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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우주 4장, 형이상학적 문제들

이윤진이카루스 2013. 9. 17.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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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이상학적 문제들

 

25. 결정론과 비결정론에 대한 형이상학적 교설들.

지식성장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함을 밝힘으로써, 나는 세상의 내부로부터의 완벽한 예측이 불가능함만을 밝혔다. 이로 인하여, 외부로부터 보면 아마도 하느님이 보면 - 세상은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과 함께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다는 가능성이 열려있게 된다. 결정론에 대한 형이상학적 교설은 그리하여 이제 보다 세밀하게 고찰되어야 한다.

형이상학적 결정론은 논증될 수 있는가?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첫눈에 보기에 우리는 홀데인(Haldane)의 논증이 (혹은 언어의 네 가지 기능들로부터 유래하는 나의 논증), 결정론에는 합리성에 대한 여지가 없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 반대를 증명한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 겹의 오해를 보여줄 것이다.

첫 번째 오해는 이렇다. 홀데인의 논증은 반드시 종교적 결정론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모든 형태의 형이상학적 결정론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우월한 추론능력들의 도움을 받은 교사가 흔히 어린이의 합리성을 망상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어린이 안에 있는 합리적 사고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 것과 꼭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우리의 합리적 결정들의 합리성을 파괴하지 않고도 그 결정들에 대하여 아마도 미리 알 것이기 때문이다. 합리성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는 것은 자연법칙들(추론능력이 없는) 의한 사전결정이라는 개념뿐이다. 그리하여 형이상학적 결정론의 몇 가지 형태들은 홀데인의 논증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만 모든 형태들이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두 번째 오해는 이렇다. 홀데인의 논증은, 형이상학적 결정론의 몇 가지 형태들이 이성의 망상적 특성을 수반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하여, 추론된 논증과, 가령 무비판적 교화(indoctrination) 사이의 차이점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만 어려움이 생겨난다; 다시 말해서, 이성주의자들에게. 이성주의자들에게는 그 어려움이 극복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형이상학적 결정론자들은 홀데인의 논증에서 단지 결정론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이성주의에 대한 반증을 볼 것이다.

세 번째로, 홀데인의 논증은 결정론적 교설의 비합리성이나 그런 교설을 이성적으로 토론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확립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홀데인은 논증은 자체의 존재에 의하여 결정론에 관하여 논증하는 것이 가능함을 증명한다; 이유인즉 홀데인의 논증은 틀림없이 결정론에 반대하는 논증이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여기 이 절에 있는 형이상학적 결정론이 논증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항하여 그 결정론을 옹호하려는 나의 첫 번째 두 가지 시도들은, 형이상학적 결정론에 반대한 논증들뿐만 아니라 그 결정론을 방어하는 논증들 또한 있음을 밝힌다.

그리하여 형이상학적 결정론은 분명히 논증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정론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논증들은 결론적이 될 수 없다: 형이상학적 결정론을 지지하는 논증들은, 세상에서 결정되지 않은 사건의 존재를 반증할 수 없기 때문에, 틀림없이 결론적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논리적 상황은 보편적 이론의 상황과 유사하다.) 그리고 형이상학적 결정론을 반대하는 논증들은 결론적일리가 없는데 이유인즉, 예를 들어, 우리는 세상의 외부로부터 세상에 관한 완벽한 사전 지식을 얻는 정신의 존재를 반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형이상학적 결정론과 형이상학적 비결정론 모두 반증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것들의 경우들은 어떻게 논증될 수 있는가?

과거에는, 형이상학적 결정론을 지지하는 주요 논증이 종교적인 근거나 과학적결정론에 대한 신뢰에 기초를 두었다. ‘과학적결정론을 지지하는 논증들을 비판함으로써, 나는 간접적으로 형이상학적 결정론을 또한 비판했다. 게다가 결정론자는 증거의 부담을 져야한다는 논증은 (‘증거로써 나는 여기서 물론 결론적인 증거를 의미하지 않는다) ‘과학적결정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결정론의 형이상학적 해석본에도 적용된다. 그리고 나의 철학적 논증들 중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 과거와 미래 사이의 비대칭으로부터 유래하는 나의 논증도 그렇게 적용된다; 혹은 홀데인의 논증은, 비록 종교적 결정론과 같은 형이상학적 결정론의 모든 변종들에는 적용되지 않는다할지라도, 그렇게 적용된다. 이 논증들 중 어떤 논증도 결론적이 아니다. 그러나 그 논증들의 영향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질 것이다.

26. 내가 형이상학적 결정론을 배척하는 이유: 파메니데스(Parmenides)와의 대화.

특수상대성에 대한 우리의 토론을 고려하여, 어떻게 아인슈타인 자신이 확신에 찬 결정론자가 될 수 있었는지 질문이 될 것이다. 답변은, 그가 자신의 형성시기에 과학적결정론을 믿었었다할지라도, 나중 삶에서 그가 믿은 결정론은 솔직히 종교적이거나 형이상학적 종류였다는 것이다.

그는 실험으로부터 이론을 향하는 유효한 논증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그는 과학으로부터 형이상학으로 향하는 유효한 논증이 없음을 마찬가지로 분명히 알았다. 그러나 그는 반대방향으로 논증했다. 그는 자신의 형이상학적 결정론을 자신의 이론들이 지닌 겉으로 보기에 사실인 특징에 근거시키지 않았고 그는 자신의 물리이론들로부터 그 이론들이 이 특징을 가질 것을 요구했는데 이유인즉 물리적 실제 자체는 결정론적이었다고 그가 믿었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그는 우리의 이론들이 단순해야 한다고 요구했는데 이유인즉 그가 세상의, 물리적 실제의 단순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적결정론에 반대하는 나의 논증들이 흥미로움을 발겨하고 그 논증들이 자신이 이전에 생각하지 않은 각도에서 문제에 접근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과학적결정론에 반대하는 나의 논증들이 유효하다할지라도, 나의 논증들이 자신의 형이상학적 결정론이나 자신의 겉으로 보기에 사실인 결정론적 이론들을 뒤흔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리하여 나는 그의 형이상학적 결정론에 보다 직접적인 공격을 시도했다.

내가 이 주제에 관한 논문을 읽은 후 나는 그 공격을 사사로운 대화에서 실행했다. 나는 먼저 그의 형이상학적 결정론을 기술하려고 했고, 그는 그 결정론에 대한 나의 설명에 동의했다. 그가 파메니데스(Parmenides)3차원 덩어리-우주와 같이 변화하지 않는 4차원 덩어리-우주를 신뢰했기 때문에, 나는 그를 파메니데스라고 불렀다. (물론 네 번째 차원은 시간이다.) 그는 자기의 견해들에 대한 이 설명과 영화(映畵) 유추에 완전히 동의했다: 하느님의 눈에는 영화가 그곳에 있을 따름이고, 미래는 과거만큼 그곳에 있었다: 이 세상에는 어떤 사건도 발생하지 않아서 변화는, 미래와 과거 사이의 차이점이 또한 그랬던 바와 같이, 인간의 망상이었다.

나는 두 가지 논증을 사용하여 이 견해를 공격했다.

첫 번째 논증은,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서 어떤 것도 이런 종류의 파메니데스적 형이상학을 보장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이론의 특정 해석을 구하려는 시도에 반대하여 자신이 최근에 유사한 논증을 사용했다는 것을 우리의 경험에서 어떤 것도 떨어진 거리에서 행동의 도입을 보장하지 않았다는 것 - 내가 상기시킬 때까지 많이 감명을 받지 않았을지라도, 이것을 인정했다.

나의 두 번째 논증은 더 많은 형이상학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 논증은 이렇다. 우주가 영화처럼 미리 결정된 것으로, 그리고 영화처럼 4차원적으로 (왜냐하면 영화의 각 장면을 우리가 세상의 3차원적 모습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수용한다면, 우리는 화면들의 수열 순서를 네 번째 차원으로 수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제된다면, 수용하기 어려운 몇 가지 결과들이 뒤따를 것이다. 나는 그 결과들 중 세 가지를 지적했다. 첫 번째 결과는, 미래가 과거에 의하여 인과적으로 수반되기 때문에, 병아리가 달걀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과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결정론으로 인하여 미래는 매우 자세하게 과거 속에 완벽하게 포함되었다. 그리하여 미래는 불필요해졌다. 미래는 과잉이었다. 화면들 모두가 첫 번째 화면에 의하여 엄격하게 논리적으로 수반되는 (알려진 이론과 연결하여) 영화를 보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이 거대한 불필요성은 아인슈타인의 단순성이라는 개념이 지닌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그 단순성과 화해하기 힘들었다.

또 다른 결과는 변화와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는 우리 자신의 방식을 우기가 해석하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시 영화(映畵) 유추를 통해서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대한 영화장면들 즉, ‘시간-조각들(J. H. 우저[Woodger]가 쓴 용어를 사용하여) 그 조각들의 연속적 순서를 덧붙여 우리는 경험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의 화살이 주관적이라고,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것으로서의 시간은 망상이라고 관념론적이거나 주관주의적인 철학의 필수적인 부분을 형성하고 심층적인 관념론적이고 주관주의적인 결과들과 결합된 견해 말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지녔던 신념들 중에서 한 가지 신념은 그의 사실주의였다.

마지막 결과는, 내가 지적한 바와 같이, 완벽한 모순과 매우 많이 닮았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연속적인 화면들을 경험한다면, 적어도 한 가지는 정말로 이 세상에서 변하고 있다: 우리가 의식하는 경험. 영화(映畵), 현재 존재하여 미리 결정되어 있다할지라도, 시간적 변화의 경험이나 망상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영사기를 통하여 (, 우리 자신과 관련하여) 지나고 움직여야 한다. 유사하게 우리는 4차원적 덩어리-우주와 관련하여 틀림없이 움직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미래를 과거로 변환하는 것은 우리에 대한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리하여 세상에는 변화가 파메니데스의 견해를 반증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인정하는 바, 이 비판들은 아마도 답변될 수 없었지만 효과적인 답변이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의식을 시간 속에서 퍼져나가는 것으로서, 그리고 시간 속에 공존하는 것으로서 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우리는 시간이 이런 방식으로 경험되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조각들의 시간적 연속으로서 경험된 이유를 틀림없이 설명해야 한다. 변화는 사실이어서, 세상에 대하여 관념론적 견해를 채택하지 않고는 파메니데스와 함께 변하지 않는 실제와 정말로 변하는 현상의 망상적 세상을 구분하지 않고는 - 설명될 수 없었다. 그리고 심지어 그럴 경우에도 우리가 망상에 대한 객관적 사실이 지닌 망상적 특징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그 망상에 대한 객관적 사실과 실제 그 망상을 제거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을 틀림없이 설명해야 한다. (매우 시각적인 망상들의 경우에, 우리가 망상으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다는 지각은 똑같이 망상을 쫓아내는 데 실패한다: 망상은 사실이다; 그리고 정말로 많은 경우에 생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사실이다.)

이 모든 난제들을 고려하여, 단연코 가장 단순한 방식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비대칭을 고려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관점을 배격하여 어떤 의미에서 미래가 과거에 의하여 수반되는 않도록 할 견해를 수용하는 것임을 나는 지적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대하여 비결정론적인 관점을 수용할 것임을. ‘과학적결정론을 지지하는 논증들이 무효로 밝혀지자마자, 비결정론적인 형이상학이 경험에 더 근접한 듯이 보여서 어떤 종류의 새로운 난제들도 야기하는 듯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들이 나는 논증들이었다. 파메니데스는 자신의 습관처럼 이 논증들을 크게 인내하며 토론했다. 그는 자신이 그 논증들에 의하여 감명을 받았으며 그 논증들에 대한 답변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것을 뛰어넘어서 나는 문제를 추구하지 않았다.

 

27. 과학에 대한 소득: 경향이론(A Theory of Propensities)

지금까지 나는 결정론이 지닌 불리한 점들을 밝히려고 노력함으로써 결정론을 비판했다. 나는 또한 결정론의 포기는 일반상식, 윤리학, 과학철학 그리고 내가 희망하는 바, 진리에 대하여 몇 가지 긍정적인 이점들을 불러올 것이라고 암시했다.

그러나 이 책과 현재의 문맥에서 우리의 주요 관심사들 중 한 가지 관심사로서의 양자이론과 (후기[後記: Postscript]III양자이론과 물리학에서의 균열[Quantum Theory and the Schism in Physics] 참조) 함께 과학 자체에 대한 소득은 아마도 주요 소득 아마도 비결정론을 선호하는 가장 강력한 긍정적 논증을 제공한다: 결정론을 배격하면서, 우리는 과학에 실제적 중요성을 띨 수 있을 접근방식에 대한 길을 연다. 나는 경향에 관한 물리이론의 형태로 된 확률이론의 물리적 해석을 염두에 두고 있다. (후기[後記: Postscript]I사실주의와 과학의 목표[Realism and the Aim of Science], 2부 참조.)

그런 이론이, 진지한 토론을 거친 후에, 궁극적으로 수용 가능함으로 판명될지라도, 결정론을 배격함으로써만 우리는 물리이론으로서 경향 해석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데 필요한 자유를 얻는다는 사실은 남는다. 그리하여 결정론은 논증에 의하여 증명되지 않는 것만이 아니다; 결정론으로 인하여, 그 가능성들의 장점들이 어떻게 궁극적으로 평가를 받든 간에 틀림없이 그렇게 고려될 가치가 있는 가능성을 우리는 진지하게 고려하지 못한다.

물리적 경향들이라는 개념은 물리적 힘이라는 개념에 관한 유추로써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물리적 힘은 관찰될 수 없지만 시험될 수 있는 가설적 존재이다; 물론 힘을 포함하는 가설을 시험함으로써 시험될 수 있는. 예를 들어, 특정 장소에 특정 방향과 강도를 지닌 정전기적(electrostatic) 힘의 존재에 대한 가설은 그 가설이 지닌 예측 가능한 효과들에 저 장소에 놓일 시험 몸체의 가속의 방향과 규모 의하여 시험될 수 있다.

이제 연속적인 시험들에서 각 시험은 동일한 결과들을 낳는다고 전제하자: 우리는 힘이 불변한다는 가설로써 이것을 설명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연속적인 시험들에서 각 시험이 힘의 방향에 대해서는 동일한 결과들을 낳는다고 전제하지만 가속의 규모에 관한 결과들은 등락을 거듭한다고 전제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 힘의 강도가 등락을 거듭하는 반면 이 힘의 방향은 불변한다는 가설로써 이것을 설명할 것이다. 상응하는 해석이, 가속의 방향이 등락을 거듭하지만 가속의 규모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대비해서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들에서 등락을 거듭하는 이 힘들에 대한 가설들이 이론적으로 불만족스럽다는 것이 판명될 것이다; 예를 들어, 시험하는 동안에 우리는 가능한 한 모든 조건들을 불변으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우리는 아마도 등락을 미지의 간섭들에, 혹은 실험적 조건들을 불변으로 유지하지 못한 미지의 근원들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불만족스러울 것이어서 우리는 그렇다면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기로 결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 모든 조건들을 불변으로 유지했던 객관적 상황힘들보다는 경향들을 결정한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그 상황이 평균가속도 가까이서 매우 높을 것이고, 더 높은 가치와 더 낮은 가치 모두를 향하여 감소할 가속하는 경향들을 혹은 가속되는 경향들 결정한다고. 그런 경향들의 존재에 대한 가설은 통계적 시험들에 의하여 (후기[後記: Postscript]I, 2부 확률에 관하여 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시험되어야 할 것이다.

이 개념은 물론 우리가 결정론을 포기하자마자 도입될 수 있을 따름이다; 왜냐하면 전제가 동일한 상황은 등락을 거듭하는 결과들 낳을 것이다 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토론으로부터, 우리가 결정론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경향들 대신에 등락을 거듭하는 힘들이라는 개념들을 사용하여 우리가 작업을 해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특정 경우들에서 두 가지 설명은 수학적으로 동일 한 것으로 판명될 것임 또한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것을 수용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확신과 같은 것으로써 주어질 수는 없지만 시험가능성에 대한 질문들은 결정적일 것이다. 등락을 거듭하는 힘들을 통한 결정론적 해석은 등락을 거듭하는 초기 조건들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 이 전제가 시험될 수 있어서 시험을 견딘다면, 등락을 거듭하는 힘들(forces)을 통한 결정론자의 설명이 승리한다. 그러나 결정론자가 초기 조건들의 숨겨진 등락들에 대한 시험 불가능한 가설에 억지로 의존하게 되면, 그 존재가 통계학적으로 시험될 수 있는 경향들을 통한 설명은 선호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설명을 선호될 수 있게 만들 다른 환경들은 다음 절에서 토론될 것이다.) 아무튼, 결정론의 교설을 선호하는 편견은 경향이론을 자유롭게 토론하는 길에 방해가 되도록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경향이라는 개념을 힘의 개념에 대한 일종의 일반화로서 혹은 아마도 그 개념에 대한 대안으로서 설명하려고 노력했는데, 주로 힘의 개념이, 그 개념을 초자연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서 올바르게 비난했던 이성주의적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또한 처음에 의심스럽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우리는 물리과학이 미지의 것으로써 알려진 것을 설명함을, 그리고 가시적 세상을 가설적으로 비가시적인 세상으로써 설명함을 배웠다 (혹은 그렇기를 나는 희망한다); 그리고 우리는 힘이라는 개념에 익숙해졌다. (뉴튼은 인력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는 그 개념을 없애려고 했다; 아인슈타인도 그랬다.) 그리하여 우리는 또한 경향이라는 개념에 익숙하게 될 것이다.

경향과 힘 사이에서 유추하면서 나는 우리가 경향들만이 가속하거나 가속된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지 않다. 반대로 다른 경향들이 더 중요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향은 주어진 조건 하에서 한 가지나 또 다른 가능한’ (또는 실제적[virtual]’) 상태들의 조합을 전제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다양한 상태들을 차지하는 경향들의 숫자적 가치들은 상태에서 상태로 변화할 것이다. 이 가치들을 결정하는 기능은 (확률배분) 일반적으로 조건들의 대칭들이나 비대칭들을 반영할 것이다. 힘에 대한 유추는 두 가지 요점들에서 들어올 것이다: 우리는 경향들을 (혹은 아마도 경향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다른 기능들) 심지어 힘과 같은 상호작용이 (혹은 아마도 간섭) 가능한 가설적인 물리적 규모들로서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무게들을 경향들에게 귀속시켜야 할 것이다: 대칭들에 따라서 상황에 내재할지라도 대칭들만에 의해서는 아직 완전히 결정되지 않을 무게들.

 

 

28.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인 이론들과 확률주의적 이론들.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인 이론들은 물리학에서 합당하게 제기될 수 있는 모든 질문들에 답변할 수 없다. 그 이론들은 섞는 기계가 가령 두 가지

별개의 무더기들로 들어온 커피 원두들이나 코코아 원두들을 항상 성공적으로 섞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와 같은 단순한 질문들에 답변할 수 없다; 혹은 우리가 동전을 집어넣은 합당하게 구축된 동전-던지기 기계는, 항상 정확하게 동일한 방식으로 무작위 특성을 지닌 동전-던지기의 수열을 낳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와 같은 매우 유사한 질문. 분명히, 이것들은 버릴 수 없는 물리적 문제들이다; 그리고 그 문제들이 본질적으로 통계적인 질문들은 무엇인지를 묻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통계적이거나 확률적인 이론들에 의하여 답변이 되어야 한다.

아마도 물리학에서 이 문제들 중에서 가장 특징적이고 가장 중요한 문제들은 스펙트럼선의 강도(强度)에 관한 문제들과 방사성으로 붕괴하는 핵의 반감기에 관한 문제들이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의 원문에서 나는 (종합적인: synthetic) 통계적 결론들은 통계적 추론들로부터만 얻어질 수 있다고 여러 차례 주장했다. 확률에 관한 나의 이후 저술을 고려하여 (후기[後記] I, 2부 참조), 이것은 다시 설명되어야 한다.

통계적 이론들이거나 (수열들에 관한 이론들) 집합론적 확률이나 경향 해석의 의미에서 확률을 주장하는 이론들인 객관적이론들을 포함하도록 나는 여기서 확률적(probabilistic)이라는 단어를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나는 여기서 주관적 이론들이나, 가령 제프리즈[Jeffreys]나 케인즈나 카르납[Carnap]이 의미하는 바의 귀납적확률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 용례에서 나의 옛 주장은 통계적 결론들은 통계적 전제들로부터만 얻어질 수 있다는 다음에 의하여 갈음될 수 있다:

(1) 확률적 결론들은 (더 정확하게, 0이나 1이 아닌 확률들을 주장하는 비-분석적 서술들) 확률적 전제들로부터만 도출될 수 있다.

(2) 통계적 결론들은 통계적이거나 혹은 다른 확률적 전제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확률적 전제들로부터 도출된다면, 통계적 결론들은 엄격히 말해서 귀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확률들이나 척도 01거의 빈도가 없거나혹은 거의 항상으로서 해석함으로써, 우리는 통계적 결론들이 비-통계적 확률적 전제들로부터 거의 귀결된다고 말할 것이다.

(2)를 고려하여, 확률적 전제들로부터 거의 귀결되는통계적 서술들을 시험함으로써 우리는 때때로 확률적 이론들을 시험할 수 있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시도들의 수열을 통하여 어떤 기계로써 동전의 앞면을 던지는 확률이 1/2이라는 이론을 시험할 것이다; 왜냐하면 동전 앞면을 던지는 확률이 1/2이라는, 그리고 동전던지기들은 독립적이어서 확률은 불변한다는 전제를 근거로, 빈도 1/2을 지닌 무작위-같은 수열이 아닌 시도들의 수열에 대한 확률은 0(zero)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추가로 귀결되는 곳에서 저 가장 길게-관찰된 수열들은 무작위 수열이나 집단의 빈도 속성들을 매우 근사하게 실현할(realize)’ 것이다.

이 사례에는 어떻게 통계적 전제들이 비-통계적인 확률적 전제들로부터 거의귀결될 것인지를 독자에게 상기시키려는 의도만 있다. 이 사례에는, 이 절의 시초에서 제기된 섞는 기계에 의하여 혹은 (다소 동일한 것에 해당되는 것) 동전-던지기 기계의 의하여 이룩된 관찰 가능한 효과들을 설명하는 방법에 관한 의문에 답변하는 것으로서의 의도가 전혀 없다.

이 질문들에 답변하려는 결정론적 시도는, 초기조건들에 관한 전제로써 관련된 물리적 과정들에 대한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인 이론을 결합함으로써 실행될 것이다; 숨겨진초기조건들에 대한 확률적 전제로서 아마도 기술될 전제.

이것을 사례의 도움을 받아서 더 완전히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의 동전-던지기 기계가 자체의 움직임들을 매우 정확하게 반복하거나 재생하도록 매우 정밀하게 제작된다고 전제하자. 동전은, 굴러 내려가거나 미끄러져 내려가는 (동전이 평면 끝에 오기 전에 면으로 떨어진다면) 경사진 평면을 향하여 여전히 회전하는 동안, 엄격하게 수직 위치에서 고정된 기계에 의하여 여러 번 들려서 수직 축 주위를 돈 다음에 떨어지도록 되어 있다고 전제하자. 그 과정은 가령 20번 반복되고 그 다음에 동전은 배출된다.

이런 종류의 기계가, 약 절반이 앞면을 보이고 절반이 뒷면을 보이면서, 동전들의 매우 잘 섞였거무작위수열을 생산하는 데 성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까? 동전을 기계에 넣는 방식으로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떤 불규칙성에 귀속시킬 수 없는데, 이유인즉 (a) 우리가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가능한 한 정확하게 동전을 기계에 넣는다면 통계적 결과는 영향을 받지 않고 (b) 우리가 넣는 방식을 변경한다면 통계적 결과는 또한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계가, 자체의 초기 절차에서, 동전이 처음 기계에 넣어졌을 때 존재할 동전의 위치에서 어떤 차이점들을 매우 정확하게 수정할 수 있도록 우리는 기계를 제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기계는 초기조건들을 (물론 완벽하게는 아니라할지라도) 동등하게 만든다(equalize).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우리는 통계적 결과를 기계와 동전의 상태에 있는 세밀하고도 숨겨진 차이점들예를 들어, 분자적이거나 원자적 변화들에 - 귀속시키고 싶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결과에서의 차이점들을 숨겨진 초기조건들에서의 차이점들에게 귀속시킬 것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그 기계가 다양한 작동들에서 발생하게 되어 있는 세밀한 숨겨진 차이점들의 증폭에 해당하는 장치를 (우리의 사례에서 회전하는 동전을 여러 번 수직으로 떨어뜨리기와 같은; 혹은 또 다른 기계 안에서 그 동전을 격렬하게 흔들기) 포함한다고 지적함으로써, 다른 거시적 결과를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기계가 항상 앞면들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뒷면을 내놓는다는 사실을 내가 믿기에 완전히 만족스럽게 설명한다. 그러나 결과의 통계적 안정성관찰되는 기계의 산출량이, 가령 상대적 빈도 1/2로 기계가 집단을 산출한다는 가설과 매우 근접하게 일치한다는 사실 기계가 설명한다는 것은 불충분하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i) 숨겨진 초기조건들의 수열은 또한 집단을 형성한다고 전제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반대로, (ii) (i)을 제외한 어떤 전제도 고도로 비개연적이라고 우연-같은 집단을 형성하지 않는 초기조건들의 집합은 확률이나 척도 0(zero)을 지닌다고 전제함으로써, 추가적으로 설명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통계적 문제는 숨겨진 초기조건들에 대하여 확률적이지만 통계적이 아닌 전제로부터 유래하는 추론에 의하여 궁극적으로 해결된다. 혹은 다시 말해서, 우리의 통계적 문제는 확률적 이론에 의하여 해결되었다; 왜냐하면 기계에 대하여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인 이론은 통계적 효과에 대한 설명에서 매우 부수적인 역할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주어진 종류의 설명이 어느 정도까지는 만족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설명은 순전히 통계적 이론으로써가 아니라 확률이나 척도 이론으로써 작동한다는 것을 이해함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초기조건들이 우연-같은 집단을 형성한다는 전제를 위에 ‘(i)’로 표시된 다른 수열의 발생은 0 확률이나 척도를 지닐 것이라는 추가 전제로써 - ‘(ii)’로 표시된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확률에 대한 비-통계적

척도 이론이 우리의 초기조건들 배분에 대하여 유효하며 확률이론은 물리적으로 해석되어야 (내가 제안하는 바, 경향들에 의하여) 한다고 전제함을 의미한다.

순전히 통계적인 이론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이론은 (i)에서 멈추어서 숨겨진 초기조건들의 수열에 대하여 동일한 특징을 전제함으로써 (관찰 가능한) 동전던지기들의 수열이 지닌 무작위-같은 특징을 설명함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를 한 걸음 뒤로 후퇴시킬 따름이다. 게다가 이 전자(前者) 수열들 중 몇 가지는 사실상 무작위-같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 수열들 모두가 그렇거나 거의 모두가 그렇다고 통상적으로, 법칙의 문제로서 예측할 (우리가 예측하는 것처럼) 어떤 권리를 우리가 지니는가?

 

29. 란데의 칼날(Landé’s Blade).

내가 아는 어떤 물리학자도 알프레드 란데(Alfred Landé)보다 이 문제를 더 분명하게 보지 못했고 여기에 포함된 것을 밝히려고 더 많은 일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논증은, 우리가 단칭 사건들의 확률들을 근본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다른 확률 서술들에 의해서는 제외하고 어떤 서술에 의해서도 갈음될 수 없는 것으로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밝히려고 고안되었다. 게다가,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인 이론을 초기조건들에 관한 통계적 전제들과 결합시킨다할지라도 우리는 무한회귀(infinite regress)를 얻을 따름임을 그의 논증은 밝힌다; 그리고 이 전제를 고수하는 해석은 시험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이 (혹은 란데의 용어사용법으로, ‘순전히 학문적이[purely academic]’) 되게 되어있다. 나는 란데의 중요한 구절을 (우연히도 또한 결정론에 반대하는 논증을 포함하는) 전체적으로 인용할 것이다.

 

상아 공들이 강철 칼날의 중앙에 있는 관을 통하여 떨어뜨려지고 오른쪽[r]과 왼쪽[l]으로 떨어지는 공들의 50:50 평균 비율이 관찰된다. 이제 피상적인 관찰자는 개별적인 r -사건을 순전히 우연적인 것으로서 간주할 것이고 보다 숙련된 물리학자는 심지어 칼날에 부딪히기 전의 r -공이 오른쪽으로 다소 우세함을 지니고 있었음을 미리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미리 아는 것은 관찰자에게, 강철 칼날이 나중에 하는 r 공과 l 공들을 구분하는 동일한 일을 하는 일종의 시각적 칼날인 시각적 장치가 있음을 전제한다. r 공의 삶에서의 사건들 중 한 사건은 관을 떠날 때 한 무리의 분자들과 미리 결정된 조우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전적 견해에 따라서 오늘날의 r 상태는, 강철 칼날 조우는 단지 한 가지 연결일 뿐인 사건들의 지속적인 연쇄...rrr...을 통한 무한한 과거로의 어제의 r 상태에 의하여 선행된다.

결정론자가 이제 r l 공들 사이의 평균 50:50 비율에 대한 인과적 설명을 요구받으면, 그의 답변은 관과 칼날이 존재하기 오래 전에 이 비율 또한 미리 결정되었다가 될 것이다. 심지어 평균으로부터의 등락이 무작위 사건들에 관한 이론의 통계적 기대들에 일치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한층 압박을 받고, 그는 후퇴하여 실제로 각각의 단칭 사건들이 미리 결정되어 있었다할지라도 무작위 등락에 종속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의 무리들 사이에 미리 확보된 조화를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처럼(as if)실제(reality)”를 전도된 위치에 놓을 것이다. 무작위 배분은 물리적 실제이다, 그리고...무작위처럼 보일 따름인 [결정론적 체계]는 순전히 학문적 구조물이다.... 오류 이론을 충족시키는 효과들의 배분은, ... 결정론자의 관점에서 앞선 시기와 그곳에서부터 훨씬 앞선 시기로 되돌아가서 원인들의 상응하는 무작위 배분을 요구한다. 통계적으로 배분된 사건들에 관하여 엄격하게 결정론적인 이론을 제시하는 프로그램은 어떤 결과도 낳지 못한다.

 

란데의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논증은 훨씬 더 명시적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a) 떨어뜨린 공들의 숫자 N1,000이었다고 전제하자. 결정론자는, 란데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1,000가지 단칭 사건들 각각의 초기조건들에 상응하는 배분이 있었다는 전제로써만 결과들과 무작위 등락의 50:50 비율 모두를 설명할 수 있다. 1,000가지 초기조건들이 50:50 비율과 무작위 등락을 보여주는 이유를 결정론자가 밝히려 한다면, 그는 분명히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로 향하는 중이다. 그가 설명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거부한다면, 그는 사실들은 설명되지 않은 것으로서, 기적적인 것으로서 수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훨씬 더 심하게 압박을 받을 것이다: 그는 틀림없이 다음 1,000가지 사건들이나 다음 10,000가지 사건들이 매우 유사한 통계적 결과들을 낳을 것이라고 추측할 그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이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 사건들 또한 상응하는 초기조건들의 배분에 기인할 것이라고 추측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비율들이 그렇게 이상하게 안정적인지를 자신이 추측한 까닭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란데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그는 다시 미리-확보된 조화[pre-established harmony]’를 믿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란데가 보여주는 것은 그 설명에 따라 많은 작은 원인들이나 실수들(errors)’이 무작위 결과를 낳을 (부분적으로 서로 무효화함으로써, 기타 등등) 오래된 결정론적 설명의 공허함이다. 이 모든 것은 틀림없이 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정론자에게는 통계적 결과들이 조금이라도 초기조건들의 배분에 관한 통계적 전제들로부터만 도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통계적 수열들의 이상하게 법칙-같은 행태가, 결정론자에게, 궁극적으로 통약가능하고 설명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 사실을 발견한다. 더욱 특히, 그 행태는 결정론자에 의하여 무작위나 우연의 요소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없고 높은 확률들의 도움을 받아서도 설명될 수 없다. 결정론자가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전 사건들의 수열의 (다시 말해서, 초기조건들의 수열의) 설명되지 않은 통계적 배분이기 때문에, 란데의 논증은 이 개념들이 적용될 수 없게 됨을 보여준다.

란데의 이 고찰들은 자신들이 통계적 행태를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결정론자들이 확률에 대한 (그리고 심지어 경향에 대한) 고찰들을 그들의 전제들 속으로 눈에 띄지 않게 미끄러져 들어가게 함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그 들은 무작위의 일반적인 가설로 지칭될 전제로써 일을 한다 (이 문장의 원문은 they operate with an assumption which may be called the general hypothesis of randomness인데 they가 란데의 고찰들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결정론자들을 가리키는지, 혹은 확률에 대한 고찰들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다. 역자): 통제되지 않는 초기조건들은 항상 무작위적이라는 전제. (이 전제는 흔히 분자 혼란의 원칙[the principle of molecular chaos]’으로 불린다.) 그 전제는 다시 통계적 의미로 이전과 동일한 난제들을 유발하는 혹은 경향 의미로서 해석될 것이다. 후자(後者)의 의미에서, 그 가설은 (i) 통제된 실험조건들이 초기조건들을 절대적으로 고정시키지 않고 그 초기조건들에게 어느 정도의 활동을 남겨둔다는 것을, 그리고 (ii) 그리하여 초기조건들에 개방된 채로 남겨진 가능성들 각각은 어떤 경향이나 확률로써 (때때로 대칭 고찰들[symmetry considerations]의 도움을 받아서 실현될) 실현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 보다 만족스러운 고찰들이 비의도적으로 끼어들었음을, 그리고 또한 그 고찰들이 결정론적 틀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엄격하게 배제되었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은 란데의 논증의 장점들 중 한 가지 장점이다.

(b) 결정론자가 스스로 빠진 난제들을 훨씬 더 분명하게 밝히기 위하여, l 공들에 대한 r 공들의 비율이 50:50이 아니라 가령 40:60이라고 전제하자. 이 경우에 칼날이 왼쪽으로 세밀하게 이동하는 것이 r 공들의 위한 비율을 향상시킬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우리는 아마도 그 이동의 결과로 52:48이나 50:50의 비율을 이룩할 것이고, 나아가 사소한 이동도 심지어 r 공들에게 과반수를 부여할 것이다.

우리가 안정된 란데-빈도들을 얻을 수 있음이 허용된다는 조건으로만, 이것들과 같은 결과들을 낳는 실험들이 실행될 수 있다고 인정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칼날의 위치에서 작은 조정들이 지적된 것들과 같은 결과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측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결정론자에게, 이런 종류의 예측들은, 초기조건들에서 미리-확보된 조화를 전제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불가능하거나 기적적이다; 결정론자는, 우리가 본 바와 같이, 그 예측들을 설명할 수 없다.

(c) 란데의 논증은 또한, 우리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확실하게 예측을 할 수 있도록 만들기에는 불충분하다는 조건으로만 확률 고찰들이 과학에 들어온다는 교설을 비판하기 위하여 사용될 것이다.

결정론적 관점에서, 이 교설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이 교설은 방금 비판된 초기조건들의 통약불가능하고 기적적인 저 통계적 배분 이론에 유일한 대안이다. 분명히, 그 교설은 결정론적 관점에서 단칭 확률 서술들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교설이다. 그러나 그 교설은 결정론적 관점들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이 유지하고 있는 듯하다.

이 교설의 취약성이나 심지어 무관함을 알기 위하여, 강철 칼날에 떨어지는 공들과 r l 공들의 50:50 비율로 란데에 의하여 기술되는 바와 같은 조치에 우리가 직면한다고 다시 전제하자. 더 나아가 우리에게 시각적 칼날이 있고 그 칼날의 도움을 받아서 오른쪽 공이든 왼쪽 공이든 우리가 모든 다가오는 공을 확실하게 수 있다고 전제하자. 이것으로 인하여 물론 각각의 개별적 공에 대한 예측에 관한 한 확률을 불러내는 것이 불필요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정도로도 우리의 문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우리가 전제할 것인 바, 공들은 동일한 50:50 비율을 지니고, 그리고 동일한 통계적 등락들을 지니고 이전과 똑같이 강철 칼날의 오른쪽과 왼쪽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이 통계적 결과들을 설명하는 문제와, 미래 수열들이 유사한 결과들을 낳을 것이라고 (조건들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예측하는 우리의 능력을 설명하는 문제는 이제 우리가 모든 개별적 결과를 미리 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정확하게 동일한 것으로 남는다.

그러나 rl공들에 대한 우리의 사전 지식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 공들의 비율들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은가? 공들이 충분히 서서히 란데의 관을 통하여 나오고 서로 충분한 거리를 두어서 그 공들을 시각적 칼날로써 관찰할 수 있고 손으로써 r 공 각각을 제거할 수 있다고 (가령 상자 속에 공을 넣어서) 우리는 전제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50:50 비율 대신에 단지 공들을 얻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닌 정확한 지식을 토대로 우리는 원하는 대로 우리의 통계적 결과들을 통제할 수 있다.

이 논증은 확실히 옳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은 상자 속에서 치워진 공들에 대한 l 공들의 비율이 이전과 같이 50:50임을 여전히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이 비율과 통계적 등락들을 설명하는 문제는 변하지 않고 남는다: 그 문제는 다시 이동되었을 뿐이다.

50:50 비율은 객관적 실험 조건들에 의존하고 우리의 지식이나 우리의 지식 부족과 어떤 관련도 없음이 지금쯤 분명할 것이다. 우리가 실험 조건들을 변경시킨 한 r 공들을 상자-공들로 갈음하여 결과들에는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관과 칼날을 건드리지 않고 우리가 조건들을 변경시키지 않은 한, 변화는 없었다.

 

 

30. 란데의 칼날과 경향 이론.

우리가 칼날을 이동시킬 때 빈도들이 변함을 우리는 보았다. (앞 절의 (b) 참조.) 이론의 임무는, 이 변화들 및 유사한 변화들을 우리가 예측할 이유를 밝히면서, 간단한 방식으로 이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실상 우리가 그렇게 하는 바와 같이).

칼날의 위치 변화는 실험적 장치에 내재하는 가능성들과 그 장치의 대칭-조건들을 변화시킨다. 보다 정확하게, 그 변화는 이 가능성들의 척도를 변화시킨다: 왼쪽으로의 이동은 r 공들을 얻는 가능성을 증가시킨다. 가능성들의 척도들을 객관적 확률들이나 경향들로 지칭함으로써, 나는 또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 가능성들이 힘과 같이 상호작용하여 결합할 수 있는 물리적 규모들로서 지금 간주되고 있다는, 그리고 그 가능성들이 그리하여 가능성이라는 용어에도 불구하고 물리적으로 실제적인 것으로서 간주될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을 끌기 위하여 나는 이렇게 한다: 그 가능성들은 논리적 가능성들일 뿐만 아니라 물리적 가능성들이기도 하다.

경향들은 객관적, 단칭 확률들로서 해석될 것이다. 경향들은, 각 실험에 동일한 것으로 전제되는 실험적 장치에 내재적인 한, 단칭이다. (그리하여 수열의 요소에 대하여 후속-결과들로부터 우리는 독립이나 자유를 얻는다.) 그리고 경향들은 그리하여 실험적 장치의 반복들인 수열들의 빈도들에서 베르누이의 방식으로 자신들을 드러낸다.

실험적 장치가 그러해서 우리가 항상 동일한 결과를 예를 들어 r 공들만 얻는다면 그 장치는 겉으로 보기에 결정론적인 종류일 것이다; 그 장치가 그러해서 우리가 1과도 0과도 동일하지 않은 상대적 빈도들을 우리가 얻는다면 그 장치는 확률적 종류일 것이다. 모든 경우에 실험적 장치는 실험의 각 개별적 결과의 확률들을 결정하거나 어떤 결과들을 얻는 경향들을 결정한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조건들이 객관적인 물리적 조건들이기 때문에 경향들이나 확률들도 또한 객관적이다. 그것들은 조사 중인 체계의 속성들로서가 (, 혹은 전자, 혹은 무엇이든) 아니라 전체 실험적 장치의 속성들로서 (물론 공이나 전자, 즉 조사 중인 체계를 포함하는)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경향들이 존재할 것임 미지의 것으로써 알려진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도입되는 힘이나 다른 추상적이거나 초자연적물리적 존재들과 꼭 마찬가지로 인정할 것을 나는 제안한다. 그것들은, 힘과 같이, 다른 물리적 존재들 사이의 - 가령, 물리적 몸체들 사이나 장(: fields)의 흐름들(currents)과 같은 보다 추상적인 존재들 사이나 아마도 심지어 다른 확률들 사이의 어떤 관계들의 결과이다 (혹은 그 결과에 의존한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변화할 수 있을) 이 추상적이지만 객관적인 물리적 존재들을 우리의 물리이론 안으로 수용하자마자, 우리가 그 물리적 존재들이 상호작용하도록 하거나, 특정 배열에서 한 장소의 경향을 그 경향의 이웃의 경향들에게 의존하도록 만들 법칙들로써 연결되도록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없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에서 (예를 들어, 57) 전개된 나의 옛 관점은, 통계적 결과들이 (란데에 의하여 토론된 결과들과 같은 것들) 반대로 대칭 고찰들로부터 도출될 수 없지만 대칭 고찰들로써 고무될 통계적 가설들에 의하여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관점은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두 통의 편지에서) 그리고 또한 요르단(Jordan)에 의하여 비판되었다. 두 사람 모두 내가 틀렸다고 주장했을 뿐이었다면 두 사람 모두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통계적 결과들이 고전적인 결정론적 전제들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여 두 사람 모두 틀렸다. 이 전제들이 통계적이 될 필요가 없지만 경향들에 대한 가설들이 될 것이라 할지라도, 확률적 전제들은 정말로 통계적 결론들에 필수불가결하다; 그리고 경향들은 가능성들의 척도들이기 때문에, 특정 경우들에서 대칭 고찰들로부터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사례에서의 경우이다) 혹은 특정 가능성들에는 0(zero) 척도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이것은 요르단[Jordan]의 사례에서의 경우이다) 유효하게 도출될 것이다.

 

 

31. 결론.

비록 내가 과학적결정론에 대한 나의 논박이 물리학에서의 확률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근거를 준비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믿을지라도, 내 자신의 논박은 (란데의 논박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어디에서도 확률이론을 이용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양자이론의 도움을 받지도 않는다. ‘자유의지는 또한 부수적으로만 언급된다. [그러나 발문[Afterword]’을 참조하라.] 나의 논증은, 아무리 강력하게 결정론적으로 보일지라도, 모든 물리이론에게 유효하다.

나의 논증의 인간적인 질문들에 대한 그리고 윤리학과 책임의 문제들에 대한 적용에 관하여, 소수의 암시만이 주어졌다 (15, 16, 23 24 절에서), 이 세상의 모든 단칭 사건들은 독특하고, 그 사건들의 독특함의 모습 아래서 고찰되면, 그 사건들은 결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것으로서 기술될 것이다. 어떤 사건들에 대하여, 그 사건들을 기술하는 이 방식은 아마도 지나치다. 그러나 인간의 개성들과 그 개성들의 행동이 관련될 때, 그 방식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모습일 것이다. 그 방식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때마다 분명히 그러하다.

사람이 예측자인 한, 예측하는 기계들에 관하여 내가 얻은 결과들은 인간과 인간 사회에 더 한층 강력한 이유로 적용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네 자신을 알라- 다시 말해서, 너의 한계들을 알라 우리가 지금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논리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다. 우리가 계산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전하게 알 수 없고 심지어 우리의 모든 한계들도 알 수 없다 적어도 우리 지식에 대한 우리의 한계들.

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자신과 예측하는 기계들 사이의 유사성이 멀리 나아간다고 제시할 의도가 정말로 없다. 사람은 예측자일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심지어 우리의 순전히 지식적인 활동들에 관한 한, 우리에게는 희망과 공포와 흥미와 문제들이 있다. 우리는 단순히 계산기만은 아니고 주로 계산기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계산기인 한, 우리는 비참하게 나쁜 계산기이다. 모든 평범한 덧셈 기계는 우리들 대부분보다 우월하다. 우리의 두뇌가 계산을 할 줄 모른다면 우리는 구구단과 산수 체계를 구축할 수 없을 터이다. 우리는 연필과 종이와 전자적 두뇌로써 계산 방식을 구축하는데 단지 우리 자신이 충분한 두뇌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로 계산기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산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 해결책이 우리의 제한된 계산 능력들을 뛰어넘는 문제들에 우리가 흥미를 갖기 때문에 우리는 계산기를 만든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이, 우리는 계산기를 만듦으로써 우리에게 제시되는 새로운 문제들에 의하여 우리는 매혹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계산기를 만든다. 우리가 지닌 근본적인 지식적 충동은 난제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혹은 심지어 난제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난제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계산기는 수학적 정리(定理)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계산기는 비-증거들로부터 증거들을 구분하여 비-정리(定理)들로부터 특정 정리(定理)들을 구분할 것이다. 그러나 계산기는 따분하고 재미없는 증거들로부터 어렵고 기발한 증거들을 구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계산기는 재미없는 것을 너무 많이 지나치게 너무 많이 - ‘것이다. 아무리 체계적이라 할지라도 계산기가 지닌 지식은 몇 조각의 금이 몇 조각의 귀중한 정보 떠 있는 평범한 이야기의 바다와 같다. (이 조각들을 잡는 것은 계산기 없이 그 조각들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만큼 어렵고 동시에 그 노력보다 더 짜증날 것이다.) 사실들을 만들어내는 계산기의 무감각적인 능력에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은 문제를 지닌 사람뿐이다.

이 논증을 보다 공식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여, 문제의 주제와 관련되는 모든 서술들을 세 가지 구별되는 집합들로 이론이 참이라고 주장하는 집합, 이론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집합, 그리고 이론이 어떤 주장도 하지 않는 집합 나누는 것은 모든 이론의 기능이다. 일관적이지 않은 이론이 쓸모가 없는 것은 이 이유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런 이론은 그런 분류를 하지 않고 모든 서술을 (그리하여 모든 서술의 부정 또한) 주장하기 때문이다. 일관적이지 않은 이론은 너무 많은 것을 주장하기 때문에 쓸모가 없다.

이제 좋은 (, 일관적인) 계산기는 틀림없이 무용하지 않는데 이유인즉 그 계산기가 그런 분류를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계산기는 여전히 너무 많은 것을 주장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 계산기가 자동적으로 이론의 모든 결과들을 도출하도록 만들어진다면, 그 계산기에는 흥미롭거나 중요한 결과들을 골라내는 방법이 여전히 없을 것이고 또한 그 계산기가 분명한 시간 간격 안에서 이 결과들 중 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증하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2 + 1 = 3’과 같은 모든 중간정도로 유용한 서술로써 그 계산기는 서술들의 무한수열인 ‘2 + 1 4’, ‘2 + 1 5’...‘2 + 1 3 + 1’, ‘2 + 1 4 + 1’...과 같은 서술들의 다른 무한수열을 또한 포함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체의 생산 순서 안에서의 서술들의 무한수열에서, 흥미로운 서술 하나를 조우할 (합당한 표준을 통하여) 확률은 0(zero)일 것이다.

오직 인간의 두뇌만 [혹은 아마도 나는 인간의 정신을 말했어야 한다] 흥미, 목적, 문제 그리고 목표를 심지어 비교적 좁은 자체의 지적(知的) 활동들 안에서 만들어낼 수 있다.

또 다른 논증은 이럴 것이다. 우리는 실수를 통하여 배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모순에 도달했을 때 우리가 돌아서서 우리의 전제들을 재구성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 방법을 적용하면서 우리는 필요하다면 심지어 논리적 특성을 지닌 전제들도 재검토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것은 논리적인 역설들의 경우에 발생했다.) 기계가 똑같이 할 수 있을지는 상상불가능하다. 기계를 만드는 사람들이 부주의하게 기계에 모순을 장착시킨다면 그 기계는 시간이 되면 자체가 형성할 수 있는 모든 서술을 (그리고 그 서술의 부정을) 도출할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그 기계에, 그 기계가 ‘0=1’을 도출할 경우에 그 기계에 경고하여 그 기계가 자체의 전제들 중 몇 가지 전제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장치를 장착시킬 것이다. 그러나 자체의 도출 방법들이나 자체의 비판 방법들을 비판하여 재조정할 수 있는 기계를 우리는 구축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고찰들의 일반적인 결과는 1절에서 상식적 관점으로서 예측될 수 있거나 결정된사건들과 예측될 수 없어서 결정되지않은 다른 사건들이 있다는 견해 기술된 세상에 대한 순진한 견해의 복원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고찰들은 심지어 이 견해와, 사건들은 예측될 수 없다고 우리를 믿게 만드는 것은 통상적으로 단지 지식의 부족이라는 다른 견해 - ‘더 정교한’ - 사이의 화해와 같은 것을 제시한다.

물리적 세상에서 지식의 혹은 더 정확하게, 지식을 대표하는 것으로서나 지식으로부터 귀결되는 것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물리적 사건들의 존재가 우리가 여기서 토론하던 비결정론의 종류를 낳는다고 우리가 깨닫는다면 이 화해는 발생될 것이다. 지식은 새로운 문제들 정복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지식은 자체가 풀 수 없는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할 것이다; 적어도 즉각 풀 수 없는. 왜냐하면 지식은 자체의 미래의 정복 결과들을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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