그 사업이 완성될 때까지 사업의 기초로 남아 있는다고 상정될 때만, 실용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이고 정신적인 혁명의 시간 될 것이고, 정치적 분야에서 새로운 실험을 하고 새로운 경험을 쌓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디어와 이상(理想)이 변하리라고 예상된다. 원본 청사진을 만들었던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국가로 보였던 것이 그들의 후계자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전체주의적 접근 전체가 붕괴한다. 처음에 궁극적인 정치적 목표를 설정하고 그 다음에 그 목표를 향하여 움직이는 것은, 우리가 그 목표가 실현과정에서 상당히 변할 것임을 인정한다면, 쓸모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취한 행동이 새로운 목표를 실현하는 데서 실제로 벗어난다는 것이 금방이라도 밝혀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새로운 목표에 따라서 진로를 수정한다면, 우리는 동일한 위험에 빠지게 된다. 지금까지 치른 모든 희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곳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점진적 타협으로 실현하는 것보다 먼 이상을 한 걸음에 달려가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그 이상이 매우 멀리 떨어져있다면, 심지어 지금까지 취한 조치가 그 이상으로부터 벗어나는지 혹은 그 이상을 향하고 있는지 조차 말하기 어렵게 됨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만약 과정이 갈지자(之) 모양으로 진행되거나, 헤겔이 사용한 은어(隱語)인 '변증법적으로' 진행되거나, 혹은 전혀 분명하지 않게 계획되면, 특히 그렇다. (이것은 목적은 얼마나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있는가라는 오래되고 다소 유치한 질문과 관련이 있다. 어떤 목적도 모든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주장은 차치하고, 나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목적은 더 멀리 떨어진 이상(理想)이 정당화할 수 없는 일시적 조치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일보한 가정, 즉 (a) 이 이상이 무엇인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합리적인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과 (b) 그 이상을 실현하는 최상의 방법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합리적인 방법이 존재한다는 가정과 함께, 유토피아적 접근이란 하나의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이상을 믿는 플라톤만이 구제할 수 있음을 우리는 이제 안다. 그렇게 원대한 가정만이 유토피아적 방법론은 완전히 무용지물이라고 선언하는 우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플라톤 자신과 가장 열정적인 플라톤주의자도 (a)가 명백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궁극적 목표를 결정하는 합리적인 방법이 없고, 있다고 할지라도 겨우 어떤 종류의 직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므로 유토피아적 공학가들 사이의 의견차는, 합리적인 방법이 없어서, 이성 대신에 힘의 사용, 즉 폭력을 틀림없이 야기한다. 어떤 분명한 방향으로 진보가 조금이라고 이룩된다면, 그것은 채택된 방법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채택된 방법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공은 지도자의 우수함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수한 지도자란 합리적인 방법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운에 따라 생겨난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비판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이상이란 실현될 수 없다고, 이상은 늘 유토피아로 남는다고 주장을 함으로써 이상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는 실현 불가능하다고 독단적으로 선언되었던 많은 것들이, 예를 들어 시민들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제도 설립 즉, 국가 내부에서의 범죄예방을 위한 제도 설립이 실현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유효한 비판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예를 들어 무력 침략이나 위협 같은 국제 범죄 예방을 위한 동일한 제도 설립이 흔히 유토피아적이라고 낙인이 찍혔지만, 심지어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유토피아적 공학이라는 이름으로 비판하는 것은 사회를 전체로서 재건할 것을 권하는데,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가진 경험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 실제 결과를 알아내기 어려운 싹쓸이식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가 그런 야심찬 요구를 실현하는 데 필요할 사실적 지식 같은 것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을지라도, 유토피아적 공학은 국가 전체에 대하여 합리적으로 계획을 세울 것을 주장한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기획에 실용적인 경험이 부족하고 사실과 관련된 지식은 경험에 기초하여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지식을 소유할 수 없다. 현재로서, 대규모의 공학에 필요한 사회학적 지식은 존재하지 않을 따름이다.
이 비판을 고찰하면, 유토피아적 공학가는 실제 경험의 필요성과, 실제 경험에 기초한 사회적 기술의 필요성을 인정할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실제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적 실험을 두려워해서 움츠린다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더 많이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유토피아적 공학가는 항변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유토피아적 공학이란 사회에 실험적 방식을 적용하는 것뿐이라고 덧붙여 말할 것이다. 실험은 싹쓸이식 변화를 포함하지 않고는 수행될 수 없다. 그 실험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사는 현대 사회의 독특한 특성 때문에, 대규모일 것임이 틀림없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속에서의 실험은, 한 공장이나 마을 혹은 어느 지구에 국한된다면, 매우 절실하게 필요한 현실적인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유토피아적 공학을 지지하는 그런 주장은 옹호될 수 없다고 광범위하게 유포된 편견, 이름하여 사회적 실험은 '대규모'여야 한다는, 사회적 실험이 현실적 상황에서 수행되려면 사회 전체를 포함해야 한다는 편견을 드러낸다. 그러나 점진적 사회 실험은 '작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상황에서, 사회의 한 가운데서 수행될 수 있는데 다시 말해서 사회 전체를 혁명화하지 않고도 가능하다. 사실상, 우리는 그런 실험을 늘 하고 있다. 새로운 종류의 생명보험, 새로운 종류의 세제, 새로운 형법 개혁의 도입 모두는 사회를 전체적으로 재구성하지 않고도 사회 전체를 통하여 큰 반향을 불러오는 사회적 실험이다. 심지어 새로운 가게를 개점하거나, 극장 표를 예약하는 사람도 작은 규모로 일종의 사회적 실험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사회적 상황에 관한 모든 지식은 이런 종류의 실험을 함으로써 얻어진 경험에 기초한다. 우리가 반대하는 유토피아적 공학가는, 사회주의 속에서의 실험이란 실험실 상황에서, 예를 들어 격리된 마을에서 실행된다면 가치가 없다라고 주장한다면, 옳은데 그 까닭은 우리가 알고자 하는 바는 평범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의 사회에서 사건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본보기가 유토피아적 공학가의 편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폭로한다. 그는 우리가 사회 전체 구조로 실험을 하려면 전체 구조를 개조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는 그러므로 보다 신중한(modest) 실험을 단지 작은(small) 사회의 전체 구조를 개조하는 실험으로서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많이 배울 수 있는 종류의 실험은 한 번에 한 사회 제도를 변경하는 것이다. 그 까닭은 이런 방법으로서만 우리는 어떻게 다른 제도의 틀 속에 제도를 맞추는지와 어떻게 제도를 조정하여 우리의 의도에 따라서 그 제도들이 작동하도록 만들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만 우리는 미래의 개혁 의지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 분명한 중력의 반격을 모험하지 않고, 실수를 저지를 수 있고 우리가 저지른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다. 게다가, 유토피아적 방식은 수없이 많은 희생이 치러진 청사진에 위험한 독단적 첨가물을 틀림없이 붙인다. 강력한 이해관계가 실험의 성공과 연계될 것이 분명하다. 이 모든 것은 실험의 합리성 혹은 과학적 가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점진적 방식으로는 반복 실험과 지속적인 재조정이 가능하다. 사실상, 점진적 방식은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실수를 해명하고 넘어가려고 들거나 자신들이 항상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를 쓰는 대신에, 자신들의 실수에 조심하는 다행스러운 상황을 낳는다. 이것은 - 유토피아적 기획이나 역사주의적 예언이 아니고 - 과학적 방식의 비결 전부는 실수로부터 배우려는 자세이기 때문에, 과학적 방식을 정치에 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믿는 바 이 견해들은 사회적이고, 예를 들어 기계적인 공학을 비교함으로써 확증될 수 있다. 유토피아적 공학가는 물론 기계 기술자가 간혹 심지어 매우 복잡한 기계류를 전체로 계획한다고,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청사진은 특정 종류의 기계류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 기계류를 생산하는 공장 전체를 포함하며 미리 계획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의 대답은 자신이 충분한 경험을, 다시 말해서 시행착오로 개발된 이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계 기술자는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가 되리라. 그러나 이것은 기계 기술자는 이미 모든 종류의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가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다시 말해서, 그가 점진적 방식을 적용하여 습득한 경험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가 새로 만들어내는 기계류는 상당히 많은 작은 개선의 결과이다. 그는 보통 먼저 모형을 만들어, 그 모형의 여러 부품에 많은 점진적 조정을 한 다음에야 생산을 위한 자신의 최종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간다. 유사하게, 자신의 기계를 생산하기 위한 그의 계획은 많은 경험을, 즉 옛 공장에서 이루어진 많은 점진적 개선을 결합한다. 대량의 즉, 대규모 방식은 점진적 방식이 우리들에게 먼저 많은 자세한 경험을 제공하는 곳에서, 그리고 심지어 그 때에도 단지 이 경험의 영역 안에서만 효력을 발휘한다. 청사진에만 기초하여 새로운 엔진을 생산하는 데로 나아갈 각오가 된 제조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초안이 처음에 모형을 만들어 그 모형을 가능한 한 많은 작은 조정으로 '개발되지' 않고 가장 우수한 전문가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할지라도.
정치에서 이 비판 즉, 플라톤의 이상주의를 마르크스가 '유토피아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을 대조하는 것이 아마도 유익하다. 마르크스의 비판과 나의 비판에 공통적인 것은 둘 다 더 많은 현실주의 요구한다는 점이다. 우리 둘은 유토피아적 계획이 그 계획들이 상상되는 방식으로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데, 그 까닭은 사회적 행동은 예상되는 결과를 정확하게 낳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곳에서 행동하면서 배우고 - 더 정확하게는 우리가 배워야 하고 - 그래서 우리의 견해를 수정하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 때문에 점진적 접근이 무효화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많은 차이점이 있다. 유토피아주의를 논박하면서, 마르크스는 사실상 모든 사회 공학을 비난한다 - 이 점을 사람들은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사회란 우리가 지닌 합리적 계획에 따라서가 아니라 역사의 법칙에 따라서 성장해야 하기 때문에, 사회제도의 합리적인 기획에 관한 믿음을 완전히 비현실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역사적 과정의 산고(産苦)를 더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모든 사회공학에 반대하여 철저한 역사주의적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아마도 내가 비현실적으로 공격한 요소들 중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지라도, 유토피아주의에는 플라톤의 접근방식에서 유난히 특징적이고 마르크스가 반대하지 않는 한 가지 요소가 있다. 그것은 싹쓸이 유토피아주의이자, 사회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전체로서 다루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회악의 근원까지 파헤쳐야 한다는, 우리가 (뒤 가르가 말하는 바와 같이) '세상에 적합성을 가져오기를' 희망한다면 불쾌감을 주는 사회제도를 철저히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신념이다. 그것은, 요컨대, 비타협적인 급진주의(radicalism)이다. (독자들은 내가 이 급진주의라는 용어를 - 요즘 보통 쓰이는 '자유적 진보주의'의 의미가 아니라 -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는' 자세를 지칭하기 위하여 그 원래 문자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것이다.) 플라톤과 마르크스 두 사람은 전체 사회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킬 종말론적 혁명을 꿈꾸고 있다.
이 싹쓸이, 플라톤식 접근방식의 이 극단적 급진주의는 (그리고 마르크스식 접근방식의 극단적 급진주의 또한), 내가 믿는 바, 탐미주의와, 즉 우리들의 세상보다 조금 더 낫고 더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그 세상의 모든 추악함이 없는 세상을 건설하려는 욕망과 연계되어 있다: 엉성하게 조각을 덧댄 낡은 옷이 아니라 정말로 아름답고 새로운 세계인 완전히 새로운 가운. 이 탐미주의는 매우 이해될만한 견해이다; 사실상, 나는 우리 대부분이 완벽에 관한 그런 꿈으로 고통을 당한다고 믿는다. (왜 우리가 그런 꿈으로 고통을 당하는지 그 몇 가지 이유는 다음 장에 나오리라고 나는 기대한다.) 그러나 이 탐미주의적 열정은 이성(理性)에 의해서, 책임감에 의해서, 그리고 도움을 주려는 인도주의적 충동에 의해서 억제될 때만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탐미주의적 열정은 신경증이나 병적 흥분 상태로 발전하기 쉬운 위험천만한 열정이 된다.
우리는 이 탐미주의가 플라톤에게서 보다 더 강하게 표현된 곳을 발견하지 못한다. 플라톤은 예술가였다; 그리고 다수의 최고 예술가들처럼, 그는 모형, 자기 작품의 '신성한 원형'을 시각화하여 그 원형을 성실하게 '복제하려고' 노력했다. 앞장에 인용된 많은 글이 이 점을 예시한다. 플라톤이 논리학으로서 설명하는 것은 주로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닌 세상에 대한 지적(知的) 직감이다. 그가 주장하는 훈련된 철학자는 '아름답고 정의롭고, 선량한 것의 진실을 보고', 천상에서 지상으로 그 진실을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다. 플라톤에게 정치란 제왕적 예술이다. 그 정치는 예술이다 - 우리가 말하는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라는, 혹은 상황을 처리하는 기술이라는 은유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단어의 보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그것은 음악이나 회화, 혹은 건축과 같이 구성의 예술이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정치가는 아름다움을 위하여 도시를 구성한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항의를 해야겠다. 나는 인간의 삶이 예술가가 지닌 자기 표현을 위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너무 많이 방해가 되지 않는 한, 모든 사람에게는 원하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정형화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내가 탐미주의적 충동에 많이 공감을 한다 할지라도, 예술가는 다른 재료에서 표현을 하라고 나는 제안한다. 정치는 평등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원칙을 유지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꿈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과 불의로 고생하는 사람을 돕는다는 필요성에 굴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목적에 부합하는 제도를 구축하는 필요성에 굴복해야 한다.
플라톤의 철저한 급진주의, 즉 싹쓸이식 행동을 요구하는 것과 그의 탐미주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관찰하는 것은 흥미롭다. 아래의 글은 매우 특징적이다. 플라톤은 '신성한 것과 교감하는 철학자'에 관하여 말하면서, 자신은 '자신이 지닌 천상의 영상을 도시 속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실현하려는.. 충동에 의하여 압도'당할 것이라고 처음으로 언급한다, - '그 설계가가 신성한 것을 자신의 모형으로 지니고 있는 예술가가 아니라면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도시. 설계가들의 관하여 상세한 설명을 요청 받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그들은 도시와 사람들의 인격을 화포(canvas)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우선 자신들의 화포를 깨끗하게 만들 거야 -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다른 사람과 달라지게 되는 지점이지. 그들에게 깨끗한 화포가 주어지지 않거나, 그들 자신이 화포를 청소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도시나 개인에게 작업을 시작하지 않을 거야 (그들은 법률도 제정하지 않지).'
플라톤이 화포 청소(canvas-cleaning)에 관하여 말할 때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조금 나중에 설명된다. '그게 어떻게 이루어질까요?'라고 글라우콘이 묻자, 소크라테스는 대답한다, '열살 이상의 모든 시민은 도시로부터 추방되어 시골 어느 곳으로 이송되어야 해; 그리고 부모의 습관이나 버릇의 영향을 받지 않은 아이들은 국가가 떠맡아야 해. 그 아이들은 우리가 설명한 [진실로 철학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법률에 따라서 교육되어야지.' (물론 철학자들은 추방될 시민들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들은 교육가로 남고, 그 철학자가 임무를 수행하도록 돕는 시민이 아닌 사람들도 아마도 남는다.) 동일한 정신으로 플라톤은 정치가에서 왕도의 정치학(Royal Science of Statesmanship)에 따라서 통치하는 왕족 통치자에 관하여 말한다: '그들이 법에 의해서든 아니면 법 없이 복종하거나 불복하는 백성을 통치하게 되든;... 그리고 그들이 국가의 시민을 살해하거나 이주시킴[혹은 '추방함']으로써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국가를 정화하든... - 그들이 과학과 정의(正義)에 따라서 진행하고 국가를... 보전하고 국가를 과거보다 더 낫게 만든다면, 이런 형태의 정부는 올바른 유일한 정부라고 선언되어 마땅하다.'
이것이 예술가-정치인이 나아가야 하는 길이다. 이것이 화포 청소(canvas-cleaning)가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현존하는 제도와 전통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그는 정화하고 숙청하고, 쫓아내고, 추방하고 죽여야 한다. ('말살하다[liquidate]'가 무서운 현대적 용어이다.) 플라톤의 진술은 정말로 모든 형태의 급진주의의 비타협적 태도를 설명한다 - 타협을 거부하는 탐미주의자의 비타협적 태도를. 사회란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워야 한다는 견해는 매우 쉽게 폭력적 행동을 초래한다. 그러나 이 모든 급진주의와 폭력은 비현실적이며 헛되다. (이것은 러시아의 발전 사례로 밝혀졌다. 소위 '전쟁 공산주의'라는 화포 청소가 야기한 경제파국 후에, 레닌은 그 원칙이나 기술을 의식적으로 공식화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실제로 일종의 점진적 공학인 '신 경제 정책'을 도입했다. 그는 그렇게도 많은 인간의 고통을 낳으며 뿌리가 뽑혀버린 구상의 특징 대부분을 복원함으로서 시작했다. 화폐, 시장, 소득격차, 그리고 사유재산이 - 잠시 동안 심지어 생산에서 사기업까지 - 도입되었고, 이 기초가 재설립된 후에야 개혁의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었다.)
플라톤의 탐미주의적 급진주의의 기초를 비판하기 위하여, 우리는 두 가지 다른 점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첫 번째 것은 이렇다. 우리의 '사회체계'와 그 체계를 다른 '체계'로 바꿀 필요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사람이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전에 깨끗하게 지워져야 하는 화포(canvas)에 그려진 그림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몇 가지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차이점 하나는 화가와 그 화가와 공동작업을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삶을 가능케 하는 제도와 화가의 꿈과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계획, 화가가 생각하는 적합성과 도덕성의 기준, 이 모든 것들이 사회체계, 즉 지워져야 할 그림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화포를 청소하려면, 그들은 자신과 자신이 지닌 유토피아적 계획을 파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따라올 것은 아마도 아름다운 플라톤식 이상[理想]의 복제품이 아니고 혼란일 것이다.) 정치적 예술가는 아르키메데스처럼 지렛대로 사회를 움직이기 위하여 자신이 설 수 있는 사회 밖의 장소를 소리쳐 요구한다. 그러나 그런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란 재건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작동해야 한다. 이것이 사회공학에서 더 많은 경험을 습득할 때까지 우리가 사회제도를 점진적으로 개혁해야 하는 간단한 이유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더 중요한 두 번째 요점, 즉 급진주의 속에 내재하는 비이성주의에 다다른다. 모든 문제에서, 우리는 시행착오로써, 실수를 저지르고 개선을 함으로써 배울 수 있을 따름이다; 영감(靈感)이 경험에 의하여 견제 당한다면 매우 귀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영감에 의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의 사회를 완전히 재건하면 즉각 작동되는 체제가 생겨나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오히려 우리는 경험부족 때문에, 작은 조정을 오랫동안 그리고 힘들여 해나가는 과정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는 많은 실수가 저질러지리라고 예상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 적용을 지지하는 점진적 공학이라는 그 합리적 방식에 의하여. 그러나 이 방식이 충분히 급진적이지 못하다고 혐오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화포로 새롭게 시작하기 위하여, 그들이 새로 건설한 사회를 다시 지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이유로 새로운 시작이 완결을 불러오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어느 지점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할 것이다. 처음에는 급진적 화포청소(canvas-cleaning)를 해본 후에야, 이것을 인정하여 점진적 개선이라는 보다 신중한 방식을 채택할 마음을 먹는 사람은 그들이 취한 처음의 싹쓸이식이고 폭력적인 행동이 완전히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탐미주의와 급진주의는 분명히 우리로 하여금 이성을 버리도록 만들고, 이성을 정치적 기적을 바라는 난폭한 희망으로 바꾸어 놓는다. 아름다운 세상에 관한 꿈에 도취되어 나타나는 이 비이성적 태도를 나는 낭만주의(Romanticism)이라고 부른다. 낭만주의는 천상의 도시를 과거나 미래에서 구한다; 낭만주의는 '자연으로 돌아가라', 혹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라'고 설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이성보다는 우리의 감정에 호소한다. 심지어 지구상에 천국을 만들겠다는 최상의 의도를 가지고도, 낭만주의는 지옥을 만들어낼 뿐이다 - 인간만이 동료 인간을 위하여 마련하는 그 지옥.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권 플라톤", 칼 포퍼 -
CHAPTER 9: AESTHETICISM,
PERFECTIONISM,
UTOPIANISM
'Everything has got to be smashed to start with.
Our whole damned civilization has got to go, before
we can bring any decency into the world.'
'Mourlan', in DU GARD'S Les Thibauts.
Inherent in Plato's programme there is a certain approach towards politics which, I believe, is most dangerous. Its analysis is of great practical importance from the point of view rational social engineering. The Platonic approach I have in mind can be described as that of Utopian engineering, as opposed to another kind of social engineering which I consider as the only rational one, and which may be described by the name of piecemeal engineering. The Utopian approach is the more dangerous as it may seem to be the obvious alternative to an out-and-out historicism - to a radically historicist approach which implies that we cannot alter the course of history; at the same time, it appears to be a necessary complement to a less radical historicism, like that of Plato, which permits human interference.
The Utopian approach may be described as follows. Any rational action must have a certain aim. It is rational in the same degree as it pursues its aim consciously and consistently, and as it determines its means according to this end. To choose the end is therefore the first thing we have to do if we wish to act rationally; and we must be careful to determine our real or ultimate ends, from which we must distinguish clearly those intermediate or partial ends which actually are only means, or steps on the way, to the ultimate end. If we neglect this distinction, then we must also neglect to ask whether these partial ends are likely to promote the ultimate end, and accordingly, we must fail to act rationally. These principles, if applied to the realm of political activity, demand that we must determine our ultimate political aim, or the Ideal State, before taking any practical action. only when this ultimate aim is determined, in rough outline at least, only when we are in possession of something like a blueprint of the society at which we aim, only then can we begin to consider the best ways and means for its realization, and to draw up a plan for practical action. These are the necessary preliminaries of any practical political move that can be called rational, and especially of social engineering.
This, in brief, is the methodological approach which I call Utopian engineering . It is convincing and attractive. In fact, it is just the kind of methodological approach to attract all those who are either unaffected by historicist prejudices or reacting against them. This makes it only the more dangerous, and its criticism the more imperative.
Before proceeding to criticize Utopian engineering in detail, I wish to outline another approach to social engineering, namely, that of piecemeal engineering. It is an approach which I think to be methodologically sound. The politician who adopts this method may or may not have a blueprint of society before his mind, he may or may not hope that mankind will one day realize an ideal state, and achieve happiness and perfection on earth (이 문장에서는 before his mind와 he may or may not hope 사이에 접속사 and를 넣는 것이 옳다 - 역자 주). But he will be aware that perfection, if at all attainable, is far distant, and that every generation of men, and therefore also the living, have a dream; perhaps not so much a claim to be made happy, for there are no institutional means of making a man happy, but a claim not to be made unhappy, where it can be avoided. They have a claim to be given all possible help, if they suffer. The piecemeal engineer will, accordingly, adopt the method of searching for, and fighting against, the greatest and most urgent evils of society, rather than searching for, and fighting for, its greatest ultimate good . This difference is far from being merely verbal. In fact, it is most important. It is the difference between a reasonable method of improving the lot of man, and a method which, if really tried, may easily lead to an intolerable increase in human suffering. It is the difference between a method which can be applied at any moment, and a method whose advocacy may easily become a means of continually postponing action until a later date, when conditions are more favourable. And it is also the difference between the only method of improving matters which has so far been really successful, at any time, and in any place (Russia included, as will be seen), and a method which, wherever it has been tried, has led only to the use of violence in place of reason, and if not to its own abandonment, at any rate to that of its original blueprint.
In favour of his method, the piecemeal engineer can claim that a systematic fight against suffering and injustice and war is more likely to be supported by the approval and agreement of a great number of people than the fight for the establishment of some ideal. The existence of social evils, that is to say, of social conditions under which many men are suffering, can be comparatively well established. Those who suffer can judge for themselves, and the others can hardly deny that they would not like to change places. It is infinitely more difficult to reason about an ideal society. Social life is so complicated that few men, or none at all, could judge a blueprint for social engineering on the grand scale; whether it be practicable; whether it would result in a real improvement; what kind of suffering it may involve; and what may be the means for its realization. As opposed to this, blueprints for piecemeal engineering are comparatively simple. They are blueprints for single institutions, for health and unemployed insurance, for instance, or arbitration courts, or anti-depression budgeting , or educational reform. If they go wrong, the damage is not very great, and a re-adjustment not very difficult. They are less risky, and for this very reason less controversial. But if it is easier to reach a reasonable agreement about existing evils and the means of combating them than it is about an ideal good and the means of its realization, then there is also more hope that by using the piecemeal method we may get over the very greatest practical difficulty of all reasonable political reform, namely, the use of reason, instead of passion and violence, in executing the programme. There will be a possibility of reaching a reasonable compromise and therefore of achieving the improvement by democratic methods. ('Compromise' is an ugly word, but it is important for us to learn its proper use. Institutions are inevitably the result of a compromise with circumstances, interests, etc., though as persons we should resist influences of this kind.)
As opposed to that, the Utopian attempt to realize an ideal state, using a blueprint of society as a whole, is one which demands a strong centralized rule of a few, and which therefore is likely to lead to a dictatorship . This I consider a criticism of the Utopian approach; for I have tried to show, in the chapter on the Principle of Leadership, that an authoritarian rule is a most objectionable form of government. Some points not touched upon in that chapter furnish us with even more direct arguments against the Utopian approach. one of the difficulties faced by a benevolent dictator is to find whether the effects of his measures agree with his good intentions (as de Tocqueville saw clearly more than a hundred years ago ). The difficulty arises out of the fact that authoritarianism must discourage criticism; accordingly, the benevolent dictator will not easily hear of complaints concerning the measures he has taken. But without some such check, he can hardly find out whether his measures achieve the desired benevolent aim. The situation must become even worse for the Utopian engineer. The reconstruction of society is a big undertaking which must cause considerable inconvenience to many, and for a considerable span of time. Accordingly, the Utopian engineer will have to be deaf to many complaints; in fact, it will be part of his business to suppress unreasonable objections. (He will say, like Lenin, 'You can't make an omelette without breaking eggs.') But with it, he must invariably suppress reasonable criticism also. Another difficulty of Utopian engineering is related to the problem of the dictator's successor. In chapter 7 I have mentioned certain parts of this problem. Utopian engineering raises a difficulty analogous to but even more serious than the one which faces the benevolent tyrant who tries to find an equally benevolent successor (see note 25 to chapter 7). The very sweep of such a Utopian undertaking makes it improbable that it will realize its ends during the life time of one social engineer, or group of engineers. And if the successors do not pursue the same ideal, then all the sufferings of the people for the sake of the ideal may have been in vain.
A generalization of this agreement leads to a further criticism of the Utopian approach. This approach, it is clear, can be of practical value only if we assume that the original blueprint, perhaps with certain adjustments, remain the basis of the work until it is completed. But that will take some time. It will be a time of revolutions, both political and spiritual, and of new experiments and experience in the political field. It is therefore to be expected that ideas and ideals will change. What had appeared the ideal state to the people who made the original blueprint, may not appear so to their successors. If that is granted, then the whole approach breaks down. The method of first establishing an ultimate political aim and then beginning to move towards it is futile if we admit that the aim may be considerably changed during the process of its realization. It may at any moment turn out that the steps so far taken actually lead away from the realization of the new aim. And if we change our direction according to the new aim, then we expose ourselves to the same risk again. In spite of all the sacrifices made, we may never get anywhere at all. Those who prefer one step towards a distant ideal to the realization of a piecemeal compromise should always remember that if the ideal is very distant, it may even become difficult to say whether the step taken was towards or away from it. This is especially so if the course should proceed by zigzag steps, or, in Hegel's jargon, 'dialectically', or if it is not clearly planned at all. (This bears upon the old and somewhat childish question of how far the end can justify the means. Apart from claiming that no end could ever justify all means, I think that a fairly concrete and realizable end may justify temporary measures which a more distant ideal never could .)
We now see that the Utopian approach can be saved only by the Platonic belief in one absolute and unchanging ideal, together with two further assumptions, namely (a) that there are rational methods to determine once and for all what this ideal is, and (b) what the best means of its realization are. only such far-reaching assumptions could prevent us from declaring the Utopian methodology to be utterly futile. But even Plato himself and the most ardent Platonists would admit that (a) is certainly not true; that there is no rational method for determining the ultimate aim, but, if anything, only some kind of intuition. Any difference of opinion between Utopian engineers must therefore lead, in the absence of rational methods, to the use of power instead of reason, i.e. to violence. If any progress in any definite direction is made at all, then it is made in spite of the method adopted, not because of it. The success may be due, for instance, to the excellence of the leaders; but we must never forget that excellent leaders cannot be produced by rational methods, but only by luck.
It is important to understand this criticism properly; I do not criticize the ideal by claiming that an ideal can never be realized, that it must always remain a Utopia. This would not be a valid criticism, for many things have been realized which have once been dogmatically declared to be unrealizable, for instance, the establishment of institutions for securing civil peace, i.e. for the prevention of crime within the state; and I think that, for instance, the establishment of corresponding institutions for the prevention of international crime, i.e. armed aggression or blackmail, though often branded as Utopian, is not even a very difficult problem . What I criticize under the name Utopian engineering recommends the reconstruction of society as a whole, i.e. very sweeping changes whose practical consequences are hard to calculate, owing to our limited experiences (이 문장에서 under the name Utopian engineering은 under the name of Utopian engineering으로 써서 of를 넣어야 한다 - 역자 주). It claims to plan rationally for the whole of society, although we do not possess anything like the factual knowledge which would be necessary to make good such an ambitious claim. We cannot possess such knowledge since we have insufficient practical experience in this kind of planning, and knowledge of facts must be based upon experience. At present, the sociological knowledge necessary for large-scale engineering is simply non-existent.
In view of this criticism, the Utopian engineer is likely to grant the need for practical experience, and for a social technology based upon practical experiences. But he will argue that we shall never know more about these matters if we recoil from making social experiments which alone can furnish us with the practical experience needed. And he might add that Utopian engineering is nothing but the application of the experimental method to society. Experiments cannot be carried out without involving sweeping changes. They must be on a large scale, owing to the peculiar character of modern society with its great masses of people. An experiment in socialism, for instance, if confined to a factory, or to a village, or even to a district, would never give us the kind of realistic information which need so urgently.
Such arguments in favour of Utopian engineering exhibit a prejudice which is as widely held as it is untenable, namely, the prejudice that social experiments must be on a 'large scale', that they must involve the whole of society if they are to be carried out under realistic conditions. But piecemeal social experiments can be carried out under realistic conditions, in the midst of society, in spite of being on a 'small scale', that is to say, without revolutionizing the whole of society. In fact, we are making such experiments all the time. The introduction of a new kind of life-insurance, of a new kind of taxation, of a new penal reform, are all social experiments which have their repercussions through the whole of society without remodelling society as a whole (introduction은 introductions로 써서 복수화함이 문법적으로 옳다 - 역자 주). Even a man who opens a new shop, or who reserves a ticket for the theatre, is carrying out a kind of social experiment on a small scale; and all our knowledge of social conditions is based on experience gained by making experiments of this kind. The Utopian engineer we are opposing is right when he stresses that an experiment in socialism would be of little value if carried out under laboratory conditions, for instance, in an isolated village, since what we want to know is how things work out in society under normal social conditions. But this very example shows where the prejudice of the Utopian engineer lies. He is convinced that we must recast the whole structure of society, when we experiment with it; and he can therefore conceive a more modest experiment only as one that recasts the whole structure of a small society. But the kind of experiment from which we can learn most is the alteration of one social institution at a time. For only in this way can we learn how to fit institutions into the framework of other institutions, and how to adjust them so that they work according to our intentions. And only in this way can we make mistakes, and learn from our mistakes, without risking repercussions of a gravity that must endanger the will to future reforms. Furthermore, the Utopian method must lead to a dangerous dogmatic attachment to a blueprint for which countless sacrifices have been made. Powerful interests must become linked up with the success of the experiment. All this does not contribute to the rationality, or to the scientific value, of the experiment. But the piecemeal method permits repeated experiments and continuous readjustments. In fact, it might lead to the happy situation where politicians begin to look out for their own mistakes instead of trying to explain them away and to prove that they have always been right. This - and not Utopian planning or historical prophecy - would mean the introduction of scientific method into politics, since the whole secret of scientific method is a readiness to learn from mistakes .
These views can be corroborated, I believe, by comparing social and, for instance, mechanical engineering. The Utopian engineer will of course claim that mechanical engineers sometimes plan even very complicated machinery as a whole, and that their blueprints may cover, and plan in advance, not only a certain kind of machinery, but even the whole factory which produces this machinery. My reply would be that the mechanical engineer can do all this because he has sufficient experience at his disposal, i.e. theories developed by trial and error. But this means that he can plan because he has made all kinds of mistakes already; or in other words, because he relies on experience which he has gained by applying piecemeal methods. His new machinery is the result of a great many small improvements. He usually has a model first, and only after a great number of piecemeal adjustments to its various parts does he proceed to a stage where he could draw up his final plans for the production. Similarly, his plan for the production of his machine incorporates a great number of experiences, namely, of piecemeal improvements made in older factories. The wholesale or large-scale method works only where the piecemeal method has furnished us first with a great number of detailed experiences, and even then only within the realm of these experiences. Few manufacturers would be prepared to proceed to the production of a new engine on the basis of a blueprint alone, even if it were drawn up by the greatest expert, without first making a model and 'developing' it by little adjustments as far as possible.
It is perhaps useful to contrast this criticism or Platonic Idealism in politics with Marx's criticism of what he calls 'Utopianism'. What is common to Marx's criticism and mine is that both demand more realism. We both believe that Utopian plans will never be realized in the way they were conceived, because hardly any social action ever produces precisely the result expected. (This does not, in my opinion, invalidate the piecemeal approach, because here we may learn - or rather, we ought to learn - and change our views, while we act.) But there are many differences. In arguing against Utopianism, Marx condemns in fact all social engineering - a point which is rarely understood. He denounces the faith in a rational planning of social institutions as altogether unrealistic, since society must grow according to the laws of history and not according to our rational plans. All we can do, he asserts, is to lessen the birthpangs of the historical processes. In other words, he adopts a radically historicist attitude, opposed to all social engineering (이 문장에서 분사구문인 opposed to all social engineering은 앞이 쉼표를 없애서 앞은 명사구 a radically historicist를 수식하도록 하든지, opposed를 opposing으로 써야한다 - 역자 주). But there is one element within Utopianism which is particularly characteristic of Plato's approach and which Marx does not oppose, although it is perhaps the most important of those elements which I have attacked as unrealistic. It is the sweep of Utopianism, its attempt to deal with society as a whole, leaving no stone unturned. It is the conviction that one has to go to the very root of the social evil, that nothing short of a complete eradication of the offending social system will do if we wish to 'bring any decency into the world' (as Du Gard says). It is, in short, its uncompromising radicalism. (The reader will notice that I am using this term in its original and literal sense - not in the now customary sense of a 'liberal progressivism', but in order to characterize an attitude of 'going to the root of the matter'.) Both Plato and Marx are dreaming of the apocalyptic revolution which will radically transfigure the whole social world.
This sweep, this extreme radicalism of the Platonic approach (and of the Marxian as well) is, I believe, connected with its aestheticism, i.e. with the desire to build a world which is not only a little better and more rational than ours, but which is free from all its ugliness: not a crazy quilt, an old garment badly patched, but an entirely new gown, a really beautiful new world . This aestheticism is a very understandable attitude; in fact, I believe most of us suffer a little from such dreams of perfection. (Some reasons why we do so will, I hope, emerge from the next chapter.) But this aesthetic enthusiasm becomes valuable only if it is bridled by reason, by a feeling of responsibility, and by a humanitarian urge to help. Otherwise it is a dangerous enthusiasm, liable to develop into a form of neurosis or hysteria.
Nowhere do we find this aestheticism more strongly expressed than in Plato. Plato was an artist; and like many of the best artists, he tried to visualize a model, the 'divine original' of his work, and to 'copy' it faithfully. A good number of the quotations given in the last chapter illustrate this point. What Plato describes as dialectics is, in the main, the intellectual intuition of the world of pure beauty. His trained philosophers are man who 'have seen the truth of what is beautiful and just, and good' , and can bring it down from heaven to earth. Politics, to Plato, is the Royal Art. It is an art - not in a metaphorical sense in which we may speak about the art of handling men, or the art of getting things done, but in a more literal sense of the word. It is an art of composition, like music, painting, or architecture. The Platonic politician composes cities, for beauty's sake.
But here I must protest. I do not believe that human lives may be made the means for satisfying an artist's desire for self expression. We must demand, rather, that every man should be given, if he wishes, the right to model his life himself, as far as this does not interfere too much with others. Much as I may sympathize with the aesthetic impulse, I suggest that the artist might seek expression in another material. Politics, I demand, must uphold equalitarian and individualistic principles; dreams of beauty have to submit to the necessity of helping men in distress, and men who suffer injustice; and to the necessity of constructing institutions to serve such purposes .
It is interesting to observe the close relationship between Plato's utter radicalism, the demand for sweeping measures, and his aestheticism. The following passages are most characteristic. Plato, speaking about 'the philosopher who has communion with the divine', mentions first that he will be 'overwhelmed by the urge.. to realize his heavenly vision in individuals as well as in the city', - a city which 'will never know happiness unless its draughtsmen are artists who have the divine as their model'. Asked about the details of their draughtsmanship, Plato's 'Socrates' gives the following striking reply: 'They will take as their canvas a city and the characters of men, and they will, first of all, make their canvas clean - by no means an easy matter. But this is just the point, you know, where they will differ from all others. They will not start work on a city nor on an individual (nor will they draw up laws) unless they are given a clean canvas, or have cleaned it themselves.'
The kind of thing Plato has in mind when he speaks of canvas-cleaning is explained a little later. 'How can that be done?' asks Glaucon, 'All citizens above the age of ten', Socrates answers, 'must be expelled from the city and deported somewhere into the country; and the children who are now free from the influence of the manners and habits of their parents must be taken over. They must be educated in the ways [of true philosophy], and according to the laws, which we have described.' (The philosophers are not, of course, among the citizens to be expelled: they remain as educators, and so do, presumably, those non-citizens who must keep them going.) In the same spirit, Plato says in the Statesman of the royal rulers who rule in accordance with the Royal Science of Statesmanship: 'Whether they happen to rule by law or without law, over willing or unwilling subjects;... and whether they purge the state for its good, by killing or by deporting [or 'banishing'] some of its citizens... - so long as they proceed according to science and justice, and preserve... the state and make it better than it was, this form of government must be declared the only one that is right.'
This is the way in which the artist-politician must proceed. This is what canvas-cleaning means. He must eradicate the existing institutions and traditions. He must purify, purge, expel, banish, and kill. ('Liquidate' is the terrible modern term for it.) Plato's statement is indeed a true description of the uncompromising attitude of all forms of out-and-out radicalism - of the aestheticist's refusal to compromise. The view that society should be beautiful like a work of art leads only too easily to violent measures. But all this radicalism and violence is both unrealistic and futile. (This has been shown by the example of Russia's development. After the economic breakdown to which the canvas-cleaning of the so-called 'war communism' had led, Lenin introduced his 'New Economic Policy', in fact a kind of piecemeal engineering, though without the conscious formulation of its principles or of a technology. He started by restoring most of the features of the picture which had been eradicated with so much human suffering. Money, markets, differentiation of income, and private property - for a time even private enterprise in production - were introduced, and only after this basis was re-established began a new period of reform .)
In order to criticize the foundations of Plato's aesthetic radicalism, we may distinguish two different points.
The first is this. What some people have in mind who speak of our 'social system', and of the need to replace it by another 'system', is very similar to a picture painted on a canvas which has to be wiped clean before one can paint a new one. But there are some great differences. one of them is that the painter and those who co-operate with him as well as the institutions which make their life possible, his dreams and plans for a better world, and his standards of decency and morality, are all part of the social system, i.e. of the picture to be wiped out. If they were really to clean the canvas, they would have to destroy themselves, and their Utopian plans. (And what follows then would probably not be a beautiful copy of a Platonic ideal but chaos.) The political artist clamours, like Archimedes, for a place outside the social world on which he can take his stand, in order to lever it off its hinges. But such a place does not exist; and the social world must continue to function during any reconstruction. This is the simple reason why we must reform its institutions little by little, until we have more experience in social engineering.
This leads us to the more important second point, to the irrationalism which is inherent in radicalism. In all matters, we can only learn by trial and error, by making mistakes and improvements; we can never rely on inspiration, although inspirations may be most valuable as long as they can be checked by experience. Accordingly, it is not reasonable to assume that a complete reconstruction of our social world would lead at once to a workable system. Rather we should expect that, owing to lack of experience, many mistakes would be made which could be eliminated only by a long and laborious process of small adjustments; in other words, by that rational method of piecemeal engineering whose application we advocate. But those who dislike this method as insufficiently radical would have again to wipe out their freshly constructed society, in order to start anew with a clean canvas; and since the new start, for the same reasons, would not lead to perfection either, they would have to repeat this process without ever getting anywhere. Those who admit this and are prepared to adopt our more modest method of piecemeal improvements, but only after the first radical canvas-cleaning, can hardly escape the criticism that their first sweeping and violent measures were quite unnecessary.
Aestheticism and radicalism must lead us to jettison reason, and to replace it by a desperate hope for political miracles. This irrational attitude which springs from an intoxication with dreams of a beautiful world is what I call Romanticism . It may seek its heavenly city in the past or in the future; it may preach 'back to nature' or 'forward to a world of love and beauty'; but its appeal is always to our emotions rather than to reason. Even with the best intentions of making heaven on earth it only succeeds in making it a hell - that hell which man alone prepares for his fellow-men.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Vol 1 Plato", Karl. R. Popp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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