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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우주 3장 비결정론의 경우

이윤진이카루스 2013. 8. 16.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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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결정론의 경우

 

10. 내가 비결정론자인 이유: 그물로서의 이론들.

나는 개인적으로 비결정론의 교설이 참이라고, 그리고 결정론은 전적으로 근거가 없다고 믿는다.

나의 믿음에 대한 근거들 가운데서 두드러진 것은 모차르트의 G단조 교향곡과 같은 새로운 작품의 창조가, 모차르트의 몸과 특히 모차르트의 두뇌 모차르트의 물리적 환경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나 생리학자에 의하여 완전히 상세하게 예측될 수 없다는 직감적 논증(7절에서 언급된)이다. 반대의견은 직감적으로 터무니없어 보인다; 아무튼, 반대의견을 선호하는 합당한 논증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과, 현재 그 반대의견을 지지하는 의사(擬似)-종교적 편견 즉, 과학의 전지(全知), 단지 원칙적으로라면, 하느님의 전지(全知)에 어떤 방법으로든 근접한다는 편견을 제외하고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나는 이 요점이, 아무튼 내가 토론할 예정인 자유의지라는 전통적인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여기서 나의 흥미를 끄는 문제는, 오히려, 모차르트에 관하여 우리가 든 사례에서 출현하는 문제 세상이 그러해서 우리가 원칙적으로, 우리가 충분히 안다는 조건으로만, 과학의 합리적인 방법들을 통하여 새로운 교향곡의 작곡과 같은 심지어 독특한 사건들을 매우 자세하게 예측할 수 있는지 이다. 이것은 이 분야에서 나의 흥미를 끄는 유일한 문제이다. 나는 자유로운(free)’라는 말과 의지(will)’이라는 말의 의미의 분석을 통하여, 그리고 모차르트나 혹은 누군가가 자신이 했던 것과 다르게 할 수 있었을 지의 문제를 통하여 피곤해졌을 따름이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완벽하게 분명히 해야 한다. 나는 사실의 세계에 흥미를 느낀다; 그리고 슐릭(Schlick)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아 이 분야에 의미 분석을 도입했던) 이래 심지어 흄(Hume)도 단어들이 지닌 의미의 분석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 폭넓게 수용되었을지라도, 이것은 내가 보기에 오해다. 흄 또한 세상의 구조에 관심을 지녔으며, 그리고 그가 그 오해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 곳에서만 언어적 오해들을 치워버렸다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의 흥미를 끌고, 내가 알기에 철저하게 믿을 수 없는 것은 독특한 업적들이 주장하는 과학적 예측가능성이다. 그 과학적 예측가능성은 증거의 부담이 결정론자에게 떨어지는 저 질문들 중 하나인데 그 질문들 몇 가지는 9절에 열거되었다.

그러나 결정론자에게, 내가 보기에 설익고 훌륭한 논증들이 제시된 적이 없는 흔히 반복되는 주장들에 대하여 논증들을 제공하는 책임을 지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결정론에 대항하는 강력한 철학적 논증들이 또한 있는데 부분적으로 논리적인 동시에 부분적으로 형이상학적이다; 여러 해 전에 나에게 과학적결정론의 취약점을 확신시켰던 논증들.

나는 우리의 과학 이론들을 인간의 발명품들로 세상을 잡도록 우리에 의하여 고안된 그물들 본다. 확실히, 이것들은 시인들의 작품들과, 그리고 심지어 기술자들을 발명품들과 다르다. 이론들은 도구들은 아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은 진리이다: 우리는 진리가 아닌 것을 제거하려는 희망을 지니고 우리의 이론들을 시험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이론들을 심지어 도구들로서 발전시키는 데 성공할 것이다: 우리의 물고기인 실제 세상을 잡는데 점점 더 잘 적응된 그물들을 만드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론들은 이런 목적에 대한 완벽한 도구는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이론들은 우리 자신이 만든 이성적인 그물들이어서 모든 면에서 실제 세상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으로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우리의 이론들이 매우 성공적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우리의 이론들이 실제에 대하여 탁월한 근사치를 낳은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렇게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이론들은 우리 자신의 작품이라는 것을 우리가 염두에 분명하게 둔다면; 우리가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이론들은 우리의 오류가능성을 반영한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 이론들의 단순성이나 그 이론들의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인 특징과 같은 우리 이론들이 지닌 일반적인 특징들이 실제 세상의 특징들과 일치하는지 우리는 의심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우리가 모든 개에는 꼬리가 있다과 같은 서술을 시험했고 그 서술이 우리의 시험을 견디어냈다면 아마도 모든 개는 (혹은 고양이는) 꼬리를 지고 있거나, 혹은 적어도 거의 모든 개가 그렇다. 그러나 그런 보편화된 주어-술어 문장이 세상을 기술하는 데 상당히 성공적으로 밝혀졌다는 사실로부터, 혹은 심지어 그 문장이 참이라는 사실로부터 세상은 주어-술어 구조를 지니고 있다거나 세상의 특정 속성들을 지닌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결론을 내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유사하게 단칭서술들이나 수학적 서술들이나 혹은 영어 서술들이 성공하거나 심지어 참이라고 해서 우리는 세상이 내재적으로 단순하거나 수학적이거나 영국적이라는 추론을 도출하려는 유혹을 느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추론들은 사실상 이런저런 철학자들에 의하여 도출되었다; 그러나 숙고해보면 그 추론들을 추천할 게 없다. 세상은, 우리가 그 세상을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고도로 복잡하다; 그리고 그 세상이 이런저런 의미에서 단순한 구조적인 모습을 띨지라도, 우리가 지닌 이론들 중 몇 가지 이론들의 단순성은 우리가 자신이 만든 것 세상의 내재적인 단순성을 수반하지 않는다.

결정론에 관한 상황은 유사하다. 뉴튼의 이론은, 관성의 법칙, 기타 등등으로 구성되는데 참이거나 매우 근사하게 참일 것인데, 다시 말해서 세상은 그 이론이 주장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 안에는 결정론의 서술이 없다; 그 이론은 어디에서도 세상이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이라고 지칭했던 저 특징을 지닌 것은 그 이론 자체이다.

이제 이론의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인 특징은 그 이론이 지닌 단순성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인 이론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시험될 수 있어서 시험들이 점점 더 정확하고 엄격하게 만들어 질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론들이 다른 이론들보다 선호되어야 한다는 것은 내용, 시험가능성, 그리고 단순성에 관한 나의 고찰로부터 귀결된다; 그것이 우리가 다른 이론들에 우선해서 그 이론들을 구축하여, 우리 앞에서 문제가 관련되는 모든 곳에서 그 이론들을 고수하려고 (그 이론들이 시험들을 견디어낸다면) 노력하는 이유이다. 동시에 그 이론들이 성공하면 세상에는 내재적으로 결정론적 특징이 있다고 추론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듯이, 세상은 내재적으로 단순하다고 추론하는 것도 정당화될 수 없다.

과학의 방법은 단순한 이론들로써 세상을 기술하는 우리의 노력에 달려있다: 복잡한 이론들은, 우연히 사실일지라도, 시험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과학은 체계적인 과도한-단순화(over-simplification)의 기술로서 우리가 유리하게 생략할 것을 알아채는 기술 기술될 것이다.

이 결과와 책임가능성의 문제 사이의 연관성을 아는 게 중요하다. 행성들의 최종적 위치와 최종적 가속도의 규정된 정확도로써, 3개월 이후의 우리 태양계의 상태에 대한 계산과 같은 예측업무를 고려하라. 책임가능성의 의미에서 우리가 초기상태의 허용 가능한 부정확도를 계산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에게는 뉴튼의 역학뿐만 아니라 우리 태양계의 모형 또한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는 행성들의, 그 행성들의 질량과 위치와 속도의 목록이 필요하다; , 우리에게는 오늘의 태양계의 상태에 관한 근사치적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기술을 제시하면서 우리는 변함없이 우리의 이론을 이용해야 한다.

먼저, 태양계의 상태에 속하는 것과 (위치, 질량, 속도) 그 상태에 속하지 않는 것을 (예를 들어, 행성들의 지름; 행성들의 온도; 행성들의 열용량; 그리고 행성들의 화학적 및 자기적[磁氣的: magnetic] 속성들) 결정하는 것은 이론이다.

두 번째, 이론은 우리에게 어떤 규모의 행성들이 무시될 것인지 (예를 들어, 운석들) 알려준다. 다시 말해서 모든 예측업무를 마치 그 업무가 세상에 대하여 상상될 수 있는 모든 상태, 혹은 세상의 사건을 의미하는 양 생각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순진하다: 모든 예측업무, 그리고 특히 상상컨대 책임을 질 수 있을 모든 예측업무는 단순화하는 모형을 이용하여 작동한다. 모든 예측 무는 단순화하는 이론에 비추어 세상을 본 결과이다; 그리고 이 탐조등을 통하여 비춰지지 않는 모든 것은 어둠으로 남는다: 그것은 무시된다.

우리의 이론들이 지닌 보편성은 유사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우리에게는 세상이 독특하다고 믿을 많은 근거가 있다: 상호작용하는 과정들이 독특하고 고도로 복잡한 아마도 심지어 무한히 복잡한 사건들의 결합.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편적 이론들의 도움을 받아서 이 독특한 세상을 기술하려고 노력한다. 이 이론들은 세상의 보편적인 특징들인 규칙성들을 기술하는가? 혹은 보편성은, 단순성처럼, 단지 우리의 이론들이 지닌 아마도 우리의 이론적 언어가 지닌 특징이고 세상의 특징은 아닌가?

내가 믿기에 여기서 경우는 단순성의 경우와 다소 다르다. 우리가 모든 개에게는 꼬리가 있다라고 말하면, 우리는 사실상 모든 개들에 관하여 어떤 것을 주장한다; 우리가 꼬리 없는 개의 종류를 발견한다면 (꼬리 없는 고양이인 맹크스[Manx cats] 종과 유사한) 우리는 그 서술을 철회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보편성은 우리가 주장하는 어떤 것이고 우리가 시험하기로 한 어떤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단순성은 우리의 이론들에 의하여 주장되지 않는다; 그리고 단순성이 우리의 이론들에 의하여 주장된다면 우리는 단순성을 시험하는 방법을 아마도 알지 못할 것이다.

동시에 보편성의 수준뿐만 아니라 근사치의 수준의 사다리 위로 우리는 이끄는 것은 세상을 설명하는, 즉 훨씬 더 보편적인 이론들을 통하여 세상을 설명하는 우리의 시도일 따름이다. 더 높은 보편성의 도움을 받아서 이론들을 설명하여 갈음하는 이론들은 흔히, 새로운 수준에서, 근사치들로서만 보인다.

우리가 어느 날 세상에 대하여 참이고 완벽한 이론에 도달한다는 이유 때문에 (비록 현재 이 날이 멀리 떨어진 듯 칸트와 라플라스 시대에 보였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 보일지라도) 이 근사치의 과정이 어느 날 끝날 것임은 상상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참인 이론을 틀림없이 발견한다할지라도, 우리는 제노파네스(Xenophanes) 깨달았던 바와 같이 - 우리가 그 이론을 발견했음을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거의 2세기동안 뉴튼의 이론은 세상에 대한 참인 이론으로서 간주되었다; 그리고 뉴튼의 이론이 이 2세기동안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에게 보였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만족스럽게 보이는 이론을 우리가 발견한다할지라도, 우리는 그 이론에 대한 진지한 반론이 어느 날 아마도 발견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얻은 근사치를 영원히 개선하는 데 만족해야 할 가능성을 우리는 배제해서는 안 된다. 세상을 보편적 이론들을 통하여 기술하려는 시도는, 자연수들의 비율을 통하여 무리수(無理數: irrational numbers)들을 기술하는 시도와 다르지 않게, 근사치들의 무한한 연속을 낳는다는 것은 세상이 독특한 결과일 것이다. 보편적인 이론들을 통하여 세상을 기술하려는 우리의 시도는 우리가 스스로 만든 보편적 법칙들 통하여 독특한 것과 비이성적인 것을 합리화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그 시도는, 근사치의 각 단계가 세상의 부분적인 면을 기술하는 듯이 보이고 우리는 그 부분적인 면이 없으면 다음 단계를 기술할 수 없기 때문에 비율의 연속에[a sequence of ratios] 의한 근사치의 방식과 다르다.) 우리가 지닌 바로 그 과도한-단순화(over-simplification) 방식은 우리가 우리의 근사치들을 통하여 막으려는 격차를 유발할 것이다. 그러나 성취된 근사치의 정도에 대하여 우리의 그물의 성김과 촘촘함에 대하여 절대적인 측정치가 없고 더 나쁘거나 더 좋은 근사들에 대한 비교만 있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가 발휘하는 가장 성공적인 노력들도 결정론에 대해서는 그 그물코가 너무 성긴 그물만을 낳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그물들을 통하여 세상을 속속들이 조사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 그물의 코는 어떤 작은 물고기는 항상 놓칠 것이다: 항상 비결정론이 충분히 놀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크게 관련되는 곳에서 매우 명징하게 보일 것이다. 과학적 방식들의 도움을 받아서 인간 개성들을 과학적으로 기술하거나 분류하는 데 우리가 근접할 수 있다는 어떤 징표도 없다: 분류하고 측정하려는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인간 개성들은 독특한 상태로 남아있다.

 

16. 칸트의 견해와의 비교.

앞 절에서 전개된 고찰들 대부분은 논리적 특징이나 방법론적 특징을 띤다. 그러나 세상의 독특함에 대한 견해는 형이상학적으로서 기술될 것이다: 그 견해는 noumena의 즉, 본질적인 물체들(things in themselves)의 세상이라는 칸트의 개념과 일치한다.

칸트는, 그의 동시대인들 대부분처럼, - 천문학자들 및 물리학자들을 포함하여 뉴튼 이론의 진실성을 믿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심지어 그 진실성이 선험적으로 유효하다고 믿었다. 뉴튼의 이론은 탁월한 근사치일 따름이라는 가능성은 칸트에게 떠오르지 않았고, 내가 생각하기에, 칸트에게 떠오를 수 없었다. 이것이 칸트가 본질적인 물체들의 세상인 noumena의 실제 세상으로부터 현상의 세상, 자연(Nature)우리의 지성이 자체의(뉴튼적) 법칙을 선험적으로 부과하는 세상 구분했던 이유이다. 공간과 시간 속의 세상인 자연은 인과적 법칙들에 종속된다고 그는 믿었다;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을 필연적으로(with necessity)’ 결정했던 법칙들. 공간과 시간 속의 우리의 행동들은 완벽하게 사전에 결정되어 있었다; 그 행동들은 일식이나 월식처럼 사전에 측정될 수 있었다. noumena로서만, 우리 내부의 물체들로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

우리가 칸트의 noumena 세상을 사물들이나 과정들의 본질적인 모습 하에서 고찰되는 우리의 사물들이나 과정들의 세상으로 갈음하고, 칸트의 현상의 세상을 보편성의 모습 아래서 고찰되는 우리의 사물들의 세상으로 갈음한다면, 우리는 앞 절에서 전개된 견해에 근접한다; 내가 밝힌 바와 같이, 인과성은 결정론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하고 우리의 독특한 세상은 칸트의 본질적 세상과 달리 공간 속에 있고, 훨씬 더 중요하게는,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 왜냐하면 결정된 과거와 열려있는 미래를 구분하는 일은 결정적으로 중요함을 내가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칸트가 뉴튼의 이론과 같은 이론은 우리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그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지성이 자연에 부과한 암시할 때 나는 칸트의 의견에 동의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지성은 자연을 합리화한다고 암시할 때; 그리고 우리가 결정론적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되는 실체가 뉴튼의 이론이나 다른 이론에 의하여 기술되는 것보다 더 깊은 있다고 암시할 때. 그러나 나는 뉴튼의 이론이 틀림없이 참이라는, 그리고 우리가 자연에 부과하는 이론은 틀림없이 그런 이유 때문에 선험적으로 유효하거나, 혹은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인 특징을 띤다는 그의 견해에는 또한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또한 비결정론적 실체 자체가 알려질 수 없다는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독특한 세상이 철저히 알려질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의 과학적 지식은 그 세상을 점점 더 잘 알려는 시도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인 시도 이다. 지식에 관한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지식 모두는 우리의 이 하나뿐인 독특한 세상에 관련될 따름인 동시에 다른 것에는 관련되지 않는다.

칸트의 해답이 지닌 근본적인 난점은 우리의 행동들이 공간과 시간 속에 있어서 결정되어 있는 반면,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물체들로서 우리가 공간과 시간 속에 있지 않다는 것 분명히 나의 해답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가 당장 여기서 도덕적 결정들을 내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내가 의심하지 않는 바, 칸트가 언급할 수 있기를 원했던) 가능해진다.

칸트는 자신의 결정론을 다음 구절에서 표현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관련된 외부 조건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의 사고방식에 대하여 깊은 통찰력이 있어서 그가 가장 익숙한 행위의 원동력 모두를 우리가 안다면, 어떤 사람의 미래 행동을 우리가 미리 그리고 확실하게 계산할 수 있다는 우리가 월식이나 일식에 대하여 할 수 있을 것과 같이 견해의 진실성을 우리는 수용할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인간은 자유롭다고 우리는 주장할 것이다.’

이 구절은 비결정론에 대하여 칸트의 신념이 지닌 힘을 증명한다: 이 구절은 과학이(선험적 과학) 우리에게 결정론을 수용하라고 강요한다는 그의 그릇된 신념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왜냐하면 그가 여기서 예측가능성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그 자신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분명히 순수한 결론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공식은, 예측업무에 필요할 것과 같이 그렇게 깊은 통찰력을 우리가 지닐 수 없다는 언급에 의하여, 매우 간단하게 구조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그의 공식을 공허하게 만족시킴으로써 그의 공식이 구조될지라도,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구조되지 않을 터이다; 게다가 그렇게 하는 것은 책임가능성을, 그리고 책임가능성과 함께, ‘과학적결정론을

포기하는 것에 해당할 터이다.

 

17. 고전 물리학은 책임질 수 있는가?

15절에서 전개되어 앞 절에서 칸트의 철학적 논증들과 비교된 철학적 논증들은 다소 더 전문적인 특성을 지닌 몇 가지 결과들을 제시한다: 그것들은 고전 물리학이 심지어 아다마르(Hadamard)가 얻은 결정적인 결과들과 독립적으로, 책임질 수 없음을 보여주는 한 가지 방식을 제시한다.

이 결과들의 중요성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다. 그 결과들은 뉴튼주의자가 간직하는 세상에 대한 결정론적이거나 심지어 기계론적인 그림에 영향을 미칠 필요가 없다. 그 결과들은 완벽하게 유효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튼주의자를 놀라게 하거나 뉴튼주의에게 충격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들은 과학적결정론에 정말로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서 결정론은 인간의 과학에 의하여, 인간의 경험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다는 견해; 왜냐하면 이런 형태의 결정론은 책임가능성과 명백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임질 수 있는 예측업무를 지니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항성계의 모형이 주어져야 한다 (15절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다시 말해서, 그 항성계에 대한 근사치적 기술. 한 가지-천체나 두 가지-천체의 문제를, 혹은 가령 세 가지 천체들 중 두 가지 천체의 상호작용이 첫 번째 근사치에 근거하여 무시될 수 있을 (그 천체들의 긴 거리와 작은 질량 때문에) 세 가지-천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 가지 천체들 중 여하한 두 가지 천체 사이의 강력한 상호작용을 지닌 세 가지-천체 문제를 동일한 정확도로써 해결하는 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같이 그렇게 정확한 초기조건들이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책임가능성에 의하여 요구된 근사치의 정도를 심지어 계산하기 시작할 수 있기 전에 우리에게 항성계에 대한 근사치적 초기상태가 주어져야 한다면, 책임가능성과 관련된 전체 문제는 해결이 불가능하지 않다면, 몇 가지 경우들에 대하여, 비결정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책임가능성에 의하여 요구되는 근사치를 계산할 것을 허용하기 위하여 모형은 얼마나 훌륭해야 하는가? 모형의 훌륭함이 모형이 지닌 근사치의 정도이나 정확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에 의하여 위협을 받는다; 그리고 그 위협은 복잡한 항성계들에게 매우 심각할 것이다. 그러나 항성계의 복잡성은 근사치 모형이 가까이에 있다는 조건으로만 또한 평가될 수 있다; 우리가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에 의하여 위협을 받는다는 것을 다시 지적하는 고찰.

의심할 바 없이, 너무 복잡하지 않은 많은 경우에, 다음 방식을 통하여 진행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먼저 모형을 얻고 그 모형은 훌륭하거나 나쁠 것이다: 우리가 알 필요는 없다. 그 다음에 우리는 책임가능성의 원칙에 따라서 우리의 예측업무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초기조건들에 관하여 요구되는 정확성을 계산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최초로 주어진 모형이 충분히 훌륭하지 않아서 우리가 실패한다면, 우리는 더 나은 모형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이 방식은 흔히 성공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책임가능성이 충족된다고 틀림없이 말할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더 나은 모형을 사용해서도 우리가 다시 실패한다면 어쩔 것인가? 우리가 향상된 모형에 대하여 허용 가능한 요건의 숫자를 미리 줄이거나, 아니면 우리가 모형에 대하여 요구할 훌륭함, 정확도를 미리 줄여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것 중 어느 것을 계산하는 업무로부터 우리는 단지 보다 높은 순서의 책임가능성의 문제에 봉착한다. 그리고 이것으로써 우리는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의 길에 놓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더 높은 순서의 문제는 더 낮은 순서의 문제보다 풀기가 더 쉽다고 믿거나, 덜 훌륭한 모형이 더 낮은 순서 문제의 해결에 대하여 보다 더 높은 순서의 문제 해결에 필요하다고 믿을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근사치의 방식들이 항상 결과들을 무한히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을 이유도 없다.

이 고찰들은 결정적인 것으로 제시되지 않고 오히려, ‘과학적결정론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복잡성의 문제가 상황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과 실제 세상의 복잡성은 결정론이 과학적 경험이나 우리가 지닌 과학적 이론들의 성공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논증들을 파괴할 것 같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서 제시된다.

이 매우 일반적인 고찰들과 별도로, 더 약한 의미와 더 강한 의미 모두에서의 (3절에서 구분된) 책임가능성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고찰들이 있다.

먼저, 약한 책임가능성에 관하여, 사실상 우리에게 정확한 초기조건들이 주어진다할지라도 우리는 단지 특별한 경우들에만 두 개 이상의 천체들로 구성되는 뉴튼적 항성계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 항성계가 특정 근사치의 방식들이 적용될 수 있는 저 매우 특별한 구조들에 속하지 않는다면 3개 이상의 천체에 관한 이 임무를 해결할 희망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개략적으로 동등한 거리에 위치한, 가령 8개나 80개 혹은 800개의 개략적으로 동등한 천체들로 구성된 항성계를 다루는 방법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현재 우리에게는 이런 종류의 복잡한 항성계에 대하여 예측들을 계산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 한층 강력한 이유로, 미리 결정된 정확도로써 예측업무를 해결하기 위하여 주어진 초기조건들의 조합이 얼마나 정확해야 할지를 알아내는 방법이 없다.

뉴튼 역학의 일반적인 n-천체 문제를 해결하는 진지한 전망이 없다면, 뉴튼의 역학이 심지어 책임질 수 있는(accountable)’의 더 약한 의미에서도 책임질 수 있다고 믿을 어떤 이유도 없다.

게다가 우리가 더 강력한 의미에서의 책임가능성과 관련된 상황을 조사는 데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뉴튼의 역학이 책임질 수 없다고 믿을 훌륭한 이유들을 발견할 것이다.

빈 우주 속에서 멀리, 몇 개의 자그마한 천체들로 (가령, 몇 톤이나 몇 십 톤의 질량을 지닌) 구성된 (개략적으로) 소외된 뉴튼적 중력 체계를 고려하라. 그리고 측정을 통하여, 이런 종류의 체계를 예측하는 데 필요한 초기조건들과 더욱 특히 그 체계에 속하는 다양한 천체들의 질량들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을 방법을 고려하라. 우리는 용수철저울에 연결된 추(: pendulum)나 시험 천체를 이용할 수 없는데 이유인즉 심각하게 간섭하지 않고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우리는 그 체계에 침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침입 때문에 매우 불균형을 이루어 그 항성계의 천체들 중 몇 개가 우리가 측정할 수 있기 전에 그 항성계로부터 도피할 항성계에 대하여 우리가 너무 아는 게 없기 때문에 그 간섭은 예측될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성계와 같이 외부로부터 그 체계를 시각적으로 관찰함으로써 이런 종류의 체계의 초기조건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우리는 전제해야 한다. 그 체계가 가시광선의 자체 근원을 제공하거나 외부로부터 가시광선을 통하여 조명된다고 우리는 전제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가시광선을 통하여, 우리가 그 체계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전제할 수 있다. (이 전제는, 그 체계의 천체들이 가시광선을 통한 측정들에 의하여 눈에 띄게 간섭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무거운 거시적 천체들이기 원자들이나 원자 이하의 미립자에 관한 통상적인 하이젠베르크의 견해와 반대로 - 때문에, 합당하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가 두 가지 위치들과 시간차를 측정함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시각적으로 속도들을 측정할 수 있다고 (도플러 효과의 도움을 받아서) 전제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 사이에 통신이 설치된 세 개의 먼 비-공면(-共面: non-coplanar) 행성들로부터 세 가지 속도벡터(velocity vectors)를 시각적으로 관찰할 것이다.) 질량이나, 혹은 적어도 질량비(mass-ratios)를 계산하기 위하여, 우리는 역제곱 법칙(inverse square law)을 이용해서 동일한 순간들 동안에, 거리들과 가속도들을 측정해야 (가령, 레이더를 통하여) 한다.

이제 어떻게 우리가 시각적으로 가속도들을 측정할 수 있는지 고찰하자. 유일한 방법은 속도들을 측정하여 그 속도들이 어떤 변하는지를 보는 것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순간적 속도들을 측정하는 데는 심지어 문제가 있다: 우리가 속도들을 더 정확하게 결정하기를 원할수록, 그 속도들이 속하는 순간의 결정은 더욱 부정확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양보로) 우리가 틀림없이 이 난제를 무시할 준비가 되어 있다할지라도, 우리가 가속을 측정한다면 그 난제는 보다 심각한 형태로 다시 떠오른다. 이유인즉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유한하고 너무 짧지 않은 시간격차를 통하여 분리된 두 순간에 속도들을 측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눈에 띄는 어떤 차이점도 관찰할 수 없을 터이어서 결과적으로 가속을 측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너무 짧은 시간격차를 취한다면, 우리는 가속도를 어떤 정확한 순간에 귀속시킬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추가적으로, 단지 평균 가속도들만을 얻는다.

이것에 대한 수학은 다음과 같이 단순화될 것이다. 광원으로부터 나오는 빛에 대하여 우리는 일반적인 공식인

 

(1) ΔvΔt = 1

 

지닌다.

 

이것을

 

(2) v = λo(vo - v1 )

 

쓰일 도플러 효과에 적용하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정확하게 vo와 그리하여 v1을 결정할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들은 원칙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만큼 길게 관찰할 항구적 근원으로부터 나온 빛을 언급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voλo를 정확하게 알려진 것으로 고려할 것이다. 그러나 전환 vo - v1v1보다 더 정확하게 측정될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1)(2)를 결합하여

 

(3) ΔvΔt = λo

 

얻는다.

 

우리는 가시광선으로써 작업을 한다고 전제했기 때문에 (이 전제는 다소 약화될 수 있지만 λo에는 더 낮은 한계가 있는데 왜냐하면 나무 강한 빛은 너무 큰 관통력을 지닐 것이기 때문이다) λo에는 더 낮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따라서, 우리는 (3)으로부터 우리가 원하는 만큼 작게 ΔvΔt 모두를 독립적으로 만들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3)은 등속(constant velocities)에만 유효하다; 변동속도(changing velocities)에 대해서는 v와 관련된 상황이 (3)에 의하여 표현된 것보다 훨씬 더 나쁘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속을 측정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v가 변한다고 우리가 전제해야 하는 바와 같이, v가 변하면 두 가지 다른 근원들이 있어서 각 근원은 Δv의 규모를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작은 Δt, 다시 말해서 측정에 관한 작은 기간의 (혹은 전환을 기록하는 사진건판의 노출의) 선택은, (3)이나 (1)에 따라서 Δv를 증가시킨다; 둘째로, Δt의 선택인데 결과적으로 vv1이 측정기간 동안에 변하여 v1얼룩이지고 결과적으로 Δv는 커진다. 그러므로 가속에 따라서 (기껏해야) Δt의 최적의 가치가 있어서 Δt는 충분히 크지만 (공식 (3)의 관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속도로 하여금 Δv를 증가시킬 정도로 너무 크지는 않다. Δt의 최적의 가치에 상응하여, Δv의 매우 작은 가치가 우리가 감소시킬 수 없는 가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 번째 측정에 (시간 t2에 만들어진 v2) 근거하여 가속도 를 결정하여

 

(4) ⍺ ≈

 

되도록 노력한다면, 우리는, 의 간격이 Δt보다 상당히 크지 않다면 우리가 = 0/0과 같이 완전히 비결정적인 가치를 얻음을 즉각 안다. 그리하여 여하한 시간 간격 Δt동안에 를 결정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오히려 우리는 훨씬 더 긴 기간 동안에 의 평균 가치를 얻을 수 있을 따름인데 그 기간에서 는 제한된 정확도 Δt로써만 각각 결정되고, 심지어 평균 가치는 의 감소 불가능한 정확도 때문에 ( 은 틀림없이 Δv보다 훨씬 더 크다) 오직 부정확하게 결정된다.

이 고찰들로부터, 가시광선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가 뉴튼의 체계 안에서 우리가 원하는 만큼 정확하게 (우리가 원하는 만큼 정확하게 결정될) 특정 순간에서의 다양한 가속도들 모두를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정확하게 천체들의 질량비를 결정할 수 없다. 그리하여 심지어 모든 거시적 고전 체계에서도 우리가 원하는 만큼 정확하게 우리에게 초기조건들을 제공할 수 있을 측정들이 가능한 듯이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고전 물리학의 모든 예측업무들이 초기조건들에 대한 측정들을 토대로 수행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즉각적으로 낳는다.

게다가 더 한층 강력한 이유로 이것은 고전 물리학인 책임질 수 있는(accountable)’의 더 강력한 의미에서 책임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기술된 고전 물리학에서의 상황과, 하이젠베르크에 따라서 양자이론에 대하여 유효한 불확정의 원칙 사이의 유사성은 너무 명백해서 더 이상의 언급할 필요가 없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 공식들은, 물론, 공식 (1)과 동일하다: 그 공식들은 (1)의 양변에 를 곱한 것으로부터만 생겨난다.) 그 유사성은, 하이젠베르크처럼, 조작주의적(operationalist) 분석을 적용한 결과이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와 달리, 나는 조작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존재론적 결과들을 도출하기 위하여 이 고찰들을 이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뉴튼의 역학이 결정론적이라는 데서 양자이론과 다르다는 견해에 내재된 난점들을 지적하고 싶을 따름이다.

 

18. 과거와 미래.

모든 과학적 지식이 지닌 근사치적 특성은 그 그물코를 우리가 점점 더 세밀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그물 내가 보기에 과학적결정론을 반대하고 비결정론을 선호하는 철학적으로 가장 근본적인 논증인 것을 제공한다. 거기에 부차적이지만 여전히 중요한 것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비대칭으로부터 나오는 논증이다.

우리는 과거를 변경시킬 수 없다 과거를 변경시키는 일 다음 일을 (그리고 관념론이나 주관주의나 실증주의에 따라서 동일할 것인 일) 하려는 시도들이 실행되었다할지라도: 현존하는 역사적 기록들을 왜곡함으로써 과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변경하는 것. 과거는 발생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과거는 발생한 것에 의하여 완벽하게 결정된다는 것은 하찮게도 참이다. 결정론적 교설은 그 교설에 따르면 미래 또한 발생한 것에 의하여 완벽하게 결정된다 우리의 경험 구조 속에 있는 근본적인 비대칭을 악의적으로 파괴한다; 그리고 결정론적 교설은 일반상식과도 두드러지게 충돌한다. 우리의 모든 삶과, 우리의 모든 활동들은 미래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들로 바쁘다. 분명히 미래에 발생할 것은 과거나 현재에 의하여 주로 결정된다고 우리는 믿는데 왜냐하면 현재 우리의 모든 이성적 행동은 미래에 영향을 주거나 미래를 결정하려는 시도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거를 왜곡하려는 시도들에도 유효하다.) 그러나 그만큼 분명하게 우리는 미래를 아직 완전히 고정되지 않은 것으로서 정말로 간주한다; 닫힌 과거와 대조적으로, 말하자면, 미래는 여전히 영향에 노출되어 있다; 미래는 아직 완전히 결정되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문제들에서 일반상식이나 공통적인 태도들이 최종적 중재자라고 나는 결코 주장하고 있지 않다: 논증들에 근거하여 그리고 특히 시험 가능한 과학적 이론들에 근거하여 일반상식과 충돌하는 견해를 수용하는 데에 관한 훌륭한 이유들이 있다면, 나에게는 의심할 바 없이 수용할 태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서 그 경우가 아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열림에 대한 일반상식 견해를 지지하는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인 이론으로부터 특수 상대성 이론 유래하는 훌륭한 과학적 근거들이 심지어 있기 때문이다.

 

 

19. 특수 상대성의 판결.

과거와 미래 과거의 폐쇄됨, 그리고 미래의 열림 사이의 비대칭을 주장하는 내가 옳다면 이 비대칭은 물리 이론의 구조에 재현되어야 한다.

이 요구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하여 완벽하게 충족된다. 이 이론 안에는 모든 관찰자에 대하여 혹은 내가 선호해서 말하는 바, 모든 국지적 관성 체계에 대하여 절대적인 과거와 절대적인 미래가 (가능한 동시성의 전체 지역에 의하여 분리된) 존재한다. 그 체계의 (절대적) 과거는, 물리적 영향력이 (예를 들어, 빛 신호들) 그 체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공간-시간 점들로 형성된 지역이다; 그 체계의 (절대적) 미래는 물리적 영향력이 그 체계에 의하여 미치는 모든 점들에 의하여 형성된 지역이다. 민코프스키(Minkowski)의 기하학적 재현에서 이 과거와 이 미래는 두 가지 원뿔을 (더 정확하게는 4차원적 이중 원뿔의 두 부분들) 형성한다; 그 재현의 꼭짓점 A여기--지금(the here-and-now)’이다.

 

그림 1

(범례 - possible contemporaneity: 가능한 공시성. 역자)

원뿔을 관통하여 자른 면은 이렇게 보인다 -

 

그림 2

 

(그림의 제시에서 통상적인 것처럼, 상대성에 관한 그림들에서 시간축이 위를 가리키도록 하는 것이 더 통상적이라 할지라도, 나는 이 그림을 배열하여 시간이 좌측에서 우측을 가리키도록 했다.) 나는 잘 알려진 이 그림을 상세하게 토론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 그림이 미래와 과거 사이의 비대칭 요구를 완벽하게 충족시킨다고 나는 지적을 해야겠다. 물리학적 용어들로써, 이 비대칭은, ‘과거의 여하한 장소로부터 물리적인 인과적 연쇄가 (예를 들어, 빛 신호) ‘미래속의 여하한 장소에도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하여 확립된다; 그러나 미래의 어떤 장소로부터도 그런 효과는 과거의 여하한 장소에 미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의 결과로서, 과거가 닫혀있는 반면 미래는 우리에 의하여 완벽하게 예측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우리에게 열려 있게(open)된다; 다시 말해서 그 비대칭은 내가 확보하려고 노력했던 종류의 것이다.

이것을 알기 위하여, 우리가 꼭짓점 A에 있으면서 우리의 체계가 공간-시간적 점 B에 도달했을 때 우리 체계 속의 상황들의 상태에 관하여 완벽한 예측을 하고 싶어 한다고 전제하자.

 

그림 3

 

 

우리가 이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림 3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P와 같은 점들이 있는데, 그 점들은 B의 과거에 속하지 A의 과거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P로부터, 영향들이 B에 도달할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P로부터 나온 영향이 A에 있는 우리에게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A에서 P에서의 상황에 관하여 무엇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PA의 과거-원뿔 외부에 있다; 그러나 A의 과거-원뿔은 우리가 그 지역에 관하여 지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다.

과거와 미래 사이의 이 비대칭의 결과로, 특수상대성이 위에 기술된 완벽한 의미에서 더 이상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이 아님을 나는 이제 밝히고 싶다. 특수상대성 안에는 더 이상 라플라스적 악마가 없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림 3의 상황을 다시 고려하라; A는 우리의 현재이고 B는 예측이 수행될 공간-시간적 지점이다. 인간 과학자는 그 예측을 수행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라플라스적 악마가 특정 순간에 충분히 큰 (그러나 제한적은 아닌) 공간의 지역에 대한, 즉 특수상대성의 의미에서 동시적으로 일컬어질 특정 지역에 대한 모든 초기조건들을 얻을 수 있는 악마 있다고 우리는 전제한다. 우리의 그림 4에서, 이 지역은 선분 C에 의하여 재현된다.

 

그림 4

 

 

B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상황을 예측하려는 목적으로, 선분 CB의 과거를

표시하는 점선까지 적어도 도달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선분 C가 점선 B를 뛰어넘는다고 전제할 것이다. 그리하여 C는 악마가 완벽한 정보를 받은 지역을 대표한다. 이제 이 지역이 주어지고, 이론의 관점으로부터 악마가 정보를 받을 때 위치한 제일 빠른 공간-시간적 위치인 공간-시간적 위치 D를 우리가 발견하는 것을 이론은 허용한다. 그리고 D의 위치가 그러해서 BD의 과거에 속할 것이다. 이것은 악마가, B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상태를 계산할 때, - 특수상대성을 통하여 예측보다는 소급하여 언급(retrodiction: 현재의 정보를 토대로 한 추리, 설명 또는 재현)을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혹은 다시 표현해서: 우리가 라플라스적 악마를 특수상대성 속으로 도입하려고 한다면, 악마의 정보 지역으로부터 악마의 공간-시간적 위치 D에 대한 더 낮은 한계를 우리가 계산할 수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는 나아가 그 악마가 자기 자신의 과거 속에 있는 하나의 사건만을 계산했음을 발견한다.

선분 C가 양방향으로 무한히 길어진다면 이것은 제한된 악마를 무제한적인 악마로 변신시킨다 악마가 정말로 여하한 사건도 계산할 수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러나 악마가 이론을 통하여 무한한 미래에 위치하여 여하한 사건도 그의 과거에 속하기 때문에 이것은 그러하다.

그리하여 특수상대성의 악마는 더 이상 라플라스의 악마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악마는, 라플라스의 악마와 반대로, 예측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악마는 단지 소급하여 언급할(retrodict) 따름이다.

요컨대, 특수상대성은 우리가 혹은 악마 어떤 분명한 정보를 가질 수 있는 모든 사건을 우리의 과거에 혹은 악마의 과거에 - 속하는 사건으로 변화시킨다. 그리하여, 특수상대성에 따라서 과거는 원칙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저 지역이다; 그리고 미래는, 현재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지라도, 항상 열린(open)’ 저 지역이라고 언급될 것이다: 심지어 악마에게라도 완벽하게 알려짐으로써 악마의 과거의 한 부분에 될 것이기 때문에 미래는 알려져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칙적으로 완벽하게 알려질 수도 없다. 특수 상대성은, 자체가 지닌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여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과학적결정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이용될 수 없다. (1) ‘과학적결정론이 요구하는 예측들은, 특수상대성 자체의 관점으로부터, 소급언급들(retrodictions)로서 해석되어야 한다. (2) 소급언급들(retrodictions)이기 때문에 예측들은, 특수상대성의 관점으로부터, 예측되는 체계의 미래 안에서 계산되는 듯이 보인다. 그리하여 예측들은 저 체계 내부에서 계산된다고 일컬어질 수 없다: 예측들은 내부로부터의 예측가능성이라는 원칙을 충족하지 않는다.

특수상대성이론의 존재는, 이런 방식으로, ‘과학적결정론의 진실성을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인 이론의 진실성으로부터 도출하는 일이 허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통상적인 전제를 반박한다.

 

 

 

 

 

20. 역사적 예측과 지식의 성장.

 

                                                        그러므로 나로부터 어떤 예언도 기대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내일 발견할 것을 내가 알았다면,

                                                         나는 우선권을 확보하려고 오래전에

                                                         그것을 공표했을 것이다.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É)

 

 

결정론을 비판하는 것과 별도로, 나는 지금까지 비결정론을 선호하는 두 가지 긍정적인 논증들을 토론했다: 과학적 지식이 지닌 근사치적 특성으로부터 유래하는 논증과 과거와 미래의 비대칭으로부터 유래하는 논증.

이제 나는 위 두 가지 논증들 중 어느 것보다도 아마도 덜 근본적이지만 특히 과학적결정론에 대한 공식적 반증을 구축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매우 중요한 (23절에서 밝혀질 바와 같이) 세 번째 논증에로 왔다. 나는 먼저 그 논증을 인간적인 용어들로 서술할 것이다. 놀랍게도, 그 세 번째 논증은 순전히 물리학적인 용어들로 완벽하게 다시 서술될 그리고 사실상, 보다 정확하게 서술될 수 있다.

그 논증의 핵심은 우리 자신이 과학적 방법들로써 예측할 수 없는 우리 자신에 관한 어떤 것들이 있다는 고찰이다; 더욱 특히, 우리 자신의 지식 성장 과정에서 우리가 얻을 결과들을, 과학적으로,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우리보다 더 현명한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특정 상황 하에서 어린이들의 지식 성장을 예측할 수 있을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의 지식 성장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 또한 그들 자신이 단지 내일에만 알 것을 오늘에 예측하거나 예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정보는, 우리가 단지 내일에만 알 것을 오늘 예측한다는 개념에 포함된 실제적인 모순이 있을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정말 그런 모순이 있다. 그러나 이 모순이 단지 우리의 정보에만 기인한다는 것과 그 정보가 실제로 완벽한 자기-예측의 가능성을 방해하는 것을 확신하기는 쉽지 않다. 그 정보가 그렇게 한다는 것은 다음 두 절에서 밝혀질 것이다.

여기서 나는 자기 자신이 내놓는 모든 예측의 결과들 모두를 예측할 수 있는 과학자는 있을 리가 없다는 명제의 결과들 중 몇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이 결과들 중 한 가지는 그 과학자가 자기 자신 미래 상태들 중 몇 가지를 예측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자신의 이웃 사람들의 즉, 그가 눈에 띄게 영향을 미치는 그의 환경의 그 부분의 모든 상태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내일 알 것을 그 자신이 알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의 환경에 대하여 어떻게 내일 행동할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이웃의 상태는, 그의 행동들을 예측할 수 있는 관찰자들에 의하여 그 관찰자들이 눈에 띄게 그에게 간섭을 하지도 않고 그의 이웃을 간섭하지도 않는다면 외부로부터 예측이 가능할지라도, 그의 자신에 의하여 내부로부터 완벽하게 예측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물리체계도 내부로부터 완벽하게 예측될 수 없다는 것이 (그리고 태양계와 같은 그런 항성계에 대한 예측가능성은, 외부로부터의 예측가능성처럼, 11절의 전문용어로서 기술되어야 한다는 것) 귀결된다.

그 논증은 역사주의의 교설을(the doctrine of historicism) - 사회과학의 임무는 인간 역사의 과정을 예측하는 것이라는 교설 - 논박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논증할 것이기 때문이다:

(1) 완벽한 자기-예측이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질 수 있다면, 예측가가 지닌 복잡성이 무엇이든, 이것은 어떤 상호작용하는 예측가들의 모임에 대해서도 틀림없이 또한 유효하다; 결과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예측가들의 어떤 모임도 그 모임 자체가 지닌 지식의 미래 상태를 예측할 수 없다.

(2) 인간 역사의 흐름은 인간 지식의 성장에 의하여 강력하게 영향을 받는다. (이 전제의 진실성은,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우리가 지닌 과학적 개념들을 포함하는 우리의 개념들 안에서 단지 이런저런 종류의 물질적 발전의 부산물들만 보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틀림없이 수용된다.)

(3) 그리하여 우리는 인간 역사의 미래 흐름을 예측할 수 없다; 아무튼 우리가 지닌 지식의 성장에 의하여 강력하게 영향을 받는 인간 역사의 미래 흐름의 모습들 중에서의 면면을.

이 논증은 물론 모든 사회적 예측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을 아니다; 반대로 이 논증은 사회적 이론들을 예를 들어, 경제이론들 (그러나 역사적 이론들은 아니다) - 특정 전개 상황들이 특정 조건 하에서 발생할 것임을 주장하는 예측들을 그 이론들로부터 도출함으로써, 그리고 이 예측들을 시험함으로써 시험하는 가능성과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다.

21. 이론적 지식의 성장 예측하기.

과학적 지식의 성장에 대한 예측이 무엇을 포함할지 보다 가까이 고찰하자. 그 예측은 어떤 미래 날짜에 우리가 (a) 현재 수용되지 않거나 아마도 현재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론들을 잘 시험된 것으로서 수용하거나 (물론, 임시적으로); 또는 (b) 초기조건들과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았을) 연결하여, 지금 수용되거나 나중에 수용되는 이론들로부터 지금은 알려지지 않은 어떤 설명들이나 예측들을 도출할 것임을 지금 예측하는 우리의 능력을 포함할 것이다.

현재의 절에서 나는 이론적 지식의 성장에 대한 예측들을, 즉 문제 (a)을 다룰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새로운 시험들에 근거한 이전에 수용되지 않은 이론의 수용을 혹시 예측할 수 있을지 이다. 부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예비적 질문이다: 혹시 우리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론의 내용어떤 사람에게 떠오를 것이거나 어떤 사람에 의하여 제기될 새로운 개념 예측할 수 있을 것인지.

이것이 부차적으로 중요하다고 내가 말하는 이유는, 흔히 이론이 새로이 수용된다는 의미에서 새로울 때는 그 이론이 생각되는 만큼 그렇게 완전히 새롭지 않은 것으로 판명된다는 것이다. 그 이론은, 그 이론을 지지하는 증거가 없거나 그 이론이 요구되는 문제나 그 이론을 해결할 수 있던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심지어 오래전에 제기됨과 동시에 잊혔을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아이디어들의 성장에 대하여 반대가 되는 것으로서 수용된지식의 성장에 우리가 주로 관심을 갖는다면, 중요한 것은 새로운 문제들이나 새로운 증거를 토대로 한 이론의 임시적 수용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제 먼저 우리가 지닌 새로운 이론적 아이디어들의 성장이라는 예비적 질문을 고찰하자. 심리학자 혹은, 여러분이 원한다면, 생리학자는 어린이가 (혹은 동물) 어떤 환경적 자극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해서 특정 시험들을 거쳐서 수용할 이론들이나 기대들을 예측할 것이다: 화상을 입은 어린이는 (혹은 고양이) 불을 무서워한다. 우리의 심리학적 (혹은 생리학적 혹은 물리학적 혹은 경제적...) 지식이 매우 훌륭하다면 우리가 유사한 방법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고, 가령 3주 안에 우리에게 작동하기 시작할 (우리가 지닌 물리적 혹은 경제적 환경에 대한 지식에 따라서) 어떤 환경적 자극의 영향을 받아서 가령 한 달 안에 최초로 우리에게 떠오를 이론들을 오늘 예측할 수 있다고 우리는 아마도 상상할 것이다.

이제 문제를 이렇게 표현하는 방식에는 터무니없는 것이 있다. 이유인즉, 어떤 이론들이 최초로 한 달 앞서서 우리에게 떠오를지를 우리가 오늘 안다면 이런저런 의미에서 그 이론은 물론 한 달 내에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떠오를 터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지식의 미래 성장으로서 기술될 어떤 것도 미리 알지 못한다.

내가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이 논증에 대항하여, 다음 반대의견이 제시될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 아이디어가 한 달이라는 시간 안에 어떤 사람에게 떠오를 것이라고, 그리고 그 아이디어는 그 경우에만 알려져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오늘 예언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예측은 비밀로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이 반대의견은, 우리가 내부로부터라기보다는 외부로부터 그 체계를 예측했음을 수반한다; 이유인즉 우리가 그 체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조치들을 (비밀성) 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예측이 아니었다. 게다가 우리가 예측을 수행한 그 체계에 우리 자신이 정말로 속한다고 심지어 전제하기에 우리는 우리가 얻은 결과들을 비밀로 유지하기로 결심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결정사항들을 수행할 것임을 특히 우리가 지닌 지식의 기대하지 않은 성장 때문에, 상황이 변한다면 우리가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고 우리는 철없이 전제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그런 일들을 예측할 수 있다는 전제는 논쟁중인 질문을 자기-예측이 가능한지 - 회피하는 것에 해당할 것이다.

또 다른 반대의견은 달리 보이지만 결국 동일하다. 그 반대의견은 우리가, 우리가 예측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식의 성장을 예측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가령 작가가 자신이 전달하려는 흰 종이 위에 쓰려는 검은 형태들과 역사에 미치는 그 형태들의 영향들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예측하려 할 것이다. 이 경우에 우리가 그 이론들을 예측함으로써 우리가 그 이론들을 예기했다(anticipated)고 언급될 수는 없다.

답변은 다시, 우리가 예측할 수 있다면 즉 이 형태들을 기술할 수 있다면 우리의 예측들을 의식하고 있는 우리나 혹은 어떤 사람도 그 예측들을 지금 적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측들의 기원이 미래의 역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그 기원이 지금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없다. 물론 그 예측들은 다른 상황에서 다른 효과를 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서 우리에게 관련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 관련되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체계 내부로부터 유래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들의 기원을 예측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제 나는 새로운 증거의 영향을 받는 이론의 수용에 대한 예측이라는 더 중요한 문제로 왔다.

이전과 같은 골칫거리에 들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문제의 새로운 증거가 이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틀림없이 전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예측은, 아직 수용되지 않은 이론을 선호하는 증거가 지금 있다는 것과 이론은 합당하게 지금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에 해당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측은 다시 지식의 미래 성장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서술일 것이다.

그리하여 관찰되었을 때 아직 수용되지 않은 어떤 이론을 지지하여 그 이론의 수용을 유도할 아직 관찰되지 않은 사건들을 우리가 예측할 수 있다고 현재 우리가 지닌 지식을, 즉 이제 수용된 이론들을 토대로 전제하는 것이 필요할 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 증거의 발생이 우리가 지닌 현재의 지식을 토대로 예측될 수 있는 증거는, 새로운 이론의 수용을 정당화할 증거일 리가 없다. 왜냐하면 현재 지식의 도움을 받아서 예측될 수 있는 증거는 종류에서 새롭지 않거나, 혹은 새롭다면, 우리의 현재 이론들을 확인하는 (우리가 새로운 이론을 수용하도록 유도한다기보다) 시험에 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론의 수용을 정당화할 증거의 종류는, 우리의 현재 지식의 도움을 받아서가 아니라 새로운 이론의 도움을 받아서 예측될 수 있는 증거이다; 다시 말해서 그런 증거의 종류는 틀림없이 결정적인(crucial) 증거의 특성을 지닌다.

나에게 이 논증은 완전히 흥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떤 사소함에도 불구하고 이유인즉 그 논증은 모든 이론이 자체의 진실성을 수반하여 자체의 배척을 포함하는 상황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논증은 역사주의의 영향력 있는 교설을 반증하는 데 충분하다; 왜냐하면 이 논증은 우리가 과학적 과정들을 통하여 우리가 지닌 이론적 지식의 성장을 예측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껏해야,

우리의 지식이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지닌 현재의 이론들은 모두 참이고 완벽하다는 것 - 어느 시간에도 우리가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여전히 열어 놓는다. 우리가 지닌 이론적 지식의 성장이 끝나서 우리가 지닌 이론들이 완벽할 뿐만 아니라 참이라고 우리가 전제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여전히 어떤 종류의 성장을 허용할 터이다; 왜냐하면 항상 새롭고 항상 다른 초기조건들에 우리의 이론들을 적용하는 끝없는 임무가 여전히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음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가 모든 보편적 법칙들과 또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는 모든 관련된 초기조건들을 알려한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라플라스적 악마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미래 예측들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인가?

 

 

22. 자기-예언의 불가능성.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지닌 지식의 성장에 대한 예측가능성과 연결된 질문들 중 마지막이고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난해한 질문에로 왔다. 그 질문을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 완벽한 이론적 지식과 현재나 과거의 초기조건들이 주어진다고 전제하여, 그렇다면 우리는 연역적 방법들을 통하여 어떤 주어진 순간 동안의 우리 자신의 미래 상태들과 더욱 특히 우리 자신의 미래 예측들을 예측할 수 있을까?

나는 물론 자기 자신의 초기상태에 관한 참인 초기정보와 연결하여 과학적인 자기-예측의, 즉 보편적인 이론들로부터 (참으로 전제되는) 유래하는 자기-예측을 연역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증명하려고 노력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자기-예측의 비-과학적 종류들은 성공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특정 방식으로 행동하려는 결정들에 근거한 자기-예측이 있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다음과 같은 예측으로 시작될 편지를 친구 프레드(Fred)에게 쓸 것이라고 오늘 나는 예측할 것이다: ‘너는...을 듣고서 놀랄 거야’. 이런 종류의 자기-예측들은 과학적인 형태가 아니다; 그것들은 초기조건들과 연결된 잘-시험된 보편적 이론들에 근거하지 않고 결심하는과정에 근거한다. 그것들은 또한 초기조건 나는 내일 프레드에게 편지를 쓰기로 방금 결심했다와 연결된, ‘내가 다음 날 편지를 쓰기로 결심할 때마다 나는 항상 나의 결심을 이행한다는 법칙에 근거한 과학적 예측들에 의해서 대체될 수 없다; 내가 닫힌 체계가 아니라는 이유만이라면, 이것은 기술된 체계의 조기조건들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레드가 내일 도착할 것이라고, 혹은 나의 결정과 관련된 다른 새로운 상황이 발생했다고 나에게 알려주는 전보를 내가 오늘밤에 받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과학적 이론들과 초기조건들 그리고 또한 예측업무가 주어진다고 전제하자마자, 예측의 도출은 단순한 계산의 문제가 되고, 그 문제는 원칙적으로 예측하거나 계산하는 기계에 지칭될 바와 같이, ‘계산기혹은 예측기’ - 의하여 수행될 수 있다. 이것을 인하여 나의 증거를 어떤 계산기나 예측기도 자체의 계산이나 예측을 연역적으로 예측할 수 없다는 증거의 형태로 제시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우리의 문제를 계산하는 기계들을 통하여 표현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 사소한 이점들이 있다. 먼저 그렇게 하면서 나는 결정론을 주장하는 나의 적들에게 (그들이 유물론자들이거나 물리주의자들[physicalists)’이거나 인공두뇌학자들[cyberneticists]’이든지 관계없이) 양보를 한다; 이것은 반대로 그들이 나의 논증들을 보다 공감하여 고찰할 것을 그들에게 설득한다. 두 번째로 이것으로 인하여 나는 정신들(minds)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 결정론을 논박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것으로 인하여 나는 인간 예측가들의 기벽에 의존해야 할 논박보다 더 일반적인 논박을 제시할 수 있다. 세 번째로, 기계들에 대하여 언급된 모든 것은, 사소한 변화를 겪으면서, 인간 예측가들에게도 유효할 것이다. 네 번째 이유는 방법이 그 방법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훈련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내가 알 수 있는 한 그 훈련에는 한 가지 불리한 점만 있다: 내가 그런 종류는 믿지 않을지라도, 사람은 기계라고 믿는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 내가 오해를 받을 것이라는 점.

그러나 우리의 문제를 예측하는 기계의 기능들을 통하여 토론하는 주요 이점은 이렇다. 일종의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인 이론의 단순화된 모형을 대표하여서 확실하게 외부로부터 예측할 수 있는 비교적 단순한 기계를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심지어 별개의 상태들만 가능한 기계여서 초기조건들의 제한된 정확성 문제와 관련된 모든 문제들이 무시될 기계일 것이다.) 동시에 그 기계는 라플라스의 악마의 완벽한 화신인 완벽한 물리적 구체로서 간주될 것이다.

이것을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예측가를 다음 종류의 기계라고 생각할 것이다.

예측가 속에 (a) 물리학의 모든 참인 보편적 법칙들과 (b) 수학과 논리학의 모든 관련된 계산방법들이 구축되어 있다.

예측가는 그렇게 구축되어서, 예측가가 어떤 상태에 있다는 조건으로만 예측가의 ‘0(zero) 상태’ - 예측 업무에 의하여 자극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측가는 추가적 자극들로부터 자체를 폐쇄하여, 답변을, 즉 예측을 수행함으로써 자체의 업무를 완료할 때까지 계속하여 일한다.

예측업무는 어떤 체계의 초기상태, ‘0(zero) 시간에서의 상태인 t = 0에 대한 기술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 업무는, 더 나아가, 시간 t의 한 순간을 가령, 체계의 상태가 예측될 수 있는 저 순간인 것을 틀림없이 언급한다. 예측은 예측가의 답변일 것이다. 물론 우리가 주로 흥미를 갖는 것은 이 답변이다: 그 답변은 예측가가 성취할 수 있는 지식에 대한 추가, 그리하여 자체가 지닌 지식의 성장을 대표할 것이다.

완전히 비본질적인 전제로서 (그러나 그 전제가 어떤 문제들을 단순화하는 한 유용한) 자체의 답변을 내자마자 예측가는 자체의 0 상태로 돌아갈 것이라고 우리는 첨언할 것이다.

우리의 고찰들을 보다 확고하게 만들기 위하여, 우리는 예측업무가 구멍들이 뚫린 테이프의 형태로 (업무테이프[task tape]’) 그 기계에 제공되어 모르스(Morse) 부호와 유사한 부호로 부호화된 내용들을 형성한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 답변은 답변테이프(reply tape)라는 유사한 테이프의 형태로 나온다. 자체의 업무를 완료하자마자, 그 기계는 두 가지 주요 부분들로, 다시 말해서 (a) 자체의 0 상태에 있을 기계 자체와 (좁은 의미에서), (b) 나온 답변테이프로 구성된다고 전제될 것이다.

예측가에 관한 다음 두 가지 전제 (A1)(A2)는 필수적이다.

(A1) 그 기계에 제공된 업무가 충분히 (, 라플라스의 악마가 예측에 도달하기 충분한) 분명하다면, 예측가는 항상 올바른 답변에 도달할 것이다.

이 전제의 의도는 예측가가 충분히 강력하기를 보장하는 것이다. 다음 전제의 의도는 육체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기계이기를 보장하는 것이다.

(A2) 예측가는 자체의 다양한 작동들을 수행하면서 시간이 걸린다. 특히 예측가가 예측업무에 의하여 자극을 받는 순간과 (업무테이프 삽입) 예측가가 자체의 답변을 쓰기 (구멍을 뚫기) 시작하는 순간 사이에는 시간경과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답변쓰기 (구멍 뚫기) 또한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이 전제는, 예를 들어, 몇몇 답변들은 이미 그 기계들 속에 구축되어 있어서 계산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완벽한 이론적 지식이 부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지(全知: omniscient)하거나 반-전지한(-全知: semi-omniscient) 기계들은 배제시킨다. 우리의 관점으로부터 그렇게 부여되어 있는 기계들은, 이런 방식으로 한두 가지 질문들에 답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질문들에 답변할 수 있다할지라도, 특별한 목적을 위한 임시적(ad hoc)일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이 전제들 (A1)(A2)로부터, 자기-예측의 업무의 경우에 답변은 예측된 사건 이후나 기껏해야 그 사건과 동시에 완전할 수 있을 따름이라는 것은 쉽게 증명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요점을 예측가는 자기 자신이 지닌 지식의 미래 성장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 확립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전제들을 다소 강화시킨다면, 우리는 더 많이 증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측가가 자체의 업무에서 완전히 실패할 것을 증명할 수 있다. 필요한 두 가지 추가 전제들은 다음과 같다:

(A3) 예측가가 내놓은 두 가지 답변들 중에서, 더 긴 답변이 짧은 답변보다 더 많은 시간을 차지할 것이다.

네 번째 전제는, 예측가가 실패할 것이라는 우리의 증거에 대하여 결정적인 전제여서 좀 상세하게 토론되어야 할 것이다. 그 전제는 다음과 같다:

(A4) 기계가 제공하는 모든 답변들은 한 가지 동일한 부호나 언어로 어떤 물리적 체계의 상태를 기술한다; 혹은 다시 말해서 우리는 특별한 종류의 부호나 언어를 사용하는 특별한 답변들을 배제시킨다.

두 가지 다른 고찰들이 이 전제를 낳는다. 먼저, 우리는 기계에 의하여 주어지는 답변이 명시적이라는 점을 보장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 점에 기계의 전체 목표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암묵적 의미에서, 조사 중인 체계의 초기조건들이 기계에 주어지자마자 기계는 답변을 알고 있기때문이다. 이것은, 이 초기조건들과 결합하여 기계 속에 구축된 법칙들에 의하여 답변이 수반된다고 우리가 전제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리고 게다가 - (A1) 참조 기계가 이 정보에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다고. 그리하여 기계에 의하여 수행되도록 남겨진 모든 것은 함축된 답변을 명시적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A4)는 기계가 자체의 업무를 완수할 수 있다고 더 정확하게 표현할 따름이다.

지적된 바와 같이, (A2)에는 예를 들어 특별한 목적을 위한 임시적인(ad hoc) 예측들을, 다시 말해서 하찮은 사이비-계산 기계들을 배제시키는 기능이 있다. 이 배제에 대한 필요성은 우리가 (A4)를 지지할 두 번째 고찰을 우리가 고려할 때 훨씬 더 분명해진다. 그 필요성은 다음과 같다:

예측가가 과학적기계처럼, 즉 자체의 답변들을 법칙들과 초기조건들로부터 추론하는 기계처럼 작동하기를 우리가 원한다면, 분명히 우리는 어떤 자기-예측에 대한 특별한 목적을 위한 임시적인(ad hoc) 조치들을 배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주기적으로 변하는 물리적 체계를 우리는 자기-예측적인 체계로서 해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밤을 다가오는 낮에 대한, 혹은 다음 밤, 기타 등등에 대한 예측으로서 해석할 것이다. 제한적인 경우로서 우리는 심지어 변하지 않은 체계를 자기-예측적인 체계로서 해석할 것이다. 예를 들어 빈 종잇장으로 구성되는 기계, 합의에 의하여, 다음 행들에 있는 예측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해석될 것이다: ‘내가 간섭받지 않는다면, 나의 물리적 상태는, 미래시간 t, 빈 종잇장의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런 사례들은, 자기-예측에 대하여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임시적으로(ad hoc) 고안된 것이 아니라 적어도 다양한 물리적 체계들의 (그리고 그 물리적 체계들 가운데, 가능하다면, 그 체계들과 매우 유사한 체계들) 큰 집합을 연역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과학적기계들 즉, 연역적 예측가들에게만 우리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는 데 도움을 준다. 주로 근본적으로 우리가 예측가는 자기가 강력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환경의 저 부분들에서 변화들을 예측할 수 있는지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우리가 자기-예측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술된 이런 종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한 임시적인(ad hoc) 자기-예측 방법들을 멀리 초월하는 매우 일반적인 예측능력들을 지닌 예측가들에게만 우리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그런 특별한 목적을 위한 임시적인(ad hoc) 자기-예측가들은 우리의 전제 (A2)에 의하여 암묵적으로 배제되었다; 그러나 (A2)에 의하여 배제되지 않은 것은, (A2)를 충족시키는 예측가들과 관련하여 해석의 특별한 목적을 위한 임시적인(ad hoc) 방법들의 채택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정상적인예측가는 다시 말해서, (A1)(A2)에 답변하는 자체의 0(zero) 상태에 있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해석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나는 그렇고-그런 상태에 있는 물리적 체계이고 (여기서 우리는 틀림없이 이 예측가의 물리적 기술을 자체의 0[zero] 상태 속에 삽입해야 한다) 내가 업무에 의하여 자극을 받고 있지 않다면 나는 항상 이 상태에 있을 것이다.’ 이 특별한 해석은 아마도 (A2)에 의하여 배제된다고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배제되지 않는 유사한 해석들이 (예를 들어, 위에 언급된 주기적 체계들) 있을 것이다.

모든 그런 특별한 목적을 위한 임시적인(ad hoc) 방법들을 배제하기 위하여, 자기-예측업무에 관해서일 때는 예측가가 모든 다른 업무들에 적용하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방법들을 통하여 예측가가 여전히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우리는 요구해야 할 것이다. 방금 주어진 형태에서, 그 요구는 다소 너무 모호하다 (‘본질적으로[essentially]’방법들[methods]’이라는 단어들이 표시하는 바와 같이); 동시에 그 요구는 다소 너무 포괄적이다; 아무튼 그 요구는 필요이상으로 강력한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것은 그 전제 (A4)가 표현되는 답변과 언어에 우리의 요구를 국한시키는 전제 (A4)일 따름이라는 것이 판명되기 때문이다.

전제 (A4), 자체의 n번째 상태에 있는 그렇지 않으면 정상적인 예측가가 자체를 기술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그 예측가가 이 상태로부터 n + 첫 번째 상태로 (사실상 그 예측가가 막 옮겨가려 하고, 물론 이전 상태로부터 항상 계산될 수 있는) 옮겨갈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으로서, 해석될 수 있다는 관례의 (예를 들어) 채택가능성을 배제한다.

이것이 예측기계에 관하여 우리가 전제하는 모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두 가지 구조적으로 동일한 예측가들을 고찰한다. 예측가 1번은 2번의 상태를 예언할 예정이기 때문에 말하다(Tell)’로 지칭된다; 예측가 2번은 말하다에 의하여 예언을 받을 예정이기 때문에 말을 듣다(Told)’로 지칭된다. (말하자면, TellTold를 겨냥한다.) 자체의 예측업무의 한 부분으로서 Tell에게 제공된 초기조건들은 0(zero) 시각에서의 (t = 0) Told의 상태를 기술한다고, 그리고 Tell의 업무는 1시에서의 (t = 1) Told의 상태를 예측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전제한다. Told의 초기상태에 대한 기술은, Tell에게 제공된 것으로서, Told0(zero) 시각에 자극을 받을 예정인 예측업무에 대한 기술을 (업무테이프) 포함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Tell은 이제 순간 t =1시의 Told의 상태나 동일한 것에 해당하는 1시간 길이의 시간 경과 후의 Told의 상태를 계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의 전제 (A1)에 따라서, Tell은 항상 Told를 예측하는 이 업무에서 성공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Tell에게 주어진 업무가 0(zero) 시각에 Told에게 주어질 업무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일이 발생한다고 전제한다; 다시 말해서 Tell의 업무는, Told0(zero) 시각에 자극을 받아 세 번째 예측가를 예측할 것임을 명시한다. (이 전제는, 우리가 나중에 Tell의 업무를 자기-예측업무로서 해석할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전제 (B)로서 설명할 것이다.

(B) 자체의 예측업무에 의하여 자극을 받자마자, TellTold0(zero)시각에 자체의 예측업무에 의하여 자극을 받고 있을 것과 정확하게 동일한 상태에 있을 것이다. (S가 그렇게 정보를 받는 순간의 Tell 자신의 상태와 일치할 예정이라면, Tell에게 Told가 특정 상태에 있다고 알려주는 예측업무를 Tell에게 제공하는 데 우리가 성공할 수 있을 것임을 의심하는 것에 대한 진지한 이유들이 있다. 그러나 나의 적들에 대한 양보로서, 나는 여기서 이런 종류의 업무를 Told에게 제공하는 데 우리가 성공했다고 전제한다.)

먼저 우리가 선택한 1 시간은 너무 작아서 1시에 Told는 아직 자체의 답변테이프에 구멍 뚫기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전제하자. (이 경우에 분명히 지식의 성장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다음 정리 (T1)을 쉽게 증명할 수 있다:

(T1) 서술된 조건 하에서, Tell이 자체의 업무를 완수하는 데 걸린 시간은 1시간보다 더 길었다.

증거는 사소한 것이다. Tell이 자체의 업무를 완수했기 때문에 Tell의 답변에는 완벽하게 구멍이 뚫렸다. 그러나 1시간이 경과한 후에, TellTold와 동일한 상태들을 건너야 하고 게다가 동일한 시간 안에 건너야하기 때문에 Tell은 심지어 구멍 뚫기를 시작도 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우리의 전제에 따라서, Told1시에 자체의 테이프에 작업을 시작도 하지 못했다.

다음으로 우리가 1시 대신에 2시를 TellTold의 상태를 예측할 예정인 시간으로서, 그리고 Told가 자체의 테이프에 구멍 뚫기를 완수하지도 않고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전제하자. 명백한 이유들로 인하여 우리는 이 경우에 정리 (T2)를 얻는다:

(T2) 서술된 조건 하에서, Tell이 자체의 업무를 완수하는 데 걸린 시간은 2시간보다 길다.

증거는 이전 증거와 유사하다.

이제 우리가 3시를 Told의 상태가 예측될 예정인 시간인 Told가 자체의 업무를 완수하기에 충분히 긴 시간으로서 선택했다고 최종적으로 전제하자. 우리는 정리 (T3)을 얻는다:

(T3) 서술된 조건 하에서, Tell이 자체의 업무를 완수하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하게 3시간이다.

이것은 다시 TellTold가 동일한 기계들이라는 사실로부터 귀결된다; 그리고 그 사실은 Tell이 자체의 지식의 미래 장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유인즉 Tell의 완료된 답변은, 기껏해야 단지 예측된 사건과 함께 도착할 수 있기 때문에 너무 늦게 와서 예측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결과는 합당하고 확신적이라고, 그리고 우리의 세 가지 정리들은 우리의 목적에 필요한 모든 것을 확립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측은 모든 경우에 너무 늦게 와서 기계가 지닌 지식의 미래성장에 대한 예측으로서 고려되지 않을 것이다.

이 결과는 (A3)(A4)를 이용하지 않고 도출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자기-언급이 가능하여 기술이 자체를 기술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특별한 목적을 위한 임시적인(ad hoc) 어떤 특별한 상징사용을 도입한다할지라도 (그러나 그 상징사용은 사용된다면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결과가 유효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자체의 완벽한 답변의 자기-계산이, 너무 늦어서 자기-예측으로서 성공할 수 없을지라도, 기계에 의하여 아마도 완수될 수 있는 유일한 경우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A3)(A4)를 사용하기로 결정한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자기-계산은 완전히 불가능해짐이 밝혀질 수 있다: 자기-계산은 늦게 올 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실패할 것이다.

우리가 매우 단순하고 확신적인 심층 전제를 사실상, 부수적 정리나 부명제 도입한다면 이것은 매우 쉽게 밝혀질 수 있다. 이 부명제는, 표준 언어로 된 두 번째 기술의 (두 번째 구멍이 뚫린 테이프) 물리적 상태에 대한 표준 언어로 된 (가령 구멍이 뚫린 테이프의 도움을 받아서) 기술은 두 번째 기술보다 (두 번째 구멍이 뚫린 테이프) 더 짧은 적이 있을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 부명제는, 우리가, 적어도 두 번째 기술의 모든 상징을 (테이프에서 모든 구멍의 위치) 기술해야 한다는 그리고 모든 그러한 기술에는 적어도 한 가지 상징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하여 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부명제가 인정된다면 우리는, 정리(T3)을 부인하여 우리의 전제들의 체계가 틀림없이 일관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음 정리 (T4)를 얻는다.

(T4) 정리 (T3)의 조건들 하에서 Tell이 자체의 업무를 완수하는 데 걸린 시간은 3시간보다 길었다.

증거는, 부명제가 인정된다면, 다시 완전히 간단하다. Tell3시에서의 Told의 상태를 예측해야하기 때문에, Tell(a) Told의 테이프와 별도로 (그 테이프는 우연히도 Told‘0[zero] 상태이다) Told의 상태를, 그리고 (b) Told의 테이프상태를 기술해야 한다. 그러나 그 부명제에 따라서, (b)만에 대한 Tell의 기술은 적어도 기술될 테이프만큼 길 것이다. 그리하여 (a)(b) 모두에 대한 Tell의 기술은 틀림없이 더 길다. (A3)를 고려하여 이것은 그 정리를 확립한다.

이제 (T3)(T4)가 서로 모순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전제 조합은 틀림없이 일관성이 없다. 이것은, (A2)(A3)(A4) 그리고 부명제가 모든 충족된다면 (A1)이나 (B)가 틀림없이 거짓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아가, 예측가가 자체의 계산을 완수하지 못하기, (A1)이 실패하기 때문이거나 혹은 예측가에게 요구된 업무가 제공될 수 없었기, 즉 이 기술이 제공되자마자 자체의 상태에 대한 기술이 제공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측가가 자체의 미래 상태를 예측하지 못할 것임의 의미한다.

이 결과는 물론 부명제 및 (A3)(A4)에 의존한다. 그러나 심지어 부명제 없이도, 그리고 (A3)(A4) 없이도, 나는 예측가가 자기 자신의 미래예측들을 예측할 수 없음을 적어도 예측된사건이 실제로 발생했기 전까지는 할 수 없음을 밝혔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닌 지식의 미래 성장을 예측할 수 없다.

 

 

23. 과학적결정론에 대한 반증.

우리는, 라플라스적 악마의 능력들을 포함하여 가장 단순한 기계적 원리들로써 움직이는 예측가를 다시 말해서, 결정론적 특성이 의문의 여지없이 수용되는 물리적 체계를 대표하는 예측가 - 구축하는 일이 틀림없이 가능하다할지라도, 자기-예측이 불가능함을 증명했다.

그리하여 우리의 증거는, 물론 결정론을 반증하는 데 사용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증거는 과학적결정론을, 그리고 그 결정론과 함께 과학적 결과들에, 혹은 과학이 성공적이라는 사실에 결정론적 견해들을 근거시킨다는 여하한 주장을 반증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이유인즉 자기-예측이 불가능하다면, 분명히 예측가는 자기 자신의 가까운 환경에, 즉 자신이 눈에 띄게 영향을 미치는 자신의 환경의 저 부분에 미치는 자기 자신의 움직임들의 효과들을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내부로부터의 예측이 선택될 여하한 정확도로도 수행될 수 없음을, 그러나 단지 예측가와 예측가의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이 무시될 것인 한에서만 수행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결과는 과학의 성공에 의하여 증명된다: 우리는 과학적 예측의 방법을 예측과정을 통하여 전혀 영향을 받지 않거나 혹은 가볍게만 영향을 받는 체계들에만 적용한다. 다른 한편으로, ‘과학적결정론은, 원칙적으로 우리가 내부로부터 우리의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가 선택하는 정확도로써 예측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우리의 세계 안에 있기 때문에, 이 교설은 자기-예측의 불가능성의 결과인 내부로부터의 독단적으로 정확한 예측의 불가능성에 의하여 반증된다.

이 결과는, 이 모든 예측가들이 문제의 체계 안에 있다면, 하나 이상의 예측가로써 작동하려는 모든 시도에 의하여 흔들릴 수가 없다: 우리의 1번이 아닌 예측가는 1번의 난제들을 예측할 것이다; 1번이 처한 상태들; 그리고 체계의 나머지에 미치는 1번의 영향력; 그러나 그 예측가는 자체의 영향력을 (예를 들어, 1번에 미치는) 예측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상호작용하는 예측가들의 모임 한 가지 복잡한 예측가로서 공식적으로 고찰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얻은 결과는 여하한 정도의 복잡성을 지닌 예측가들에게도 유효하다.

과학적결정론에 대한 반증은 사실상 논리학의 사용만을 통해서 진행되기 때문에, ‘과학적결정론은 자기-모순적 교설로 판명된다. 그리하여 과학적결정론을 증명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그럴 듯한 결정론적 과학에 대한 매력은, 아무리 완벽하다할지라도, 결정론에 관한 여하한 다른 형태도 지탱할 수 없다. 그리하여 칸트가 지녔던 근심은 불필요했다; 그리고 어떤 철학자도, 과학의 성공에 근거하여 (경험적이든 선험적이든) 결정론으로부터 출현하는 칸트의 윤리적 신념들에 대한 난제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과학적결정론에 대한 우리의 반증은, ‘과학적결정론을 우리의 비판이 손대지 않은 세 번째 해석본에 의하여 갈음될 여지를 남겨놓는 듯이 보일 것이다. (12절에서 토론된 두 가지 해석본들을 고려하여 나는 그것을 세 번째 해석본이라고 부른다.) 이 세 번째 해석본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예측될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그 체계에 대하여 충분히 완벽한 기술이 (자연법칙들과 함께) 예측을 논리적으로 수반한다는 의미에서 그 체계의 상태에 의하여 사건이 결정되었음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의미에서 모든 물리적 체계는 예측가능하다. 이 예측이 사전에 항상 계산될 수 있다는 사실은 논리적 상황에 영향을 미치지 우리의 증거에서 우리가 결정론적인 체계를 전제했다는 사실로부터 알려질 것처럼 않는다. 그리하여 나의 증거는 자체의 목표를 성취하지 않는다고 언급될 것이다.

이 비판에 대한 나의 답변은 그 비판이 나의 요점을 놓친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반증될 수 없는 결정론을 반증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과학적결정론이라고 불렀던 것을 반증하고 싶다. 그렇게 하면서 여기에 언급된 세 번째 해석본을 내가 반증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적 예측들의 실제적 성공을 언급하여 이 성공이, 원칙적으로 우리가 예측들을 향상시켜 그 예측들을 우리가 원하는 만큼 정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전제를 정당화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나는 반증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과학적결정론뿐만 아니라, 결정론이 (‘과학적결정론이라기보다는) 과학적 경험에 의하여 정당화된다고 그리고 결정론은 합당한 사실로부터의 추론일 따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또한 반증하고 싶다. 이 매우 중요한 결정론에 대한 논증이 심지어 결정론적 세상에서도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나는 그 논증을 반증했다. 이 논증이, 자체의 의도에 의해서도, 제시된 세 번째 해석본과 같은 다른 형태의 결정론과 틀림없이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이 결정론의 이 세 번째 해석본이 참이라거나 세상에는 이 세 번째 해석본의 의하여 기술된 종류의 구조가 있다고 믿을 어떤 이유가 우리에게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책임가능성의 문제가 이 세 번째 해석본을 배척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믿을 충분한 근거가 있다. 체계의 상태에 대하여 충분히 상세한 참인 기술이, 자연법칙들과 함께, 예측을 수반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 자료들이 존재한다는 전제에 심지어 근거하여 우리의 예측에 대하여 어떤 자료가 필요할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예측업무의 해결책을 수반하기에 충분한 자료를 우리가 수집할 수 없다고 믿을 충분한 근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네 번째 해석본을 도입함으로써 답변될 수 있을 것이다: 참이고 충분히 상세한 기술은, 이용가능하다면, 여하한 예측업무에 대한 해결책을 항상 수반할 것이라는 점.

그러나 이 네 번째 해석본이, 적어도, 완전히 형이상학적임은 분명하다. 네 번째 해석본은, 원칙적으로 반증될 수 없는 존재적 전제로써 작동한다: 우리가 획득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참인 기술의 존재에 대한 전제.

요컨대, 매우 단순한 기계적 세상이 논리적으로 가능하게 보이기 때문에 순수한 논리를 통하여 반증될 수 있어 보이지 않는 세 번째 해석본을 반증하는 것은 여기서 나의 목적이 아니었다. 나는 목적은 단순히, 과학적 예측의 의심받지 않는 성공이 결정론적 우주론을 지지하는 논증으로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었다: 우리의 세상세 번째 해석본에 의하여 제시되는 특성을 지닌다는 추측을 지지하는.

 

과학적결정론이 여기서 반증된 방식은 내가 보기에 절대적으로 흥미롭다. 그 방식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미래행동들에 관하여 과학적 예측들로써 우리의 결정들을 우리가 갈음할 수 없다는 것을 (이런 종류의 예측들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밝힐 뿐만은 아니다; 그 방식은 또한, 비결정론에 대한 결정적인 논증이 합리적 지식의 존재 자체라는 것을 밝힌다. 우리가 엄격한 자연법칙들이라기보다는 우연에 종속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진보적인 합리화에는 세상의 지식의 그물로 잡으려는 시도 세상에 속하는 물론 과정이기도 한 지식 자체의 성장에는 어느 순간에라도 한계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로운’ (혹은 여러분이 부르고 싶어 하는 여하한 것) 것이다.

어떤 사전지식이 없는 이성적 행동은 적어도 과학적이고 가설적인 종류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행동에 대한 다시 말해서, ‘자유로운행동에 대한 - 여지를 남겨놓을 정도로 제한된 것으로 판명되는 것은 이 바로 동일한 사전지식이다.

 

 

24. 성 아우구스티누스, 데카르트의, 그리고 홀테인(Haldane)의 논증.

내가 보기에 과학적결정론에 대한 우리의 반증에는 J.B.S. 홀데인(Haldane)의 논증들 중 한 가지 논증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 유사하지만 다소 더 약한 논증들이 데카르트와, 그리고 훨씬 앞서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여 주창되었다.

논쟁의 요점은, 데카르트의 해석본으로, 진리에 대한 비판적 이해와 논증에 대한 합당한 평가는 (기록하는 기계의 반응이라기보다는) 틀림없이 우리들 행동들 중 자유롭고, 자발적인 우리들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실수와 편견에서의 인내는 그리하여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는 데나 혹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거부하는 데 가령 수용된 가르침에 의하여 무비판적으로 자신이 결정되어 교화(indoctrination)의 영향 하에 남아있는 것을 허용하는 데 놓여있을 것이다.

유사한 개념이 홀데인에 의하여 탁월하고도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확실히 결정론에 대한 비판으로서가 아니라 유물론에 대한 비판으로서. 홀데인이 서술하는 바, ‘나는 내 자신이 유물론자가 아닌데 왜냐하면 유물론이 참이라면 내가 보기에 우리가 유물론이 참이라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견해들이 나의 두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화학적 과정들의 결과라면, 그 견해들은 논리의 법칙들이 아니라 화학의 법칙들에 의하여 결정된다.’ 여기서 홀데인이 비판하는 것은 유물론에 대한 개념뿐만 (역사적으로 과학적결정론의 가장 중요한 해석본인) 아니라 오히려 과학적이라는 개념 자체이기도 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역학과 화학의 법칙들을 언급하든 아니면 일반적인 자연법칙들을 언급하든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은 동일하다: 나의 견해들이 자연법칙들과 초기조건들에 의하여 완벽하게 결정된다면, 그 견해들은 논리의 법칙들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는다. (여기서, 그리고 홀데인이 쓴 구절에서 논리는 공식적인 논리뿐만 아니라 논증기법과 같은 것과 증거를 합리적으로 무게 재는 기법과 같은 것을 또한 의미한다.)

홀데인의 논증에 반대하여, 기계적인 계산 기계는 자체의 작동에서 물리학의 법칙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우리는 전제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의 법칙들에 따라서 작동할 수 있다고 언급될 것이다. 또한 경험적 증거를 수집하여 그 증거를 토대로 작동하는 기계들을 구축하는 데 어떤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스스로-등록하는 온도계는 관찰적인 증거를 수집하고 여하한 온도계도 그런 증거를 토대로 작동한다.) 이것은 홀데인의 논증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겉으로 보이는 반증은 요점을 놓친다. 아무튼 그 논증은 얼마 전에 발표한 유사한 논증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나의 논증은 인간 언어의 네 가지 다른 기능들에 대한 구분에 근거한다: (1) 표현적 기능(expressive function), 즉 유기체의 상태에 대하여 징후적으로 고려되는 언어; (2) 신호 기능(signal function), 즉 다른 유기체들 안에서 반응들을 자극하는 것으로 고려되는 언어; (3) 기술적 기능(descriptive function), 즉 상황의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상태들을 기술하는 것으로 고려되는 언어 그리고 (4) 논증적 기능(argumentative function), 즉 이성적 비판의 수단으로서 (예를 들어 단순한 반대-주장에 대한 반대로서) 고려되는 언어. 처음 두 가지 기능은 또한 모든 동물언어들이 지닌 기능들이다. 마지막 두 가지 기능들은 고등(higher)’ 기능들이라고 표찰이 붙을 것이다; 그 기능들은 이나 거짓 기술이라는 그리고 유효하거나 무효한 논증이라는 개념을 낳는다. (나는 우리가 언어의 심층적 기능들을 처방적(prescriptive)이거나 충고적(advisory)이거나 혹은 촉구적인(exhortative) 기능들과 같은 - 구분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주장은, 간단하게, 이렇다. 표현이나 신호 또한 없이 우리는 물론 기술하거나 논증할 수 없다. 그러나 기술적 및 논증적 기능들은 두 가지 하위 기능들을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하위 기능들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으로써 나는, 기술하기가 자신을 표현하는 그리고 신호하는 특별한 방식이라고 우리가 말할지라도 기술하기는 이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기술의 진실성은 가령 표현의 적절성이나 자극에 대한 반응의 적절성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술하기는 또한 특정 상황에 대한 신호의 적절성과 혹은 그 상황에 합당한 반응을 일으키는 신호의 적절성의 효율성과 다르다. 왜냐하면 기술은 속이려는 혹은 가장하려는 의도로 작성되었다할지라도, 사실상 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술을 누구도 믿지 않았다할지라도, 그리고 기술이 적절한 반증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을지라도 기술은 사실상 사실일지도 모른다.

논증적 기능은, 모든 논증들이 표현하고 신호할지라도, 두 가지 하위 기능들로 표현하기와 신호하기 동일하게 환원될 수 없다. 왜냐하면 논증의 유효성은, 가령 자체가 지닌 설득적 효율성으로 환원될(효율적인 신호하기에 대한 환원일) 수 없기 때문이다; 유효한 논증은 어떤 사람을 설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무효한 논증들이, 여러 세기동안, 많은 사람들을 설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하여 기술이나 논증은 표현이나 신호만은 아니다. 그러나 자연법칙들을 통한 언어의 결정론적 이론은 이 두 가지 하위 기능들만을 설명할 수 있다: 그 이론은 모든 언어를 징후적으로서, 그리고 모든 언어에 대한 반응들을 신호들에 대한 반응들로서 틀림없이 상상한다. 기계의 도움을 받는 어떤 이론도 동일하게 그렇다. 계산하는 기계는 받는 신호들에 반응한다; 그리고 그 기계가 계산하는 결과들은 그 기계의 내부 상태에 대한 표현들이거나 징후들이다. ‘과학적결정론의 관점에서 그 결과들은 다른 것이 될 리가 없다. 계산이나 논증의 유효한 방법을 사용하는 기계와 무효한 방법을 사용하는 기계 사이의 차이점은, 자체를 과학적결정론의 인과적 접근방식에 국한시키는 어떤 이론의 지평도 초월한다.

과학적결정론은 그리하여 언어의 고등하등기능들 사이의 차이점을 무시하거나 혹은 고등 기능들을 하위 기능들로 환원하는 가능성을 주장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특히 두 가지 방법들 모두는 논증의 기능과 구조를 공정하게 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수용될 수 없다.

이 견해들에는 내가 보기에 데카르트와 홀데인의 추론이 지닌 기묘한 형이상학적 즉, 인신공격성(ad hominem) 특징이 없다; 그 견해들은 언어에 대한 비-형이상학적 이론의 부분들로서, 합리적인 근거들을 토대로 자세하게 옹호될 수 (나에게는 여기서 그렇게 할 의도가 없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견해들로 인하여 나는 데카르트와 홀데인의 논증들과 유사한 논증들을 주목했다: 두 가지 고등 기능들은 행동주의,... 부수현상설(epiphenomenalism), 물심평행론(psycho-physical parallelism), 두 가지-언어 해결책들(the two-language solutions), 물리주의 그리고 유물론과 같은 철학들에 의하여 다시 말해서, ‘물리적 세상에 대한 인과적 완벽성을유지하려고 애쓰는 이론들에 의하여 설명될 수 없다고 주장한 후에, 나는 다음과 같이 부언하였다: ‘이 모든 것들은 논증들의 비-존재를 확립하는 한 물론 비의도적으로 자멸한다. 분명히, ‘과학적결정론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언급될 것이다. 세상을 예측하려는 인간 이성의 힘으로부터 인간 이성이 원칙적으로 무한한 것으로 상상하는 힘 시작하여 과학적결정론은 자체의 결론에서 이성적 논증에 대한, 진실과 거짓 사이의 식별에 대한, 세뇌와 학습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이것이 정확하게 홀데인의 요점이다. 그것은, ‘과학적결정론이 참이라면 우리는 이성적인 방법으로 그 결정론이 참임을 알 수 없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그 결정론을 믿거나 아니면 믿지 않지만 우리가 그 결정론을 선호하는 논증들이나 근거들이 건전하다고 자유롭게 판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 결정론을 믿거나 믿지 않도록, 심지어 우리가 그 결정론을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수용한다고 믿도록 우연히 결심하기 (그렇게 세뇌당하기) 때문이다.

이 다소 이상한 논증은, 물론, ‘과학적결정론의 교설을 반증하지 않는다. 그 논증이 유효한 것으로서 수용된다할지라도, 세상은 여전히 과학적결정론에 의하여 기술될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결정론이 참이라면 우리는 그 결정론을 알 수도 없고 이성적으로 토론할 수도 없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홀데인은 과학적결정론이 유래하는 개념에 대한 반증을 제시했다. 그는 그 교설을 완전히 반증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 교설을 자체의 철학적 배경과 관련하여 확실하게 반증했다. 그는 말하자면 그 교설의 정신에서 그 교설을 반증했는데 그 정신이란 이성주의나 과학적 인본주의의 정신이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과학적결정론이 합리성을 망상으로 환원한다는 것을 밝혔기 때문이다. ‘과학적결정론은 인간 이성에 대한 과도하게 낙관적인 견해를 스스로 반증함을 수반한다.

자기-예측의 불가능성으로부터 나온 나의 논증은 앞 절들에서 토론되었는데 홀데인의 논증과 함께 다음을 공유한다: 그 두 가지 논증들은 합리성이라는 개념으로써 작동하여, 합리성을 미리-결정된 것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예측될 수 있는 것으로서 간주하는 데 논리적인 어려움이 있음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다른 면들에서, 두 가지 논증들은 다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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