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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와 그 적들 제 11장 헤겔 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적 뿌리

이윤진이카루스 2010. 7. 31. 18:46

교양인들을 그리도 비극적으로 분열시키는 현대 세계의 도덕적 분열은 자유로운 과학의 붕괴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월터 리프만

 

 

 

 

 

             열린사회와 그 적들

 

 

 

 

               제 2 권

 

 

 

 

              예언의 밀물

 

 

                                              예언 철학의 발흥

 

 

11 장 : 헤겔 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적 뿌리

 

 

우리가 흥미를 갖는 사상의 - 역사주의와 역사주의가 전체주의와 관련된 - 역사를 쓰는 일은 여기서 시도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바, 독자들은 내가 이 사상의 현대판의 배경을 밝혀줄 몇 가지 산재한 비평 이상을 내놓으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 사상들의 발전에 관한 이야기는, 특히 플라톤에서 헤겔과 마르크스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이야기는, 책의 부피를 적당한 규모로 유지하면서 도저히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진지하게 다루려하지 않겠지만, 그가 해설한 플라톤의 본질주의가 헤겔과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미친 정도만 다루겠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위대한 스승인 플라톤을 비판하면서 알게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들만 살펴본다고 해서 첫눈에 두려울 정도로 그렇게 심각한 생략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 까닭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지닌 엄청난 박학다식에도 불구하고, 두드러진 독창적 사고를 지닌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사상 창고에 그가 보탰던 것은 주로 체계화와, 특히 생물학적 문제와 같은 경험적 문제에 대한 불타는 관심이었다. 확실히 그는 논리를 창안한 사람이었고, 논리 창안과 다른 업적으로 인하여 자신이 요구하는 것을 (그의 저서 소피스트의 반박 마지막 부분에서) - 우리들이 보내는 감사와 그의 결점에 대한 우리들의 용서 -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플라톤을 읽는 사람들과 예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결점이 엄청난 것이다.

I

플라톤의 말년 작품 몇 가지에서, 우리는 당시 아테네에서 일어났던 정치적 발전의 반향을 발견할 수 있다 - 민주주의의 정착화에 관한 반향. 심지어 플라톤도 어떤 형태의 민주주의가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닌지를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우리는 그가 더 이상 민주주의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 징표를 발견한다. 비록 그가 민주주의의 친구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는 민주주의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수용하여 적과 타협할 준비가 되어있다.

타협하려는 경향은, 자신의 선배와 동시대인들을 (그리고 특히 플라톤을) 비난하려는 경향과 기묘하게 혼합되어, 아리스토텔레스의 백과 사전적 저술의 탁월한 특징의 하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특징은 플라톤의 저술의 동기가 되는 비극적이고도 도발적인 갈등의 흔적을 보여주지 못한다. 플라톤이 지녔던 날카로운 통찰력의 섬광 대신에, 우리는 무미건조한 체계화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는 '건전하고 균형 잡힌 판단'을 냄으로써 어떤 문제든 해결하려는 후세대의 많은 범용한 작가들도 가지고 있던 사랑을 발견한다 ;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혹 정교하고도 심각하게 요점을 놓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중용의 원칙' 속에서 체계화된 이 개탄스러운 경향은 그가 그렇게 자주 플라톤을 억지로 비판해야 되고 심지어 플라톤을 어수룩하게 비판하는 근원의 하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력 결여에서 역사적 통찰력 결여를 보여주는 보기는 (그는 역사가이기도 했다) 명백한 민주주의의 정착화가 마케도니아의 제국주의적 전제정치로 바뀌었을 때 그가 그 민주주의를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 그 역사적 사건은 그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부친처럼 마케도니아 궁정의 신하였고 필립 왕에 의하여 알렉산더 대왕의 교사로 선발되었는데 이 사람들과 그들의 계획을 과소평가 했던 듯하다 ; 아마도 그는 자신이 그들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군주와 앉아서 식사를 했다'고 곰페르cm(Gomperz)는 적절하게 비평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는 플라톤의 사고에 의하여 완전히 지배당했다. 다소 주저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일반적인 정치적 견해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 모든 곳에서 자신의 기질이 허용하는대로 자신의 위대한 스승을 밀접하게 추종했다. 그리하여 그는 플라톤이 주장하는 노예제도에 대한 자연주의적 이론을 지지했고 체계화했다 :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자유롭고 다른 사람은 노예이다 ; 그래서 후자에게는 노예제도가 정당할 뿐만 아니라 알맞다... 천성적으로 자기 자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인 사람은 천성적으로 노예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들을 노예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지 않고 그 말은 야만인들에게 국한하여 사용한다... 노예에게는 추리능력이 전혀 없다'.반면 자유로운 여성은 추리능력을 매우 적게만 지니고 있다.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아테네인들의 운동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과 체계적 설명에서 유래한다. 자유를 위한 투사들에 반대하여 주장을 폄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투사들의 발언 몇 가지를 남겨놓았다.) 몇 가지 사소한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노예제도에 관한 이론을 다소 완화하여 당연히 자신의 스승이 지나치게 엄혹하다고 비난한다. 그는 플라톤을 비판할 기회를 거부하지도 않았고, 당시 자유주의적 경향과의 타협이라 할지라도 타협을 위한 기회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예제도에 관한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채택한 플라톤의 많은 정치적 이념의 하나일 뿐이다. 우리가 아는 한, 특히 그의 최상의 국가론은 국가와 법률의 이론을 모방한 것이다 (국가[Republic]와 법률[Laws]은 플라톤의 저서이다 - 역자 주) ; 그래서 그의 책은 플라톤의 저서를 상당히 설명해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최상의 국가는 낭만적인 플라톤의 귀족정치와 '건전하고 균형 잡힌' 봉건제도와 몇 가지 민주주의적 개념, 이 세 가지를 타협한 것이다; 그러나 봉건제도가 으뜸을 이룬다. 민주주의자들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시민은 정부에 참여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말처럼 그렇게 근본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닌데, 그 까닭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뿐만 아니라 생산계급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은 시민권에서 제외된다고 즉시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플라톤과 함께 노동자 계급은 통치를 해서는 안 되며 통치계급은 노동을 해서도 안 되고 돈을 벌어서도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통치계급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들은 토지를 소유하지만 그들 자신이 그 토지를 경작해서는 안 된다. 사냥과 전쟁, 그리고 유사한 취미만 봉건적 통치자들에게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어떤 형태의 돈벌이에, 다시 말해서 모든 전문적 활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두려움은 아마도 플라톤이 가졌던 두려움보다 훨씬 더 심하다. 플라톤은 '실용본위적(banausic)'이라는 용어를 민중적이거나 비참하거나 부패한 정신상태를 묘사하는 데 사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용어의 모멸적 사용을 확대하여 순수한 취미가 아닌 모든 이해관계를 포함시킨다. 실제로, 이 용어를 그가 사용하는 방식은 우리가 '전문적(professional)'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방식과 매우 근사한데 특히 그 용어가 아마추어 경기에서 자격을 제한하는 의미에서 그러하고 또한 그 용어가 내과의사 같은 전문가에게 적용되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모든 형태의 전문직이 신분제도의 실종을 의미한다. 봉건주의의 신사는 '예술이든 과학이든... 어떤 직업'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또한 몇 가지 교양과목, 다시 말해서 신사가 습득해야 하는 과목이 있지만 항상 어느 정도까지만이다. 그 까닭은 그가 이 과목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갖게되면 이 사악한 결과가 따라올 것이다', 즉 그는 전문가처럼 능숙해지고 사회신분을 잃는다. 이것이 아직은 구식이 되버리지 않은 신사의 교육에 관한 이념으로 노예나 농노, 하인이나 전문인들의 교육에 반대가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유로운 교육(liberal education)이라는 개념이다 (liberal education을 서울대 철학과 이명현 교수는 교양교육으로 해석한다. - 역자 주). 그가 '모든 행동의 제 1 원칙은 여가(餘暇)'라고 반복해서 주장하는 것은 동일한 사고 선상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유한(有閑) 계급을 찬양하고 존경하는 것은 불안감이라는 기묘한 감정의 표현으로 보인다. 마케도니아 궁정의 내과의사의 아들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 때문에, 특히 전문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학자적 이해관계 때문에 사회적 신분을 잃을 가능성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자신의 귀족 친구들로부터 그런 비난을 듣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믿으려는 유혹을 받는다.. 모든 시대를 통하여 가장 위대한 학자는 아니라 할지라도 가장 위대한 학자 중의 한 사람인 전문적인 학자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은 정말로 보기에 이상하다. 그는 오히려 아마추어와 세상물정에 밝은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곰페르츠(Gomperz)는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열등의식은 아마도, 그 자신의 '전문적' 뿌리와 별도로, 플라톤으로부터의 독립을 증명하고자 하는 자신의 소망과 별도로, 그리고 그가 의심할 바없이 전문적인 '소피스트'였다는 사실과 (그는 심지어 논리학을 가르쳤다) 별도로, 여전히 다른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 까닭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플라톤 철학은 그 위대한 열망인 권력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부터, 그 철학은 단지 가르치는 직업으로서만 계속될 수 있었다. 그리고 봉건 영주를 제외하고 철학을 공부할 돈과 여가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철학이 갈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전통적 신사교육의 첨가품이 되는 것이었다. 보다 겸손한 이 열망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적 사색과 명상이 봉건적 신사의 '훌륭한 삶'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봉건적 신사를 설득하는 일이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 그 까닭은 철학적 사색과 명상이 사람이 정치적인 음모나 전쟁에 몰두해있지 않다면 자신의 시간을 보내는 가장 행복하고 고귀하고 세련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표현하는 것처럼 '아무도.. 그 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의 여가를 보내는 최상의 방법이다.

그러한 신하의 철학은 낙관적이 아니라면 유쾌한 소일거리가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낙관적이 되는 경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리고 정말로 그 낙관론 속에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주의를 체계화하면서 만들어낸 한 가지 중요한 조정이 놓여있다. 플라톤의 방황감은 모든 변화는, 적어도 어떤 우주적 기간 속에서 악화할 것이 틀림없다는 그의 이론에서 나타났다 ; 모든 변화는 퇴보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개선인 변화를 인정한다 ; 그리하여 변화는 진보일는지도 모른다. 모든 발전은 원형, 완벽한 형상이나 이데아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발전하는 것은 그것이 변하고 원형에 대한 그것의 유사성이 감소하는 정도에서 자신의 완벽성을 잃을 것이 틀림없다고 플라톤은 가르쳤다.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플라톤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스페우시푸스(Speusippus)도 이 이론을 버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페우시푸스의 주장이 고등 형태를 향한 일반적인 생물학적 진화를 함축하기 때문에 너무 지나치다고 비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시대에 많이 토론된 진화적 생물학 이론을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플라톤의 사상에 부여한 기묘한 낙관적인 왜곡은 역시 생물학적 사색의 결과였다. 그것은 목적인(目的因 : final cause)이라는 개념에 기초하고 있었다 (목적인[目的因 : final cause]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원리로서 규정된 사물의 변화에 대한 4가지 원인 중 사물의 바탕을 이룬다 - 역자 주).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물의 4 원인 중 하나가 - 움직임이나 변화의 4 원인 중 하나 - 목적인으로, 즉 움직임이 겨냥하는 목적이다. 그것이 목적 즉, 바라는 목표인 한, 목적인 또한 선하다. 그리하여 어떤 선은 움직임의 출발점일 뿐만 아니라 (플라톤이 가르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정한 바와 같이) 어떤 선은 또한 그 움직임의 끝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고 이것은 시간 속에서 시작이 되는 모든 것에게,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존재하게 되는 모든 것에게 중요하다. 발전하는 모든 것의 형상이나 본질은 그것이 향하여 발전하는 목적, 즉 끝 혹은 최종 상태와 동일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결국 플라톤 사상을 스페우시푸스가 조정한 것과 매우 닮은 것을 얻게된다. 형상과 이데아는 여전히 플라톤과 함께 훌륭하다고 여겨지는데, 시작 대신에 끝에 존재한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관론을 낙관론으로 대체한 것의 특징을 이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 다시 말해서 변화의 끝이나 목적을 그 목적인으로 그가 강조한 것은 그가 지녔던 주로 생물학적 관심의 표현이다. 그것은 플라톤의 생물학적 이론에 의하여, 그리고 또한 플라톤이 자신의 정의(正義) 이론을 우주로 확대함으로써 영향을 받는다. 그 까닭은 플라톤이 시민들의 다양한 계급이 사회에서 자연적인 위치, 즉 그 계급이 속하고 그 계급이 자연적으로 들어맞는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는 또한 유사한 원칙으로 물리적 물체와 그들의 다양한 계급이나 종류의 세상을 해석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공기나 불이 상승하는 경향뿐만 아니라 돌이나 흙 같은 무거운 물체의 무게와 그 물체들의 하강하는 경향을, 그것들이 자신의 특성이 깃든 장소를 유지하거나 되찾으려고 애를 쓴다는 가정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돌과 흙은 대부분의 돌과 흙이 있는 곳, 그리고 그것들이 속한 곳에, 자연의 정당한 순서로 존재하려고 애를 쓴다 ; 공기와 불은 공기와 불 (천체)이 있는 곳에, 그리고 그것들이 속하는 곳에, 자연의 정당한 순서로 존재하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상승한다. 이 운동이론은 동물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사로잡았다 ; 그 이론은 목적인 이론과 쉽게 결합되어, 모든 움직임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이 마구간으로 돌아가는 데 열중한 말의 느린 구보와 유사한 것으로 인정한다. 그는 그 이론을 자신의 유명한 자연적 위치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만물은 자신의 자연적 위치로부터 떨어지면 그 위치로 돌아가려는 자연적 경향을 가진다.

몇 가지 수정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본질주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은 하찮은 차이점만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플라톤과 달리 자신은 형상이나 이데아를 감지될 수 있는 물체와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차이점이 중요한 한, 그 차이점은 변화 이론의 조정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그 까닭은 플라톤 이론의 요점 하나는, 감지 가능한 것들이 형상이나 본질이나 원형 (혹은 선조들)으로부터 점점 더 멀리 떨어져 움직이기에, 그가 형상이나 본질이나 원형들 (혹은 선조들)을 감지 가능한 것들에 앞서서 존재하는 것으로, 그리하여 감지 가능한 것들과 별개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지되는 물체들을 그들의 목적인 즉, 목표를 향하여 움직이도록 만들고 이 목적인들 즉, 목표를 그 물체들의 형상이나 본질과 동일시한다. 그리고 생물학자로서, 그는 감지되는 것들은 그들 내부에 잠재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최종 상태의 혹은 그들의 본질의 씨앗을 지니고 있다고 상상한다. 이것이 그가 형상이나 본질은 물체 안에 있고, 플라톤이 말한 바와 같이 물체에 앞서거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모든 움직임이나 변화는 사물의 본질에 내재하는 잠재성 몇 가지가 실현되는 것 (이나 '실제화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를 들어, 물 위에 뜨거나 불에 탈 수 있는 것은 목재 조각의 본질적 잠재성이다 ; 이 잠재성은 목재 조각이 물에 뜨거나 불에 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본질 속에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목재 조각이 물에 뜨거나 불에 탄다면, 목재 조각은 잠재성을 실현하며, 그리하여 변화하거나 움직인다. 따라서, 본질은 사물의 모든 잠재성을 포함하여, 변화나 움직임의 내적 근원과 같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형상의 본질, 이 '현상'이나 '목적' 인은 그러므로 실제로 플라톤의 '자연'이나 '영혼'과 동일하다 ; 그리고 이 동일시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에 의하여 입증된다. '자연은 또한 잠재성과 같은 유에 속한다 ; 그 까닭은 그것은 물체 자체 속에 내재하는 운동의 원칙이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형이상학(Metaphysics)에서 기술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영혼'을 '살아있는 몸의 첫째 현실태(entelechy)'로 정의하며, '현실태'는 원동력으로 생각되어 나중에 형상이나 형상인으로 설명되기 때문에 우리는 다소 복잡한 용어도구의 도움을 받아서 플라톤의 원래 관점으로 다시 도달한다 : 영혼이나 자연은 형상이나 이데아와 비슷한 것이지만 물체에 내재해 있으며 물체의 운동 원리는 것. (젤러[Zeller]가 '과학적 용어법의 분명한 사용과 포괄적 개발'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칭찬했을 때, 그가 '분명한(definite)'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다소 불안감을 느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복잡하고도 다소 허세적인 전문어를 사용함으로써 너무 많은 철학자들을 매혹시켰다는 가장 개탄스러운 사실과 함께 포괄성은 인정될 수 있다 ; 그리하여 젤러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수천 년 동안 그는 철학이 나아갈 길을 보여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백과사전적 형태의 역사가였는데 역사주의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바는 없다. 그는 홍수와 다른 재발성 재앙이 때때로 인류를 파괴하여 소수의 생존자만 남긴다는 플라톤 이론의 보다 제한적인 해설을 고집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제외하고는 역사적 경향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의 변화 이론이 얼마나 역사주의적 해석에 들어맞는지가 이곳에서 밝혀질 수 있으며, 그의 변화 이론이 과시적인 역사주의적 철학을 상술하는 데 필요한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이곳에서 밝혀질 수 있다. (헤겔 이전에 이 기회는 완전히 이용되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로부터 직접적으로 발생하는 세 가지 역사주의적 원칙이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1) 개인이나 국가가 발전할 때만, 그리고 국가 역사를 통해서만, 우리는 그 '숨겨진, 개발되지 않은 본질'에 (헤겔의 표현을 빌리면) 관한 어떤 것이든 알게 될 수 있다. 이 원칙은 나중에 무엇보다도 역사주의적 방식의 채택을 낳는다 ; 다시 말해서, 우리는 역사주의 방식을 적용함으로써만, 사회 변화를 연구함으로써 사회적 실체나 본질에 관한 어떤 지식이든 습득할 수 있다는 원칙의 채택. 그러나 그 원칙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특히 알려진 것과 사실적인 것을 선량한 것과 동일시하는 헤겔의 도덕적 실증주의와 결합될 때) 역사 숭배와, 세계의 재판정뿐만 아니라 현실성의 거대한 극장으로서의 역사 칭송을 야기한다. (2) 변화는, 개발되지 않은 본질 속에 숨은 것을 폭로함으로써, 처음부터 변화하는 물체에 갖추어져 있던 본질, 잠재성, 씨앗을 나타나게 만들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원칙은 역사적 운명이나 피할 수 없는 본질적 운명에 대한 역사주의적 이념을 낳는다 ; 그 까닭은, 헤겔이 나중에 밝힌 바와 같이, '우리가 원칙, 목표,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숨겨져 개발되지 않은 본질'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 민족, 국가에게 발생하는 모든 것은 그 인간, 그 민족, 혹은 그 국가에서 발현되는 본질, 실재, 실제 '개성'으로부터 유래하여 그것들을 통하여 이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한 인간의 운명은 자기 자신의 존재와 즉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 그것은 정말로 그가 대항해서 싸워야 하지만 실제로 우리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인 중요한 것이다.' 헤겔의 운명에 관한 이 공식은 (케어드[Caird]가 만들어냈다) 분명히 모든 물체는 자기 자신의 '자연적 위치'를 찾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을 역사적이고 낭만적으로 대응한다. 그것은, 물론, 인간에게 발생하는 것은 그의 외부 환경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그가 그것에 반응하는 방식에 달려있다는 진부한 말의 허세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순진한 독자는, '운명'과 특히 '자기 자신의 존재' 같은 감동적인 말의 도움으로 공식화될 필요가 있는 이 지혜의 깊이가 주는 진리를 이해하고 느끼는 자신의 능력에 극도로 기뻐한다. (3) 현실적이거나 실제적이 되기 위해서, 본질은 변화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이 원칙은 나중에, 헤겔에게서 다음과 같은 형식을 띄게된다 :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 잠재성에 지나지 않는다 : 그것은 아직 존재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데아가 실제화 되는 것은 활동에 의해서만이다.' 그리하여 내가 '존재로 나타나기를' 원한다면 (확실히 매우 겸손한 소망이다), 나는 '나의 개성을 주장'해야 한다. 여전히 다소 인기가 있는 이 이론은, 헤겔이 분명하게 보는 바와 같이, 노예제도에 대한 새로운 정당화를 야기한다. 그 까닭은 자기주장이란, 다른 사람들과 관련된 어느 사람의 관계에 관한 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모든 관계는 그러므로 주인과 노예, 지배와 복종의 근본적인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고 헤겔은 지적했다. 각자는 자신을 주장하고 증명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본성과 용기와 자신의 독립을 보존하는 일반적인 능력이 없는 사람은 노예상태로 떨어져야 한다. 개인 관계에 대한 이 매력적인 이론은, 물론, 헤겔의 국제 관계 이론 속에서도 대등한 것을 가지고 있다. 민족은 역사의 무대(Stage of History)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 세계를 지배하려는 시도는 민족의 의무이다.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는 이 모든 역사주의적 결과는, 다음 장에서 다른 각도로 접근될 것인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 속에서 '숨어서 개발되지 않은 채' 2000년 이상을 잠자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많은 예찬자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풍요롭고 미래가 기대되는 것이었다.

II

우리 철학에 대한 가장 중대한 위험은, 태만과

애매모호함을 별도로 하고, 학풍고집(scholasticism)

이다,.. 그것은 모호한 것을 정확한 것인 양 다룬다..

F. P. 램지(Ramsey).

우리는 헤겔의 역사주의 철학을 분석하는 데로, 혹은, 아무튼,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 사이의 발전에 대한 비평과 현재 장의 III부로 종결되는 기독교의 발흥에 대한 간단한 비평으로 지체 없이 나아갈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다. 주제에서 약간 벗어나지만, 나는 다음에 보다 기술적인 문제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定義)에 관한 본질주의적 방식을 토론하겠다.

정의와 '용어의 의미'에 관한 문제는 역사주의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문제는 혼동과, 헤겔의 생각 속에서 역사주의와 결합될 때 내가 예언 철학이라고 부르는 우리 시대의 독소적 지적(知的) 병을 낳은 불필요한 말의 저 특정 종류가 고갈되지 않고 나오는 근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발휘하는 지배적인 지적(知的) 영향의, 중세기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동시대 철학에 붙어 다니며 괴롭히는 모든 언어적이고도 공허한 학풍고집의 가장 중요한 근원이다 : 그 까닭은 심지어 L.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같은 최근의 철학도, 우리가 보게 되는 바와 같이, 이 영향을 받아 고통을 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사상의 발전은, 내가 생각하는 바, 모든 원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定義) 방식을 사용한다면 공허한 불필요한 말과 무의미한 학풍고집의 상태에 정지되어 있었으며, 다양한 과학이 진보를 이룩할 수 있었던 범위가 이 본질주의적 방식을 제거할 수 있었던 범위에 달려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 과학'의 많은 부분이 아직도 중세기에 속하는 이유이다.) 이 방식에 대한 토론은 문제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다소 추상적이어야 할 것인데, 그들의 영향력은 매우 뿌리깊은 편견을 낳아서 그 편견을 추방하려는 전망이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는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혼란과 불필요한 말의 근원을 분석하는 것은 아마도 소득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과 견해를 구별하는 데에서 플라톤을 따랐다. 지식, 즉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두 가지 종류이다 - 논증적(demonstrative) 혹은 직감적(intuitive). 논증적 지식(demonstrative knowledge)은 '원인'의 지식이다. 그 지식은 삼단논법적 논증과 (그것의 '매개념[middle terms]'에서 '원인'을 보여준다) 함께 논증될 수 있는 명제로 - 결론 - 구성된다. 직감적 지식은 사물의 '나눌 수 없는 형태' 혹은 본질 혹은 본질적 성질을 파악하는데 달려있다 (그것이 '즉각적'이라면, 다시 말해서 그 '원인'이 그것의 본질적 성질과 동일하다면) ; 그것은 모든 논증의 원초적 기본 전제를 파악하기 때문에 모든 과학의 독창적 근원이다.

의심할 바 없이, 모든 지식을 증명하거나 논증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옳았다. 모든 증거는 전제로부터 시작된다 ; 그런 증거는, 다시 말해서, 전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그러므로 모든 결론의 진실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없고, 전제가 사실이라면 결론이 사실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줄 따름이다. 우리가 이제 전제가 증명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진실의 문제는 또 다른 과정에 의하여 새로운 전제, 기타 등등, 무한까지 다시 옮겨질 따름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의심할 바 없이 사실이어서 증거가 필요 없는 전제가 있다고 우리가 가정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은 그러한 무한 소급추론 (논리학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피하기 위함이었다 ; 그리고 이것을 그는 '기본 전제(basic premises)'라고 불렀다. 우리가 이 기본 전제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을 당연시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과학적 지식 전체는 기본 전제 속에 포함되어 있고 우리가 기본 전제에 관한 백과사전적 명세표를 얻을 수 있다면 과학적 지식 전체가 우리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이 기본 전제를 얻는가 ? 플라톤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사물의 본질을 직감적으로 파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사물의 본질을 앎으로써만 사물을 알 수 있다. 사물을 아는 것은 그 본질을 아는 것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썼다. 그에 따르면, '기본 전제'란 사물의 본질을 묘사하는 기술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기술이란 바로 그가 정의(定義)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증거에 관한 기본 전제는' 정의(定義)이다.

정의(定義)는 무엇과 같은가 ? 정의에 관한 한 가지 보기는 : '강아지는 어린 개다.'일 것이다. 그런 정의(定義) 문장의 주어인 '강아지'라는 말은 정의될 용어 (혹은 정의된 용어)라고 불린다 ; '어린 개'라는 말은 정의하는 공식(defining formula)이라고 불린다. 대체로, 정의하는 공식은 정의된 용어보다 더 길고 더 복잡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용어가 사물의 본질 이름으로 정의되는 것을 생각하고, 정의하는 공식을 그 본질의 묘사로서 간주한다. 그래서 그는 정의하는 공식은 문제된 사물의 본질이나 본질적 특성을 끝까지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그리하여 '강아지는 네 개의 발을 가지고 있다'와 같은 기술은 사실일지라도 강아지의 본질이라는 것을 망라하지 않고 말(馬)에 관해서도 역시 사실이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정의가 아니다 ; 그리고 유사하게 '강아지는 갈색이다'라는 기술은 어떤 강아지에 관해서는 사실이라 할지라도 모든 강아지에 관해서 사실인 것은 아니다 ; 그래서 그 기술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겨우 정의된 용어의 우연한 특징을 묘사한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정의나 기본적 전제를 이해하여 그것들이 옳다는 것을 -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틀린 본질을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 - 확실하게 할 수 있는가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점에 대하여 분명히 밝히지는 않을지라도, 그가 주로 플라톤을 추종한다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플라톤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지적(知的) 직감 (intellectual intuition)의 도움을 받아서 이데아를 파악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정신적 눈'으로 이데아를 시각화하거나 바라보는데, 그가 보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했지만 순전히 지성에 의지하여 감각에 의존하는 모든 요소를 제외한 과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플라톤의 견해보다 덜 급진적이고 덜 영감적이지만 결국 동일하게 된다. 그 까닭은 우리가 많은 관찰을 한 후에만 정의(定義)에 도달한다고 그가 가르치지만, 그는 감각-경험은 본질적으로 보편적 본질을 파악하지 않아서 정의를 완전히 결정할 수는 없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우리가 지적(知的) 직감, 즉 우리로 하여금 오류 없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도록 만들어 알게 만드는 정신적 혹은 지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할 따름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우리가 직감적으로 본질을 안다면 그 본질을 설명할 수 있고 그리하여 정의할 수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고 가정한다. (해석학 후편[Posterior Analytic]에서 이 이론을 옹호하는 그의 주장은 놀랄 정도로 허약하다. 그 주장은 우리가 지닌 기본 전제에 관한 지식은 무한소급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에 논증적이 될 수 없다는 것과, 기본 전제는 그 위에 기초를 둔 결론만큼 적어도 사실적이고 확실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줄 따름이다. '그러므로 기본 전제에 관한 논증적 지식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 그리고 지적 직감만이 논증적 지식보다 더 진실하기 때문에, 기본 전제를 파악하는 것은 지적 직감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그는 썼다. 영혼론(靈魂論: De Anima)과 형이상학(Metaphysics)의 신학 부분에서, 우리는 오히려 주장을 발견한다 ; 그 까닭은 여기서 우리는 지적 직감에 관한 이론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 지적 직감이 그 대상, 본질과 접촉하고, 심지어 지적 직감이 그 대상과 하나가 된다는 이론. '실제 지식은 그 대상과 동일하다.')

이 간단한 분석을 요약하면, 내가 믿기에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본질의 직감적 정의(定義)를, 다시 말해서, 모든 본질을 정의하는 공식과 함께 모든 본질의 이름을, 포함하는 백과사전의 편찬에서 모든 연구의 궁극적 목적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졌던 완벽하고 완전한 지식에 대한 이상(理想)을 상당히 잘 묘사할 수 있다 ; 그리고 그가 지식의 과정이 그런 백과사전의 점증적 축적에, 백과사전 속의 빈칸을 채워넣는 것뿐만 아니라 백과사전을 확충하는 데, 그리고 물론 논증적 지식인 '사실 모두'가 백과사전으로부터 삼단논법적으로 도출되는 데 놓여있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이제 이 모든 본질주의적 견해는 현대 과학의 방식과 가장 강력한 대조를 이룬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는 아마도 순수 수학은 아닌 경험 과학을 염두에 두고 있다.) 첫째로, 과학에서 진리를 찾기 위하여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진리를 찾았는지를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과거에 많은 실망으로부터 우리는 결말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가진 과학 이론이 무너진다 하여도 더 이상 낙망하지 않는 것을 배웠다 ; 그 까닭은,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가 두 이론 중 어느 것이 더 나은 이론인지를 매우 확신적으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진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 그리고 우리 대부분에게 결말이나 확실성이라는 망상을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보상하는 것은 이 지식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과학 이론이 항상 가설로 남지만, 많은 중요한 경우에서, 새로운 가설이 옛 가설보다 더 우수한지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 까닭은 두 가설이 다르면, 그 가설들은 다른 예측을 낳고, 그 예측은 흔히 실험될 수 있다 ; 그래서 그런 결정적 실험을 기초로 하여, 우리는 때때로 옛 가설이 무너지는 곳에서 새로운 가설이 만족스런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실을 탐구하면서 우리가 과학적 확실성을 과학적 진보로 대체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과학적 방식에 관한 이 견해는 과학의 발전에 의하여 입증된다. 그 까닭은 과학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것처럼 본질적 정보를 점차 백과사전적으로 축적하여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혁명적인 방식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 과학은 대담한 아이디어에 의하여, 새롭고 매우 기묘한 이론의 전개에 의하여 (지구는 평평하지 않다거나, '측량 공간[metrical space]'은 평탄하지 않다는 이론과 같은), 그리고 옛 이론의 전복에 의하여 발전한다.

그러나 과학적 방식에 관한 이 견해는 과학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단어를 이해한 의미에서, 결말을 뜻하는 의미에서, '지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과학에서, 우리는 우리가 진리에 도달했다는 믿음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가지지 못한다. 우리가 보통 '과학적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로, 이런 의미에서의 지식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경쟁하는 다양한 가설과 그 가설들이 다양한 실험을 통과하는 방식에 관한 정보이다 ; 그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를 사용하여, 최신작이자 가장 잘 실험된 과학적 '견해'이다. 이 의견은, 게다가, 우리가 과학에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물론 순수 수학과 논리학을 제외하고) 의미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관하여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경험 과학에서, '증거'가 이론의 진리를 한 번에 영구히 확립할 수 있는 주장을 의미한다면, 증거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발생할 수 있는 것은 과학적 이론에 대한 반박이다.) 다른 한편으로, 순수 수학과 논리학에는 증거의 여지가 있는데, 세상에 관한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고 세상을 설명하는 수단을 개발할 따름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다른 곳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과학적 기술(記述)이 경험의 세계를 언급하는 한, 그 기술은 분명히 반박 가능하다 ; 그리고, 그 기술이 반박 불가능한 한, 그 기술은 경험의 세계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증거가 경험 과학에서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논쟁은 역할을 한다 ; 진실로, 논쟁의 역할은 적어도 관찰과 실험의 역할만큼 중요하다.

과학에서 정의(定義)의 역할은, 특히,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과 매우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 속에서 우리는 먼저 본질을 가리킨다 - 아마도 본질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 그리고 우리는 정의하는 공식의 도움을 받아서 본질을 묘사한다고 가르쳤다 ; '이 강아지는 갈색이다'와 같은 평범한 문장에서와 똑같이, 우리는 처음에 '이 강아지'라고 말하여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 다음에 그것을 '갈색'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정의되어야 하는 용어가 가리키는 본질을 그렇게 묘사함으로써, 우리는 용어의 의미를 또한 결정하고 설명한다고 그는 가르쳤다. 따라서, 정의(定義)는 두 가지 매우 긴밀하게 관련된 질문에 한 번으로 답하는 것이다. 한 가지 질문은 '그것이 무엇인가 ?'인데 예를 들어, '강아지는 무엇인가 ?'이다 ; 그 질문은 정의된 용어에 의하여 외연으로 나타나는 본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다른 질문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데 예를 들어, ' "강아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다 ; 이 질문은 용어의 (다시 말해서, 본질을 외연으로 나타내는 용어의) 의미를 묻는다. 현재 맥락에서 이 두 가지 질문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 더 정확하게, 두 가지 질문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 그래서 나는 특히 두 가지 질문이, 정의에서, 왼편에 있는 용어에 의하여 제기되어 오른편에 있는 정의하는 공식에 의하여 답변이 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이 사실은 본질주의적 관점의 특징을 이루는데, 정의에 대한 과학적 방식은 그 관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본질주의적 해석은 정의를 '보통', 다시 말해서,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읽는다고 말할 수 있는 반면, 우리는 정의는, 정의가 보통 현대 과학에서 쓰이는 바와 같이, 앞으로 즉,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읽혀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 그 까닭은 정의란 정의하는 공식으로 시작하여, 정의에 대한 짧은 표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강아지는 어린 개다'라는 정의에 대한 과학적 견해는 그 정의는 '강아지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기보다는 '어린 개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를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것이리라. ('삶은 무엇인가 ?'나 '중력은 무엇인가 ?'와 같은 질문은 과학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 '오른편에서 왼편으로'라는 접근방식으로 특징지어진 정의의 과학적 사용은, 아리스토텔레스나 본질주의적 해석과 반대로, 유명론적(唯名論的) 해석으로 불릴 것이다. 현대 과학에서, 유명론적 정의만 나타나는데, 다시 말해서, 약호나 표식이 긴 이야기를 줄여서 표현하기 위하여 소개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정의란 과학에서 조금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까닭은 약호란 항상, 물론, 약호가 의미하는 더 긴 표현인 정의하는 공식에 의하여 대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우리의 과학 언어를 매우 부담스럽게 만든다 ; 우리는 시간과 종이를 낭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적 정보의 가장 작은 부분이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지닌 '과학적 지식'은, 이 용어가 올바르게 사용되는 의미에서, 우리가 모든 정의를 없애버린다해도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 우리 언어에 끼치는 유일한 영향은 정밀이 아니라 단지 간결성을 잃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에서는 간결성을 위하여 정의를 도입할 시급한 실용적 필요가 있을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정의가 하는 역할에 관한 이 견해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 사이의 대조보다 더 큰 대조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까닭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본질주의적 정의는 우리가 지닌 모든 지식이 도출되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 그리하여 그 정의는 우리의 모든 지식을 담고 있다 ; 그리고 그 정의는 짧은 공식을 긴 공식으로 대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것과 반대로, 과학적 즉, 유명론적 정의는 어떤 지식도, 심지어 어떤 '견해'도 담고 있지 않다 ; 그 정의는 새로운 자의적인 약호를 소개할 따름이다 ; 그 정의는 요약한다.

실제로, 이 표식은 매우 유용하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박테리아 연구가가, 특정 종류의 박테리아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마다, 그 전체 묘사를 (몇 가지 유사한 종과 그 종이 구별되는 염색, 기타 등등의 방법을 포함하여) 반복해야 한다면 발생할 극단적인 난관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유사한 고찰에 의해서, 과학적 정의가 위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 왜 그리 자주 잊혀졌던 지를 이해할 것이다. 그 까닭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균학 같은 과학을 처음 연구할 때, 자신들이 직면하는 이 모든 새로운 기술적 용어의 의미를 알아내려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마치 그것이 본질주의적 정의인양, 짧은 이야기를 긴 이야기로 바꾸어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정의를 실제로 배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심리학적 우연이고, 교사나 교과서 저술가는 정말로 완전히 다르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다시 말해서, 그는 기술적 용어에 대한 필요성이 발생한 후에만 그 용어를 소개할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정의의 과학적 즉, 유명론적 사용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적 방법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정의에 관한 본질주의적 관점은 본질적으로 옹호될 수 없을 뿐임이 또한 밝혀질 수 있다. 부당하게 너무 오래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하여, 나는 본질주의적 원칙의 두 가지를 비판하겠다 ; 영향력이 있는 몇 학파가 여전히 거기에 의존하기 때문에 중요한 두 가지 원칙. 하나는 지적(知的) 직감이라는 난해한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정확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용어를 정의해야 한다'는 매우 인기 있는 원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함께 우리가 능력 즉, 지적 직감을 소유하고 있어서 그것으로써 우리는 본질을 볼 수 있으며 어느 정의가 올바른 것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고 주장했고, 많은 현대 본질주의자들은 이 원칙을 반복했다. 다른 철학자들은, 칸트를 좇아서, 우리는 그런 종류의 것을 소유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나의 의견은 우리가 '지적 직감'으로 설명될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는 것이다 ; 즉 더 정확하게, 우리가 지닌 지적 경험 중 어떤 것은 그렇게 설명될 것이라는 것을. 개념이나 관점, 혹은 예를 들어 곱셈 같은 수학적 방식을 자신이 '그것에 대하여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이해하는' 모든 사람은 그것을 직감적으로 이해한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 그리고 그런 종류의 지적 경험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어떤 사람이 아무리 강하게 직감적으로 그것이 사실임에 틀림없다고, 즉 그것은 '자명하다'고 느낄지라도, 나는 이런 경험들이 우리들의 과학적 노력을 위하여 중요하다 해도 어떤 개념이나 이론의 진실성을 확립하는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 직감은 주장을 추구하는 우리를 격려할지라도, 심지어 주장으로서 역할을 할 수도 없다. 그 까닭은 다른 사람이 동일한 이론이 틀렸다는 똑같이 강한 직감을 가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과학의 길은 예전에 자명하다고 선언된 버려진 이론으로 뒤덮여 있다 ; 예들 들어 프란시스 베이컨은 태양과 별들이 분명히 정지해 있는 지구 주위를 회전한다는 자명한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직감은 틀림없이 시인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자의 삶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한다. 직감은 과학자를 발견으로 이끌어간다. 그러나 직감으로 인하여 과학자는 실패를 또한 맛본다. 그래서 직감은 말하자면 항상 과학자의 개인적인 일로 남는다. 과학은 과학자가 어떻게 아이디어를 얻는지를 묻지 않고 모든 사람에 의하여 실험될 수 있는 주장에 흥미를 가질 따름이다. 위대한 수학자 가우스(Gauss)는 예전에 이렇게 소리쳐 이런 상황을 말끔하게 설명했다 : '나는 결과를 얻었다 ; 그러나 나는 어떻게 그 결과를 얻는지 아직 모른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소위 본질에 관한 지적 직감이라는 원칙에도 적용되는데, 그 원칙은 헤겔에 의하여 전파되었고 우리 시대에는 E. 후설(Husserl)과 그의 수많은 제자들에 의하여 전파되었다 ; 그리고 그것은 후설이 지칭하는 바 '본질에 관한 지적 직감' 즉, '순수 현상학'이 과학이나 철학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이 순수 현상학자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새로운 창안인지 혹은 데카르트주의나 헤겔주의적 해석인지 많이 논쟁된 문제는 쉽게 결정될 수 있다 ;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해석이다.)

비판될 두 번째 원칙은 현대적 관점과 훨씬 더 중요하게 연결되어 있다 ; 그리고 그것은 특히 장황한 표현이라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이래, 우리는 모든 진술을 증명할 수 없으며, 모든 진술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증거의 무한소급을 불러올 뿐이기 때문에 무너질 것이라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수많은 현대 작가들은 분명히 우리가 지닌 모든 용어의 의미를 정의하려는 유사한 시도는, 같은 방식으로, 정의의 무한소급을 야기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싶다. 크로스먼(Crossman)의 오늘날의 플라톤(Plato To-Day)에서 따온 다음 글은 우리 시대의 많은 유명한 철학자들, 예를 들어,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함축적으로 지닌 관점의 특징이다 : '..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유용하게 토론할 수가 없다. 우리가 시간을 낭비하는 무익한 논쟁 대부분은 주로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대하여 각자가 자신의 모호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반대자가 그 말들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에 기인한다. 우리가 우선 용어를 정의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이로운 토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우리는 정치선전이 (현대판 수사학) 성공하기 위하여 주로 용어의 의미를 혼동시키는 데 의존하는 것을 관찰하기 위하여 일간신문을 읽기만 하면 된다. 정치가들이 법에 의하여 자신들이 사용하고자 하는 용어를 정의해야 한다면, 그들은 대중적 인기 대부분을 잃어버릴 것이고, 그들의 연설은 짧아질 것이며, 그들의 불화는 순전히 언어적임이 밝혀질 것이다.' 이 글은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빌려온 편견 한 가지의, 언어란 정의를 사용함으로써 더 정확해질 수 있다는 편견 한 가지의 커다란 특징이다.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지 고찰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정치가들'이 (혹은 다른 사람들) '법에 의하여 자신들이 사용하고자 하는 용어를 정의해야 한다'면, 그들의 연설은 짧아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길어질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까닭은 논리적 전개가 진술의 사실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바와 같이 정의는 용어의 의미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논리적 전개나 정의는 이 문제를 원래 상태로 돌려놓을 뿐이다. 논리적 전개는 진실의 문제를 전제로 돌려놓고, 정의는 의미의 문제를 정의하는 용어로 (다시 말해서, 정의하는 공식을 구성하는 용어들로) 돌려놓는다. 그러나 이것들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가 출발할 때 사용한 용어만큼 모호하고 혼란스럽기 쉽다 ; 그리고 여하튼, 우리는 그 용어들을 하나하나 계속해서 정의하여야 한다 ; 그리하여 역시 정의되어야 하는 새로운 용어를 불러온다. 기타 등등, 무한대로 계속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용어가 정의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가 내놓는 모든 진술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주장처럼 근거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처음보기에 이 비판은 불공평해 보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정의를 요구한다면, '민주주의', '자유', '의무', '종교', 기타 등등과 같은 말과 매우 흔히 연결되는 모호성의 제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 모두를 정의한다는 것을 분명히 불가능하지만, 더 위험한 이 용어들의 몇 가지를 정의하여 그대로 두는 것은 분명히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리고 정의하는 용어는 인정되어야 한다고, 다시 말해서, 우리는 무한 소급을 피하기 위해서 1, 2단계에서 멈추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호는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위에 언급된 용어들은 많이 오용된다. 그러나 그 용어들을 정의하려는 시도가 사태를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부인한다.. 그런 시도는 사태를 악화시킬 따름이다. 심지어 한번이라도 '자신들이 쓰는 용어를 정의함'으로써, 그리고 정의하는 용어는 정의되지 않은 채로 내버려둠으로써, 정치가들이 자신의 연설을 더 짧게 만들 수 없을 것임은 분명하다 ; 그 까닭은 본질주의적 정의란, 다시 말해서 '우리의 용어를 정의하는' 정의는 (새로운 기술적 용어를 도입하는 유명론적[唯名論的] 정의와 반대로)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짧은 이야기를 긴 이야기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용어를 정의하려는 시도는 모호함과 혼동을 증가시킬 따름이다. 그 까닭은 우리가 모든 정의하는 용어 하나하나가 정의되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없기 때문에, 영리한 정치가나 철학자는 정의하라는 요구를 쉽게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로써 그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는다면 정치가는 '일반인들의 의지가 통치하는 것' 혹은 '국민들의 정신이 통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리고 그가 이제 정의를 내놓아서 정밀의 최고 기준을 충족시켰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더 이상 감히 비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통치'나 '국민'이나 '의지'나 '정신'이 차례에 따라서 정의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우리를 무한소급의 길로 치닫게 만들어 모든 사람이 그런 요구를 제기하기를 주저하기 때문에, 어떻게 그가 비판을 받을 수 있을까 ?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런 요구가 제기된다면, 그 요구는 똑같이 쉽게 충족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정의가 옳은지, 혹은 참인 지의 질문에 관한 논쟁은 말에 관한 빈 논란만을 야기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정의에 관한 본질주의적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우리가 지닌 지식의 '원칙'을 설정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다만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를 정의'하여야 한다는 분명히 보다 겸손한 주장을 한다고 할지라도, 붕괴된다.

그러나 의심할 바없이, 우리가 분명하고 모호함 없이 말해야 한다는 요구는 매우 중요하며, 충족되어야 한다. 유명론적(唯名論的) 관점은 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 ? 그리고 유명론은 무한소급을 피할 수 있을까 ?

그럴 수 있다. 유명론적 위치에는 무한소급에 상응하는 난점이 없다. 우리가 보아온 바와 같이, 과학은 과학이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를 결정하기 위하여 정의를 사용하지 않고, 다만 편리한 짧은 표찰을 도입하기 위하여 정의를 사용한다. 그래서 과학은 정의에 연연하지 않는다 ; 모든 정의는 제공되는 정보를 손상시키지 않고도 생략될 수 있다. 이것을 고려할 때 과학에서는 실제로 필요한 모든 용어는 정의되지 않는 용어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과학은 용어의 의미를 확실하게 하는가 ? 이 질문에 대하여 다양한 답변이 제시되었지만, 나는 그 답변 중 어느 것도 만족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황은 이러한 듯싶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관련된 철학들이 그렇게 오랜 기간동안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에 관한 정밀한 지식을 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들에게 말해서 우리 모두에게는 그것을 믿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용어와 그 의미에 대하여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대신에 사실에 대하여 신경을 쓰던 물리학과 같은 과학이 커다란 정밀성을 이룩한 반면, 2000년 동안을 용어의 의미에 관하여 걱정을 하던 철학이 장광설로 가득 찼을 뿐만 아니라 가증스럽게 애매모호하다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이 믿음에 매달린다. 이것은, 확실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서 용어의 의미에 관한 중요성이 부당하게 과장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의미 문제에 대한 이 집착은 정밀성을 이룩하는데 실패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애매모호함과 혼란의 주원인이기 때문이다.

과학에서, 우리는 기술(記述)이 용어의 의미에 의존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심지어 용어가 정의되는 곳에서도, 우리는 정의로부터 정보를 얻으려하거나, 정의에 주장을 기초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가 그렇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유이다. 우리는 용어에 지나친 부담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용어에 가능한 한 적은 무게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용어의 '의미'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용어란 조금 모호하며 (우리가 실용적인 적용에서만 용어를 배웠기 때문에) 우리는 모호함이라는 용어의 경계부분을 감소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그 부분 속에서 충분히 지탱함으로써, 용어의 의미와 관련된 가능한 음영이 문제가 되지 않을 그런 정도로 문장을 신중하게 표현함으로써 정밀성을 이룩한다고 우리는 항상 인식한다. 이것이 우리가 말에 관하여 논쟁을 피하는 방식이다.

과학과 과학적 언어의 정밀성이 그 용어의 정밀성에 달려있다는 견해는 틀림없이 매우 표면적으로 타당해 보이지만, 내가 믿는 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견일 따름이다. 언어의 정밀성은 오히려 용어에 정밀이라는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사실에 달려있다. '사구[砂丘]'나 '바람' 같은 용어는 분명히 매우 모호하다. (작은 모래 언덕은 '사구'로 불리기 위하여 몇 인치로 높아야 하는가 ? 공기는 '바람'으로 불리기 위하여 얼마나 빨리 움직여야 하는가 ?) 그러나, 많은 지질학자들이 지닌 목적을 위해서, 이 용어들은 완전히 충분하게 정밀하다 ; 그리고 다른 목적을 위해서, 더 높은 수준의 구별이 필요할 때, 지질학자는 항상 '4와 30 피트 높이 사이의 사구' 혹은 '시속 20과 40 마일 사이의 속도를 지닌 바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 정확한 과학에서의 위상도 비슷하다. 예를 들어 물리적 측정에서 우리는 오차가 나는 범위 항상 고려하여 조심한다 ; 그래서 정밀성은 이 범위를 0으로 감소시키려고 노력하거나 그런 범위가 없는 척하는 데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오차를 명시적으로 인정하는 데 달려있다.

심지어 용어가 문제를 일으키는 곳에서도, 예를 들어 물리학에서 '동시성(simultaneity)'처럼, 그것은 의미가 정밀하지 못하거나 모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용어에 너무 적은 의미보다는 너무 많은 의미나 너무 '정밀한' 의미를 부여하도록 유도하는 어떤 직감적 이론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동시성 분석에서 발견한 것은, 동시적 사건에 대하여 말할 때, 물리학자들은 무한 속도의 신호가 있다면 도전 받을 수 없었을 거짓 가정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역자에게 과학적 지식이 없기 때문에 확실한 의미를 의역하거나 직역하기가 힘듭니다. 원문은 What Einstein found in his analysis of simultaneity was that, when speaking of simultaneous events, physicists made a false assumption which would have been unchallengeable were there signals of infinite velocity.인데 were there signals of infinite velocity는 if there were signals of infinite velocity로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협조로 정확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역자 주.) 오류는 물리학자들이 무의미한 짓을 했다거나 그들의 의미가 모호했다거나 용어가 충분히 정확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것은 정확하게 말해서, 그 직감적 자명성(自明性: 스스로 명백함) 때문에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이론적 가정을 제거하면 과학에서 나타났던 난제가 제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실제로 용어의 의미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이론의 사실성에 관심을 가졌다. 어떤 사람이, 분명한 물리적 문제를 제쳐두고, 그 '본질적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혹은 심지어 물리학자들이 동시성에 관하여 말할 때 물리학자들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을 분석함으로써 동시성에 관한 개념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했다면 많은 것이 이룩되었을 개연성은 매우 적다.

우리는 이 사례로부터 우리가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또한 애매모호함과 같은 용어의 의미에 관한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사례에 적용해도 확실히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집착은 더 정확하게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에 많은 것이 달려있다는, 그리고 우리가 이 의미로써 일을 한다는 가정에 의존한다 ; 그러므로 장광설과 학풍고집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원리와 같은 원리를 비판할 것인데, 그는 과학이 사실의 문제를 조사하는 반면 용어의 의미를 분명히 하여 우리의 언어를 정화하고 언어적 수수께끼를 제거하는 것이 철학이 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 학파의 견해는 이성적으로 비판될 수 있는 어떤 지속적 논쟁도 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 그러므로 그 학파는 미묘한 분석작업을 소수의 비밀스러운 창시자 무리에게 독점적으로 맡긴다. 이것은 의미에 집착하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전형적인 결과가 생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듯하다 : 학풍고집과 신비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이 두 가지 전형적인 결과가 어떻게 출현했는지 간단하게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증 즉, 증거와 정의(定義)는 지식을 획득하는 두 가지 근본적이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먼저 증거라는 원칙을 고려하면, 증거는 증명될 수 있는 보다 더 많이 증명하려는 수많은 시도를 야기했다 ; 중세의 철학은 이 학풍고집으로 가득 차있고 동일한 경향이 대륙에서는 칸트까지 관찰될 수 있다. 피히테(Fichte)와 쉘링(Schelling), 그리고 헤겔(Hegel)의 낭만주의적 반동을 불러왔던 것은 칸트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새로 태동한 경향은 증거를 버리고, 증거와 함께 모든 종류의 이성적 논쟁을 버리는 것이었다. 낭만주의자들에게는 사회과학에서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새로운 종류의 독단주의가 유행하게 되었다. 낭만주의는 우리에게 원리 선언을 내민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선언을 수용하거나 버리거나 할 수 있다. 예언 철학의 이 낭만주의적 기간은, 쇼펜하우어에 의하여 '거짓의 시대'라고 불리었는데, 쇼펜하우어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 '정직의 특성, 의문을 독자와 함께 떠맡는 정신은 이전 모든 철학자의 작품에 스며있는데 여기서 완전히 사라졌다. 한 장 한 장 읽을 때마다 소위 철학자들이라는 사람들은 독자를 가르치려하지 않고 독자를 현혹시키려고 한다.'

유사한 결과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관한 원리에 의하여 나타났다. 첫째로 그 원리는 사소한 일에 집착하는 일을 많이 낳았다. 그러나 나중에, 철학자들은 사람은 정의에 관하여 논쟁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런 방식으로, 본질주의는 장광설을 부추겼을 뿐만 아니라 논쟁에 대한, 다시 말해서 이성(理性)에 대한 환멸을 불러왔다. 학풍고집과 신비주의, 그리고 이성에 대한 절망, 이것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플라톤의 공개적인 반역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이성에 반대하는 은밀한 반역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으로부터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본질주의와 정의의 이론은 최초로 제시되었을 때, 특히 소크라테스의 오랜 동료인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로부터 강력한 반대를 받았는데 그의 비판은 매우 타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반대는 불행히도 패퇴 당했다. 인류의 지적(知的) 발달에 관련된 이 패배의 결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 결과 중 몇 가지는 다음 장에서 토론될 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인 정의에 관한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의 비판을 끝낸다.

III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나의 비판이 매우 불충분하다는 사실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거의 없다 - 내가 플라톤을 비판한 것보다 훨씬 더 그렇다. 그 두 사람에 대한 언급의 주요 목적은 그들이 역사주의의 발흥과 열린사회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행했던 역할을 보여주는 것과, 우리 시대의 문제에 - 현대 역사주의와 전체주의의 시조인 헤겔의 예언 철학 발흥에 - 그들이 끼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 사이의 발전은 여기서 조금도 다루어질 수 없다. 그들을 공평하게 다루려면, 적어도 책 한 권이 필요할 것이다. 본 장의 남은 몇 쪽에서 나는, 그러나, 열린사회와 닫힌 사회 사이의 갈등의 관계로 이 기간이 어떻게 해설될는지를 밝히려고 노력할 것이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사변(思辨)과 위대한 세대인 페리클레스, 소크라테스,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정신 사이의 갈등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추적될 수 있다. 이 정신은, 초기 기독교도들처럼, 인간의 형제애를 설교했던 견유학파(Cynics)의 운동에 다소 순수하게 보존되었는데 그들은 형제애를 신(神)을 아버지로 하는 일신교적 신앙과 연결시켰다. 아우구스투스의 제국뿐만 아니라 알렉산더의 제국도 페리클레스의 제국주의적 아테네에서 최초로 형성된, 그리고 항상 동서양의 접촉으로 자극을 받았던 이 개념들의 영향을 받았다. 이 개념들과 아마도 견유학파의 운동 자체는 기독교 발흥에 또한 영향을 미쳤을 개연성이 높다.

초기에, 견유학파의 운동처럼 기독교는 플라톤화 하는 우월의식에 찬 지식인들의 이상주의와 지식주의를 반대했다. ('하느님은 이것을 현명한 자와 신중한 사람들로부터 숨기고 아기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그것이, 부분적으로, 더 넓은 의미에서 유태적 플라톤주의로 설명될 것인 하느님과 하느님 말씀의 추상적 숭배에 대한 항의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이 유태인의 종족주의에 반대하는, 그 종족주의의 경직되고 공허한 종족적 금기에 반대하는, 그리고 예를 들어 선민사상에서, 다시 말해서, 신(神)을 종족적 신으로 해석하는 데에서 표현된 그 종족적 배타성에 반대하는 항거였다. 종족적 법규와 종족적 단결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은 고대 종족 사회라기보다는 종족적 생활의 옛 형태를 복원하고 고착시키려는 필사적인 시도의 특징으로 보인다 ; 그리고 유태민족의 경우에는, 그것은 유태인의 종족적 삶에 닥친 바빌로니아의 정복의 충격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큰 경직성을 향해 가는 이 운동과 병행하여 분명히 동시에 시작되었고, 그리스 종족주의의 해체에 위대한 세대가 반응한 것과 닮았던 박애주의 사상을 낳은 또 다른 운동을 우리는 발견한다. 이 과정은 유태인들의 독립이 결국 로마에 의하여 파괴되었을 때 반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은 가능성이 있던 두 가지의 해결책 사이에서 새롭고 더 깊은 분열을 초래했는데, 정통 유태집단에 의하여 대표되는 바와 같이 종족으로의 복귀와, 노예뿐만 아니라 야만인(혹은 이방인)을 포용하던 새로운 기독교 종파의 박애주의였다. 우리는 국가적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가 얼마나 다급했던가를 사도행전(Acts)으로부터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유태집단의 발전으로부터 또한 이것을 알 수 있다 ; 그 까닭은 보수적인 유태집단은 동일한 도전에 대하여 자신들의 종족적 삶의 형태를 고착화시키고 견고화하는 또 다른 운동으로, 그리고 플라톤의 승인을 받았을 아집으로 자신들의 '율법'에 매달림으로써 반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개가, 플라톤의 아이디어의 전개처럼, 열린사회라는 새로운 신조에 대한 강한 적대감에 의하여 고취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이 경우에는, 기독교라는 새로운 신조에 대한.

그러나 위대한 세대, 특히 소크라테스의 신조와 초기 기독교의 신조 사이의 유사점은 더 깊다. 초기 기독교도들의 힘은 그들의 도덕적 용기에 놓여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 힘은 '로마는 자신의 신민들에게 양심에 반하여 행동하도록 강요할 권한이 있다'는 로마의 주장을 수용 거부했다는 사실에 놓여있었다. 정의의 기준을 세우려는 권력의 주장을 거부했던 기독교 순교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죽은 같은 대의(大義)로 박해를 받았다.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 신앙이 강력해졌을 때 이 문제들은 분명히 크게 바뀌었다. 이 기독교의 공식적 인정이 (그리고 배교자인 율리아누스 황제의 신 플라톤적 반교회 모형을 모방한 그 후 조직) 지배 권력의 편에서 평등주의적 종교의 - 그들이 무신론과 불경이라는 죄목뿐만 아니라 무력으로 대처하려 했다가 실패한 종교 - 엄청난 도덕적 영향력을 부수고자 의도된 교묘한 정치적인 움직임이 아니었던지 하는 의문이 대두된다. 다시 말해서, (특히 율리아누스 황제 이후에) 로마는 파레토(Pareto)의 충고인 '감정을 파괴하려는 헛된 노력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감정을 이용하는 것'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생긴다. 이 의문은 대답하기가 어렵다 ;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 추종자들에게 '.. 시대착오적으로 냉소적인 동기',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이 지닌 '삶에 대한 현대 서구적 자세'와 더 일치하는 동기의 근원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경고하는 역사적 느낌'에 호소함으로써 (토인비가 그렇게 하는 바는 같이) 그 의문은 분명히 일축될 수 없다 (이 문장의 의미는 현대가 아닌 로마 시대에 시대착오적으로 냉소적인 - 다시 말해서 로마 시대에 무슨 평등이냐 - 평등을 주장하는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 추종자들에 의하여 공인되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기독교의 힘에 의하여 로마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민주혁명의 열기를 쳐부수려고 힘을 낭비하지 말고 그 열기를 이용하라'는 파레토의 생각을 이용하여 로마의 정치가들이 기독교를 공인했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은 없어질 수가 없다로 해석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 추종자들이 기독교를 공인한 것이 아니다라고 토인비는 주장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의 의미는 토인비를 전공한 분들과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되는 과정을 연구한 분들에 의하여 확인되기를 역자는 기대한다 - 역자 주). 그 까닭은 그런 동기가 30인의 참주의 지도자인 크리티아스(Critias)에 의하여 기원전 5세기에 공개적이고 '냉소적으로', 더 정확하게 말해서, 파렴치하게 표현된 것을 우리는 보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유사한 말이 그리스 철학의 역사에서 흔하게 발견될 수 있다. 아무튼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비기독교도, 이단자, 그리고 철학자 박해와 더불어 (기원후 529년) 암흑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문장에서 서울대 이명현 교수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Justinian]를 율리아누스 황제[줄리안]로 오기하고 있다 - 역자 주). 교회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적 전체주의 이후에 종교재판에서 절정을 이루는 과정을 따랐다. 종교재판의 이론은 특별히 순전히 플라톤적이라고 묘사될 수 있다. 그 이론은 법률(Laws)의 마지막 세 권에 밝혀져 있는데, 그 책에서, 병든 양심이 불행하게도 권력가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을 솔직하고 명예로운 사람으로 인정되는 이리를 양치기 통치자가 죽여야 할지라도, 양떼를 무슨 일이 있어도 법과 특히 종교적 관행과 이론의 경직성을 보존함으로써 보호하는 것이 양치기 통치자의 의무라는 것을 플라톤은 보여준다.

이른 바 중세기의 '기독교적' 권위주의가, 특정 지적(知的) 무리에게서, 당시 최신 유행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 시대에서 문명이 주는 긴장에 대한 특징적인 반응의 하나이다 (이 문장의 의미는 중세기의 기독교적 권위주의는 현대에서 문명이 주는 긴장감 때문에 사람들이 권위주위에 빠져드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역자 주). 이것은 틀림없이 정말로 더 '유기적'이고 '통합된' 과거를 이상화하는 데에 기인할 뿐만 아니라, 이 긴장을 무한히 증가시킨 현대의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에 대한 이해 가능한 혐오에 또한 기인한다 (이 문장의 의미는 권위주의란 과거를 '유기적'으로 -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사회에서 제 위치에 만족하며 사는 기계적인 생활 - 그리고 '통합적'으로 즉, 상호비판이나 격변이 없이 이상화시키는 것이며, 현대에서는 불가지론에 대하여 혐오가 생겨나는 것이다 - 역자 주). 사람은 하느님이 세상을 통치한다고 믿었다. 이 믿음은 사람들의 책임을 제한했다. 사람들 자신이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는 새로운 믿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거의 참을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불러왔다. 이 모든 것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중세가 심지어 기독교의 관점에서도 우리의 서구 민주주의보다 더 잘 다스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가 특정 '율법학자'에 의하여 예수의 말의 진짜 해석과 가짜 해석을 구분할 기준에 관하여 심문을 받았다고 우리는 복음서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는 큰 고통을 겪고 있는 부상당한 사람을 보고 '다른 편으로 지나간' 제사장 및 레위 사람과, 반면 부상당한 사람의 상처를 싸매 주고 그의 물질적 요구를 돌보아주었다는 사례를 이야기하여 대답했다. 이 사례는 내가 생각하기에 교회가 자유와 양심을 억압하던 때뿐만 아니라, 교회가 지켜보고 교회의 권위 때문에 밝혀지지 않은 박해가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갔던 때를 갈망하는 저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기억되어야 한다. 당시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그리고 동시에 이 시절을 회복하기를 원하는 현재 그렇게도 유행하는 낭만적 중세주의의 '기독교'에 대한 감동적인 비평으로서, 여기서 한 구절이 H. 진저(Zinsser)의 저서 쥐와 이, 그리고 역사(Rats, Lice, and History)에서 인용될 것인데 그 책에서 그는 '성 요한의 춤', '성 비투스'의 춤', 기타 등등으로 알려진 중세의 춤 광증 유행병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나는 진저를 중세에 대한 권위자로 초빙할 의사가 없다 - 문제가 되고 있는 사실들은 거의 논쟁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의 비평은 실용적인 사마리아인에 대한 - 위대하고 인간적인 내과의사에 대한 - 희귀하고도 기묘한 효과를 자아낸다 [괄호 속의 이 문장들은 이명현 교수의 번역본에는 빠져있다 - 역자 주].) '이전 시대에서 들어보지 못한 것을 아닐지라도 이 이상한 발작은 흑사병이라는 참혹한 질병이 창궐하던 동안과 바로 직후에 대규모로 퍼졌다. 대체로, 춤 광증은 우리가 신경계통의 유행성 감염 질병과 연관짓는 특징 하나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 광증은 오히려 억압받고 굶주리고 오늘날 거의 상상될 수 없는 정도로 비참해진 사람들 속에서 공포와 절망으로 야기된 집단 광란처럼 보인다. 그치지 않는 전쟁과, 정치 및 사회적 분열이라는 참혹함에 피할 수 없고, 알 수 없고 치명적인 질병인 무서운 고통이 추가되었다. 인류는 방어할 수 없는 테러와 위험의 세상에 갇힌 것처럼 무기력하게 서있었다. 하느님과 악마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하여 행하여진다고 믿었던 고통 아래서 움츠렸던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는 살아있는 개념이었다. 긴장 하에서 무너졌던 사람들에게는 시대 상황 아래서 종교적 광신주의의 길을 취했던 정신착란이라는 내부적 피난을 제외하고는 도피의 길이 없었다.' 진저는 그 다음에 이 사건들과, 그가 말하기를 '경제 및 정치적 광란이 이전 시대의 종교적 광란을 대신했던' 우리 시대의 특정 반응을 비교한다 ; 그리고 그 다음에, 그는 권위주의의 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특징지어 '테러에 취하여 비참했던 사람들로 거의 믿어지지 않는 고초와 위험이라는 압박감으로 무너져내렸다'고 요약한다. 중세기의 '부단한 화합과 단결'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는 태도, 혹은 인류를 전염병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이성을 이용하기를 원하는 태도 중 어느 태도가 더 기독교적인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중세 권위적인 교회의 일부는 그런 실용적인 인도주의를 '세속적'으로, 쾌락주의(Epicureanism)의 특징으로, 그리고 '금수처럼 자신의 배를 채우기'를 원하기만 하는 사람들의 특징으로 낙인찍는 데 성공했다. '쾌락주의(Epicureanism)', '물질주의(materialism)', 그리고 '경험론(empiricism)'이라는 용어는, 다시 말해서, 위대한 세대의 가장 위대한 한 사람이었던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철학은 이런 방식으로 사악함과 동의어가 되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족적 이상주의는 일종의 그리스도 이전의 기독교로 칭송을 받았다. 정말로, 이것은 심지어 우리 시대에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거대한 권위의 근원이어서 그들의 철학은 중세기 권위주의에 의하여 채택되었다. 그러나 전체주의 진영 밖에서도 우리 삶에 끼치는 그들의 실제 영향보다 그들의 명성이 더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데모크리투스(Democritus)라는 이름은 거의 기억되지 않을지라도 그의 도덕과 그의 과학은 아직도 우리와 살아간다.

-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제 2 권, 헤겔과 마르크스", 칼 R. 포퍼 -

To the debacle of liberal science can be traced the moral schism of the modern world which so tragically divides enlightened men.

WALTER LIPPMAN.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VOL. II

THE HIGH TIDE OF PROPHECY

THE RISE OF ORACULAR PHILOSOPHY

CHAPTER 11 : THE ARISTOTELIAN ROOTS OF

HEGELIANISM

The task of writing a history of ideas in which we are interested - of historicism and its connection with totalitarianism - will not be attempted here. The reader will remember, I hope, that I do not even try to give more than a few scattered remarks which may throw light on the background of the modern version of these ideas. The story of their development, more particularly during the period from Plato to Hegel and Marx, could not possibly be told while keeping the size of the book within reasonable limits (이 문장에서 while keeping 이하의 구문은 분사구문에 접속사 while이 첨가된 형태인데 주문장의 주어가 The story of their development이므로 능동형의 분사구문이 keeping이 쓰일 수 없다. 따라서 while keeping 이하의 분사구문은 while we keep the size of the book within reasonable limits로 써야한다 - 역자 주). I shall therefore not attempt a serious treatment of Aristotle, except in so far as his version of Plato's essentialism has influenced the historicism of Hegel, and thereby that of Marx. The restriction to those ideas of Aristotle with which we have become acquainted in our criticism of Plato, Aristotle's great master, does not, however, create as serious a loss as one might fear at first sight. For Aristotle, in spite of his stupendous learning and his astonishing scope, was not a man of striking originality of thought. What he added to the Platonic store of ideas was, in the main, systematization and a burning interest in empirical and especially in biological problems. To be sure, he is the inventor of logic, and for this and his other achievements, he amply deserves what he himself claimed (at the end of his Sophistic Refutations) - our warm thanks, and our pardon for his shortcomings. Yet for readers and admirers of Plato these shortcomings are formidable.

I

In some of Plato's latest writings, we can find an echo of the contemporary political developments in Athens - of the consolidation of democracy. It seems that even Plato began to doubt whether some form of democracy had not come to stay. In Aristotle, we find indications that he did not doubt any longer. Although he is no friend of democracy, he accepts it as unavoidable, and is ready to compromise with the enemy.

An inclination to compromise, strangely mixed with an inclination to find fault with his predecessors and contemporaries (and with Plato in particular), is one of the outstanding characteristics of Aristotle's encyclopaedic writings. They show no trace of the tragic and stirring conflict that is the motive of Plato's work. Instead of Plato's flashes of penetrating insight, we find dry systematization and the love, shared by so many mediocre writers of later times, for settling any question whatever by issuing a 'sound and balanced judgement' that does justice to everybody ; which means, at times, by elaborately and solemnly missing the point (마지막 절에서 동사 means의 목적어가 없다. 의미상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간혹 정교하고도 심각하게 요점을 빼먹는다는 뜻이지만 영어의 표현으로는 부적절하다 - 역자 주). This exasperating tendency which is systematized in Aristotle's famous 'doctrine of the mean' is one of the sources of his so often forced and even fatuous criticism of Plato . An example of Aristotle's lack of insight, in this case of historical insight (he also was a historian), is the fact that he acquiesced in the apparent democratic consolidation just when it had been superseded by the imperial monarchy of Macedon ; a historical event which happened to escape his notice. Aristotle, who was, as his father had been, a courtier at the Macedonian court, chosen by Philip to be the teacher of Alexander the Great, seems to have underrated these men and their plans ; perhaps he thought he knew them too well. 'Aristotle sat down to dinner with Monarchy without becoming aware of it', is Gomperz's appropriate comment.

Aristotle's thought is entirely dominated by Plato's. Somewhat grudgingly, he followed his great teacher as closely as his temperament permitted, not only in his general political outlook but practically everywhere. So he endorsed, and systematized, Plato's naturalistic theory of slavery : 'Some men are by nature free, and others slaves ; and for the latter, slavery is fitting as well as just... A man who is by nature not his own, but another's, is by nature a slave... Hellenes do not like to call themselves slaves, but confine this term to barbarians... The slave is totally devoid of any faculty of reasoning', while free women have just a very little of it. (We owe to Aristotle's criticisms and enunciations most of our knowledge of the Athenian movement against slavery. By arguing against the fighters for freedom, he preserved some of their utterances.) In some minor points Aristotle slightly mitigates Plato's theory of slavery, and duly censures his teacher for being too harsh. He could neither resist an opportunity for criticizing Plato, nor one for a compromise, not even if it was a compromise with the liberal tendencies of his time.

But the theory of slavery is only one of Plato's many political ideas to be adopted by Aristotle. Especially his theory of the Best State, as far as we know it, is modelled upon the theories of the Republic and the Laws ; and his version throws considerable light on Plato's. Aristotle's Best State is a compromise between three things, a romantic Platonic aristocracy, a 'sound and balanced' feudalism, and some democratic ideas ; but feudalism has the best of it. With the democrats, Aristotle holds that all citizens should have the right to participate in the government. But this, of course, is not meant to be as radical as it sounds, for Aristotle explains at once that not only slaves but all members of the producing classes are excluded from citizenship. Thus he teaches with Plato that the working classes must not rule and the ruling classes must not work, nor earn any money. (But they are supposed to have plenty.) They own the land, but must not work it themselves. only hunting, war, and similar hobbies are considered worthy of the feudal rulers. Aristotle's fear of any form of money earning, i.e. of all professional activities, goes perhaps even further than Plato's. Plato had used the term 'banausic' to describe a plebeian, abject, or depraved state of mind. Aristotle extends the disparaging use of the term so as to cover all interests which are not pure hobbies. In fact, his use of the term is very near to our use of the term 'professional', more precisely in the sense in which it disqualifies in an amateur competition, but also in the sense in which it applies to any specialized expert, such as a physician. For Aristotle, every form of professionalism means a loss of caste. A feudal gentleman, he insists , must never take too much interest in 'any occupation, art or science... There are also some liberal arts, that is to say, arts which a gentleman may acquire, but always, only to a certain degree. For if he takes too much interest in them, then these evil effects will follow', namely, he will become proficient, like a professional, and lose caste. This is Aristotle's idea of a liberal education, the idea, unfortunately not yet obsolete , of a gentleman's education, as opposed to the education of a slave, serf, servant, or professional man. It is in the same vein that he repeatedly insists that 'the first principle of all action is leisure' . Aristotle's admiration and deference for the leisured classes seems to be the expression of a curious feeling of uneasiness. It looks as if the son of the Macedonian court physician was troubled by the question of his own social position, and especially by the possibility that he might lose caste because of his own scholarly interests which might be considered professional. 'one is tempted to believe', says Gomperz , 'that he feared to hear such denunciations from his aristocratic friends.. It is indeed strange to see that one of the greatest scholars of all time, if not the greatest, does not wish to be a professional scholar. He would rather be a dilettante, and a man of the world..' Aristotle's feelings of inferiority have, perhaps, still another basis, apart from his wish to prove his independence of Plato, apart from his own 'professional' origin, and apart from the fact that he was, undoubtedly, a professional 'sophist' (he even taught rhetoric). For with Aristotle, Platonic philosophy gives up her great aspirations, her claims to power. From this moment, it could continue only as a teaching profession. And since hardly anybody but a feudal lord had the money and the leisure for studying philosophy, all that philosophy could aspire to was to become an annex to the traditional education of a gentleman. With this more modest aspiration in view, Aristotle finds it very necessary to persuade the feudal gentleman that philosophical speculation and contemplation may become a most important part of his 'good life' ; for it is the happiest and noblest and the most refined method of whiling away one's time, if one is not occupied with political intrigues or by war. It is the best way of spending one's leisure since, as Aristotle himself puts it, 'nobody.. would arrange a war for that purpose' .

It is plausible to assume that such a courtier's philosophy will tend to be optimistic, since it will hardly be a pleasant pastime otherwise. And indeed, in its optimism lies the one important adjustment made by Aristotle in his systematization of Platonism. Plato's sense of drift had expressed itself in his theory that all change, at least in certain cosmic periods, must be for the worse ; all change is degeneration. Aristotle's theory admits of changes which are improvements ; thus change may be progress. Plato had taught that all development starts from the original, the perfect Form or Idea, so that the developing thing must lose its perfection in the degree in which it changes and in which its similarity to the original decreases. This theory was given up by his nephew and successor, Speusippus, as well as by Aristotle. But Aristotle censured Speusippus' arguments as going too far, since they implied a general biological evolution towards higher forms. Aristotle, it seems, was opposed to the much-discussed evolutionary biological theories of his time . But the peculiar optimistic twist which he gave to Platonism was an outcome of biological speculation also. It was based upon the idea of a final cause.

According to Aristotle, one of the four causes of anything - also of any movement or change - is the final cause, or the end towards which the movement aims. In so far as it is an aim or a desired end, the final cause is also good. It follows from this that some good may not only be the starting point of a movement (as Plato had taught, and as Aristotle admitted ) but that some good must also stand at its end. And this is particularly important for anything that has a beginning in time, or, as Aristotle puts it, for anything that comes into being. The form or essence of anything developing is identical with the purpose or end or final state towards which it develops. Thus we obtain after all, in spite of Aristotle's disclaimer, something very closely resembling Speusippus' adjustment of Platonism. The Form or Idea, which is still, with Plato, considered to be good, stands at the end, instead of the beginning. This characterizes Aristotle's substitution of optimism for pessimism.

Aristotle's teleology, i.e. his stress upon the end or aim of change as its final cause, is an expression of his predominantly biological interests. It is influenced by Plato's biological theories , and also by Plato's extension of his theory of justice to the universe. For Plato did not confine himself to teaching that each of the different classes of citizens has its natural place in society, a place to which it belongs and for which it is naturally fitted ; he also tried to interpret the world of physical bodies and their different classes or kinds on similar principles. He tried to explain the weight of heavy bodies, like stones, or earth, and their tendency to fall, as well as the tendency of air and fire to rise, by the assumption that they strive to retain, or to regain, the place inhabitated by their kind. Stones and earth fall because they strive to be where most stones and earth are, and where they belong, in the just order of nature ; air and fire rise because they strive to be where air and fire (the heavenly bodies) are, and where they belong, in the just order of nature . This theory of motion appealed to the zoologist Aristotle ; it combines easily with the theory of final causes, and it allows an explanation of all motion as being analogous with the canter of horses keen to return to their stables. He developed it as his famous theory of natural places. Everything if removed from its own natural place has a natural tendency to return to it.

Despite some alterations, Aristotle's version of Plato's essentialism shows only unimportant differences. Aristotle insists, of course, that unlike Plato he does not conceive the Forms or Ideas as existing apart from sensible things. But in so far as this difference is important, it is closely connected with the adjustment in the theory of change. For one of the main points in Plato's theory is that he must consider the Forms or essences or originals (or fathers) as existing prior to, and therefore apart from, sensible things, since these move further and further away from them. Aristotle makes sensible things move towards their final causes or ends, and these he identifies with their Forms or essences. And as a biologist, he assumes that sensible things carry potentially within themselves the seeds, as it were, of their final states, or of their essences. This is one of the reasons why he can say that the Form or essence is in the thing, not, as Plato said, prior and external to it. For Aristotle, all movement or change means the realization (or 'actualization') of some of the potentialities inherent in the essence of a thing . It is, for example, an essential potentiality of a piece of timber, that it can float on water, or that it can burn ; these potentialities remain inherent in its essence even if it should never float or burn. But if it does, then it realizes a potentiality, and thereby changes or moves. Accordingly, the essence, which embraces all the potentialities of a thing, is something like its internal source of change or motion. This Aristotelian essence of Form, this 'formal' or 'final' cause, is therefore practically identical with Plato's 'nature' or 'soul' ; and this identification is corroborated by Aristotle himself. 'Nature', he writes in the Metaphysics, 'belongs also to the same class as potentiality ; for it is a principle of movement inherent in the thing itself.' on the other hand, he defines the 'soul' as the 'first entelechy of a living body', and since 'entelechy', in turn, is explained as the Form, or the formal cause, considered as a motive force , we arrive, with the help of this somewhat complicated terminological apparatus, back at Plato's original point of view : that the soul or nature is something akin to the Form or Idea, but inherent in the thing, and its principle of motion. (When Zeller praised Aristotle for his 'definite use and comprehensive development of a scientific terminology' , I think he must have felt a bit uneasy in using the word 'definite' ; but the comprehensiveness is to be admitted, as well as the most deplorable fact that Aristotle, by using this complicated and somewhat pretentious jargon, fascinated only too many philosophers ; so that, as Zeller puts it, 'for thousands of years he showed philosophy her way'.)

Aristotle, who was a historian of the more encyclopaedic type, made not direct contribution to historicism. He adhered to a more restricted version of Plato's theory that floods and other recurring catastrophes destroy the human race from time to time, leaving only a few survivors. But he does not seem, apart from this, to have interested himself in the problem of historical trends. In spite of this fact, it may be shown here how his theory of change lends itself to historicist interpretations, and that it contains all the elements needed for elaborating a grandiose historicist philosophy. (This opportunity was not fully exploited before Hegel.) Three historicist doctrines which directly follow from Aristotle's essentialism may be distinguished. (1) only if a person or a state develops, and only by way of its history, can we get to know anything about its 'hidden, undeveloped essence' (to use a phrase of Hegel's ). This doctrine leads later, first of all, to the adoption of an historicist method ; that is to say, of the principle that we can obtain any knowledge of social entities or essences only by applying the historical method, by studying social changes. But the doctrine leads further (especially when connected with Hegel's moral positivism which identifies the known as well as the real with the good) to the worship of History and its exaltation as the Grand Theatre of Reality as well as the World's Court of Justice. (2) Change, by revealing what is hidden in the undeveloped essence, can only make apparent the essence, the potentialities, the seeds, which from the beginning have inhered in the changing object. This doctrine leads to the historicist idea of an historical fate or an inescapable essential destiny ; for, as Hegel showed later, 'what we call principle, aim, destiny' is nothing but the 'hidden undeveloped essence'. This means that whatever may befall a man, a nation, or a state, must be considered to emanate from, and to be understandable through, the essence, the real thing, the real 'personality' that manifests itself in this man, this nation, or this state. 'A man's fate is immediately connected with his own being ; it is something which, indeed, he may fight against, but which is really part of his own life.' This formulation (due to Caird ) of Hegel's theory of fate is clearly the historical and romantic counterpart of Aristotle's theory that all bodies seek their own 'natural places'. It is, of course, no more than a bombastic expression of the platitude, that what befalls a man depends not only on his external circumstances, but also on himself, on the way he reacts to them. But the naive reader is extremely pleased with his ability to understand, and to feel the truth of this depth of wisdom that needs to be formulated with the help of such thrilling words as 'fate' and especially 'his own being'. (3) In order to become real or actual, the essence must unfold itself in change. This doctrine assumes later, with Hegel, the following form : 'That which exists for itself only, is.. a mere potentiality : it has not yet emerged into Existence... It is only by activity that the Idea is actualized.' Thus if I wish to 'emerge into Existence' (surely a very modest wish), then I must 'assert my personality'. This still rather popular theory leads, as Hegel sees clearly, to a new justification of the theory of slavery. For self-assertion means , in so far as one's relations to others are concerned, the attempt to dominate them. Indeed, Hegel points out that all personal relations can thus be reduced to the fundamental relation of master and slave, of domination and submission. Each must strive to assert and prove himself, and he who has not the nature, the courage, and the general capacity for preserving his independence, must be reduced to servitude. This charming theory of personal relations has, of course, its counterpart in Hegel's theory of international relations. Nations must assert themselves on the Stage of History ; it is their duty to attempt the domination of the World.

All these far-reaching historicist consequences, which will be approached from a different angle in the next chapter, were slumbering for more than twenty centuries, 'hidden and undeveloped', in Aristotle's essentialism. Aristotelianism was more fertile and promising than most of its many admirers know.

II

The chief danger to our philosophy, apart from

laziness and woolliness, is scholasticism,.. which

is treating what is vague as if it were precise..

F. P. RAMSEY.

We have reached a point from which we could without delay proceed to a analysis of the historicist philosophy of Hegel, or, at any rate, to the brief comments upon the developments between Aristotle and Hegel and upon the rise of Christianity that conclude, as section III, the present chapter. As a kind of digression, however, I shall next discuss a more technical problem, Aristotle's essentialist method of Definitions.

The problem of definitions and of the 'meaning of terms' does not directly bear upon historicism. But it has been an inexhaustible source of confusion and of that particular kind of verbiage which, when combined with historicism in Hegel's mind, had bred that poisonous intellectual disease of our own time which I call oracular philosophy. And it is the most important source of Aristotle's regrettably still prevailing intellectual influence, of all that verbal and empty scholasticism that haunts not only the Middle Ages, but our own contemporary philosophy ; for even a philosophy as recent as that of L. Wittgenstein suffers, as we shall see, from this influence. The development of thought since Aristotle could, I think, be summed up by saying that every discipline, as long as it used the Aristotelian method of definition, has remained arrested in a state of empty verbiage and barren scholasticism, and that the degree to which the various sciences have been able to make any progress depended on the degree to which they have been able to get rid of this essentialist method. (This is why so much of our 'social science' still belongs to the Middle Ages.) The discussion of this method will have to be a little abstract, owing to the fact that the problem has been so thoroughly muddled by Plato and Aristotle, whose influence has given rise to such deep-rooted prejudices that the prospect of dispelling them does not very bright. In spite of all that, it is perhaps not without interest to analyse the source of so much confusion and verbiage.

Aristotle followed Plato in distinguishing between knowledge and opinion . Knowledge, or science, according to Aristotle, may be of two kinds - either demonstrative or intuitive. Demonstrative knowledge is also a knowledge of 'causes'. It consists of statements that can be demonstrated - the conclusions - together with their syllogistic demonstrations (which exhibits the 'causes' in their 'middle terms'). Intuitive knowledge consists in grasping the 'indivisible form' or essence or essential nature of a thing (if it is 'immediate', i.e. if its 'cause' is identical with its essential nature) ; it is the originative source of all science since it grasps the original basic premises of all demonstrations.

Undoubtedly, Aristotle was right when he insisted that we must not attempt to prove or demonstrate all our knowledge. Every proof must proceed from premises ; the proof as such, that is to say, the deviation from the premises, can therefore never finally settle the truth of any conclusion, but only show that the conclusion must be true provided the premises are true. If we were to demand that the premises should be proved in their turn, the question of truth would only be shifted back by another step to a new set of premises, and so on, to infinity. It was in order to avoid such an infinite regress (as the logicians say) that Aristotle taught that we must assume that there are premises which are indubitably true, and which do not need any proof ; and these he called 'basic premises'. If we take for granted the methods by which we derive conclusions from these basic premises, then we could say that, according to Aristotle, the whole of scientific knowledge is contained in the basic premises, and that it would all be ours if only we could obtain an encyclopaedic list of the basic premises. But how to obtain these basic premises ? Like Plato, Aristotle believed that we obtain all knowledge ultimately by an intuitive grasp of the essences of things. 'We can know a thing only by knowing its essence', Aristotle writes , and 'to know a thing is to know its essence'. A 'basic premise' is, according to him, nothing but a statement describing the essence of a thing. But such a statement is just what he calls a definition. Thus all 'basic premises of proofs' are definitions.

What does a definition look like ? An example of a definition would be : 'A puppy is a young dog.' The subject of such a definition-sentence, the term 'puppy', is called the term to be defined (or defined term) ; the words 'young dog' are called the defining formula. As a rule, the defining formula is longer and more complicated than the defined term, and sometimes very much so. Aristotle considers the term to be defined as a name of the essence of a thing, and the defining formula as the description of that essence. And he insists that the defining formula must give an exhaustive description of the essence or the essential properties of the thing in question ; thus a statement like 'A puppy has four legs', although true, is not a satisfactory definition, since it does not exhaust what may be called the essence of puppiness, but holds true of a horse also ; and similarly the statement 'A puppy is brown', although it may be true of some, is not true of all puppies ; and it describes what is not an essential but merely an accidental property of the defined term.

But the most difficult question is how we can get hold of definitions or basic premises, and make sure that they are correct - that we have not erred, not grasped the wrong essence. Although Aristotle is not very clear on this point , there can be little doubt that, in the main, he again follows Plato. Plato taught that we can grasp the Ideas with the help of some kind of unerring intellectual intuition ; that is to say, we visualize or look at them with our 'mental eye', a process which he conceived as analogous to seeing, but dependent purely upon our intellect, and excluding any element that depends upon our senses. Aristotle's view is less radical and less inspired than Plato's, but in the end it amounts to the same . For although he teaches that we arrive at the definition only after we have made many observations, he admits that sense-experience does not in itself grasp the universal essence, and that it cannot, therefore, fully determine a definition. Eventually he simply postulates that we possess an intellectual intuition, a mental or intellectual faculty which enables us unerringly to grasp the essences of things, and to know them. And he further assumes that if we know an essence intuitively, we must be capable of describing it and therefore of defining it. (His arguments in the Posterior Analytic in favour of this theory are surprisingly weak. They consist merely in pointing out that our knowledge of the basic premises cannot be demonstrative, since this would lead to an infinite regress, and that the basic premises must be at least as true and as certain as the conclusions based upon them. 'It follows from this', he writes, 'that there cannot be demonstrative knowledge of the primary premises ; and since nothing but intellectual intuition can be more true than demonstrative knowledge, it follows that it must be intellectual intuition that grasps the basic premises.' In the De Anima, and in the theological part of the Metaphysics, we find more of an argument ; for here we have a theory of intellectual intuition - that it comes into contact with its object, the essence, and that it even becomes one with its object. 'Actual knowledge is identical with its object.')

Summing up this brief analysis, we can give, I believe, a fair description of the Aristotelian ideal of perfect and complete knowledge if we say that he saw the ultimate aim of all inquiry in the compilation of an encyclopaedia containing the intuitive definitions of all essences, that is to say, their names together with their defining formulae ; and that he considered the progress of knowledge as consisting in the gradual accumulation of such an encyclopaedia, in expanding it as well as in filling up the gaps in it and, of course, in the syllogistic deviation from it of 'the whole body of facts' which constitute demonstrative knowledge.

Now there can be little doubt that all these essentialist views stand in the strongest possible contrast to the methods of modern science. (I have the empirical sciences in mind, not perhaps pure mathematics.) First, although in science we do our best to find the truth, we are conscious of the fact that we can never be sure whether we have got it. We have learned in the past, from many disappointments, that we must not expect finality. And we have learned not to be disappointed any longer if our scientific theories are overthrown ; for we can, in most cases, determine with great confidence which of any two theories is the better one. We can therefore know that we are making progress ; and it is this knowledge that to most of us atones for the loss of the illusion of finality and certainty. In other words, we know that our scientific theories must always remain hypotheses, but that, in many important cases, we can find out whether or not a new hypothesis is superior to an old one. For if they are different, then they will lead to different predictions, which can often be tested experimentally ; and on the basis of such a crucial experiment, we can sometimes find out that the new theory leads to satisfactory results where the old one breaks down. Thus we can say that in our search for truth, we have replaced scientific certainty by scientific progress. And this view of scientific method is corroborated by the development of science. For science does not develop by a gradual encyclopaedic accumulation of essential information, as Aristotle thought, but by a much more revolutionary method ; it progresses by bold ideas, by the advancement of new and very strange theories (such as the theory that the earth is not flat, or that 'metrical space' is not flat), and by the overthrow of the old ones.

But this view of scientific method means that in science there is no 'knowledge', in the sense in which Plato and Aristotle understood the word, in the sense which implies finality ; in science, we never have sufficient reason for the belief that we have attained the truth. What we usually call 'scientific knowledge' is, as a rule, not knowledge in this sense, but rather information regarding the various competing hypotheses and the way in which they have stood up to various tests ; it is, using the language of Plato and Aristotle, information concerning the latest, and the best tested, scientific 'opinion'. This view means, furthermore, that we have no proofs in science (excepting, of course, pure mathematics and logic). In the empirical sciences, which alone can furnish us with information about the world we live in, proofs do not occur, if we mean by 'proof' an argument which establishes once and for ever the truth of a theory. (What may occur, however, are refutations of scientific theories.) on the other hand, pure mathematics and logic, which permit of proofs, give us no information about the world, but only develop the means of describing it. Thus we could say (as I have pointed out elsewhere ) : 'In so far as scientific statements refer to the world of experience, they must be refutable ; and, in so far as they are irrefutable, they do not refer to the world of experience.' But although proof does not play any part in the empirical sciences, argument still does ; indeed, its part is at least as important as that played by observation and experiment.

The role of definitions in science, especially, is also very different from what Aristotle had in mind. Aristotle taught that in a definition we have first pointed to the essence - perhaps by naming it - and that we then describe it with the help of the defining formula ; just as in an ordinary sentence like 'This puppy is brown', we first point to a certain thing by saying 'this puppy', and then describe it as 'brown'. And he taught that by thus describing the essence to which the term points which is to be defined, we determine or explain the meaning of the term also. Accordingly, the definition may at one time answer two very closely related questions. The one is 'What is it ?', for example, 'What is a puppy ?' ; it asks what the essence is which is denoted by the defined term. The other is 'What does it mean ?', for example, 'What does "puppy" mean ?' ; it asks for the meaning of a term (namely, of the term that denotes the essence). In the present context, it is not necessary to distinguish between these two questions ; rather, it is important to see what they have in common ; and I wish, especially, to draw attention to the fact that both questions are raised by the term that stands, in the definition, on the left side and answered by the defining formula which stands on the right side. This fact characterizes the essentialist view, from which the scientific method of definition radically differs.

While we may say that the essentialist interpretation reads a definition 'normally', that is to say, from the left to the right, we can say that a definition, as it is normally used in modern science, must be read back to front, or from the right to the left ; for it starts with the defining formula, and asks for a short label to it. Thus the scientific view of the definition 'A puppy is a young dog' would be that it is an answer to the question 'What shall we call a young dog ?' rather than an answer to the question 'What is a puppy ?'. (Questions like 'What is life ?' or 'What is gravity ?' do not play any role in science.) The scientific use of definitions, characterized by the approach 'from the right to the left', may be called its nominalist interpretation, as opposed to its Aristotelian or essentialist interpretation . In modern science, only nominalist definitions occur, that is to say, shorthand symbols or labels are introduced in order to cut a long story short. And we can at once see from this that definitions do not play any very important part in science. For shorthand symbols can always, of course, be replaced by the longer expressions, the defining formula, for which they stand. In some cases this would make our scientific language very cumbersome ; we should waste time and paper. But we should never lose the slightest piece of factual information. Our 'scientific knowledge', in the sense in which this term may be properly used, remains entirely unaffected if we eliminate all definitions ; the only effect is upon our language, which would lose, not precision , but merely brevity. (This must not be taken to mean that in science there cannot be an urgent practical need for introducing definitions, for brevity's sake.) There could hardly be a greater contrast than that between this view of the part played by definitions, and Aristotle's view. For Aristotle's essentialist definitions are the principles from which all our knowledge is derived ; they thus contain all our knowledge ; and they serve to substitute a long formula for a short one. As opposed to this, the scientific or nominalist definitions do not contain any knowledge whatever, not even any 'opinion' ; they do nothing but introduce new arbitrary shorthand labels ; they cut a long story short.

In practice, these labels are of the great usefulness. In order to see this, we only need to consider the extreme difficulties that would arise if a bacteriologist, whenever he spoke of a certain strain of bacteria, had to repeat its whole description (including the methods of dyeing, etc., by which it is distinguished from a number of similar species). And we may also understand, by a similar consideration, why it has so often been forgotten, even by scientists, that scientific definitions must be read 'from the right to the left', as explained above. For most people, when first studying a science, say bacteriology, must try to find out the meanings of all these new technical terms with which they are faced. In this way, they really learn the definition 'from the left to the right', substituting, as if it were an essentialist definition, a very long story for a very short one. But this is merely a psychological accident, and a teacher or writer of a textbook may indeed proceed quite differently ; that is to say, he may introduce a technical term only after the need for it has arisen .

So far I have tried to show that the scientific or nominalist use of definitions is entirely different from Aristotle's essentialist method of definitions. But it can also be shown that the essentialist view of definitions is simply untenable in itself. In order not to prolong this digression unduly , I shall criticize two only of the essentialist doctrines ; two doctrines which are of significance because some influential modern schools are still based upon them. one is the esoteric doctrine of intellectual intuition, and the other the very popular doctrine that 'we must define our terms', if we wish to be precise.

Aristotle held with Plato that we possess a faculty, intellectual intuition, by which we can visualize essences and find out which definition is the correct one, and many modern essentialists have repeated this doctrine. Other philosophers, following Kant, maintain that we do not possess anything of the sort. My opinion is that we can readily admit that we possess something which may be described as 'intellectual intuition' ; or more precisely, that certain of our intellectual experiences may be thus described. Everybody who 'understands' an idea, or a point of view, or an arithmetical method, for instance, multiplication, in the sense that he has 'got the feel of it', might be said to understand that thing intuitively ; and there are countless intellectual experiences of that kind. But I would insist, on the other hand, that these experiences, important as they may be for our scientific endeavours, can never serve to establish the truth of any idea or theory, however strongly somebody may feel, intuitively, that it must be true, or that it is 'self-evident' . Such intuitions cannot even serve as an argument, although they may encourage us to look for arguments. For somebody else may have just as strong an intuition that the same theory is false. The way of science is paved with discarded theories which were once declared self-evident ; Francis Bacon, for example, sneered at those who denied the self-evident truth that the sun and the stars rotated round the earth, which was obviously at rest. Intuition undoubtedly plays a great part in the life of a scientist, just as it does in the life of a poet. It leads him to his discoveries. But it may also lead him to his failures. And it always remains his private affair, as it were. Science does not ask how he has got his ideas, it is only interested in arguments that can be tested by everybody. The great mathematician, Gauss, described this situation very neatly once when he exclaimed : 'I have got my result ; but I do not know yet how to get it.' All this applies, of course, to Aristotle's doctrine of intellectual intuition of so-called essences , which was propagated by Hegel, and in our own time by E. Husserl and his numerous pupils ; and it indicates that the 'intellectual intuition of essences' or 'pure phenomenology', as Husserl calls it, is a method of neither science nor philosophy. (The much debated question whether it is a new invention, as the pure phenomenologists think, or perhaps a version of Cartesianism or Hegelianism, can be easily decided ; it is a version of Aristotelianism.)

The second doctrine to be criticized has even more important connections with modern views ; and it bears especially upon the problem of verbalism. Since Aristotle, it has become widely known that one cannot prove all statements, and that an attempt to do so would break down because it would lead only to an infinite regression of proofs. But neither he nor, apparently, a great many modern writers seem to realize that the analogous attempt to define the meaning of all our terms must, in the same way, lead to an infinite regression of definitions. The following passage from Crossman's Plato To-Day is characteristic of a view which by implication is held by many contemporary philosophers of repute, for example, by Wittgenstein : '.. if we do not know precisely the meanings of the words we use, we cannot discuss anything profitably. Most of the futile arguments on which we all waste time are largely due to the fact that we each have our own vague meanings for the words we use and assume that our opponents are using them in the same senses. If we defined our terms to start with, we could have far more profitable discussions. Again, we have only to read the daily papers to observe that propaganda (the modern counterpart of rhetoric) depends largely for its success on confusing the meaning of the terms. If politicians were compelled by law to define any term they wished to use, they would lose most of their popular appeal, their speeches would be shorter, and many of their disagreements would be found to be purely verbal.' This passage is very characteristic of one of the prejudices which we owe to Aristotle, of the prejudice that language can be made more precise by the use of definitions. Let us consider whether this really be done.

First, we can see clearly that if 'politicians' (or anybody else) 'were compelled by law to define any term they wished to use', their speeches would not be shorter, but infinitely long. For a definition cannot establish the meaning of a term any more than a logical derivation can establish the truth of a statement ; both can only shift this problem back. The derivation shifts the problem of truth back to the premises, the definition shifts the problem of meaning back to the defining terms (i.e., the terms that make up the defining formula). But these, for many reasons , are likely to be just as vague and confusing as the terms we started with ; and in any case, we should have to go on to define them in turn ; which leads to new terms which too must be defined. And so on, to infinity. one sees that the demand that all our terms should be defined is just as untenable as the demand that all our statements should be proved.

At first sight this criticism may seem unfair. It may be said that what people have in mind, if they demand definitions, is the elimination of the ambiguities so often connected with words such as 'democracy', 'liberty', 'duty', 'religion', etc. ; that it is clearly impossible to define all our terms, but possible to define some of these more dangerous terms and to leave it at that ; and that the defining terms have just to be accepted, i.e., that we must stop after a step or two in order to avoid an infinite regression. This defence, however, is untenable. Admittedly, the terms mentioned are much misused. But I deny that the attempt to define them can improve matters. It can only make matters worse. That by 'defining their terms' even once, and leaving the defining terms undefined, the politicians would not be able to make their speeches shorter, is clear ; for any essentialist definition, i.e. one that 'defines our terms' (as opposed to the nominalist one which introduces new technical terms), means the substitution of a long story for a short one, as we have seen. Besides, the attempt to define terms would only increase the vagueness and confusion. For since we cannot demand that all the defining terms should be defined in their turn, a clever politician or philosopher could easily satisfy the demand for definitions. If asked what he means by 'democracy', for example, he could say 'the rule of the general will' or 'the rule of the spirit of the people' ; and since he has now given a definition, and so satisfied the highest standards of precision, nobody will dare to criticize him any longer. And, indeed, how could he be criticized, since the demand that 'rule' or 'people' or 'will' or 'spirit' should be defined in their turn, puts us well on the way to an infinite regression so that everybody would hesitate to raise it ? But should it be raised in spite of all that, then it can be equally easily satisfied. on the other hand, a quarrel about the question whether the definition was correct, or true, can only lead to an empty controversy about words.

Thus the essentialist view of definition breaks down, even if it does not, with Aristotle, attempt to establish the 'principles' of our knowledge, but only makes the apparently more modest demand that we should 'define the meaning of our terms'.

But undoubtedly, the demand that we speak clearly and without ambiguity is very important, and must be satisfied. Can the nominalist view satisfy it ? And can nominalism escape the infinite regression ?

It can. For the nominalist position there is no difficulty which corresponds to the infinite regression. As we have seen, science does not use definitions in order to determine the meaning of its terms, but only in order to introduce handy shorthand labels. And it does not depend on definitions ; all definitions can be omitted without loss to the information imparted. It follows from this that in science, all the terms that are really needed must be undefined terms. How then do the sciences make sure of the meanings of their terms ? Various replies to this question have been suggested , but I do not think that any of them are satisfactory. The situation seems to be this. Aristotelianism and related philosophies have told us for such a long time how important it is to get a precise knowledge of the meaning of our terms that we are all inclined to believe it. And we continue to cling to this creed in spite of the unquestionable fact that philosophy, which for twenty centuries has worried about the meaning of its terms, is not only full of verbalism but also appallingly vague and ambiguous, while a science like physics which worries hardly at all about terms and their meaning, but about facts instead, has achieved great precision. This, surely, should be taken as indicating that, under Aristotelian influence, the importance of the meaning of terms has been grossly exaggerated. But I think that it indicates even more. For not only does this concentration on the problem of meaning fail to establish precision ; it is itself the main source of vagueness, ambiguity, and confusion.

In science, we take care that the statements we make should never depend upon the meaning of our terms. Even where the terms are defined, we never try to derive any information from the definition, or to base any argument upon it. This is why our terms make so little trouble. We do not overburden them. We try to attach to them as little weight as possible. We do not take their 'meaning' too seriously. We are always conscious that our terms are a little vague (since we have learned to use them only in practical applications) and we reach precision not by reducing their penumbra of vagueness, but rather by keeping well within it, by carefully phrasing our sentences in such a way that the possible shades of meaning of our terms do not matter. This is how we avoid quarrelling about words.

The view that the precision of science and of scientific language depends upon the precision of its terms is certainly very plausible, but it is none the less, I believe, a mere prejudice. The precision of language depends, rather, just upon the fact that it takes care not to burden its terms with the task of being precise. A term like 'sand-dune' or 'wind' is certainly very vague. (How many inches high must a little sand-hill be in order to be called 'sand-dune' ? How quickly must the air move in order to be called 'wind' ?) However, for many of the geologist's purposes, these terms are quite sufficiently precise ; and for other purposes, when a higher degree of differentiation is needed, he can always say 'dunes between 4 and 30 feet high' or 'wind of a velocity of between 20 and 40 miles an hour'. And the position in the more exact science is analogous. In physical measurements, for instance, we always take care to consider the range within which there may be an error ; and precision does not consist in trying to reduce this range to nothing, or in pretending that there is no such range, but rather in its explicit recognition.

Even where a term has made trouble, as for instance the term 'simultaneity' in physics, it was not because its meaning was unprecise or ambiguous, but rather because of some intuitive theory which induced us to burden the term with too much meaning, or with too 'precise' a meaning, rather than with too little. What Einstein found in his analysis of simultaneity was that, when speaking of simultaneous events, physicists made a false assumption which would have been unchallengeable were there signals of infinite velocity. The fault was not that they did not mean anything, or that their meaning was ambiguous, or the term was not precise enough ; what Einstein found was, rather, that the elimination of a theoretical assumption, unnoticed so far because of its intuitive self-evidence, was able to remove a difficulty which had arisen in science. Accordingly, he was not really concerned with a question of the meaning of a term, but rather with the truth of a theory. It is very unlikely that it would have led to much if someone had started, apart from a definite physical problem, to improve the concept of simultaneity by analysing its 'essential meaning', or even by analysing what physicists 'really mean' when they speak of simultaneity.

I think we can learn from this example that we should not attempt to cross our bridges before we come to them. And I also think that the preoccupation with questions concerning the meaning of terms, such as their vagueness or their ambiguity, can certainly not be justified by an appeal to Einstein's example. Such a preoccupation rests, rather, on the assumption that much depends upon the meaning of our terms, and that we operate with this meaning ; and therefore it must lead to verbalism and scholasticism. From this point of view, we may criticize a doctrine like that of Wittgenstein , who holds that while science investigates matters of fact, it is the business of philosophy to clarify the meaning of terms, thereby purging our language, and eliminating linguistic puzzles. It is characteristic of the views of this school that they do not lead to any chain of argument that could be rationally criticized ; the school therefore addresses its subtle analyses exclusively to the small esoteric circle of the initiated. This seems to suggest that any preoccupation with meaning tends to lead to that result which is so typical of Aristotelianism : scholasticism and mysticism.

Let us consider briefly how these two typical results of Aristotelianism have arisen. Aristotle insisted that demonstration or proof, and definition, are the two fundamental methods of obtaining knowledge. Considering the doctrine of proof first, it cannot be denied that it has led to countless attempts to prove more than can be proved ; medieval philosophy is full of this scholasticism and the same tendency can be observed, on the Continent, down to Kant. It was Kant's criticism of all attempts to prove the existence of God which led to the romantic reaction of Fichte, Schelling, and Hegel. The new tendency is to discard proofs, and with them, any kind of rational argument. With the romantics, a new kind of dogmatism becomes fashionable, in philosophy as well as in the social sciences. It confronts us with its dictum. And we can take it or leave it. This romantic period of an oracular philosophy, called by Schopenhauer the 'age of dishonesty', is described by him as follows : 'The character of honesty, that spirit of undertaking an inquiry together with the reader, which permeates the works of all previous philosophers, disappears here completely. Every page witnesses that these so-called philosophers do not attempt to teach, but to bewitch the reader.'

A similar result was produced by Aristotle's doctrine of definition. First it led to a good deal of hairsplitting. But later, philosophers began to feel that one cannot argue about definitions. In this way, essentialism not only encouraged verbalism, but it also led to the disillusionment with argument, that is, with reason. Scholasticism and mysticism and despair in reason, these are the unavoidable results of the essentialism of Plato and Aristotle. And Plato's open revolt against freedom becomes, with Aristotle, a secret revolt against reason.

As we know from Aristotle himself, essentialism and the theory of definition met with strong opposition when they were first proposed, especially from Socrates' old companion Antisthenes, whose criticism seems to have been most sensible . But this opposition was unfortunately defeated. The consequences of this defeat for the intellectual development of mankind can hardly be overrated. Some of them will be discussed in the next chapter. With this I conclude my digression, the criticism of the Platonic-Aristotelian theory of definition.

III

It will hardly be necessary again to stress the fact that my treatment of Aristotle is most sketchy - much more so than my treatment of Plato. The main purpose of what has been said about both of them is to show the role they have played in the rise of historicism and in the fight against the open society, and to show their influence on problems of our own time - on the rise of the oracular philosophy of Hegel, the father of modern historicism and totalitarianism. The developments between Aristotle and Hegel cannot be treated here at all. In order to do anything like justice to them, at least another volume would be needed. In the remaining few pages of this chapter I shall, however, attempt to indicate how this period might be interpreted in terms of the conflict between the open and the closed society.

The conflict between the Platonic-Aristotelian speculation and the spirit of the Great Generation, of Pericles, of Socrates, and of Democritus, can be traced throughout the ages. This spirit was preserved, more or less purely, in the movement of the Cynics who, like the early Christians, preached the brotherhood of man, which they connected with a monotheistic belief in the fatherhood of God. Alexander's empire as well as that of Augustus was influenced by these ideas which had first taken shape in the imperialist Athens of Pericles, and which had always been stimulated by the contact between West and East. It is very likely that these ideas, and perhaps the Cynic movement itself, influenced the rise of Christianity also.

In its beginning, Christianity, like the Cynic movement, was opposed to the highbrow Platonizing Idealism and intellectualism of the 'scribes', the learned men. ('Thou hast hid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prudent and hast revealed them unto the babes.') I do not doubt that it was, in part, a protest against what may be described as Jewish Platonism in the wider sense , the abstract worship of God and His Word. And it was certainly a protest against Jewish tribalism, against its rigid and empty tribal taboos, and against its tribal exclusiveness which expressed itself, for example, in the doctrine of the chosen people, i.e. in an interpretation of the deity as a tribal god. Such an emphasis upon tribal laws and tribal unity appears to be characteristic not so much of a primitive tribal society as of a desperate attempt to restore and arrest the old forms of tribal life ; and in the case of Jewry, it seems to have originated as a reaction to the impact of the Babylonian conquest on Jewish tribal life. But side by side with this movement towards greater rigidity we find another movement which apparently originated at the same time, and which produced humanitarian ideas that resembled the response of the Great Generation to the dissolution of Greek tribalism. This process, it appears, repeated itself when Jewish independence was ultimately destroyed by Rome. It led to a new and deeper schism between these two possible solutions, the return to the tribe, as represented by orthodox Jewry, and the humanitarianism of the new sect of Christians, which embraced barbarians (or gentiles) as well as slaves. We can see from the Acts how urgent these problems were, the social problem as well as the national problem. And we can see this from the development of Jewry as well ; for its conservative part reacted to the same challenge by another movement towards arresting and petrifying their tribal form of life, and by clinging to their 'laws' with a tenacity which would have won the approval of Plato. It can hardly be doubted that this development was, like that of Plato's ideas, inspired by a strong antagonism to the new creed of the open society ; in this case, of Christianity.

But the parallelism between the creed of the Great Generation, especially of Socrates, and that of early Christianity goes deeper. There is little doubt that the strength of the early Christians lay in their moral courage. It lay in the fact that they refused to accept Rome's claim 'that it was entitled to compel its subjects to act against their conscience' . The Christian martyrs who rejected the claims of might to set the standards of right suffered for the same cause for which Socrates had died.

It is clear that these matters changed very considerably when the Christian faith itself became powerful in the Roman empire. The question arises whether this official recognition of the Christian Church (and its later organization after the model of Julian the Apostate's Neo-Platonic Anti-Church ) was not an ingenious political move on the part of the ruling powers, designed to break the tremendous moral influence of an equalitarian religion - a religion which they had in vain attempted to combat by force as well as by accusations of atheism and impiety. In other words, the question arises whether (especially after Julian) Rome did not find it necessary to apply Pareto's advice, 'to take advantage of sentiments, not wasting one's energies in futile efforts to destroy them'. This question is hard to answer ; but it certainly cannot be dismissed by appealing (as Toynbee does ) to our 'historical sense that warns us against attributing', to the period of Constantine and his followers, '.. motives that are anachronistically cynical', that is to say, motives that are more in keeping with our own 'modern Western attitude to life'. For we have seen that such motives are openly and 'cynically', or more precisely, shamelessly, expressed as early as in the fifth century B.C., by Critias, the leader of the Thirty Tyrants ; and similar statements can be found frequently during the history of Greek philosophy . However this may be, it can be hardly doubted that with Justinian's persecution of non-Christians, heretics, and philosophers (A.D. 529), the dark ages began. The church followed in the wake of Platonic-Aristotelian totalitarianism, a development that culminated in the Inquisition. The theory of the Inquisition, more especially, can be described as purely Platonic. It is set out in the last three books of the Laws, where Plato shows that it is the duty of the shepherd rulers to protect their sheep at all costs by preserving the rigidity of the laws and especially of religious practice and theory, even if they have to kill the wolf, who may admittedly be an honest and honourable man whose diseased conscience unfortunately does not permit him to bow to the threats of the mighty.

It is one of the characteristic reactions to the strain of civilization in our own time that the allegedly 'Christian' authoritarianism of the Middle Ages has, in certain intellectualist circles, become one of the latest fashions of the day . This, no doubt, is due not only to the idealization of an indeed more 'organic' and 'integrated' past, but also to an understandable revulsion against modern agnosticism which has increased this strain beyond measure. Men believed God to rule the world. This belief limited their responsibility. The new belief that they had to rule it themselves created for many a well nigh intolerable burden of responsibility. All this has to be admitted. But I do not doubt that the Middle Ages were, even from the point of view of Christianity, not better ruled than our Western democracies. For we can read in the Gospels that the founder of Christianity was questioned by a certain 'doctor of the law' about a criterion by which to distinguish between a true and a false interpretation of His words. To this He replied by telling the parable of the priest and the Levite who both, seeing a wounded man in great distress, 'passed by on the other side', while the Samaritan bound up his wounds, and looked after his material needs. This parable, I think, should be remembered by those 'Christians' who long not only for a time when the Church suppressed freedom and conscience, but also for a time in which, under the eye and with the authority of the Church, untold oppression drove the people to despair. As a moving comment upon the suffering of the people in those days and, at the same time, upon the 'Christianity' of the now so fashionable romantic medievalism which wants to bring these days back, a passage may be quoted here from H. Zinsser's book, Rats, Lice, and History, in which he speaks about epidemics of dancing mania in the Middle Ages, known as 'St. John's dance', 'St. Vitus' dance', etc. (I do not wish to invoke Zinsser as an authority on the Middle Ages - there is no need to do so since the facts at issue are hardly controversial. But his comments have the rare and peculiar touch of the practical Samaritan - of a great and humane physician.) 'the strange seizures, though not unheard of in earlier times, became common during and immediately after the dreadful miseries of the Black Death. For the most part, the dancing manias present none of the characteristics which we associate with epidemic infectious diseases of the nervous system. They seem, rather, like mass hysterias, brought on by terror and despair, in populations oppressed, famished, and wretched to a degree almost unimaginable to-day. To the miseries of constant war, political and social disintegration, there was added the dreadful affliction of inescapable, mysterious, and deadly disease. Mankind stood helpless as though trapped in a world of terror and peril against which there was no defence. God and the devil were living conceptions to the men of those days who cowered under the afflictions which they believed imposed by supernatural forces. For those who broke down under the strain there was no road of escape except to the inward refuge of mental derangement which, under the circumstances of the times, took the direction of religious fanaticism.' Zinsser then goes on to draw some parallels between these events and certain reactions of our time in which, he says, 'economic and political hysterias are substituted for the religious ones of the earlier times' ; and after this, he sums up his characterization of the people who lived in those days of authoritarianism as 'a terror-stricken and wretched population, which had broken down under the stress of almost incredible hardship and danger'. It is necessary to ask which attitude is more Christian, one that longs to return to the 'unbroken harmony and unity' of the Middle Ages, or one that wishes to use reason in order to free mankind from pestilence and oppression ?

But some part at least of the authoritarian Church of the Middle Ages succeeded in branding such practical humanitarianism as 'worldly', as characteristic of 'Epicureanism', and of men who desire only to 'fill their bellies like the beasts'. The terms 'Epicureanism', 'materialism', and 'empiricism', that is to say, the philosophy of Democritus, one of the greatest of the Great Generation, became in this way the synonyms of wickedness, and the tribal Idealism of Plato and Aristotle was exalted as a kind of Christianity before Christ. Indeed, this is the source of the immense authority of Plato and Aristotle, even in our own day, that their philosophy was adopted by medieval authoritarianism. But it must not be forgotten that outside the totalitarian camp, their fame has outlived their practical influence upon our lives. And although the name of Democritus is seldom remembered, his science as well as his morals still live with us.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Vol II, Hegel and Marx", Karl R. Pop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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