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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자리 / 오길영

이윤진이카루스 2013. 8. 25. 11:56

[크리틱] ‘한국’문학의 자리 / 오길영

등록 : 2013.08.23 19:00 수정 : 2013.08.2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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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길영 충남대 교수·영문학

다양한 세계문학전집이 나와 꽤 인기를 끈다. 이런 현상은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의 관계를 숙고하게 만든다. 첫째, 각 민족문학이 세계문학공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문학적인 가치평가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각 국가가 세계자본주의 체제에서 차지하는 경제적 지위와 정치·군사·문화적 힘의 역학관계가 동시에 작용한다. 근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성립 이후에 지금까지 세계체제와 국제어의 중심축은 좋든 싫든 유럽과 북미의 세력권이었다. 유럽과 북미 국가의 문학이 세계문학을 선도한 것은 문학적 우월함 때문만은 아니다. 경제와 언어의 영향력이 관건적 역할을 한다.

2차대전 이후 주목받게 된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경우도 스페인어와 그에 뿌리박은 유럽문화 전통의 힘이 작용한 것이며, 1960년대 이후 일본문학의 부상, 최근 중국문학의 대두도 이들 국가가 세계자본주의 체제에서 차지하는 뚜렷한 위상과 관련된다. 경제적 위상이 높지 않다면, 적어도 그 국가가 지배적인 국제어의 세력권에 있어야 한다. 예컨대 아일랜드 문학의 경우가 그렇다. 20세기 초반 아일랜드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미약했지만, 영국의 오랜 식민통치에서 강제적으로 부과된 영어와 영국문화에 대한 아일랜드 작가들(조이스, 예이츠, 베케트 등)의 비판적 자의식과 창조적 변용이 세계문학공간을 재편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체코의 카프카도 유사한 사례로 꼽을 만하다.

둘째, 세계문학공간에서 한국문학이 차지하는 위상은 세계문학과의 피상적 교류나 다른 나라 작가들과의 만남, 번역 활성화를 통해서는 높아지기 힘들다. 물론 그런 작업도 필요하지만 한국문학공간에 번역·수용되어 읽히는 세계문학과의 냉정한 비교와 상호교섭의 분석이 긴요하다. 요는 ‘나’를 남에게 알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얼마나 아는가이다. 비교컨대 한국영화가 활성화된 이유 중 하나는 한국의 영화시장에서 한국영화와 외국영화가 실시간으로 관객에게 비교평가를 받으며, 그런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국영화가 분투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한국문학 수용자의 수준은 이미 국제적이고 세계화되어 있다. 마치 유럽 축구와 미국 야구를 실시간으로 즐기듯이, 그들은 한국문학을 외국문학과 자연스럽게 견주면서 선택한다. 그렇다면 영화비평이 그렇듯이 ‘한국’문학으로 한정된 문학비평의 폭도 넓어져야 하지 않을까.

셋째, 번역된 세계문학과의 비교를 통해 한국문학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국내에도 많이 소개된 현대 미국소설의 거장들인 토머스 핀천, 코맥 매카시, 필립 로스, 돈 드릴로 등의 작품을 다시 읽으며 갖게 된 질문. 이들에 견줄 만한 한국 소설의 거장은 누구인가? 한 나라 문학의 수준은 양이 아니라 종국에는 그 나라 문학이 거둔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판가름된다면, 그 답은 긍정적이지 않다. 당대 세계문학의 거장들이 어떤 새로운 내용을 표현하고 형식과 기법을 실험하는지를 겸허하게 배우고 창조적으로 변용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끝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국 현대문학의 생산적 대화와 그 결실이 보여주듯이, 이런 작업은 본격문학, 고급문학만이 아니라 각 나라가 축적한 장르문학과의 교섭도 아우른다. 한국문학의 내용과 형식이 풍성하지 못한 원인 중 하나는 본격문학의 비옥한 토양이 되는 다양한 장르문학 전통이 두텁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런 대화와 교섭이 이뤄질 때 비로소 괴테가 말한 각 민족문학의 호혜적 관계에서 생성되는 세계문학의 구체적인 면모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오길영 충남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