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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활동 혐의로 1930년 일제에 체포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일제 경찰이 촬영한 황태성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
[토요판] 커버스토리
본인 전향과 미국의 맞교환 제안에도 부랴부랴 죽이다
▶ 황태성의 죽음은 아이러니다.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였고, 북을 조국으로 택했으나 버려졌으며, 협상가로 월남했으나 간첩의 이름으로 죽었고, 지금 남한의 보수에게 기억되지 않고 진보에게 기념받지 못한다. 남과 북에서 모두 버려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멘토’였으나 훗날 ‘멘티’에게 사형당했다. 사형을 승인한 것은 박 전 대통령이지만, 황태성의 존재를 근거로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박 전 대통령을 압박한 것은 공교롭게 야당 대선 후보 윤보선이었다.
1963년 초 57살의 중년 사내가 법정에서 발언했다. “원심 판결은 (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으나… 소위 적국간에도 (밀사를) 사형치 않는 것이 국제법상의 관례인지라 하물며 비록 괴집(괴뢰집단)에 가담하였다 하더라도 어떤 사항을 논의하는 정도라면 그것만으로서 극형을 선고할 필요성의 여부를 고려하여야 할 것인바… (저는) 1955년 9월부터는 괴집(북한)에서 일체의 관직을 탈취당하였으며 특히 원심 판결 후 전향하는 간곡한 탄원서를 1962년 5월10일자로 제출하였으므로 자유정부인 대한민국의 품 안에 돌아오려는 피고인에 대하여 극형을 처함은 양형이 심히 부당하다.”
남자의 논리는 명징하고 취지는 명확했다. 사형 당하느냐 마느냐를 다투는 재판이다. 그러나 서울 삼각지 육군본부에 위치한 육군고등군법회의 법정 방청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민간인도 기자도 없었다. 군법회의 2부 소속 군판사 5명만 있었다. 비공개재판이다.
1963년은 남자가 잘 아는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한 지 2년째 되는 해였다. 1963년 1월부터 5·16 쿠데타 이후 금지됐던 정치활동이 1년7개월 만에 허용됐다. 당시 민주당 소속 신참 정치인이던 김대중, 김영삼도 곧 정치를 재개할 것이었다. 5·16 쿠데타의 주역 박정희와 김종필 등 민주공화당이 집권하느냐, 4·19 혁명 이후 잠시 집권했던 민주당이 재집권하느냐가 갈리는 격동의 해였다. 황태성 재판은 이런 정치적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었다.
황태성은 “(간첩이 아니라) 밀사로 온 것”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1, 2심 법원이 자신에게 국가보안법의 반국가단체 구성 및 활동 혐의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으나, 법률상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로는 최고 무기징역만을 선고할 수 있으므로 법률 적용에 잘못이 있다는 항변도 했다. 한 아들의 아버지, 한 손녀의 할아버지인 황태성의 목숨은 5명의 군판사들이 7월2일 내릴 선고에 달려 있었다.
박정희가 남로당 가입할 때
신원보증인이 돼줬던 사람
박정희와 통일 협의하겠다며
남한서 지인 접촉하다 체포
간곡한 전향 탄원도 소용없었다
박정희와 김형욱이 죽였지만
그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 건
황태성 말대로 ‘여론’이었다
그 여론은 야당으로부터 나왔다
요즘 상상하기 힘든 아이러니다
서울로 잠입해 박정희의 형수를 만나다
황태성의 삶 자체가 한국현대사다. 그는 1906년 4월27일 경북 상주군(현 상주시) 청리면 원장리의 중산층 농가에서 태어났다. 식민지배의 부당함에 일찍 눈떴다. 판결문 등을 종합하면, 15살 되던 1921년 경성공립 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에 입학했으나 1924년 “일본인 교장 배척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하다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25년에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상과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10월 항일학생운동과 관련해 또다시 퇴학 처분을 받았다. 항일운동 과정에서 황태성은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 주류적 사상이었던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당시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을 위해 좌우합작을 했고 그 결과 1927년 경북에 신간회 김천지회가 만들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김천청년동맹’이 만들어졌고 황태성은 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는 사회주의자이기 전에 독립운동가였다. 1927년 조선공산당 지역운동은 물론 <조선일보> 김천지국 기자로도 활동했다. 1928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는 등 여러차례 투옥됐다. 1930년대에 3년6개월을 복역했다. 1945년 해방 뒤 좌우 갈등이 더 심해졌다. 해방 직후 공산당 등 사회주의 활동이 합법화됐다. 동서 냉전이 상황을 바꿨다. 미 군정은 일본과 남한에서 모두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1946년 10월 대구에서 미 군정의 식량정책 실패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인 ‘대구 10월사건’이 벌어졌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사회주의자·독립운동가로 이때 경찰의 총격으로 숨졌다. 황태성은 연희전문학교 의과에 다니던 둘째 아들과 월북했다. 박헌영을 비롯해 많은 남로당원들이 미 군정의 검거를 피해 월북했다. 김일성은 6·25 이후 남로당 계열을 숙청하고 죽였다. 황태성은 무역성 부상 및 무역상 서리를 지냈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관직에서 밀려났다. 남의 반공주의가 그를 밀어냈고, 북의 파벌주의가 그를 옥죄었다. 이념의 힘으로 운동했으나, 이념에 배반당할 처지였다.
황태성은 박정희의 멘토였다. 당시 조선은 작은 나라였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1935년 인구는 2350여만명이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는 더 적었다. 1935년 3월19일치 <동아일보>를 보면, 당시 고등교육에 해당하는 보통학교 학생수는 학령아동의 1%인 3000여명에 불과했다. 격동기에 많은 지식인들이 역사의 시공간을 함께 스쳐갔다. 황태성은 1906년생으로 박정희의 형인 사회주의자 박상희와 동갑이었다. 둘이 각별했다. 황태성은 박상희의 처 조귀분을 소개했다. 조귀분도 야학 교사를 하던 인텔리 여성이었다. 1917년생인 박정희는 11살 많은 박상희와 황태성을 많이 따랐다. 박정희는 사회주의에 이끌린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형의 죽음을 계기로 남로당에 입당했다. 황태성이 박정희의 신원보증인이 됐다. 이념 갈등이 잇달아 벌어지던 중에 1948년 군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여순반란사건을 일으켰다. 반란은 진압됐고 군 내부의 공산주의자는 색출돼 처형됐다. 박정희도 발각됐으나 남로당원의 정보를 방첩대에 제공하고 겨우 살아났다. 정보장교로 6·25 때 활약했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딸 박영옥이 김종필과 결혼했다. 조카사위 김종필과 함께 1961년 쿠데타를 일으켰다.
판결문을 보면, 황태성은 5·16 쿠데타가 벌어지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남북통일 문제를 협의하겠다”고 당에 제안했다. 황태성은 임진강을 건너 1961년 8월31일 오전 10시 서울에 잠입했다. 박정희, 김종필과 접촉하려 많은 지인을 접촉했다. 남한에 살고 있는 조카딸을 만났다.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동창 출신 학자도 접촉했다. 여러차례의 중간 접촉 끝에 결국 황태성은 자신의 편지를 박정희의 형수인 조귀분에게 전달했다. 1961년 10월20일 중앙정보부에 체포됐다. 같은 달 22일 반도호텔(현재 롯데호텔 위치)에서 조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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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7월2일 육군고등군법회의(현재의 고등군사법원)가 황태성 전 북한 무역상 서리에 대해 내린 파기환송심 판결문을 <한겨레>가 분석해보니, 황태성이 전향한다는 탄원서를 제출한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판결문을 보면 “1955년 9월부터는 괴집(북한)에서 일체의 관직을 탈취당하였으며 특히 원심 판결 후 전향하는 간곡한 탄원서를 1962년 5월10일자로 제출하였으므로 자유정부인 대한민국의 품 안에 돌아오려는 피고인에 대하여 극형을 처함은 양형이 심히 부당하다고 볼 것”이라는 진술이 보인다. 이 판결문에서 “피고인의 남하는 남한에서 간 밀사에 대한 반찰(답장)”이라는 황태성의 진술도 확인됐다. 두 진술 내용은 지금까지 역사학계에 알려진 바 없는 사실이다. 판결문 육군본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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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성 전 북한 무역상 서리·부상에 대해 내린 파기환송심 판결문. |
중정의 ‘김종필 위장’ 접촉과 파기환송심
1961년 10월은 박정희, 김종필에게 중요한 시기였다.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수십명으로 구성된 국가재건최고회의 내부 권력 투쟁이 마무리되지 않았다. 권력은 잡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렵다. 쿠데타 주체들이 군대로 돌아갈지, 정치에 참여할지, 정치활동은 언제 다시 허용할지, 대통령 선거는 언제 치를지 등이 모두 쟁점이었다. 미국은 박정희, 김종필을 민족주의자로 의심했다.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도 의심스러워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황태성이 밀사로 남하해 박정희와 접촉하려 시도한 사실 자체를 국민과 언론에 알리지 않았다. 중정 파견 경찰을 자신으로 변장시켜 접촉시켰다. <김형욱 회고록>을 보면, 김형욱은 박정희에게 황태성이 남한에 온 사실도 기초 조사를 마친 뒤 뒤늦게 알렸다. 결국 황태성을 도운 조카사위 권상능, 동향 후배 김민하 등 3명 모두 군검찰에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황태성 재판은 정치의 자장 속에서 일그러지고 권력 쟁투 속에서 왜곡됐다. 1심을 맡은 육군보통군법회의는 1961년 12월27일 황태성에게 “(반국가단체) 간부 또는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국가보안법 1조 2호’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권상능과 김민하는 반공법(편의제공) 혐의로 각각 징역 15년과 10년을 선고받았다. 황태성은 자신이 간첩이 아니라 “남북 협상을 위하여, 또한 남한 정부를 돕기 위하여 밀사의 형식으로” 왔다는 등의 이유로 항소했으나, 2심을 맡은 육군고등군법회의는 1962년 9월11일 항소를 기각했다. 다만 2심 군법회의는 권상능, 김민하의 형량을 각각 징역 2년과 1년6개월로 감형했다.
황태성은 다시 항소했다. 그사이 재판을 둘러싼 정치의 자장이 또 바뀌었다. 1963년 1월24일 김종필이 중앙정보부장을 사임했다. 쿠데타 주체 김용순, 김재춘이 후임 중앙정보부장을 차례로 맡았다. 그들은 김종필의 라이벌이었다. 3심은 민간인 판사로 이뤄진 대법원이 맡았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963년 1월31일 “법 적용이 잘못됐다”며 황태성에 대한 사형 판결을 파기했다. 1, 2심 군법회의는 황태성이 월북한 뒤 북한에서 무역성(일종의 경제부처) 부상이었던 점, 노동당 중앙위원이었던 점 등 14개 사실을 근거로 ‘반국가단체를 구성하고 간부 또는 지도적 임무에 종사’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황태성이 1955년 9월 무역성 부상을 그만뒀고 이어 1956년 3월에는 노동당 중앙위원직도 사임한 사실을 근거로 삼아 법 적용이 잘못됐다고 판단했다. 즉 ‘반국가단체의 지도적 임무’에 대해 사형까지 내릴 수 있도록 한 1961년 당시의 국가보안법을 적용해서는 안 되며, ‘반국가단체의 수괴라 할지라도 무기징역 이상을 선고하지 못하게 한 1950년대의 국가보안법을 적용해야 하므로 사형선고는 법 적용을 잘못한 오류라는 취지였다.
황태성은 잠시 시간을 얻었다. 그러나 군검찰은 법기술자들이었다. 황태성이 1955~56년 ‘지도적 임무’에서 벗어난 사실을 피해갈 방법을 찾아냈다. 공소장을 변경해 형법 98조의 ‘간첩죄’를 국가보안법과 함께 적용시켰다. 간첩죄는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었다. 1963년 7월2일 파기환송심을 맡은 육군고등군법회의는 이런 논리로 대법원의 파기환송 취지를 무시하고 재차 황태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박정희의 과거 멘토’가 몰래 남한에 내려왔고, 국가보안법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국민과 기자 모두 몰랐다.
불같은 성격으로 뼛속까지 반공주의자인 김종필의 육군사관학교 8기 동기 김형욱이 그해 7월 중순부터 중앙정보부장이 됐다. 그는 황태성 사건을 철저히 숨겼다. 1963년 10월15일에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황태성의 존재는 박정희에게 악재라고 생각했다. 뒤늦게 황태성의 존재가 9월 말 언론에 알려졌다. 김형욱은 9월27일 밤 황태성 사건을 브리핑했다.
“5·16 쿠데타 세력도 북에 밀사 보냈다”
야당인 민주당 대선 후보 윤보선이 ‘빨갱이 공세’에 나섰다. 황태성 사건을 근거로 박정희와 공화당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지금 보수진영이 진보진영에 하는 사상 공격을 공교롭게 야당이 박정희에게 가한 셈이다. 야당지로 유명했던 <동아일보> 10월9일치 1면 톱기사가 대표적이다. ‘윤보선씨 안동유세서 중대발언-공화당은 공산당 자금으로 조직/ 간첩 황태성이 20만달라 가지고와서 김종필씨와 접촉/ 점선식으로 만든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다. 옆 사이드 기사 제목은 ‘야의 인신공격을 비난-박정희 후보 부산유세/ 빨갱이라면 왜 사단장 시켰나’이다. 대선을 5일 앞둔 <동아일보> 10월10일 1면에는 ‘간첩 황은 형 친구-형수 만나려하다가 체포됐다/ 박정희씨 해명’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충남 대지주의 자식으로 일제 강점기에 영국 유학을 갔던 보수주의자이자 5·16 쿠데타 진압 명령을 포기한 전직 대통령 출신 윤보선의 사상 공격이 같은 지면에 실렸다. 주한 미국대사가 “질서있게 치러진 민주 선거였다. 우려했던 노골적인 탄압과 총체적인 선거부정은 벌어지지 않았다”고 평가한 10월15일 대선에서 박정희가 전라도 몰표 등에 힘입어 당선됐다. 그리고 같은 달 22일 사형 판결을 확정했다. 그해 11월 총선에서 민주공화당이 다수당이 됐다. 약 1년 반 동안 황태성은 ‘사형(1심)→사형(2심)→파기환송(3심)→사형(파기환송심)→사형(파기환송심 상고심)’ 판결을 겪었다.
새로 드러난 김형욱 국회 발언
“미8군에선 황태성을 미 조종사
2명과 바꾸었으면 한다 해서
그러면 정치적으로 어떻게 되냐
그래서 부랴부랴 죽였습니다”
사형 재차 확정된 10월22일부터
집행된 12월14일 사이 53일
누가, 언제, 왜 갑작스럽게
사형집행을 명령했는가
박정희의 레드 콤플렉스였나
한 아들의 아버지이고 한 손녀의 할아버지이자 한 조카딸의 외삼촌인 황태성은, 살려고 했다. 간첩이 아니라 밀사임을 줄곧 주장했다. 1963년 7월2일 내려진 육군고등군법회의 파기환송심 판결문을 보면, 그는 5·16 쿠데타 이후 평양 노동당 사무소를 찾아가 “박정희 의장은 ○○부터 잘 아는 사이인바 당에서 남파를 시켜주면 직접 동인(박정희)을 상면(면담)하여 남북통일 문제를 협의하고 동집단(남한)의 통일 방안과 일치하는 남북협상 문제에 대한 의식을 탐지하여 오겠다”고 밝혔다.
황태성이 재판 과정에서 ‘5·16 쿠데타 세력이 북에 밀사를 보냈다’고 진술한 사실도 이번 취재 과정에서 새로 드러났다. 1963년 7월2일 판결문을 보면, 황태성은 남하한 이유에 대해 “남한에서 간 밀사에 대한 반찰(편지 답장을 보냄)”이라고 진술했다. 1990년대 초·중반 <조선일보>와 <월간조선> 보도를 통해 5·16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영관급 장교와 민간인을 북에 몰래 파견한 사실은 알려졌다. 김종필 전 총리는 1998년 언론을 통해 ‘정보 차원에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번 취재에서 새로 드러난 황태성의 진술은 이런 해명과 다르다. 남과 북의 만남을 황태성이 인지한 상태에서 내려온 셈이다. 황태성이 법정에서 이런 민감한 사실을 드러냈다는 사실에서, 당시 집권세력이 왜 비공개로 재판을 진행했는지 어느 정도 추정된다.
황태성이 전향 탄원서를 제출한 사실도 새로 드러났다. 황태성은 파기환송심 과정에서 “(저는) 1955년 9월부터는 괴집(‘괴뢰집단’의 준말로 북한을 뜻함)에서 일체의 관직을 탈취당하였으며 특히 원심 판결 후 전향하는 간곡한 탄원서를 1962년 5월10일자로 제출하였으므로 자유정부인 대한민국의 품 안에 돌아오려는 피고인에 대하여 극형을 처함은 양형이 심히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1955년 이후 박헌영 등 남로당 계열 사회주의자들을 숙청하고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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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월1일,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국립묘지에 헌화하고 있다.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
대통령 취임 3일 전 집행…죽어서는 ‘생존설’
파기환송심 이후 사형 집행 사이 어느 시점에 미국도 황태성을 심문했다. 대략 1963년 10월 전후로 추정된다. 김형욱은 회고록에서 “미군 정보당국은 박정희를 비롯해 김종필, 이주일, 장태화 등이 사실상 공산주의자이며 그래서 황태성 사건을 미군 정보당국에 알리지 않고 쉬쉬하며 감추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며 “미 시아이에이(CIA)의 에드워드가 (미국 원조 쌀을 얻으려면) 황태성을 넘겨달라고 요구해 미군 정보당국에 넘겼으며 그 대가로 미국산 원조 소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형욱은 “1963년 10월 시아이에이 한국지부 에드워드와 약속대로 황태성을 미군 정보당국에 넘겼다”고 썼다. 권상능도 언론 인터뷰에서 재판 과정에서 황태성을 거의 매일 면회했는데, 1963년 가을 약 2주 동안 행방을 알 수 없었다고 밝혔다. 황태성을 심문한 미국 쪽 주체가 ‘미국 정보당국’인지 ‘미군 정보당국’인지 분명하지 않다. 시아이에이 한국지부 또는 주한미군 방첩대(CIC)가 심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에드워드’의 전체 이름도 더 이상 알려진 바 없다. 수십년이 지나면 공개되는 미국외교기밀문서(FRUS·Foreign Relations of United States) 가운데 황태성이 언급된 문건 몇건은 한국에 알려져 있으나 심문 기록 자체는 공개된 바 없다.
황태성은 이번엔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북괴에서 남파된 간첩이 아니고 대한민국에 유리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하여 남하한 애국적인 밀사인바 원심은 이런 점을 잘못 보고 지난번의 대통령 선거전에 악용된 그릇된 여론의 영향으로 청구인(황태성)을 극형으로 처단(선고)하였다”고 항변했다. 또 “원심 판결에 관여한 재판관, 공소의 제기 또는 그 기초되는 수사에 관여한 검찰관, 정보관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하였음이 증명될 것”이라고도 항변했다. 그러나 육군고등검찰부는 재심 재판이 진행중인데도 1963년 12월14일 오전 11시 토요일 갑작스럽게 황태성을 인천 교외의 군부대에서 총살했다. 12월16일 조카사위 권상능이 서울 마포구 서대문형무소에서 피 묻은 주검을 건네받았다. 12월17일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황태성은 죽어서도 아직 자유롭지 못했다. 지주 출신 보수주의자들에 기원을 둔 야당 민주당은 ‘황태성 생존설’을 계속 주장했다. 1964년 1월28일치 <경향신문>을 보면, 민주당 소속 조재천 의원은 “(박정희의) 사상논쟁에 매듭을 지어야 한다”며 “간첩 황태성 사건 등 항간에 퍼져 있는 의혹을 명백히 풀라”고 요구했다. 조재천은 일제 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해방 뒤 경북도 경찰국장 등을 지낸 반공보수주의자였다. 또 국회 여야 의원들은 황태성의 사형집행 현장에 있던 입회자 증언을 청취했다.
1963년에 적용된 형사소송법(428조)을 보면, ‘재심의 청구는 형의 집행을 정지하는 효력이 없다. 단, 관할법원에 대응한 검찰청 검사는 재심청구에 대한 재판이 있을 때까지 형의 집행을 정지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형 집행이 불법은 아니지만 이례적인 사건임은 분명했다. 서울고법은 피고인이 숨지고 없는 상태에서 1964년 9월3일 황태성의 재심청구를 “이유 없다”며 기각 판결했다.
역사학계의 연구와 몇몇 언론 보도로 황태성이 왜, 어떻게 남하했는지는 어느 정도 밝혀졌다. 그러나 사형이 재차 확정된 1963년 10월22일부터 사형이 집행된 1963년 12월14일 사이의 53일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누가, 언제, 왜 갑작스럽게 사형집행을 명령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실제로 남로당원이었고 가족 중에 사회주의자가 많았던 박정희의 ‘레드 콤플렉스’가 이유라는 해석이 많다. 박정희가 ‘나는 좌파가 아니다’라는 점을 미국과 한국의 보수에게 입증하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취지다. 2001년 <문화방송>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황태성 사건을 다룬 보도의 제목은 ‘박정희와 레드 콤플렉스’였다.
이번 취재로 새로 드러난 김형욱의 국회 발언에서 이 점이 다시 확인된다. 1964년 9월21일 국회 내무위원회의 중앙정보부에 대한 국정감사 회의록을 보면, 출석한 김형욱이 의원들의 질문에 답했다. “(미)8군에서는 황 간첩(황태성)을 헬리콥터 조종사 두명과 바꿀 생각을 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사형집행을 하니까 왜 이것을 협의 없이 죽였느냐, 우리는 조종사하고 바꾸었으면 했다고 해서 우리가 바꾸자는 얘기 하지 말라고, 바꾸면 정치적으로 어떻게 되느냐 그래서 부랴부랴 죽였습니다.”
남에 있는 조카사위 등은 인터뷰 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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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성 연보 |
박정희와 김형욱이 황태성을 죽였지만 그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은 황태성 말대로 ‘여론’이었다. 그 여론의 상당 부분은 당시 야당으로부터 나왔다. 2014년의 정치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아이러니다.
황태성은 남과 북 모두에서 버려졌다. 북은 침묵했다. <한겨레>는 1963년 10월~1964년 2월 5개월치 <노동신문>을 전부 검토했으나 황태성 관련 보도는 전혀 없었다. 당시 <노동신문>은 남한의 일간지를 가리지 않고 실시간으로 인용하며 남한을 비판하는 보도를 했다. 당시 황태성 사건이 대선의 이슈로 <동아일보> 등 주요 일간지 전면에 등장했다. 그런데도 1963년 10월 한달간 <노동신문>이 남한 대선을 언급한 건 10월10일, 13일, 16일, 18일, 21일, 30일에 불과했다. ‘황태성’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대선이 15일인데 결과를 18일치에 단신으로 처리했다. 1963년 10월의 기사 논조는 박정희와 야당 모두 좋지 않다는 양비론이었다. 1964년부터 ‘박정희 도당’이라는 비난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실체적 진실은 아직 베일 뒤에 있다. 역사학계의 의견을 종합하면, △황태성에 대한 미국의 심문 내용 △갑작스런 사형집행 이유와 과정 등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전향 탄원서를 실제로 냈는지 △5·16 직후 쿠데타 세력이 밀사를 북에 보낸 사실을 황태성이 어떻게 알았는지 △재판 기록이 왜 지금 증발했는지 △재판 관련자의 직무에 관한 죄가 무엇인지 등 이번 취재 과정에서 새롭게 드러난 의혹도 밝혀져야 한다.
진실이 파묻히고 상처가 벌어진 상태로, 산 사람은 계속 산다. 남과 북이 모두 버린 사내의 조카사위 권상능(80)은 개인사업을 하며 살고 있다. <한겨레>가 지난 5월 만났으나 인터뷰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황태성의 손녀는 생존해 미국에 거주하고 있음이 확인됐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의사인 황태성의 아들 황기옥은 평양에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접촉할 합법적 방법이 없었다. 황태성이 김종필과 만나도록 도왔다가 복역한 김민하(80)는 지난 5월 <한겨레> 기자와 만나 “황태성은 밀사”라고 거듭 주장했다. 그러나 인터뷰는 거절했다. 김종필을 대신해 황태성과 만난 당시 중정 파견경찰 박문병은 지난 4월 말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황태성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냥 시키니 만났다”고 답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숨진 지 오래다. 회고록도 남기지 않았다. 김종필 전 총리 쪽에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김 전 총리가 회고록을 쓸지 분명하지 않다.
※참고문헌
황태성 군법회의 판결문(1961.12.27 보통군법회의, 1962.9.11 고등군법회의, 1963.1.31 대법원 1963.7.2 고등군법회의 파기환송심, 1963.10.22 대법원 파기환송심 상고심, 1964.9.3 서울고법 재심), 1964.9.21 국회 내무위원회 국정감사 회의록, 1963년 10월~1964년 2월 <노동신문>, <월간조선> 1992년 7월호 ‘구소련 공산당 국제부 부부장의 남-북한-소련 접촉 비사 공개/ 5·16 직후에 남북한 비밀접촉 있었다’, <민족21> 2001년 6월1일 기사 ‘황태성 조카사위 권상능 심층증언’, <근대 대구·경북 49인 그들에게 민족은 무엇인가>(김도형 외 지음·혜안·1999), <혁명과 우상-김형욱 회고록>(김경재·전예원·1991), 미 국무부 기밀해제문서 Telegram from the embassy in Korea to the department of state(October 16, 1963, 1am)
고나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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