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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무라 히데키

이윤진이카루스 2014. 6. 9. 10:20

문화

21세기에 다시 가지무라를 불러낸 이유

등록 : 2014.06.08 19:27 수정 : 2014.06.08 19:27

가지무라 히데키(1935~1989)

‘폭력적 근대’ 극복의 가능성
한국 민중의 저항에서 찾아

<가지무라 히데키의 내재적 발전론을 다시 읽는다>
가지무라 히데키의 내재적 발전론을 다시 읽는다
강원봉·도베 히데아키·미쓰이 다카시·조관자·차승기·홍종욱 지음
아연출판부·1만2000원

1989년 가지무라 히데키가 53살로 세상을 떠났다. 도쿄 호세이(법정)대학 캠퍼스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세움 간판이 세워졌다. 호세이대 한국문화연구회, 조선문화연구회, 신주쿠 외국인 등록법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 등의 이름으로 내걸린 추도문은 이랬다.

“가지무라씨는 억압 민족과 피억압 민족의 입장에 있는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넘지 못하리라던 벽을, 그 탁월한 지식과 우리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던 진지하고 겸허한 자세를 통해 멋지게 깨버렸다. 이 때문에 일본인으로서의 고인의 존재는 우리들에게 혁명적이기조차 했다. 우리들은 가지무라씨 덕에 일본인을 믿을 수가 있었다.”

가지무라 히데키(1935~1989·사진), 그는 누구인가?

1960~80년대 일본의 한국(조선)사 연구자들 중에서 그만큼 근대 이후 수난의 한국사를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한국에 대한 일본사회의 멸시와 식민주의 역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 민중을 역사 발전의 적극적인 주체로 내세운 당시 그의 글들은 한국의 읽는 이들에게 놀라움과 함께 대단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 이런 일본인도 있구나!

1980년대 중반의 한국사회 성격논쟁 때 한국 지식사회를 달군 식민지반봉건사회론, 내재적 발전론과 함께 한자 발음인 미촌수수(梶村秀樹)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던 가지무라. 차별받던 재일동포와 식민지적 근대의 질곡 속에 신음하던 약소국 한국 민중의 다중적 억압과 피착취를 가슴 아파하며 그들의 저항에 연구자 및 실천운동가로 줄기차게 동참했던 그는 일본 내 ‘조선사연구회’ ‘일본조선연구소’ 등을 주도하면서 식민사관을 정면으로 격파하는 새로운 한국사 연구의 흐름을 선도했다. 그는 근대극복 과제의 해결 가능성을 모순이 중첩된 변방 한국 민중의 저항 속에서 발견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든 한국에서든 지금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아연)가 동북아총서 제17권으로 펴낸 <가지무라 히데키의 내재적 발전론을 다시 읽는다>는 바로 그런 가지무라를 불러내 그의 삶과 학문을 재조명한다. 이 책 집필자들이 지적하듯이, 가지무라가 잊혀진 건 그의 학문적 한계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그가 제기한 문제의식을 외면하거나 잊고자 했던 일본 사회와 한국 사회의 변질에 있다. 따라서 그가 던졌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며 어떤 면에선 점점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가지무라를 다시 불러낸 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가지무라로 하여금 그처럼 평생 “사상적 격투”를 벌이게 만든 그 사상적 입각점은 무엇이었나?

이 책 제4장에서 가지무라의 한국 인식과 역사 인식을 명쾌하게 정리한 강원봉(도쿄외국어대 박사과정)은 그것을 식민주의와 ‘일한(日韓)체제’라고 봤다. 일한체제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형성된 ‘경제 중심의 종속적 분업관계’를 가리킨다. 가지무라는 이 일한체제를 ‘일본의 한국 진출·한국 예속화’로 인식했다. “한국 경제는 36년간의 일본 식민지 지배와 해방 뒤 20년간의 미국 지배정책의 역사적 소산인 식민지적 경제였다.” 1960년대 일본 자본주의 입장에서 한국은 반공의 최전선이요, 값싼 노동력의 공급처로서 경제·군사 양면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는 하위 파트너였다. 박정희 정권의 외자 의존적 공업화 정책은 일본 자본의 안정적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인간성 해체를 강요하는 강압적 노동정책으로 이어졌다. 그들 뒤에는 미국과 일본이 있었다. 21세기인 지금 그 구조는 과거지사일까? 그랬다면 가지무라를 다시 불러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가지무라는 박정희의 이런 압축적 근대화 궤적이 “근대 일본 100여 년의 궤적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고 보았다. 그나마 자체 모순을 완화하는 한국이라는 식민지적 배출구가 있는 일본과는 달리 식민지가 없는 한국의 민중은 훨씬 더 처참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사회의 한국 멸시와 한국인 차별은 패전 뒤 이런 식민지적 종속구조에 토대를 둔 폭력적 근대를 청산하지 못한 채 미국에 기대어 오히려 그것을 확대재생산하면서 모순을 성찰하고 수정할 기회를 놓쳐버린 데서 비롯했다.

“우리들이 서야 할 입장은 근대 일본 100년의 궤적을 깨끗이 모두 부정함과 동시에 그의 도달점인 현재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비참할 정도의 기만성을 보여주는 근대화주의를 극복하려는 입장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들은 당분간 남조선(한국) 민중의 악전고투 속에서 획득된 감각으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적어도 1980년대까지 고난 속의 한국 민중은 국가를 상대화하는 경험과 시각을 지닐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제국주의적 기득권에 안주한 풍요 속의 일본 사회는 국가 지상주의에 함몰됐다. 가지무라는 식민지의 희생을 토대로 한 근대 100년을 문명의 진보로 자화자찬한 일본 사회에 절망하면서 거기에 저항한 신채호의 민족사학과 한국 민중 고난의 세계사적 의미를 ‘역사의 하수구’라고 표현한 함석헌의 ‘의미로서의 역사’에서 가능성을 찾았다. 가지무라에게 일한체제는 식민지적 근대 그 자체였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문제의식과도 닮았으되 가지무라는 중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출구를 찾았다.

가지무라는 낡은 게 아니라 시대를 선취했던 것이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사진 아연출판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