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장
확률에 관한 객관적 이론들에 대한 언급.
이 장(章)에서 나는 확률에 관한 빈도 이론이 경향 이론에 의하여 그리고 또한 흔히 지금 지칭되는 바와 같이 ‘척도-이론적 접근방식(measure-theoretical approach)’에 의하여 대체된 방식을 설명할 것을 제안한다. 나는, 이 접근이 빈도 이론을 대체한다할지라도, 그 접근방식이 빈도 이론에 일종의 사후(死後)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것을 밝히려고 노력할 것이다; 왜냐하면 빈도 이론은 척도-이론적 접근방식으로부터 ‘거의 연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척도-이론적 접근방식 안에서, 폰 미제스(von Mises)의 빈도 이론의 요건을 위반하는 무작위 수열을 우리가 우연히 떠올릴 확률이 0임이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요건들이 충족될 것임은 ‘거의 확실하다.’
이 새로운 접근방식의 주요점은 척도-이론적 확률 서술들이 단칭 확률 서술들이라는 사실에 놓여있다: 우리가 ‘단칭 확률’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주장할 서술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빈도를 ‘거의 수반하는’ 단칭 확률은 물리적 경향으로서 가장 잘 해석될 수 있다. 그리하여 빈도에서 척도 이론으로의 수학적 천이(遷移)는, 내가 제안하는 바, 객관적인 물리적 확률들에 대한 통계적 해석에서 경향 해석으로의 천이(遷移)에 해당한다.
나는 이 장(章)을 경향 해석을 더 완벽하게 설명하는 절(節)과 경향 이론을 채택하는 이유들로써 시작한다. 그러나 주로 이 장(章)은 1934년 이래 확률에 관한 빈도 이론의 발전들 중 몇 가지에 관한 역사적 언급들로 구성되는데 그 언급들은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그렇게 두드러진 역할을 했고 더욱 특히 폰 미제스의 일관성 문제들과 관련해서이다. A. H. 코플랜드(Copeland)와 나의 전제들이 (내가 최소한으로 축소하려고 노력했던) 1935년에 A. 왈드(Wald)에 의하여 강화되었음이 밝혀지는데 A. 왈드는 폰 미제스(von Mises)의 이론만큼 개략적으로 강력한 한 이론이 일관적이었음을 밝히는 데 최초로 성공했다. 왈드의 이론은 A. 처치(Church)에 의하여 심층적으로 강화되었는데 A. 처치는 1940년에 어떤 효과적으로 계산 가능한 도박 체계에 (혹은 도박 체계들의 집합) 따라서도 선택들에 무감각한 집단들의 C 집합의 일관성이나 비-공허함(non-emptiness)을 확립했다. 이런 상황 전개는 내가 보기에 매우 만족스러운 빈도 이론이 자립할 수 있음과 상황이 우리에게 척도-이론적 접근방식을 채택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님을 확립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중요하다; 우리가 그런 상황 전개의 우수한 장점들 때문이 그런 상황 전개를 자유롭게 채택할지라도. 게다가 우리가 심지어 무한한 수열들 속의 빈도들에 대하여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급할 것임을 안다는 것은 소중하다; 왜냐하면 빈도 예측들은 - 경향 가설들로부터 ‘거의 귀결되는’ - 우리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단지 예측된 빈도들로 인해서만 우리는 이 가설들을 시험할 수 있다.
20. 경향들의 경우.
확률의 주관적 해석은 아마도 어떤 도박 상황들에 대한 - 예를 들어 경마 - 해석으로 옹호될 수 있을 것인데 그 해석 안에서 사건에 대한 객관적 상황은 잘못-정의(定義)되고 재생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그 해석이 심지어 이와 같은 상황들에도 적용 가능하다고 실제로 믿지 않는다: 강력한 사례가 - 만들 가치가 있다면 - 도박꾼이나 ‘합리적 내기꾼’이 내기를 걸기 위하여 알아내려고 하는 것은 객관적 상황, 객관적 경향들, 객관적인 사건의 공산이라는 견해에 대하여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말에게 내기를 거는 사람은 - 자기 자신의 믿음 상태에 관해서나 혹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논리적 힘에 관해서라기보다는 - 말들에 관해서 더 많은 정보를 얻고자 노심초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우연의 게임에서 - 가령 룰렛이나 주사위나 동전던지기 - 그리고 모든 물리적 실험들에서,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주관적 해석은 완벽하게 실패한다. 왜냐하면 이 모
든 경우에서 확률들이 실험의 객관적 상황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나는 한 가지 객관적인 확률 해석만 - 순전히 통계적이거나 빈도 해석 - 고찰했다. (나는 이 두 가지 명칭이 같은 명칭이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나는 이 해석에 반대하여 통상적으로 진행된 모든 비판들을 참고함으로써 이 해석을 재구축하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나는 두 번째 개관적인 해석이자 더 나은 해석이 - 경향 해석 - 있다고 제안하고 싶다. 나의 제안은 빈도 이론에 대한 통상적인 비판 중 어떤 비판도 정당화된다는 믿음에 의하여 동기화되지 않는다. 반대로 나는 빈도 이론의 일관성을 의심하지 않으며 나는 빈도 이론을 이용하여 작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경향 이론이 결정적으로 선호될 수 있다고 또한 믿는다. 이것을 믿는 나의 근거들 중 몇 가지 근거는, 다른 근거들이 나중을 위하여 남겨질 것인 반면, 현재의 절에서 토론될 것이다.
이 절에서 토론은 ‘단칭 사건들(singular events)’ (혹은 발생들)의 확률을 해석하는 문제에만 국한될 것이어서, 내가 여기서 경향 해석과 대조적으로 확률에 관한 빈도 해석을 언급할 때마다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단칭 사건들에 대한 확률의 빈도 이론이다.
빈도 해석의 관점에서 어떤 종류의 사건의 - 특별한 주사위를 사용하여 6을 얻는 것과 같은 - 확률은 극단적으로 긴 (아마도 무한한) 사건의 수열에서 이런 종류의 사건의 상대적 빈도일 따름이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이 주사위를 사용하여 우리가 오늘 아침 아홉시 이후에 던져진 세 번째 던지기에서 6을 얻는 확률과 같은 단칭 사건의 (다시 말해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의 23절의 의미에서 ‘발생’; 또한 71절 참조) 확률에 대하여 말한다면, 순전히 통계적 해석에 따라서 우리에게는 이 세 번째 던지기가 던지기들의 수열의 한 구성으로서 간주될 것이고 이 수열의 구성으로서 자체의 역량에서 저 수열의 확률들을 공유한다고만 말할 의도가 있다; 다시 말해서 저 수열 내부에서 상대적 빈도들에 지나지 않는 확률들.
현재의 절에서 나는 확률 해석에 관한 객관적인 실험적 조건의 중요성에 관한 이전 장(章)에서 도달한 결과들을 이용함으로써, 이 해석에 반대하여, 그리고 경향 해석에 찬성하여 논증할 것을 제안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진행할 것을 제안한다. (1) 나는 먼저 빈도 해석의 관점에서 경향 해석을 수용 불가능하게 만드는 듯이 보이는 경향 해석에 반대하여 틀림없이 반대론들이 제기된다는 것을 밝힐 것이다. (2) 나는 그 다음에 이 반대론들에게 임시적인 답변을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다음에 요점 (3)으로서, 처음에 제기되었을 때는 심각한 난제처럼 보이지 않을지라도, 빈도 해석이 직면해야 하는 어떤 난제를 제시할 것이다. (4) 마지막으로 나는 이 난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빈도 해석은 처음 보기에 사소하게 보이는 수정을 채택할 수밖에 없음을 밝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겉으로 보기에 사소한 수정은 경향 해석의 채택에 해당하는 것으로 밝혀진다.
(1) 순전히 통계적인 확률에 대한 해석의 관점에서 경향 해석이 수용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경향들은 자체들을 실현하는 경향들이나 의향들로 부여된, 그리고 경향들이 실험이 반복되는 긴 수열에서 사실상 스스로 실현되는 통계적 빈도들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으로 고려되는 가능성들로서 (혹은 가능성들에 대한 척도들이나 ‘무게들’로서) 설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경향들은 어떤 수열들의 통계적 특징들을 우리가 설명하여 예측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도입된다; 그리고 이것이 경향들의 유일한 기능이다. 그리하여 (빈도 이론가가 주장할 것이다) 경향들로 인하여 우리는, 단칭 사건의 반복이 동일한 조건 하에서 어떤 통계적 특징들을 지닌 수열을 생성할 것임을 제외하고, 단칭 사건에 대한 여하한 것도 예측하거나 말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경향 해석이 새로운 단어와 - ‘경향’ - 그 단어와 결합되는 새로운 심상이나 은유를 - 경향이나 의향이나 충동의 새로운 심상이나 은유 - 제외하고 빈도 해석에 아무것도 추가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의인화적(擬人化的: anthropomorphic)이거나 심리적 은유들은, ‘힘(force)’과 ‘에너지’의 옛 심리적 은유들이 자체의 원초적인 형이상학적이고 의인화적(擬人化的: anthropomorphic) 의미를 상실하는 정도까지만 유용한 심리적 개념들이 된 ‘힘(force)’과 ‘에너지’의 옛 심리적 은유들보다 훨씬 덜 유용하다.
이것이 개략적으로 빈도 이론가들의 견해일 것이다. 경향 해석을 옹호하여 나는 두 가지 다른 논증들을 이용할 작정이다: 임시적 답변 (2)이자 형세를 역전시켜 빈도 이론가들을 이기려는 시도에 해당하는 논증; 이것은 (3)과 (4)에서 토론될 것이다.
(2) 임시적 답변으로서 나는 경향이라는 개념과 힘이라는 개념 - 특히 힘의 장(場) -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는 제안을 수용하고 싶다. 그러나 ‘힘’이나 ‘경향’이라는 표찰이 모두 심리적이거나 의인화적(擬人化的: anthropomorphic) 은유들일지라도 두 가지 개념들 사이의 중요한 유사점은 여기에 놓여있지 않다; 그 유사점은, 더 정확하게, 두 가지 개념 모두 물리 세계의 관찰될 수 없는 의향적 특징들에 주목하여 물리 이론의 해석에서 도움을 준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여기에 그 개념들의 유용성이 놓여있다. 힘의 개념은 - 혹은 훨씬 더 낫게 힘의 장(場) 개념 - 관찰 가능한 가속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어떤 등식에 의하여 (은유들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기술된 의향적인 물리적 존재를 도입한다. 유사하게 경향이나 경향들의 장(場)이라는 개념은 관찰 가능한 빈도들을 이 사건들의 반복들의 수열들로 설명하기 위하여 단칭 물리적인 실험적 배열들의 - 다시 말해서 단칭 물리적 사건들의 - 의향적 속성을 도입한다. 두 가지 모두의 경우에 새로운 아이디어의 도입은 물리 이론에 대한 자체의 유용성에 호소함으로써 정당화될 수 있다. 두 가지 개념 모두는 버클리(Berkeley)의 의미에서 ‘초자연적’이거나 혹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개념들의 유용성의 한 부분은 그 개념들이, 이론은 관찰 불가능한 물리적 실체의 속성들과 관련되는 것과 우리가 관찰할 수 있고 그리하여 우리가 이론을 시험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은 이 실체의 훨씬 더 표면적인 효과들 중 단지 몇 가지 효과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에 정확하게 놓여있다. (위 11절에서 15절 참조.) 경향 해석을 지지하는 주요 논증은 양자 이론으로부터 어떤 비합리적이고 주관주의적인 특성을 지닌 방해하는 요소들을 - 경향들보다 더 ‘형이상학적’이고, 게다가, 단어의 나쁜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인 요소들 - 제거하는 자체의 힘에서 발견될 수 있다. 경향 해석이 판단되어야 할 것은 이 적용 분야에서 그 해석의 성공 혹은 실패에 따라서이다.
이 임시적 답변을 하고 나는 경향 해석을 선호하는 나의 주요 논증으로 나아간다. 나의 논증은 빈도 해석이 틀림없이 마주칠 어떤 난제들을 지적하는 데 놓여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위에 선언된 요점 (3)으로 온다.
(3) 많은 반대론들이 확률에 관한 빈도 해석에 반대하여 제기되었는데 특히 사건들의, 그리고 상대적 빈도들의 한계들의 무한 수열들이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그렇다. 나는 여기서 이 반대론들을 언급하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 반대론들이 다음 절에서 토론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반대론들은 주로 무효한 것으로 밝혀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바, 이런 형태로 이전에 제기되지 않는 간단하고도 중요한 반대론이 있다
우리에게 무게가 실린 주사위가 있다고, 그리고 우리는 긴 실험을 연속적으로 수행한 후에 이 무게가 실린 주사위를 사용하여 1/4에 매우 근접하는 6을 얻는 확률을 우리 스스로 충족했다고 상정하자. 이제 가령 이 무게가 실린 주사위를 사용하는 던지기들로 구성되지만 동질이면서 대칭적인 주사위를 사용한 몇 번의 던지기로 (2회나 혹은 아마도 3회) 구성되는 수열 b를 고려하라. 분명히 이 공정한 주사위를 사용한 몇 번의 던지기 각각에 관하여, 이 던지기들이 우리의 상정에 따라서 통계적 빈도 1/4를 지닌 던지기들의 수열의 항들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두 세 번의 던지기는 긴 수열의 1/4 빈도에 도저히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6이 나올 확률은 1/4이라기보다는 1/6이라고 우리는 말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간단한 반론이, 다양한 가능한 답변들이 있을지라도, 결정적이라고 믿는다.
지나가는 길에서만 한 가지 답변이 언급될 필요가 있는데 이유인즉 그 답변은 확률의 주관주의적 해석에 의지하려는 시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 답변은 확률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가 지닌 특별한 지식이자 공정한 주사위를 사용한 이 던지기들과 관련하여 우리가 지닌 특별한 정보라는 주장에 해당된다. 나에게는 주관적 이론에 대한 나의 일반적인 토론을 고려하여 이 답변이 정당화되지 못했다고 내가 생각한다는 것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우리 앞에 놓인 사례는 이 주관적 이론에 반대한 심층적 논증을 암시한다 (비록 그다지 중요한 논증이 아니라할지라도). 왜냐하면 단지 두 세 번의 그런 던지기들이 있음을 우리가 알지라도, 우리는 어느 던지기들이 올바른 주사위를 사용하여 수행되는지를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우리가 조건들을 확인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이 조건들에 근거하여 우리가 내기들을 수용하지 않을 두 세 번의 던지기가 있을 것임을 우리가 정말로 알지라도, 1/4에 매우 근접하는 확률에 근거하여 내기를 거는 것이 (우리가 상당한 숫자의 던지기들에 근거하여 내기를 걸기로 결심한다면) 전적으로 합당할 것이다. 이 던지기들의 경우에 6이 나올 확률은 1/4의 미만, 다시 말해서 사실상 1/6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던지기들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과 그 던지기들의 영향력이, 내기들의 숫자가 크다면, 틀림없이 매우 작을 것임 우리는 또한 안다. 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미지의 던지기들에 1/6의 확률을 귀속시키면서 ‘확률’이라는 단어로써 ‘우리가 지닌 전체적인 실제 지식에 비춘 합리적인 내기 지수’를 의미하지 않고 그 단어로서 그 지수를 도저히 의미할 수도 없다는 것은 (주관적 이론이 그러한 바와 같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제 주관적 이론은 밀쳐놓자. 우리의 반론에 대한 답변으로 빈도 이론가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 자신이 여러 해 동안 빈도 이론가였기에 내 자신의 답변이 다음 방향들을 따라서 진행되었음을 나는 상당히 잘 알고 있다.
수열 b에 대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기술(記述)은 b가 무게가 실린 주사위를 사용한 던지기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공정한 주사위를 사용하면 3을 말함을 보여준다. 우리는 6의 면이 무게가 실린 주사위로써 던지기들의 수열에서 1/4의 빈도로 그리고 공정한 주사위로써 던지기들의 수열에서 1/6의 빈도로 나타날 것이라고 (이전 경험이나 직감을 근거로 - 추측의 ‘근거’가 무엇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추측한다. 이 후자(後者) 수열인 공정한 주사위를 사용하는 던지기들의 수열을 ‘c’로 표시하자. 그렇다면 b의 구성에 관한 우리의 정보는 (i) p(a,b) = 1/4나 혹은 매우 근사하게 그렇다고 우리에게 알려주는데 왜냐하면 거의 모든 던지기들이 무게가 실린 주사위를 사용하기 때문이고 (ii) bc가 - 다시 말해서 b와 c 모두에 속하는 3번의 던지기 집합 - 공집합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bc가 c에 속하는 던지기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6이 나오는 단칭 확률이, bc에 속하는 저 던지기들 가운데서, - 이 단칭 던지기들이 우리가 p(a,c) = 1/6을 경험하는 수열 c의 항들이라는 사실을 통하여 - 1/6일 것이라고 주장할 자격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대체적으로 나의 답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어떻게 내가 이런 종류의 답변에 만족할 수 있었는지 의아한데 왜냐하면 그 답변이 전적으로 불만족스럽다는 것이 내가 지금 보기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두 가지 등식
(i) p(a,b) = 1/4
(ii) p(a,bc) = 1/6의
양립가능성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또한 이 두 가지 경우들이 빈도 이론의 내부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문제도 없다: 우리는, 선택 수열 bc 안에서 - 매우 길고 그 항들이 b와 c 모두에 속하는 실제로 무한 수열 - 등식 (ii)가 충족되는 반면, 어떤 수열 b를 아마도 구축하여 등식 (i)이 충족되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이런 종류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우에서 bc는 실제로 무한수열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제에 따라 bc는 정확하게 3개의 항을 포함한다. bc에서 6은 나타나지 않거나, 한 번, 혹은 두 번, 혹은 세 번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수열 bc에서는 6이 빈도 1/6로 틀림없이 발생하지 않을 것인데 이유인즉 이 수열이 기껏해야 세 가지 항을 포함하고 있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경우에 단지 두 가지 무한하거나 매우 긴 수열들이 있다: (실제적인) 수열 b와 (실제적인) 수열 c. 문제의 던지기들은 두 가지 수열 모두에 속한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는 이렇다. 던지기들이 이 수열들 모두에 속한다할지라도, 그리고 우리는 이 특정 던지기 bc가 b의 내부 어느 곳에서 발생함으로 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어디인지 통보를 받지 않아서 그리하여 그것들을 확인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그들의 경우에 합당하고 참인 단칭 확률이 1/4라기보다는 1/6이라는 것에 조금의 의심도 없다. 혹은 다시 말해서 그것들이 두 가지 수열에 속할지라도, 우리에게는 그것들의 단칭 확률이 수열 b라기보다는 수열 c의 빈도와 동등한 것으로서 추정될 수 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 단지 그것들이 다른 (공정한) 주사위를 사용한 던지기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공정한 주사위를 사용한 던지기들의 수열에서 6이 경우들의 1/6에서 나타날 것임을 추정하거나 상상하기 때문에.
(4) 이 모든 것은 빈도 이론가들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론의 수정(modification)을 - 분명히 매우 사소한 수정 - 도입함을 의미한다. 그는 이제 수용 가능한 사건들의 수열이 (참조 수열, ‘집합체’) 틀림없이 항상 반복되는 조건의 수열이라고 말할 것이다.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 그는 수용 가능한 수열들이 틀림없이 생성하는 조건의 집합에 의하여 - 반복되는 실현이 독립적인 수열의 항들을 생산하는 조건의 집합 - 규정되는 실제적이거나 사실적 수열들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수정이 도입된다면, 우리의 문제는 즉각 해결된다. 왜냐하면 수열 b는 더 이상 수용 가능한 참조 수열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게가 실린 주사위를 사용한 던지기들로 구성된 그것의 저 부분은 (다시 말해서, b
게다가 내가 여기서 ‘수정(modification)’으로 기술한 것은 단지 대부분의 빈도 이론가들이 (내 자신을 포함해서) 항상 당연하게 여겼던 전제를 명시적으로 서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명백하게 사소한 수정을 보다 가깝게 관찰한다면 우리는 그 수정이 빈도 해석에서 경향 해석으로의 천이(遷移)에 해당하는 것을 발견한다.
빈도 해석은 항상 확률을, ‘주어진 것’으로서 전제되는 수열에 상대적인 것으로서 간주한다; 그리고 빈도 해석은 확률은 어떤 주어진 수열의 한 속성이라는 전제를 근거로 작업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수정으로써 수열은 반대로 자체의 생성하는 조건의 집합에 의하여 정의(定義)된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저 확률은 생성하는 조건의 한 속성이라고 이제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하여 매우 큰 차이점이 생기는데 특히 단칭 사건의 (혹은 ‘발생’)의 확률에게 그렇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단칭 사건 a가, 수열 b의 한 항이라는 사실 때문이라기보다는 생성하는 조건 b
물론 빈도 이론가는 확률이 생성하는 조건의 한 속성일지라도, 이 조건에 의하여 생성된 실제적이거나 사실적인 수열 내부의 상대적 빈도와 대등하다고 여전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보다 완벽하게 생각하면 우리의 빈도 이론가가 비의도적으로 경향 이론가로 변했음이 완벽하게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확률이 생성하는 조건의 (가령, 실험적 장치) 속성이라면 그리고 그리하여 그 확률이 이 조건에 의존하는 것으로서 고려된다면 빈도 이론가에 의하여 주어지는 답변은 실제적 빈도가 틀림없이 또한 이 조건에 의존한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그 조건을 확률과 동등한 빈도를 지닌 수열들을 생산하는 경향이나 의향이나 성향이 주어진 것으로서 상상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정확하게 경향 해석이 주장하는 바이다.
우리가 경향에 관해서라기보다는 단순히 가능성에 관해서 언급함으로써 마지막 단계를 - 경향을 생성하는 조건에 귀속시키기 - 피할 수 있다고 아마도 생각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은 경향 해석의 가장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보이는 것을 회피하기를 희망할 것이다: ‘생명력(vital forces)’과 황량한 사이비-설명들이라고 그렇게 자주 언급되었던 유사한 의인화(擬人化: anthropomorphism)에 대한 그것의 직감적 유사성.
가능성들과 관련한 확률의 해석은 물론 매우 오래되었다. 우리는 논증을 위하여, 동등한 가능성들에 관한 확률에 대한 고전적 정의(定義)에 반대하는 잘 알려진 반대론들을 (무게가 실린 주사위의 경우에 의하여 전형이 된), 모든 가능성의 숫자에 의하여 나누어진 호의적인 가능성들의 숫자로서, 억제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정의(定義)가 어떻게 경향 해석과 비교되는지를 알기 위하여 대칭적 주사위들이나 동전들과 같은 경우들에 우리 자신을 국한시킬 것이다.
두 가지 해석에는 공통성이 많다. 두 가지 해석 모두는 주로 단칭 사건들을, 그리고 각각의 사건이 발생하는 조건에 내재적인 가능성들을 언급한다. 그리고 두 가지 해석 모두는 이 조건을 원칙적으로 재생 가능하여 사건들의 수열을 낳을 것으로서 간주한다. 차이점은 단지 다음 것에 놓여있는 듯이 보인다: 다른 한 가지 해석이 단지 조건의 물리적 대칭들을 - 조건에 의하여 개방상태로 남겨진 동등한 가능성들 - 언급할 따름인 반면, 한 가지 해석은 저 반대할만한 형이상학적 경향들을 도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치는 단지 겉으로만 그렇다. 가능성들만은 우리에 목적에 - 혹은 물리학자나 도박꾼의 목적 - 부적당한 것과, 심지어 고전적 정의(定義)도 문제의 가능성들을 실현하는 동등한 의향들이나 경향들이나 성향들이 동등한 가능성들에 부착되어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알기 어렵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먼저 0에 매우 근접하는 균등-가능성들을 고찰하면 쉽게 밝혀질 수 있다. 0에 매우 근접하는 균등-가능성의 사례는 길이 n의 0들과 1들의 유한 수열의 확률일 것이다: 2
그러나 0에 근접하고 1에 근접한 가능성들이 예측들로서 - ‘거의 발생한 적이 없’고 그리고 ‘거의 항상 발생하는 것’ -해석될 수 있음이 인정된다면, 철저하고 예외적이고 동등하다고 전제되는 앞면이나 뒷면을 얻는 두 가지 가능성들은 또한 예측들로서 해석될 수 있다. 그 가능성들은 ‘결국은 경우들의 약 절반에서 거의 확실하게 자체들을 실현하는’ 예측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베르누이의 정리의 (그리고 길이 n의 수열들의 위 사례) 도움을 받아서 1/2 가능성들에 대한 이 해석이, 방금 주어진 0이나 1에 근접한 가능성들에 대한 해석과 논리적으로 대등함을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요점을 다소 다르게 표현하여, 가능성들만으로는 예측이 탄생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진이 내일 북위와 남위 13도 사이의 모든 가옥들을 (다른 가옥들은 아니다) 파괴할 것임은 가능하다. 아무도 이 가능성을 산출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추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단순한 가능성은 예측을 낳지 않는 반면, 그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추정은 기술된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매우 개연적으로’) 예측의 근거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사건이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언급되는 것을 기초로 사건을 거의 예측할 수 없는 반면, 가능성의 척도에 대한 추정은 - 다시 말해서 가능성에 부착된 확률의 추정 - 항상 예측적인 모습을 지닌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러한 상태로서의 가능성이 자체를 실현하는 경향을 지닌다고 상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확률 측정들이나 확률에 귀속되는 ‘무게들’을 자체를 실현하는 확률의 의향, 경향, 혹은 성향으로서 정말로 해석한다; 그리고 물리학에서 (혹은 내기걸기에서) 우리는 추측을 하는 면허로서 확률들에 대한 그런 측정들이나 ‘무게들’에 흥미를 가진다. ‘경향 해석’이라는 표찰을 선택하는 나의 이유는 내가, 확률 이론의 역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쉽게 놓칠 이 요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경향은 의인적(擬人的: anthropomorphic) 개념이라거나 경향은 생명력의 개념과 유사하다는 주장에 의하여 위협을 받지 않는 이유이다. (이 개념에는 정말로 지금까지 쓸모가 없어서 반대할 수 있어 보인다. 그러나 생존 투쟁을 위한 대부분의 생명체의 의향이나 경향이나 성향은 무용한 개념이 아니라 매우 유용한 개념이다; 그리고 생명력이라는 개념의 무용함은 그 개념이,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생존 투쟁을 하는 경향을 보여주면서 자신들의 환경을 조사하는 것과 새로운 생태 환경을 점유하는 것의 경향과 같은 다른 경향들을 개발한다는 주장에 중요한 것을 덧붙이겠다고 약속하지만 덧붙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듯하다.)
요컨대 경향 해석은, 확률들은 긴 (사실적 혹은 실제적) 수열들에서 상상되거나 추정된 통계적 빈도들이라는 견해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제시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열들이 자체의 항들이 생성되는 방식에 의하여 - 다시 말해서 생성하는 조건에 의하여 - 정의(定義)된다는 사실에 주목함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상상된 확률들을 이 생성하는 조건에 귀속시키게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밝힐 수 있다: 우리는 그 확률들이 이 조건에 의존한다는 것과 그 확률들이 조건에 따라서 변할 것임을 인정하게 된다. 빈도 해석의 이런 수정으로 인하여 거의 불가피하게 확률들은 이 조건의 - 다시 말해서, 경향들 - 의향적 속성들이란 상상이 탄생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단칭 사건의 확률을 실제적이거나 관찰된 빈도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상상된 잠재적이거나 사실적 통계적 빈도에 의해서 측정되는 단칭 사건 자체의 속성으로서 해석할 수 있다.
모든 의향적 속성들처럼, 경향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잠재성들에 어떤 유사성을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가 아마도 생각하고 싶을 것과 같이 경향들은 개별적 물체들 안에 내재할 리가 없다. 경향들은 주사위나 동전 안에 내재하는 속성들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사실적이라 할지라도 다소 더 추상적인 것에 내재한다: 경향들은 전체 객관적인 상황의 관계적 속성들이다; 상황에 대한 그 정확한 의존을 우리가 상상만 할 수 있는 숨겨진 상황의 속성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상상을 시험하고 싶어 한다면 사건의 모든 반복에서 조건들을 불변하게 유지함으로써 우리는 관련성 상황을 불변하게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경향들은 다시 힘이나 힘의 장(場)을 닮는다: 뉴튼의 힘은 사물의 속성이 아니라 최소한도 두 가지 사물의 관계적 속성이다; 그리고 물리적 체계에서 실제적인 결과적 힘들은 항상 전체 물리적 체계의 속성이다. 힘은, 경향처럼, 관계적 개념이다.
이 경향의 (가령, 실험적 장치들의) 관계적 모습은 우리가 쉽게 놓칠 모습이다: 우리는 던지기의 절반에서 앞면이나 뒷면이 나타날 경향이 동전의 내재적 속성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경향이 동전의 속성이 아니라 동전 던지기의 속성이라는 사실과 완전히 별도로 우리가 가령 테니스장보다는 부드러운 모래나 진흙의 표면에 (동전이 꼿꼿이 서게 될 수 있는 곳) 동전을 떨어뜨린다면 우리는 우리가 더 낮은 확률들을 얻음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가장 간단한 경우들에도 고려될 몇 가지 실험적 조건이 있을 것임을 보여준다.
이 결과들은 ‘p(a,b)’에서 b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분석의 결과들을 - 두 번째 논증 - 뒷받침하고 그 결과들에 의하여 뒷받침 된다; 그리고 그 결과들은, 우리가 ‘b’를 사건들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 수열의 이름으로서 해설할지라도, 우리가 모든 가능한 수열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용될 유일한 수열들은 어떤 가능한 결과들을 생성하는 조건의 반복으로서 기술될 것이어서 그 결과들의 생성 방법에 의하여, 다시 말해서, 실험적 조건을 생성하는 집합에 의하여 규정될 수열들이다.
나의 논증들을, 특히 현재 절의 나의 논증들을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나의 논증들이 아마도 의미 분석의 방법을 예시하는 것으로서 생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 것이나 하려고 했던 것은 ‘경향’이라는 단어가 어떤 맥락에서 경향들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용됨을 밝히는 것이다. 나는 아마도 특히 현재 절에서 빈도 이론이 부분적으로 오해된 의미 해석의 혹은 불완전한 의미 해석의 결과라고 암시함으로써 이 오해를 심지어 부추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자리에 또 다른 의미 분석을 두는 것을 제안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내가 제안하는 것이 뉴튼적 힘의 가설과 유사한 새로운 물리적 가설임이 (혹은 아마도 형이상학적 가설) 이해되는 순간 분명히 이해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실험적 조치가 (그리하여 어떤 체계의 모든 상태) 때때로 빈도들에 의하여 시험될 수 있는 경향들을 생성한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은 시험될 수 있고 어떤 양자 실험들에 의하여 입증된다. 예를 들어 이중슬릿 실험(The two-slit experiment)은 (후기의 III권, 18절) 확률에 대한 순전히 통계적 해석과 경향 해석 사이의 결정적인 실험과 같은 것이어서 순전히 통계적인 해석에 불리하게 문제를 결정할 것이라고 언급될 것이다.
경향 해석은 이 후기의 나머지 책들에서 보다 완벽하게 토론될 것이다. 경향 해석은 이 토론들에 비추어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장(章)에서 빈도 해석에서 경향 해석으로의 천이(遷移)가 폰 미제스와 코플랜드(Copeland)와 왈드(Wald)와 처치(Church)에 (그리고 내 자신) 의하여 전개된 수학적 빈도 이론에서 내가 만족하는 바, 철학적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순전히 수학적 관점에서도 빈도 이론보다 우수한 확률의 신-고전적 혹은 측정-이론적 처리(The neo-classical or measure-theoretical treatment of probability)로의 천이(遷移)에 상응한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결정론 문제에 몰입하는 후기의 II권 말미에서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경향 해석을 의식적으로 수용하는 데 방해가 되었던 것이 형이상학적 결정론에 대한 신뢰였음을 밝힐 의도이다. 양자 이론에 관한 후기의 III권에서 경향 이론의 유용성은 시험될 것이다. 결어부분에서 (또한 III권에서) 나는 경향 해석의 도움을 받아서 물리학의 새로운 형이상학이 - 물리학의 옛 프로그램들을 통합하고, 게다가, 물리 과학들과 생물 과학들의 통합 가능성을 제시하는 듯이 보이는 물리학을 위한 새로운 연구 프로그램 - 구축될 수 있음을
밝힐 의도이다.
21. 빈도 이론이 성공하는 곳.
우리가 과학적 확률 서술들에 대하여 어떤 해석을 채택하든, 빈도 해석이 근본적으로 중요하게 남을 것인데 이유인즉 우리가 경험적 시험들에 부치는 것은 항상 빈도 서술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나는 여기서 내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의 가장 긴 장(章)에서 (7장) 토론한 문제들로써 다시 시작할 것이다.
내가 그 장(章)을 썼을 때, 폰 미제스의 소위 무작위의 (혹은 도박 체계들의 무용성의) 공리나 공준(公準)에 대한 토론은 절정에 달했다.
이 절정은 칼 멩거(Karl Menger)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당시, 왈드의 이후 삶과 저술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두 번째 사건이 발생했다. 비엔나 출신의 철학자 칼 포퍼는... 무작위 수열의 개념을 정확하게 만들어 폰 미제스의 집합체들에 대한 정의(定義)가 지닌 명백한 결점들을 고치고자 노력했다. 내가 포퍼의 개념들에 대한 반(半)-전문적 해설을 들었을 때 (슐릭[Schlick]의 철학파에서) 나는 중요한 주제를 매우 상세하게 수학 세미나에 제출할 것을 그에게 요구했다. 왈드는 크게 흥미를 가졌고 결과는 ... 결과(Ergebnisse)에서 집합체들에 대한 개념들의 자기-일관성에 관한 그의 거장다운 논문이었다... 왈드가 통계의 토대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집합체들에 관한 이 연구와 시간 연속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였다. .. 모르겐슈테른(Morgenstern)의 제안으로 수행된.’
나는 내가 이 사건을 언급하는 데 대하여 용서받기를 희망한다. 그것은 왈드뿐만 아니라 내 자신에게도 중요했다. 왜냐하면 왈드의 저술은 내 저술의, 내가 이 분야에서 열망할 수 있었던 것을 멀리 넘었던 범위와 깊이의 일반화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주제에 관하여 내가 준비했고, 내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언급했던 어떤 사소한 논문들을 발간하지 않았다.) 왈드의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도박 체계들의 가산 집합에 무감각한 수열들을 구축하도록 하는 일종의 ‘대각 논법(diagonal argument)’을 이용하는 것으로서 개략적으로 기술될 수 있다.
왈드가 얻은 결과는 개략적으로 이랬다. 그는 도박 체계들의 가산 집합이 주어지면 모든 이 도박 체계들에게 무감각한 집합체들이 - 사실상 집합체들의 전체 연속체 -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도박 체계들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수렴적 빈도들을 지닌 수열들이 존재한다는 것) 밝혔다. 게다가 그는 도박 체계들의 집합이 ‘건설적인 방식으로 정의(定義)된다’면 우리는 모든 이 도박 체계들에게 무감각한 집합체들의 사례들을 효과적으로 구축할 수 있음을 밝혔다.
왈드가 얻은 결과는 마무리되었는데 말하자면, 알론조 처치(Alonzo Church)가 쓴 논문에서였다. 왈드는 ‘건설적인 방식으로 정의(定義)된’과 ‘효과적으로 구축될 수 있다’라는 단어들을 단순한 의미로 사용했다: 그는 단순히 도박 체계들의 (가산) 집합이 그 집합에 속하는 모든 체계들을 구축하는 어떤 표시나 방법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에게 제시될 때마다 이 표시나 방법은 그 집합의 모든 도박 체계들에 따라서 선택에 무감각한 집합체들을 구축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처치는 자신이 1936년에 공식적인 정의(定義)를 제안했던 효과적인 계산가능성의 개념이 적용될 곳에서 이것이 사실임을 지적했다. 그는 폰 미제스가 코플랜드처럼 규칙의 도움을 받아서 구축될지도 모르는 집합체들을 사용하여 작업을 했던 모든 사람들을 심하게 비판했음을 회상했다; 그리고 내 자신처럼 그런 구축들에 대하여 방법들을 제시했던 사람들을 훨씬 더 심하게 비판했다. 그런 수열들에 대하여 성공적인 도박 체계들이 틀림없이 항상 존재하는데 이유인즉 수열들이 수학적 구축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폰 미제스는 항상 그런 수열들에 대하여 훨씬 더 많은 성공적인 도박 체계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로서는 나는 이것을 심각한 반대론으로서 간주하지 않았다. 내가 원했던 유일한 것은 확률 이론의 형식을 수열의 n번째 항의 확률이 자체의 모든 이전 것들의 속성들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전제로부터 도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처치(Church)는 폰 미제스의 반대론들이 중요함을 알았다. 그는 선택의 여하한 실용적 체계는 (도박 체계) 틀림없이 우리로 하여금 선택될 항들을 (의존하여 도박을 하기 위한) 효과적으로 계산하도록 할 체계일 것임을 지적함으로써 그 반대론들에 답변을 했다. 그리하여 그는 폰 미제스의 최초 조건을 (‘수렴의 공리[axiom of convergence]’) 그대로 둠으로써, 그리고 폰 미제스의 두 번째 조건을 (‘무작위의 공리’ 혹은 ‘제외된 도박 체계들의 공리’) 무작위 수열들로부터 모든 효과적으로 계산될 수 있는 선택 기능들에 대한 무감각성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무작위 수열을 정의(定義)할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효과적으로 계산 가능한 모든 것을, 다시 말해서, 모든 실용적 도박 체계들을 (정확한 수학적 설명을 할 수 있는 모든 실용적 도박 체계들) 제외함으로써 내가 생각하기에 처치(Church)는 폰 미제스가 염두에 두고 있던 종류의 집합체를 정확하게 규명하는 데 성공했다. 처치는 왈드의 증거가 이 경우에 적용 가능함을 밝혔다. 그리하여 집합체들의 존재는 - 혹은 처치가 지칭한 바와 같이 ‘무작위 수열들’ - 밝혀졌다.
이 결과들은 내가 보기에 합당하게 요구될 수 있었던 폰 미제스의 빈도 이론에 대한 가장 완벽한 정당화를 확립한다. 이 결과들은 틀림없이 모든 비판자들을 침묵시킨다. 심지어 (내 자신처럼) ‘수렴의 공리’에 (혹은 ‘제한 공리[limit axiom]’) 반대했던 사람들도 효과적인 답변을 받았다.
왜냐하면 처치는 보렐(Borel)이 얻은 매우 중요한 결과가 처치의 ‘무작위 수열들’에까지 - 혹은 동등한 분포를 가진다면, 다시 말해서 p(0) = p(1) = 1/2이라면 적어도 ‘0’과 ‘1’ 두 가지 속성을 지닌 무작위 수열들에까지 - 확대될 수 있음을 밝혔기 때문이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처치가 얻은 결과는 이렇다. 우리가 모든 가능한 무한 ‘대안들’을 - 다시 말해서 0들과 1들의 모든 가능한 무한 수열들 - 고려한다면 그것들 거의 모두는 처치가 의미하는 바로는 무작위 수열들이다.
이것은 분명히 먼저 거의 모든 대안적 수열들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수렴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것들 거의 모두가 ‘우연과- 같은’ 혹은 ‘무작위적’ 특성을 지닌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은 나아가 그런 무작위적 수열들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거의 모든’으로써 다음이 여기서 의미된다. 0들과 1들의 수열들을 0과 1 사이의 실수의 2진법적인 단편적 확대들로서 해석하라. 그렇다면 무작위가 아닌, 다시 말해서 처치의 무작위성의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지 않는 수열들은 척도 0의 집합을 형성함이 밝혀진다.
확률 1/2를 지닌 대안들에 대하여 이 정리를 직감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규모에 따라서 정렬된 길이 2, 4, 6...의 모든 가능한 수열들을 고찰할 것이다. (공간 때문에, 나는 처음 두 가지 집합만을 제시한다.)
길이 2: 수열 수: 4
00 10
01 11
길이 4: 수열 수: 16
0000 1000
0001 1001
0010 1010
0011 1011
0100 1100
0101 1101
0110 1110
0111 1111
일반적으로 길이 n의 다양한 수열들의 숫자는 2
베르누이가 오래 전에 주목한 바와 같이 다음이 유효하다:
(1) 정확하게 동등한 분포를 갖는 수열들의 상대적 빈도는 자기들의 길이와 비례하여 감소한다. (그 빈도는 길이 2의 수열들 가운데는 1/2/이고, 길이 4의 수열들 가운데는 3/8이고, 길이 6의 수열들 가운데는 5/16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동등한 분포를 갖는 수열들의 상대적 빈도는 증가한다. (이것은 우리가 적어도 길이 6의 수열들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다지 잘 예시될 수 없다.)
(3) 직감적으로 무작위-같은 특성을 지니고, 훌륭한 근사치로 ‘정상적인 서수적 선택’에 무감각한 저 수열들의 상대적 빈도는 수열들의 길이와 비례하여 증가한다. (우리가 더 큰 길이의 수열들을 - 적어도 6과 8까지 - 고려한다면 이것은 합당하게 예시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제 수열들이 점점 더 길어진다면 더 큰 비율이 p(0) = p(1) = 1/2로부터 이탈하지 않을 것이고, 더 큰 비율이 점점 더 많은 선택 방법들에게 더 근접하게 무감각하게 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정리를 얻는다.
이제 이 결과에 비추어 수렴 공리에 대한 통상적인 비판을 고찰하자. 통상적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a) 자체가 수렴하는 수학적 규칙에 따라서 계산될 수 없는 수열을 상정하는 것은 쓸모가 없다.
(b) 확률 이론에 따라서 모든 수열들은 가능하고 어떤 확률 전제와도 양립할 수 있어서 또한 다음과 같은 수열도 그렇다:
빈도 1/2 및 1/3 사이에서 오고가서 수렴적이 아닌 01 0011 000000111111 000000000000000000111111111111111111. 그러나 분명히 가능한 수열이기 때문에 이 발산적 수열을 제외하는 것은 수용될 수 없다.
이 반대론들에 대한 답변을 이제 주어질 수 있다:
(a) 수학적 규칙에 따라서 효과적으로 계산될 수 없는 거의 모든 수열들은 수렴적 빈도들을 지닌다.
(b) 발산적 수열들이 있다할지라도, 그 수열들은 그리하여 무시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상황을 매우 가볍게 이념화하여 단순화하는 이론을 제공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수렴 공리’ 혹은 (폰 미제스 지칭하는 바와 같이 ‘제한 공리’) 자체의 겉으로 보이는 불쾌한 특징을 완전히 잃는다 (이 문장의 원문은 Seen in this light, the 'axiom of convergence' or ('limit axiom' as von Mises called it) completely loses it apparently objectionable character인데 or가 괄호 안에 있어야 할 듯하다. 역자). 왜냐하면 자의적 상정(想定)으로 놓이는 대신에 그 공리는 이제 정리의 이념화하거나 단순화한 판본의 특징을 띄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무한 수열들에 적용되는 듯이 보이는 대신에, 그 공리는 이제는 커다란 길이의 거의 모든 유한 수열들에 의하여 그리고 그들의 길이가 증가됨에 따라서 항상 더 유한한 수열들에 의하여 공유되는 속성을 이념화할 따름으로 보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매우 직선적이고 만족스럽다; 그리고 나는 내 견해로 그것이 빈도 접근방식을 완벽하게 정당화한다고 반복하여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도 접근방식의 바로 이 정당화는 그 모든 것을 대체한다: 빈도 이론은 자체가 수학적으로 완전히 정당화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낡은 것이 된다. 왜냐하면 빈도 이론을 정당화하는 이론은 반대로 폰 미제스의 의미에서 빈도 이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론은 본질적으로, 고전적 이론처럼 (원초적으로 베르누이가 만든), 가능성들이나 가능성들의 집합들을 측정하는 이론이다. 그 이론은 ‘신-고전적’ 이론으로 아마도 지칭될 것이다. 빈도 이론을 정당화하는 자체의 능력으로써 그 이론은 더 강력한 이론으로 판명된다; 정말로 그 이론은 빈도 이론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베르누이의 목표가 실현되고, 고전적 혹은 더 정확하게 신-고전적 이론을 빈도 이론으로부터 분리하는 격차를 가로질러서 다리가 건설되자마자 후자(後者)는 자체의 정당화를 통하여 자체의 독립적인 존재를 잃고 전자(前者)의 한 부분이 된다.
22. 빈도 이론이 실패하는 곳.
빈도 이론에는 신-고전적 이론이 필요하지 않다: 빈도 이론은 완벽하게 자족적이다. 그렇지만 빈도 이론은 실패하는데 왜냐하면 빈도 이론이 충분히 일반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빈도 이론의 범위 안으로 들여올 수 없는 가장 흥미로운 문제들과 해결책들이 있다.
보기의 도움을 받아서 이것을 예시하기 위하여 나는 앞 절에서 언급된 정리의 간단한 형태를 보다 자세히 토론할 것인데 그 정리에 따르면 거의 모든 대안들에서 1들의 상대적 빈도는 한계를 지닌다.
a를 대안으로 (다시 말해서 0들과 1들의 수열) 하자. n'를 a의 n번째 장소까지 발생하는 1들의 숫자로 하여 n'/n은 a의 n번째 장소까지 1들의 상대적 빈도로 하자.
수학자는, Ɛ > 0을 사용함을 제외하고 우리가 원하는 만큼 작게 선택된 모든 작은 부분 Ɛ에 대하여 숫자 m이 존재하여 m번째 장소로부터 계속해서 n'/n이 p(1,a)로부터 Ɛ미만으로 편차를 보인다는 조건으로만, n'/n이 한계를 지닌다고 - 우리는 그것을 p(1,a)라고 칭할 것이다 - 말할 것이다; 혹은 기호들을 사용하여:
(✡) m이 존재하여, 모든 선택된 n에 대하여 n > m이어서,
|n'/m - p(1,a)| < Ɛ이다.
이제 경험적 무작위 대안 a에 대하여 (집합체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선택된 Ɛ에 상응하는 숫자 m을 효과적으로 계산할 수 없다 (단지 집합체는 수학적 규칙에 따라서 결정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다: 우리는 아무리 작다할지라도 모든 선택된 Ɛ에 대하여 m을 효과적으로 계산할 수 있어서 실패할 (✡) 확률은 Ɛ미만이다; 혹은 같은 것이지만 유효할 (✡) 확률은 1 - Ɛ 초과이다. 사실상 m을 1/Ɛ
이 공식에서 그 정리는, 폰 미제스가 밝힌 바와 같이, 빈도 이론 안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우리는 대안 a를 수용하여 그 대안으로부터 새로운 집합체 b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형성한다: 우리는 a를 잘라서 어떤 선택된 길이 n의 매우 긴 (겹치지 않는) 세그먼트들(segments)로 만드는데 거기서 n > m이다. 새로운 집합체 b의 항들은 a의 이 긴 세그먼트들이다. 그 정리가 주장하는 바는, b의 항들인 세그먼트들 안에서 1/1,000보다 큰 p(1,a)로부터의 편차는 평균적으로 1,000번째 세그먼트마다 1회 이상 발견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 편차들의 상대적 빈도는, 집합체 b 안에서, 1/1,000미만인 한계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 우리가 아무리 크게 n을 선택한다할지라도.
어떤 반대론도 그 정리에 대한 이 빈도 해석에 제시될 수 없다.
그러나 토론된 정리는 거의 모든 대안들에는 수렴적 빈도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필연적 귀결의 토대로 만들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정리로부터 이 필연적 귀결로 향하는 추론은 빈도 이론 안에서 재생될 수 없다.
고전적 이론의 틀 안에서 그 정리 자체는 빈도 해석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해석이 주어질 수 있다. 그것은 이렇게 표현될 것이다. (나는 단순성을 위하여, 평등분배의 경우인 p(1) = 1/2에 국한한다.)
길이 n의 다양한 세그먼트들 각각의 한 표본을 (n이 선택되어 n > m 인) 넣어 가방 안에 2
그 정리의 이 해석이 주어지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하는 데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만큼 작게 Ɛ를 선택할 것이고, 우리가 Ɛ를 점점 더 작게 만든다면 m = 1/Ɛ
이제 이 논증은 도저히 폰 미제스가 우리의 정리를 표현한 빈도 해석 안에서 재생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긴 세그먼트들인 n의 무한 숫자들로 해부한 대안 a인 한 가지 수열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우리는 a를 무한한 길이의 무한히 많은 세그먼트들로 해부할 수 없다 - 심지어 두 가지 그런 세그먼트들로도 해부할 수 없다: a를 그 중 하나가 적어도 무한한 세그먼트들로 해부하는 것은 기껏해야 a의 한 가지 무한 ‘세그먼트’를, 다시 말해서 a 자체를 생성할 수 있다 (어떤 시작하는 세그먼트를 더 적게). 그리하여 b를 이전에 사용된 방식으로 구축하는 가능성은 없다; 그리고 편차를 발견하는 (혹은 발견하지 않는) 확률이 폰 미제스에 의하여 정의(定義)된 것은 단지 b 안에서였다.
두 번째로, 그 항들이 무한 수열들인 집합체 b의 개념은 빈도 이론 안에서 고려될 수 없다. 빈도 이론에서는 집합체의 항들은, 본질적으로, 관찰 가능한 사건들이거나 실험들의 결과들이다. 그 항들은 또한 사건들의 유한 수열들인 텐데 왜냐하면 사건들의 유한 수열은 반대로 복잡한 사건으로서 해석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합체의 항은 분명히 사건들의 무한 수열이 될 수 없다.
그리하여 한계로의 실제적 변환은 폰 미제스의 해석에 완전히 막혀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한계 정리의 모든 내용은, 통상적으로, 실제로 변환을 만들지 않고도 단지 점점 더 긴 유한 수열들에 대하여 말함으로써 완벽하게 표현될 수 있다. 심지어 우리 앞에 놓인 경우에서 이것은 우리가 그 정리의 고전적 해석을 고려한다면 그렇다고 언급될 것이다 - 정확하게 그것은 우리가 한계로 나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계로 나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틀 안에서 그 정리는 자체가 변환을 가능하게 만드는 틀 안에서 지니고 있는 완전한 힘을 가질 수 없다.
나의 이 비판에 대하여 빈도 이론가는 다음 답변을 제시할 것이다. 나는 폰 미제스의 해석이, 본질적으로 옳을지라도, 그 이론의 완전한 힘을 제공하지 않음을 내가 인정한다고 빈도 이론가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전적 정리를 집합체들의 언어로 보다 직접적으로 번역함으로써 고쳐질 것이다. 2
이 답변은 틀림없이 거부될 것이지만 신중하게 분석될 자격이 있다. 그 답변이 밝히는 바는, 올바르게도, 확률이 빈도에 관하여 충분히 유연한 개념으로써 항상 연결될 것이라는 점이다: 무한 집합들에서 빈도를 포함하는 개념; 무한 수열들에서 빈도의 일반화, 즉 빈도 한계들; 그리고 연속적인 집합들에 대하여 정의(定義)된 측정들과 같은 어떤 심층적 일반화들. 그러나 폰 미제스의 빈도 이론에서는 단지 관찰 가능한 사건들의 무한 수열들에서의 빈도 한계들이 수용된다. 이것을 고려하여 다음이 언급되어야 한다.
(a) 우리가 나의 가설과 관련된 반대자가 제시하는 무한 수열에서의 상대적 빈도를 재해석하는 방법을, 저 유한 집합으로부터 무작위로 도출된 집합체들 구축함으로써 수용한다면 이런 종류의 재해석은 사소하고 동시에 불필요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재해석은 평범한 유한 비율을 비율들의 무한 수열의 한계로써 재진술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재해석은, 게다가, ‘무작위’ 도출들을 전제해야 한다.
(b) 우리의 원래 가방과 그 가방의 빈도들은 자체에 관하여 우연 같은 것이 없었다. 이것은 모든 n에 대하여 정확하게 가산적인 모든 빈도를 지닌, 순전히 수학적 모형이었다. 이것은 우연 같거나 무작위적인 (다시 말해서 독립적인) 도출들의 결과들과 동일한 이 빈도들을 해석하기 위하여 명징성에 기여하지 않는다.
(c) 폰 미제스의 형태의 빈도 이론 안에서, 무작위 도출들이 이 빈도들을 산출할 것이라는 서술은 틀림없이 우연한 사건들의 빈도들에 관하여 가설적 추정치의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가방의 내용들에 관한 상응하는 서술은 증명가능한 수학적 정리들이었다.
(d) 그리하여 0들과 1들의 모든 가능한 수열들의 가방으로부터 비-수렴적 빈도를 지닌 수열을 (폰 미제스의 이론 안에서 해석될 수 없을) 뽑는 0 확률이 있다는 서술은 틀림없이 토론되고 있는 정리와 대등하지 않고 그 토론되고 있는 정리에 따라서 거의 모든 그런 수열들은 수렴된다 (비-수렴적 수열들의 집합의 척도가 0이기 때문에).
언급된 것으로부터, 우리가 토론 중이던 정리는 - ‘큰 숫자들에 대한 강력한 법칙’의 형태 - 폰 미제스의 수렴 공리의 도출에 해당하지 않음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 정리는 모든 수열들이 수렴된다는 것을 확립하지 않고 (확립할 수도 없다) 단지 거의 모든 수열들이 수렴된다는 것을 확립한다. ‘수렴의 공리’는 ‘집합체들’을 수렴되는 것들에 속하는 것으로서 규정한다. 다시 말해서 폰 미제스의 이론은, 전적으로 합당하게, 수열들의 특별하게 흥미로운 집합을 골라낸다.
폰 미제스의 두 번째 공리인 무작위의 공리에 관한 상황도 밀접하게 유사하다. 다시 그 공리는 그런 상태로 도출될 수 없다. 그러나 그 공리는 문제의 수열들이 독립적인 사건들로 구성된다는 전제 하에서 모든 도박 체계들이 거의 모든 수열들에서 (척도 0의 집합을 예외로 하고, 독립적 사건들의 모든 수열에서) 실패한다는 두브(Doob)의 정리에 의하여 대체될 수 있다.
여기에 사용된 독립에 대한 전제는, 사실상, n번째 항이 자체의 모든 이전 것들로부터 독립적이거나 이전 것 선택에 n-1-무감각하다는 나의 전제와 동일하다; 그리고 이 범위까지, 이론을 독립의 전제나 n-무감각에만 (수렴 공리는 배제하고) 근거시키려는 나의 시도가 주로 올바른 방향에 있었음이 판명된다. 이것은 독립이나 n-무감각이 분명한 직감적 의미를 지니는 한 중요하다: 우리는 주사위를 흔들거나 섞거나 혹은 유사한 수단을 통하여 n번째 던지기나 도출이 이전 던지기나 뽑기의 결과들에 의하여 어떤 정도로도 영향을 받지 않음을 보장하려고 정말로 노력한다.
23. 실패의 중요성.
여기서 우리는 결정적인 요점을 건드린다. 빈도 이론의 실패가 실제로 중요한 것으로 판명되는 곳은 여기다.
내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 49절에서, ‘우연의 이론의 근본적인 문제(the fundamental problem of the theory of chance)’라고 불렀던 문제는 신-고전적 이론으로써 완벽하게 해결 가능하다. 이 이론은, 경향 해석과 결합하면, 독립적 사건들의 (이전 것 선택에 n-무감각한 사건들) 수열들이 그들이 하는 이상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폰 미제스의 집합체들이 하는 것과 같이 그 수열들이 행동하는 이유: 그 수열들의 빈도들이 수렴을 향하는 경향을 보이는 이유. 그 수열들이 동시에 무작위-같아서 (거의) 모든 도박 체계들이 실패하는 이유. 우리가 이상한 행태를, 어느 정도 우리 모두가 우연한 사건들에서 기대하지만 진지하게 그것을 심사숙고하는 누구에게나 틀림없이 상당한 난제들을 야기할 이 규칙성 겸 불규칙성을 이해할 때 우연의 이론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된다.
신-고전적 이론은, 경향 해석과 결합되어, 우리가 독립적이거나 우연-같은 체계들의 무한 수열에서 1과 대등한 확률을 지닌 그런 행태를 기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근본적으로 베르누이, 푸아송(Poisson), 보렐(Borel), 그리고 다른 고전 이론가들의 방향을 따라서 - 사실상 내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방향 - 해결된다. 왜냐하면 이런 면에서 나는 폰 미제스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아마도 누군가가 이전에 했던 것보다 더 강력하게 문제를 강조한 반면, 폰 미제스는 여기에 문제가 없어서 우리는 무작위 수열들의 존재를 궁극적인 경험적 사실로서 수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견해로 확률 이론은 이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따름이어서 그 사실을 이념화한 형태로 기술했다. 그것이 폰 미제스가 자신이 기약(旣約: irreducible)으로서 간주했던 자신의 두 가지 공리들에 도달한 방식이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고전적 시도들이 모든 순환적이었음을 발견했을 때 자신의 견해를 확인하였다. 이 순환성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그가 절망했다는 부분적 이유로, 실증주의자로서 그가 ‘설명’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부분적 이유로 인하여 그는 추론이라는 개념을 포기했다: 여기에 기술될 수 있었지만 설명될 수는 없었던 자연에 대한 기약(旣約: irreducible) 사실들이 있었다.
나는 한편으로 폰 미제스의 고전 이론 비판이 정당화되었다고 느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가 필요한 수학적 이론 이상을 전제해서 ‘우연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느꼈기 때문에 나는 그 이론을 재구축하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나는 우연-같은 수열들의 이론은 본질적으로 고전적인 독립 개념과 대등한 개념인 n-무감각 개념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음을 밝힘으로써 그의 전제들을 단지 최소한으로 감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칸텔리(Cantelli), 콜모고로프(Kolmogorov), 왈드(Wald), 처치(Church), 그리고 J. L. 두브(Doob)의 저술 속에 있는 폰 미제스 자신의 개념들 덕분에, 우리가 그 이론이 전제했던 형식을 고려한다면, 이제 나는 고전 이론에 대한 폰 미제스의 반대론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믿는다. 그리고 두브의 제외된 도박 체계들의 정리의 도움을 받아서 그 문제가 최종적 해결책에 도달했거나 매우 근접하게 도달했다고 (우리가 경향들을 전제한다면) 나는 더욱 믿는다.
24. 신-고전 이론과 빈도 이론의 대조.
신-고전 이론의 이전 이론처럼 신-고전 이론은 확률을 가능성들의 (혹은 속성들이나 등급들이나 집합들의) 척도로서 취급한다고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신-고전 이론은 다음 요점을 근거로 고전 이론과 다르다.
(a) 신-고전 이론은 확률의 정의(定義)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대신에 신-고전 이론은 ‘확률’을 특정 계산의 규칙들을 충족시키는 것으로서 수용한다.
(b) 신-고전 이론에는 균등 분배나 균등-확률들을 비-균등 분배들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서 취급할 필요가 없다.
(c) 몇 가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경우들에서 신-고전 이론은 특정 가능한 수열들의 집합들이 0이나 1의 척도들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정리들을 통하여 특정 고전적 한계-정리들을 (특정 가능성들이 0이나 1의 한계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는) 대체한다.
(d) 신-고전 이론은 다른 해석들을 허용하지만 강력하게, 특히 자체의 독립 이론을 통하여, 문제의 사건의 반복들의 수열들 안에서 빈도들에 의하여 시험될, 확률들을 단칭 발생들이나 사건들에 귀속시키는 해석을 제안한다; 다시 말해서 신-고전 이론은 확률들에 대한 경향 해석을 제안한다.
나는 이 요점들을 차례로 간단하게 토론하겠다.
(a) 고전 이론은 확률을 동등하게 가능한 경우들에 대한 선호되는 것들의 숫자의 비율로서 정의(定義)했음이 기억될 것이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 4절 참조) ‘동등하게 가능한(equally possible)’은 여기서 또한 ‘동등하게 개연적인(equally probable)’을 의미함을 알기에 이 정의(定義)는 비-동등한 확률들을 동등한 확률들로써 정의(定義)하려는 시도에 해당한다 (이 문장의 원문은 Seeing that 'equally possible' here also means 'equally probable', this definition amounts to an attempt to define non-equal probabilities in terms of equal probabilities인데 분사구문 Seeing that ~ 'equally probable'의 주어가 this definition이 될 수 없으므로 As we see that 'equally possible' here also means 'equally probable'로 고쳐 쓰는 것이 옳다. 문법적으로 틀린 원문이다. 역자); 혹은 다시 말해서 이 정의(定義)는 확률들의 계산이 균등-확률을 자체의 근본적 개념으로서 수용해서 이 근거들을 기초로 일반적인 계산을 구축해야 한다는 제안에 해당한다. 이 제안은 (b) 아래서 보다 완벽하게 비판될 것이다.
대조적으로, 신-고전 이론은 라플라스(Laplace)나 폰 미제스(von Mises)의 방향에서 ‘확률’의 정의(定義)를 제시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신-고전 이론은 분명히 확률의 수학적 계산을 구축하는 공식적인 업무를 이 계산을 우연의 게임들에서 통상적으로 적용하려는 목적으로 해석하는 업무로부터 분리한다.
라플라스와 폰 미제스 모두는, 확률을 정의(定義)할 때, 적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라플라스는 주사위의 여섯 가능성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폰 미제스는, 던지기들의 긴 수열들에서, 주사위의 면들이 불규칙하지만 균등한 빈도들로써 떨어지는 이상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신-고전 이론에 대하여 ‘확률’은 공식적인 수학적 체계의 규칙들을 충족시키는 모든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체계가 먼저 (수학적 일반성과 가능한 적용들을 목적으로) 개발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체계의 다양한 해석들의 문제는 단지 그 후에 제기되어야 했다.
(b) 신-고전 이론은 균등-확률에 대하여 차별적 위상을 전제하지 않는다; 보다 특별히 신-고전 이론은 모든 확률들은 궁극적인 균등-개연적 ‘단위들’이나 ‘조각들’의 총화로서, 혹은 다시 말해서, 실제로 계산하는 가능성들(counting possibilities)의 결과들로서 구축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반대 의견이 여전히 매우 유행하기 때문에 - 우리는 확률에 대한 실제적인 숫자 가치를 평가하는 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흔히 듣는다 - 여기서 몇 가지 추가적인 비판적 언급들을 추가하는 것이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나는 균형 고찰(symmetry considerations)에 의하여 스스로 제시될 동등 확률들에 대한 가설적 추정치들이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나의 인정을 (과학적 발견의 논리, 57절 참조) 회상하고 싶다. (이것들은 물론 무관심의 원리로부터 도출되지도 않고 도출될 수도 없다; 그러나 모든 가설들처럼 그 추정치들은 어떤 것을 통해서라도 (균등분배들이 예측들의 불확실성을 극대화한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포함하여) 우리의 직감에 자체를 추천할 것이다.)
나의 첫 번째 요점은 (폰 미제스가 흔히 강조하는 바와 같이) 심지어 무게가 실린 주사위의 단순한 경우도 - 분명히 물리학과의 관련성 문제 - 균등-확률의 문제를 초월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드 므와브르(De Moivre)의 정의(定義)로부터 시작한 확률에 관한 많은 고전적 저술가들이 (라플라스 자신을 포함하여) 나중에 (때때로 몇 쪽 나간 후에) 동등 확률들이라는 전제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보다 일반적인 이론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즉각적으로 자체의 일반 공식에서 이항식(二項式: binomial formula)을 도출하면서.
세 번째 요점으로서 Janina Hosiasson의 (폴란드 출신 철학자인데 이름의 독음을 알 수 없음. 역자) 비판이 언급될 것이다. 그 비판은 두 가지 매우 유사한 우연의 게임들 사이의 차이점을 고찰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첫 번째 게임에 대한 기술:
우리에게는 한 개의 가방과 두 개의 항아리 I과 II가 있다. 가방 안에는 세 개의 계산 장치들이 있는데 두 개는 'I'로 표기되어 있고 하나는 'II'로 표기되어 있다. 항아리 I과 II 안에는 각각 세 개의 공이 들어 있다; 항아리 I 안에는 두 개의 공이 희고 하나는 검다; 항아리 II 안에는 한 개의 공이 희고 두 개의 공이 검다.
우리는 가방으로부터 계산 장치를 무작위로 꺼낸다. 계산 장치가 ‘I’로 표기되어 있으면 우리는 다음에 항아리 I로부터 무작위로 한 개의 공을 꺼낸다; 그 항아리가 'II'로 표기되어 있는 반면 우리는 항아리 II로부터 무작위로 한 개의 공을 꺼내지 않는다. 우리가 항아리 I이나 II로부터 무작위로 한 개의 공을 꺼냈을 때, 게임은 끝난다. 문제는 흰 공을 꺼내는 확률을 결정하는 것이다.
해답은, 물론, (
두 번째 게임에 대한 기술:
두 번째 게임은 항아리 II가 하나는 희고 하나는 검은 두 개의 공만을 담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 첫 번째 게임과 정확하게 같다.
두 번째 게임에서, 한 개의 흰 공을 꺼낼 확률의 문제에 대한 답변은, 물론, (
두 가지 게임을 비교하면, 우리는 첫 번째 게임이 다음 도식으로써 재현될 것임을 발견한다:
도식 1
두 번째 게임은 다음 도식으로써 재현될 것이다:
도식 2
두 번째 게임의 결과에 대한 우리의 계산은 다음 세 번째 도식에 의하여 재현될 것이거나,
도식 3
이 도식이 두 번째 도식과 ‘대등하다’는 주장에 의하여 재현될 것이다.
이제 Janina Hosiasson이 주장한 요점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것이다:
첫 번째 게임에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아홉 가지 동등한 가능성을 경험한다. (도식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바와 같이, 우리는 아마도 가방을 가지지 못할 것이고, I 숫자가 매겨진 한 항아리 대신에, 두 개 모두 I 숫자가 매겨진 두 개의 다른 항아리를 가질 것이어서 그것들 중 다섯 개가 흰 도합 아홉 개의 공을 지닌 세 개의 항아리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먼저 게임을 끝내는 모든 동등한 방식들이나 가능성들을 - 도합 아홉 가지 - 계산하고 그 다음에 흰 공들을 뽑는 것으로 끝나는 방식들이나 가능성들의 숫자를 (다시 말해서, 5) 계산한다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얻는 결과를 재현할 수 있다. 비율 5/9는 해답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두 번째 경우에는 적용될 수 없다. 그 결과는 11/18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서 11 가지 가능성들이 선호될 수 있는 고려할 18가지 가능성들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따름이다: 가능성의 계산은 이런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게임이 매우 간단할지라도 (그 게임의 계산에 관해서는 난제가 조금도 없다) 그리고 두 번째 게임이 모든 단계마다 동등한 확률들이나 동등한 가능성들로써 작동할지라도, 그 게임의 결과는 (동등한) 가능성들을 계산하는 이론 안에서 재현될 수 없다. 그 게임의 결과는, 오히려, 우리가 틀림없이 계산할 수 있지만 실제로 두 번째 게임 안에서 전혀 발생하지 않는 18가지 동등한 확률들의 일종의 허구적 구축에 놓여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 번째 도식이, 확률 계산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아는 모든 사람이 한 눈에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두 번째 게임과 ‘대등한’ 게임을 기술할지라도, 그 도식은 실제로 두 번째 게임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 번째 게임을 기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게임과 (8가지 동등하지 않은 가능성들을 지닌) 세 번째 게임의 (18가지 동등한 가능성들을 지닌) ‘대등’은 계산을 구축하기 전에 ‘보일’ 수 있거나 계산의 기초로서 ‘전제’ 될 것이 아니다.
논증은 이렇게 요약될 것이다. 두 번째 게임에는 공들을 꺼내는 8가지 다른 방식들이 있는데 그 중에 다섯 가지의 방법이 흰 공을 낳는다. 그러나 가능성들은 동등하지 않은 것으로서 (어떤 이유로든) 평가되고 결과 11/18을 결정하는 것은 주장되는 동등한 가능성들의 계산이라기보다는 계산법이다. 혹은 다른 상식으로 표현하여, 문제가 존재하는 동등한 가능성들로써 설명될지라도, 그 해결책은 자체의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식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것은 동등한 가능성들의 계산에 근거한 여하한 정의(定義)의 불합리성을 보여준다.
(c) 어떤 집합들이 측정치 0을 (혹은 측정치 1) 가지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신-고전 이론에서, 어떤 중요한 한계-정리들의 갈음은 상당히 철학적으로 중요하다. 다른 한편으로 그 갈음은 소위 확률 이론의 역설들 몇 가지를 해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확률 가설들로부터 상대적 빈도들을 통한 시험들에 이르는 ‘교량’을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른 바 역설들은 최근에 많이 토론되었다. 그 역설들은 때때로 ‘쿠르노의 원리(Cournot's principle)’로 (혹은 쿠르노의 명제[Cournot's lemma]) 불렸던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 원리는 ‘그 확률이 매우 작은 사건들은 실제로 불가능하다’로서 설명될 것이다. 이것과 관련된 난점은 (유사한 원리와 관련된 것처럼) 그 확률이 매우 낮은 사건들은, 단지 매우 드물게라할지라도, 정말로 발생한다는 사실로부터 발생한다; 혹은 폴 버네이즈(Paul Bernays)의 말로써, ‘우리는 물론 쿠르노의 명제에 반대-사례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복권에서의 나의 당첨과 같이)’. (게다가 충분히 복잡한 실제 사건 모두는 매우 낮은 확률을 지닌다.)
확률 이론 안에서 이 문제는 두 가지 분명히 구별되는 형태들로 나타난다. 먼저 그 문제는 교량의 문제로서 - 확률에서 빈도로의 천이(遷移) - 나타난다; 두 번째로 이 문제는 빈도 이론 안에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자세히 토론된, 확률 서술들의 시험가능성의 문제로서) 나타난다.
이제 이 두 가지 문제 중 첫 번째 문제는 신-고전 이론으로부터 빈도 이론을 새롭게 도출함으로써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큰 숫자들의 강력한 법칙과 ‘거의 확실한 것’으로서 도박 체계들의 무용성에 대한 두브(Doob)의 정리를 도출함으로써.
왜냐하면 이것들은 정확하게 1과 동등한 확률로써 도출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외들은 0에 매우 근접하기보다는 0과 정확하게 동등한 확률을 지닌다. 그리고 0과 동등한 확률들은 언급하는 유사-쿠르노 원리에 대한 경험적 반대-사례들은 있을 리가 없다: 0과 동등한 확률을 지닌 당첨 표들은 없다.
물론 이 반대-사례들의 부족은 새로운 추론들과 0 확률들이 무한 수열들과 관련되고, 우리는 경험적 사건들의 무한 수열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또한 우리는 무한한 표들을 지닌 복권을 운영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 수열들에 대한 수렴과 무작위의 법칙들은 빈도 이론의 기초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법칙들의 도출에, 단지 1에 근접한, 혹은 0에 근접한 확률들을 피하면 큰 변화가 생긴다.
우리가 ‘교량’에 대한 폰 미제스의 비판을 기억한다면 이것은 매우 명백하게 보일 것이다. 베르누이나 푸아송(Poisson)의 정리들을 고전적 확률 서술들로부터 빈도 서술들을 추론하는 데 대한 정당화로서 사용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어떤 보조적 원리를 임시적으로 전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우리의 계산에 의하여 우리가 1이하인 확률을 얻을 때마다 그 사건은 우리 실험의 거의 모든 반복들에서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의 항상’으로써 0.999의 확률을 해석할 수 있다면, 왜 ‘0.50의 확률이 사건은 평균 100의 경우들에서 50 경우에 발생함을 의미함을 즉각 인정하지 않는가?’라고 폰 미제스는 지적한다. 혹은 다시 말해서 빈도 정의(定義)를 왜 즉각 채택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추론은 여기서 차이점을 만든다.
먼저, 새로운 추론은 다음 난제를 제거한다: 예를 들어 0.999의 확률은 ‘거의 항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만족스럽게 해석될 수 없다. 아무리 1에 근접해도 0.999와 동등한 빈도 한계 같은 것이 필요할 것이고 이 확률 0.999는 도박 체계들에 무감각하다는 서술 또한 필요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0.999를 빈도 의미에서 해석하고 싶다면, 우리에게는 전체 빈도 이론이 필요하다. 우리가 정확하게 1과 (혹은 척도 0의 경우에서와 같이 0과) 동등한 확률을 얻는다면 경우는 달라진다. 물론, 심지어 이 경우에도, 우리가 요구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확률’은 틀림없이 빈도와 관련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확한 관련성이 확보될 필요는 없다 - 한계 공리와 무작위 공리도 필요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확률 (척도) 0을 갖는, 그리하여 무시될 경우들을 제외하고 유효함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전제할 필요가 있는 유일한 것은 0 확률이 (혹은 0 척도), 무작위 사건들의 경우에, 마치 불가능성인양 무시될 확률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확률’을 해석한다면 우리는 0.50의 확률이, 확률 1과 함께, 사건이 100번의 경우에서 50번으로 발생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어있다. 정말로 이 결론이 정당화된다는 사실은 이제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은 빈도 정의(定義)를 전제하지 않고도 이제 증명될 수 있다. 그리하여 불합리한 빈도 정의(定義)의 문제는 없다. 그 문제는 불필요하게 되었을 따름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확률이 빈도 한계를 의미함을 전제하지 않을지라도 빈도 한계들에 관한 결과들을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하여 우리는 ‘확률’에 더 넓고 더 모호한 의미를, 우리가 한편으로 확률 서술들로부터 다른 한편으로 통계적 시험들에 종속될 수 있는 빈도 서술들로 이동할 수 있는 교량을 위협하지 않고, 덧붙이는 일이 가능하다.
그러나 고전 이론이 객관적으로 - 가령, 경향 해석의 의미에서 - 해석된다면, 고전 이론에서 통계학으로 유도하는 그런 ‘교량’이 구축될 수 있을 따름임은 분명하다. 주관적 해석에 나의 옛 비판이 적용된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 48절, 주석 6 및 62절, 주석 3 참조)
(d) 우리는 신-고전 이론이 ‘확률’을 정의(定義)하지 않음을, 그리하여 고전 이론과 폰 미제스 모두가 그랬던 바와 같이 ‘확률’의 정의(定義)로부터 계산법을 도출하려고 시도하지 않음을 보았다. 대신에 신-고전 이론은 먼저 계산법을 (공리적 양태로 혹은 측정 이론의 한 부분으로서) 구축한다. 그 후에 주관적이나 객관적인 다양한 계산법에 대한 해석들이 고찰될 것이다. 그러나 독립 이론에서의 주관적 해석의 실패로 인하여 우리는 경향 해석을 거의 채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빈도 해석은, 폰 미제스가 제시한 정확한 의미에서 (비록 내가 이전에 일관적이고 고도로 만족스러운 이론이라고 말했다할지라도) 신-고전 이론의 가능한 해석들 중 한 가지 해석도 제공하지 않는다: 후자(後者)는 정말로 보다 일반적이고 일종의 ‘최초의 근사치’로서의 빈도 이론을 포함한다.
빈도 해석과 경향 해석을 제외하고 어떤 객관적 해석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빈도 해석이 자체에게 ‘교량’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신) 고전 이론을 경향 해석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을 제외하고 어떤 가능성도 보지 못한다.
이와 관련한 주요점은 새로운 이론이 정말로 확률들을 단칭 사건들에 귀속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이론이 사건들의 수열들과 이 수열들 안의 빈도들을 고찰한다할지라도, 한 가지 사건의 확률은 수열들의 관찰된 세그먼트들의 몇 세그먼트들에서 자체의 빈도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다. (새로운 이론은 거의 모든 수열들의 빈도 한계들과 일치할 따름이다.)
나는 폰 미제스 형태의 이론이 신-고전적 (집합-이론적) 확률 이론의 형식의 가능한 해석들 중 한 가지 해석으로서 간주될 수 없음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눈에 두 가지 접근방식 - 신-고전적 접근방식과 빈도 접근방식 - 사이의 화해는 아마도 가능한 듯이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 신-고전 이론의 빈도 해석이 아마도 폰 미제스 형태의 빈도 이론가들의 주요 의도를 실현할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신-고전 이론 안에서 사용되는 바와 같이 ‘사건 x의 확률 (혹은 척도)’라는 표현을 ‘거의 모든 (무작위, 혹은 무작위-같은) 수열들의 무한 집합의 수열들 안의 형태 x의 사건들의 빈도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확률 분포가 (혹은 장[場: field], 혹은 표식-공간[label-space]) 주어지면 그 해석(✡)은 항상 실행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물론 큰 숫자들의 강력한 법칙으로부터, 그리고 두브(Doob)의 법칙으로부터 귀결된다. 그러나 나는 (✡)가 철저히 불만족스러운 것을 밝히려고 노력하겠다: (✡)가 실제로 순서의 뒤바꿈을 의미하는 것을; 그리고 (✡)가 상황을 호도하는 것을.
해석 (✡)는 물론 빈도 이론과 동일하지 않지만, 빈도 이론가가 그것을 일종의 자신의 아이디어들에 대한 일반화로서 수용할 것이라는 정신에서 그 이론과 매우 가깝다; 그리고 빈도 이론가는 다음과 같이 (✡)을 지지하여 아마도 논증할 것이다.
첫 번째 사례로 ‘확률’은 사건들의 유한 집합 안에서 상대적 빈도를 의미하고, 두 번째 사례로 사건들의 무한 수열 안에서 상대적 빈도들의 한계를 의미한다. 무한 수열에 관해서 우리는 ‘분포’에 관하여, 다시 말해서, 근본적 속성들의, 혹은 사건들의 종류들의 빈도 한계들일 따름인 1이 그 총화인 다양한 근본적인 확률들에 관하여 말할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한 가지 수열에 상대적인 (폰 미제를 추종하여 우리 빈도 이론가들이 지금까지 한 바와 같이) 분포 대신에, 수열들의 - 즉, 동일한 주어진 분포를 갖는 - 집합에 상대적인 분포를 고찰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없다. 이것은, 그 교설에 따라 확률들과 분포들이 어떤 주어진 참고 수열에 상대적으로만 의미를 갖는 빈도 교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 이 새로운 형태로, 확률들과 분포들은 참고 수열들의 어떤 집합에 속하는 모든 저 참고 수열들에 상대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 집합은 아마도 ‘참고 집합’으로 지칭될 것이다. 마지막 단계로, 참고 집합의 척도가 1이고 예외적인 수열들의 집합의 척도가 0이라면, 확률들과 다른 빈도들을 지닌 ‘예외적인 수열들’을 포함하기 위하여 우리는 심지어 참고 수열들의 이 ‘참고 집합’을 확대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가 빈도 이론의 관점에서 확률 계산법에 대하여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해석임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 논증을 사안을 완전히 혼란시킨다.
왜냐하면 우리는, 또한 장(場)이나 ‘공간(space)’라고 불리는 근본적 분포에 상대적으로만 신-고전 이론의 의미에서 확률들이나 척도들에 대하여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분포를 설치하지 않고 우리는 수열의 집합의 척도에 관하여 전혀 말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분포는 확률들의 분포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다른 확률들의 체계인 우리의 측정 체계를 설치할 때 어떤 확률들로써 시작한다. (폰 미제스 자신이 항상 강조했던 바와 같이, 우리에게는 확률들이 주어지고 우리는 그 확률들로부터 다른 확률들을 도출한다.) 그리하여 ‘참고 집합’에는 척도 1이 있고, ‘예외적 집합’에는 척도 0이 있는데 우리의 초기 분포에, 다시 말해서, 처음에 주어지는 확률들에만 상대적이다; 그리고 이 확률들을, 다양한 초기 분포에 대하여 (다시 말해서 다양한 공간에 배열된) 척도 0이 될 척도 1의 수열들의 집합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혹은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모든 가능한 대안들의 지속적인 집합이 주어진다면, 부분집합 A가 또 다른 분포와 관련하여 척도 0을 가질 것이지만 상응하는 빈도들을 지닌 대안들의 부분집합 A는 한 가지 초기 분포와 관련하여서는 척도 1을 가진다. 그러므로 (✡)을 거의 모든 수열들의 빈도들을 통한 ‘확률’의 설명으로서 (혹은 정의[定義])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으로써 번역된 ‘척도 1’은 분포에, 다시 말해서, 최초에 전제된 확률들에 상대적임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는 틀림없이 가능한 해석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만족스럽다.
25. 신-고전 이론의 구조.
이 요점은 가장 중요하다. 이 요점은 만족스러운 해석은 p(x)를 빈도들을 통하여 설명하는 해석이 아닐 것임을 보여준다; 혹은 다시 말해서 그 해석은, 단칭 사건들이나 발생들이, 어떻든 빈도들과 연결되어 있다할지라도, 빈도 해석에 의하여 완벽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결과들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사건들의 수열들과 확률들이 신-고전 이론과 연결되어 있는 방식에 의하여 증명된다. 특정 사건이 - 가령 사건들의 수열에서의 m번째 사건 - 속성 P를 지닌 확률은 다음 방식으로 도입된다.
최초의 단계로서, 우리는 서로 배타적이고 철저한 속성들인 P, P', P"의 근본적인 집합을 고찰하는데 그 집합을 사건은 보여줄 것이고, 모든 이 숫자들의 총계가 1일 방식으로, 그 속성들 각각과 1미만의 양수를 (자유롭게, 혹은 당신이 원한다면 가설적으로) 조정한다.
이 자유롭게 배정된 (혹은 가설적으로 추정된) 숫자들은 그 근본적인 집합에 속하는 속성들의 확률들로 판명될 것이다. 그 숫자들이, 자체의 총계가 1이라는 조건에 종속되어, 자유롭게 선택될 수 (혹은 가설적으로 추정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여기서 더 오래된 고전적 접근방식의 (그에 따라서 숫자들은 모두 동등했다) 일반화가 있다.
다음 두 단계들은 독립 이론이나 결합 사건들의 확률 이론을 소개하려고 고안되었다. 그 단계들은, 본질적으로, 모든 가능한 수열들에 대한 고찰과 그 수열들에게 척도를 귀속시키는 것에 근거한다.
우리가 실제 수열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을 서술함으로써 모든 가능한 수열들을 구축한다:
(1) 실제 수열의 첫 번째 사건에 의하여 밝혀질 모든 가능한 속성들;
(2) 실제 수열의 첫 번째 두 사건들에 의하여 밝혀질 모든 가능한 속성들의 결합들;
(3) 실제 수열의 첫 번째 세 가지 사건들에 의하여 밝혀질 모든 가능한 속성들의 결합들; 기타 등등.
우리는 이 속성들의 다양한 가능한 결합들을 가능한 수열들이라고 지칭할 것이다.
한 가지 근본적인 속성들을 초과하여 속성들이 있다면
(a) 가능한 수열들의 숫자가 틀림없이 그 수열들의 길이보다 더 빠르게 - 사실상 적어도
(b) m번째 장소에는 각 속성이 적어도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사건들의 무한수열을 고려하고 따라서 무한 길이의 각각인 가능한 수열들의 집합을 고려한다면,
(a) 모든 가능한 수열들의 집합 U는 무한집합이 (연속체의 집합원의) 될 것임;
(b) m번째 원소가 속성 P를 지닌 모든 가능한 무한 수열들의 집합 S(m,P)는 또한 무한집합일 (동일한 집합원의) 것이다.
그러나 옛 고전 이론의 의미에서, 우리는 집합 U의 숫자에 의하여 나누어지는 집합 S(m,P)의 숫자를 속성 P를 지닌 m번째 사건의 확률로서 해석해야 한다.
이 숫자들이 무한하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우리는, 집합 U에 대해서는 척도 1을 결합하고, 집합 S(m,P)에 대해서는 첫 번째 단계에서 우리가 속성 P와 조정했던 숫자와 대등한 척도를 결합한다. 그리하여 가능성들의 고전적 비율은 우리가 속성 P를 지닌 m번째 사건의 확률로서 이제 인정할 후자(後者) 숫자와 동등하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는 m과 n에 대하여 동일한 확률을 m번째 사건과 n번째 사건에 결합시키고 그리하여 장소-선택에 대한 무감각을 확보한다.
세 번째 단계는 자체의 l번째, m번째, n번째... 사건들이 각각 속성 P, P', P"...을 지닌 수열들의 척도가 그 l번째 사건들이 속성 P를 지닌 (1) 수열들의, 그 m번째 사건이 속성 P'를 지닌 (2) 수열들의 집합들에 대한 척도들의 산물이라고 규정한다; 그 n번째 항이 속성 P''를 지닌 수열들의... 기타 등등. 다시 말해서 세 번째 단계는 독립의 산출물 규칙을 규정한다.
이것으로부터, 다른 더 많은 중요한 정리들 가운데서, 다음이 자동적으로 귀결된다:
(i) 빈도들이 확률들로 수렴되지 않는 수열들의 집합에는 척도 0이 있다. (결과적으로 비-수렴적 빈도들을 지닌 집합에는 척도 0이 있다.)
(ii) 주어진 도박 체계에 따라서 선택에 민감한 수열들의 집합에는 척도 0이 있다. (이것은 두브[Doob] 정리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우리가 척도 0을 확률 0으로 해석하고 불가능성으로 해석하지 않기 때문
에, 우리는 폰 미제스의 이론과 배치되는 수열들의 가능성을 제외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수열들을 생각해내는 확률이 0임을 밝혔다.
이 이론에서 확률들은 가능성들에 관한 일반화된 척도들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베르누이의 방법인 것의 도움을 받아서, 확률 분포로부터 이탈하는 빈도들을 지닌 수열들은 매우 드물어서 그 수열들의 발생은 무시될 수 있음이 밝혀진다.
그리하여 가능성들의 척도들로서 확률들에 대한 해석은 바로 신-고전 이론의 구조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신-고전 이론에서 확률과 독립 모두는 논리적으로 빈도들의 계산에 앞서는 개념들이다; 그리고 확률과 독립은 빈도들로 축소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률이나 독립에 관한 신-고전적 서술들로 인하여 우리는, 확률 1의 도움을 받아서, 물리학에 대한 모든 적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빈도들에 관한 결정적 서술들을 주장할 수 있다.
26. 단칭 확률 서술들.
빈도 이론과 신-고전 이론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단칭 확률 서술들에 대한 해석에 있다. 단칭 확률 서술들에 대한 빈도 해석은 과학적 발견의 논리의 73절에서 상당히 완전하게 토론되었다. 그 해석은 ‘다음 던지기가 앞면들일 것이라는 확률이 1/2’라는 서술이 ‘이 동전으로 하는 던지기들의 수열에서의 (유한이건 무한이건) 앞면들의 상대적 빈도가 1/2이다’라는 가설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서 그 문장은 단칭적으로 보일 따름이지만, 수열에 관한 문장으로서 합당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과 반대로, 신-고전 관점은 단칭 확률 서술들을 확률들을 단칭 사건들에, 혹은, 더 정확하게, 단칭 사건과 동시에 문제의 사건이 발생하거나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예상되는 환경들의 집합에 귀속시키는 서술들로서 해석한다.
나는 확률 이론을, 그 이론이 확률들을 단칭 사건들이나 단칭 서술들에 수열들의 집합들을 통한 우회를 통해서라기보다는 직접적으로 귀속시킨다면, ‘단칭 사건 이론’이라고 지칭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단칭 사건 이론’을 원한다면 그 이론이 확률을 이성적 믿음의, 다시 말해서, 주관적이거나 논리적 이론의, 정도(程度)로서 해석하는 이론이어야 한다고 언급되는 것을 흔히 듣는다; 특히 고전적 (라플라스적) 정의(定義)가, 확률이나 균등-가능성에 근거하여, 너무 좁은 것으로서 회피되어야 한다면. 합리적인 믿음의 정도들을 신뢰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듯이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단칭 사건 이론’을 채택하고 싶어 하는데 균등-확률에 근거한 이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소망이 주관적 이론이나 논리적 이론을 채택함으로써만 만족될 수 있다고 (어떤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이유로) 믿는다.
그러나 그 이론에 따라서 확률이 가능성들의 평가인 (혹은 척도) 고전적이거나 신-고전 이론이 균등-확률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이유는 전혀 없다. 반대로, 균등-확률이 평가나 척도를 확립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음과, 균등-확률이 항상 이론의 실제적인 수학적 발전에서 단지 사소한 역할만 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나는 나중의 절에서 확률에 대한 주관적이고 논리적인 이론들에 관한 몇 가지 심층적 언급을 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우리가 균등-확률 접근방식을 폐기한다면, 우리의 선택이 한편으로는 빈도 이론에 다른 한편으로는 주관적이고 논리적인 이론들에 국한된다고 믿을 어떤 이유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을 따름이다. 나는 먼저 균등-확률 경우를 - 완벽한 주사위 - 토론하고 그 다음에 주사위에 무게를 실어서 그 경우를 변화시킴으로써 나의 요점을 설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완벽한 주사위의 경우에, 우리는 다음 던지기의 여섯 가지 가능한 결과들 각각에 동등한 확률들을 귀속시킨다. 이것은 다음 던지기에 - 단칭 사건 - 관하여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이 단칭 사건에 (그 단칭 사건이 잠재적으로 어떤 빈도 분포를 지닌 수열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별도로) 관하여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 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우리가 단칭 사건에 관하여 주장하는 것은 - 다음 던지기 - 다음 방향들에 따라서 분석될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1) 우리는 먼저 던지기의 결과가 나타나는 여섯 면들 중 한 면에 의하여 규정되는 한에서만 던지기의 결과에 흥미를 갖는다고 결정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를 들어, 어떤 면이 서쪽을 향할 것인지의 문제는 무시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전에 고찰되는 ‘가능한 결과들’의 한계를 정한다.
(2) 사건이 발생할 객관적인 조건들은 (혹은 실행될 시험)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이 요점은, 우리가 완벽한 예측가능성을 확률 주장을 이용하여 실행된 주장으로서 해석할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
(3) 가능한 결과들 각각과 그 결과들의 논리적 결합들에 (나는 그 결과들의 분리나 논리적 총화를 특히 염두에 두고 있다) 확률 계산법의 공리들을, 특히 합산 정리, 충족시켜 문제의 숫자가 가산적 척도로서 해석될 숫자가 첨부될 수 있다고 우리는 상상한다; 그리하여 숫자 1이 고찰되는 모든 가능한 결과들의 분리(결합)에 첨부될 것이고, 숫자 0은 두 가지 예외적인 결과들의 결합(조우, 교차)에 첨부될 것이다.
(4) 이 숫자들에는 사건이나 실험의 조건들에 의하여 열려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에 대한 척도들로서의 의도가 있다: 이 조건들이, 객관적으로, 이 결과들에 대하여 대칭적이라면, 그 숫자들은 동등하다고 전제함으로써 발견될 수 있다.
(5) 이 분석에서 우리가 동등한 확률들을 전제된 객관적인 조건들의 대칭을 토대로 귀속시킨다는 것을 강조하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가 특정 주사위의 경우에 오류를 저지른다면 (그리고 모든 실제적인 물리적 주사위는 적어도 매우 사소하게 비대칭적일 것이다), 그 정도까지 우리가 하는 동등한 숫자들의, 다시 말해서, 동등한 확률들의, 귀속시키기는 역시 오류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을 전제했다:
(6) 대칭이나 동질성으로부터의 바로 그 사소한 편차들에 바로 그 균등-확률로부터의 사소한 편차가 일치한다.
이것이 (개략적으로) 동질적으로 예상되는 주사위의 경우에 대한 분석이다. 이것은 숫자들을 (가능성이나 확률의 척도들) 사건의 객관적 상황들에 귀속시킨다; 동시에 우리의 주관적 지식에도 그리고 우리의 지식이 보증할 믿음의 (객관적으로 이성적인) 정도에도 귀속시키지는 않는다.
차이점을 밝히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사위가 제시되고 던지기들의 결과들에 대한 확률 분포를 결정하라는 요구가 주어진다고 전제하라. 나의 분석에 따라서 합당한 답변은 이렇다: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주사위가 개략적으로 동질적이라면, 확률들이 틀림없이 개략적으로 동등하다.’
이제 기계장치를 통하여 중앙에서 ‘1’로 표시된 반대 면을 향하여 움직이도록 조정될 수 있는 무게가 실린 주사위로 방향을 선회하자.
(1) 우리는 무게의 중앙 위치에 대한 균등-확률이 개략적으로 유효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매우 작은 무게의 변화에, 작은 (그래서 아마도 무시될 수 있는) 균등-확률로부터의 편차가 일치할 것이다; 그리고 역학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그 편차가 나타나는 면 ‘1’의 확률에서의 증가를 의미할 것임을 암시할 것이다.
(2) 우리에게 ‘그 작은 차이점을 당신은 무엇이라고 부르는가?’라는 질문이 주어진다면 합당한 답변은,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알지 못한다.’이다. 나는 우리가 균등-확률로부터의 편차를 알려진 이심률(異心率: eccentricity)로부터 계산할 수 있다고 (바일[Weyl]이 제안하는 바와 같이)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확률 분포는 무게가 실린 주사위만의 특징이나 속성이 아니라 모든 관련된 조건들의 특징이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포는, 예를 들어, 그 주사위가 떨어지는 표면에 - 가령, 그 표면이 강철이나 고무나, 벨벳으로 덮인 평면 쿠션이나 진흙이든 간에 - 부분적으로 의존할 것이다 (위 21절 참조).
(3) 그러나 우리가 무게가 실린 주사위의 경우에 대칭 고찰들을 확률 분포의 계산에 적용할 수 없다할지라도, 우리는 그 계산에 대하여 중요한 일을 정말로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작든’ 혹은 ‘크든’ 무게의 변화가 ‘1’의 확률을 증대시켰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알지 못할지라도, 단칭 사건의 특정 조건에 부착된 확률 분포가 있다는 것을 수반한다.
(4) 물리적 사건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리고 우리가 흔히 계산할 수 없는 숫자들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주장에 관해서 난제는 없다. 수학과 수학적 물리학에서 우리는 매우 흔히 그 수학적 가치들을 우리가 명시할 수 없는 (혹은 정확하게 명시할 수 없는) 수학적 기능의 행태를 토론함으로써 중요한 결과들을 얻는다.
(5) 확률 숫자들의 더 정확한 결정에 덧붙는 바로 그 불확실성은 내가 보기에 확률의 객관성에 대한 명확한 표시이다. 무게가 실린 주사위의 경우를 다시 고려하라. 우리는 이심률(異心率: eccentricity)과 다른 관련된 조건들에 대하여 매우 정확하게 정보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지식들 중 이 지식은, 비록 그 지식으로 인하여 우리가 예를 들어 분포가 동등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얻고 싶어 하는 정밀의 정도를 지닌 확률을 결정하는 데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객관적인 확률은 있을 것이지만 우리는 그 확률을 알지 못하거나 아직 그 확률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를 들어 정확한 결정을 하려는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킬 실험들의 긴 수열을 수행할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을지라도, 객관적인 확률을 측정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주관적 이론을 토대로, 우리의 지식 상태는 정확히 매 순간 확률을 결정
한다. 우리의 지식 상태로부터 실제로 확률을 계산하는 데는 중대한 난제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 계산이 우리의 지식 상태나 지식 부족에 대한 척도이기 때문에 모든 지식 상태에 대한 정확한 숫자이다. 이런 관점을 토대로, 반복되는 실험들을 통하여, 다시 말해서 심층적 지식을 습득함을 통하여 그 확률을 측정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에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심층적 지식은, 일반적으로, 확률을 변경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 장[章] 참조.)
내 견해로, 실험의 반복은 확률을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객관적 확률에 대한 우리가 얻는 추정치의 정밀성을 개선하기 위하여 실험의 반복을 이용할 것이다.
27. 주관적 및 논리적 이론들에 대한 추가 비판.
단칭 사건들의 객관적 확률에 대한 나의 분석을 시작하기 전에, 나에게는 주관적 및 논리적 이론들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앞의 장(章)의 관점과 다소 다른 관점에서, 말할 것이 조금 더 있다.
나에게는 우리가 문제에 봉착하지 않고도 확률 계산법을 이성적 기대의 정도들 중 한 가지 정도나 혹은 그와 같은 종류의 것으로서 확률 계산법을 해석할 수 있음을 그리고 우리는 보다 객관적이거나 심리학적인 견해를 (램지[Ramsey]나 굿[Good]이나 케메니[Kemeny]와 함께) 채택함으로써나 보다 논리적인 견해를 (제프리즈[Jeffreys]나 케인즈[Keynes]나 카르납[Carnap]과 함께) 채택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음을 인정할 마음이 있다.
내가 여기서 비판할 예정인 것은 이 해석들이 물리 과학들에서 확률의 이용을 기술한다는 견해이다.
나의 관점에서, 물리학의 서술들은 객관적이어서 어떤 정도로도 우리가 지닌 정보의 상태와 관련되지 않는다: 또한 그 서술들은 우리가 지닌 정보나 우리가 지닌 무지를 ‘표현하지’도 않는다. 그 서술들은 세상에 관한 - 물론추측성 주장들 - 주장들이다.
이것은 물리 과학들의 확률 서술들에 대해서도 유효하다. 그 서술들은 우리의 지식 부족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지식의 부족은 빈도들에 대한 지식을 기적적으로 생성하지 않는다 - 심지어 큰 숫자들의 도움을 받아서도 생성하지 않는다.
빈도 가설들이 - 가령, 스펙트럼의 선들의 강력함에 관한 - 다른 물리학 가설들만큼 객관적이라는 것은 아마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칭-사건 확률들의 객관성을 거부하는 몇몇 사람들에 의하여 인정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요점은 그 차이점이 비교적 사소하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단칭-사건 확률들은 (보렐-칸텔리[Borel-Cantelli] 법칙에 의하여 그리고 두브[Doob]의 법칙에 의하여) 객관적인 빈도 서술들을 낳는다. 다른 한편으로 합당한 믿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확률들은 합당하게 기대되는 빈도들에 관한 서술들을 낳기만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석이 주관적이라면 주관적 의미에서 ‘합당하게 기대되는’이고 원래 해석이 논리적이거나 항진명제적이라면 논리적 의미에서 ‘합당하게 기대되는’.
단칭 사건들의 객관적인 확률들의 경우에, 우리는 먼저 단칭 사건이 발생할 객관적인 조건들을 평가한다; 그 다음에 수학적 추론을 통하여 어떤 빈도들이 발생할 조건들을 평가한다. 주관적이고 논리적인 확률들의 경우에, 우리는 먼저 ‘주어진’ 정보에 대한 서술인 ‘자료들’과 문제의 사건에 대한 서술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평가한다; 그 다음에, 수학적 도출을 통하여, 이 동일한 자료들과 어떤 빈도 서술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평가한다. 따라서 우리가 얻는 것은 우리의 정보와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객관적 확률 가설로부터 하는 바와 같이, 시험되도록 그리고 필요하다면 배척되도록 빈도 가설을 도출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지식이 어떤 빈도에 대한 기대를 보장하는 정도에 관한 참인 서술을 (사실상 항진명제적 서술) 얻는다 (계산이 올바르다는 조건으로): 물리적 추측 대신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식의 상태에 관한 자명한 이치와 그 이치가 의미하는 바를 얻는다. (앞 장[章] 참조.)
주사위의 경우를 다시 고찰하라. 주관적이고 논리적인 이론들은 실제로 물리학자의 흥미를 끄는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이 주사위는 어떻게 행동할까? 그 이론들은 (인정되는 바, 답변이 불가능한) 문제들을 실제로 제기하지 않는다: 다음 던지기에서는 어떤 면이 나올까? 그 이론들이 묻는 문제는 다른 문제이다; 그 문제는 이렇다: ‘어느 정도까지 우리는 우리의 자료로 인하여 이 주사위의 행태에 관하여 이런 서술이나 저런 서술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다음 단칭 사건에 관하여 그 이론들은 이렇게 물을 수 있을 따름이다: ‘어느 정도까지 우리의 지식으로 (혹은 무지) 인하여 우리는 다음 던지기에서 1이 나타날까?’
나는 주사위의 행태에 관심이 있고, 내가 믿기에, 대부분의 물리학자들도 그렇다. 나는 주사위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알고 싶어서 예측들을 - 예를 들어, 주사위의 면들이 특정 조건 하에서 수행된 던지기들의 긴 수열에서 개략적으로 동등하게 자주 나타날 것이라는 것 - 제안할 준비가 되어 있다; 혹은 조건들이 주사위의 모든 면들과 관련하여 대칭을 확보한다는 것.
대조적으로, 주관적이고 논리적인 이론가들은 주사위의 행태에 관한 추측들에가 아니라 주사위에 관하여 자신들이 얼마나 많이 이미 알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다음 던지기의 결과에 관한 자신들의 무지가 여섯 면들과 관련하여 대칭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리하여 여섯 가지 확률들이 동등하다는 것을 발견한다고 말하자.
우리는 이제 일련의 던지기들을 시작하여, 가령, 3, 1, 5, 1, 2, 2, 3, 5를 얻는다. 주관적이고 논리적인 이론가들은 이 새로운 자료들이 틀림없이 다음 던지기의 확률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게 되어 있다. 많건 적건 확률들은 변화할 것이다: 4와 6에 대한 확률들은 감소할 것이고 (많게 혹은 적게), 1과 2에 대한 확률들은 증가할 것인데 이유인즉 1과 2가 각각 두 번씩 나타났던 반면 4와 6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주사위가 동질적이라고, 그리고 그 수열은 평범한 수열에 관한 아름다운 사례로 판명된다고 전제하라. 그렇다면 확률들은 - 주관적이고 논리적인 해석들의 의미에서 - 항상 다소 변화할 것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균등분배에 점점 가깝게 안정될 것이다. 던지기들과 새로운 ‘자료들’의 긴 수열의 전체 충격은 없었다. 그리하여 자료들은 ‘전체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상황은 객관적 이론의 관점에서는 매우 다르게 보인다 - 단칭 사건이든 빈도 형태이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사위 던지기들의 수열은 가설의 통계적 시험을 구성했다. 우리가 처음에 주사위에 무게가 편중되어 있다고 의심했더라면 그 시험은 우리의 의심을 반증했을 텐데. 그리하여 우리는 시험이 동등한 확률에 대하여 우리가 원래 지니고 있던 추측을 입증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관적이고 논리적인 해석들은 두 가지 것을 혼동한다: 객관적인 물리 체계들에 관한 물리적 서술들과 이 서술들이 ‘우리의 경험에서 구축되는’ 정도에 대한 인식론적 추정치들.
이 오류들을 설명하는 모든 단칭-사건 이론이 틀림없이 주관적이거나 논리적이라는 것은 잘못된 믿음만이 아니다. 새로운 ‘정보’가 다양한 정도들로 확률들을 변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인하여 어떤 사상가들은 확률들이 실험적 조건들의 객관적 속성들을 기술할 수 없다고 믿게 되었다: 주사위 던지기가 짝수로 나타난다고 우리가 ‘정보를 받는다’면 2를 던지는 확률은 1/6에서 1/3로 증가한다; 기호로 쓰면:
p(2) = 1/6
p(2, 짝수) = 1/3.
이것은 틀림없이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의 공식 안에 있는 ‘짝수’라는 단어를 ‘정보’로 해석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주관적이거나 논리적인 해석을 채택했다. (우리가 용어사용법에 의하여 두 가지 해석을 혼합하는 데로 잘못 이끌려가지 않는다면, 이것은 우리가 ‘정보’라는 용어를 심지어 객관적인 이론의 맥락으로 사용할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객관적 관점에서, ‘p(2)’와 p(2, 짝수)는 두 가지 다른 실험적 배열들과 관련된다: 전자(前者)는 모든 주사위 던지기가 고찰되는 배열과, 후자(後者)는 주사위 던지기의 결과가 우연히 짝수라면 우리가 주사위 던지기를 무시하기로 결정하는 배열과 관련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또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짝수’라는 기호에 의하여 표현되는 ‘정보’는 우리가 다른 질문을 하고 있음을 - 우리가 더 이상 ‘2를 던지기 확률이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지 않고 대신에 ‘짝수 숫자들로 나타나는 저 주사위 던지기들만을 고려하여, 2를 던지는 확률은 무엇인가?’ -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 문장에서 ‘What is the probability of throwing 2, taking into account only those throws which result in even numbers?’라는 부분은 분사구문 taking into account 이하 부분이 분사구문으로 쓸 수 없기 때문에 - 분사구문의 주어가 What이 될 수 없다 - if we take into account ~로 써야 한다. 역자 주).
28. 단칭 사건들의 확률에 대한 경향 해석.
이전 두 개의 절에서 나는, 단칭-사건 이론이 균등-확률을 토대로 구축되지 않는다할지라도, 객관적인 단칭-사건 이론에 반대하는 통상적인 논증들이 근거가 없음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가능성들에 대한 척도로서의 확률이라는 개념은 다소 변변찮은 상태로 남아 있다고 나는 인정한다; 특히 이 공식이 정의(定義)로서 고찰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가능성’은 여기서 ‘확률’에 대한 또 다른 단어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아무튼 가능성은 그 의미가 ‘확률’의 의미보다 더 명백한 단어가 아니다 (‘빈도’처럼).
‘확률’을 정의(定義)하는 것은 나의 의도가 아니다 - ‘단칭 사건들의 확률’들을 정의(定義)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우리에게는 정의(定義)가 필요하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공리 체계가 있기 때문에) 단지 해석만 필요할 따름이다; 그리고 나는 해석을 제시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그 해석을 ‘가능성들의 척도’라는 표현보다 직감적으로 더 수용가능하게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는 단칭 사건의 객관적 확률을 그 사건이 발생하도록 만드는 객관적 경향의 - 명시된 물리적 상황에 내재되어 사건을 실현하는 경향이 지닌 힘의 - 척도로서 해석할 것을 제안한다.
나에게는 나의 의도들에 대한 이 선언이 나의 실증주의자 친구들 중 많은 친구들에 의하여 두려움으로 받아들여질 것임에 추호의 의심도 없는데 그들은 이 선언 안에서 내 자신의 형이상학적 - ‘경향들이나 의향들’이라고 나는 쓸 뻔 했지만 나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 - 증거를 볼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 ‘성향(disposition)’이라고 말하자.
나는 단어들의 마술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나는 ‘의향’이나 ‘경향’대신에 ‘성향’이라는 용어를 쓰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의 설명적 가설들처럼, 객관적 확률에 관한 가설이 관찰들에 근거하여 알려질 수 있는 것을 멀리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초월적(transcendent)임을 강조하고 싶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의 25절 말미 참조.) 이것은 객관적 빈도 가설들에 유효하다; 그리고 그 가설들이 빈도들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단칭 사건들의 객관적 확률들에 관한 가설들에 대하여, 이것은 훨씬 더 높은 정도까지 유효하다 (왜냐하면 그 가설들이 지닌 보편성의 정도가 더 높기 때문이다).
단칭 사건들의 객관적 확률들에 대한 해석을 설명하기 위하여, 먼저 경향 1은 사건이 확실하거나 혹은 거의 확실하게 발생함을 의미하며, 경향 0은 사건이 확실하거나 혹은 거의 확실하게 발생하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지적함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한계들 안에서, 양쪽 객관적 해석들은 상당히 잘 일치한다. 그러나 이것은 1이나 0이 아닌 확률들은 유발하는 것은 환경 자체라기보다는 정확한 환경에 대한 우리의 지식 부족이 아닌지의 의문을 즉각 제기한다. 이 의문에 대한 답변이 ‘그렇다’라면 우리는 객관적 이론을 포기해야 한다. 답변이 ‘아니다’라면 우리는 그 이론을, 심지어 ‘환경’에 대하여 가장 완벽한 지식도 결과를 예측가능하게 만들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비결정적인 사건들에만 적용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는 그 이론을 동전 던지기들과, 아무도 이런 의미에서 비결정적이라고 믿지 않은 거시적-물리적 사건들(macro-physical events)과 같은 것들에 적용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중요한 반대론이고, 객관적 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문제의 근원으로 갈 것을 강요하는 반대론이다.
동전들 던지기의 기계를 고려하라: 우리가 동전을 구멍 속에 넣고 단추를 누르면 동전이 기계 밖으로 나와서 부드러운 쿠션 위로 떨어진다. 이것이 기계에 의하여 수행되는 것을 한두 번 내가 보고 나에게 앞면에 걸고 내기를 할 마음이 있는지 질문을 받는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합당한 답변은 ‘나는 이 기계가 자체의 결과들 무작위화 하는 기계인지 (잘 구축된 룰렛 테이블이 그럴 것처럼)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바에도 불구하고 그 기계는 그렇게 구축되어서 특별한 방식으로 단추를 누름으로써 (또는 어떤 유사한 수단으로 통하여) 우리가 마음대로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가 될 것이다. 동전이 우리 눈앞에서 가령 평탄하지 않은 표면 위로 굴러가도록 되어 속도가 붙은 다음에 비커 속으로 떨어진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두 번째 경우에 우리는 실험의 객관적 조건이 그러한지 확신할 것인 반면, 첫 번째 경우에 우리가 실험의 객관적인 조건이 기계적인 초기 조건의 어떤 ‘무작위성’을 보장하는 그런 것인지 의심할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지식의 결핍이 존재한다. 첫 번째 경우에 미지의 객관적 조건은 그 조건을 아는 사람들이 정확한 예측들을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쉽게 될지도 모른다. 첫 번째 실험은 내가 아는 것보다 그 실험에 대하여 더 많이 아는 사람들에 의하여 그렇게 예측될 것이고 아마도 심지어 통제될 것이다.
두 번째 경우에 상황은 다르다. 결과를 예측하는 데 아마도 사용될 저 초기 조건이 ‘무작위화’ 되는 것은 실험 조건의 한 부분이다. 이것으로써 그 조건이 그런 방식으로 조절되어서 (거친 표면, 기타 등등) 동일한 명시된 조건 하에서 수행되는 실험들의 길 수열 안에서 (‘무작위화’를 포함하여) 기계적인 초기 조건은 무작위적 방식으로 변화될 것 같다고 우리들 대부분은 추측할 것임을 나는 의미한다.
우리의 객관적인 확률 가설의 토대인 초기 조건의 무작위성을 명시된 실험의 조건이 보장하는 것은 이 긍정적인 추측이다: 우리의 실험적 내역들이 무작위적인 초기 조건이 반복된다면 무작위적인 초기 조건을 만들어내는 그런 것이라고 우리는 예측한다.
그러나 굴러가는 동전과 거친 표면의 실제적인 초기 조건을 재빨리 측정하여 계산하는 사람이 있어서 동전이 비커 속으로 떨어지기 바로 전에 매번 올바른 예측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쩔 것인가? 나의 답변은 그의 예측들이 빈도 이론과 갈들을 일으키지 않을 것과 같이 단칭 사건들의 객관적 확률들에 대한 우리의 추정치들과도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실험의 결과를 조금 앞서서 알든 모르든 빈도들은 안정성과 무작위성을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개별적 실험들의 경향들 - 혹은, 더 정확하게, 개별적인 실험적 장치 - 또한 그러하다. 왜냐하면 ‘경향’으로써 나는, 실험이 충분히 자주 반복된다는 조건으로만, 이 빈도들을 유발하는 장치의 의향을 (혹은 여러분이 그것을 지칭하고자 원하는 모든 것) 정확하게 의미하게 때문이다. 경향들은 빈도들을 유발하는 의향들이다: 이것은 신-고전 이론에 의하여 제안되는 해석이다. 그러나 ‘경향’은 ‘빈도’를 의미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너무 드물게 반복되어서 무작위 수열의 충분한 세그먼트 (혹은 ‘빈도’) 같은 것을 유발하지 않는 사건들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문 사건들은 경향을 지닐 가능성이 높다.
주사위의 경우에 숫자 1/6은 그리하여 실험적 장치를 규정하는 것으로서 해석되어, 사전인지나 빠른 계산을 통하여 동전 던지기들의 긴 수열에서 모든 결과를 예측하는 데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이 장치에 대하여 유효한 특징으로 남는다. 숫자는 우리의 지식 결핍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근거로 개별적 실험 장치에 귀속된다. 추가 지식은 실험적 장치를 규정하는 확률이나 경향을 방해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질문이 - 동전을 거친 표면 위로 굴리는 것과 같은 과정들이 초기 조건을 무작위화 할 것이라고 우리는 왜 믿는가? - 남는다. 나에게는 후기(Postscript) II권, 29절 및 30절에서 이 질문으로 돌아오려는 의도가 있다. (란데의 칼날[Landé's Blade].)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언급만 더 하고 싶다. 첫 번째 언급은 경향을 언급함으로써 나는 뉴튼의 힘의 개념과 흡사하지만, 가속도들보다는 빈도들을 유발하기 때문에 힘과 구별되는 직감적 개념을 제안하고 싶다. 빈도들은 경향들이 변할 때 변한다. 경향들은 뉴튼적 힘들로서 (버클리[Berkeley]가 ‘불가사의한 것’으로서 배척했던) ‘초월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다. 수학적으로 경향들은 완벽하게 정확하다 - 경향들은 단순한 계산법에 대한 해석들이다. 그리고 경향들의 시험가능성에 관하여 우리는 경향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확률 1을 지닌) 빈도 서술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심지어 빈도 서술들을 초월하는 성분도, 어떤 의미에서, 시험될 수 있다 - 다른 종류의 빈도 서술들에 의하여. (이것은 양자 이론을 분석함으로써 밝혀질 수 있다.)
나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요점을 이렇다. 경향(propensity) 해석은, 내가 믿기에, 고전적 통계 역학에 대한 해석이다. 볼츠만(Boltzmann)은 동향(tendency)에 대하여 말했다. 그러나 동향이 고전적 저술가들이 가능한 경우들에 대하여 동등하게 개연적인 것의 지수를 언급할 때 실제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을 가장 잘 기술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전적 저술가들은 이 지수가 경향의 척도로서 (가장 일반적인 척도는 아니라할지라도 특히 중요하고 편리한 척도) 주어진 사건을 유발하기 위하여 어떤 명시된 조건에 특징적인 것이었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논리적 확률이라는 개념이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을지라도, 나는 물론 그것을 저술했을 때 빈도 이론가였다. 나는 확률들에 대한 계산법에는 복수의 해석들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빈도 해석이 물리학에서의 모든 적용에 대하여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계속해서 믿었다.
나는, 신-고전 이론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빈도 정리들의 결정적인 중요성에 비추어 이 견해를 아직도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견해들이 지닌 지속성보다는 중단을 강조하는 일이 더 올바르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그 변화는 먼저 양자 이론에서 상황을 이해하려는 지속적인 시도의 결과로서 발생했다 (그 상황에 대해서는 후기의 II권 및 III권에 더 많은 서술이 있다): 내가 최초로 경향 해석의 필요를 느낀 것은 여기였다. 여기서부터 나는 신-고전 이론이 내가 폰 미제스의 영향을 받아서 이전에 구축하기가 불가능하다고 간주했던 고전 이론과 빈도 이론 사이의 ‘교량’을 건설함으로써 정말로 경향 해석에 대한 수학적 토대를 제공했음을 발견함으로써 크게 만족하여 확률 이론으로 돌아갔다.
정말로 경향 해석의 도입은 임시적인 것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 경향 해석은 ‘우연 이론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한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
49절 및 64절 참조). 다시 말해서 경향 해석은 동전 던지기들의 거의 모든 유한 수열들이 왜 자체들이 행하는 놀라운 방식으로 행동하는지를 설명한다: 왜 긴 수열들은 마치 그 수열들의 상대적 수열들이 한계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 왜 그 수열들이 이 기묘한 규칙성과 특징적인 불규칙성을 결합하는지; 그리고 왜 그 수열들의 세그먼트들이 베르누이의 법칙에 그렇게 잘 복종하는 듯이 보이는지.
결론적 요약, 1982년.
(1) 이 책의 마지막 장의 요지는 우연 이론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가 (내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지칭한 바와 같이)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이제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이 당혹스러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동전 던지기들이나 주사위 던지기들에 대한 모든 기록된 수열이 한편으로 전형적인 무작위 특징을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 한계로 향하는 듯이 보이면서 안정된 상대적 빈도를 보이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 수수께끼는, 우리가 확률 계산법에 대한 경향 해석을 전제한다면, 이제 완벽하게 풀릴 수 있다. 계산법 자체는, 잘-알려지고 고도로 만족스러운 사건들의 독립에 대한 정의(定義)가 첨부될 수 있는 명제논리학의 미터적 일반화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과학적 발견의 논리, 새로운 부록 ✡iv 및 ✡v 참조) 판명된다.
그 계산법으로, 경향 해석을 통하여 해석되어, 인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A) 불변적인 조건 하에서 일어나는 독립적인 사건들의 거의 모든 유한 수열들은 반복되는 단칭 사건들의 확률들과 (경향들) 동등한 한계들을 지향하는 상대적 빈도들을 보이는 경향을 지닐 것이다.
(B) 거의 모든 그런 수열들은 다양한 방식들로, 예를 들어 결국 모든 도박 체계들의 실패에 의하여, 기술될 수 있는 무작위적 특성을 지닐 것이다.
이 독립적 사건들 (A)와 (B)의 수열들이 지닌 두 가지 특징들은 수학자 리처드 폰 미제스(Richard von Mises)에 의하여 1920년대에 상정되었는데 그는 그 특징들을 공리들이라고 지칭해서 그 공리들을 토대로 확률의 수학적 이론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공리들은 이제, 우리가 확률들은 결과적으로 자체를 실현하는 단칭 사건들의 경향들로서 해석한다면, 지적된 바와 같이, 단순한, 거의 논리적 체계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근거들에 입각하여 거의 필수적인 요건으로 판명된다.
이 중요한 순수 수학의 업적은 야코프 베르누이(Jacob Bernoulli)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추측 기법[Ars Conjectandi], 1713년) 그는 20년 동안 놀라운 업적인 그 책을 저술했다. 그 업적은 많은 수학자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나는 그 저술을 순수 수학의, 그리고 가능한 가장 큰 철학적 관심을 지닌 엄청난 성공작으로 간주한다. 이 아이디어들은 세상의 중요한 수수께끼들 중 한 수수께끼이자 리처드 폰 미제스가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간주했던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2) 이 장(章)에서는 이 발전이 확률 계산법의 주관적 해석과는 양립할 수 없음이 또한 밝혀진다.
(3) 우리의 지식 결핍이라는 이유로만 우리에게는 확률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견해는 라플라스(Laplace)이래 많은 위대한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폭넓게 주장되었다; 그 견해는 나에게 보내진 두 통의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옹호되었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 한 통이 재 인쇄되었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내가 그렇게 많은 논증들을 (자주 나는 내 자신의 말을 반복할까봐 두렵다) 가능한 한 철저하게, 주관적 이론은 그렇게 할 수 없는 반면, 객관적 해석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을 밝히려는 노력에서 이 책 안에 수록한 주요한 이유이다.
(4) ‘주사위-장난을 치는 하느님’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반대론은 의심할 바 없이 확률 이론은 우리의 지식 결핍인 우리 인간이 지닌 오류성에 기인하는 임시방편이라는 그의 견해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서, 분명히 결정론과 연결된 견해인 확률 이론의 주관주의적 해석에 대한 그의 믿음에 기인하는. 나는 우리의 모임에서 이 견해가 폐기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그의 주의를 돌리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1954년 3월 31일자 보른에게 보낸 파울리(Pauli)의 편지에 따르면 (우리의 모임 초반에 이 견해를 틀림없이 지지했던) 아인슈타인은 이 견해를 폐기했다.
(5) 우연 이론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적어도 인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한 가지 가능한 길을 연다는 것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 해결책이 (명백한) 인과 법칙들이 통계적 질량 효과들로서 (예를 들어 보일의 법칙이나 플랑크의 양자의 작음에 근거한 인과 법칙들로서) 도출될 수 있는 저 경우들에서 길을 연다는 것. 그러나 우리가 인과적 특징의 모든 효과들을 (컴프턴 효과[Compton effect]와 같은 모든 표면적으로 결정론적인 효과들) 동일한 방식으로 취급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는 듯하지 않다; 다시 말해서 힘들을 1과 동등한 경향들로서 취급하기.
(6) 물론 나는 이 책을 구상한 이래 몇 가지 새로운 논증들을 발견했다 (1953년경에). 그 논증들 중 몇 가지는 1982년 독일어본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의 7판에서 최근 실린 새로운 부록들에서 발견될 것이다. 나는 그 논증들이 과학적 발견의 논리의 다음 영어본에도 포함되기를 희망한다.
사실주의와_과학의_목표_III장_확률에_관한_객관적_이론들에_대한_언급.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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