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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주 - 부록

이윤진이카루스 2013. 12. 8. 15:17

  부록

 

 

 

 

 

 

 

 

 

 

 

 

 

 

 

 

 

 

비결정론은 충분하지 않다: 발문(跋文)

 

 

여기서 나의 주제는 자유이다. 인간의 자유로써 나는 자유의지로 보통 지칭되었던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의지(will)’라는 용어를 토론함으로써 우리가 용어법에 관한 무익한 문제들에 빠지게 될까봐 그 용어를 피하겠다. 유사한 이유들로 인하여 나는 도덕적 자유를, 비록 그 자유가 철학자들 자신이 매우 빈번하게 흥미를 느꼈던 종류의 인간의 자유라 할지라도, 명시적으로 토론하지 않겠다. 대신에 나는 예술작품들을 창조하거나 과학에서 설명적 이론들을 창조하는 자유를 토론함으로써 시작하겠다. 도덕적 자유는 매우 중요하지만, 다시 그 자유에 대한 토론으로 인하여 우리는 도덕적 책임의 문제나 심지어 보상과 처벌의 문제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도덕적 문제들에 대한 직접적인 토론을 피함으로써 그리하여 사실에 대한 서술들이나 과학적 이론들에 찬성하거나 반대하여 창조하는 자유의 문제들과 근거들 및 논증들을 평가하는 자유의 문제들에 내 자신을 국한시킴으로써 나는 나의 토론을 단순화시키고 싶다. 아마도, 우리가 이런 종류의 자유를 향유한다면 우리는 또한 도덕성의 영역에서 창조하고 추론하고 선택하는 자유를 향유하고 그런 창조 및 선택과 병행하는 책임을 향유할 것이다. 반면에 우리에게 적어도 사실에 관한 문제들을 추론하여 논증하는 자유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도덕적 자유가 있을 수 없다.

이 발문(跋文) 논문의 제목 비결정론은 충분하지 않다에는 비결정론적 물리학이 옹호하려는 이 책 대부분의 관심사인 자체로 인간 자유에 대한 여지를 남길 정도로 충분하지 않음을 지적하려는 의도가 있다: 비결정론은 인간의 자유를 이해될 수 있게 만드는 데 충분하지 않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주장하는 바,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추가하여 적어도 제 3 세계를 향한 제 2 세계의 인과적 열림으로서 뿐만 아니라 제 2 세계를 향한 제 1 세계라고 내가 지칭하는 것의 인과적 열림이 필요하고 그 반대 상황도 필요하다. 그리하여 내가 제 1 세계, 2 세계, 그리고 제 3 세계라고 부른 것을 설명함으로써 나는 시작하겠다.

 

 

                         제 1, 2 3 세계

 

1 세계로써 나는 통상적으로 물리학의 세계라고 지칭되는 것을 의미한다: 바위들과 나무들과 힘들(forces)의 물리적 장(: fields)들의 세계. 나는 또한 여기에 화학과 생물학의 세계들을 포함시키고자 한다. ‘2 세계로써 나는 심리적 세계를 의미한다. 그 세계는 인간 정신을 연구하는 학생들에 의하여 연구되지만 동물들의 정신을 연구하는 학생들에 의해서도 또한 연구된다. 그것은 공포와 희망의, 행동하려는 의향의, 그리고 잠재의식적 및 무의식적 경험들을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주관적 경험들에 관한 감정의 세계이다. 그리하여 1 세계2 세계라는 용어는 두 가지 모두 쉽게 설명된다. 내가 3 세계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설명은 다소 더 어렵다.

3 세계로써 나는 인간정신에 관한 사물의 세계를 의미한다. 내가 예술작품들과 또한 윤리적 가치들 및 사회제도들을 (그리하여 우리는 결사들[societies]이라고 아마도 말할 것이다) 3 세계에 포함시킬지라도, 나는 주로 과학적 도서관들의 세상에, 책들에, 과학적 문제들에, 그리고 잘못된 이론들을 포함하여 이론들에 내 자신을 국한시키겠다.

저서들, 학술지들, 그리고 도서관들은 제 1 세계와 제 3 세계 양쪽 모두에 속한다. 그것들은 물리적 대상들이어서 그런 상태로 제 1 세계에 속한다: 그것들은 제 1 세계의 물리적 제한이나 물리법칙들에 종속된다. 예를 들어, 동일한 저서 두 권이 물리적으로 완전히 유사할지라도 그 책들은 물리적 공간의 동일한 부분을 차지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 두 권의 책들은 두 가지 다른 제 1 세계의 대상들이다. 그러나 그 두 권의 책들은 제 1 세계에 속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또한 제 3 세계에 속한다. 동일한 서적 두 권의 매우 유사한 책들은 제 1 세계의 대상들로서 다르다; 그러나 두 권의 물리적으로 유사한 (혹은 유사하지 않은) 책들의 내용들이 동일하다면, 3 세계의 대상들로서 두 권의 책은 동일하다: 그 두 권의 책들은 한 가지 3 세계의 대상의 다른 권이다. 게다가 이 한 가지 제 3 세계의 대상은 제 3 세계의 제한과 평가에 종속된다; 그 대상은 예를 들어 자체의 논리적 일관성에 관하여 검토될 수 있고 자체의 정보적 내용에 대하여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책의, 혹은 이론의 내용은 추상적인 것이다. 바위, 나무, 동물 그리고 인간의 몸과 같은 모든 구체적인 물리적 몸체들은 제 1 세계에 속한다; 그리고 모든 심리적 상태들은, 의식적이건 잠재의식적이건, 2 세계에 속한다. 그러나 문제, 이론, 그리고 논증 같은 추상적인 것들은 그릇된 것들을 포함하여 제 3 세계에 속한다. (모순적인 논증들과 이론들도 또한 그렇다. 이것으로 인하여 제 3 세계가 모순적이 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제 3 세계가 이론도 아니고 주장도 아니며 논증도 아니기 때문이다: 3 세계는 사물들의 집합인 담론의 우주a universe of discourse이다.) 게다가 우리가 예술작품들에 대하여, 가령 4 세계와 같은 새로운 용어를 도입하기로 결정하지 않는다면 햄릿과 같은 연극과 슈베르트의 미완성같은 교향곡은 또한 제 3 세계에 속한다; 그리고 책의 각 권이 제 1 세계 3 세계 모두에 속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특정 연극 햄릿과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특정 연주는 제 1 세계와 제 3 세계 모두에 속한다. 그 작품의 연극이나 연주는 복잡한 물리적 사건들로 구성되는 한 제 1 세계에 속한다; 그러나 그 작품의 연극이나 연주에 내용이나 요점이나 의미가 있는 한 그 연극이나 연주는 제 3 세계에 속한다.

1 세계’, ‘2 세계’, 그리고 3 세계라는 용어들은 색깔이 없고 자의적인 것으로서 의식적으로 선택된다. 그러나 그 세계를 1, 2, 그리고 3으로 숫자를 매기는 것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물리적 세계가 동물 감각의 세계 이전에 존재했던 듯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제 3 세계가 특별히 인간의 언어의 진화로써만 시작된다고 추측한다. 나는 언어적으로 설명되는 인간 지식의 세계를 매우 특징적인 제 3의 세계로서 수용할 것이다. 그 세계는 문제들, 이론들 그리고 논증들의 세계이다; 그리고 나는 또한 아직 언어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저 문제들, 이론들, 그리고 논증들을 포함시킬 것이다. 나는 또한 제 3 세계에 역사가 있다고 다른 문제들, 이론들, 그리고 논증들이 당시에 여전히 발견되지 않았거나 반증되지 않은 반면, 특정 문제들, 이론들, 논증들의 발견되었거나 혹은 아마도 반증되었다고 전제할 것이다.

 

 

                      세 가지 세계의 실제성

 

내가 생각하기에 물리적 몸체들로 이루어진 제 1 세계의 실제성이나 존재를 수용하는 것은 훌륭한 상식이다. 버클리(Berkeley)의 주장에 대한 존슨(Johnson) 박사의 유명한 논박이 밝히는 바와 같이, 바위와 같은 물리적 몸체는 발에 차일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언급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바위를 충분히 강하게 발로 찬다면, 우리는 바위가 대항하여 찰 수 있음을 느낄 것이다. 알프레드 란데(Alfred Landé)를 따라서, 어떤 것이 발로 차일 수 있고 원칙적으로 대항하여 찰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나는 어떤 것이 존재하거나 사실적이라고 말하기를 제안한다; 조금 더 일반적으로 표현하여, 1 세계에 있는 것과,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몸체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어떤 것이 존재하거나 사실적이라고 말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하여 제 1 세계, 즉 물리적 세계는 실제성의 혹은 존재의 표준 사례로서 간주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용어사용법이나 단어들의 사용이나 의미의 문제가 무의미함을 신뢰한다. 그리하여 나는 사실적(real)’이나 존재하는(existing)’과 같은 단어들의 사용을 그다지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특히 이론적 주장들이나 명제들이 지닌 진실성에 대한 문제들과 비교하여.
내가 옹호하고 싶고 내가 보기에 상식을 다소 초월하는 진실성이 있는 명제는 물리적 세계 1과 심리적 세계 2의 실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추상적 세계 3이기도 하다; 바위와 나무의 물리적 세계 1이 실제적인 정확하게 저 의미에서 실제적인: 1 세계의 물리적 대상들뿐만 아니라 제 2 세계와 제 3 세계의 대상들도 서로 발로 찰 수 있다; 그리고 그 대상들 또한 발로 차일 수 있다.

 

 

                        제 1 2 세계의 실제성

 

비록 내가, 존슨 박사, 알프레드 란데, 그리고 다른 상식적 사실주의들과 함께 제 1 세계를 실제성의 바로 그 표준으로서 간주하기를 제안할지라도, 나는 일원주의자가 아니라 다원주의자이다. 1 세계의 존재를 부인하고 단지 경험들만을 존재하는 것으로서 인정하여 단지 제 2 세계만을 인정하는 일원주의 비물질론이나 현상론은 최근까지 상당히 유행했다. 현재, 그 반대 의견이 훨씬 더 유행한다. 나는 단지 1 세계만 존재한다는 견해를 의미한다. 이 견해는 일원론적 유물론이나 물리주의나 철학적 행동주의로 지칭된다. 더욱 최근에는 이 이론이 정신적 경험들이 실제로 두뇌 과정들과 일치하기 때문에 일치 이론(identity theory)’으로 또한 지칭되었다.

일원론의 다양한 형태들은 여기서 다원론에 의하여 갈음될 것이다: 세 가지 세계에 대한 주장. 이 다원론은 두 가지 매우 다른 논증의 방향들에 의하여 뒷받침될 수 있다. 먼저 제 2 세계의 실제성을 밝히기 위하여 우리는 상식의, 그리고 악성 치통은 정말로 매우 실제적이라는 상식적 견해에 반대하여 효과적인 논증들을 물리주의자들이 만들어내지 못한 것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두 번째이나 주요 논증은 매우 다르게 진행한다. 그 논증은 이론들과 같은 제 3 세계의 대상들이 사실상 정말로 물리적 세계 1과 강력하게 상호작용한다는 주장으로부터 시작한다. 가장 간단한 사례들은, 우리가 제 3 세계의 계획들에 따라서 그리고 흔히 고도로 추상적인 이론들에 따라서 가령 원자로나 원자폭탄이나 마천루나 비행장을 건설할 때 우리가 제 1 세계 안에 변화를 일으키는 방식들이다.

주관적 경험들에 관한 제 2 세계의 존재에 대한 나의 주요 논증은, 우리가 제 3 세계를 이용하여 제 1 세계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기 전에 우리가 통상적으로 제 3 세계의 이론을 파악하거나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론을 파악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정신적인 일이고 제 2 세계의 과정이다. 사례는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하여 계획하기, 건설하기 및 불도저들의 이용이다. 먼저 인간정신에 의한 제 2 세계 계획하기와 기계류 계획을 제한하는 제 1 2 세계 모두의 내부적 한계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있다. 두 번째, 우리에게는 인간 두뇌를 사용하는 제 2 세계와 제 1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이 있는데 그 상호작용은 반대로 불도저들을 조종하는 우리의 사지(四肢)에 영향을 미친다.

이 논증의 효과는 분명히 제 3 세계에 의존한다. 3 세계가 존재하고 적어도 부분적으로 자율적이라면, 그리고 더 나아가 제 3 세계의 계획들이 정말로 제 1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면 내가 보기에 제 2 세계가 또한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런 방식으로 제 2 세계의 존재에 대한 나의 주요 논증으로 인하여 우리는 제 3 세계가 존재하는지의 문제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아가 제 3 세계가 부분적으로 자율적인지의 문제로 돌아왔다.

 

 

                  제 3 세계의 실제성과 부분적 자율성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사고는 상호작용을 하면서 함께 진화한다. 인간의 언어는, 물론, 인간의 사고 과정들을, 다시 말해서 제 2 세계의 대상들을 표현한다. 그러나 주관적인 제 2 세계의 대상들이 객관적인 인간 언어로 설명될 때 주관적인 제 2 세계의 대상들에게 인간의 언어는 매우 큰 차이점을 만든다: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정신 사이에는 강력한 피드백 효과가 있다.

이것은 주로 사고가, 언어로 표현되자마자, 우리들 자신의 외부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대상은 그 경우에 상호-주관적으로 비판될 우리 자신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비판되는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상호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인 비판은 인간의 언어로써 나타난다; 그리고 인간의 언어로써 객관적인 표준들과 우리의 주관적인 사고 과정들의 내용들을 지닌 세계인 인간의 제 3 세계가 나타난다.

그리하여 제 3 세계는 우리가 단지 어떤 사고를 생각하든 또는 우리가 그 사고를 언어로 (훨씬 더 낫게는, 그 사고를 글로 쓰든 인쇄가 되도록 하든) 표현하든 큰 차이를 만든다. 우리가 단지 사고를 생각만 한다면 그 사고는 객관적으로 비판을 받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한 부분이다. 비판을 받을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그 사고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어서 대상이 되어야 한다: 3 세계의 대상. 언어로 표현된 사고들은 제 3 세계에 속한다. 그 사고들은 예를 들어 그 사고들에는 어떤 환영을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어불성설인 논리적 결과들이 있음을 밝힘으로써 논리적으로 비판을 받을 수 있다. 3 세계에 속하는 사고 내용들만 동등함이나 환원가능성이나 모순과 같은 논리적 관계들 속에 설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제 2 세계에 속하는 주관적인 사고 과정들과 본질적인 내용들인, 말하자면, 3 세계를 구성하는 객관적인 사고들의 내용들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요점을 완벽히 명백하게 만들기 위하여, 몇 가지 실수들을 저지름으로써 두 사람 모두 거짓 정리(定理)예를 들어 5 + 7 = 13이라는 정리에 - 도달하는 두 명의 수학자를 생각하라. 그들의 사고 과정들은 제 2 세계에 속하는데 유사하거나 완전히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사고들의 내용은 제 3 세계에 속하는데 동일하고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두 명의 수학자들은 제 3 세계의 논리적 구조에 의하여 발길로 차일 수 있는데 그 구조는 그들이 주장하는 정리(定理)가 객관적으로 참인 서술 ‘5 + 7 = 12’를 부정함으로, 그리고 그 정리(定理)가 그리하여 틀림없이 객관적으로 거짓임을 밝힌다. 두 명의 수학자들은 발길로 차인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산술 자체의 법칙들에 의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원론자들이다: 1 세계와 제 2 세계를 신뢰하는 것은 상식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 3 세계의 존재를 수용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들은 물론 인쇄된 서적들이나 혹은 청각적 언어 소음들로 구성된 제 1 세계의 매우 특별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두뇌 과정들과 주관적 사고 과정들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나무들 같은 다른 물리적 몸체들로부터 서적들을, 늑대울음과 같은 다른 소음들로부터 인간의 언어를 구분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가 어떤 특별한 종류의 제 2 세계 경험들을, 즉 단지 이 서적들이나 이 언어적 소음들과 상호 관련된 특별한 종류의 (아마도 두뇌 과정들과 평행선을 달리는) 사고 과정들을 겪는 데 도움을 주는 사실일 이라고 그들은 주장할 것이다.

나는 이 견해를 전적으로 불충한 것으로서 간주한다. 나는 우리가 제 3 세계의 자율적 부분의 존재를 인정해야 함을 밝히려고 노력할 것이다; 객관적인 사고 내용들이 이해되고 주관적이거나 개인적인 사고 과정들에 대한 이해에 객관적인 사고 내용들이 인과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관적이거나 개인적인 사고 과정들로부터 독립적이고 그 사고 과정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객관적인 사고 내용들로 구성되는 부분. 그리하여 나는 지금까지 제 1 세계의 형태나 제 2 세계의 형태에 의하여 점령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고 과정들과 상호작용하는 자율적인 제 3 세계 대상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제 3 세계 대상들은 우리의 사고 과정들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기초적인 산술로부터 사례를 들어보자. 자연수 0, 1, 2, 3, 4, 5, 6, 기타 등등의 무한 수열은 인간이 발명한 것인 인간 정신의 산물이다. 그런 상태로 그 수열은 자율적이 아니라 2 세계의 사고 과정들에 의존한다고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짝수나 소수(素數: prime numbers)를 생각하라. 이것들을 우리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발견되었거나 찾아졌다. 우리는 자연수들의 수열이 짝수와 홀수들로 구성되는 것과 그 수열에 대하여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든, 어떤 사고 과정도 제 3 세계의 이 사실을 변경시킬 수 없음을 발견한다. 자연수들의 수열은 우리가 세는 것을 배운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그 수열은 인간 언어 내부의 발명품이다. 그러나 그 수열에는 자연수들의 인공적인 수열의 비의도적인 결과들인 자체의 변하지 않는 법칙들이나 제한들이나 규칙들이 있다; , 인간 정신의 어떤 산물이 지닌 비의도적인 결과들.

소수(素數: prime numbers)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언급될 것이다. 자연수들의 수열에서 우리가 더 높이 나아갈수록 (가령, 먼저 숫자 100에서 200으로, 그 다음에 1100에서 1200으로) 소수(素數) 발생은 드물어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것은 제 3 세계의 자율적 속성이다. 이제 이 발견으로 인하여 우리는 제 3 세계 안에 있는 새로운 자율적인 문제를 만난다; 소수(素數)들 자체처럼 단지 그곳에 있는 것으로서 발견되는 문제. 그것은 다음과 같이 흥미로운 문제이다: 우리가 점점 더 큰 숫자들로, 예를 들어 1000만으로 나아간다면, 소수(素數)들 점점 더 드물어진다고 할지라도 소수(素數)들은 결국 사멸하거나 아니면 항상 새로운 소수(素數)들이 나타나는가? 혹은 유클리드의 용어사용법에 따라서, 자연수들의 수열 자체처럼 하나의 가장 큰 소수(素數)가 존재하거나 소수(素數)들의 수열은 무한한가?

이것은 객관적이고 동시에 자율적인 문제이다: 가장 큰 소수(素數)가 존재하거나 소수(素數)들의 수열은 지속적으로 계속되어 무한에 이른다. 유클리드는 그 문제를 심지어 발견했고 해결했다. 그는 가장 큰 소수(素數)가 존재한다는 전제가 터무니없음을 밝혔다.

그리하여 그는, 가장 큰 소수(素數)는 존재하지 않지만 항상 더 큰 소수(素數)가 있다는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인 증거를 제시했다: 자연수들이 그러한 바와 같이, 소수(素數)들의 수열은 무한이다. 그리 이 사실은 제 3 세계의 객관적인, 자율적인 사실이다. 그것은 제 3 세계의 정리(定理), 자율적인 제 3 세계의 대상이다. 우리는 그것을 발견할 수 있고, 우리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변경하기 위하여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소수(素數)들의 발견으로 인하여 많은 난제들이 발생했는데, 그 난제들 중 몇 가지는 해결되었고 많은 난제들은 아직 미제로 남아있다. 이 문제들은 우리가 만들어낸 새로운 분야인 자연수들의 수열에서 우리에 의하여 발견된다. 그 문제들은 누군가가 이전에 그 문제들에 대하여 생각했는지와 별개로, 그곳에 있는 것으로서 발견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인간 정신의 산물들인 수학에서의 구축물이 있고, 객관적인 동시에 이 구축물들의 결과들로서 아마도 생각된 적이 없는 문제들과 이론들이 있다. 이것은 수학의 세계가 자율적인 부분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3 세계의 자율적인 부분.

나의 다음 요점은, 3 세계의 이 자율적인 부분이 제 2 세계와 그리고 또한 제 2 세계를 통하여 제 1 세계와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실제적(real)이라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 미제로 남아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면, 그 사람들 모두는 아마도 많은 다양한 정도로 이 문제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그들의 노력의 결과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3 세계 안에 있는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존재나 비존재에 달려있고, 부분적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사고 과정들에 의하여 객관적으로 참인 사고 내용들로 이끌려 가는지 또는 아닌지에 달려있다. 이것은 자율적인 제 3 세계의 대상들이 제 2 세계의 과정들에게 강력한 인과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새로 발견된 제 3 세계의 문제가, 해답이 있든지 없든지, 공표되면 인과적 영향력은 식자공(植字工: typesetters)과 심지어 인쇄기의 바퀴를 움직이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심지어 제 1 세계 속까지 확대된다.

이런 것들과 같은 매우 단순한 이유들 때문에, 3 세계가 부분적으로 자율적이라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그 세계의 자율적인 부분이 적어도 제 2 세계를 통하여 제 1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실제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상황은 모든 과학적 발견과 모든 기술적 발명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이 모든 경우들에서 제 3 세계의 문제들과 이론들은 주요 역할을 맡는다. 문제들은 발견될 것이고, 이론들은 (가령 제 1 세계에 관한) 인간 정신의 산물일지라도, 문제들은 우리가 구축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문제들이 지닌 진실성과 거짓성은, 모든 중요한 경우들에서 우리가 변경할 수 있는 관계인 제 3 세계에 대한 그 문제들의 관계에 전적으로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들이 지닌 진실성과 거짓성은 제 3 세계의 내부 구조와 (특히 언어) 1 세계 모두에 달려있는데 후자(後者)인 제 1 세계는 내가 제안한 바와 같이 실제성의 바로 그 표준이 된다.

 

 

                        인간의 상황과 자연 세계

 

생명체의 근원은,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주에서 독특한 사건이다. 우리는 그 근원을 설명할 수 없고, 그것은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망설이며 기적이라고 지칭했었을 것에 근접한다. 동물 의식의, 기쁨과 고통의 감정의 제 2 세계가 출현함은 두 번째 그런 기적으로 보인다.

의식의 출현과 이전에 생명의 출현을 우주의 진화에서 두 가지 비교적 최근의 사건들로서 간주하는 것이 합당한 듯이 보인다; 우주의 시작처럼 현재 그리고 아마도 영원히 우리의 과학적 이해를 뛰어넘는 사건들. 이 겸허한 접근방식은 미제 문제들의 존재를 자유롭게 인정하고 그리하여 그 문제들에 관하여 그 문제들의 특성과 아마도 심지어 가능한 해결책을 향한, 혹은 적어도 부분적 해결책을 향한 방식들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발견하는 길을 폐쇄하지 않는다.

세 번째 커다란 기적은 인간 두뇌의 출현과 인간 정신 및 인간 이성의 출현이다. 이 세 번째 기적은 적어도 진화적 관계에서 다른 것들보다 설명하기 쉬울 것이다. 사람은 동물이다. 사람은, 동물들이 무생물에 가까운 것보다 훨씬 더 다른 동물에 가깝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동물두뇌로부터 인간두뇌를 구분하는, 그리고 모든 다른 동물언어들로부터 대부분의 고등동물들이 자신들의 내부 상태들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니고 다른 동물들과 의사소통하기 위하여 지닌 의향들로부터 - 인간언어를 구분하는 차이점이 경시되지는 않는다.

사람은 사람의 언어를 창조하였는데 그 언어의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가치와 진실성의 가치가 있고 그 언어의 논증적 기능과 논증들의 유효성에 대한 가치가 있어서 단지 표현적이고 의사소통적인 기능들만 지닌 동물 언어들을 초월한다. 사람의 언어로써 사람은 객관적인 제 3 세계를 창조했는데, 동물의 왕국에는 그 세계에 대하여 상당히 다른 유사언어만 존재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 언어를 사용하여 사람은 문명의, 배움의, -유전적 성장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냈다: 유전자 암호에 의하여 유전되지 않는 성장의 새로운 세상; 자연선택에 의존하기보다는 이성적인 비판에 근거한 선택에 의존하는 성장의 세상.

그리하여 우리가 이 세 번째 위대한 기적을 설명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제 3 세계의 인간언어가 행하는 역할이다: 인간두뇌와 인간정신의 출현; 인간이성과 인간자유의 출현.

 

 

물리학에서의 결정론과 비결정론

 

이 논문의 제목은 비결정론은 충분하지 않다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자유에 관하여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아직 적어도 고전적 결정론에 (혹은 물리적 결정론 즉, 1 세계 결정론) 대한, 그리고 그 반대인 저 비결정론에 대한 개괄도 제시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이 두 가지 개념들이 인간자유의 토론에 대하여 불충분한 이유를 아직 밝혀야 한다.

고전적 결정론 즉, 1 세계 결정론은, 뉴튼의 역학에 근거하여 라플라스(Laplace)에 의하여 매우 극명하게 설명된 매우 오래된 개념이다. [10절 참조.]
결정론에 대한 라플라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서술될 수 있다. 우주 속의 어떤 순간의 모든 물질적 입자들에 대하여 우리에게 정확한 질량, 위치, 그리고 속도가 주어진다고 전제하라; 그렇다면 우리는 원칙적으로 뉴튼적 역학의 도움을 받아서 과거에 발생했던, 그리고 미래에 발생할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물리적 움직임과, 그리하여 모든 구술 및 서술 단어들, 모든 시(), 그리고 작곡될 모든 음악을 포함할 것이다. 계산은 기계에 의하여 수행될 수 있다. 계산은 뉴튼의 운동법칙과 현존하는 초기조건들로써 계획될 필요가 있다. 계산은 완전히 귀가 먹어서 음악적 작곡 문제들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계산은 주어진 작곡가에 의하여 과거나 미래에 어떤 검은 음표가 흰 음악종이에 놓일지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라플라스적 결정론은 매우 설득력이 없어서 매력이 없는 견해이다; 그리고 그 결정론은 의심스러운 논증인데 왜냐하면, F. A. 하이에크(Hayek)에 의하여 (내가 생각하기에 처음으로) 지적된 바와 같이 계산기가 복잡성에서 틀림없이 우주를 크게 능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라플라스가 인과적으로 폐쇄되고 결정론적인 제 1 세계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로부터 올바른 결론을 도출하지 않음을 강조할 가치가 있다. 우리가 라플라스의 견해를 수용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진짜 인간자유와 창조성이 부여되어 있다고 우리는 주장해서는 (많은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안 된다.

그러나 라플라스적 결정론은, 에테르(Ether)의 기계적 모형을 통하여 전기와 자성(magnetism)을 뉴튼적 역학으로 환치하려는 맥스웰(Maxwell)의 몇 가지 노력들의 붕괴를 근거로 수정되어야 했다. 그 시도들과 함께 뉴튼의 기계적 제 1 세계의 폐쇄에 대한 주장 또한 붕괴되었다: 뉴튼의 기계적 제 1 세계는 제 1 세계의 전자기적(電磁氣的: electromagnetic) 부분을 향하여 열려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여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은 결정론자로 남았다. 그는 거의 자신의 생애 말엽까지, 역학과 중력과 전기를 포함하는 통일되고 폐쇄된 결정론적 이론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사실상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에게는 인과적으로 열린 (그리하여 비결정론적인) 물리적 우주를 가령, 2 세계의 영향에 노출된 물리적 세계 심령 연구협회의 몇몇 심령론자 회원들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 전형적인 미신으로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명성을 지닌 물리학자는 그 물리적 우주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형태의 비결정론이 물리학의 공식적 신조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 새로운 비결정론은 양자역학에 의하여 도입되었는데 양자역학은 인과적으로 환치 불가능한 기초적인 우연한 사건들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두 종류의 우연한 사건들이 있는 듯이 보인다. 한 종류는, 우연히 어떤 장소와 시간에 발생하여 우연한 사건을 발생시키는 데 결합하는 두 가지 인과적 연쇄들의 독립에 기인한다. 전형적인 사례는 두 가지 인과적 연쇄로 구성되고 그 연쇄 중에서 하나는, 나머지 독립적인 인과적 연쇄가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이 벽돌에 맞을 위치를 차지하도록 만들 반면, 벽돌을 풀어놓는다. 이런 종류의 우연한 사건은 (그 이론이 라플라스에 의하여 확률에 관한 자신의 저서에서 전개되었다) 라플라스적 결정론과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다: 관련된 사건들에 대하여 충분히 완전한 정보를 미리 받은 사람은 누구나 무엇이 발생하게 되어 있었는지를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우연을 낳은 것은 우리가 지닌 지식의 불완전함뿐이었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두 번째이자 훨씬 더 근본적인 종류의 우연한 사건들을 도입했다: 절대 우연. 양자역학에 따르면, 인과적 연쇄들을 통하여 더 이상 분석될 수 없지만 소위 양자 비약(quantum jump)’으로 구성된 기초적인 물리적 과정들이 있다; 그리고 양자 비약은 인과적 법칙들이나 인과적 법칙들의 우연의 일치에 의하여 통제되지 않지만 확률적 법칙들에만 의해서 통제되는 절대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사건으로 예상된다. 그리하여 양자역학은, 아인슈타인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사위놀이를 하는 하느님으로서 기술한 것을 도입했다. 양자역학은 이 절대적인 우연한 사건들을 제 1 세계의 기본적 사건들로서 간주한다. 결과적으로 방사선을 방출하는 원자의 분열과 같은 이 우연한 사건들의 다양한 특수한 결과들은 미리 결정되지 않아서, 사건 이전에 모든 관련된 조건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예측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과정들에 대하여 시험 가능한 통계적 예측들을 할 수 있다.

양자역학이 물리학에서 마지막 단어로 남을 것이라고 내가 믿지 않을지라도, 나는 양자역학의 비결정론이 근본적으로 건전하다고 믿게 된다. 심지어 고전적인 뉴튼적 역학도 원칙적으로 비결정론적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고전적인 뉴튼적 역학에 인간 지식의 물리적 모형들을 예를 들어, 컴퓨터들 도입하면 이것은 분명해진다. 객관적인 인간 지식을 우리 우주에 도입함으로써 3 세계의 도입 (컴퓨터들이 비인간적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만든 것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 우리는 이 우주의 비결정론적 특성뿐만 아니라 그 우주의 본질적인 개방성이나 미완성을 증명할 수 있다.

이제 양자역학으로 회귀하면서 나는 주사위놀이를 하는 하느님에 대한, 혹은 확률적 법칙들에 대한 비결정론이 인간자유에 대한 여지를 남기지 못함을 지적하고 싶다. 이유인즉 우리가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은 어떻게 우리가 예측될 수 없고 우연 같은 형태로 행동할 수 있는가 뿐만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의도적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 이기도하기 때문이다. 주소가 없는 편지들을 부치는 것과 같은 그런 우연한 사건들에 관한 유명한 확률적 불변성은 흥미로운 관심사가 될 것이지만, 그 불변성에는 좋든 나쁘든 한 편의 시()를 쓰는 자유의 문제나 가령 유전자 암호의 근원에 관하여 새로운 가설을 진전시키는 자유의 문제에 대한 어떤 유사성도 없다.

양자역학이 옳다면 라플라스적 결정론이 틀렸다는 것과, 물리학으로부터 유래하는 논증들은 비결정론의 교설과 싸우는 데 더 이상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은 인정되어야 한다.

 

 

                     비결정론은 충분하지 않다

 

물리적 세계가 완벽하게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결정되었다고 생각하자. 다시 말해서, 사건들은 물리적 법칙들에 따라서 서로 뒤따르지만, 사건들의 연결에는 우리가 룰렛게임으로 부터나 주사위놀이로 부터나 동전던지기로 부터나 혹은 양자역학으로부터 아는 수열들과 유사한, 예측될 수 없고 아마도 확률적인 수열들에 의하여 채워진 어떤 헐거움(looseness)이 때때로 있다고 전제하자. 그리하여 우리에게 있다고 정말로 내가 제안한 바와 같이, 우리에게는 비결정론적인 제 1 세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제 1 세계가 제 2 세계 및 제 3 세계를 향하여 인과적으로 폐쇄되어 있다면 우리에게는 소득이 없다. 그러한 비결정론적인 제 1 세계는 예측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2 세계는, 그리고 제 2 세계와 함께 제 3 세계는 제 1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닌 느낌이나 소망이 무엇이든, 폐쇄된 비결정론적 제 1 세계의 현재 상태에 대하여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할지라도 우리가 그 제 1 세계를 예측할 수 없었다는 라플라스의 세계와 유일하게 다른 점과 함께, 폐쇄된 비결정론적 제 1 세계는 이전과 같이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다만 부분적이라 할지라도, 우연에 의하여 지배되는 세계일 것이다.

그리하여 비결정론은 필수적이지만 인간의 자유와 특히 창조성을 참작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실제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1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주장이다; 1 세계가 제 2 세계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 1 세계가 제 2 세계와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는 주장; 혹은 제 1 세계가 제 2 세계를 향하여 인과적으로 열려있어서 나아가 제 3 세계를 향하여 열려있다는 주장.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핵심 요점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제 1 세계가 자족적이거나(self-contained) ‘폐쇄된것이 아니라 제 2 세계를 향하여 열려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2 세계가 제 3 세계에 의하여 그리고 또한 제 1세계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1 세계가 제 2 세계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결정론과 자연주의

 

라플라스적 결정론과 제 1 세계가 인과적으로 폐쇄되어 있다는 이론을 선호하는 근본적인 철학적 동기는, 인간은 동물이라는 깨달음과 우리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보려는 소망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나는 그 동기가 옳다고 믿는다; 자연이 완벽하게 결정론적이라면 인간 행동들의 영역 또한 그럴 것이다; 사실상 행동들은 없을 테지만 기껏해야 행동들의 모습만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논증은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사람이 자유롭다면, 적어도 부분적으로 자유롭다면 자연 또한 그렇다; 그래서 물리적인 제 1 세계는 개방되어 있다. 그리고 사람을 적어도 부분적으로 자유롭다고 간주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반대 견해는 라플라스의 견해 운명예정설을 낳는다. 반대 견해는 수십 억 년 전에 씨앗이 식물을 포함하는 것과 같이 제 1 세계의 기초적 입자들이 호머의 시()와 플라톤의 철학과 베토벤의 교향곡들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견해를 낳는다; 인간의 역사는 미리 결정되어 있고 그 역사와 함께 인간의 창조적인 모든 행위도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견해. 그래서 그 견해에 대한 양자 이론적 해석본은 꼭 마찬가지로 나쁘다. 그 해석본은 인간의 창조력에 영향을 미쳐서 인간의 창조력을 완전히 우연의 문제로 만든다. 물론 인간의 창조력에는 우연적인 요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나 음악 작품들의 창조가, 최후에, 화학이나 물리학을 통하여 설명될 수 있다는 이론은 내가 보기에 터무니없다. 음악 작곡이 설명될 수 있는 한, (또한 음악가의 창조력을 자극하는) 다른 음악의 영향을 통하여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 작곡은 설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매우 중요하게, 음악과 모든 다른 제 3 세계 현상들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내부 구조와 내부 법칙들과 제한들을 그 흡수가 (그리고 그 가끔씩 일어나는 저항이) 음악가의 창조력에 크게 중요한 통하여.

그리하여 우리의 자유와 특히 창조하는 우리의 자유는 분명히 세 가지 세계 모두의 제한사항들 하에 놓인다. 베토벤이 어떤 불운에 의하여 태어날 때부터 귀가 먹었더라면 그는 작곡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작곡가로서 그는 자유롭게 자신의 자유를 제 3 세계의 구조적 제한사항에 종속시켰다. 자율적인 제 3 세계는, 히말라야에서 길을 찾는 사람처럼 자신의 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선택된 길에 의하여 제한을 받고 자신이 발견하고 있던 세계의 제한사항들에 의하여 제한을 받기 때문에 자신이 위대하고도 진정한 발견들을 수행했던 세계였다. (유사한 언급이 괴델[Gödel]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열린 우주

 

그리하여 되돌아가서 제 1 세계, 2 세계, 그리고 제 3 세계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나의 뇌리에서는 제 2 세계와 제 3 세계가 상호작용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이론을 파악하거나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의 정신은 인과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우리의 뇌리에 저장된 소음들에 대한 기억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 작성자의 작품에 의하여, 우리가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제 3 세계 대상의 자율적인 내부 구조들에 의하여.

이 모든 것은 제 3 세계가 우리 정신의 제 2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수학자가 자신의 제 3 세계 결과들을 (물리적) 종이 위에 서술할 때 그의 정신은 그의 제 2 세계 물리적인 제 1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하여 제 2 세계가 제 3 세계를 향하여 열려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제 1 세계는 제 2 세계를 향하여 열려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속한 그리고 제 1 세계와 제 2 세계 및 제 3 세계를 부분들로서 포함하는 자연이나 우주 자체가 열려있음을 밝히기 때문이다; 자연이나 우주는 제 3 세계를 포함하여서 제 3 세계는 내재적으로 열려있음이 밝혀질 수 있다.

3 세계가 열려있음에 관한 한 가지 모습은, 공리화된(公理化: axiomatized) 산술은 완료될 수 없다는 괴델(Gödel)의 정리의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완료불가능성과 개방성은, 자신의 지도에 자신이 그리고 있는 지도를 포함시키면서 자신의 방에 대한 지도를 그리는 사람에 관한 잘-알려진 이야기의 판본에 의하여 아마도 매우 잘 예시된다. 그의 업무는 완료에 저항하는데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지도 안에서 자신의 최근 입장(入場: entry)을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다.

지도에 대한 이야기는, 비록 간단한 방식으로 지식의 제 3 세계 대상들을 포함하는 우주의 불완전성을 예시할지라도, 3 세계 이론들과 그 이론들이 제 1 세계에 미치는 영향과 비교하여 사소한 경우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이야기는 아직 비결정론을 예시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실제로 지도에 든 다양한 마지막()은 입장(入場: entries)들의 무한한 수열 안에서 결정된 입장(入場: entries)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획()들의 이 확정성(確定性: determinacy)은 인간 지식의 오류성(誤謬性: fallibility)(3 세계의 문제들, 이론들, 그리고 실수들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는 오류성) 고려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만 유효하다. 이것을 고려하여, 우리의 지도에 드는 이 마지막()들의 각각은 소묘화가에게 마지막()정확하게 묘사하는 추가적 ()을 들이는 문제인 새로운 문제를 구성한다. 모든 인간 지식을 특징짓는 오류성(誤謬性: fallibility) 때문에, 이 문제는 도저히 절대적인 정확도를 지닌 소묘화가에 의하여 해결될 수 없다; 소묘화가가 향하여 나아가는 획()들이 작을수록, 원칙적으로 예측될 수 없고 비결정적이며 부단히 증가할 상대적 부정확성은 더 커질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지도에 관한 이야기는 객관적인 인간의 지식에 영향을 미치는 오류성(誤謬性: fallibility)이 어떻게 본질적인 비결정론과 인간의 지식을 자체의 일부로 포함하는 우주의 개방성에 기여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우주는, 인간의 지식을 포함한다면 개방되게 되어있다; 현재의 것들과 같은 논문들, 그리고 서적들은 한편으로 제 1 세계의 대상들이고 다른 한편으로 잘못을 저지르며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의 지식을 서술하거나 기술하려고 노력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열린 우주 속에서 산다. 우리는 인간지식이 있기 이전에는 이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자마자 그 개방성이 인간 지식의 존재에 독점적으로 의존한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폐쇄된 우주에 관한 모든 견해들을 확률적으로 폐쇄된 우주에 관한 견해뿐만 아니라 인과적으로 폐쇄된 우주에 관한 견해 배척하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다; 그리하여 파동역학(波動力學: wave mechanic)에 의하여 상상되는 폐쇄된 우주뿐만 아니라 라플라스에 의하여 예상되는 폐쇄된 우주도 배척한다. 우리의 우주는 부분적으로 인과적이고, 부분적으로 확률적이고 부분적으로 열려있다: 우리의 우주는 드러나고 있다. 반대 견해는 우리의 인공적인 제 1 세계에 관한 제 3 세계의 이론들을 특히 그 이론들의 특징적인 과도하게 단순화된 사항들 1 세계 자체의 특징으로 오해하는 데서 발생한다. 우리는 아마도 더 잘 알았을 것이다.

우리 우주의 개방성에 반대하여, 또는 그 개방성으로부터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들이 부단히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에 반대하여 지금까지 어떤 훌륭한 이유도 제시되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3 세계의 내부 구조에 의하여 고취될 뿐만 아니라 제한되기도 하는 창조력인 창조력에 의구심을 보이는 훌륭한 근거는 지금까지 제시되지 않았다.

인간은 물론 자연의 한 부분이지만, 3 세계를 창조하면서 인간은 자신과 동시에 인간언어와 비판적 사고, 그리고 인간 이전에 존재했던 바와 같은 자연을 초월했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는 정말로 자연의 일부이지만 인간의 지식은 자연을 적어도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비판적 사고와 그리고 인간의 지식의 출현 이전에 존재했던 바와 같은 초월했다.

비결정론은 충분하지 않다: 인간의 자유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제 2 세계를 향한 제 1 세계의 개방성이 필요하고, 3 세계를 향한 제 2 세계의 개방성이 필요하고 제 3 세계의 자율적이고 고유한 개방성, 인간 정신의 산물들의 세계와 특히 인간 지식의 세계가 필요하다.

 

 

 

 

 

 

과학적 환원 및 모든 과학의 본질적 미완

 

                            I

 

결정론은, 역사적으로, ‘환원주의(reductionism)’의 주장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책에 제시된 의미에서, ‘과학적결정론자는 틀림없이 환원론자이다; 환원주의자는 결정론자가 될 필요는 없을지라도. 이 부록에서 나는 환원주의를 간단하게 토론하고 싶다.

환원주의에 관하여 두드러진 질문들은, 내가 믿는 바, 세 가지이다:

(1) 우리는 생물학을 물리학이나 혹은 물리학 및 화학으로 환원시킬 수 있거나 환원시키기를 희망할 수 있는가?

(2) 우리는, 우리가 동물들에게 치부할 저 주관적인 의식적 경험들을 생물학에 환원시킬 수 있거나 생물학에 환원시키기를 희망할 수 있는가 그리고, 질문 (1)이 긍정으로 답변된다면 우리는 그 경험들을 나아가 물리학과 화학에 환원시킬 수 있는가?

(3) 우리는, 자아에 대한 의식과 인간 정신의 창조성을 동물적 경험에 환원시킬 수 있거나 환원시키기를 희망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질문 (1)(2)가 긍정으로 답변된다면 우리는 그 의식과 창조성을 물리학과 화학에 환원시키거나 환원시키기를 희망할 수 있는가?

분명히 이 세 가지 질문에 (내가 나중에 방향을 선회할) 대한 답변들은 부분적으로 환원시키다(reduce)’라는 단어의 의미에 부분적으로 의존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다른 곳에서 제시한 이유들 때문에, 나는 의미 분석의 방식에 그리고 정의(定義)들에 의하여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대신에 내가 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이렇다.

나는 다양한 학문에서 성공적 및 비성공적인 환원들에 그리고 특히 화학의 물리학에 대한 환원에 대한 몇 가지 사례들을 토론함으로써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환원주의적 연구 프로그램들이 남긴 잔여물로써.

이 토론 과정에, 나는 세 가지 주장을 옹호할 것이다. 먼저, 성공적인 환원만큼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법칙들에 대하여 뉴튼이 자신의 이론으로 혹은 더 정확하게는 자신의 이론을 통한 뉴튼의 설명 - 환원한 것 및 그 법칙들을 그가 수정한 것과 같은) 과학에서 큰 성공은 없다는 의미에서 나는 과학자들이 환원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할 것이다. 성공적인 환원은, 아마도, 모든 과학적 설명들에 대하여 상상될 수 있는 가장 성공적인 성공인데 왜냐하면 성공적인 환원이 메이에르송(Meyerson)이 강조한 것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알려진 것을 사용하여 미지의 것을 밝히는 것(identification). 그러나 환원과 대조적으로, 새로운 이론의 도움을 받는 설명은 알려지지 않은 것을 통하여 알려진 것을 알려진 문제 설명한다: 새로운 추측을 통하여.

두 번째로, 나는 과학자들이 환원주의를 한 가지 방법으로서 환영해야 한다고 제안할 것이다: 과학자들은 순진하거나 아니면 다소 비판적인 환원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정말로, 다소 필사적인 비판적 환원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할 것인데 왜냐하면 과학에서 어떤 주요 환원도 완벽하게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장 성공적인 환원주의적 연구 프로그램들이 남긴 해결되지 않은 잔여물이 거의 항상 있다.

세 번째로, 반대로 본질주의에 반대하는 훌륭한 논증들이 있어서 그 논증들이 철학적인 환원주의와 밀접하게 연합한 듯이 보이는 반면 철학적 환원주의를 선호하는 훌륭한 논증들은 있는 듯이 보이지 않는다고 나는 주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방법론적 근거들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환원을 시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심지어 환원에 대한 비성공적이거나 미완성된 시도들로부터 거대한 지식을 배울 수 있고, 이런 방식으로 남겨진 문제들은 우리의 가장 소중한 지적(知的) 소유물에 속하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의 과학적 실패작들로 간주되는 것을 (혹은 다시 말해서, 과학에서 커다란 미제의 문제들을) 강조하면 우리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II

 

뉴튼과 별도로, 거의 완벽하게 성공적이었던 드문 환원들 가운데 우리에게 알려진 한 가지 환원은, 유리분수들(rational fractions)을 자연수들의 순서쌍들로 (, 자연수들 사이의 관계들이나 비율들로) 환원한 것이다. 비록 그 환원은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이룩되었다할지라도, 우리는 심지어 이 환원이 20세기에서만 다루어진 잔여물(위너[Wiener]와 쿠라토프스키[Kuratowski](1914) 의한 순서쌍을 비순서쌍들의 비순서쌍으로의 환원과 함께; 게다가, 우리는 그 환원이 쌍들 자체들로 라기보다는 대등한 쌍들의 집합들로의 환원임을 인식해야 한다) 남겼다고 말할 것이다. 그 환원은 산술화(arithmetization)에 관한 피타고라스학파의 우주론적 연구 프로그램을 부추겼는데 그 프로그램은, 그러나, 2, 3, 혹은 5의 제곱근과 같은 무리수들의 존재에 대한 증명으로써 붕괴됐다. 플라톤은 산술화에 관한 우주론적 연구 프로그램을 기하학연구(geometrization)에 관한 우주론적 연구로 갈음했고, 이 프로그램은 유클리드에서부터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그러나 뉴튼과 라이프니츠(Leibniz)가 미적분학을 발명함으로써 (그리고 그들 자신이 지니고 있던 직감적 방법들이 배제시키지 못했던 몇 가지 역설적인 결과들을 배제시키는 문제) 새로운 산술화에 대한 자연수들에로의 새로운 환원 필요가 생겨났다. 19세기와 20세기 초의 가장 장엄한 성공들에도 불구하고, 이 환원은 완벽하게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한 가지 해결되지 않는 잔여물을 언급하여, 자연수들의 수열에로의 혹은 현대적인 집합 이론의 의미에서의 집합으로의 환원은 자연수들의 동치 순서쌍들의 집합에로의 환원과 동일하지도 않고 심지어 유사하지도 않다. 집합 개념이 순진하고 순전히 직감적으로 (칸토어[Cantor]에 의해서처럼) 사용되었다면 이것은 아마도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한집합들에 대한 역설들과 (볼차노[Bolzano], 칸토어 및 러셀에 의하여 토론된) 집합이론을 공리화할 필요는, 최소한도로 말해도, 이룩된 환원이 간단한 산술화가 아니라 자연수로의 환원 공리적인 집합이론으로의 환원이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것은 고도로 정교하고 다소 위험한 일로 판명되었다.

이 사례를 요약하면, 산술화의 프로그램은 다시 말해서, 기하학과 무리수들의 자연수들로의 환원에 대한 프로그램 부분적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이 실패로 야기된 예기치 않은 문제들의 숫자와 예기치 않은 지식의 양은 압도적이다. 다음과 같이 일반화될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환원주의자로서 성공하지 못하는 곳에서도, 우리가 실패를 향해 가면서 우리가 얻을 흥미롭고 예기치 않은 결과들이 가장 큰 가치를 지닐 수 있다.

 

                                     III

 

나는 무리수들을 자연수로 환원하는 시도의 부분적 실패를 언급했고 또한 나는 환원 프로그램들은 과학적 및 수학적 설명, 단순화 그리고 이해에 관한 활동들의 한 부분임을 지적했다.

이제 나는 보다 상세하게 물리학에서의 환원 프로그램들에 관한 몇 가지 성공 사례 및 실패 사례와, 특히 거시물리학의 미시물리학으로의 환원과 화학의 미시물리학 및 거시물리학으로의 환원에 관한 부분적 성공 사례들을 토론할 것이다.

나는 궁극적 설명(ultimate explanation)’이라는 명칭을,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도 않고 더 이상 설명될 수도 없는 어떤 것의, 더욱 특히 본질(essence)’이나 실체(substance)’(ousi) 도움을 받아 사물들을 설명하거나 환원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사용한다.

두드러진 사례는 무생물에 관한 물리학 전체를 확대 실체(extended substance)로 데카르트가 환원한 것이다; 단지 한 가지 본질적인 속성을 지닌 실체(matter); 다시 말해서, 공간적 확대.

물리학 전체를 실체(matter)의 한 가지 분명한 본질적 속성으로 환원하려는 이 시도는, 그 시도가 물리적 우주에 대하여 이해 가능한 그림을 낳는 한, 매우 성공적이었다. 데카르트가 본 물리적 우주는, 그 속에서 모든 천체(body)’실체의 부분이 이웃 부분을 밀고 다른 편에 있는 이웃에 의하여 밀리는 소용돌이의 움직이는 시계장치였다. 물리적 세계에서는 실체(matter)만 발견될 수 있고 모든 공간은 그 실체로 가득 차있다. 사실상, 빈 공간은 없고 실체의 본질적인 공간적 확대만 있기 때문에 공간 또한 실체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단 한 가지 순수하게 물리적인 인과관계의 방식만 있었다: 모든 인과관계는 밀치기(push), 즉 접촉에 의한 행동.

세상을 바라보는 이 방식은, 뉴튼이 자신의 중력이론을 통하여 새로운 인과관계를 도입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을지라도, 심지어 뉴튼에 의해서도 만족스러운 것으로 보였다: 인력(attraction), 즉 거리를 둔 행동.

뉴튼 이론에 관한 거의 믿을 수 없는 설명적 및 예측적 성공은 데카르트의 환원 프로그램을 파괴했다. 뉴튼 자신은 우주적 입자 충격(cosmic particle bombardment)에 관한 충격(impulse)’(우산효과[umbrella effect]와 결합된 방사압[radiation pressure])을 통하여 중력을 설명함으로써 데카르트의 환원 프로그램을 수행하려고 시도했다 (그 시도는 통상적으로 르 사즈[LeSage]라는 이름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나는 뉴튼이 이 이론에 대한 치명적인 반대의견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믿는다. 물론 그 반대의견은 접촉을 통하여 조금 떨어진 인력과 행동을 밀치기와 행동으로 환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견은 또한 모든 움직이는 천체들이, 자체의 움직임에서 제동장치로서 작동했을 (뒤쪽 창문에 대한 비[rain]의 밀치기를 초과하는 자동차 앞 유리에 대한 비[rain]의 과잉 밀치기를 고려하라) 또한 그리하여 뉴튼의 관성 법칙 사용을 무효화했을 저항 매체 속에서 움직였을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체의 직감적인 인력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의 인력은 실체(matter)의 본질적인 속성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터무니없다고 뉴튼 자신이 배척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력을 밀치기로 궁극적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붕괴한다.

우리는 여기서 촉망되는 과학적 환원과 그 환원의 실패에 관한, 그리고 환원을 시도함으로써 그 환원이 실패하는 것과 아마도 그 환원이 실패하는 이유를 발견함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배우는지에 대한 간단한 사례를 경험한다.

(나는 이 실패가 뉴튼이 우주를 신[]의 지각기관[sensorium]이라고 기술한 즉각적인 이유였다고 추측한다. 우주는, 말하자면, 모든 천체들의 배분을 의식하고있었다: 우주는, 어떤 의미에서, 전지(全知)했다. 우주는 이 지식을 무한한 속도로 모든 순간에 모든 장소들로 전파했기 때문에 또한 어디에도 존재했다. 그리하여 우주는, 적어도 신적(神的) 본질의 두 가지 특징적인 속성들을 공유하기에 자체가 신적(神的) 본질의 한 부분이었다. 이것은 뉴튼에 의한 또 다른 본질주의적인 궁극적 설명의 시도였다고 나는 제안한다.)

데카르트의 환원은 방법론적인 이유들로 인하여 우리가 환원을 시도해야 하는 이유를 예시한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환원은 또한 우리가 시도했던 환원들의 완벽한 성공에 관하여 우리가 자신만만해서는 안 되고 다소 실망할 수만 있는 이유를 가리킨다.

 

                                    IV

 

물리적 세계에서 모든 것을 확대와 밀치기로 환원하려는 데카르트의 시도는 뉴튼 자신의 중력이론의 성공과 비교될 때 실패작이었다. 그 성공은 너무나 커서 뉴튼주의자들은, 로저 코츠(Roger Cotes)를 필두로, 뉴튼 자신이 반대 의견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뉴튼 이론 자체를 궁극적 설명으로 간주하여 중력성 인력(gravitational attraction)을 실체의 본질적 속성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뉴튼은 확대(extension) (자신이 주장하는 원자들의) 관성(inertia)이 질량의 본질적인 속성이 아닌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뉴튼은, 나중에 아인슈타인이 강조한 관성과 중력성 질량(gravitational mass)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들의 비례(proportionality)(또는 평등성[equality]) 의하여 노출된 문제에 대하여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본질주의적 접근방식이 지닌 몽매주의(obscurantism: 또는 반계몽주의)로 인하여 뉴튼과 외트뵈시(Eötvös) 혹은 심지어 아인슈타인 사이의 시야에서 거의 실종된 문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은 관성적 질량과 중력성 질량의 본질주의적 동일시를 파괴했고, 이것이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등가원리(等價原理: principle of equivalence)를 통하여 다소 특수한 목적으로 그 동일시를 설명하려던 이유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중력 방정식들이, 저 중력 작용을 하는 천체들이 시간-공간 측지선(geodesic)에서 움직인다는 이전에 개별적으로 전제된 원리를 홀로 유발함이 밝혀졌을 때, 관성의 원칙은 사실상 중력 방정식으로 환원되었고 그리하여 관성질량은 중력질량으로 환원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결과가 지닌 중요성에 강력한 인상을 받았을지라도 그 결과가 마흐[Mach]가 지녔던 핵심적인 문제를 - 관성에 대한 설명 유명하지만 결코 명료하지 않는 마흐의 원칙보다 더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해결했음을 완전히 인정하지는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각 천체의 관성은 우주에서 모든 다른 천체들의 결합된 효과에 기인한다는 마흐의 원칙’. 아인슈타인에게는 실망스럽게도 이 원칙은, 적어도 자체에 대한 해석 몇 가지에서, 모든 천체가 없는 공간에 대하여 특수상대성을 낳은 일반상대성과 양립할 수 없었는데 특수상대성 안에서 관성의 법칙은 마흐의 제안과 반대로 여전히 유효하다.)

여기서 우리 성공적인 환원에 관한 매우 만족스러운 사례를 경험한다: 일반화된 관성의 원칙을 일반화된 중력의 원칙으로 환원한 것. 그러나 그 사례는 이런 관점에서 거의 고찰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이, 순전히 수학적 관점에서, 우아하지만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서 간주될 수 없던 한 가지 결과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느꼈을지라도, 아인슈타인조차 그런 관점에서 그 사례를 고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공리들의 체계 안의 한 가지 공리의 의존이나 독립은 일반적으로 형식적인 관심 이상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측지선(geodesic) 위의 운동의 법칙은 개별적인 공리로서 전제되어 한다거나 중력이론의 나머지에서 도출될 수 있는지가 왜 문제가 되어야 하는가? 답변은 그 법칙의 도출을 통하여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의 일치성이 설명되었고 전자(前者)가 후자(後者)로 환원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떨어진 거리에서의 움직임이라는 뉴튼의 커다란 문제가 (본질주의의 어법으로 표현된) 아인슈타인의 중력행동이 지닌 유한한 속도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관성 실체(matter)의 중력 실체(matter)로의 환원에 의하여 해결되었다고 우리는 아마도 말할 것이다.

 

                                       V

 

뉴튼과 뉴튼주의자들은 물론 자기력과 전기력의 존재에 관하여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20세기 초까지 전자기 이론을 뉴튼의 역학으로 혹은 뉴튼 역학의 수정된 형태로 환원하려는 시도들이 수행되었다.

이런 전개상황에서 두드러진 문제는 겉으로 보기에 -핵심적인 힘들(non-central forces)(외르스테드 힘[Oersted forces]) 핵심적인 힘들로 환원한 것인데, 그 핵심적인 힘들은 심지어 수정된 뉴튼 이론에도 맞아 들어가는 듯이 보였다. 이런 전개상황에서 두드러진 이름들은 앙페르(Ampère)와 베버(Weber)였다.

맥스웰(Maxwell) 또한 패러데이(Faraday)의 힘의 (역선[力線: lines of forces]) 전자기장을 뉴튼 역학 즉, 발광성(發光性: luminiferous) 에테르 모형으로 환원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그 시도를 포기했다 (전자기장의 운반체로서 발광성 에테르는 아니라할지라도). 헬름홀츠(Helmholtz) 또한 뉴튼적이자 부분적으로 데카르트적인 환원 프로그램에 매혹되어서, 자신의 제자인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에게 이 문제에 관하여 연구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을 때, 헬름홀츠는 역학의 연구 프로그램을 구할 희망으로 그렇게 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는 맥스웰의 방정식이 결정적이라는 헤르츠의 확인을 수용했다. 헤르츠와 J. J. 톰슨(Thomson) 이후 정확하게 반대 연구 프로그램이 더 매혹적이 되었다 역학을 전자기론으로 환원하는 프로그램.

실체(matter)에 관한 전자기론은 다시 말해서, 역학과 화학을 원자론에 관한 전자기론으로 환원하는 것 적어도 러더퍼드(Rutherford) 행성 모형 즉, 핵 원자 모형의 해인 1912년부터 1932년까지는 두드러지게 성공적이었다.

사실상, 양자역학은 (혹은 예전에 지칭된 바와 같이 새로운 양자론’) 적어도 1935년까지는 당시 역학의 새로운 실체(matter)에 관한 전자기적 이론으로의 환원에 대한 최종적 형태로서 간주되던 것에 대한 또 다른 명칭이었을 따름이다.

심지어 양자역학 바로 전까지 주요 물리학자들에게 이 환원이 얼마나 중요하게 보였는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할 것이다:

 

... 우리의 현재 개념들에 따르면 기초 입자들은 [다시 말해서, 전자와 양성자]...

전자기장을 축소해놓은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우주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두 가지 실제성을 제시한다..., , 중력 에테르와 전자기장, 혹은 그것들 또한

아마도 지칭될 바와 같이 공간과 실체(matter).

 

내가 이탤릭체로 쓴 다른 것이 아니다(nothing else)’는 웅장한 문체로의 환원에 특징적이다. 정말로 그의 생애의 말엽까지,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1920년의 견해가 대체된 혹은 더 정확하게는 붕괴된 (특히 핵 힘[nuclear forces]의 발견으로 인하여) - 후에도 중력장과 전자기장을 통합된 장이론(unified field theory)으로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본질적으로 동일한 환원주의적 견해에 해당하는 것은 거의 모든 주요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당시 (1932) 수용되었다: 영국에서는 에딩튼(Eddington)과 디랙(Dirac) 그리고 유럽대륙에서는 아인슈타인 외에도 보어(Bohr), 드브로이(de Broglie), 슈뢰딩거(Schrödinger),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보른(Born) 및 파울리(Pauli). 그리고 당시 캘리포니아 기술 연구소(the 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의 로버트 A. 밀리컨(Robert A. Millikan)은 그 견해에 관하여 매우 인상적인 서술을 제시했다:

 

정말로, 양전자(positive electron)지금은 통상적으로 양성자(proton)으로 지칭되는 지금은 통상적으로 단지 전자(electron)로 지칭되는 음전자(negative)보다 1850배 무겁기 때문에, 전하(charge)에서는 정확하게 같지만 질량에서는 크게 다르게

물질세계가 다만 두 가지 근본적인 존재들, 즉 양전자들과 음전자들을 포함한다는

이론을 실제 보편적으로 최종 수용했던 1914년에 정점을 이루었던 전체 연속적인

발견들보다 과학의 역사에서 더 아름답게 단순화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환원주의적 글은 매우 알맞은 시기에 쓰였다: 채드윅(Chadwick)이 자신의 중성자 발견을 공표한 것과 앤더슨(Anderson)이 최초로 양전자(positron)을 발견한 것은 동일한 해(1932)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딩튼(Eddington)과 같은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들 중 몇몇은, 심지어 유카와(Yukawa)가 중간자(meson)라고 지칭될 것의 존재를 제안한 후에도, 양자역학의 도래와 함께 실체(matter)에 관한 전자기론이 최종 상태에 들었다는 것과 모든 실체(matter)는 전자와 양성자(protons)로 구성되어 있다고 계속해서 믿었다.

정말로 역학과 화학을 실체(matter)에 관한 전자기론으로 환원한 것은 거의 완벽한 듯이 보였다. 공간을 채우는 실체(matter)의 본질로서, 그리고 데카르트의 밀치기(push)로서 데카르트와 뉴튼에게 나타났던 것은 반발력(repulsive forces)으로 음전자들이 음전자들에게 행사하는 힘 환원되었다 (라이프니츠가 오래 전에 요구했던 바와 같이). 실체(matter)의 전기적 중립성은 동등한 숫자의 양 양성자(positive protons)와 음전자에 의하여 설명되었다; 그리고 실체(matter)의 전화(電化: electrification)(이온화: ionization) 원자의 궤도전자(軌道電子: planetary electron) 껍질로부터의 전자의 손실에 (혹은 원자의 궤도전자 껍질 속의 전자 과잉에) 의하여 설명되었다.

화학은, 파울리(Pauli)의 배타원리(exclusion principle)를 사용함으로써 기발하게 완성되었던 이론인 원소들의 주기적 체계에 대한 보어(Bohr)의 양자론에 의하여 물리학으로 환원되었다 (혹은 환원된 듯이 보였다); 그리고 화학적 구성에 관한, 그리고 공유 화학적 결합(covalent chemical bonds)의 본성에 관한 이론은 하이틀러(Heitler)와 런던(London)에 의하여 다시 파울리의 원리를 이용한 동극 원자가(homeopolar valency [동극 원자가로 번역했으나 정확한 번역과 내용을 알 수 없음. 역자])의 이론으로 환원되었다.

실체(matter)는 환원 불가능한 물질이라기보다는 복잡한 구조로 밝혀졌을지라도, 물리학의 우주에서는 그런 통일성이나 그런 정도의 환원이 전에 없었다.

또한 그 이후에도 그런 통일성이나 그런 정도의 환원이 이룩되지도 않았다.

참으로 우리는 여전히 데카르트의 밀치기를 전자기력으로 환원한 것을 신뢰한다; 그리고 보어(Bohr)의 원소들에 관한 주기적 체계 이론은, 동위원소의 도입으로 상당히 바뀌었을지라도, 대체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우주를 안정된 빌딩 블록들로서 두 가지 입자들을 가진 전자기적 우주로 이렇게 아름답게 환원한 것에서 다른 모든 것은 당시 붕괴되었다. 강조하건대 이 붕괴과정에서 우리는 엄청난 숫자의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나의 주요 주장 중 한 가지 주장이다. 그러나 단순성, 그리고 환원 프로그램은 사라졌다.

이 과정은, 중성자와 양전자의 발견과 동시에 시작되었는데, 그 후 항상 새로운 기초 입자들의 발견과 함께 계속되었다. 그러나 입자론은 심지어 주요 난제도 아니다. 실제적인 붕괴는 새로운 종류의 힘의 발견, 특히 명백하게 전자기력과 중력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단거리 핵력(short-range nuclear forces)의 발견에 기인한다.

중력은 당시 물리학자들을 그다지 많이 괴롭히지 않았는데 이유인즉 중력이 일반상대성에 의하여 해명되었을 따름이었고 중력과 전자기력의 이원론이 통합장이론(a unified field theory)에 의하여 갈음될 것이라고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물리학에서 우리는 네 가지 매우 다르고 여전히 환원 불가능한 종류의 힘을 지니고 있다: 중력, 약 붕괴 상호작용(weak decay interaction), 전자기력 그리고 핵력(nuclear forces).

 

                                      VI

 

그리하여 데카르트의 역학은 데카르트와 뉴튼에 의하여 다른 모든 것들이 환원될 수 있는 토대로서 예전에 간주되었던 전자기학으로 성공적으로 환원되었고 여전히 지금도 환원된다. 그러나 인정되는 바와 같이 화학의 양자물리학으로의 가장 인상적인 환원은 어떨까?

화학적 결합의 본성(The Nature of the Chemical Bonds)의 저자인 폴링(Pauling)(1959) 자신은 화학적 결합의 본성이 무엇인지 정의(定義)’할 수 (혹은 정확하게 서술할 수) 없었다는 강력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화학적 결합에 관한 (공유 또는 쌍 전자 결합과 비-공유, 예를 들어 플러그--구멍[plug-and-hole], 결합 모두에 관한) 양자론으로의 완전히 만족스러운 환원을 우리가 경함한다고 논증을 위하여 전제하자. 더 나아가 논증을 위하여 우리에게 핵력에 대한, 원소들과 그 원소들의 동위원소들의 주기계(the periodic system)에 대한, 그리고 특히 더 무거운 핵의 안정성과 불안정성에 대한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이론이 있다고 논증을 위하여 전제하다. 이것은 화학의 양자역학으로의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환원을 구성하는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리학 이론에 다소 이질적인 개념인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 도입되어야 한다: 진보에 관한, 우리의 우주의 역사에 관한, 우주진화론에 관한, 그리고 심지어 우주진화론 이상에 관한 개념.

이것은 원소들의 주기율표와 주기계(the periodic system)에 대한 (재설명된) 보어(Bohr)의 이론이 더 무거운 핵들이 보다 가벼운 핵들로 구성되는 것으로서 설명하기 때문에 그렇다; 궁극적으로 수소 핵들과 (양성자들) 중성자들로 (반대로 일종의 양성자들과 전자들의 구성으로서 아마도 간주될) 구성되는 것으로서. 그리고 이 이론은 더 무거운 원소들에는 역사가 그 원소들의 핵들의 속성들이, 우주에서 드물게만 마주치는 상황 하에서 몇 가지 수소 핵들을 더 무거운 핵들로 융합되도록 만드는 드문 과정으로부터 실제로 발생한다는 것 있다고 전제한다.

우리는 이것이 실제로 발생했고 여전히 발생한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다; 더 무거운 원소들에는 진화적인 역사가 있다는, 그리고 중수소가 헬륨으로 변하는 융합과정은 우리 태양의 주요 에너지원이고 또한 수소폭탄의 근원이라는 견해. 그리하여 헬륨과 모든 더 무거운 원소들은 우주론적 진화의 결과이다. 그들 역사, 그리고 특히 더 무거운 원소들의 역사는 현재 우주론적 견해들에 따르면 기묘한 것이다. 더 무거운 원소들은 초신성 폭발의 산물로 현재 간주된다. 몇 가지 최근 측정치들에 따르면 헬륨은 질량과 수소를 통하여 모든 실체(matter)25%를 형성하고 질량을 통하여 모든 실체(matter)2/3 혹은 3/4을 형성하기 때문에 모든 더 무거운 핵들은 매우 희소한 것으로 보인다 (질량을 통하여 함께 아마도 1이나 2%). 그리하여 지구와 아마도 우리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은 주로 매우 희귀한 (그래서 나는 매우 귀중하다고 [‘귀중하다는 단어의 부분에서 원문이 인쇄가 잘못되어 제일 앞과 두 번째 알파벳이 불명확하고 그 다음 알파벳에 ecious로 연결되는 것을 볼 때 아마도 이 단어는 precious인 듯하다. 역자] 말해야 겠다) 재료들로 주로 만들어져 있다.

현재 우주의 기원에 관하여 가장 널리 수용되는 이론은 - 뜨거운 빅뱅 이론 대부분의 헬륨은 빅뱅 자체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헬륨은 팽창하는 우주가 존재하는 바로 첫 번째 순간 안에서 생산되었다고. 이 추측의 (원래 가모프[Gamow]에게서 나온) 과학적 위상에 대한 불안성은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화학을 양자역학으로 환원하려고 시도하면서 이런 종류의 이론들에게 우리가 도움을 청해야하기 때문에, 이 환원이 잔여물 없이 수행되었다고 주장될 수 없다.

사실상 우리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화학을 물리이론으로보다는 우주론으로 환원했다. 물론 현대의 고전적 상대주의적 우주론은 응용 물리이론으로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헤르만 본디(Hermann Bondi)가 말하는 바와 같이, 이 시절은 이제 끝난 듯이 보이고, 우리가 지닌 아이디어들 중 몇 가지는 (예를 들어, 디랙[Dirac] 및 요르단[Jordan]과 함께 시작된 아이디어들) 물리이론을 우주생성론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들로서 거의 기술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우주론과 우주생성론 모두는, 물리학의 엄청나게 매혹적인 부분들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우주론과 우주생성론 모두가 더 잘 시험될 수 있게 되고 있다할지라도, 여전히 물리과학에서 거의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우들이며, 화학을 물리학으로 환원하는 토대들로서 역할을 하기는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소위 화학을 물리학으로 환원하는 것을 미완성이자 다소 문제가 있는 것으로서 간주하는 한 가지 이유이다; 물론 내가 이 새로운 문제들 모두를 크게 환영한다할지라도.

 

                                  VII

 

그러나 화학을 물리학으로 환원하는 것에 대하여 두 번째 잔여물이 있다. 우리의 현재 견해는 수소만은, 혹은 더 정확하게 수소의 핵은 모든 다른 핵들의 건축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양성 핵들이 매우 짧은 거리까지 강력하게 서로 전기적으로 반발한다고 믿지만, 훨씬 더 짧은 거리에 (반발이 엄청난 압력이나 속도에 의해 극복된다는 조건으로만 성취될 수 있는) 대해서는 양성 핵들이 핵력에 의하여 서로 끌어들인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수소 핵에, 수소 핵들이 우리의 우주 속에 존재하는 압도적인 다수의 조건들에서 작동하지 않는 상관관계성 속성들을 귀속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 핵력은 극단적으로 드문 조건 하에서 단지 늦게 활성화된 잠재력이다: 엄청난 온도와 압력 하에서. 그러나 이것은 주기율표의 진화론이 예정이나 미리-확립된 조화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본질적 속성이론과 매우 많이 닮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튼 우리의 태양계와 같은 태양계는 현재의 이론들에 따르면 이 속성들의 이전-존재에, 혹은 더 정확하게, 잠재력에 의존한다.

게다가 초신성들의 폭발에서 더 무거운 원소들의 근원에 대한 이론은 두 번째 형태의 예정이나 미리-확립된 조화를 소개한다. 왜냐하면 그 이론은 중력이 (분명히 모든 힘 중에서 가장 약하고 지금까지 핵력이나 전자기력과 연결되지 않은) 수소가 크게 축적된 데에서 핵들 사이의 엄청난 전기적 반발을 극복하여 핵력의 행동으로 인하여 그 핵들을 용해되도록 만들 정도로 강력하게 될 수 있다는 주장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화는 핵력의 내재적 잠재력과 중력의 내재적 잠재력 사이에 존재한다. 나는 미리-확립된 조화에 관한 철학이 틀림없이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미리-확립된 조화에 대한 지지 요청이 만족스러운 환원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지지 요청이 한 가지 사물을 다른 사물로 환원하는 방법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화학의 물리학으로의 환원은, 우리가 다소 비현실적으로 유리한 전제들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완벽과 거리가 멀다. 더 정확하게, 이 환원은 수소원자 속으로 구축된 잠자는 잠재력, 즉 낮은 확률을 지닌 상대적 경향들이 활성화되는 것을 허용하기 위하여 우주적 진화론, 즉 우주진화론을 전제하고 덧붙여 두 종류의 미리-확립된 조화를 전제한다. 내가 제안하는 바, 우리는 출현(emergence)이라는 개념과 출현하는 속성들(emergent properties)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듯이 보인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이 매우 흥미로운 환원이 우리에게 우주에 대하여 기묘한 아무튼 환원주의자에게는 기묘한 - 그림을 남겼음을 우리는 안다; 이것이 내가 이 절에서 주장하고 싶은 요점이다.

 

                                  VIII

 

지금까지 언급된 것을 요약한다: 나는 사례들의 도움을 받아서 환원 문제를 분명히 하려고 노력하여, 물리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환원 사례들 중 몇 가지가 완벽하게 성공하지 못하고 잔여물을 남겼음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어떤 사람은 뉴튼의 이론이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이론을 완벽하게 성공적으로 환원한 것이라고 주장할 (그러나 위 각주 5를 참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고, 그리고 우리에게는 일반상대성, 양자이론 그리고 특별한 경우들로서의 네 가지 힘을 고도로 근사하게(approximately) 유발하는 통합이론이 있다고 우리가 전제할지라도, 우리는 화학이 잔여물 없이 물리학으로 환원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사실상 소위 화학의 환원은 진화, 우주론 및 우주진화론, 그리고 출현하는 속성들의 존재를 전제하는 물리학으로 환원이다.

다른 한편으로, 환원하려던 우리의 완벽하지 못한 시도들에서, 특히 화학을 물리학으로 환원하려던 시도들에서 우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배웠다. 새로운 문제들은 새로운 추측성 이론들을 낳았고, 이것들 중 몇 가지는 핵융합과 같은 것으로 입증하는 실험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술을 야기했다. 그리하여 방법의 관점에서, 우리의 환원 프로그램들은, 시도된 환원들이 그런 상태로 통상적으로 실패했다고 언급될지라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IX

 

여기에서 언급된 이야기와 그 이야기로부터 도출된 교훈은 생물학자에게 예기치 않은 것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생물학에서도 또한, 환원주의는 (물리주의[physicalism]나 유물론의 형태로), 완벽하게 성공적으로는 아니라할지라도, 극도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심지어 환원주의가 성공하지 못한 곳에서도, 환원주의는 새로운 문제들과 새로운 해결책들을 낳았다.

나는 아마도 나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할 것이다. 철학으로서, 환원주의는 실패작이다. 방법의 관점에서, 상세한 환원들에 대한 시도들은 연달아 충격적인 성공들 거두었고 환원주의의 실패들은 또한 과학에 관하여 매우 유용했다.

이 과학적 성공들을 이룩한 사람들 중 몇몇이 철학의 실패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이해가 가능하다. 아마도 화학을 양자물리학으로 완벽하게 환원하려는 시도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나의 분석으로 인하여 그 철학자들은 잠시 멈추어 문제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X

 

지금까지의 토론은 자크 모노(Jacques Monod)가 자신의 저서 우연과 필연(Chance and Necessity)의 서문에서 서술한 간단한 언급에 대한 설명으로서 간주될 것이다:

 

화학에서 모든 것이, 의문의 여지없이 모든 화학의 기초를 이루는 양자이론을

통하여 예측되거나 해결될 수도 [혹은 양자이론으로 환원될 수도] 없다.

 

동일한 책에서, 모노는 생명의 근원에 관하여 제안을 (확실히 주장은 아니다) 또한 내놓는데, 우리는 그 제안을 매우 특별하고 여기서 도달한 관점에서 고찰할 것이다. 모노의 제안은 생명체가 극단적으로 비개연적인 우연한 환경들의 결합에 의하여 무생물로부터 출현했으며 이것은 낮은 확률을 지닌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0의 확률을 지닌 사건이었다는 사실상 독특한(unique) 사건 것이다.

이 제안은 실험적으로 시험될 수 있다 (에클스[Eccles]와의 토론에서 모노가 지적한 바와 같이). 어떤 잘-정의(定義)된 실험적 상황 하에서 우리가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생명체의 근원에 관한 독특성이라는 가설은 반증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제안은, 처음 보기에 시험될 수 있는 과학적 가설처럼 보이지 않을지라도, 시험될 수 있는 과학적 가설이다.

게다가 무엇이 모노의 제안을 합당하게 만드는가? 유전자 암호의 독특성에 대한 사실이 있지만, 모노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것은 자연선택의 결과일 수 있을 것이다. 생명체의 근원과 유전자 암호의 근원을 당혹스러운 수수께끼로 만드는 것은 이것이다: 유전자 암호는 해석되지 않으면 생물학적 기능이 없다; 다시 말해서, 유전자 암호가 그 구조가 암호에 의하여 규정되는 단백질의 합성을 낳지 않는다면. 그러나 모노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세포가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세포인 비-원시적인 세포) 암호를 번역하는 동력장치는 자체가 DNA 안에 암호화 되어 있는 적어도 50개의 고분자 구성요소들로 구성된다.’ 그리하여 암호는 자체의 해석의 어떤 산물들을 사용함을 통하지 않고는 해석될 수 없다. 이것은 실제로 당혹스러운 순환이다: 그것은 유전자 암호의 기원에 관한 모형을, 혹은 이론을 형성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악순환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생명체의 근원이 (우주의 근원처럼) 과학에 대해서는 관통될 수 없는 장애물이, 그리고 생물학을 화학과 물리학으로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들에 대해서는 잔여물이 된다는 가능성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생명체의 기원의 독특성에 대한 모노의 제안이 확실히 환원에 대한 시도들에 의하여 반증될 수 있다할지라도, 그 제안이 참이라면 모든 완벽하게 성공적인 환원에 대한 부인에 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제안과 함께 모노는 방법의 이유들로 인한 환원주의자이기도 한데, 내가 믿기에 화학을 물리학으로 환원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앞선 토론에 비추어 우리 모두에게 강요되는 입장에 도달한다. 그것은 자신이 궁극적 성공에 대하여 절망한다할지라도 환원을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비판적 환원주의자의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노가 자신의 저서 다른 곳에서 강조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주요 희망이 놓여 있는 곳은 옛 문제들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하여, 반대로 새로운 발견들인 새로운 해결책들을 낳을 새로운 문제들을 발견하는 우리의 희망 환원주의적 방법들을 전체론적인(holistic)’ 방법들로 갈음하는 데라기보다는 환원 시도들로써 앞으로 나아가는 데이다.

나는 여기서 전체론을 상세하게 토론하고 싶지 않지만 몇 마디가 필요할 것이다. 전체론적인 실험적 방법들은 (배아에서 세포이식과 같은), 전체론적인 사고에 의하여 고취될지라도, 방법론적으로 환원주의적이라고 주장될 것이다. 전체론적인 이론들은, 다른 한편으로, 유기체나 유전자인구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원자나 분자에 대한 기술에서도 사소하게 필요하다. 전체론적이든 아니든 아마도 유용한 추측들의 다양성에는 한계가 없다. 나의 주요 주장을 고려하면, 생물학에서 실험적 방법들의 특징에 관해서만 의심이 든다: 그 방법들 모두가 다소 환원주의적 특징을 지니지 않는지. (그런데 데이비드 밀러[David Miller]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바와 같이, 결정론적 및 비결정론적 이론들에 관하여 유사한 상황이 나타난다. 내가 이 책의 대부분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우리는 형이상학적인 비결정론자들이 되어야 할지라도, 방법론적으로 우리는 여전히 결정론적이거나 인과적 법칙들을 찾아야 한다 해결될 문제들 자체가 확률주의적 특징을 지니는 곳은 제외하고.)

생명체의 근원의 독특함이라는 모노의 제안이 분명히 반복될 수 있는 조건 하에서 무생물로부터 나온 생명체의 생성에 의하여 반증되어야할지라도, 이것은 완벽한 환원에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환원이 불가능하다고 선험적으로 논증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오랫동안 우리가 하고 있던 것을 이해하지 않고, 그리고 우리가 심지어 분자생물학이나 유전자암호에 대하여 암시도 가지기 전에 우리는 생명체로부터 생명체를 생성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실제로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완벽히 물리화학적으로 이해하지 않고도 우리가 무생물로부터 생명체를 생성할 것임은 틀림없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암호의 해독에 내재한 악순환을 깨는 데 우리가 성공하는 방법.

아무튼 꿈도 꾸지 못한 분자생물학의 돌파구가 생명체의 근원에 대한 문제를 이전보다 더 큰 수수께끼로 만들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새롭고도 더 깊은 문제들을 얻었다.

 

                                     XI

 

화학을 물리학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그리하여 진화론을 물리학으로 도입할 것을 요구한다; , 우리 우주의 역사로의 회귀. 진화론은 생물학에서 훨씬 더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덧붙여 목적이나 목적론(teleology)이나 (마이어[Mayr]의 용어를 사용하여) 목적론적 법칙(teleonomy)의 개념 혹은 문제 해결에 관한 매우 유사한 개념도 그렇다; -생물학적 과학들의 주제에는 완전히 관계가 없는 개념 (이 과학들 안에서 최대치들과 최소치들에 의하여 그리고 변분법[calculus of variations]에 의해서 수행되는 역할이 약간 유사한 것으로서 간주되었다할지라도).

목적론을 비-목적론적이거나 평범한 인과적 용어들로 설명함이 가능한 것을 밝힌 것은 물론 다윈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다원론은 우리가 지닌 최고의 설명이다. 현재 진지하게 경쟁상대가 되는 가설들은 없다.

문제들과 문제해결은 생명체와 동시에 나타나는 듯이 보인다. 생명체의 시작 이전에 작동중인 자연선택과 같은 것이 예를 들어, 덜 안정적인 원소들의 방사성 붕괴에 기인하는 더 안정된 원소들의 선택 있을지라도 우리는 원자핵들에 대하여 생존이 이 용어의 어떤 의미에서도 문제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결정체들과 미생물들 사이의 밀접한 유사점과 그것들의 분자 부분들은 (세포기관들[organelles]) 여기서 또한 붕괴한다. 결정체들에서는 성장이나 번식이나 생존의 문제들이 없다. 그러나 생명체는 바로 처음부터 생존의 문제들에 직면한다. 정말로,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는 생명체를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리고 살아있는 유기체들을 우주에 있는 유일하게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복합체로서 기술할 수 있다. (컴퓨터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도구적이지만 이런 의미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생명체에게 해결될 문제들에 대한 의식을 귀속시켜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인간의 수준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과 같은 많은 문제들을 그 문제를 의식하지 않고 부단히 해결한다.

 

                                     XII

 

동물들이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때때로 동물들이 심지어 문제를 의식할 수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동물의 왕국에서 의식의 출현은 아마도 생명의 근원 자체만큼 큰 수수께끼이다.

범심론(汎心論: panpsychism)이나 물활론(hylozoism) , 실체에는 일반적으로 (낮은 정도의) 의식이 부여되어 있다는 주장이 내가 보기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보다 이것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나는 말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고려된다면, 미리-확립된 조화인 또 다른 예정설에다. (물론 그것은 라이프니츠의 미리-확립된 조화론의 원래 형태의 한 부분이었다.) 왜냐하면 생명이 없는 실체에서 의식에는 어떤 기능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이프니츠, 디드로[Diderot], 뷔퐁[Buffon], 헤켈[Haeckel] 그리고 많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의식을 생명이 없는 입자들에게 (모나드[monads], 원자[atoms]) 귀속시킨다면 우리는 그 의식이 동물들에게서 어떤 기능을 하는 의식의 저 형태들의 존재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헛된 희망에서 그렇게 한다.

왜냐하면 동물들에게서 의식은 어떤 기능을 지니고 있어서 그 의식이 신체기관인양 지켜 보일 수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려울지라도, 우리는 의식이 진화의, 자연선택의 산물이라고 상정해야 한다.

이 언급이 환원에 대해서는 프로그램이 아마도 될 것이라 할지라도, 이 언급은 아직은 환원이 아니고 환원주의자에 대한 상황은 다소 필사적으로 보인다; 그것은 환원주의자들이 범심론에 관한 가설을 채택한 이유나, 더 최근에는, 환원주의자들이 의식의 (가령 치통에 대한 의식) 존재를 전적으로 부인했던 이유를 설명한다.

이 행동주의적 철학이 현재 전적으로 유행하고 있을지라도,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은 내가 제안하는 바, 실체의 비존재 이론보다 조금도 더 진지하게 고려될 수 없다. 두 가지 이론 모두는 몸과 정신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한다.’ 해결책은 두 가지 경우들에서 근본적인 단순화이다: 해결책은 몸이나 정신에 대한 부인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그 해결책은 너무 싸구려이다. 나는 이 두 번째 남은 질문에 관하여 그리고 특히 범심론에 관하여 아래 XIV 절에서 조금 더 많은 것을 말할 것이고 그 절에서 나는 심신평행론(psychophysical parallelism)을 비판한다.

 

                                      XIII

 

이 장의 첫머리에 등재된 세 가지 환원에 대하여 남은 질문들중에서 나는 두 가지 질문을 간단하게 언급했다. 나는 이제 세 번째 질문인 자아와 인간 정신의 창조성에 대한 인간 의식의 환원 문제로 오고 있다.

존 에클스(John Eccles) 경이 자주 강조한 바와 같이, 이 세 번째 질문은 정신-두뇌 연결에 관한 문제이다; 그리고 자크 모노는 인간의 중추신경계에 관한 문제를 생명체의 근원에 대한 문제인 첫 번째 변경(first frontier)’과 자체의 난점을 비교하여 두 번째 변경(second frontier)’이라고 부른다.

의심할 바 없이 이 두 번째 변경은 특히 비전문가 생물학자에게는 살기에 위험한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분적 환원에 대한 시도들은 내가 보기에 두 번째 질문의 지역에서보다 이 지역에서 더 희망적이라고 나는 말할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의 지역에서처럼 내가 보기에 두 번째 질문의 지역에서보다 내가 보기에 상대적으로 불모인 지역 - 더 많은 새로운 문제들이 환원주의적 방법들로써 여기서 발견될 수 있고, 아마도 심지어 해결될 수도 있다. 세 가지 지역 중 어떤 지역에서의 완벽하게 성공적인 환원이 내가 보기에 불가능하지 않다면 매우 비개연적이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나에게는 없다.

이로써, 내가 이 논문의 서두에 등재된 환원에 관하여 남은 이 세 가지 문제들을 토론하거나 여하간 언급하겠다는 나의 약속을 나는 완수했다고 아마도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과학의 미완료 가능성에 대한 나의 주장으로 나아가기 전에, 이 문제들 중 세 번째 문제에 대하여 -정신 문제 혹은 정신-몸 문제 나는 다소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싶다.

나는 동물들에게서 의식이 출현하여 그 의식을 이해하여 아마도 그 의식을 생리학으로 환원한 문제를 매우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로서 간주한다; 그리고 나는 자아에 관한 특별히 인간적인 의식의 출현이라는 진화된 문제에 , -정신의 문제 대하여 유사한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가 적어도 인간 자아의 문제를 어느 정도 조명할 수 있다고 나는 정말로 생각한다.

나는 내 자신을 다원주의자로서 기술하기를 선호할지라도 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데카르트적 이원론자이다; 그리고 물론 나는 데카르트의 두 가지 실체 중 어떤 것도 지지하지 않는다. 물질은 본질적인 확대의 속성을 지닌 궁극적 실체가 아님을 우리가 알았지만 그 구성 대하여 그 물체의 확대대부분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여 우리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복잡한 구조들로 구성되어 있다: 물질은 전기적 반발을 통하여 (모든 공간이 아니라면)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

나의 첫 번째 주장은 자아에 대한 인간의 의식은, 그 의식의 분명히 환원불가능한 통일성과 함께, 고도로 복잡하다는 것과 그 의식이 아마도 부분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더 높은 수준의 인간 의식과 개성에 대한 의식은 동물들에게는 부재하다고 제안했다. 나는 또한 인간의 영혼을 송과선(松果腺: pineal gland)에 두는 데카르트의 추측이 흔히 터무니없는 것으로서 묘사된 바와 같이 그렇게 터무니없지는 않을 것이며, 분리된 두뇌 반쪽에 대하여 스페리(Sperry)가 얻은 결과들을 고려하여 뇌의 왼쪽에 있는 언어중추에서 위치가 탐색되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에클스(Eccles)가 최근에 나에게 알려준 바와 같이, 스페리의 나중 실험들은 이 상상을 어느 정도까지 뒷받침한다: 오직 좌뇌만 인간적인 듯이 보여 개성을 의식하는 반면, 우뇌는 매우 영리한 동물의 뇌로서 묘사될 것이다.

나는 나의 상상을 내가 특별히 인간의 언어 발달에 귀속시키는 역할에 근거시켰다.

모든 동물 언어에는 정말로, 거의 모든 동물의 행태 칼 뷜러(Karl Bühl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표현적(expressive) (혹은 징후적[symptomatic]) 기능과 소통적(communicative) (혹은 신호적[signalling]) 기능이 있다. 그러나 그 외에도 인간 언어에는 몇 가지 추가 기능들이 있는데 그 기능들은 그 언어의 특징이고 그 언어를 언어라는 더 좁고도 더 중요한 의미에서 언어로 만든다. 뷜러는 인간 언어가 지닌 기본적인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기능에 주목했고 나는 나중에 추가 기능들이 (처방적[prescriptive], 충고적[advisory], 기타 등등) 있으며 그 기능들 중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기능은 논증적(argumentative) 기능임을 지적했다. (알프 로스[Alf Ross]는 많은 다른 기능들이 추가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명령을 내리거나 요구나 약속을 하는 기능들.)

이 기능들 중 어떤 기능도 다른 기능들 중 어떤 기능으로 환원될 수 있다 생각하지 않았는데 모든 기능들 중에서 고등 기능들을 (기술[記述]과 논증) 두 가지 하등 기능들로 (표현과 소통) 환원할 가능성은 최저이다. 이것들은, 그런데, 항상 존재하여 그것이 아마도 그렇게 많은 철학자들이 그것들을 인간 언어의 특징인 저 속성들로 오해하는 이유일 것이다.

나의 주장은 인간 언어의 고등 기능들로써 새로운 세상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인간 정신의 산물들의 세계. 나는 그 세계를 3의 세계라고 불렀다. 나는 이미 이 책의 발문에서 이 용어의 그리고 또한 1 세계2 세계’ - 사용법을 기술했다. 요컨대, 나는 물리적 물질, 힘의 장(: fields), 기타 등등의 세계를 1 세계라고 부른다; 의식과 아마도 무의식적 경험의 세계를 2 세계’; 그리고 특히 이야기하기(storytelling), 신화 만들기, 이론들, 이론적 문제들, 오류 탐지, 그리고 논증들과 같은 구술 (기술되거나 인쇄된) 언어의 세계인 3의 세계.’ (예술작품들과 사회제도들의 세계들은 제 3 세계에 포함되거나 4 세계5 세계로 지칭될 것이다: 이것은 취향이나 편의의 문제일 따름이다.)

나는 이 영역들의 (제한된) 자율성(autonomy)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용어들을 도입했다. 대부분의 유물론자들이나 물리주의자들이나 환원주의자들은, 이 세 가지 세계들 가운데서 오직 제 1 세계만 존재하여 그 세계가 자율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제 2 세계를 행동으로 갈음하고, 더욱 특히 제 3 세계를 언어적 행동으로 갈음한다. (위에 지적된 바와 같이 몸-정신 문제를 해결하는 저 너무나 쉬운 방법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인간의 정신과 자아에 대한 인간의 의식의 , 내가 우주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놀라운 것들 중 몇 가지로서 간주하는 저것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방법; 다른 동등하게 쉬운 출구는 버클리(Berkeley)와 마흐(Mach)의 비유물론(immaterialism)이다: 단지 감각들만 존재한다는, 그리고 물질은 감각들로부터의 구성일 따름이라는 주장.)

 

                                      XIV

 

몸이나 두뇌 그리고 정신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주로 네 가지 입장이 있다.

(1) 물리적 상태들의 제 1 세계의 존재에 대한 부인; , 버클리와 마흐가 주장하는 바의 비유물론.

(2) 정신적 상태들이나 사건들의 제 2 세계의 존재에 대한 부인으로 어떤 유물론자들과 물리주의자들 및 철학적 행동주의자들이나 두뇌와 정신의 일치를 주장하는 철학자들.

(3) 정신적 상태들과 두뇌의 상태들 사이의 철저한 평행구조에 대한 주장; ‘정신물리학적 평행구조라고 불리는 입장. 이것은 주로 데카르트의 견해에서 어떤 난제들을 피하기 위하여 데카르트학파에서 겔린크스(Geulincx), 스피노자, 말브랑슈(Malebranche) 그리고 라이프니츠에 의하여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부수현상설[附隨現象說: epiphenomenalism]처럼, 이것은 의식으로부터 여하한 생물학적 기능도 박탈한다.)

(4) 정신적 상태들은 신체적 상태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주장. 이것은 (3)에 의하여 대체되었다고 널리 믿어지는 데카르트의 견해였다.

내 자신의 입장은 두뇌-정신 평행구조는 어떤 지점까지 존재하게 거의 되어 있다는 것이다. 접근하는 물체를 갑자기 볼 때 눈의 깜빡임과 같은 어떤 반사작용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소 평행구조적 특징을 지닌 현상들이다: 근육의 반응은 (그 안에 물론 중추신경계가 포함되어 있는) 시각적 인상이 반복될 때 규칙적으로 반복된다. 우리의 주의가 그 반응에 쏠리면 우리는 그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의식할 것이고 몇 가지 (그러나 물론 모두는 아니다) 다른 반응들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마도 심지어 반응들만 포함된 몇 가지 경우들에서 완벽한 정신물리학적 평행구조에 대한 주장은 입장 (3) - 오류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나는 한 가지 형태의 심리물리학적 상호작용론을 제안한다. 이것은 (데카르트가 알았던 바와 같이) 물리적 제 1 세계는 인과적으로 폐쇄된 것이 아니라 2 세계에 열려 있어서 정신적 상태들과 사건들에게 열려 있다는 주장을 포함한다. 이것은 아마도 물리학자에게는 다소 매력 없는 주장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제 3 세계가 (그 세계의 자율적 영역들을 포함하여) 2 세계를 통하여 제 1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주장이다. (이것에 대하여 많은 것이 이 책의 발문에서 토론되었다.)

나는 제 2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과 연관된 어떤 일이 제 1 세계에서 (두뇌 속에서) 일어난다는 견해를 기꺼이 수용한다. 그러나 완벽하거나 철저한 평행구조에 대하여 말하면, 우리는 동일한정신적 상태나 사건은 항상 정확하게 상응하는 생리학적 상태가 동반하고 반대의 경우도 그렇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적된 바와 같이, 나는 이 주장에는 옳은 점이 있다는 것과 예를 들어 어떤 두뇌 영역들의 전기적 자극은 규칙적으로 어떤 특징적인 움직임들이나 감각들을 낳을 것임을 인정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정신적 상태들에 대한 보편적인 규칙으로서, 그 주장에는 어떤 내용이 있는지 그 주장이 공허한 주장이 아닌지? - 묻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제 2 세계의 원소들과 두뇌 과정들 사이에 혹은 제 2 세계의 형태들(Gestalten)과 두뇌 과정들 사이에 평행구조를 가질 수 있지만 우리는 고도로 복잡하고 독특하면서 분석이 불가능한 제 2 세계의 과정과 어떤 두뇌 과장 사이의 평행구조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는 독특한 많은 제 2 세계 사건들이 있다. 우리가 창조적인 참신함을 무시한다할지라도, 멜로디를 두 번 듣고 그것이 동일한 멜로디임을 인식하는 것은 동일한 제 2 세계의 사건의 반복이 아닌데 이유인즉 그 멜로디를 두 번째 듣는 것은 멜로디를 인식하는 행위와 관련되고 그 행위는 첫 번째 듣는 것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1 세계의 대상은 (이 경우에는 또한 제 3 세계의 대상) 반복되는 것이지 제 2 세계의 사건이 아니다. 관념 연합론적 심리학처럼 제 2 세계의 사건들을 되풀이되는 요소들로 구성된 것으로서 간주하는 일종의 제 2 세계 이론을 우리가 수용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우리는 제 2 세계의 경험의 반복되는 부분과 동일한 멜로디 듣기 반복되지 않는 부분인 그것은 동일한 멜로디라는 인식(인식 경험이 반대로 다른 환경에서 되풀이될 수 있는 곳)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원자론적이거나 분석적인 심리학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2 세계는 고도로 복잡하다. 우리가 감각 감지와 (, 1 세계의 대상들에 대한 감지) 같은 그런 분야에만 (, 1 세계의 대상들에 대한 감지) 우리는 원자적이나 분자적 방법들로써, 예를 들어 형태(Gestalt) 방법들로써 (내가 생각하기에 이곤 브런스윅[Egon Brunswik]의 생물학적이거나 기능적 방법들과 비교하여 모두 귀중하지 않은 방법들) 우리가 제 2 세계를 분석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나 이론과 같은 제 3 세계의 대상들을 발명하고 이해하려는 우리의 독특한 시도들을 고려한다면 그런 방법들의 적용은 전적으로 합당하지 않을 것으로 판명된다.

우리의 사고나 우리의 이해가 언어적 설명을 하려는 시도들과 상호작용하여 그 설명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방식; 문제나, 우리가 그 문제를 설명하려고 할 때 더 명백해지고 우리가 그 문제를 서술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의 시도들을 비판할 때 훨씬 더 분명해지는 이론에 대하여 우리가 처음으로 모호한 느낌을 가지는 방식; 문제가 변하거나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옛 문제일 것인 방식; 일련의 사고가 한편으로서 상호 연결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분명하게 설명되는 방식: 이 모든 것은 내가 보기에 형태(Gestalt) 심리학이라는 흥미로운 분자적 방법들을 포함하여 분석적이거나 원자론적 방법들을 초월한다. (그런데 형태심리학자들이 가설들은 형태들[Gestalten]이라고 가르치는 반면, 나는 형태들[Gestalten]이 가설들이라고 가르친다: 수용된 신호들에 대한 해석들.)

게다가, 흔히 두뇌의 한 지역이 파괴되면 또 다른 지역이 제 2 세계에 간섭하지 않고 평행구조에 반대하는 또 다른 논증이며, 이번에는 보다 복잡한 제 2 세계의 경험들에 대하여 반드시 모호한 고려에 라기보다는 제 1 세계 안에서의 실험들에 근거한 - ‘떠맡을수 있다고 믿을 근거가 우리에게 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반()-환원주의적으로 들린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 우리가 있으면서 우리들의 세계 중 이 세계를 바라보는 철학자로서 나는 정말로 궁극적 환원에 대하여 절망한다. 그러나 방법론적으로 이것으로 인하여 나는 반()-환원주의적 연구 프로그램에 도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시도된 환원활동의 성장에 비례하여 우리의 지식이 확대될 것이라는 예측을 낳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우리가 지닌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의 범위도.

 

                                 XV

 

이제 특별히 자아에 대한 인간의 의식 문제로 회귀하자; 나의 제안은 그 문제가 제 2 세계와 제 1 세계 및 제 3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여러분이 원한다면 피드백[feedback]) 통하여 출현한다는 것이었다. 3 세계가 하는 역할에 대한 나의 논증들은 다음과 같다.

자아에 대한 인간의 의식은, 다른 것들 가운데서, 몇 가지 고도로 추상적인 이론들에 근거한다. 동물들과 심지어 식물들로, 틀림없이, 시간에 대한 감각과 시간적 기대들을 지닌다. 그러나 자신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서 간주하는 것에는 시간에 관하여 거의 명쾌한 이론이 필요하다; 개인적인 역사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리고 이 역사를 통하여 자신의 개인적인 정체를 (자신의 몸의 정체와 연결하여)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리하여 그것은, 잠든 기간 동안에 우리가 의식의 지속성을 잃을 때 우리가 우리의 몸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남아있다는 이론이다; 그리고 우리가 의식적으로 과거 사건들을 상기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제안하는 바, 동물들의 기억이 취하는 보다 원시적인 형태인, 우리의 기대들과 반응들 속에서 과거 사건들에 의하여 영향만을 받는 것 대신에) 이 이론에 근거해서이다.

어떤 동물들에게는 물론 개성이 있다; 그 동물들에게는 자존심과 야망과 밀접하게 유사한 것이 있어서 그 동물들은 이름에 반응하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인간의 의식은 언어 속에 그리고 (명시적 및 함축적 모두의 방식으로) 설명되는 언어에 묶여있다. 어린이는 스스로 자신 이름을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아(I)’와 같은 단어를 배우고, 자신의 몸의 그리고 자기 자신의 지속성에 대한 의식으로써 그것 사용하기를 배운다; 어린이는 또한 그 단어를 의식은 항상 끊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지식과 연결한다. 인간 영혼의 큰 복잡성과 비본질적 특징은, 즉 인간의 자아는 인간이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잊는 경우들이 있음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특히 명백해진다; 인간은 자신들의 과거 역사 한 부분 아니면 전체를 잊었지만 인간은 자신들의 개성의 적어도 한 부분을 유지했거나 아마도 회복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기억력은 실종된 것이 아닌데 이유인즉 인간은 걷는, 먹는, 심지어 말하는 방법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령, 브리스톨(Bristol) 출신인혹은 자신들의 이름과 주소가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인간이 집으로 가는 길을 발견하지 (동물들이 정상적으로 발견하는) 못하는 한 자아에 대한 인간의 의식은 심지어 동물 기억력의 정상적인 수준을 넘어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이 말하는 능력을 잃지 않았다면 동물의 기억력을 초월하는 약간의 인간 의식이 남아있다.

나는 정신분석에게 크게 우호적은 아니지만 정신분석이 발견한 것들은 사고하는 본질로부터 데카르트가 받는 도움과 대조적으로 인간 자아의 복잡성에 관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듯이 보인다. 나의 주요 요점은 인간 자아에 대한 의식은, 최소한도, 자신의 육체에 대한 (고도록 이론적인) 시간적 혹은 역사적 인식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식적 기억과 자신이 되는 개별적이고 독특한 육체 사이의 연결에 관한 인식; 그리고 수면을 (다시, 시간과 시간적 주기성에 관한 이론을 포함하는) 통하여 자신의 의식이 정상적이고 주기적으로 방해를 받는다는 의식. 게다가, 인간 자아에 대한 의식은 지역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특정 장소와 사람들의 모임에 속하는 것에 대한 의식을 포함한다. 물론 이것의 많은 부분에는 본능적인 토대가 있어서 동물들에 의해서 공유된다. 나의 주장은, 인간 자아에 대한 의식을 심지어 말없는 인간 의식의 수준으로 올리는 데는 인간의 언어나 제 2 세계와 제 3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인간 자아의 통일성은 주로 기억에 기인하며 기억은 동물에게 뿐만 아니라 식물에게도 또한 (그리고 심지어 아마도, 몇 가지 경우에는, 자석들과 같은 비-유기체적 구조들에도) 귀속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런 상태로 기억의 도움을 받는 것은 인간 자아의 통일성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음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필요한 것은 평범한기억이라기보다는 (과거 사건들에 대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의식을 육체들에 관한 제 3 세계의 이론들에게 (, 물리학에게) 연결하는 이론들에 대한 기억이다; 3 세계의 이론들을 파악하는특징을 지닌 기억. 그 기억은, 우리가 그런 의향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그리고 필요하다면 저 이론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 의향들을 이용할 수 있다는 느낌과 함께, 필요하다면 우리로 하여금 명시적인 제 3 세계의 이론들에 의존하도록 할 수 있는 의향들을 포함한다. (이것은 물론 어느 정도까지 인간 의식이 인간 언어에 의존하면서 자아에 대한 인간의식과 동물 의식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할 것이다.)

 

                                  XVI

 

이 사실들은 내가 보기에 인간 의식의 세계인 인간의 제 2 세계를 인간의 제 1 세계로 즉, 본질적으로 두뇌생리학의 세계로 환원하는 것에 대한 불가능성을 확립한다. 왜냐하면 제 3 세계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자율적이어서 다른 두 세계들로부터 독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3 세계의 자율적인 부분이 제 2 세계와 상호작용할 수 있다면, 2 세계는 내가 보기에 제 1 세계로 환원될 수 없다.

3 세계의 부분적 자율성에 대한 나의 표준적 사례들은 산술로부터 도출된다.

이 책의 발문에서 이미 설명된 바와 같이, 자연수의 무한수열이 그런 사례를 제시한다. 자연수의 무한수열은 인간 정신의 산물인 발명품이고 발전된 인간 언어의 한 부분이다. 사람들이 오직 하나, , 다수를 셀 수 있는 원시적 언어들과 사람들인 다섯까지만 셀 수 있는 다른 언어들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끝이 없는 세기의 방법이 발명되자마자, 구별들과 문제들이 자율적으로 나타난다: 홀수들과 짝수들은 발명되지 않고 자연수의 수열에서 발견되고 소수(素數)들과 그 소수들과 연결된 많은 해결된 문제들 및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도 그러하다.

이 문제들, 그리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정리(定理)들은 (매우 큰 소수는 존재하는 않는다는 유클리드의 정리와 같은) 자율적으로 나타난다; 그것들은 사람이 창조한 자연수의 수열의 내부적 구조의 한 부분으로서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나 생각하지 못하는 것과 독립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들을 파악하거이해하거발견하여 그 문제들 중 몇 가지를 해결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사고는 제 2 세계에 속하는데 부분적으로 자율적인 문제들에, 그리고 제 3 세계에 속하는 정리들의 객관적 진실성에 의존한다: 2 세계는 제 3 세계를 창조하기만 하지 않고 제 2 세계는 일종의 피드백 과정으로 제 3 세계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창조된다.

그리하여 나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3 세계, 그리고 특히 제 3 세계의 자율적인 부분은 분명히 물리적 제 1 세계로 환원될 수 있다. 그러나 제 2 세계가 부분적으로 제 3 세계에 의존하기 때문에 제 2 세계는 또한 제 1 세계로 환원될 수 있다.

물리주의자들, 즉 내가 지칭하는 바와 같은 철학적 환원주의자들은 그리하여 제 2 세계와 제 3 세계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이것과 함께, 인간 기술의 전체는 (특히 컴퓨터들의 존재), 3 세계의 정리들을 그렇게 많이 이용하는데, 이해가 불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공항이나 마천루 건축가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제 1 세계에서의 그런 격렬한 변화들은 물리적 제 1 세계 자체에 의하여 제 3 세계 이론들의 발명도 없고 그 발명들에 근거한 제 2 세계의 계획도 없이 궁극적으로 만들어진다고 우리는 전제해야 한다: 그것들은 예정된 것이다;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수소 핵 속으로 구축되는 미리 확립된 조화의 한 부분이다.

이 결과들은 내가 보기에 터무니없다; 그리고 철학적 행동주의나 물리주의는 (혹은 정신과 몸의 일치에 대한 철학) 내가 보기에 이 어불성설로 환원된다.

 

                                XVII

 

철학적 환원주의는 내가 믿기에 실수이다. 철학적 환원주의는 모든 것을 본질들과 실체들을 통한 궁극적 설명으로, 즉 더 이상의 설명을 할 수도 없고 필요도 없는 설명으로 환원하려는 소망에 기인한다.

우리가 궁극적 설명에 대한 이론을 포기하자마자 우리는 우리가 항상 지속적으로 ?’를 물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질문들은 궁극적 답변을 낳이 않는다. 영리한 어린이들은 이것을 알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정말로 도저히 근본적으로 무한한 질문의 연속인 것을 답변할 충분한 시간이 가질 수 없는 어른들에게 양보한다.

 

                                    XVIII

 

1, 2 3 세계는, 부분적으로 자율적일지라도, 동일한 우주에 속한다: 그 세계들은 상호작용을 한다. 그러나 우주에 대한 지식은, 이 지식 자체가 우주의 한 부분을 형성하는 것처럼 형성한다면 틀림없이 완료될 수 없다는 것은 쉽게 밝혀질 수 있다. 발문에서 나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방에 대하여 세밀한 지도를 그리는 사람의 사례와 그가 자신의 그림에 자신이 그리는 지도를 포함시키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문제들을 언급했다. 그가 임무를 완수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사례와 다른 사례들은 모든 설명적 과학들이 완료될 수 없는 이유를 밝히는 데 도움을 준다; 이유인즉 설명적 과학을 완료한다는 것은 그 과학 자체에 설명적 해설을 부여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더 강력한 결과는 형식화된 산술의 완료불가능성에 대한 괴델(Gödel)의 유명한 정리에 함축되어 있다 (이런 환경에서 괴델의 정리와 다른 초[]-수학적 미완성 정리들을 이용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약한 입장에 대하여 무거운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물리적 과학은 산술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리고 환원주의자에게는 물리적 상징들로 설명되는 과학만이 어떤 실제성을 지니기 때문에) 괴델의 미완성 정리는 모든 물리적 과학을 미완으로 만든다; 이것은 환원주의자에게 모든 과학이 미완성임을 틀림없이 밝힌다. 모든 과학이 물리적으로 설명되는 과학으로 환원될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는 비환원주의자에게 과학은 어떤 방식으로든 미완이다.

철학적 환원주의는 오류일 뿐만 아니라, 환원의 방법이 완성된 환원을 이룩할 수 있다는 믿음 또한 오류이다. 우리는 출현하는 진화의 세계 속에서 산다; 그 문제들이 해결된다면, 그 해결책이 새롭고 심층적인 문제들을 낳는 문제들의 세계 속에. 그리하여 우리는 출현하는 신기함의 우주 속에 산다; 통상적으로 앞의 어떤 단계로도 완벽하게 환원될 수 없는 신기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원들을 시도하는 방법은, 우리가 그 방법의 부분적 성공들 때문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우리의 부분적 실패들로부터, 우리의 실패들이 드러내는 새로운 문제들로부터 배우기 때문에, 매우 유용하다. 열린 문제들은 그 문제들의 해답들만큼 거의 흥미롭다; 정말로 그 문제들은, 거의 모든 해답들이 반대로 열린 문제들로 구성된 새로운 세계 전체를 연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그 만큼 흥미로울 것이다.

 

 

 

 

 

              환원에 대한 심층적 언급, 1981

 

                                  I

 

1972년 초기에 앞의 부록을 쓸 때, 나는 두 가지 것을 끌어내려고 열중했다. 하나는 환원하려는 시도의 가치이다: 그런 시도들이 낳는 흔히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성공, 그리고 그 시도들이 낳을 새롭게 이해한 것.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성공적인 환원들이 없다는 것인데 그 환원들에서 성공적인은 단지 우리의 통찰을, 우리가 이해한 것을 증진시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 환원에서 성공적인은 화학과 같은 한 가지 지식의 분야가 원자론과 같은 또 다른 지식의 분야에서 완벽하게 도출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완벽한 환원들이 존재하는지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어떤 철학적 이유 때문에 환원들이 조만간 완벽하게 성공할 것이라는 다소 독단적인 기대인 철학적 환원주의라고 내가 부른 것과 나는 싸움을 벌이고 싶다; 다시 말해서, 환원주의가 참이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가 세상에 관하여, 혹은 우리 자신에 관하여, 혹은 언어에 관하여, 혹은 과학에 관하여, 혹은 철학에 관하여,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관하여 우리가 충분히 알기 때문에 환원들이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우리가 그런 종류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그리고 세상은 환원주의적 철학에서 꿈꾸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마음 설레게 만든다고 나는 대답한다.

 

                                       II

 

나는 1972년의 원소들의 주기계(the periodic system)에 대한 닐스 보어(Niels Bohr)의 탁월한 양자이론의 결과로 원소 72번의 (하프늄[Hafnium]) 발견에 대한 흥분상태를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그 발견은 화학이 원자이론으로 환원된 위대한 순간으로서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내가 여전히 말하고 싶은 바, 그 발견은 아마도 크리크(Crick)와 왓슨(Watson)DNA 구조 발견에 의하여 대표된 돌파구를 통해서만 갈음되는 20 세기의 모든 환원주의적 모험들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다. 그 진보가 내가 여기서 재생하는 두 가지 도표들에 의하여 극적으로 묘사되는 1929년도에 나온 원서를 나는 여전히 지니고 있다 (그 도표들을 저술한 사람인 아르투르 하스[Arthur Haas], 그를 도와 그 책을 완간한 나의 친구 프란츠 우어바흐[Franz Urbach]를 추념하여).

보어의 이론은 원소들이 지닌 화학적 속성들에 대한 예측과, 그리하여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원소 72의 속성들에 대한 예측과, 그리하여 그 원소의 발견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시각적 속성들 중 몇 가지에 대한 예측을 또한 허용했다; 그리고 그 이론은 심지어 화학적 화합물의 속성들 중 몇 가지에 대한 예측을 낳았다.

 

  

 1.

원자량과 화학적 및 다른 현상들에

따라서 배치된 화학원소들의 순환계

 

 

 

 

 

 

  

2.

원자들의 껍질 구조에 대한 닐스 보어의

이론에 따른 순환계

 

 

그 이론은 물질의 역사에서 위대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이었다고 합당하게 느꼈다: 보어는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디(Soddy)의 제안과 (1919) J. J. 톰슨(Thomson)의 발견에 (보어의 원자 모형의 해인 1913) 의하여 그리고 F. W. 애스턴(Aston)의 질량분광학(質量分光學: mass spectroscopy)에 의하여 시작된 완전히 다른 형태의 문제가 이미 배경에서 어렴풋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중수의 발견인 유리(Urey)의 폭탄선언이 왔는데 그것은 화학의 기초적 측정들인 원자 무게들에 대한 측정들이 화학의 그리고 순환계의 기초적 현상들 다소 틀려서 수정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가장 근본적인 부분은 갑자기 무너졌다: 아무튼 닐스 보어는 늪 위에다 건축을 했다. 그러나 그의 건물은 여전히 서있다.

그리고 양자역학이 왔고 런던(London)과 하이틀러(Heitler)의 이론이 왔다. 그리고 화학을 물리학으로 환원하는 것은 원칙적으로만 환원이라는 것이 상당히 분명해졌다; 그리고 완벽한 환원 같은 것은 위대한 돌파구의 해였던 1922년에 느껴졌던 것보다 당시 더 멀었다는 것이 상당히 분명해졌다.

이것은 상황을 덜 추상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개괄된 이야기에 대한 일별인데 왜냐하면 이제 나는 다소 추상적인 장()으로 왔기 때문이다: 환원주의의 논리로.

 

                                        III

 

피터 메더워(Peter Medawar)는 다음 표 3을 이용하여 비판적으로 환원을 토론한다:

 

(4) 생태학/사회학

(3) 생물학

(2) 화학

(1) 물리학

3.

환원에 관한 관습적인 표

 

메더워는 이 주제들의 하위에 대한 상위의 참된 관계는 논리적 환원가능성에 관한 한 가지만이 아니라 오히려 표 4에서 언급된 주제들 사이의 관계에 비교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4) 계량 (유클리드적) 기하학

(3) 아핀 기하학(Affine Geometry)

(2) 사영 기하학(射影 幾何學: Projective Geometry)

(1) 위상 기하학(Topology)

4.

다양한 기하학

 

4에 등재된 고등 기하학적 원리들과 하등 기하학적 원리들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는 기술하기가 완벽하게 쉽지는 않지만, 그 관계는 틀림없이 환원가능성의 관계는 아니다. 예를 들어, 사영 기하학의 결과들이 사영 기하학의 개념들을 이용하기에 충분히 풍요로운 언어에 뿌리박은 계량 기하학에서 모두 유효하다할지라도 계량 기하학은 특히 유클리드적 기하학의 형태로는 다만 매우 부분적으로 사영 기하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계량 기하학을 사영 기하학의 풍요화로서 간주할 것이다. 유사한 관계들이 표 4의 다른 수준들 사이에서 유효하다. 풍요화는 부분적으로 개념들의 한 가지이지만 주로 정리들의 한 가지이다.

메더워는 표 3의 연속적인 수준들 사이의 관계들이 표 4의 그 관계들과 유사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화학은 물리학의 풍요화로서 간주될 것이다; 이것은 화학이 전체적으로는 아닐지라도 부분적으로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리고 유사하게 표 3의 고등 수준들도.

그리하여 하등 수준들이 매우 명백한 의미에서 고등 수준 안에 유효하게 남을지라도, 그리고 하등 수준들이 어떤 방식으로 고등 수준들에 포함될지라도 표 4의 주제들은 분명히 하등 수준들의 주제들로 환원될 수 없. 게다가 고등 수준의 명제들 중 몇 가지는 하등 수준으로 환원될 수 있다.

나는 메더워의 언급들이 고도로 암시적임을 발견한다. 그 언급들은 물론 우리의 물리적 우주가 결정적이라는 물리적 이론은, 어떤 주어진 순간에 우세한 초기조건들과 함께, 다른 순간의 물리적 우주의 상태를 완벽하게 결정한다는 개념을 우리가 포기한다는 조건으로만 수용될 수 있다. 우리가 이 라플라스적 결정론을 수용한다면, 3은 표 4와 유사한 것으로서 간주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실정으로는, 이 두 가지 표 모두의 고등 수준들은 하등 수준들의 가설들로부터 (공리들) 도출될 수 없는 새로운 근본적인 가설들과 (새로운 공리들) 하등 수준들의 개념들을 통하여 정의(定義)될 수 없는 새로운 근본적인 개념들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

이것과 반대가 되는 것으로서, 환원주의의 개념은 내재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도 고등 수준들에서는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의 물리적 가설들을 공식화한다면 (공리화한다면) 환원주의에 따라서 명백하게 새로운 모든 개념들은 틀림없이 물리학의 개념들을 통하여 환원될 수 (정의[定義]될 수) 있어서 원칙적으로 회피될 수 있다; 그리고 명백하게 새로운 모든 가설들은 틀림없이, 이 정의(定義)들의 존재에서, 물리학의 형식화되거나 공리화된 기본적인 가설들로부터 논리적으로 환원될 수 있다.

 

                                     IV

 

이제 이 환원주의적 프로그램이 순전히 논리적 용어들로서 기술된 수 있는데, 심지어 원칙적으로 실행될 수 있는지 의심할 논리적 이유들이 있다. 나는 이 이유들 중 몇 가지를 언급할 것이다.

유사한 프로그램인 수학을 논리학으로 환원하는 프로그램을 고려하라: 화이트헤드(Whitehead)와 러셀의 수학원리(Principia Mathematica)에서 정점을 이루는 프로그램은 탁월한 업적이지만 적어도 프로그램의 환원주의적 모습들에 관한 한, 또한 실패작이다. 순수 논리학은 수학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정말로 한다. 그러나 수학은 (기능적) 논리학보다 더 풍요롭다. 이것은 괴델(Gödel)이 발견한 것들에서 밝혀질 수 있다: 숫자이론에 관한 모든 공리 체계에는 저 공리 체계 안에서는 논리적으로 결정될 수 없지만 단지 더 강력한 공리 체계 안에서만 결정될 수 있는 문제들이 출현한다. (이 더 강력한 체계에서, 새롭지만 정확하게 유사한 문제들이 출현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성장하는 공리 체계들의 무한수열이 필요하고, 심지어 숫자 이론에 대한 이 (미완성) 공리 체계들 중 한 가지를 논리학으로 환원하는 것은 환원주의적 프로그램의 의미에서 완벽한 환원이 아닐 것이다.

또한 정의(定義)들에 대한 문제들이 있다. 환원주의적 프로그램의 의미에서의 형식적 정의(定義)의 요점은 그 정의(定義)축약어만으로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W. V. 콰인(Quine)은 예를 들어 몇 가지 정의(定義)들을 자신의 수학적 논리 체계에 도입한 다음에 그 정의(定義)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평한다:

 

그런 축약어의 규약들은 형식적 정의(定義)들로 지칭된다... 형식적으로 신호를 정의(定義)하는 것은 이미 가까이 있는 표기법의 어떤 형태에 대하여 속기로서

그 신호를 채택하는 것이다.... 신호를 정의(定義)하는 것은 신호를 회피하는

방법을 밝히는 것이다.

 

이것은 환원주의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종류의 정의(定義)이다; 왜냐하면 환원주의자는 어떤 내재적으로 새로운, 어떤 환원 불가능한 원소도 고등 수준들에서 들어오지 않음을 밝히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가장 낮은 수준인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 복잡한 물리적 상황들이나 무리들 때문에 축약적인 정의(定義)들이 필요하게 된다할지라도 (마흐[Mach]사고의 경제[economy of thought]’라고 지칭한 것에 대한 이유들 때문에).

그런 순수하게 축약적인 정의(定義)들을 -창조적 정의(定義)이라고 부르자. 왜냐하면 다른 정의(定義)들인 창조적 정의(定義)들이 또한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 정의(定義)들은 형식적으로 비-창조적 정의(定義)들로부터 구분될 수 없지만 전혀 다른 역할을 공리들의 혹은 새로운 가설들의 역할 한다; 그리고 비-창조적 정의(定義)들의 이용은 그리하여 시도된 환원에서 허용될 수 없다.

 

 

                                    V

 

창조적 및 비-창조적 정의(定義)들은 다음과 같이 기술될 수 있다.

S를 어떤 형식적 정의(定義)가 도입하는 새로운 상징으로 하라. 그 정의(定義)가 비-창조적이거나 단지 축약적이라면, 모든 새로운 정리들다시 말해서, 그 도출을 정의(定義)가 허용하고 정의(定義)없이는 도출될 수 없는 저 정리들 상징 S를 포함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정의(定義)로 인하여 우리는 이 새로운 정리들 중 모든 정리로부터 상징 S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의(定義)창조적이라면, 상징 S를 포함하지 않지만 S를 도입하는 정의(定義)가 부재한 상태에서 공리들로부터 도출될 수 없는 정리들이 있을 것이다.

처음 인상들은 그런 창조적 정의(定義)들이 존재할리가 없다고 암시한다. 그러나 그 정의(定義)들은 존재할 수 있고 정말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정의(定義)들에 관한 사실들 중 몇 가지는 환원주의적 프로그램과 크게 관련된다.

1963년 나는 사례연구인 확률계산에서의 창조적 및 비-창조적 정의(定義)을 발표했다. 나는 확률계산을 다양한 이유들로 인한 나의 사례연구의 목표로 정했는데 주로 확률계산이 내가 상당히 잘 알고 있다고 내가 생각한 공리체계를 나에게 제공했기 때문이고 공리가 (혹은 정의[定義]) 새로운 정리들을, 즉 공리체계의 나머지로부터 도출될 수 없는 정리들을 낳을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방법들에 내가 상당히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에게 흥미를 일으키는 사례연구의 주요 결과들은 다음 두 가지이다 (그것들에 대하여, 사례들이 저 연구에 주어진다):

우리가 순전히 축약적이거나 비-창조적인 정의(定義)를 공리체계에 도입한다면, 이 정의(定義)는 창조적 정의(定義)가 될 수 있다:

 

(a) 공리들 중 한 가지를 생략함으로써

(b) 새로운 공리를 추가함으로써.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공리체계가 엄격하게 정해지지 않으면 정의(定義)가 창조적이거나 비-창조적임을 확신할 수 없다.

이제 이것은 물리주의의 관점에서, (적어도) 화학과 생물학의 전제는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에서 물론 매우 중요하다: 분명히 순전히 축약적인 정의(定義)에 대하여 우리가 사용하여 작업을 하는 (우리가 고등 체계들을 환원하고 싶어 하는) 물리학의 공리체계가 정확하게 형식화되고 고정되지 않는다면 그 정의(定義)가 실제로 축약적인지 우리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심지어 그 경우에도 어떤 정의(定義)의 특징은 의문스러운 상태로 남을 것이다. 주어진 정의(定義)가 주어진 공리체계와 관련하여 창조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일상적인 방법은 없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순전히 논리적 관점에서, 환원주의의 프로그램이 정말로 매우 모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과학을 직감적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모호한 면일지라도 매우 중요한 심지어 부분적인 환원들도 바람직하고 중요한 상태로 남을 것이다.

 

                                       VI

 

이 모든 것은 유물론의 역사와, 그리고 유물론의 자기-초월의 이야기와 관련된다.

유물론의 배후에 있는 주요 개념인 내가 유물론적 연구 프로그램이라고 부르는 것은 알려져서 익숙한 것인 물질의 속성들인 모든 것을 질서정연한 우주인 모든 우주를 -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주로 두 가지 유물론적 연구 프로그램이 있었다. 한 가지는 파메니데스(Parmenides)에게로 돌아가서 세계를 가득 찬 것으로서, 물질로 채워진 것으로서 간주했다; 그 유물론적 연구 프로그램은 연속체 역학(continuum mechanics)을 낳았다. 다른 한 가지는 원자들과 공간을 자체의 구호로 삼으면서 세상을 주로 빈 것으로서 간주했다. 두 가지 프로그램 모두는 거대한 역학적 기계로서 세상을 보는 견해를 낳았다: 소용돌이들의 세상이거나 원자들의 세상. 그러나 세상이 물질의 익숙한 속성들을 통하여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 가지 프로그램 모두에게 본질적이었다.

이 본질적인 요건은 물론 환원주의적 요건이다. 이런 관점에서 유물론과 환원주의는 동일한 프로그램이다. 그것은 매우 중요하고도 유용한 프로그램이었다 정말로 자연에 대한 과학이 된 프로그램.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체를 초월했다; 관념적 전통보다 더 강력한 것으로 증명된 과학의 비판적 전통 덕분에.

그리하여 원래 프로그램에서 예견되었던 바와 같이 설명을 했어야 했던 저 익숙한 속성들 대신에 우리는 이제 추상적이고 익숙지 않은 법칙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물질의 익숙한 행태는 매우 익숙지 않은 추상적인 수학적 공식들에 의하여 설명된다. 예를 들어 물질의 보존에 관한 직감적으로 매우 만족스러운 개념은 에너지 보존에 관한 매우 추상적인 법칙에 의하여 대체되었다; 그리고 물질 자체는 이 추상적인 에너지의 한 가지 형태로서만 간주된다.

그러나 유물론을 초월하는 이 과정은 일찍이 시작되었다 뉴튼과 뉴튼이 말하는 힘들과 함께, 패러데이(Faraday)와 맥스웰(Maxwell)과 아인슈타인, 그리고 장(: fields)라는 개념과 함께. 그리고 핵분열의 (반감기) 내재적 확률과 같은 개념들과 함께.

 

                                   VII

 

이 환원주의적 노력들 중 어떤 노력도 우주의 창조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생명, 그리고 생명이 지닌 믿을 수 없는 복잡성들과 형태들의 풍요로움. 사실상 다윈 이전에 환원주의자는 자연 속의 의도에 관한 문제들에 자신의 눈을 감는 일 이상을 할 수 없었다. 1859년에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이 발간된 후에 정말로 매우 강력한 논쟁인 논쟁이 자연선택 일어났는데 그 논쟁은 환원주의에 의하여 이용될 수 있었다. 환원주의자들은 의도의 문제를 보지 않기 위하여 자신들의 눈을 더 이상 감을 필요가 없었다; 반대로 그들은 의도의 문제를 환원주의를 위하여 당시 이용할 수 있었다.

다윈의 환원 프로그램은 왓슨(Watson)과 크리크(Crick)의 성공을 통하여 가장 크게 고무되었다. 분자생물학이 과학의 매우 빠르게 성장하는 부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거의 이념이 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VIII

 

여기서 나는 생명체의 진화라는 문제에 중요하게 관련되는 또 다른 흥미로운 최근 전개상황에 관하여 몇 마디 말을 하고 싶다: 평형과는 거리가 먼 열린 체계들의 열역학의 전개상황.

열역학은 열의 흐름에 대한, 그리고 열의 흐름에 책임이 있는 힘들에 대한 또 다른 단어이다.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열은 더 뜨거운 몸체나 지역으로부터 더 찬 몸체나 지역으로 흐르고, 이 움직임은 흐름이 멈출 때 평형으로 향한다. 과학으로서의 열역학은 이 모든 것을 기술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성공적인 환원주의적 및 유물론적 설명은 통계적 역학이라고 불리는 상응하는 분자역학에 의하여 주어진다.

열역학의 처음 두 가지 법칙들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엔트로피는 증가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법칙이다. 볼츠만의 엔트로피 해석을 통하여 분자적 무질서로서 표현되어, 두 번째 법칙은 폐쇄 체계의 분자적 무질서는 자체의 최대치에 총체적 무질서 도달할 때까지 증가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무질서 증가의 법칙은 우주적 원리로서 해석되어 생명체의 진화를 이해 불가능하게 만들어서, 분명히 심지어 역설적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생명체의 진화가 볼츠만의 무질서로부터 멀어지는 일반적인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 분명한 역설의 해결책이, 모든 살아있는 체계와 심지어 전체 지구는 자체의 발전하고 성장하는 동식물상과 함께 열린 체계라는 사실과 연결되어있다는 것은 오랫동안 의문시되었다.

물론 두 번째 법칙은 (그리고 그 법칙에 대한 볼츠만의 해석) 열린 체계에 대하여 유효하지 않다; 그리하여 여기에 어떤 진보를 이룩할 가능성이 있는 듯이 보였다.

장관을 이루는 진보가 당시 이룩되었다. 나는 여기서 그 이야기를 말 할 수 없지만 주로 프리고진(Prigogine)에게 기인하는 가장 중요한 결과들을 나는 언급하고 싶다. 그 결과들은 요컨대 평형과는 거리가 먼 상태에 있는 열린 체계는, 엔트로피를 유발한다할지라도 증가하는 무질서로 향하는 경향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들은 자체의 환경 속으로 이 엔트로피를 운반할 수 없으며 그 결과들의 내부 질서를 감소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증가시킬 수 있다. 그 결과들은 구조적 속성들을 발전시켜서, 그리하여 어떤 흥미로운 것도 더 이상 그 결과들에 발생할 수 없는 평형 상태로 변화시키는 것의 바로 그 반대 행동을 한다.

아마도 가장 간단한 사례는 철판 위에서 끓는 찻주전자이다. 이것은 많은 에너지가 바닥으로부터 그 주전자 속으로, 그리고 꼭대기와 옆면들에서 그 주전자 밖으로 흘러간다는 의미에서 열린 체계이다.

그 체계 안에서는, 강력한 온도 차이점들이 전개되는데 폐쇄 체계가 할 것의 바로 반대가 되는 것이다. 그 차이점들은 열의 흐름뿐만 아니라 빠른 물결들을 만들어내며 물이 끓기 시작하면 우리에게는 심지어 상당히 특징적인 규모의 가시적인 물질 구조가 생겨난다: 증기 방울들. 이 증기 방울들은 결코 평등하지 않지만 일종의 평균 크기가 있다: 전형적인 확률주의적이거나 통계적인 효과 (그런 경향들은 전체적인 상황에 의존한다: 철판의 온도, 주전자의 크기와 형태, 열의 흐름...). 게다가 물이 두 가지 상태들로 액체 물과 수증기 나뉜다; 그리고 한 무리의 분자들이 다음 시간 단위 동안에 한 가지 상태나 나머지 다른 상태를 띨 것인지는 분명히 확률적인 문제이다: 우리는 여기서 확률적인 효과들과, 물리학의 비-결정론적인 부분과 (열역학에서 철저한 바와 같이) 직면한다.

프리고진(Prigogine)은 이론적 및 실험적으로 물리학의 이 부분을 전개하고 있고, 이제 평형상태와 거리가 먼 상태의 열린 체계들은 평형의, 엔트로피의 최대화의, 구조가 사라짐의 상태를 향하여 움직인다기보다는 새로운 구조들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우주에 대하여 예측되었던 저 열의 죽음의 상태를 향하여 움직인다기보다는.

 

                                    IX

 

프리고진의 연구는 적어도 고등 구조들의 진화에 대한 물리적 이해를 (지구상의 생명체의 진화에 대하여 상당히 분명한 모습으로 보이는) 향한 최초의 발걸음을 내디뎠다는 의미에서 흥미로운 물리주의적 환원의 한 편으로서 간주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연구는 생명체가 지닌 창조성이 물리학의 법칙들을 거부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는 길을 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환원주의적인 방향으로의 한 단계일지라도, 이것은 생명체가 지닌 창조적 속성들의 환원과는 무한히 거리가 멀다.

우리가 우주를 물리적 기계로 보든 아니든, 우리는 우주가 생명체와 창조적인 인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주가 생명체와 창조적인 인 인간들의 사고들에 열려있고 그 사고들에 의하여 물리적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 우리는 이 사실에 눈을 감거나, 환원주의적 프로그램들에 의하여 초래된 성공사례들에 대한 우리의 평가로 인하여 우리는 생명체를 보호하는 우주가 최고의 의미에서 창조적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 위대한 수학자들, 위대한 과학자들 그리고 위대한 발명가들뿐만 아니라 위대한 시인들, 위대한 화가들, 위대한 음악가들이 창조적이었던 의미에서 창조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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