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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우주, 1장 결정론의 종류

이윤진이카루스 2013. 7. 17. 21:33

 

1

 

결정론의 종류

 

나는 여기서 비결정론자가 된 이유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나는 이 이유들 가운데 자유 의지의 직감적 개념을 포함시키지 않겠다: 비결정론을 옹호하는 이성적 논증으로서 그것은 소용이 없다. 사람에게는, 사실상 자신이 제안의 영향을 받거나 강요를 받거나 혹은 약물에 취해 행동하고 있을 때, 의도적이고도 자신의 자유 결정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믿는 경향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 의지로 된 우리의 직감들에 대한 도움을 포함하지 않는 논증들을 통하여 우리가 결정론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는 데 성공하는 순간, 제한적으로 이 직감들의 유효성을 재정립하는 일이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이유인즉 방금 언급된 반대사례들이 그럴 경우에 특별한 경우들로서, - 환각의 경우들로서, 아마도, 그 경우들에 의하여 이 직감들은 일시적으로 신뢰성을 상실하게 된다 취급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들 중 어떤 문제도 여기서 토론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다음에서 할 예정인 것은 일반상식 논증들, 철학적 논증들, 그리고 특히 과학적 논증들을 비판하는 것인데, 그 논증들은 결정론을 지지하여 이용되었다.

나의 핵심적 문제는 내가 과학적결정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지하는 논증들의 유효성을 조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구조가 그러해서 모든 자연 법칙들과 함께 과거 사건들에 대하여 충분히 정확한 기술(記述)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원하는 정확의 정도와 함께 여하한 사건도 합리적으로 예측될 수 있다는 교설.

그 문제는 주로 양자 이론 주창자들이 흔히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상황을 제시하기 때문에 유의미하다. 고전 물리학은 내가 과학적결정론이라고 부른 것을 수반한다; 그리고 양자 이론만 우리가 고전 물리학을 배척하도록 강요하고 고전 물리학과 함께 과학적결정론을 배척하도록 강요한다. 이 관점에 반대하여 나에게는 심지어 고전 물리학의 유효성도 우리에게 세상에 관한 결정론적 교설을 부과하지는 않을 것임을 밝히려는 의도가 있다.

결정론을 비판하면서 나는 실제적으로 예외 없이 1927년까지 물리학자들이 간직했고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자신이 사망한 거의 1955년까지 간직했던 듯이 보이는 물리학 및 생물학의 견해에 관여할 것이다. 그 견해는 스피노자, 홉스, , 칸트, 쇼펜하우어, J. S. , 그리고 (적어도 1927년까지) M. 슐릭(Schlick)과 같은 철학자에 의하여 또한 지지를 받았다. 슐릭은, 다음의 흥미로운 인용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1930년의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 생각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모든 사건들이 보편적 법칙들에 종속된다는 이 전제가 통상적으로 보편적

인과법칙의 원리로서 기술되기 때문에 나는 [나의 주장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할 것이다: 모든 과학은 보편적 인과법칙의 원리를 전제한다... 모든

경험은, 적어도 그 신념이 실제적 생명체가, 다른 사람들 및 자연과의 모든

접촉에서, 지닌 모든 목적들에 그리고 또한 심지어 기술이 요구하는 최상의

정확도에 필수적인 한 이 전제가 충족된다는 신념을 지지한다. 그러나 가장

가벼운 예외 없이도 인과성의 원칙이 절대적으로 그리고 모든 곳에서

유효한지를 - 다시 말해서, 결정론은 올바른지 -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이렇다: 찬성론과 반대론의 (그 모든 것은 아무튼 사이비-

논증들일 터이다) 숫자를 저울질함으로써 단지 생각하고 짐작함을 통하여

결정론과 비결정론 사이의 문제를 결정함은 불가능하다는 것. 우리가 현대

물리학이 지금, 심지어 원자들 내부에서의 초미세(超微細) 사건들에 대해서도

인과성의 원칙이 유효한지 아닌지의 문제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는 실험적 및 논리적 재주의 압도적인 무기고를 특히 우리가

생각한다면, 그런 일은 터무니없는 인상을 낳게 되어 있다.

 

나는 이 글이, 여러 가지 면에서,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견해를 대표하기에 인용했다: 인과성의 원칙은 결정론의 논문과 동일하다는 것과,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인과성의 원칙은 적어도 모든 실용적인 목적들에 대하여 올바르다는 것: 아마도 절대적으로모든 사건들은 아니라할지라도 모든 사건들에 대하여, ‘도처에서 심지어 가장 사소한 예외도 없이’ - 양자이론에 의하여 제기된 의심. 또한 나에게는, 슐릭의 제안에 내재하는 도전을 수용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그 문제가 단지 경험적 논증을 이용해서만이지만 논증

될 수 있는 것은, 이 문제들에 대한 사변적 사고가 사이비-논증들을 이용할 수 있을 따름인 반면, ‘터무니없는 인상을 남기게 되어 있다. 경험적 논증들을 다소 향상시키는 것은 사변적 사고를 완전히 넘어서는 것이라고 정말로 나는 느낀다.

 

1. 결정론: 종교적, ‘과학적’, 그리고 형이상학적.

결정론에 대한 직감적 개념은, 세상이 영화와 같다고 말을 함으로써 요약될 것이다: 방금 투사되고 있는 그림이나 사진은 현재이다. 이미 상연된 영화의 저 부분들은 과거이다. 그리고 아직 상영되지 않은 부분들은 미래이다.

영화에서 미래는 과거와 공존한다; 그리고 미래는 과거와 정확하게 동일한 의미에서 고정되어 있다. 관중은 미래를 모를지라도, 모든 미래 사건은, 예외 없이, 정확이 과거처럼 원칙적으로 확실하게 아마도 알려질 것인데 이유인즉 미래는 과거가 존재하는 동일한 의미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미래는 영화 제작자에게 세상의 창조주에게 알려질 것이다.

결정론에 대한 개념은, 비결정론을 신뢰하는 위대한 종교들이 적어도 몇 가지 사건들은 미리 정해지지 않았다는 교설 있다할지라도, 종교적으로 시작되었다. (적어도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이래 기독교 신학은 대부분 비결정론의 교설을 가르쳤다; 탁월한 예외는 루터와 캘빈이다.) 종교적 결정론은 하느님의 전지전능에 미래를 결정하는 완벽한 권능 - 관한 개념과 연결되는데 그 결정론은 미래가 이제 하느님에게 알려져서 미리 알려질 수 있고 미리 고정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종교적 결정론 외에도, 내가 과학적이라고 지칭할 결정론에 관한 교설의 한 가지 형태가 있다.

역사적으로, 하느님이라는 개념을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갈음하고 하느님의 법칙이라는 개념을 자연법칙의 개념으로 갈음한 결과로서 우리는 과학적결정론이라는 개념을 간주할 수 있다.

자연, 혹은 아마도 자연의 법칙, 전지(全知)할 뿐만 아니라 전능하다. 자연의 법칙은 모든 것을 미리 고정시킨다. 대조적으로 하느님에 관해서는 그 하느님이 불가해하고 계시를 통하여만 알려질 텐데, 자연법칙들이 인간 경험의 도움을 받아서 인간이 지닌 이성에 의하여 발견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에 관한 법칙들은 안다면, 우리는 순전히 이성적인 방법들을 통하여 현재의 자료로부터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모든 형태의 결정론적 교설에서 특징적이다: 적어도 한 가지 (미래) 사건이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면, 결정론은 배척되어야 하고 비결정론이 참이다. 내가 과학적결정론이라고 지칭하는 것에 관하여, 적어도 세상에서 발생하는 한 가지 미래 사건이 자연법칙들로부터 유래하는 계산을 통하여 그리고 세상의 현재나 과거 상태에 관한 자료들에서 유래하는 계산을 통하여 예언될 수 없다면, ‘과학적결정론은 배척되어야 할 터임을 이것은 의미한다.

그리하여 과학적결정론의 근간을 이루는 근본적 개념은, 우리가 자연법칙들 알기만 하고 세상의 현재 및 과거 상태를 알기만 한다면, 세계의 구조가 모든 미래 사건들을 원칙적으로 미리 이성적으로 계산될 수 있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건이 예언될 수 있다면, 그 사건은 바라는 만큼 정확한 정도로 틀림없이 예언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심지어 측정에서 가장 세부적인 차이점도 다양한 사건들을 구분한다고 주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적결정론이라는 개념이, 역사적으로 말해서, 일종의 종교적 결정론을 자연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 용어들로서 해석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 개념을 다른 관점에 불 수 있다. 우리는, 예를 들어, 그 개념을 세상에 관한 일반상식 관점에 대한 다소 정교한 비판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제시할 수 있는데 그 관점에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사건들을 두 가지 형태로 분리할 수 있다: 계절들의 변화와 같은 예언 가능한 사건들이나 태양과 붙박이별들의 주행성 및 연간 운동이나 시계의 작동; 그리고 날씨의 변덕이나 구름의 행태와 같은 예언이 불가능한 사건들.

이제 시계와 구름 사이의 차이점에 관한 이 일반상식 관점은, 이 두 가지 사건들의 형태가 실제로 다른지 혹은 단지 우리가 지닌 지식의 불만족스러운 상태로 인하여 그 사건들이 다르게 보이는지의 다소 정교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비판될 것이다; 우리가 시계에 관하여 아는 것만큼 구름에 관하여 안다는 조건으로만 구름의 행태가 시계의 행태만큼 예언될 수 있을지.

이 문제는, 혹은 더 정확하게, 이 추측은 과학적 지식의 진보로 인하여 행성들이나 방랑별들예전에는 변덕의 악명 높은 상징들이었던 - 움직임을 붙박이별들 자체의 행동들만큼 정확하게 예측될 수 있게 되자마자 신념으로 변했다. 현대에서 과학적결정론을 거의 보편적으로 수용하게 된 것은 이 성공, 케플러와 뉴튼의 천체물리학의 성공이었다.

과학적결정론을 신뢰하는 힘은, 칸트가 도덕적 이유 때문에 결정론을 배척했다가 과학에 의하여 확립된 부인할 수 없는 것으로서 결정론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는 사실에 의하여 판단될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가 만족스럽게 해결할 수 없었던 자신의 철학에서 이율배반이 생겨났다. 그러나 내가 밝히려고 노력할 바와 같이 뉴튼의 역학은 과학적결정론을 수반하지 않는다. 내가 여기서 옳다면, 칸트는 뉴튼의 역학을 수용함으로써 자신이 과학적결정론을 수용하게 되었다고 믿는 데서 오류를 저질렀다; 그리고 그가 해결하지 못했던 이율배반은 나타나지 않을 따름이다.

과학적결정론에 대한 비판적 토론이 우리의 주 업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및 과학적결정론 외에도 세 번째 결정론적 교설의 해석이 또한, 비록 간략하게나마, 토론되어야 할 것이다. 그 해석은 형이상학적 결정론(metaphysical determinism)로서 기술될 것이다.

결정론의 형이상학적 교설은 단지 이 세상 속의 모든 사건들이 변화가 불가능하거나 미리 정해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 교설은 그 사건들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 있거나 과학적 수단을 통하여 예언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교설은 미래가 과거만큼 거의 변경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은 과거가 변경될 수 없다고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다. 형이상학적 결정론에 따라서 미래가 변경될 수 없다고는 것은 정확하게 동일한 의미이다.

형이상학적 결정론은 분명히 시험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세상이 부단히 우리를 놀래게 만들어서 미리 결정되었거나 심지어 어떤 규칙성의 징표를 보여주지 않았다할지라도, 미래는 아마도 여전히 미리 결정되어 있을 것이고 심지어 운명의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미리 알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비결정론 또한 시험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심지어 세상에 완벽하게 규칙적이고 결정론적인 현상이 있다할지라도, 여하한 종류의 결정되지 않은 사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시험가능성이나 경험적 내용의 결여가 논리적 취약성을 (물론 무의미는 아니다) 지적한다: 교설은 논리적으로 너무 취약해서 실험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일한 이유 때문에 그 교설은 다른 교설에 포함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형이상학적 결정론은, 자체의 취약성 때문에, 종교적 결정론 및 과학적결정론 모두에 포함된다; 그리고 형이상학적 결정론은 다양한 결정론적 이론들에 공통적인 것만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기술될 것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적 결정론은 단지 자체가 지닌 취약성 때문에 반증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형이상학적 논증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논증들이 불가능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적 논증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논증들은 과학적결정론을 지지하는 논증들이다. ‘과학적결정론들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논증들이 무너진다면, 형이상학적 결정론을 지지하는 것은 남지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먼저 과학적 결정론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논증들은 검토할 것이다. 나의 토론의 끝쯤에서만 (26), 나는 형이상학적 결정론의 수용에 반대하는 조금 더 직접적인 논증들을 개진할 것이다.

이어지는 절들에서 과학적결정론을 지지하는 일반상식 논증들과 철학적 논증들이 먼저 검토될 것이다; 그런 다음에만 나는 고전적 물리학에 근거한 논증들로 방향을 선회할 것이다.

 

2. -질문들, 인과성과 과학적결정론.

앞 절에서 나는 예언 가능한 사건들과 예언 불가능한 사건들 사이의 혹은 시계와 구름 사이의 일반상식이거나 표면적인(prima facie) 구분을 제안했고, ‘과학적결정론은 이 구분에 대한 정교한 비판으로부터 출현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일반상식이 결정론이라는 개념에 접근하는 또 다른 방법은 인과성이라는 유행성 개념을 통해서이다. 결정론을 지지하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그럴 듯한 논증은 이렇다: 우리는 모든 사건에 대하여 왜 그 사건이 발생하는가라고 항상 물을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그런 왜-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원칙적으로 우리는 계몽하는 답변을 항상 얻을 수 있다. 그리하여 모든 사건은 인과적으로 발생한다(caused)’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사건은 미리 그 사건의 원인인 사건들에 의하여 틀림없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우리는, 그러나 이러한 고찰로 인하여 우리가 과학적결정론이라는 개념으로 줄곧 도달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도, 이 고찰들의 진실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일반상식 논증들이 끝나고 세련됨이 시작되는 곳을 집어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먼저 몇 가지 전형적인 왜-질문들과, 일반상식 수준에서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그 질문들에 대한 몇 가지 전형적인 답변들을 고찰하자.

왜 벌은 꿀을 저장할까?’ 답변: ‘겨울 동안에 벌은 음식으로 꿀이 필요하니까.’ (이것은 전혀 이론적 서술이 아니다.) ‘왜 오늘 월식이 일어날까?’ 답변: ‘지구가 오늘 태양과 달 사이에 서 있어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비치기 때문이다.’ (이것도 여전이 우리가 월식을 예언할 수 있을 이론으로부터의 서술이 아니다.) ‘그는 왜 죽었는가?’ 답변: ‘그가 지난주에 장례식에 갔을 때 거의 반시간 동안 빗속에 서있었다. 그래서 그는 감기에 걸렸고 그 감기가 폐렴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일흔 셋의 나이였다.’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일흔-넷에도 폐렴을 이겨냈다.)

우리는 이 모든 답변들이 완벽하게 수용될 수 있다고, 그리고 그 답변들이 정확하게 요구된 종류의 정보를 제공한다고 상정할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왜-질문들을 불만족스럽게 반복하는 아이들도 더 나은설명이 그들로 하여금 문제의 종류의 사건들을 예언하도록 할 설명의 의미에서 주어지기를 통상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그 아이들이 주어지기를 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심층적 원인들에 주어진 원인들에 일시적으로 선행하거나 주어진 원인들에 심층적으로 동기가 되는 원인들 대한 서술일 따름이다: 아이들은 자신들은 질문들을 반복하지 않는데 이유인즉 그들이 조건들의 더 완벽한 조합을 원하지만 그들이 사건들에 대한 연속적인 인과적 연쇄가 주어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항상 왜-질문들을 할 수 있고 우리가 항상 그 질문들에 대하여 관련성 답변들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리하여, 본질적으로 과학적이든 다른 것이든 결정론과 크게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가서 우리의 왜-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이 다시 말해서 제공된 설명들 관련성 보편적인 법칙들이 주어진다면, 설명될 사실들이 논리적으로 추론될 수 있는 초기 조건들로 (원인들) 정말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요구할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인과설이라는 유행성 이론으로 한 걸음 떨어져서 보다 정교한 이론을 향한다. 이 요구를 수용하고, 추가로, ‘보편적 인과성의 법칙을 전제하여 모든 사건은 원칙적으로 우리의 요구라는 의미에서 인과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하자; 다시 말해서, 항상 원인들(초기 조건들), 우리로 하여금 문제의 사건을 추론하도록 할 보편적 법칙들이 있다고 우리는 전제한다. 이것은 강력한 전제이다. 그러나 그 전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결정론에 전적으로 해당하지는 않으며, 이것에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

먼저 (인과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사건이라는 일반상식 개념은 주로 질적(qualitative)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바라는 정도의 정확성으로 사건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과학적결정론의 요구는 분명히 보편적 인과성이라는 일반상식 개념을 초월한다. 존의 열이 나는 상태를 인과적으로 설명하라는 요구는 일반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체온이 102103이기보다는 102.4102.5 사이에 있는 이유에 관한 질문이나 상응하는 정도의 정확성으로 수행되는 예측을 요구하는 것은 일반상식을 초월한다.

두 번째로, 원인이라는 일반상식 개념은 동일하게 질적이다. 원인들은 다시 말해서 초기 조건들 절대적으로 정확하게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깨달음; 그리하여 우리는 어느 정도 정확하지 않은 초기 조건들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사실은 이 사실이 지닌 고유한 문제들을 제기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은 인과성이라는 일반상식이나 직감적 개념을 초월한다.

세 번째로, 앞선 두 가지 문제들로부터 출현하는 다음 문제가 있다: ‘과학적결정론은, 우리에게 충분히 정확한 초기 조건들이 주어진다면, 바라는 정도의 정확성으로 모든 사건을 예언할 능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여기서 충분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에게 충분히 정확하지 않았던 초기 조건들이 주어졌다고 호소할 우리가 우리의 예측들에서 실패할 때마다 권리를 박탈하는 그런 방식으로 분명히 우리는 충분히를 설명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이론은 예언의 부정확성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예언에 대하여 요구할 정확의 정도가 주어진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요구된 정확의 정도의 예측을 우리에게 충분히 줄 초기 조건들에서 정확도를 계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요구를 책임가능성의 원칙(principle of accountability)’라고 부른다. 그 요구는 과학적결정론의 정의(定義)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세 가지 요점들은 그리고 특히 세 번째 요점 분명히 인과성의 유행성이나 일반상식 개념을 정말로 초월하기 때문에, 인과성의 유행성 직감적 개념은 심지어 보편적인 인과성 원칙의 강력한 형태로 동시에 과학적결정론이라는 교설이 무효인 반면, 그 개념에 관한 한 유효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고 지적함으로써 우리가 결정론을 지지하여 유효하게 논증할 수 있다고 믿었던 많은 유명한 철학자들이 저지를 실수를 경계해야 한다.

 

3. 책임가능성의 원칙.

계산의 결과는, 통상적으로, 계산 자료들의 가장 정확하지 않은 것보다 더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예측은, 따라서, 통상적으로 그 예측이 근거한 주어진 초기 조건들 중 어떤 조건보다 더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원하는 만큼 우리는 예측들을 정확하게 만드는 것이 항상 가능할 것을 우리가 요구한다면, 이 요구는 통상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만큼 관련된 초기 조건들의 정확성을 우리가 증가시킬 수 없다면, 충족될 수 없을 것이다.: 초기 조건들은 예측 업무가 정해놓은 문제의 해결책에 대하여 충분히 정확해야 할 것이다.

과학적결정론을 정의(定義)하려는 목적으로, 우리에게 충분히 정확한초기 조건들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여하히 명시된 정확도로 예측들을 얻을 수 있다는 요건은, 분명히, 너무 모호하다. 그런 요건은 우리의 정의(定義)를 하찮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항상 성공적인 예측들을 도출하는 데 실패한다할지라도, 우리는 항상 그 요건이 충족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의 초기 조건들이 충분히 정확하지않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는 항상 우리의 실패를 설명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상황을 고치기 위하여, 우리가 우리의 예측들의 결과를 시험하기 전에, 초기 조건들이 충분히 정확한지를 우리는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측 업무로부터 (다른 것들 중에서 예측에 필요한 정확도를 서술해야 하는) 이론과 결합하여 우리가 이 특정 예측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초기 조건들이나 자료들이 얼마나 정확해야 하는지를 미리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보다 완벽하게 표현하여, 우리의 초기 조건들이 충분히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함으로써 그리고 목전의 특정 예측 업무에 대하여 우리의 초기 조건들이 얼마나 정확해야 할지를 서술함으로써 바람직한 정확도로써 사건을 예측하지 못한 이유를 미리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과학적결정론에 대한 어떤 만족스러운 정의(定義), 우리가 우리의 예측 업무로부터 (물론 우리의 이론들과 결합하여) 초기 조건들에 필요한 정확도를 계산할 수 있다는 원칙에 (다시 말해서 책임가능성의 원칙) 근거해야 할 것이다.

다른 예측 업무들이 책임을 지지 못할 반면, 어떤 예측 업무들은 책임을 진다’ - 다시 말해서 그 예측 업무들은 책임가능성의 원칙을 만족시킨다. 우리는 이론 내부의 예측 업무들이, 통상적으로, 책임을 질 때 그 이론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고 또한 말할 것이다.

어떤 목적들을 위해서, 초기 조건들의 정확성보다는 초기 조건들이 계산될 수 있는 가능한 측정들의 결과들의 정확도를 언급함으로써 도달된 다소 더 강력한 책임가능성의 원칙을 사용하여 작업을 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더 강력한 의미에서, 우리가 우리의 예측들을 근거시킬 가능한 측정들의 필요한 정확도를 우리가 예측 업무로부터 (그리고 이론)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예측 업무는 책임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되는 바, 예측 업무를 해결하기 위하여 초기 조건들이 제공되어야 할 정확도를 우리가 계산하는 것을 허용하는 더 약한 의미에서 동일한 예측 업무는 책임을 질 수 있을 것이다.

책임가능성에 대한 이 더 강력한 개념은 분명히 두 가지 개념들 중에서 보다 현실적이다’: 약한 의미에서 책임질 수 있지만 강한 의미에서 책임질 수 없는 이론은 그 결정론적 특징이 원칙적으로 우리에 의하여 시험될 수 없는 이론일 것이다: 그 이론은 과학적결정론을 지지하는 데 이용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적결정론은 더 강력한 의미에서 책임가능성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에서 두 가지 의미 사이의 차이점을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다면, 나는 항상 더 약한 의미에서의 책임가능성을 염두에 둘 것이다. 이유인즉 이론이 더 약한 의미에서 (‘책임진다) 책임질 수 없다면 그 이론은 더 강력한 의미에서도 분명힌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책임진다는 단어의 더 약한 의미에서 책임불가능성은 책임진다는 단어의 더 강력한 의미에서 책임불가능성을 수반한다 (혹은 논리적으로 더 강력하다).

과학적결정론은 책임가능성의 원칙을 수반하기 때문에, 명확하게 책임질 수 없는 예측 문제의 사례는, 우리 자신의 세계에 적용될 수 있고, 즉각 과학적결정론이라는 교설을 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심할 나위없는 이런 종류의 사례를 만들 수 없다할지라도, 책임가능성의 원칙이 보편적으로 충족된다는 것을 믿을 이유가 우리에게 없다면 과학적결정론을 신뢰할 이유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은 틀림없이 분명하다.

다음 절들에서 나는, 적어도 두 가지 분야에서, 책임가능성의 원칙이 저 분야들에서 충족된다고 믿을 어떤 이유도 우리에게 없다는 이유로만 결정론 붕괴를 지지하는 유명한 철학적 논증들뿐만 아니라 몇 가지 확신적인 일반상식 논증들을 밝히려고 노력할 것이다.

우리의 토론은 다음을 확립할 것이다. 우리가 특정 분야에 대하여 점점 더 많이 지속적으로 배울 일이 가능하다; 우리가 점점 더 많을 사건들을 예측하는 것; 그리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우리 예측들의 정확도를 증가시킬 것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닌 예측성 능력들의 지속적인 성장은, ‘과학적결정론이 그 분야에서 유효하다는 믿음에 대한 유효한 근거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의 예측들은 부단히 향상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책임가능성의 원칙이 충족된다고 심지어 의미하지 않는 방법들에 의하여 수행될 것이다.

나중에 (17절에서) 고전물리학의 책임가능성 문제가 제기될 것이고, 고전물리학이 보다 약한 의미에서 책임이 있다고 믿을 어떤 근거도 없고 동시에 고전물리학이 더 강력한 의미에서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믿을 충분한 근거들이 있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4. 행동 연구와 책임가능성의 원칙.

이제 결정론을 지지하는 단순하지만 매우 강력한 논증을 검토하자.

비결정론자들은 때때로 사람들이, 그리고 아마도 작은 정도로 고등동물들이 행성계들이나 기계적 시계들과 매우 다르게 행동한다고, 그리고 결정론은 (역학 분야에서 유효하다할지라도) 그리하여 생물학적 분야에서 유효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관점들에 반대하여 어떤 결정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가 자주 동물들의 행동을, 그리고 또한 인간의 행동을 매우 성공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은 부인될 수 없다. 게다가 우리가 인간이나 동물에 대하여 점점 더 많이 배움에 따라서 이 예측들은 점점 더 나아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예측들은 인간이나 동물의 행태를 체계적으로 연구함으로써 한층 더 향상될 것이다. 행동에 관하여 점점 더 많이 배우는 이 과정이 끝장나야 하는 이유는 없다. 그리하여 유기체들에 대한 우리 연구의 결과는 행성계에 대한 우리 연구의 결과와 동일한 것으로 기대될 것이다. 고등유기체들은 시계 범주에 속한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이것을 표현할 수 있다. (그 유기체들이 기계적 시계와 같음을, 혹은 어떤 전자적 자기-규제성 기계장치와 더 같음을 우리가 발견할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구름이 또한 이 범주에 속하는지 혹은 속하지 않는지는 이 시점에서 결정되지 않을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논증은 지칭될 바와 같이, ‘행동 연구로부터의 논증’ - 훌륭한 일반상식이고, 내가 생각하기에,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나 그 논증은 자체의 목표를 성취하지 못한다; 내가 기꺼이 할 바와 같이, 동물과 인간의 행동을 점점 더 자세히 연구함으로써 그 행동에 대한 우리의 예측들의 가능한 향상에 한계가 없다고 우리는 심지어 시인할지라도 그 논증은 자체의 목표를 성취하지 못한다. 결정론을 지지하려는 시도로서, 행동연구로부터 나온 논증은 무효일 따름이다.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책임가능성의 원칙을 언급할 필요만 있다. 과학적결정론은 증가된 지식을 이용하여 우리가 우리의 예측들을 향상시킬 것이라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그 결정론은, 우리의 명시된 예측 업무로부터, 예측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우리의 초기 정보에 관한 정확도를 우리가 계산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한다.

이제 행동 연구로부터 나온 논증은 우리의 지식 향상이 이 원칙을 충족시키는 데서 우리를 도울 것임을 암시하는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는다. 나의 고양이가 다음에 무엇을 할지 예측하는 데 내가 우연히도 상당히 성공적이다: 그 고양이가 나의 책상 위로 뛰어올라 와서 편지지 위에 앉을지, 혹은 고양이가 문턱에 뛰어올라 그곳에서 정원으로 갈지; 그리고 나는 고양이의 행태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지속적으로 배우고 있다. 그러나 내가 배우고 있는 행태는, 주로, (a) 중요한 (혹은 목표-지향적인’) 행동들이나 혹은 (b) 습관의 속임수들이거나 혹은 일들을 처리하는 방식들로 구성된다. 후자(後者)를 연구하는 것은 어느 정도 상세하게 전자(前者)의 도식을 채워 넣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가 나의 편지지 위에 자리를 잡을 것이라고 내가 예측할 때, 내가 예측할 수 없는 많은 세부사항들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몇 인치 차이로 쉽게 틀릴 것이다.

내가 상황을 배우는 데는 어떻게 이 세부사항들이 그림에 추가될지를 암시하는 것이 없다. 물론 관련된 초기 상황들에 대한 더 나은 지식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 몇 인치 차이를 줄일 것이라고 우리는 항상 말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초기 조건들이 이 인치들을 줄이는 예측 업무에 관련될 것인지를 우리는 모를 따름이다. 책임가능성의 원칙을 충족시키는 행동이론이 우리에게 없을 따름이다: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그런 이론을 어디에서 찾을지에 대한 개념조차도 없다.

신경계에 대한, 특히 두뇌에 대한 정확한 연구가 우리의 예측들에서 격차들을 막는 데 많은 일을 할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이것은 전적으로 사실일 것이고, 논증을 목적으로도 나는 여기서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수용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행동연구로부터 논증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동물들의 행동을 연구함으로부터 점점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일반상식 논증을 전혀 다른 논증으로 갈음한다: 생리학이나 물리학이 결정론적 체계들이라는 논증으로.

 

5. 비판적 온도와 양단간의 원칙(All-or-Nothing Principle).

사실 우리는 이 문제들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어서 우리가 지닌 두뇌생리학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나의 고양이의 정확한 위치와 관련된 예측 업무와 같은 예측 업무에 어떻게 적용할지에 관하여 우리에게 최소한의 개념도 없다.

그러나 두뇌생리학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어떻게 적용할지 우리가 정말로 안다고 전제하자. 더욱 특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 근육의 수축을 우리가 예측하도록 할 초기 조건들이라고 전제하자; 그리고 마지막 사례로 특정 신경절(ganglion)(신경절의 무리) ‘불탈(fire)’ 것일지 아닌지를 우리가 예측하도록 할 초기 조건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전제하자.

이제 불타는 신경의 과정은 많은 면에서 폭발과 유사하다: 특정 전기적 잠재력이 (종판[終板: end-plate] 잠재력) 어떤 결정적인 높이에 도달했을 때 신경은 별안간 불탄다. 이 높이에 도달하지 않으면 신경은 전혀 불타지 않는다. (이것은 신경전달의 양단간의 원칙으로서 알려졌다.) 유사한 방식으로 화학적 폭발은, 특정 결정적 온도에 도달할 때,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서는 아무 것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책임가능성의 원칙이 폭발의 결정적 온도에 적용될 수 있는지는 크게 의심스럽다; 그리고 정확하게 유사한 이유들로 인하여, 그 원칙이 신경전달에 적용될 수 있는지도 크게 의심스럽다. 물론 온도가 결정적인 온도 아래에 있으면서 서서히 올라가지만 꾸준히 올라간다면 우리는 폭발 시간을 안전하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책임가능성은 우리가 폭발시간을 우리가 원하는 것만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주장을 수반한다. 그리고 이 주장은, 반대로, 또 다른 주장을 포함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만큼 정확하게 우리가 온도를 측정할 수 있고, 온도의 증가 속도를 측정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온도는 질량효과(質量効果: mass-effect)이다; 온도는 질량적 혹은 육안으로 보이는 양이다. 온도는 본질적으로 평균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양은 원칙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만큼 정확하게 측정될 수 없다. 주어진 신경이 발화하는 잠재력에 대한 정확한 가치가 또한 어떤 다른 질량효과에 의존한다고 믿을 충분한 근거가 있다. 예를 들어 그 가치는 피로효과(fatigue-effect)(아마도 반대로 특정 종류의 분자들의 충분한 집중[concentration]다시 말해서, 충분히 큰 숫자 존재나 부재에 근거하는) 의존한다. 우리가 형이상학적 결정론의 진실성을 전제한다할지라도 우리의 현재 이론들 안에는 우리가 예측 업무의 세부사항으로부터 초기 조건들의 필수적인 정확성을 일반적으로 계산할 수 있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은 없다.

이 고찰들을 요약하면, 우리는 두뇌가 (두뇌가 기본적인 양자 과정들을 확충하든 아니든) 매우 개연적으로 온도들이나 특정 화학물질들의 집중에 고도로 민감하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근육운동들이 질량효과들이고 그 운동들이 신경자극의 폭발들[volleys]’과 같은 다른 질량효과들에 부분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놀랄 일이 전혀 아니다.) 그러나 책임가능성의 원칙이 이 질량효과들에게 적용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에게 허용할 어떤 실마리나 징표도 우리에게 없다; 혹은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성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는지를 말하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멀리 우리가 일반상식 행동으로부터의 논증으로부터 움직였는지를 알고, 게다가 정말로 행동에 관하여 점점 더 많이 배우는 것에 대한 우리의 평범한 학습 경험에서 어떤 것도 책임가능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지식, 그리고 그 지식과 함께 예측하는 힘이 특정 분야에서 꾸준히 증가할지라도 이 사실은 본질적으로 과학적결정론과 같은 것이 이 분야에 대하여 유효하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논증으로서 이용될 수 없다고 우리는 매우 일반적으로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식은 책임가능성의 원칙을 충족하는 바로 저 특별한 종류의 지식에 접근하지 않고도 꾸준히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6. 시계와 구름.

내가 질량효과들을 언급해야 했기 때문에 이것은 아마도 위 1절에서 언급된 시계와 구름으로부터 나온 결정론적 논증을 비판할 훌륭한 장소이다. 나는 예측 가능한 사건들과 (행성들이나 시계의 움직임)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 (날씨나 구름의 움직임) 사이의 일반상식 구분이 유효하지 않다는, 그리고 우리가 시계에 관하여 지닌 만큼 구름에 관한 구름의 상세한 초기 조건들뿐만 아니라 구름의 법칙들에 관한 많은 지식을 우리가 얻을 때 이 구분이 사라질 것이라는 논증을 시사하고 있다.

행성들의 사례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 논증에 관하여 중요한 것이 언급될 수 있다. 구름에 관하여 향상된 상세한 지식은 정말로 행성들을 시계의 사건들로 흡수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 흡수는, 질량효과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완벽하게 성공적이 될 수 없다.

게다가 우리는 또한 문제를 반대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시계의 작동을 점점 더 자세하게 예측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예를 들어 시계 속의 열()의 흐름을 (가령 추의 길이가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조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상세한 이 연구는, 구름에 관한 문제들과 동일한 예측 문제들을 제시하는 종류의 움직임들에 종속되어, 시계를 분자들의 구름에 흡수시키는 결과를 분명히 낳을 터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지식의 증가와 비례하여 구름의 범주가 점점 더 시계의 범주에 가깝게 근접할 것이라는 확신적인 논증은 그 반대 상황 또한 유효하다는 것을 지점함으로써 반박될 수 있다.

정확하게 같은 두 개의 시계는 동일한 시간을 표시할 것이고, 지속적으로 그러할 것이라고 언급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흥미를 끌지 못하는데 이유인즉 우리는 정확하게 같은 두 개의 시계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장에서 연속적으로 생산되어 정확하게 닮아 보이는 두 개의 벽시계나 손목시계는 일반적으로 계속해서 동일한 시각을 표시하는 않을 것이다 (이 문장의 원문은 Moreover, two clocks or watches serially produced in a factory and looking otherwise perfectly alike will not, in general, continue to show the same time인데 otherwise가 불필요하게 들어간 듯하다. 역자). 이것이 그 시계들이 조절장치의 도움을 받아서 시각이 조정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유이다. 조정이 된 후에, 그 시계들은 똑같은 시각을 상당히 잘 지킬 것이다; 그러나 그 시계들은 일반적으로 더 이상 같은 모습을 띠지 않을 것이다: 기계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조절장치 분명히 이제 관찰될 수 있는 차이점을 드러낼 것이다. 이 차이점은 또 다른 면에서 시간 지키기 - 두 개의 시계가 더욱 같도록 만들기 위하여 도입되어야 했다. 이것은 표면적인 유사성이 고도록 기만적일 것임을 보여준다.

시계가 늦게 가면, 훌륭한 시계제작자는 원인을 아마도 작동에 끼어있는 먼지 한 점 발견할 것이다. 이 사례는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그 사례가

보편적 인과성의 법칙과 일치할지라도 책임가능성의 원칙을 분명히 충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시계제작자도 먼지 한 점을 검사함으로부터 그 먼지 한 점이 하루에 5분보다 3분 늦게 시계가 가는 원인일 것이라고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는, 이 특정 먼지의 점이 제거되자마자, 시계는 더 이상 조정되지 않고도 시각을 지킬 것이라고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7. 심리학으로부터 나온 결정론을 위한 논증들.

행동이나 심리학으로부터 나온 논증들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유효하지 않다. 이유는 가령 행동의 초기 조건들을 측정하는 데 난관이 있어서라기보다는 행동에 관한 우리들의 예측의 정확성이 행동의 초기 조건들을 측정 정확성을 개선함으로써 무한히 향상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동으로부터 유래하는 논증은 더 오래된 논증인 심리학으로부터 유래한 논증의 해석본일 따름이다.

어떤 위대한 철학자들은 자유 의지라는 개념을 반박하기 위하여 이 논증들 이용하여 그리하여 간접적으로 결정론 지지했다. 이 논증은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예부흥 이래 그 논증은 아마도 홉스(Hobbes), 스피노자, (Hume), 그리고 프리스틀리(Priestley)에 의하여 매우 명확하게 서술되었다. 홉스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의지는 또한 자체가 제거하지 않는 다른 것들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생긴다’; 그래서 자발적인 행동들 모두가 필연적 원인들을 지닌다는 것이 귀결된다’.

흄은 동기들과 자발적인 행동들 사이의 연결은 자연의 어떤 부분에서와 같이 규칙적이고 일관적이다라고 자신이 서술하여 표현하는 바와 같이, ‘동기들로부터 자발적 행동들의 추론이라는 개념들 도입한다. 게다가 그는 인격에서 행위로라는 추론 개념을 도입했다.

두 가지 개념 모두는 칸트에 의하여 수용되었고 칸트는 완벽한 심리학적 정보로 인하여 우리가 달이나 태양 일식에 대하여 계산하는 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어떤 인간의 미래 행동도 미리 그리고 확실하게 계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서술은 과학적결정론에 대한 그의 강력한 믿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 서술이 동기들과 행동들 사이의 규칙적인 결합을 근거로 흄이 염두에 두었던 것과 같은 심리학적 관찰들에 의하여 조금이라도 지지를 받는가이다.

이제 나는 심리학적 원인들의 소망들, 희망들, 동기들, 그리고 의도들의 존재를 부인하고 싶지 않다; 혹은 상황이 특정 행동을 요구한다는 느낌의 존재. 반대로, 적어도 만족스러운 심리학적 설명과 같은 것이 주어질 것인 (혹은 아마도 상황논리를 통한 설명) 반면, 나는 생리학적이거나 물리학적 인과성 설명들이 실패하기 마련인 많은 중요한 경우들이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특정 학습과정에 걷기, 말하기, 쓰기, 스키타기, 피아노 연주하기 학습과정에 아마도 특징적인 신경회로의 생성과 같은, 포함된 생리적 변화들이 있다고 믿을만한 충분한 근거들이 있다; 또한 우리가 배운 것을 연습하면서 걷기 혹은 말하기에서 특징적인 생리적 반응들이 발생한다고 믿을 만한 훌륭한 근거들이 있다. 그러나 스키를 타는 사람이 움직임들의 새로운 순서를 발명하거나, 작가가 단어들의 새로운 순서를 발명하거나, 작곡가가 화음의 새로운 순서를 발명한다면 생리학적 과정들은 움직임들이나 단어들이나 화음들의 동일한 순서들이 다른 것들로부터 (무의식적으로) 대체된 생리학적 과정들과 다른 것이라는 견해를 지지하는 것은 없다. 물론 새로운 것의 발명은 흔히 어떤 생리학적 상관성을 지닐 흥분감과 결합된다; 그러나 다른 경우들에서, 혁신가는 자신의 혁신을 전적으로 의식하지 못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과 자신이 창조한 것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업적이 새로움의 특징을 지닌다는 것은 해석과 평가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 어떤 사람은 진부한 인용구의 사용을 예상 밖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창조적이고 기발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그 진부한 인용구를 적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적절함, 반어법, 그리고 독창성은 한 사람의 발설을 특징짓고 생리학적 용어들로서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어서는 안 되는 특질들의 사례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다양한 종류의 합당한 심리학적 설명들이 있을 것이다: 가정 분위기의 영향; 무의식적 표준들을 세우게 만들었을 사례들과 접촉들; 독서, 글쓰기, 그리고 다른 교육적 영향들이 그런 것들을 설명하는 데 이용될 것이다. 새로운 수학적 증거의 발명이 여기에 속하고 새로운 논증들의 발명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아마도 심지어 논증을 이해하려는 시도도 여기에 속한다.

그리하여 생리학자가 수학자의 두뇌를 자신이 연구하여, 수학자가 막 발명하려는 새로운 증거의 단계들을 예측할 수 있음을 믿을 이유는 없고 믿지 않을 이유는 많다. 그러나 증거가 우리 앞에 놓이자마자, 그 증거의 단계들 중 몇 가지 단계들에 대한 어떤 심리학적 설명을 우리는 아마도 발견할 것이다: 한 가지 심리학적 설명은 아마도 동일한 수학자에 의한 초기 증명을 닮았을 것이다; 또 다른 심리학적 설명은 아마도 그 수학자의 스승에 의하여 발명된 방법의 기발한 적용일 것이다. 보다 예리한 분석은 심지어, 이 특별한 상황에서, 그가 자신의 옛 스승을 생각하여 자신이 스승으로부터 받았을 종류의 충고를 생각하도록 만든 원인들 중 몇 가지를 드러낼 것이다.

이 모든 경우들에서, 우리의 인과성 설명은,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성공적인 예측들에 의하여 시험될 수 있는 심리학적 가설들에 통해서일 것이다. 그리하여 오일러(Euler)가 중간 정도로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여,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아마도 성공적으로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는 모차르트가, 미사곡이나 오페라를 작곡하라는 위임을 수용했다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그리고 모차르트의 능력과 성실함 모두를 고려하면, 모차르트는 사실상 위대한 작품을 만들 것이어서 계기에 맞추어 조각을 붙인 것뿐만은 아닐 것이라고. 우리가 더 멀리 나아가서 예측들이 근거할 심지어 새로운 발명품들에 속하는 예측들 시험이 가능하면서도 잘-시험된 심리학적 가설들을 설명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없다.

이 심리학적 원인들에 대한 고찰은 자유 의지의 원칙을 직감적으로 설명하는 데서 근본적인 난제들 드러낸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우리는, 관련된 사람의 배경, 소망, 공포, 그리고 태도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결정들이 논증들에 의하여 혹은 그의 음악적 또는 문학적 취향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방식에 관해서도 우리가 많은 것을 안다면, 만족스러운 정도로 우리가 그것을 인과적으로 설명수 없을 것이라면 의미에서, 우리는 결정이나 행동이나 새로운 발명품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자유 의지의 원칙에 이런 의미에서 원인이 없는 결정들을 주장할 의도가 있다면, 홉스와 스피노자와 흄과 그들의 후계자들에 의하여 그 원칙의 비판은 건전하고 인정될 것이다.

그러나 이 고찰들 중 어떤 고찰도 과학적결정론과 같은 것을 지지하는 논증으로서 이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과학적결정론은 원인들의 존재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 결정론은 (칸트로부터 내가 인용한 글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이 원인들로 인하여 우리가 바람직한 정확도로써 사건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 결정론은 책임가능성의, 다시 말해서, 예측 업무로부터, 예측 문제가 해결되기 위하여, ‘원인들다시 말해서 초기 조건들 알려져야 하는 정확도를 계산하는 가능성의 원칙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원칙이 학습의, 혹은 동기의 심리학 분야에서 충족될 수 있다고 믿을 어떤 이유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원칙이 행동이나 생리학의 분야에서도 충족될 수 있다는 믿을 어떤 이유도 없다. 반대로 그 원칙이 심리학적 분야에서 충족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칸트의 제안은 분명히 오해에 근거한다. 그 제안은, 우리가 어떤 분야에서 원인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무한하게 향상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또한 이 분야에서 우리가 원하는 만큼 정확하게 우리의 예측들을 만들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일반적으로 사실도 아니고 심지어 합당하지도 않다.

심리학적 방법들을 통하여 인간의 행동을 바람직한 정확도로써 예측한다는 개념은 정말로 모든 심리학적 사고에 완벽하게 맞지 않아서 그 개념이 수반할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어렵다. 예를 들어 그 개념은 사람이 위층에서 자기가 승진했다는 것을 아니면 자기가 해고당했다는 것을 - 자기에게 알려주는 편지를 발견하기를 기대한다면 얼마나 빨리 그 사람이 위층으로 걸어 올라갈 지를 바람직한 정확도로써 예측하는 것을 수반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물리적 초기 조건들과 (층계의 높이, 구두와 층계의 마찰) 생리학적 초기 조건들을 (사람의 일반적인 조건의, 그의 심장의, 그의 폐의, 기타 등등의 상태) 예를 들어 경제적 초기 조건들 (사람의 저축, 그의 대안적 고용 기회들, 그가 부양하는 사람들의 수) 및 심리학적 초기 조건들과 (그의 자신감이나 고민, 기타 등등) 결합시키는 것을 포함할 것이다. 이것들이, 알려졌다 할지라도, 어떻게 평가될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어떻게 이것들이 평가되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심리학적 조건들이, 더욱 특히, 물리적 힘들이 비교되어서 결합되어야 할 물리적 힘들의 방식으로 취급될 정도로 이용될 수 있을지.

심리분석가는, 여러 해 동안 연구하여 (지난 10년여 동안의 많은 분석들), 자신의 환자의 무의식 속에 묻힌 모든 종류의 원인들동기들과 기타 등등 파헤칠 것이다. 그 분석가가, 매우 많은 경우들에서, 자신의 환자의 행동을 성공적으로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제하자. 그렇다할지라도, 자기 환자의 동기들에 관한 자신의 모든 지식을 사용하여 심리분석가는 가지각색의 심리학적 조건들 하에서 층계를 걸어 올라가는 데 자신의 환자에게 걸릴 정확한 시간을 예측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심리분석가는 자신에게 충분한 자료들이 주어진다면 자신이 심지어 이 예측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아마도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떤 자료들이 이 목적에 충분할 것인지 서술할 수도 동시에 책임질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심리분석가로 하여금 저 자료들에게 요구되는 정확도를 계산하도록 허용할 이론의 흔적도 심지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혹은 고양이의) 심리학적 지식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가 자살도 하지 않을 것이고 도둑질을 저지르지도 않을 것이라고 (혹은 고양이가 물지도 않고 할퀴지도 않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결정론을 확립하기 위하여, 훨씬 더 많은 것이 필요할 터이다.

우리가 과학적결정론에 의하여 그리고 특히 책임가능성의 원칙에 의하여 - 암시되는 바를 깨닫자마자 우리는 심리학적 지식이 행동적 지식이 심리학적 지식에 의하여 보충되어야 할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으로부터 유래한 논증을 토론할 때 우리가 알았던 바와 같이) 생리학적 지식에 의하여 또한 보충되어야 할 것임을 우리는 안다. 이것은 물론 심리학에서 유래한 논증이 붕괴됨을 의미한다.

두말할 필요 없이, 심리학에서 유래한 논증은 처음부터 행동에서 유래한 논증보다 훨씬 취약했다. 우리는 동기들의 강도를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본 바와 같이 행동주의자 때문이라기보다는 조금만 숙고해도 밝혀지듯이, ‘동기인격과 같은 개념의 이용이 법칙-같은 연결들을 발견하려는 혹은 우리가 그 연결들을 발견할 수 없을 때 심지어 그 연결들을 창조하려는 다소 어설픈 시도 이상이 아니다. 나는 그의 행동 동기는 무엇이었던가?’같은 질문이나 왜 그는 그 일을 했는가?’와 같은 왜-질문이 완벽하게 합당할 것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질투심에서 (혹은 야망 때문에, 혹은 복수를 위하여) 그 일을 했다와 같은 답변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모든 답변들은, 고도로 정교하다할지라도, 분류하려는 조악한 시도들 이상이 아니다; 혹은 기껏해야 행동을 이성적으로 이해 가능하도록 만드는 가설적 상황 도식을 구축하려는 조악한 시도들. 그 답변들은 도처에서 이 다음에 이해하려는 시도들이다; 이것은 심지어 우리가 예측들을 사용하여 그 도식을 대면함으로써 아마도 시험될 도식을 이용하여 우리가 작동하는 드믄 경우들에도 그러하다.

 

8. 세상에 대한 결정론적 그림.

행동에서 유래하는 논증들도 또한 심리학에서 유래하는 논증들도 경험에 근거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분야들에서 많은 정확한 예측들을 했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을 터이다. 오히려 내가 보기에 그 정확한 예측들은 물리적 세상은 결정론적이라는 사전 신념들에서 흘러나온다. 결정론적인 물리적 세상에는 분명히 비결정론적 행동에 대한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행동은 물리적 세상의 내부 사건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결정되지 않은 의식의 상태들에 대한 여지는 있을 것을 보인다. 그러나 그런 의식의 상태들이 존재한다는 전제는 매우 불만족스러울 터이어서 정말로 불필요할 것이다. 그런 의식의 상태들은 행동과 어떤 종류의 인과적 연결도 지닐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의식의 상태들에 관하여 알 수 없거나, 아무튼, 우리는 그런 의식의 상태들에 관하여 틀림없이 이야기할 수 없다. 이유인즉 우리가 그럴 수 있다면, 결정되지 않은 사건들은 소리의 물리적 세상에 어떤 인과적 영향을 미칠 터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세상은 결정론적이라는 교설과 모순이 될 전제.

이런 방식으로, 물리적 세상에 대한 결정론적 견해는 우리에게 행동의 세상에 대한 그리고 심리학의 세상에 대한 결정론적 견해를 강요한다; 그리고 정말로 홉스와 그의 후계자들의 물리적 세상에 대한 견해는 결정론적이었다. 이것은 물론 그들이 주장하는 심리학에서 유래하는 논증이 (혹은 흄과 슐릭[Schlick])에 의하여 제시된 행동으로부터 유래한 논증) 이 신념의 결과였음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 논증이 그 결과였음을 암시한다.

물리적 세계가 결정론적이라는 홉스의 신념이 뉴튼의 이론에 선행했다는 것을 주목하는 일은 흥미롭다. 그리하여 뉴튼의 탁월한 성공은 결정론적 교설의 매우 인상적인 입증으로서 쉽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뉴튼은 옛 결정론적 프로그램을 실제로 바꾸었던 듯하다.

이것은, 우리가 예를 들어 칸트에게서 발견하는 결정론적 진리에 대한 강력한 의존을 설명한다.

행동으로부터 그리고 심리학으로부터 유래한 논증들이 물리적 세계에 대한 결정론적 관점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의미는 이 논증들을 제시했던 사람들 누구도 책임가능성의 문제를 고찰하는 일을 멈춘 적이 없는 이유를 또한 설

명할 것이다 (이 문장의 원문은 The suggestion that the arguments from behaviour and from psychology result from a deterministic view of the physical world would also explain why none of those who proposed these arguments ever stopped to consider the problem of accountability인데 의미상 stopped considering의 뜻이므로 어법에 맞추어 stopped considering으로 써야 한다. 역자). 이유인즉 물리적 세계에 대한 홉스의 시계장치 그림에는 책임가능성이 직감적으로 명백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뉴튼의 그림에서도 그렇다 (적어도 우리가 복수-몸체 문제[the many-body problem]의 세부사항들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물리적 세계가 결정론적이라면, 그리고 책임가능성이 물리학 분야에서 충족된다면, 행동이나 심리학 분야에서 책임가능성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우리의 토론이, 전통적인 철학적 논증들뿐만 아니라 결정론을 지지하는 인기가 있거나 일반상식 논증들이 무효함으로 보여준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우리의 토론은 고전 물리학으로부터 가장 강력한 논증들이 나타날 것을 우리가 기대할 수 있음을 또한 암시한다. 나는 비결정론이 겉으로 보기에 수용될 수 있는 것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이유와 증거의 부담이 결정론자에게 매달려야 하는 이유 몇 가지를 일반적인 방식으로 설명할 예정이다.

 

9. 증거의 부담(The Burden of Proof).

적어도 임시적으로 비결정론을 수용하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증거의 부담이 결정론자의 어깨에 내려앉는다는 것이다. 나에게 알려진 결정론을 찬성하는 유일하게 타당하여 강력한 논증들은 과학적결정론을 지지하는 논증들이다; 그리고 과학적결정론을 지지하는 일반상식 논증들이, 책임가능성의 문제에 직면할 때, 모두 붕괴하는 사실을 고려하면 모든 것을 감안하여 일반상식은 비결정론을 지지하는 듯이 보인다.

증거의 부담이 내가 보기에 결정론자에게 매달린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 나는 네 가지 이유만 언급할 것이다.

먼저 정교하지 못한 일반상식은 시계와 동시에 구름이, 다시 말해서 보다 예측될 수 있고 덜 예측될 수 있는 사건들이 있다는 견해를 선호한다; 사전 결정과 예측가능성은 정도의 문제들이라는 견해.

두 번째로 유기체들은 적어도 몇 가지 더 단순한 체계들보다 덜 사전 결정적이고 예측 가능하다는, 그리고 고등 생명체들은 하등 생명체들보다 덜 사전 결정적이고 예측 가능하다는 견해에 관하여 겉으로 보기에 그럴 듯한 경우가 있다.

비버는 (혹은 사람) 자신이 사는 물리적 환경에서 두드러지고 분명한 변화를 일으킨다. 물론 물리적 환경도 비버에게서 (혹은 사람에게서) 두드러지고 분명한 변화를 일으켜 응답한다. 그러나 결정론의 진실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훨씬 더 많은 것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비버가 항상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고 전제하여 결정론자는 물리적 환경이 (비버의 존재를 제외한)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비버를 탄생시킬 수 있음을 밝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버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물리적 환경에 관하여 우리가 많이 알고 있다할지라도 우리는 비버를 낳을 물리적 환경에 관해서는 아는 게 틀림없이 없다. 여기에 우리 지식 속의 불균형이 있고, 우리 지식에서의 격차가 메워질 수 있음을 증명하는 부담이 결정론자에게 달려있다; 지금까지 결정론자는 기껏해야 프로그램만 지녔다.

세 번째이자 내가 생각하기에 매우 중요한 이유는 자유 의지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결정론이 참이라면, 음악에 대하여 아는 게 없는 물리학자나 생리학자가 모차르트의 두뇌를 연구함으로써 모차르트가 펜으로 종이 위에 쓸 장소들을 예측하는 일이 원칙적으로 가능해야 한다. 이것을 뛰어넘어 물리학자나 생리학자는 모차르트의 행동을 미리 알아채서 심지어 모차르트의 교향곡이 모차르트에 의하여 의식적으로 상상되기 전에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작곡할 수 있어야 한다. 유사한 결과들이 수학적 발견들과 우리의 지식에 대한 모든 다른 추가사항들에 유효할 것이다. 칸트와 같은 사람이 이 결과들을 지지하는 데 묵시적으로 열성적이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 그들은 직감적으로 동일하게 터무니없다. 터무니없든 아니든, 그들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을 초월한다; 그리하여 다시 증거의 부담은 결정론자에게 달려있다.

네 번째로 비결정론은 사전에 결정되지 않았고 예측 불가능한 적어도 한 가지 사건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데, 모든 사건들이 원칙적으로 예측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과학적결정론보다 분명이 더 취약한 주장이다. 과학 안에서 내가 취약한 이론들보다 강력한 이론들을 선호할지라도, 강력한 이론들이 더 잘 논증될 수 있기에, 다시 말해서 비판될 수 있기에 나는 그렇게 선호한다. 아무튼 더 강력한 이론을 제시하는 사람이 증거의 부담을 수용한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지지하는 주로 자신의 이론이 지닌 설명력을 보임으로써 - 논증들을 생산해야 한다. 그러나 결정론은, 내가 과학적이라고 지칭하는 그 결론의 판본도, 과학에 속하지 않아서 설명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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